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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의 역사, 조선시대 당쟁의 시작과 그 흐름

by 파란토마토 2008. 3. 19.
조선시대 붕당(당쟁)의 역사

출처:
디시인싸이드 이산갤러리

수 차례의 사화를 견디고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낸 사림 세력들은 사림 출신 스승 밑에서 공부한 선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인재를 감당하지 못하는 한정된 관직의 수는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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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인과 서인이 주도한 붕당 성립기

◎동인 VS 서인

붕당의 효시라 할 동인과 서인의 분열은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 즉 을해당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을해당론 ☞ 왕실 외척이 관료추천권이 있는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느냐는 논쟁

1575년(선조8)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림세력들이 이른바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져서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사건이다. 이는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의 추천권을 놓고 벌인 싸움인데, 이 때문에 일제 시대 이래 당쟁의 근본 원인이 개인적 감정 싸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왕실 외척이지만 사람들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선배 정치인과, 왕실 외척 지위를 이용한 심의겸의 정치적 비리를 용서할 수 없다는 후배 정치인의 대립이었다.


분파 후 정여립 모반사건의 결과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지만 3년후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남인,북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기축옥사

1589년(선조22)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통 정여립 옥사, 또는 정여립 반란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다. 정여립이 역모를 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는데도 정여립과 친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인 중에서 급진적인 지도자들과 전라도 지역 서경덕, 조식 학파의 수많은 인물들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이후 심각한 정치적 후유증을 남겼다. 때문에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정여립이 이씨왕조가 정씨왕조로 바뀐다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일으킨 민중반란이라는 설, 선조 임금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일어나게 된 사건이라는 설 등 많은 이견이 존재한다.


◎남인 VS 북인

남인과 북인의 분립은 동인과 서인의 분립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기축옥사로 인해 분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기축옥사 당시 서인(정철)이 정여립 사건의 처리를 주도하면서 북인계 인물을 무고하게 죽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남인계 인물들이 제대로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당이 발생했다고 보고있다. 또한 그로부터 3년 뒤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 때 서인의 처리 문제로 분당이 발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남인의 중심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이후 화의를 주장하여 실각되자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남인은 한동안 몸을 사리게 된다.

◎대북 VS 소북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로 갈라져 대립한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살해하는 등 소북파를 몰락시킨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서인은 정권을 장악하고 대북파를 몰락시켜 다시는 정치의 무대에 설 수 없게 만들었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것이다.


2. 서인과 남인의 공존, 붕당 공존기

서인과 남인의 50년에 걸친 붕당정치 시대 - 정치적 평화를 유지한 제도개혁의 시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계 정치가들은 인망이 높은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해 사회안정을 도모하는 등 남인을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남인들의 도움으로 주요 정치적 과업을 시행하였다. 인조년간 정치사 연구결과를 보면, 주요 관료집단에서 서인과 남인의 비율은 6:4정도였고 서인과 남인 학통을 이끈 산림들도 거의 대등하게 등용되었다. 이후 인조, 효종, 현종에 이르기까지도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붕당간의 조화로운 공존이 계속되었다. 서인이 주도적인 위치를 지키는 가운데 남인이 이를 견제하는 양당체제, 즉 정치적 평화시대였던 것이다.


3. 일진일퇴의 환국정치, 일당전제기

일당전제기는 1674년 왕실에서 공복을 입는 기간 문제로 일어난 갑인년 복제논쟁을 군주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즉위년부터, 1729년 영조가 일당전제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한 기유대처분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보통 일진일퇴 정국, 환국에 의한 일당독재, 역모조작과 정탐정치 등으로 표현되는 격렬한 당파싸움의 시기다. 전후 여덟 차례 정도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에 의해 일당독재가 반복되었다.

◎서인 VS 남인

서인과 남인의 공존은 평화롭기도 했지만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 불안정함이 '폭발'한 것이 바로 예송 논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예송논쟁 ☞ 서인 : 효종은 차남이야. 무조건 1년상! / 남인 : 차남이지만 왕됐으니 장남 대접 받아야 되는거 아니야? 당연히 3년상이지.

왕실에 적용할 상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벌인 논쟁으로서, 1659년(현종 즉위년) 논쟁과 1674년(현종 15) 논쟁 두 번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효종과 효종왕비의 상사 때, 어머니 자의대비가 큰아들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둘째 아들 이하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였다. 이는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파견된 분조에서 사실상 아버지 인조를 대신하는 소군주로서 권한을 행사했지만, 국내에 돌아온 이후 의문 속에 죽음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였다. 2차 예송논쟁은 결국 숙종 즉위년부터 남인 주도 정권을 출범시켰다.

예송논쟁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 변동이 없었으나, 2차 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강경파 청남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탁남으로 분열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경신대출척, 즉 경신환국으로 집권한지 몇년만에 쫓겨나게 된다.


■ 경신환국
1680년(숙종6)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남인정권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벌을 위한 새로운 군대인 체부를 설치함으로써,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던 서인계 외척 김석주의 군사권을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론 VS 소론 VS 남인


그러던 중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 바로 임술삼고변이다.

■ 임술삼고변

1682년(숙종8)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기 시작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첫 사건이다. 훗날 노론이 된 왕실 외척 김석주, 이사명, 김익훈 등이 밀정을 파견하여 남인들에게 역모를 권유한 후 이를 밀고하는 등의 정탐정치를 자행한 사실이 드러나 큰 물의를 야기시킨 사건이다. 당시 서인 영수 송시열은 이를 자신이 스승의 후손들을 잘못 교육시킨 탓이라 하여 결국 정탐정치를 자행한 이들을 변호하려 하였고, 이를 서인 소장파 인물들이 탄핵하고 윤증 학파가 이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서인이 분열 된 이후에도 환국은 계속 되는데, 서인이 물러나고 남인이 재등용되는 기사환국 이후 왕에 의해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래서 갑술환국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 기사환국

1689년(숙종15) 서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남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를 말한다. 이 정권교체는 장희빈이 아들을 (후일의 경종) 낳자, 곧바로 왕위계승권자로 정하려는 것을 서인들이 반대함으로써 일어났다. 이로써 서인 영수 송시열은 사사당하였고, 서인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는 폐출되었으며, 장희빈은 왕후에 봉해졌다.

■ 갑술환국

1694년(숙종20) 남인 일당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일당정권으로 바뀐 급격한 정권교체다. 이 정권교체는 서인계와 남인계 일부 집단의 정탐정치 시도에서 발단되었다. 이로써 인현왕후는 복위되었고, 반면에 장희빈은 왕후에서 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왕세자(경종)의 보호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갔다.

그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 대신들이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 신임옥사


1721년(경종1) 12월에 노론 주도 정권이 소론 일당정권으로 급변한 신축환국과, 다음해 목호룡이 이른 바 노론 및
연잉군(후일 영조) 측근 인물들의 경종 시해음모를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임인옥사, 이 두 사건을 합쳐서 지칭하는 것이다. 신축환국은 노론당이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직후, 다시 대리청정을 청함으로써 노론 정권을 공고하게 하려다가, 소론과 남인의 공격으로 실패함으로써 정권이 교체된 사건이다. 임인옥사로 당시 노론 최고 지도자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4인이 모두 사형을 당하였으므로, 노론 입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사건을 올바른 노론 붕당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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