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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준기라는 배우의 가치

by 파란토마토 2009. 5. 15.


이준기라는 배우의 가치


남자배우가 한 순간 ‘신데렐라’ 가 되는 경우는 그가 멜로물에서 호연을 펼쳤을 때이다. 다른 경우보다, 이 경우가 남자배우를 한 순간 ‘스타’ 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다.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의 주요한 타겟이 ‘여성’ 이라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몇몇 특정한 장르의 작품을 제외하고선 대다수의 작품들은 ‘여성’ 을 주 소비층으로 하여 만들어진다. 여성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선, 여주인공은 당대 여성을 반영한 캐릭터여야 하고, 남주인공은 그러한 여성들이 그 시대에서 가장 원하는 남성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남자주인공을 보면서 성적 호감을 느껴야 한다. 드라마 혹은 영화를 보는 여성들이 여자주인공에 대한 동일시를 느끼면서 동시에 남자주인공에 대해서 극 중 여주인공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빠져들 때, 그 드라마 혹은 영화는 속된 말로 ‘뜬다’. 그리고 더불어 그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한 배우 역시 뜨게 된다.


이준기는, 이 법칙에서 완벽하게 벗어났음에도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끈 희귀한 경우이다.




이준기가 처음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 끈 이유는 영화 ‘왕의 남자’ 속  ‘공길’ 이란 캐릭터 때문이었다. ‘공길’ 은 남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길은 ‘게이’ 도 아닌 ‘트랜스젠더’ 쪽에 가까운 캐릭터였다. 왕의 남자가 개봉할 당시 ‘게이코드’ 가 QAF같은 미드를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면서 2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금씩 유행을 타고 있던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게이’ 남성에 대한 여성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게이’ 남성들은 ‘쟤가 왜 게이일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성적 매력을 여성들에게 어필한다. QAF에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가 ‘브라이언’ 에게 쏟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길’ 은 그러한 성적 매력을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공길은 몸은 남성이되 내면은 여성인 캐릭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개인의 성적 취향은 ‘남성’ 보단 ‘여성’ 에 가까운, 그렇게 되도록 길러진 인물이었다. 공길을 보면서 여성들이 ‘동일시’ 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적 매력’ 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극 중에서 ‘장녹수’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는 공길이란 캐릭터는 잘못 연기할 경우 오히려 여성들의 미움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육갑은 죽고, 녹수와 연산은 상처를 받으며, 장생은 눈이 먼다. 영화 속에서 유일한 여성인 ‘녹수’ 에 여성들이 감정이입을 할 경우 공길은 말 그대로 ‘죽일 놈’ 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영화를 본 그 누구도 육갑의 죽음을, 장생이 눈 먼 것을, 연산과 녹수의 상처받은 일을 공길에게 책임지우지 않는다. 공길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직, 간접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해를 입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 가장 불우하다 생각되는 인물이 ‘공길’ 이 되어버린다.

공길이 가진 ‘남성의 몸, 여성의 마음’ 이라는 특성은 관객들로부터 충분히 ‘비호감’ 일 수 있는 요소였다. 공길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채, 자신의 마음은 전혀 내색하지 않는 모습으로 늘 모든 상황에서 반발쯤, 발을 뺀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길의 ‘모호함’ 은 모두를 오해하게 만들고,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그러한 공길의 ‘모호함’ 이 발단이 된다.

그런데 대다수의 관객은 공길의 성정체성이나 공길의 태도에 대해서 불쾌해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을 한 채 여성을 연기하는 공길에게 불쾌해 하거나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길은, 보수적인 한국 남성들조차 영화관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 뿐인가? 멜로물에서 좋은 역할을 연기한 그 어떤 남자배우도 이끌어내지 못한 유례없는 인기를 한 순간에 관객들에게서 얻어냈다. 신드롬이라고 할 만한 그 인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한 배역은 여성들로 하여금 선망의 감정을 품게 할 매력적인 ‘남성’ 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성들은 그러한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공길’ 이란 캐릭터를 연기한 이준기란 배우의 힘이다.




