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해당되는 글 112건

  1. 2015.02.07 연지인형 - 화려한 궁중 여인들 (후궁, 공주, 옹주부터 중전/중궁까지~) (1)
  2. 2013.07.06 유약한 숙종, 카리스마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3. 2013.05.29 동이(숙빈 최씨)와 숙종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야사집 수문록 보기)
  4. 2013.05.24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의 위엄 및 업적
  5. 2013.05.14 한국의 궁중혼례 - 국혼의 절차와 격식
  6. 2013.05.14 장희빈(장옥정, 희빈 장씨)와 숙종 시대의 실제 역사 연표
  7. 2013.05.13 미인 밝히던 조선 왕들의 '굴욕' - 해를 품은 달 일곱번째 이야기 (1)
  8. 2013.05.12 김혜수 장희빈 81-100회 미리보기 (줄거리 요약)
  9. 2013.05.12 김혜수 장희빈 41-60회 미리보기 (줄거리 요약)
  10. 2013.05.12 김혜수 장희빈 21-40회 미리보기 (줄거리 요약)
  11. 2013.05.12 김혜수 장희빈 1-20회 미리보기 (줄거리 요약)
  12. 2013.05.12 장희빈만 악녀?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13. 2013.05.10 역대 장희빈들 연기 동영상 비교하기 (1)
  14. 2013.05.08 장옥정은 역사 왜곡 사극이다?? '악녀 장희빈, 천사 인현왕후' 공식은 진짜일까?? (2)
  15. 2013.05.06 사극 속의 장희빈, 실제 역사 속의 장희빈은 어떻게 다를까? (4)
  16. 2013.05.06 제 9대 장희빈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9)
  17. 2013.05.03 장희빈(장옥정, 희빈 장씨)에 대한 이런 저런 기록들
  18. 2013.04.26 숙종 - 암행이 잦았던 임금, 카리스마로 불호령을 내리던 임금임을 보여주는 일화들
  19. 2013.02.07 야사 속의 폐비 윤씨에 대한 이야기 소개
  20. 2013.02.07 조선시대 최고의 막말 대마왕은??? 연산군도 광해군도 세조도 태종도 아닌 정조였다.
  21. 2013.02.07 [펌] 조선이 생각보다 괜찮은 나라인 이유 1 (2)
  22. 2013.02.07 [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자인가?
  23. 2011.09.22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기 위해서 죽인 사람들 명단 (6)
  24. 2011.09.22 [펌] 세조(수양대군)에 대한 재평가
  25. 2011.07.31 김종서는 어떤 사람인가? 어린 임금의 왕위를 지키려다 살해된 김종서(金宗瑞)
  26. 2011.07.31 [펌] 드라마 '왕과 비'의 어설픈 역사 인식 (1999)
  27. 2011.07.30 고전 책 소개 - 공주의 남자의 야사가 담긴 책, 금계필담은 어떤 책?
  28. 2011.07.30 유익하고 재미있는 역사 만화 소개
  29. 2011.07.30 세조의 킹메이커, 신숙주 (조선시대 최고의 King Maker) - KBS 한국사전 (1)
  30. 2011.07.30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역사 속의 결말 보기 (6)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모두 숙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


인경왕후 - 숙종의 첫 정비, 요절했으나 숙종의 사랑을 받으며 그나마 행복하게 죽음.

인현왕후 - 숙종의 계비, 숙종에 의해 쫓겨나고, 숙종에 의해 다시 궁으로 불려가지만 병으로 요절하는 불쌍한 여인

장희빈   - 숙종이 잠시나마(?) 뜨겁게 사랑했던 후궁이자, 중전이자, 폐서인된 불행한 스토리의 주인공

숙빈     - 그 기세 등등한 장희빈을 몰아내고, 마침내 자기 아들을 왕 위에 올린,, 최후의 승자.

화완옹주 - 영조가 아주 많이 사랑해주었던 옹주, 숙종의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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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쓴 글은 역시 옛날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역사니까 옛날 이야기 맞구나..ㅋ)

 

 

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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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680년에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했다가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 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챔피언' 장옥정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든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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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세 주역. 왼쪽부터 최숙빈(한효주 분), 장희빈(이소연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
ⓒ MBC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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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드라마였던 동이 속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실제 만남은 어땠을까?
궁녀와 지존의 극적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수문록: 조선 후기의 문신 이문정(李聞政)이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연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책.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입궁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 공간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봤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위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한 사료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숙종 18년(1692) 이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1656~1726년)이 지은 <수문록>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1721~1722년)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 이문정의 <수문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밤중에 궁궐을 거닐던 숙종은 조명이 유독 화려한 어느 궁녀의 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이 방안을 몰래 엿보니, 웬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종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렇게 해서 최 숙빈과 숙종이 조우하게 되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숙종이 방문을 열어젖힌 뒤의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을 통해, 우리는 최 숙빈이 그 순간에 얼마나 대담성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방문을 열어젖힌 숙종은 "너 지금 뭐하냐?"고 물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이문정의 <수문록>에서는 "선대왕(先大王, 숙종)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고 기록했다.

 


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최 숙빈의 '대담성'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한밤중에 잔칫상을 차려 놓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숙종이 묻자, 최숙빈이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수문록>

 

 

 

 

 "선대왕(先大王,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

 

 

숙종은 좀 '솔직한' 군주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최측근들에게 숨기지 않았던 듯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그 의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방문 앞에 다가선 숙종은, 창호지에 침을 묻혔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의 체면을 내팽긴 채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그 궁녀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이 궁녀가 바로 훗날 영조를 낳게 될 최씨였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다.

이후의 기사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날 밤 궁녀 최씨는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홀로 거행하다가 숙종에게 우연히 들켰고 그런 모습에 감동된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문록>의 설명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 젖히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임금의 얼굴이 보인다면, 웬만한 궁녀들은 기겁을 하고 놀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임금이 "너 지금 뭐하냐?"라고 물어보면, 아마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최 숙빈은 마치 사전에 준비라도 해놓은 듯이 매우 침착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녀는 중전(폐비 인현왕후)의 시녀로서 특별히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 지금 뭐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네, 저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인현왕후의 시녀였다며 자기소개부터 먼저 했다. 최 숙빈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현왕후와의 관계를 밝힌 다음에 최 숙빈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은 중전의 탄신일입니다.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계시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드시는 것이라곤 거친 현미뿐입니다. 내일이 탄신일인데 누가 좋은 음식을 올리겠습니까? 소녀로서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이것을 차린 겁니다. 중전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진헌할 길이 없어서, 마치 실제로 진헌하는 것처럼 소녀의 방안에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인현왕후가 죄인이고 장 희빈이 중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대답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현왕후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그런 숙종 앞에서 폐비를 두둔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숙종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웬만한 궁녀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자기 부모님 생신이나 기일 등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인현왕후의 생일을 들먹인 것은 최 숙빈이 보통 이상의 대담성을 소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위의 행위를 결코 '무모함'이라 표현하지 않고 '대담성'이라 표현한 것은, 최 숙빈의 행동이 평소에 축적된 고도의 상황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숙종은 '폐비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서인들의 상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숙종은 그런 상소들을 무시하곤 했지만, 계속 올라오는 상소문이 숙종의 심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폐비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다고 최숙빈이 대답하자, 숙종이 그로부터 감동을 받아 최숙빈을 가까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다. ⓒ <수문록>

 

 

 

최 숙빈은 인현왕후전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숙종의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폐비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말해도 숙종이 진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황판단을 했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폐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이 바뀌고 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아직까지는 폐비가 죄인의 신분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전을 쫓아낸 것은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칭찬을 들을 가능성보다는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일이었다.

결국 최 숙빈의 대담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숙종은 "죄인의 생일을 기념하다니! 이런 발칙한!"이라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최 숙빈의 행동으로부터 신선한 감동을 받아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수문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그제야 생각해 보니, 다음 날이 정말로 중전의 탄신일이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시고는 마침내 그를 가까이하셨다."

