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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by 파란토마토 2007. 9. 22.

[제14회]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

 

■ 방송 : 2007. 9. 22 (토) 20:10~21:0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 연출 : 송철훈 PD
■ 작가 : 정종숙


"처(處)자는 김처선의 이름이니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處)자를 쓰지 말라."



1505년 4월 1일,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처참하게 죽이고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렸다.
도대체 연산군과 김처선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목숨 걸고 지켜내었던
진정한 "왕의 남자"였다.


▣ 영화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연산군의 곁에서 평생을 걸고 눈과 귀어 되어주었던 영화<왕의 남자>의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보필했던 내시 김처선.
그는 왕의 그림자로서 왕을 독살할 수도, 왕의 생명을 지켜낼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 상선내시였다. 지금 '내시 김처선'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 傳"에서는 '조선왕조실록', 내시부 지침서 '내반원기' 등의 사료와 전문가 인터뷰를 바탕으로 내시의 전문 직업적 면모를 파헤치고, 김처선이라는 인물의 실체를 밝혀낸다.


왕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남자, 김처선

단종부터 연산군까지 다섯 분의 임금을 모셨던 내시, 김처선. 성종과 연산군 대에는 왕의 건강을 돌보고, 그의 지시와 명령을 전하는 상선내시로서 임금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상선내시는 왕의 신임을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최고위 자리였다. 왕이 가장 신뢰하는 신하로서 왕을 대신해 성종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시릉내시로 근무한 김처선. 그는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이자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왕의 그림자였다.



왕의 독이 될 것인가. 왕의 생명이 될 것인가!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연산군은 기생들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날마다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 고,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어 벼 수확을 하러 금표(군사훈련지역이나 왕의 사냥터에 세우는 일반인 출입 금지 표지문)안으로 들어왔다가 처형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특히 연산군은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내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 내시가 승명패를 차고 지나갈 때에는 신분에 상관없이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래서 권력을 얻은 내시들 중에는 대낮에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이도 있었다.

조선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신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하거라."

口是禍之問 舌是斬身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연산군은 "신언패"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이 자신의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궁궐담을 점점 높이 쌓아가는 가운데 김처선은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왕을 위해 마지막 충성의 길을 선택한다. 내시의 본분은 왕을 바른 길로 모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양아들이 있었던 김처선. 1505년 4월 1일, 그는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 채 목숨 걸고 왕의 앞에 선다.

"이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은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바른 정치를 펴셔야 합니다."




연산군의 광기어린 보복,
      김처선에 대한 모든 흔적을 없애버리다.




[전의면 옛지도
- 김처선의 집을 파헤쳐 연못을 만든 흔적]
왕의 손에 처참하게 죽은 김처선. 그의 직언에 분한 연산군은 김'처'선(金處善)의 '처(處)'자 사용 금지령을 내린다.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사람은 모두 이름을 고쳐야 했고, 공문서에 '처'자를 사용했다가 국문을 당한 이도 있었다.

또한
김처선이 나고 자란 전의현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애버리고, 그의 고향집을 파헤쳐 연못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연산군은 처절하게 김처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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