이준기는 철저하게 자신을 ‘가련하게’ 만들었다. 공길이란 캐릭터가 여러 면에서 가련하지 않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준기는 그저 ‘존재 자체가 불행한’ 인물을 훌륭하게 연기해 냈다. 그 결과 그는 ‘눈물 흘리는 남자’ 에게 보내는 여성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남성’ 을 버림으로써 ‘남성’ 을 획득한다. 공길에게 보낸 여성들의 지지는 결국 당시 유행하던 ‘나쁜 남자 신드롬’ 과 맞물려진 현상이다. 결국 나쁜 남자, 에 여성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 나쁜 남자의 내면에 숨겨진 아이처럼 여린 모습 때문이다. ‘나쁜 남자’ 가 진실로 ‘나쁜 남자’ 라면 그러한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없다. ‘나쁜 남자’ 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단단한 갑옷을 벗기면 그 누구보다 여린 속살이 드러날 것이라는 여성들의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나쁜 남자’ 에 열광한다. 그것은 단단한 갑옷이 아니라, 그 갑옷 뒤에 숨어있는 아이 같은 내면에 보내는 환호이며, 그의 상처받은 내면에 보내는 따뜻한 애정이다. 공길은 그 아이 같은 내면을 가진 남자였고, 그것을 숨기기보단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극 중 장생이 되어, 육갑이 되어, 연산이 되어 공길을 보호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육갑이 공길을 보호하다 죽어도, 장생이 눈이 멀어도, 연산이 상처를 받아도 공길을 탓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쁜 남자가 퍼붓는 독설을 들으면서도 끝까지 그 내면을 바라봐주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와 같다. 설혹 자신이 상처를 받을지라도 상대를 보호해주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동정심을 이준기는 공길이란 캐릭터를 통해 여성들에게서 끌어냈다. 그는 모호한 눈빛과 처연한 몸짓으로 매 순간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은 인물인  처럼 보이도록 스스로를 만들었다. 숨기지 않고 본연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순백의 처연함은, 나쁜 남자가 가진 단단한 갑옷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여성들에게 어필했다.



‘나는 이토록이나 연약하며 슬프다’, 라고 온 몸으로 강조하면서 이준기는 여성들의 모성애를 극대화시켰다. 그래서 여성들은 그에게서 ‘남성성’ 을 발견하지 못했어도, 그를 ‘배우자’ 혹은 ‘이상형’ 으로 느끼지 못했어도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것은 여태껏 한국의 남자배우들에게선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요소였다. 한국의 남자배우들이 기껏해야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했던 것은 여태까지 ‘나쁜 남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틱틱 거리지만 상처받은 내면을 가지고 있는 ‘싸가지’ 가 그나마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준기는 그러한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여성들의 모성애를 자극시켰다. 위악적인 모습을 통해 억지로 상처를 숨기지 않고 모호하게 흐리는 슬픈 ‘공길’ 이란 캐릭터는 가슴 아프게 여성들을 자극한다. 상대에게 다가가 위로받고 싶지만 그것이 자신 없이 쭈삣거리는 아이 같은 모양새를 한 채 그는 말간 눈으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공길과 수현

이준기의 이러한 캐릭터적 특성은 ‘개와 늑대의 시간’ 의 ‘수현’ 에서도 잘 드러난다. ‘개와 늑대의 시간’ 에 수현이란 캐릭터 역시, 공길과 유사하다. 수현은, 공길처럼 모든 사람이 지켜주지 못해서 안달인 캐릭터이다.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 입는다.

점점 드라마 속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변화하면서 이러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캐릭터는 점차 사장되고 있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젠 ‘착한 캔디형’ 은 오히려 욕을 먹고 있다. 오히려 솔직한 ‘이라이자’ 가 더 호응을 얻는 시대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웃는 캔디나, 그 어떤 상황도 헤쳐 나가는 영웅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수현이란 캐릭터는 현대적이기 보단 과거적인 캐릭터이다. 그는 낭중지추처럼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영웅형’ 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이렇게 잘난 남자면, 누구 하나쯤 시기와 질투로 미워해도 되련만 다들 예뻐한다. (나중에 배상식과 대립하기도 하지만 케이가 배상식을 먼저 자극하지 않았다면 배상식 또한 케이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같이 일한 시간보다 헤어진 지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팀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수현의 인생이 기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현에게 쏟아지는 민기, 지우, 마오, 그리고 양부모님의 과도한 애정과 믿음은 신기할 정도이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토록이나 관계 설정, 애정의 양상이 비정상적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청자들 또한 극중 다른 인물들처럼 ‘어떻게 하면 수현을 더 잘 지켜줄 수 있을것인가’ 에 대해서 열중했다. 그로 인해서 죽은 아버지나, 그로 인해서 인생이 비틀린 민기에 대해서 애도를 보내긴 했지만, 그것을 ‘수현’ 에게 책임 지우지 않았다.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수현에 대해서 마치 하해와 같이 관대했듯이 시청자들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수현이 ‘영웅’ 에 가깝에 능력이 좋은 인물로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대부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수용했다. 아마도 ‘수현’ 은 최근 드라마 주인공 중 가장 시청자들의 애정을 많이 받은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고 또한 과도한 능력을 가진, 최근 드라마의 경향으로 보자면 충분히 비정상적인 캐릭터인 ‘수현’ 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힘은 결국 ‘이준기’ 이다. ‘수현’ 이란 캐릭터가 대중들의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면 ‘개와 늑대의 시간’ 이란 드라마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연기력’ 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정서적인 측면’ 이었다. 단순히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킨다고 해서, 단순히 액션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해결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준기는 과거 공길 연기를 하면서 보여줬던 장기를 이 드라마 속에서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아무리 악한 연기를 해도, 또 아무리 딱딱한 연기를 해도, ‘처연함’ 을 잃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처연하게 약한 모습을 기본적으로 가진 채 대중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간다. 연기의 기교를 논하기 이전에 이준기는 먼저 대중들의 정서를 사로잡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관객들이 ‘논리적 타당성’ 을 따질 수 없게 만든다. 그는 ‘공길’에서 그러했듯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불행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비난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아픈 사람을 보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정서적으로 금세라도 죽을 것처럼 아픈 연기를 했고, 그래서 그의 모든 행동은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었으며, 그 결과 ‘수현’ 이란 캐릭터는 정당성을 확보한다.