침방나인으로 바느질 생활을 하던 최 숙빈이 숙종과 친분을 맺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결정적 요소는 위와 같이 최 숙빈 특유의 대담성이었다. 판단력을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인 대담성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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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에게 껄떡댄 숙종? 실제론 최숙빈이 대담했다 

동이와 숙종의 만남, 실제론 더 드라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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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사전 인물사전 중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 이하 생략





세계 4대 해신

살리미스 해전 -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
칼레 해전 - 신흥 해양국가 영국의 해군제독 '찰스 하워드'
트라팔카 해전 - 영국 해군 총사령관 '허레이쇼 넬슨'

그리고,

한산 해전 - 조선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옥포해전

1592년 5월 7일 거제시 옥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1명 부상
  왜  : 군사 - 50척 / 피해 - 전선 26척 격침, 4080명 사망


합포해전

1592년 5월 7일 창원 마산 합포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적진포해전

1592년 5월 8일 고성 적진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 피해 - 전선 11척 격침, 2840명 사망


사천해전

1592년 5월 29일 경상도, 사천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 2척, 판옥선 26척 / 피해 - 이순신, 나대용 피격(사상자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병력모름 / 피해 - 13척 모두격침, 2600명 사망


당포해전

1592년 6월 2일 토영 당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귀선) 포함 2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1척 / 피해 - 전선 21척 모두 격침, 2820명 사망


1차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5일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산 26척 / 피해 - 구루시마 미치유키 사망, 전선 26척 모두격침, 2720명 사망


율포해전

1592년 6월 7일 거제도 율포만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7척 / 피해 - 대선 2척·소선 1척 격침, 대선 3척·소선1척 나포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3명 전사, 10여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73척, 수군 1만 명 / 피해 - 47척 침몰, 12척 나포, 8980명 사망,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경상도 진해 안골포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42척 / 피해 - 전선 42척 모두 격침, 3960명 사망


장림포해전

1592년 8월 29일 경상도 장림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전선 6척, 병력 30명 / 피해 -6척 모두 격침, 30명 도주


화준구미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 사하구 몰운대 인근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5척 / 피해 - 전멸


다대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서평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9척 / 피해 - 전멸


절영도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영도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척 / 피해 - 전멸


초량목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척 / 피해 - 전멸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470척, 벙력 7만명 / 피해 -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웅포 해전

1593년 2월 10일 경남 진해시 웅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8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0여 척 / 피해 - 100여 명 사망



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경상도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연합함대 124척/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31척 / 피해 - 전멸


장문포 해전

1594년 11월 15일 거제 장목면 장목리

조선 : 군사 - 판옥선 50여척(거북선포함)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불명 / 피해 - 도주


어란포 해전

1597년 8월 27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8척 / 피해 - 도주


벽파진 해전

1597년 9월 7일 진도군 벽파진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도주


명량 대첩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협

조선 : 군사 - 판옥선 13척, 2400여 명 / 피해 - 2명 전사 및 3명 부상(총 사상자 불명)
  왜  : 군사 - 세키부네 133척, 아타케부네 200여 척, 그 외 500여 척, 27420여 명 / 피해 - 전선 31척 격침, 92척 전투력 상실,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미 미치후사 전사, 총 18466 사망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19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사면 신촌리 고라금해수욕장

조선 : 군사 - 판옥선 85척, 병력 1만 7000명, 명나라 사선 25척, 명 호선 77척, 명 병력 2만 6000명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아타케부네 100여 척, 병력 1만 6600명 / 피해 - 아타케부네 50척 격침


장도해전 : 순천왜고성전투

1598년 9월 20일~10월 7일 순천 왜성

조선 : 군사 - 수군 1만 5000여 명 / 피해 - 조선 130명 사상, 명나라 전선 30여척 격침 및 파손, 명나라 수군 2000명 전사
  왜  : 군사 - 1만 4천여명/ 피해 - 전선 30척 격칙 및 파손, 11척 나포, 3천명 사상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조선 전선 83척, 명 전선 63척 / 피해 - 이순신 장군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명 사상
  왜  : 군사 - 전선 500여 척 / 피해 - 전선 200여 척 격침, 150여 척 파손, 100여 척 연합수군에 나포



총 45전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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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이순신 장군 평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에서조차도 성웅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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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

 

왕실의 혼례인 '국혼'은 절차와 격식이 매우 엄격하고 복잡하다.


국혼에는 '가례'와 '길례'가 있는데 왕을 비롯하여 세자, 세손 등 왕통을 이어나갈 분들의 혼례를 가례라 하고, 그외 왕족이나 공주의 혼례를 길례라 한다. 이와 같은 궁중혼례는 그때 그때 절차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조선초부터 준칙으로 정해져 내려오는데 '세종실록예지' '국조오례의' '국혼정례' 등이 그것이다. 그 절차는 육례로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달에 걸쳐 수천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나라의 큰 잔치였다.


절차

 

① 납채(納采) : 간택된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에 대궐에서 사신을 보내 청혼을 하는 의식
② 납징(納徵) :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정표로 대궐에서 사신을 시켜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의식
③ 고기(告期) : 대궐에서 길일을 택해 가례일로 정하여 이를 별궁에 알려주는 의식
④ 책비(冊妃)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왕비집에 사신을 보내 왕비로 책봉받는 의식
⑤ 친영(親迎) : 국왕이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아들여 대궐로 돌아오는 의식
⑥ 동뢰(同牢) : 국왕이 왕비와 서로 절을 나눈 뒤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루는 의식

 

금혼령

 

국혼의 선행되는 간택에 있어서 먼저 금혼령을 내렸다.


금혼령은 국혼에 앞서 민간의 혼사부터 금하고 나서 처자봉단(處子捧單)을 걷어 들이기 위한 전제 절차로 그 기간에 혼인할 수 있는 범위와, 절대로 할 수 없는 범위를 밝히고, 국혼에 응할 자격이 있는 자녀를 가진 집을 대상으로 하여 자진신고를 강요하는 명령이다.


 

이와 같은 국혼의 거론은 대왕대비, 왕대비 등 궁중에서 가장 행렬이 높은 여성이 적령기에 들어선 왕 또는 세자 등의 배우자 선택을 발설하여 예조에서 금혼령 발포를 명령하는데, 순조 19년 4월 丁丑일에 명하신 것으로는 '9세에서 13세에 이르는 처자에게 혼인을 금할 것을 명하고 왕세자 가례를 위하여 간택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예조에서는 구체적인 허혼범위와 처자봉단을 받아들이는 기한을 정하여 한성부 및 팔도에 영포하며, 마감이 지나면 한성부 및 각 도에서 단자를 일일이 감봉(監封)하여 예조로 올려 보낸다.


 

허혼범위는 우선적으로 사대부 계급의 연령제한이 있고, 그밖에 異姓親의 촌부라든가, 이씨라든가의 금기 등이 있었다.

 

 

 

 

초간택

 

초간택에 참가하는 처자들의 복장은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 저고리 위에 덧저고리를 입고 치마를 입는다.

 

이렇게 예복을 갖추고 입궁할 때에는 세를 내서라도 최소한 사인교를 타고 간다. 가마 앞, 뒤에는 몸종과 유모가 따르며 더 갖춰진 신분의 아가씨는 수모(미옹사)까지 딸린다. 없는 경우에는 유모가 대신한다.

 

대궐문에 당도하면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궁문턱을 넘어설 때 미리 준미해 놓은 솥뚜껑의 꼭지를 밟고 넘어가는 특이한 풍속이 있다. 입궁의 순서는 호주의 관직과 신분의 차에 의하여 고직과 신분이 높은 딸의 순서대로 입궁하게 된다.

