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장생을 빼고는 아무도 공길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너무 한 것 아닌가요?
A. 남사당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상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한 사람은 공길이 속해 있는 남사당 패의 꼭두쇠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꼭두쇠는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패거리 식구의 처우에 관련된 모든 처결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거리 중에 섞여 있기 위해서는 누구도 꼭두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길이 몸을 팔 경우 양반에게서 많은 노자돈과 음식이 나올 것을 장생을 제외한 패거리 전원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 사실을 다 아는 공길로서는, 싫어도 양반에게 몸을 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길이 양반에게 몸을 팔아 그 댓가로 패거리를 먹여 살린 것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공길이 팔아 먹고 사는 것 이제 좀 그만두라는 장생의 일갈이나 양반에게 팔던 몸뚱이 이젠 왕에게 팔겠다는 거냐는 장생의 빈정거림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Q. 공길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장생을 구타하는 꼭두쇠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당황한 둘은 무리에서 도망쳐 한양으로 가는데요. 남사당패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조직이었을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패거리에서 도망치는 것은 남사당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남사당의 패거리가 된 자는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 규칙이란 무리 중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곳에 말하고 다니지 말 것, 놀이 중에 얻은 수입을 혼자 빼돌리지 말 것 등인데 그 중 가장 엄하게 다스려진 죄가 패거리에서 무단 이탈하여 함부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남사당 은어로 '망도'라 하며, 잡힐 경우 죽을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하였습니다.
Q. 남사당에는 공길처럼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맡는 배우가 있었나요?
A. 있었습니다.
남사당에서는 처음 패거리에 들어온 사람(대부분 어린이들입니다)을 삐리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패거리의 가장 말단에 배치되어 잔심부름 및 잡일을 맡아 하였고 자신의 전문 연희가 정해지는 가열로 승급하기 전까지는 치마 저고리에 댕기를 들이고 여장을 하였습니다.
이들 삐리들은 행색만 여자였던 것이 아니라 패거리 중에서도 실제로 여자 노릇을 하였는데,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들과 한 명씩 짝을 지어 남색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이때 가열 이상이 대부분 남자 역할을 맡았으므로 숫동모라 하고, 여자 역할을 맡는 삐리들은 암동모라고 불렀습니다) 삐리의 수는 언제나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의 수보다 모자랐으므로, 패거리 전원이 짝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남사당 내에서 남색에 관한 규율은 매우 엄격하여, 무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라 할지라도 한 사람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는 없었습니다.
Q. 조선시대 공길이나 장생 같은 광대들의 신분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A.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계급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광대는 백정, 화척, 기생, 무당 등과 같이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사당패는 광대 중에서도 가장 천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남사당패를 일러 흔히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양인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정도로 천한 계급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유교 사회에서 중시하는 농업 등에 종사하지 않고 남에게 여흥을 팔아 연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색 및 집단 혼숙 등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패륜을 저지르는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사당은 양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허가 없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양인들로부터 구타 및 모욕등을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대들을 핍박한 대부분은 양반이 아닌 농민이나 천민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양인과 거주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사당패는 전국을 유랑해 다니지 않을 수 없었고, 경기도 안성 및 경남 진양(현재의 밀양) 지역등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Q. 장생이나 공길과 같은 광대들은 여자와는 같이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요.
원래 광대패에는 여자가 없나요?
A. 남사당패에 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특별히 여자를 천시해서라기보다는, 유랑이 잦은 남사당의 생활 특성상 남성에 비해 체력이 약한 여자가 무리에 끼어있을 경우 신속한 이동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독신 남성들로 구성된 패거리에 소수의 여자가 끼어 있을 경우, 그들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들면서 남사당패에도 여자가 한 두 명씩 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자들이 주로 맡았던 배역은 어름산이(줄광대)였다고 합니다.
Q. 영화 마지막쯤에서, 장생이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하는 재담 중에 '기생들 요분질도 심드렁해지니 사내놈과 비역질을 일삼는데, 이 비역질이 예사 비역질이 아니라 쌀이 나오고 비단 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역질이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A. 비역, 혹은 비역질이란 남성 간의 성교를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반대로 여성간의 성교는 밴대질이라고 합니다.
남사당 사이에서는 '비역을 출하다'는 등으로 사용하며, 주로 삐리나 외모가 반반한 남사당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머슴이나 한량 등의 남성에게 몸을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때 받는 몸값을 남사당 은어로 허우채(解衣債의 변형)라고 합니다.
Q. 육갑은 조정 중신들의 공길 살해 계획에서 공길을 살려내고 대신 활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 장면을 보면 달구지에 거적으로 덮은 시신을 두 사람이 밀고 나가는 것이 전부더군요. 왕의 총애를 받던 광대인데, 장례는 왜 그렇게 초라한가요?