‘수현’ 이란 캐릭터는 공길과는 달리 표면적으로는 좀 더 남성적인 캐릭터였고, 그래서 공길보다는 여성들에게 ‘남자’ 로써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캐릭터이기는 했으나, 이준기가 대중들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간 방식은 ‘수현’ 과 ‘공길’ 모두 유사하다. 대중들은 ‘수현’ 과 ‘공길’ 모두 ‘감싸주고’ , ‘보호해주고’ 싶어 했다.

관객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이러한 이준기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은 분명 대단한 장점이다. 특히 점점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변해가고, ‘악역’ 조차 캐릭터적인 정당성을 추구하는 지금, 이준기의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특성은 그가 앞으로 연기하게 될 모든 캐릭터에 ‘생명력’ 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 중 캐릭터가 비록 비현실적인 인물이라 할지라도 이준기는 정서적으로 관객들을 감화시킴으로써, 캐릭터가 가진 비현실성을 현실로 끌고 내려올 수 있다. 이러한 장기는 베테랑 연기자들도 쉽게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기대되는 미래

이준기는 ‘청승맞지 않게 슬프다’. 분명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슬픈데, 그것으로 인해서 보는 이들은 짜증스럽게 하거나 지치게 하거나 기운 빠지게 만들지 않는다. 분명 슬픈 캐릭터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하거나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축 쳐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상대의 기운을 빼지 않으면서, 상대의 정서를 자극한다. 그래서 그 결과,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그가 상대의 정서를 지치게 자극했다면, 다수의 대중들은 그를 긴 시간 지켜보는 것을 힘들어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정서는 자극하되, 그것을 소모시키진 않게 함으로써 그에게 호감을 가진 대중들의 시선을 오랫동안 묶어둔다. 그래서 결국 그 시선들을 자신의 팬으로 확보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한 순간에 뜬 그의 인기는 한 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여자들이 그에게 느낀 것이 ‘남자로서의 성적 매력’ 이 아닌 이상, 여성들이 보낸 환호가 ‘이준기’ 자체보다는 ‘공길’ 이란 캐릭터의 매력에 기한 것이 더 컸던 이상, 그가 ‘공길’ 이란 캐릭터를 완벽하게 벗어났을 때 보여 지는 모습에서 다수의 대중들이 거부감을 느낄 가능성은 충분했다. 게다가 언론들의 심심풀이 땅콩으로 던져진 순간, 그의 미래는 ‘캐릭터빨’ 로 뜬 대부분의 반짝 스타들의 그것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 또한 한 순간에 추락할 유성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는 긴 호흡으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제 것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그는 더 이상 ‘반짝 스타’ 라는 이름으로 그가 가진 가치를 폄하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아마도 그는 ‘공길’ 에 이어 ‘이수현’ 에 쏟아진 대중들의 정서적 호응을 특유의 긴 호흡으로 제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가 어설픈 ‘변신론’ 에 휘말려서 본인이 가진 이 장기를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그가 이러한 장기로 인해서, 배우로써 그의 미래는 무척이나 기대된다.

과연 그는 얼마나 성장할 것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대중을 자신의 것으로 확보하게 될까?

미래를 궁금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타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것 만으로도 배우 ‘이준기’ 의 ‘가치’ 는 너무나 충분하지 않은가.


출처 : 마이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