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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영조의 업적 - 애민군주이자 실패한 아버지, 영조 탕평책의 태생적인 한계

by 파란토마토 2011.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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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정치가였으나 실패한 아버지였던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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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英祖) [1694 ~ 1776] [1724.08 ~ 1776.03] 조선 제 21대 왕

前 연잉군, 後 왕세제
휘 : 금(昑)
자 : 광숙(光叔)
태어난 곳 : 1694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
승하한 곳 :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  
아버지 : 숙종(肅宗, 조선 제 19대 왕) [1661 ~ 1720]
어머니 :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정치이념

극단으로 치닫던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조정을 안정


◎업적

1740년 :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우는 등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실시함
1743년 : [수교집록]을 속편함 ,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함
1745년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함
1746년 : [자성편]을 지음
1748년 :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를 편찬함
1749년 : [정훈]을 지음
1751년 : 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하기도 함
1755년 : [대훈]을 지음
1762년 : [경세문답]을 지음
1764년 : [경세편], [표의록]을 지음   
1765년 : [백행록]을 짓는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할 저술을 많이 남김
1770년 : 세종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함
              또한 양도,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을 재서 보고하게 함
1771년 :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를 건립함
1773년 : 개천의 양변에 돌을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함
1773년 :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함
1774년 : 노비 신공 전면 혁파




◎다른 군주와 달랐던 영조만의 업적

국왕이 되기까지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영조는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고, 성균관 탕평비문에 그 뜻을 새겨 넣었다.

" 편당을 만들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만드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것은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던 영조가 노론에 진 부채를 갚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이후 영조는 소론과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면서 탕평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확대에 주력하였다.

탕평책으로 왕권을 강화한 영조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고, 경제를 개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해동지도], [속오례의], [속대전],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책들은 모두 영조대에 편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고, 어머니가 천민일 경우에만 노비가 되게 하는 종모법을 실시하여 많은 노비들을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는 많은 어제(국왕의 저술)와 어필(국왕의 글씨) 작품을 남겼고, [대학]의 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경연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대 성왕들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스승으로서의 군주)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또한 왕세제로 책봉되던 28세부터 승하할때인 83세까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이런 군주는 세종, 영조,정조가 유일하다. 이러한 영조의 학구열이 손자에게 이어져 마침내 군사를 실현한 국왕 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가르치기 위해 별도의 교재를 만들기도 했는데, 만년에 만든 [어제조훈]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고 1756년 세손이 5살 때 서지수,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했다. 이는 왕손에게 별도의 사부를 두지 않던 관례를 바꾼 것으로, 영조가 정조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또한 서민적인 것을 좋아하는 검소한 군주였다. 정순왕후와의 결혼도 정성왕후 때의 사치를 근절하고자 역대 군왕 중 가장 간소하게 치뤄졌고 영조 초기까지 이어져 오던 귀빈들이나 왕실 여인들이 머리에 쓴 가채를 1756년부터 금지하였다. 무거운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의 이유는 사치를 막고자 함이었다.




◎영조가 실패한 것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즉위 초 영조는 소론이 퍼뜨린 경종독살설과 이인좌의 난을 겪는 등 많은 난관에 부딪쳤으나, 다행히 지속적으로 탕평책을 유지하여 당쟁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영조가 70세를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당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25세 때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본 효장세자(後 진종)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무려 7년간 후사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조의 나이 42세 때인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에게서 드디어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고, 그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열다섯살의 사도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틈만나면 노론세력들과 충돌했던 세자는 결국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 갖혀 죽게 된다.

결국, 영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탕평책은 사도세자사건을 계기로 1762년부터 영조 말년까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것은 영조가 인조처럼 후손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인뒤 세손 석철, 석린, 석견 등 손자들까지도 제주도로 유배시켜 죽였으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에 뉘우치고 세손에게 정성을 다하여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있던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을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고,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고 오해까지 받은 상황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사이에서 탕평책과 잦은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영조... 비록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하고 이뤄냈던 업적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영조는 애증이 가는 문제적인 군주이다.
정치만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사도세자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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