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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by 파란토마토 2007. 10. 9.
[이한우의 조선이야기] 일곱 임금 거친 환관 김처선의 비극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세력다툼에 치여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
연산군 폭정에 맞서 직언했다 사지 찢기는 극형… 최근 드라마로 부활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초 환관 김처선(金處善)의 스토리를 극화한 드라마를 시작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배우 장항선씨가 연기했던 바로 그 환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극용 인물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 행적도 흥미진진한 데다가 생존시기도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격동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가미될 경우 우리는 오랜만에 멋진 팩션을 만나게 될 듯하다.

실록에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1년(1453년) 10월 13일자다. “경상도 영해에 귀양 가 있던 김처선을 석방하라.” 이때는 수양대군과 한명회·권람 등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후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처선은 김종서 등과는 반대쪽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4개월 후인 단종 2년 2월 19일 김처선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아 환관에 복귀했다. 고신이란 일종의 관리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인 단종 3년(1455년) 2월 27일 김처선은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 이유가 단종복위운동을 펼친 데 참여했다가 발각돼 고신을 빼앗기고 고향인 전의(全義)의 관노(官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처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열성적인 가담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환관 중에서는 엄자치가 가장 유명했다. 엄자치는 세종으로부터 가장 큰 총애를 받은 환관이었다. 이후 계유정난에 참여해 공신에 책록됐던 엄자치는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며 사육신과 같은 길을 걷다가 세조에 의해 죽게 된다. 김처선은 2년 후인 세조 3년(1457년) 8월 18일 세조의 특명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세조 6년(1460년) 5월 25일에는 뒤늦게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다. 큰 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계유정난에 김처선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와 김처선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시종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국문을 당하거나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세조 11년에는 희한한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덕중(德中)이라는 궁녀가 남몰래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영의 아들 구성군 이준을 흠모하다가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통해 한글로 된 언문연서(諺文戀書)를 보냈다가 임영대군과 구성군의 밀고로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덕중은 말할 것도 없고 최호와 김중호까지 사형을 당했다. 이때 김처선도 간접적으로 연루된 듯하다. 그러나 죄가 중하지는 않았는지 세조는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해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8년(1477년) 다시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김처선은 주로 왕명을 비밀리에 받드는 중책을 맡았다. 김처선은 품계가 계속 올라 자헌대부에까지 올랐다. 자헌대부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단히 높은 관작이다.

1494년(성종 25년) 성종이 승하했을 때 김처선은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시릉내시를 맡았다. 시릉내시란 왕의 무덤을 돌보는 내시를 뜻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성종의 무한총애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만 따져도 김처선은 그 사이에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셨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세종 말이나 문종 때 대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김처선은 어려서부터 성장과정을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던 연산군을 모시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화하는 것은 대략 재위 10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10년간 김처선에 관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7월 16일 연산군은 “내관 김처선을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김처선은 무례한 일이 있었으므로 죄를 주어야 하나 도설리가 없으니 우선 장100대로 대신하라.” 도설리(都薛里)는 내시부 소속으로 궁궐의 음식을 맡아보던 설리를 관리감독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중벌을 범했으나 일단 궁궐의 음식을 주관해야 하니 곤장100대로 대신하겠다는 뜻이다.

정확히 김처선의 ‘무례(無禮)’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는 실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락으로 볼 때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김처선으로서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살펴야 하는 본분에 충직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연산군 11년 4월 1일 ‘환관 김처선을 궐내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였다’는 짤막한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김처선은 폭군 연산군의 미움을 사 죽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산군이 내린 가혹한 후속조치들을 보면 김처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에 제동을 걸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 죽게 된 이유와 관련해 딱 한 줄 나온다. “술에 몹시 취해 임금을 꾸짖었다.” 그 대가는 컸다. “왕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활을 쏘아 죽였다.” 가산을 몰수당했고 고향 전의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7촌까지의 친척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이틀 후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었다. 그 중에 자신이 김처선에게 당한 봉변은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라고 썼다. 그런 광기는 6월 16일 “관리와 무신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는 모두 고치도록 하라”는 명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7월 14일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처서(處暑)에도 김처선의 처(處)자가 있다는 이유로 조서(暑)로 바꿔 부르도록 명했다. 술을 먹고 자신에게 직간(直諫)한 김처선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7월 19일에는 모든 문서에서 ‘처(處)’ 자를 쓰지 말할 것을 명했다. 선(善)자는 워낙 많이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 자만 쓰지 못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해 12월 오늘날의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성몽정이 문서에 처(處)를 썼다는 이유로 잡혀와 국문을 당했다. 다행히 성몽정이 그 글자를 쓴 때가 7월 19일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성몽정은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담년의 아들인 성몽정은 이 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4등에 책록되고 훗날 대사헌에까지 오른다.

연산군은 생각할수록 김처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연산군 12년 3월 12일 “김처선의 집을 흔적도 없이 파내고 그곳에 못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의 죄명을 바윗돌에 새겨 땅속에 파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중종이 즉위했다.

그해 11월 24일 사헌부 헌납 강중진이 글을 올려 “모두가 폐주에게 아부 아첨할 때 김처선 홀로 직언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은 왜 김처선의 ‘복권’과 명예회복에 반대한 것일까? 중종 7년 12월 4일 ‘삼강행실’ 속편을 편찬하던 찬집청에서 김처선의 사례를 삼강행실 속편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묻자 중종은 이렇게 답한다.
“김처선은 바른말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술에 취해 실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


김처선의 명예회복은 250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 영조에 의해 이뤄진다. 영조는 이날 “내관 김처선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죽게 됐다는 것은 내 일찍이 아주 익숙히 들었다”며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런 생애를 살았던 역사 속 김처선이 드라마 속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 궁금하다.



세계사 연표
1455 세조, 단종 몰아내고 즉위
  영국, 장미전쟁 발발
1456 성삼문ㆍ박팽년 등 사육신 처형
1479 에스파냐 왕국 성립
1485 성종, ‘경국대전’ 완성
1492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4 연산군 즉위
1498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6 중종반정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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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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