 

심사방법은 30명 내외의 처자들을 한 줄로 세우고 왕을 포함한 왕족들은 발을 치고 보는데 이 경우 당사자인 신랑은 참여치 않는 것이 전례였었다. 간택의 심사가 끝나면 간단한 점심식사가 나오고 점심식사가 끝나면 처자들은 다시 먼저 들어왔던 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재간택 (두 번째 간택)

 

재간택은 초간택을 한 지 2주일 후 정도로 주로 하며 절차는 같으나 다만 인원수가 초간택에서 많이 줄어 5내지 7인이 입궁한다.

 

재간택에서 세 사람을 뽑는다 하더라도 대개 내정은 되지만 발표하지 않으며 벌써 보이도록 특별 대우를 한다. 임중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귀가할 때 육인교를 태우고 차지내궁 등 근 50명의 호송을 받고 내전에서 보내는 봉서까지 가진 글월 비자를 시켜 따르게 하였다.

 


삼간택

 

세 번째 간택은 주로 재간택을 한 지 15일 내지 20일 만에 행하여지는데 재간택에서 내정된 처자에 대하여 재삼 확인하는 것이다.

 

삼간택에서는 왕이 이름을 지적하여 영의정을 통하여 공시한다.

삼간택에서는 최후로 뽑힌 처자는 그 자리에서 벌써 왕비 또는 빈궁대우를 받아 다른 후보자들의 큰절을 받으며 왕, 왕비, 왕대비를 뵈옵고 나서 사가가 아닌 별궁으로 큰 상궁이 모시고 가게 된다.별궁으로 나갈 때는 대궐에서 준비한 원삼에 족두리를 쓴 대례복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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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 숙종 즉위년, 甲寅)  
  · 1월
: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승하
  · 7월 : 대왕대비(장렬왕후)의 인선왕후에 대한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함
  · 8월 : 현종 승하(해시(밤9-11)
  허적을 원상으로 삼음
  왕세자(숙종) 즉위(인정문에서)
  송시열을 서울로 들어오도록 함 - 오지 않음
  · 9월 : (영부사) 송시열에게 능지(묘비문)를 지어 올리도록 명함
  송시열이 사양하는 상소 올림
  정치화를 영부사로 삼고 송시열은 판중추부사(판부사)로 내림
  유생 곽세건이 송시열에게 내린 명이 부당하니 거두어 달라는 상소 올림
  (송시열은 선왕의 적통을 문제 삼은 이다)
  · 10월 : 송시열이 지문 짓기를 사양하자 김석주에게 짓도록 함
  (송시열에 관한 견제가 구체화)
  · 11월 : 이단하가 지어올린 대행왕의 행장을 고쳐 쓰게 함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라고 썼던 대목이 오인례였음을 명시하라)
  · 12월 : 기해년 의례(儀禮)를 정한 신하들을 추죄함.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을 삭탈함
     
  1675년(숙종 1, 己卯)  
  · 1월
: 송시열을 덕원(德源)에 유배.
  · 3월 : 복창군·복평군을 궁녀 간통죄로 유배
  · 4월 : 윤5월 송시열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함
  · 8월 : 윤휴의 건의로 복제를 3년으로 함.
  · 9월 :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올림.
  * 김우명(金佑明, 1619-1675) 죽음.
     
  1676년(숙종 2, 丙辰)
 
  · 2월
: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사액함.
  · 4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8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677년(숙종 3, 丁巳)
 
  · 3월
: 호패법 시행.
  · 9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11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2월 : 호포법(戶布法)의 시행을 논의함.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1678년(숙종 4, 戊午)
 
  · 1월
: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킴.
  · 3월 : 청의 사신이 조선의 문적(文籍)을 얻어감.
  · 4월 : 공명첩(空名帖)을 폐지.
  · 6월 : 관서, 호남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에게 주전(鑄錢)을 시킴.
  · 9월 : 각사노비(各司奴婢) 면천(免賤)의 한계를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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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9년(숙종 5, 己未)  
  · 6월
: 허목(許穆)이 허적(許積)을 논핵함.
  남인이 청남(淸南) 탁남(濁 南)의 나뉨.

 

1680년(숙종 6, 庚申)  
  · 1월
: 외방의 주전(鑄錢)을 금지.
  · 4월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남인축출 서인집권. 윤휴 허적 등 남인 (南人)을 유배 보냄.
  서인(西人)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됨.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의 추대를 도모하다 처형됨.
  · 5월 : 허적(許積, 1610-1680), 윤휴(尹휴, 1617-1680)를 사사(賜死)함.
  송시열을 석방함.
  윤8월 오정창(吳挺昌) 정원로(鄭元老) 등을 처형.
  · 10월 : 장옥정이 궁녀로 입궐
  송시열을 등용.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죽음.

  1681년(숙종 7, 辛酉)  
  · 1월
: 새중전의 간택에 관해 논의
  · 2월 : 인경왕후 발인
  · 3월 : 병판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다.
  민유중을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으로 삼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주전(鑄錢).
  · 4월 : 어의동의 별궁에서 납채례를 거행하다.
  납채례 : 대궐에서 간택된 왕비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식
  · 5월 : 장옥정이 대궐에서 쫓겨나감

  1682년(숙종 8, 壬戌)  
  · 1월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
  · 5월 :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함.
  · 10월 : 허새(許璽)등을 처형.
  · 11월 : 전라감영에서 주전(鑄錢)함.
  * 허목(許穆, 1595-1682) 죽음.

  1683년(숙종 9, 癸亥)  
  · 3월
: 송시열 치사(致仕)함.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완성.
  장희재가 인조반정 회갑 축하연에서 숙정을 데리고 달아남.
  · 4월 : 폐지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결정함.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
  · 7월 : 영남의 대동법을 개정함.
  · 12월 :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죽음.

  1684년(숙종 10, 甲子)  
  · 3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올림.
  무산부(茂山府)를 새로 설치함.
  · 10월 : 중용언해(中庸諺解) 완성.
  * 김석주(金錫胄, 1634-1684) 죽음.

 

1685년(숙종 11, 乙丑)  
  · 1월
: 호패의 지패(紙牌)를 목(木), 각(角)으로 바꾸게함.
  경성부의 사부(士夫)에게도 방역(坊役)을 부과함.
  종각(鐘閣)이 불에 탐.
  · 9월 : 호패 위조자를 사형에 처하기로 함.
  · 11월 : 삼금(蔘禁)범죄의 식(式)을 정함.

  1686년(숙종 12, 丙寅)  
  · 1월
: 안주(安州)에서 주전(鑄錢)하고 차자(車子)를 제조.
  · 7월 : 진도에서 표류한중국인 80여명을 송환.
  · 12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 설치의 다섯가지 이득을 말함.
  ▷ 이징명(李徵明), 상소하여 여총(女寵)을 논함.

  1687년(숙종 13, 丁卯)  
  · 5월
: 명안공주 죽음
  · 6월 : 동평군 이항을 혜민서제조로 봉함.
  · 7월 : 최석정(崔錫鼎)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개수함.
  · 8월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열조수교(列朝受敎)를 간행.
  · 9월 : 군문(軍門)에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연습시킴.
  · 12월 : 숙종이 탕평책(蕩平策)을 유시(諭示)함.
  ▷ 만수전(萬壽殿) 불탐.
  * 김만기(金萬基, 1633-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홍우원(洪宇遠, 1605-1687) 죽음.

  1688년(숙종 14, 戊辰)  
  · 2월
: 숙종이 남한산성에 행차.
  · 3월 : 평안도에 1년을 한도로 주전(鑄錢)케함.
  · 7월 : 소론 박세채(朴世采)을 내?i고 남구만 여성제(呂聖齊)를 유배함. 11월에 석방.
  · 8월 : 인조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죽음.
  · 10월 :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왕자(경종)을 출산함.
  · 11월 : 소의 장씨의 어머니가 옥교를 타고 들어오다 욕을 당한 일로 상소가 올라옴

  1689년(숙종 15, 己巳)  
  · 1월
: 왕자를 원자로 정함.
  소의 장씨를 희빈에 봉함
  · 2월 :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 실각, 남인 집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주도에 유배 안치(安置), 6월에 사사(賜死)함.
  · 3월 : 홍치상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절도에 위리안치함.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삭탈함. 윤3월 사사(賜死).
  김익훈(金益勳) 장(杖)을 맞고 죽음.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
  · 4월 : 귀인 김씨를 폐위해 사가로 돌려보냄.
  홍치상을 교형에 처함
  · 5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함.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해 비로 삼음
  장형을 옥산부원군, 부인 고씨를 영주부부인, 계실 윤씨를 파산부부인으로 봉작함.
  * 김만중(金萬重)이 구운몽(九雲夢) 등을 지음.
  * 이단하(李端夏, 1625-1689) 죽음.

