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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거리/먹고 듣고 보자!

윤은혜 보그걸 매거진 인터뷰

by 파란토마토 2008. 4. 29.

한남동 또는 이태원으로 분류되는 언덕배기의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소년 혹은 소녀의 모습을 한 윤은혜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 메이크업이지만 참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반들거리는 얼굴이 왠지 익숙하다. 맞다, 바리스타를 꿈꾸던 은찬의 모습이 꼭 저랬지. 아침 일찍 잠에서 깬 탓에 꿈꾸는 듯한 눈으로 첫 인사를 나눴던 그녀는 메이크업을 끝낸 후 날렵한 고양이 눈의 여배우로 탈바꿈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가 양 볼이 터질 듯 자장면을 입 안에 밀어 넣던 털털한 은찬이가 맞던가? 애써 뻗지 않아도 늘씬한 다리와 포토그래퍼의 셔터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 덕분에 촬영은 수월하게 흘러갔다. 마지막 컷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메이크업을 지운 윤은혜는 3시간 전 이곳에 도착했던 그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촬영 의상인 손바닥만한 미니스커트와 몽글몽글한 니트 더미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와중에 대충 정리한 테이블 하나를 앞에 두고 그녀와 마주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서브된 감자 수프를 떠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지는 선입견에 잠시 서운해했고, 뜨거운 여름 대낮의 스콜 같았던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추억하며 옅은 미소도 지었다. “왠지 여배우들은 되직한 크림 파스타 따윈 먹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특히 당신은”이란 말을 털어놓자, 윤은혜는 “하하, 모든 여배우가 다 그런 건 아니에요”라며 카르보나라를 스푼 위에 동그랗게 말았다. 그렇게 조금은 발랄하고, 조금은 진지했던 인터뷰가 여유롭게 끝날 즈음 파스타 그릇은 시원스레 비워져 있었다.

VOGUE GIRL(이하V.G.) 이렇게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 어떤 생각이 드나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들진 않나요?
윤은혜아무래도 빨간 불이 들어온 녹음기가 제 말을 토씨 하나 안 빼놓고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부담감이 없진 않죠. 하지만 거부감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는 거죠.

V.G. 매 컷마다 굉장히 즐기면서 촬영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윤은혜 억지로 선택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건 즐기려고 해요. 그리고 그게 당연한 걸요. 

V.G. 하긴, 이제껏 브라운관 속 윤은혜의 캐릭터는 언제나 ‘열심’이었어요. 여배우로서 자칫 망가질 수 있는 상황에도 주저하지 않는 듯 보였고요.
윤은혜 작품을 선택하기 전에 두려움을 느꼈다면 분명 안 했을 거예요. 대본만 봐도 그 배역에게 주어진 캐릭터가 어느 정도 파악되잖아요. 뭘 해야만 하고, 뭘 포기해야 하는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 같은 경우만 해도 그래요. 예쁜 건 애초에 포기해야 했어요. 하지만 저도 여자잖아요. 어떨 땐 TV 속의 제 모습을 보며 조금 섭섭하거나 망가지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죠. 잠깐, 아주 잠깐이요. 그래서 아예 남자다워서 여성스러움이라곤 기대할 게 없는 은찬이가 편했어요.

V.G. 오늘 촬영에서는 은찬이와 전혀 다른 캐릭터를 보여줬어요. 변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편인가요? 윤은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요. 마침 변신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말인데, 대중은 참 변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는 ‘궁’의 채경과 ‘포도밭 그 사나이’의 지현이 비슷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전 캐릭터의 반복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건 정말 빙산의 일각만 보고 판단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제 안의 여러 감정을 끌어내 다른 캐릭터를 표현해놓았는데 단번에 “비슷한 캐릭터라 지겹다”, “히트작 이후의 차기작이라 안전하게 갔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좀 서운하죠.


V.G. 그래요, 대중은 냉정하죠. 겉모습이 확연하게 바뀌거나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 그제서야 연기 변신이라고 봐주는 정도니까.
윤은혜 맞아요. 변신의 범위가 어쩌면 굉장히 포괄적인 건데 겉이 변해야 속도 변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단순하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저도 ‘변신해야 할’ 캐릭터를 찾고 있진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아직은 저도 그런 게 재미있긴 한데,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내면을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배우로서 이미 궤도에 오른 분들 있잖아요, 송강호나 전도연 선배님 같은. 그분들은 같은 표정과 같은 목소리로 같은 걸 표현해도 언제나 달라 보여요. 굳이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으로 변화를 주지 않아도 자신만의 매력으로 각기 남다르게 소화하는 거죠. 하지만 아직은 제가 그런 식으로 표현해봤자 사람들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제 역량도 더 키워야겠지만 현재 대중이 저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거든요. 그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또다시 제 노력이 필요할 거고요.

