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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by 파란토마토 2007. 11. 9.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수난의 서삼릉(3)

▲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 회묘의 문인석과 무인석. 분명히 묘인데 어째서 능의 형식을 갖춘 것일까.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 공릉 문화유산해설사 권효숙씨가 올려다 보는 문인석의 높이가 약 3.4m 정도돼 보인다.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마치 폐비 윤씨의 한맺힌 한삼 자락의 슬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죽어서도 파란만장했던 폐비 윤씨의 묘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과 왕자 공주묘를 집장하고 후궁들의 묘까지 여기로 옮긴 영향이 미친 게 아닐까 한다.

▲ 슬픔에 찬 문인석의 얼굴에서 비장함 마저 흐른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회릉에서 곰곰 생각해본다.

다른 어느 능의 능호보다 우울한 회릉이라는 능호를 되짚어보고, 회심곡을 폐비 윤씨의 무덤 앞에서 들려줬으면 하는 것은 그들 모자의 비극 때문인지, 아님 회심곡이라도 묘 앞에서 한바탕 속 시원히 불러줘야 폐비의 500년 서린 한이 풀어질 거라는 한낱 내 감상때문인지….

1482년 성종(1457-1494)에게 사약을 받고 한삼에 피를 쏟고 죽은 뒤 묘비조차 없던 윤씨에게 연산군이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이 1489년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겨우 허락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 희생자가 폐비 윤씨이고 이 역시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 윤씨가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년(1476)년의 일이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숙의에서 단숨에 왕비로 오를 정도로 왕의 사랑을 입었지만, 훈구세력의 막강한 명문집안이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명문출신이었던 후궁들이 손잡은 세력다툼에 밀려나고 만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사림과 훈구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실을 둘러싼 대신들의 정권 알력 속에 희생된 여인들이 한둘이던가.

▲ 난간석과 석물이 조선초기 양식이다.

폐비 윤씨의 회묘가 왕릉의 겉모습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연산군의 어머니 추숭 때문만은 아니다.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는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연산군 10년(1504)이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윤씨의 폐출을 빌미 삼아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고 벌인 피바람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유래 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들에게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보충하려 한다. 그때까지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빼앗길 수 없던 권신들은 비로소 왕의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겉으로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건 때문이나,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의 속셈과 사림을 싫어했던 연산군의 내심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피비린내 나는 갑자사화에서 권신과 사림, 훈구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했고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 회묘를 수호하는 석호의 꼬리가 압권이지만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된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이다.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 폐비 윤씨 회묘에서 내려다 본 후궁들의 공동묘지.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나무들 사이로 후궁들의 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일제가 모아들인 후궁묘와 해방 이후 묘의 주변개발 때문에 옮겨온 명종 후궁 경빈 이씨 묘 외 6기를 천묘해 모두 16기의 후궁묘가 있다. 광복 후에 천묘한 묘들도 왜 일제가 만든 묘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 없다.

▲ 조선 왕들의 후궁묘.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내려와 후궁들 묘의 담장을 끼고 돌면 대문이 나온다. 이 후궁들의 묘는 싸구려 공동묘지 같은 왕자와 공주들의 묘보다 봉분도 훨씬 크고 담장을 둘러 그런 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무슨 속셈으로 왕자와 공주 묘보다 후궁들의 묘를 이렇게 크게 만들고 담장까지 둘렀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 겨울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대문 틈새로 보이는 후궁묘.

왕실에 들어와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여인들이 잠든 묘들을 보자니 겨울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스산하기만 했다.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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