1690년(숙종 16, 庚午)  
  · 6월
: 원자(元子)를 세자(경종)로 책봉.
  · 9월 :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음. 열흘 뒤 죽음.
  · 10월 :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
  · 11월 : 진제(賑濟)를 위해 공명첩(空名帖) 2만장을 판매함.
  호적법을 밝히고 지패(紙牌)를 목패(木牌)로 바꿈.
  *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죽음.

  1691년(숙종 17, 辛未)  
  · 7월
: 세자를 위해 ‘한석봉천자문’을 편찬함
  · 10월 : 주전(鑄錢).
  · 12월 :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림.
  삼남, 서북의 인재를 고루 등용함.
  북한산성의 축성을 결정함.

  1692년(숙종 18, 壬申)  
  · 3월
: 장희재를 총융사로 삼음
  · 8월 : 숙종이 창덕궁으로 돌아옴.
  총융청(摠戎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 10월 : 동(銅)을 북경에서 구입함.
  · 12월 : 8도감사에게 인명(人命) 남살(濫殺)의 폐를 엄금함.
  *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죽음.

  1693년(숙종 19, 癸酉)  
  · 4월
: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봉함
  · 7월 : 주전(鑄錢)을 호조(戶曹)에 전담시키고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함.
  · 10월 : 소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
  · 12월 : 소의 최씨가 낳은 왕자가 죽음.
  조사석(趙師錫, 1632-1693) 유배지에서 죽음.
  겨울에 대마도주가 본국인의 울릉도 어업의 금지를 요청함.

  1694년(숙종 20, 甲戌)  
  · 3월
: 왕세자가 서연을 시작함.
  갑술옥사(甲戌獄事). 남인 실각, 서인 집권.
  · 4월 : 소론 남구만(南九萬)이 영의정이 됨. 소론 등용.
  폐비 민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장씨를 폐위.
  · 5월 :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다시 종사.
  · 6월 : 숙원 최씨를 숙의로 삼음.
  · 8월 : 왜에게 왜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함.
  · 9월 :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연잉군)
  어영청(御營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1695년(숙종 21, 乙亥)  
  · 4월
: 경기 충청지방에 도적이 횡행함.
  · 6월 :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지함.
  · 10월 : 상평청(常平廳)의 주전(鑄錢)을 1년 기한으로 허가함.
  · 12월 : 버린 아이(遺棄兒) 수양(收養)의 법을 제정함.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죽음.

  1696년(숙종 22, 丙子)  
  · 1월
: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바로 고침.
  · 2월 :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사율(死律)로 처벌함.
  · 4월 : 세자빈을 심호의 딸로 간택함. 세자가 관례를 치름.
  옥산부원군의 비석 파괴 사건으로 업동 등이 잡혀옴
  · 5월 : 세자가 가례를 올림
  · 9월 :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도항한 동래인 안용복(安龍福)을 추문(推問)함.

  1697년(숙종 23, 丁丑)  
  · 2월
: 대마도주가 막부(幕府) 명으로 왜인 울릉도 왕래 금지 통지.
  도성안에 있는 거지들을 각 섬에 보냄.
  · 4월 : 기아민의 구제를 위해 송첩(松帖)을 내줌.
  · 8월 : 중인(中人) 서얼(庶孼)의 통사자(通仕者)는 찰방(察訪)을 거친 후 수령으로 서용함을 허락함.
  · 10월 : 전국에 대기근.

  1698년(숙종 24, 戊寅)  
  · 1월
: 청에서 개시(開市)를 허락하고 속미(粟米) 4만석을 보내옴.
  숙종이 탕평(蕩平)할 것을 내림.
  · 8월 : 궁인 유씨를 숙원에 봉함.
  · 10월 : 사간원에서 지방의 생사(生祠)의 폐단을 규탄함.
  · 11월 : 노산군(魯山君)을 복위.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함.
  상궁 박씨를 숙원에 봉함

  1699년(숙종 25, 己卯)  
  · 6월
: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국조보감속편(國朝寶鑑續編)을 편찬.
  · 7월 : 영월의 단종릉 장릉(莊陵)의 개수도감(改修都監)을 설치함.
  · 9월 : 남형(濫刑)을 엄금함.
  · 10월 : 숙의 최씨를 숙빈에 봉함.
  전염병이 유행하여 25만명이 사망함.
  * 권대운(權大運, 1612-1699) 죽음.

1700년(숙종 26, 庚辰)  
  · 3월
: 유생(儒生) 사제(賜第)의 범위를 정함.
  최석정(崔錫鼎)에게 속록(續錄),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수를 전담시킴.
  · 8월 : 선원보략(璿源譜略) 완성됨.

  1701년(숙종 27, 辛巳)  
  · 1월
: 문묘에 계성사(啓聖祠)를 세움.
  · 4월 : 청나라 사람이 압록강을 측량함.
  · 8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죽음.
  · 9월 : 대행왕비를 무고(巫蠱)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 명함.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림.
  · 10월 : 동평군(東平君) 항(杭)을 사사함.
: 빈(嬪)을 후비(后妃)에 올리지 못하게 명함.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사사(賜死)함.
  장희재를 처형함.
  ▷ 무고(巫蠱)의 옥(獄) 일어남.

  1702년(숙종 28, 壬午)  
  · 1월
: 세자가 장씨의 상(喪)에 감.
  희빈 장씨를 양주 인장리에 장사지냄
  · 5월 : 이준명(李浚明) 등이 울릉도 도형(圖形) 및 토산물을 바침.
  · 10월 : 김주신(金柱臣)의 딸을 왕비로 책봉. 인원왕후(仁元王后).
  귀인 김씨를 영빈, 귀인 박씨를 명빈, 숙의 유씨를 소의에 봉함
  · 11월 : 남구만, 유상운(柳尙運)을 유배지에서 석방함.

  1703년(숙종 29, 癸未)  
  · 1월
: 금위영을 폐지했다가 2월에 다시 부활시킴.
  · 7월 : 명빈 박씨가 훙서함.
  · 9월 : 명빈 소생의 왕자 이 헌을 연령군에 봉함.
  청나라에 황당선(荒唐船) 금지에 대해 통지함.
  * 이시백(李時白, 1635-1703),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죽음.

  1704년(숙종 30, 甲申)  
  · 2월
: 연잉군이 혼례를 올림.
  · 3월 : 도성 수축을 시작함.
  · 6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지.
  · 8월 : 해서대동시행절목(海西大同施行節目)을 정하게 함.
  · 11월 :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고침.
  · 12월 : 대보단(大報壇)이 완공.

1705년(숙종 31, 乙酉)  
  · 3월
: 숙종이 대보단에서 명의 신종(神宗)을 제사함.
  · 10월 : 숙종이 선위(禪位)를 명함.
  · 11월 : 세자가 선위의 명을 거두시기를 세 번째 상소하니 허락함.

  1706년(숙종 32, 丙戌)  
  · 2월
: 최석정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요청함
  · 5월 : 유생 임부(林溥)등이 동궁모해 혐의로 김춘택을 탄핵하는 상소
  · 6월 : 동궁(東宮) 모해설로 임부(林溥)를 국문함.
  · 8월 : 최석정이 전록통고(典錄通考)를 편찬하여 올림.
  · 10월 : 청에서 칠정력(七政曆)을 수입함.