V.G. 대중의 의견에 끌려가서도 안 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게 연예인의 숙명이잖아요. 어때요, 사람들의 시선에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편인가요?
윤은혜 아뇨. 전 평소에도 거리를 편하게 활보해요. 오히려 주변에서 좀 조심하며 다니라고 할 정도인걸요. 제 이미지가 그다지 신비롭진 않잖아요. 그런 게 이럴 땐 좋더라고요. 워낙 어릴 때 데뷔해서 이제 10년차인걸요.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해질 때도 됐죠. 압구정동이나 청담동은 연예인을 봐도 대부분 그렇게 민감하지 않은데 그 외의 지역에 가면 많이들 신기해하시더라고요.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데, 돌아서는 순간 후회해요. ‘날 자주 보는 분들도 아닌데 사인도 해 드리고 사진도 찍어 드리고 그랬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고요. 굉장히 죄송하죠. 

V.G. 연예인 윤은혜에게는 더 이상 미니 홈피마저 사적인 공간이 아니죠. 무심코 쓴 일기나 사적인 사진이 기삿거리가 될 수도 있고요. 가끔은 그런 상황에 슬퍼지기도 하나요?
윤은혜 전 미니 홈피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에요. 미니 홈피 들어간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요. 하고 싶으면 한 번에 몰아서 하는 성격이라서. 뭘 소소하게 챙기는 편이 못 돼요. 전 그냥 미니 홈피도 편하게 생각해요. 솔직히 팬들을 위해서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올리고 싶은 사진이 있으니까 하는 거고, 제가 싫으면 안 해요.

V.G. 올 여름, 아니 준비 기간까지 따지면 수개월 동안 남장 여자 캐릭터로 살아보니 어땠나요?
윤은혜 은찬이가 되면서 가장 편했던 게 남자 주인공들보다 더 준비 시간이 짧았다는 거예요. 원래 했는데 안 한 것처럼 보이는 스타일링이 가장 어렵잖아요. 그래서 아예 아무것도 안 했어요. 메이크업은 물론 머리 감은 후에 드라이조차 안 할 때도 있었죠. 드라마 촬영하면서 이렇게 수면 시간이 길었던 적이 없었어요, 하하. 예전에는 의상도 몸에 밀착되는 게 많았는데, 은찬이는 헐렁한 데님 팬츠에 티셔츠만 입으면 그만이니 덕분에 화면에 비치는 몸매에 민감할 필요가 없었죠.

V.G. 고은찬이라는 캐릭터가 윤은혜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극찬도 있었죠.
윤은혜 와, 그건 배우가 들을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죠. 원래 성격이 그런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분들도 꽤 많았어요. 처음에는 은찬이로 산다는 게 굉장히 어색했어요. 짧은 머리를 하고 남자처럼 행동하는 건 전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극 후반으로 갈수록 은찬이에게 동화되어 안정되게 살았지만.

V.G. 은찬이가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윤은혜 제가 뭐 하나에 꽂히면 그것밖에 안 보이는 성격이거든요. 요즘은 집을 새로 이사해서 인테리어 제품만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요. ‘커피 프린스 1호점’출연을 확정 짓고 난 후부터는 온통 남자만 보였어요. 잡지에서도 남자 헤어스타일만 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남자 주인공만 보고, 식당에 가도, 거리를 걸어도 남자의 행동과 스타일만 보이더라고요. 먹는 모습, 걷는 모습, 말투, 손짓 등 여자와는 다른 미묘한 제스처 하나까지 섬세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극 초반에는 목소리도 굉장히 허스키하게 내려고 노력했어요. 일부러 목소리를 쉬게 하기도 했고요.

V.G. 드라마 속에서 은찬이와 함께 가장 공감했던 장면은 뭔가요?
윤은혜 생각해보면 굉장히 공감해서 잘하고 싶었던 장면은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 탓에 더 못한 게 많아요. 지금 생각나는 건 그 장면이네요. 10회 때 한성이와 길을 걸어가면서 속상한 맘에 울먹이는 장면이 있어요. “나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하면서 엉엉 울죠. 처음에는 눈물을 쏟으려고 애썼더니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맘을 아예 비웠어요. 그냥 맘 가는 대로 하자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더라고요. 풀 샷과 클로즈업 샷의 세팅이 다 달라서 중간에 샷을 다르게 하면 눈물 흘리는 신에서는 눈물을 멈췄다 다시 흘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땐 세팅이 바뀌는 중간에도 계속 울면서 세팅이 끝나길 기다렸어요. 나중에 보니그 장면이 정말 맘에 들더라고요. 단순히 연기를 잘해서 만족스러운 게 아니라 그때의 아프고 먹먹한 감정이 화면 속에 드러나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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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www.voguegir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