A. 남사당 및 광대는 장례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광대의 경우는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땅에 시신을 매장할 수 있었지만, 광대보다도 천대를 받은 남사당의 경우는 땅에 시신을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사당은 대부분 천장(川葬)이라 하여 흐르는 강물에 시신을 띄워 보내거나, 깊은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Q. 작중 공길이 연산을 위해 하는 인형놀이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끼워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으로 현대의 인형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더군요. 남사당들은 정말로 그런 인형을 가지고 연희를 했나요?
A. 남사당 놀이 가운데는 '인형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사당 놀이는 풍물(흔히 말하는 농악), 버나(접시돌리기 비슷한 묘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로 구성되는데, 이 중 덜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인형극입니다. 특히 그 중에 등장하는 상좌 인형은 작중 공길이 사용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이용해 연희하는 포대괴뢰 형식입니다. 남사당은 놀이에 필요한 모든 소품-인형, 탈 등-을 모두 직접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Q. 화로 살판 이란?
며칠전 왕의 남자 삭제 장면에 관한 기사를 보니, 화로살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화로살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A. 살판의 한 종류로서, 화로를 안고 넘는 재주를 말합니다.
남사당의 살판은 현대의 덤블링에 가까운 땅재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뒷곤두, 앞곤두, 번개곤두 등의 기예를 연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물건을 들고 재주를 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이 때 드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칼살판, 대접살판, 화로살판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화로살판은 벌겋게 불이 붙은 숯불을 담은 화로를 들고 재주를 넘는 것으로, 살판쇠의 기예가 출중하지 않으면 재주를 넘는 중 화로에 담긴 숯불이 쏟아져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묘기였습니다.
Q. 남사당패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조선시대의 남사당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만큼 인기가 있었을까요?
A. 남사당은 한국적 연예인의 원형입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보고 웃을 수 있는 오락거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그들에게 있어 가끔씩 보는 남사당의 각종 기예들과 재담 등은 실로 신기하고 흥미로운 구경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남사당은 회갑연 등 각종 잔치에 불려가 흥을 돋구기도 하였고 소작농들을 다독거리는 양반 지주의 회유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왕실에서조차도 경사가 있을 때는 가끔 광대를 궁으로 불러 그 놀이를 보며 즐겼다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사당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남사당 재인 중 한 사람인 바우덕이의 경우는 그녀가 자주 들렀던 안성 지방 인근에 '사또 이름은 몰라도 바우덕이 이름은 안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1. 남사당에는 절대 여자는 없었다?
X. 사실이 아니다.
원래 남사당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당패라 하여 남사당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되는 의미에서 여사당이라는 집단도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패거리에 한 두 명의 여자가 끼이는 경우가 있었다.
2. 남사당의 꼭두쇠는 투표로 뽑았다?
O. 사실이다.
남사당은 신분이 천하기는 해도 매우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꼭두쇠는 반드시 패거리 전원의 투표를 통해 뽑았다. 이렇게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며 노쇠하거나 패거리의 신임을 잃어 꼭두쇠의 자리를 수행할 수 없을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3. 남사당은 모두 여장을 했다?
X. 사실이 아니다.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여장은 남사당 패거리 중에서도 신입 단원인 '삐리'들만이 하는 것으로서 삐리들은 여장을 하고 여자가 없는 무리 중에서 여자 노릇을 하였다.
4. 남사당은 죽으면 땅에 묻혔다?
X.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남사당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던 관계로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죽어서도 땅에 묻힐 수 없었고 천장(川葬)이라 하여 사체를 흐르는 개천에 띄워 보냈다. 남사당이 아닌 재인청 소속의 일반 광대들은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이 없는 편평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5. 남사당 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였다?
O. 사실이다.
남성들로만 조직된 남사당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동성애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신입 단원인 삐리가 여자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암동모'라고 하며 남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숫동모'라고 한다) 삐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절반을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패거리 전원이 짝을 맺을 수는 없었다고 하며 비록 꼭두쇠라 하더라도 한 명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 없었다.
6. 남사당은 자연발생적인 유랑집단으로, 내부에 아무런 규율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X. 사실이 아니다.
남사당의 내부 규율은 몹시 엄하고 일사불란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무리에서 추방되거나 그에 응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남사당 패거리 내에서 행해지는 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대미 공사'라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멍석에 말고 벅구잽이들이 돌아가며 매를 치는 것이었다.
7. 남사당패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O. 사실이다.
놀이 허가가 잘 나지 않고 양식 조달이 여의치 않은 겨울이 되면 아예 무리 자체가 해산하여 각자 구걸 및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다음해 봄에 다시 뭉쳐서 패거리를 재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고 전한다.
http://blog.naver.com/baudeogifes(안성바우덕이축제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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