  1707년(숙종 33, 丁亥)  
  · 1월
: 임보(林溥)가 장을 맞고 죽음.
  · 2월 : 이순신 사우(祠宇)에 현충(顯忠)이라 사액함.
  연령군이 가례를 올림
  · 4월 : 형장(刑杖)을 일체 금지함.
  · 11월 : 숙종이 당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신완(申琓, 1646-1707) 죽음.

  1708년(숙종 34, 戊子)  
  · 2월
: 숙종이 당론을 경계함.
  · 4월 :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佛狼機)를 만들게 함.
  · 10월 : 황해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 12월 : 서운관(書雲觀)에서 건상도(乾象圖)와 곤여도(坤輿圖) 올림.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죽음.

  1709년(숙종 35, 己丑)  
  · 1월
: 숙종이 노론 소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5월 : 서인(庶人) 상례(喪禮)의 제한을 엄격히 정함.
  김창집(金昌集)이 오륜전비언해(五倫全備諺解)를 완성.
  · 8월 : 강화도에 축성(築城)을 명함.

1710년(숙종 36, 庚寅)  
  · 3월 : 최석정(崔錫鼎)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가 올린 예기류편(禮記類篇)을 소각함.
  노론이 진출함.
  · 7월 : 왜관의 공작미(公作米)를 5년으로 연장해줌.
  · 10월 : 안정기(安鼎基)가 만든 차자(車子)를 제조함.

  1711년(숙종 37, 辛卯)  
  · 3월 :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을 시작하여 10월에 마침.
  · 5월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12월 : 왜인의 구은(舊銀, 八星銀) 사용 요청을 허락함.
  비변사에서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올림.
  * 남구만 죽음

  1712년(숙종 38, 壬辰)  
  · 4월
: 청의 목극등(穆克登) 일행이 후주(厚州)에 이름.
  · 5월 : 총융청에서 북한산성 중성(重城)을 축조함.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1713년(숙종 39, 癸巳)  
  · 7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단함.
  · 10월 : 북도 친기위(北道 親騎衛)를 설치함.
  · 11월 : 이이명(李이命)이 오례의(五禮儀)의 개정을 논함.

  1714년(숙종 40, 甲午)  
  · 1월
: 팔도에 지진(地震).
  · 2월 : 숭례문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남.
  · 7월 : 강원도의 군보단속절목(軍保團束節目)을 강구함.
  * 윤증(尹拯, 1629-1714) 죽음.

1715년(숙종 41, 乙未)  
  · 2월
: 동으로 도량형기를 주조하여 팔도에 반사함.
  · 4월 :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역서(曆書), 측산기계(測算機械), 자명종 (自鳴鐘) 등을 구해옴.
  · 12월 : 윤선거(尹宣擧)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跋文)으로 노소간의 분쟁이 격화됨.
  * 최석정(崔錫鼎, 1646-1715),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죽음.

  1716년(숙종 42, 丙申)  
  · 8월
: 윤선거(尹宣擧) 문집의 훼판(毁板)을 명함. 병신처분(丙申處分).
  · 10월 : 윤선거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 12월 : 윤증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1717년(숙종 43, 丁酉)  
  · 5월
: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함.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追奪)함.
  · 7월 : 왕이 이이명과 독대함.
  왕세자가 섭정을 함.

  1718년(숙종 44, 戊戌)  
  · 2월
: 세자빈 심씨가 훙서함.
  인장리의 장씨 묘를 천장하게 함.
  · 4월 : 소현세자빈 강씨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킴.
  · 9월 : 세자빈으로 어씨(魚氏) 책립.
  · 10월 : 마천령(磨天嶺)을 엄격히 막음.

  1719년(숙종 45, 己亥)  
  · 2월
: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이 들어감.
  · 7월 : 경상 전라 충청도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
  · 10월 : 연령군 죽음.

  1720년(숙종 46 / 경종 즉위년, 庚子)  
  · 6월
: 숙종 승하, 왕세자(경종) 즉위.
  · 10월 : 삼남의 양전을 끝냄.
  · 11월 : 청의 사신이 옴.
  조태구(趙泰耉)가 김창집(金昌集)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림.
  * 최창대(崔昌大, 1669-1720), 민진후(閔鎭厚, 1659-17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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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5.13 01:54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와 이훤 임금(김수현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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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밝히던 조선 왕들의 '굴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일곱 번째 이야기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임금(김수현 분)은 죽은 세자빈을 닮은 연우(한가인 분)를 무척이나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훤의 소망은 수많은 장애물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칫 연우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연우가 무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우가 무녀가 아닌 궁녀라 해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왕대비와 중전과 외척세력이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훤의 처지는 옛날 왕들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모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관심 있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란 관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관념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의 '베드신'은 오직 후계자 생산을 위해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베드신'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든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신하들의 '막가는' 발언들이... 

 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 사진은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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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가야(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년 24일)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 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제2장에 따르면, '검찰과 긴장관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란 취지의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라고 답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을 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 곁에는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희빈 홍씨)을 특별히 가까이 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3월 12일(1518년 4월 21일)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 12월 14일(1687년 1월 27일)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덕궁 선정전. 왕의 편전(집무실)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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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이하 생략. 전체 기사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12 23:50

 

 

 

[81회] 숙의 최씨에 대한 희빈 장씨의 미움은...




숙의최씨가 황급히 달려온 숙종에게 인골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하지만

인현왕후는 근거도 없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입을 다물게 한다.

숙의 최씨에 대한 희빈 장씨의 미움은 점점 더 커져가고...

한편 자신들의 정보가 자근아기에 의해 김춘택에게로 흘러간다고
판단한 숙정은 충근을 시켜 자근아기를 납치하려 하지만 김춘택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충근등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숙의 측 박상궁의 취선당 염탐은 계속되고 결국 권상궁에게 발견되어
희빈의 덫에 빠지고 만다.

박상궁은 피투성이가 되고 숙의가 달려와 취선당에 관련된 흉흉한 소문 때문이라며

별채를 뒤져야겠다며 벼르자 희빈은 자신있게, 만약 별채를 뒤져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숙의의 왕자를 우물에 던져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82회] 또 다시 일을 꾸미는 희빈 장씨...




결국 별채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희빈장씨는 숙의에게 아들을 살리고자 한다면

당장 대전으로 달려가 장희재의 방면을 주청드리라 명한다.

난감해지는 숙의 최씨!

어렵게 숙종에게 장희재의 방면을 입에 담자 숙종은 믿어지지 않는 듯
의아해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인현왕후 역시 이상하게 여겨 숙의를 불러 사실을
알려하나 숙의최씨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한편, 자근아기를 노리다 또다시 궁지에 몰린 충근이 동평군에게 달려와

살려달라 청할 때 의금부의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동평군은 위기에 빠진다.

충근은 당장 잡혀 들어가고 동평군역시 귀양을 가는 처지에 이른다.

장희재의 방면은 고사하고 충근의 일로 다시 위기에 빠지는 희빈장씨!

또 다시 일을 꾸며 충근을 독살시키고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위세가 살아난 희빈장씨는 다시 숙의최씨를 불러 대전에 들어 장희재의
방면을 다시 주청하라 압력을 넣는데...



 

 

[83회] 숙안의 죽음에 인현왕후는 오열을 하는데...




숙의의 계속되는 의아한 행동에 의심을 품어오던 차에 자초지종을 알게된 민진후는

이를 인현왕후에게 고하자 인현왕후는 숙의를 직접찾아가 이실직고를 받아낸다.

하지만 이 일을 바로잡을 뚜렷한 방도가 없자 난감해하고....

한편 세자내외가 중궁전에서 오랫동안 문후들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직접 중궁전을 찾아가 중전이 보는 앞에서 세자내외를
호통치는등 또 소란을 일으킨다.

이 와중에 숙안공주가 운명했다는 전언이 오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큰
뒷받침되었던 숙안의 죽음에 인현왕후는 오열을 한다. 하지만 큰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었다고 생각한 희빈장씨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한 치성에 더욱 정성을 더하는데....





[84회] 희빈은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숙의와 희빈을 중궁전으로 부른 숙종은 그동안 중전의 간병에

이토록 소홀히 했냐며 호통을 친다. 그리고 앞으로 후궁 둘이 번갈아 가며

중전의 병간호를 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희빈과 독대할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한
인현왕후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수 없고....

우려한 바대로 간병온 희빈장씨는 인현왕후에게 막말도 서슴치 않는등
오히려 인현왕후의 병이 깊어가게 만들기만 한다.

한편 취선당에 관련해 이상한 소문이 끊임없자 숙종은 희빈이 중궁전에 든 사이에

취선당을 살펴보라 명하지만 무당 막례의 기지로 별 단서를 잡아내지 못한다.

위기를 넘긴 희빈은 더욱더 신통한 방술을 이용해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숙정을 통해 행하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현왕후의 병이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되고 오히려 세자빈이 신열로
앓아 눕는 일이 발생하는데....



 


[85회] 희빈은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희빈은 숙의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여의 순봉을 불러

자신이 지어온 탕재를 달여오라 명한다.

약에 극약이라도 들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중전의 환후를 염려한
충정이라는 희빈의 말에 중전 인현왕후는 거절하지 못한다.

그 탕재에 경분이라는 염화제일 수은을 넣은 희빈은 중전이 탕재를
마시자 회심을 미소를 짓는데...

그런데... 약을 마신 다음날, 의외로 중전은 차도를 보이게 되자

대궐 안은 모처럼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러한 경사에 맞춰 숙종은 숙의를 숙빈에 봉하기에 이르고...

 

이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자 희빈장씨는 당황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 여의 순봉을 불러 다그치기 시작하지만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알 길이 없자 다시 한번 경분이 든 약재를
달여 올리라 명하는데...

 


[ 제 85회 용어풀이 ]

월름미 : 월급으로 미리 주는 쌀




[86회] 춘택은 희빈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희빈의 모친 윤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희빈은 황급히 사가로 나가고

이 틈을 타 숙빈은 다시 한번 신당을 찾아내려 일을 꾸민다.

하지만 분란을 두려워한 인현왕후의 제지로 일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사경을 헤매던 윤씨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고 희빈장씨는 슬픔에 빠진다.

이 소식을 접한 김춘택은 희빈이 사가로 나온 기회를 이용해 희빈을
없애버릴 계획을 꾸미는데...

희빈이 상을 다 치르고 궁으로 입궐하는 날, 김춘택은 꼭지단패거리를
불러모아 희빈을 처치하라 명한다.

드디어 꼭지단 패거리에 가마는 둘어싸이고 헤는 위기에 빠진다.

한편, 궐안의 숙빈역시 인현왕후의 명을 거역하고 신당을 찾기 위해
취선당으로 가는데...

 



 

 

[87회] 김춘택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지고...




김춘택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온 도성에는 나졸들이 깔린다.

하지만 희빈 장씨를 처단하기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김춘택은
오히려 결기를 다진다.

김춘택이 숙종을 알현하기 위해 일부러 잡히려한다는 이야기를
인현왕후로부터 전해들은 희빈장씨는 분하지만 자신의 죄과가 탄로 날까
전전긍긍한다.

숙종이 김춘택을 친국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순간, 희빈은 대전으로
나아와 김춘택의 친국은 또 다른 불행이 되기에 친국 대신 원지유배만
시키달라 주청드린다.

결국 희빈의 주청이 받아들여지고 김춘택은 경상도 상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모처럼 평온을 되찾는 대궐.

그러나 또다시 장희재의 방면을 주청한 제주목사의 상소문제로 시끄러워진다.

희빈장씨는 기회다 싶어 김춘택의 일로 트집을 잡힌 숙빈은 사주하여
함께 대전복도에 꿇어앉아 오라버니의 방면을 주청하지만

오히려 숙종의 노여움만 사는데...


 



[88회] 숙종의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장희빈의 노력...




숙종의 돌아선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방술로

희빈장씨는 숙종의 침의에 인골을 싸서 대전후원에 묻는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희빈 장씨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인현왕후의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올 여름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숙종은 조정을 개편하면서까지 중전을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한편 병마에 괴로워하는 인현왕후를 안스럽게 지키던 숙빈은 희빈에게 들러

중전이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모든 저주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희빈 장씨의 진노만 살뿐이다.

중궁전이 비었다는 전갈에 중전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몸소 간병하러 온 것처럼

중궁전에 들린 희빈장씨는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중전을 괴롭힌다.

그리고 중전의 헐떡거리는 목을 조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때마침 숙빈최씨가 들어오는데....

중전을 죽이기 위해 희빈의 신당에서는 매일 방술이 진행되고
인현왕후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결국 숙종 27년 8월 14일,

중전 인현왕후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뒤로하고 승하하고 마는데....

 

 

 

 

 

[89회]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장씨는 다시 중전의 자리를...




자신의 의도대로 중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장씨는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상상에 즐겁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이 호기를 맞아 그동안 죽어지내던 남인들이

서서히 희빈 장씨를 중전의 자리에 올리는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당막례가 미처 궐을 빠져나가기 전에 온 궐안은 내금위 군사들에 의해

통행금지가 행해지고 기세가 등등한 숙빈최씨는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취선당으로 들이닥치는데...

그러나 희빈 장씨의 간괴로 숙빈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례는
무사히 궐을 빠져나간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말끔히 치워진 신당만을 확인하고는 숙빈최씨는
좌절하고 마는데...

한편 숙종은 중전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몸소 상복을 입음으로서 통한을 달래고자 하였고 친히 행록을 지어

인현왕후의 행실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희빈과 숙빈에게는 한시라도 인현왕후의 빈전에서 떠나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대행왕비를 추모하라 명한다.

그러나 희빈이 빈전에 있던 숙빈을 취선당으로 부른 사이 빈전에 들린
숙종은 텅빈 빈전을 보고 불같이 격노하는데...


 

 

 

[90회] 희빈이 상복도 입지 않고 있다는 것과...

 




희빈이 상복도 입지 않고 있다는 것과 빈전의 숙빈을 함부로 불러내었다는 말에

화가 난 숙종은 취선당으로 달려와 희빈 장씨를 심하게 나무란다.

희빈장씨는 모든 것이 모함이라며 울며 매달려보지만

이미 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더욱 모질게 희빈 장씨를 떼어놓으며

숙종은 취선당을 떠나고 만다.

숙종이 자신을 홀대하고 숙빈에게 더 호의를 보이자 위기를 느낀
희빈 장씨는 빈전 뜰 앞에서 석고대죄를 올린다.

숙종의 마음은 쉽게 돌어서지 않지만 눈물로 제어미의 용서를 구하는
세자의 호소에 숙종은 희빈의 석고대죄를 받아들인다.

한편 재집권을 위한 남인들의 발호가 시작되고 제주도에 유배된
장희재의 방면이야기 흘러나오자 김춘택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장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를 날이 멀지 않았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91회]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숙빈최씨는...




빈전에 든 숙빈최씨에게, 내관한명이 희빈 장씨의

값비싼 노리개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가 날아든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그 내관을 불러들여 다시 한번 노리개를 주면서

입막음하고자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숙빈최씨 역시

그 내관을 불러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데...

한편 자근아기를 이용해 김춘택을 잡으려는 남인들은 급히 서두르고
김춘택은 행방이 묘연해진 자근아기를 찾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러나 김춘택이 자근아기와 사통을 했다는 상소로 인해 김춘택은 다시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숙빈최씨는 서둘러 대전으로 향하고 드디어
모든 사실을 숙종 앞에서 털어놓자 충격 받은 숙종은 당장 대전 후원을
파보라고 명하는데...

 





[92회] 희빈은 세자를 붙들고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숙빈 최씨의 직접 지휘아래 대전의 후원을 파기 시작하자

희빈 장씨는 모든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움에 떤다.

마침내 희빈 장씨가 묻었던 인골이 나오고 이를 직접 지켜본 숙종은
당장 희빈장씨전의 권상궁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권상궁은 잡혀오기전,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했다고 자백할 것이라며
희빈 장씨를 안심시키지만 희빈장씨는 불안하기만 하다.

드디어 숙종의 친국이 열리고 모진 고문이 권상궁에게 가해진다.

그러나 권상궁은 인골을 묻은 장본인은 자신이며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이 아니라

희빈에게서 멀어진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것 뿐이라고 끝까지 강변한다.

친국은 희빈전의 모든 상궁, 나인들에게까지 확대되고 형벌은 더욱
가혹해진다.

혹시나 모든 것을 실토하지 않을지 불안한 희빈장씨는 세자를 붙들고
자신을 살릴 사람은 세자뿐이니 어미의 곁을 떠나지 말라며 애원하는데...





[93회] 숙빈최씨를 찾아가 살려달라 요청하는 장희빈.....




위기에 몰린 희빈장씨는 자존심을 뒤로한 채 숙빈최씨를 찾아가

지금 친국을 받고있는 권상궁을 살려달라 요청한다.

그러나 희빈이 먼저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숙빈의
말에 발끈하여 심한 말다툼 끝에 힘없이 돌아온다.

궐안 사정을 알 리 없는 숙정 등은 김춘택을 잡고자 모사를 꾸미지만
김춘택은 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이들을 잡기 위해 몸소 숙정의 집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김춘택이 덫에 걸렸다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숙정.

그러나 그들이 김춘택을 포박하려는 순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의금부
병사들이 들이닥치는데...

결국 대궐로 압송되는 숙정과 막례!

이 일은 곧바로 숙종에게 보고되고 숙종은 친히 조사를 하겠노라며
이들의 친국차비도 서두르라 명한다.

그 와중에 희빈 장씨에게는 치명적인 물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화살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인현왕후의 화상이었다.

한사코 부인하던 숙정과 막례도 이 물증에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드디어 모든 것을 실토하기 시작하는데...



 


[94회] 희빈장씨는 취선당으로 돌아와 체념의 눈물을...

 




모든 실상이 드러나는 장면을 목격한 희빈장씨는 취선당으로 돌아와

체념의 눈물을 흘리고, 끝끝내 희빈의 연루는 밝히지 않는 숙정과 막례에게

더욱 가혹한 고문을 명한 숙종은 이제서야 중전의 원혼을 풀 수가 있게 되었다며

인현왕후의 빈전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세자에게 해가 돌아갈까 근심하던 남구만은 다시 한번 숙종을
찾아가 충정어린 간언을 하자 숙종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믿을 것은
세자뿐인 희빈장씨는 세자를 빈전에 보내지 않고 함께 데리고 있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숙종은 상주가 어떻게 빈전을 비우냐며 당장
세자를 데리고 오라고 명한다.

그러나 몇 차례 사람을 보내보지만 끝내 희빈 장씨가 세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자 숙종은 드디어 내금위 병사 등을 동원하고서라도
세자를 끌어내라고 명한다.

불안에 떨며 세자를 보낼 수가 없다는 희빈 장씨의 절규!

그러나 왕명또한 거역할 수 없는 지라 최상앙은 완력을 써서라도
세자를 끌어내려 한다.

그런데....세자를 사이에 두고 내금위 병사들과 희빈 장씨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중 그만 세자가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데...



 


[95회] 숙종은 결국 동평군의 사사를 윤허하고...




세자의 소식은 곧바로 숙종에게 보고되고 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제는 세자의 앞길까지 망치려 한다며 진노한다.

이런 와중에 김창집등 강경파들의 직언으로 숙종은 갈등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동평군의 사사를 윤허하고 이어서 무당 막례를 효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장씨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좌절감에 빠져드는데...

신하들의 계속된 주청에 희빈 장씨의 처리문제로 편전에서 회의가 열리고

이 회의에서 장희재의 처단뿐만 아니라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노론 강경파 의견과 폐세자의 일을 걱정하는 소론의 남구만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숙종은 곤혹스러워 하는데...

 

 

 

 

[96회] 희빈에게 스스로 자진을 명하는 숙종..




취선당에 감금된 희빈장씨!

숙빈전의 박상궁이 진지상을 차려오자 화가난 희빈은 그 밥상을 세차게 밀어 던지며

세자가 오지 않으면 곡기를 끊고 죽고 말 것이라며 절규한다.

한편 희빈의 단죄를 둘러싼 노론 강경파와 남구만의 대립은 점점
격해지고 숙종은 행형을 뒤로 미루며 갈등하기 시작한다.

제주도를 탈출한 장희재는 도성으로 돌아와 민언량과 김태윤등
남인들을 만나 그동안의 소식을 듣고 분개한다.

그리고는 바로 군사들을 일으켜 반정에 나설 계획을 세우지만
제주도에서 동행한 준성의 고발로 장희재 역시 포박된다.

숙종의 명으로 장희재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고, 이 자리에서 역모를 꾀하고

인현왕후의 저주를 부추긴 장희재의 편지가 물증으로 제시되는데...

희빈의 행형에 대해 고심하는 숙종!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는지 희빈에게 직접 사약을 내리는 대신에
스스로 자진을 명하는 전지를 내리는데...



 


 

[97회] 어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세자의 청에..




희빈 장씨에 대한 행형이 매듭지어졌다는 소식에 숙빈최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지만

세자는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며 대전으로 가려하지만 쓰러지고 만다.

마침내 자진의 명을 담은 전지가 취선당에 당도하자 희빈장씨는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세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먼저 죽을 수 없다며 전지를
내팽겨치는등 격렬하게 어명을 거부한다.

이 소식에 격노하는 숙종!

당장 취선당으로 달려가려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전에 나타난
세자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어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세자의 청에잠시 흔들리는 숙종!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나라를 경영할 수 없다며 냉정하게
세자를 나무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취선당으로 나아온 세자!
그러나 내금위 군사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취선당에서 끌려나간다.

“어마마마”를 부르짖는 세자의 절규를 들은 희빈장씨!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결국 또 다시 제지당하는데...

 

 




[97회] 어미를 살리기 위한 세자의 석고대죄..

 




어미를 살리기 위한 세자의 석고대죄!

숙빈과 세자빈이 나서서 만류하지만 어미를 살려달라며 절규하는
세자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찢어질 듯 마음이 아픈 숙종.

그러나 세자의 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결국 세자는 내관들에 의해
동궁으로 끌려가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숙빈최씨는 이러다 세자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취선당으로 가 희빈 장씨와 담판을 지으려한다.

즉 세자가 다 죽게 되었으니 세자를 살리려거든 희빈 장씨가 하루빨리
자진하는 수밖에 없다며 다그친다.

그러나 희빈 장씨의 기세가 꺾일 기미가 없자 마침내 품안에 있던
은장도를 꺼내 어서 왕명을 받들라며 소리치는데...

한편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회생의 기회를 노리던 역관들과 남인들은 세를 규합,

관리들을 매수하여 희빈의 자진전교를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시작하고 이 소식에 희빈 장씨와 장희재는 마지막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이 일을 오히려 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며 숙종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숙종은 분노의 눈물을 머금은 채 희빈 장씨를 당장
사사하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99회]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이 내려지고...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

도승지는 희빈 장씨를 강제로 끌어내지만 희빈장씨는 사약소반을 뒤엎으면서

세자를 죽이고 오지 않으면 혼자서는 죽지 않겠노라며 심하게 거부한다.

이 소식에 심하게 격노하는 숙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부사 남구만까지 향저로 돌아간다는 말에 매우 미편해한다.

한편, 희빈 장씨를 살리기 위해 세를 결집하던 역관들은 남구만을 직접 찾아가

향저로 돌아가지 말고 오히려 자신들과 함께 입궐하여 희빈을 살려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역관들의 움직임은 빨라지고 드디어 영부사 남구만을 앞세워 대궐로
몰려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관들의 국기를 뒤흔드는 이 사건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만 살 뿐,

숙종은 당장 난동에 나선 역관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하고 남구만
역시 사저에 연금시켜버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는데...

그러나 희빈 장씨가 이번에도 사약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직접 취선당으로 나아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라도 입을 벌여 사약을 마시게 하라 명하는데...





[100회] 세자의 품에서 사사되는 희빈장씨!




결국 자신의 불충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자의 품에서 사사되는 희빈장씨!

숙종은 불꺼진 대전에 홀로 앉아 희빈 장씨에 대한 회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궁에 들러 세자에게 종사의 백년대계와 세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천명을 받든 것이니 앞으로 보위를 이어갈 왕재로서의 위엄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희빈의 사사이후 장희재등 희빈 일당들의 여죄가 추궁되고 혹독한
문초가 행해진다.

김태윤의 자복으로 장희재의 죄상도 낱낱이 밝혀지고 결국 장희재는
백성들의 야유와 욕설 속에서 참수되기에 이르러 한때를 풍미했던 장씨
일가의 세도는 이렇게 끝을 맺게 되는데...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12 22:31

 

 

 

[41회] 장소의의 가회임의 논란은 계속되고...




희재의 소식을 들은 소의는 노발대발하지만
희재를 불러 대궐의 법도를 따르라고 충고한다.

동평군역시 희재를 불러 다시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고...

한편 계속해서 소의의 회임을 의심하던 귀인은 취선당의 어의까지 불러
확인해보지만 별소득이 없자 또 다른 계책을 꾸미기 시작한다.

대궐 안은 순식간에 소의의 회임이 가짜라는 소문이 돌기시작하고
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 일은 곧 소의에게 전해지고 소의는 숙종에게 고해바치지만 숙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몸조리만 잘하라는 당부를 내린다.

하지만 가회임의 논란은 계속해서 커져나가고 결국 참다 못한 숙종은
두경에게 보검을 가져오라 명하고는 취선당으로 어의를 불러 몸소
가회임 문제를 판결하고자 하는데...


[ 제 41회 용어풀이 ]

사속지망 : 왕자를 생산하여 왕실의 대를 이을 것을 바라는 마음

양사 : 사헌부와 사간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옥당 : 왕의 자문을 하는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



 


[42회] 장렬왕후의 별세와 장소의의 왕자생산...




희재와의 마찰로 대왕대비는 쓰러지고 대궐은
다시 긴장감이 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차마 숙종과 중전의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지 못하며 속으로만 노여워하고...

옥정의 출산이 가까워지지만 대왕대비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간다.

결국 65년의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자의대비 조씨는 숙종이 후사를 잇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숙종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데...

자의대비가 죽은 뒤 소의 장씨의 발호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고
숙안공주등 서인세력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으며 제발 소의의
후사가 왕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취선당의 산통이 시작되고 숙종은 왕자이기를 바라며 기대감에 부풀어오른다.

중전 인현왕후 역시 산실청의 일을 지휘하는 등 소의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대궐의 모든 귀와 눈이 취선당으로 모아진다.

드디어 취선당에서 소의의 비명소리와 함께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 제 42회 용어풀이 ]

권초지례 : 왕자가 태어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





[43회]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원자정호를 결심하고...




숙종은 왕자를 생산한 소의가 대견하기만 하고
서인들은 앞으로 몰고 올 환국을 예견하며 숙종의 의도와 남인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사가의 어미를 뵙고싶다는 소의에 청에 숙종은 흔쾌히 허락하고

윤씨는 급히 차비를 차리고 궁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궁궐대문앞에서 명패가 없다는 이유로 입궐이 거부당해

실랑이를 벌이다 지평 이익수에 의해 가마가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의 파문은 점점 번져나가고 마침내 숙종은 이익수를 당장
잡아들여 문초하라 명한다.

서인진영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고 숙종을 찾아가 원칙대로 처리한
이익수를 구명하려하지만 숙종은 권도를 내세워 그들을 압도한다.
뿐만아니라 앞으로 패거리를 지어 왕실을 능멸하는 처사를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라며 경고한다.

원자가 태어난지 두달 후,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드디어 원자 정호를
결심하자 서인들은 다시 반발하며 나서지만 우암 송시열은 서인가의 몰락을 예견한다.

조정에 부는 뜨거운 바람. 원자정호를 둘러싼 숙종과 훈구대신들과의
극한 대결은 피바람을 예고하는데...





[44회]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드디어 이를 둘러싸고 서인대신들과 숙종의 극한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격렬히 반대하며 나서는 서인들을 향해 숙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강행할 것임을 천명한다.

뿐만 아니라 소의 장씨를 내명부의 최고 품계인 희빈으로 봉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희빈으로 봉해진 옥정이 문후를 들자 인현왕후는 원자를 한번 안아보고자 하나

기세가 등등한 희빈은 원자가 신열이 있다며 원자를 가까이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치욕스런 언사를 날린다.

또 다시 좌절감에 치를 떠는 인현왕후.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자정호와 희빈 등극으로 서인가의 최후가 다가왔다고 예견한 송시열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원자정호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문을 써내려간다.

불같이 화가난 숙종, 하지만 그 상대가 우암이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드디어 동평군이 나서고 동평군은 송시열에게 맞불을 놓듯이

옥정에게 서찰을 띄워 송시열의 상소를 문제삼을 것을 간하게 하고

삼사 언관들까지 회유하여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계략을 꾸민다.

차라리 자신과 원자를 죽여달라는 희빈 장씨.

그리고 때마침 숙종에게 나아와 송시열의 상소가 부당하다고 아뢰는 삼사 언관들.

숙종은 드디어 송시열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조정은 기사환국의 광풍으로 빠져드는데...





[45회]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상소는 기사환국이라는 일대 격변을 불러일으킨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대신들의 파직과 귀향이 잇따르고

숙종은 그 빈자리를 경신환국으로 출척되었던 남인들로 채운다.

귀인은 할아버지의 파직을 따지러 희빈에게 나아오지만

이미 자기보다 높은 품계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중전 또한 기고만장한 희빈을 찾아가 타이르려 하지만

오히려 어서 왕자나 생산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쓰러지는데....

동평군과 희빈의 의지에 따라 요직에 등용된 남인들은 앞을 다퉈

우암 송시열 등을 사사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던가....

 

고심 끝에 숙종은 송시열을 제외한 김수항, 김익훈등에게 사약과 극형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궐안은 일대 광풍이 휘몰아치는데......

한편 자애롭기 그지없는 인현왕후는 그래도 국모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원자에게 예쁜 옷을 선물한다.

 

그런데 그 옷을 입은 원자가 갑자기 경기를 시작하며 울기 시작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희빈은
옷을 살펴보다 바늘 두 개를 발견하는데.....


[ 제 45회 용어풀이 ]

경신 대출척 : 숙종 6년,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몰아낸 사건

상서 : 중국 전통산문의 근원으로써 서경을 달리 부르는 말





[46회] 희빈의 계략으로 귀인과 중전은 궁지로 몰리고...




중전이 선물한 옷을 전달한 침방무수리에 대한 매질이 시작되고

황급히 달려온 중전은 다 자기 잘못이라며 용서를 빌지만

희빈은 바늘을 넣으라 사주한 자를 밝혀내야한다며 계속 매질을 한다.

결국 이 일을 숙종까지 알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계속 희빈과 맞서던 인현왕후는 안되겠다 싶어 숙종에게 달려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니 자신을 벌하고 이 일을 마무리해달라고 요청한다.
숙종은 난감해하고....

이 일은 이 선에서 마무리되나 남인들은 이 사건은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여

원자를 해하려한 것이므로 내칠 명분이 충분하다며 드디어 중전 폐위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희빈 역시 요즈음 대비 명성왕후가 중전의 꿈에 현몽한다는 소릴 들었다며 숙종에게 고하자

숙종은 인현을 불러 이는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기 때문이 아니냐며 다그치기 시작한다.
인현왕후는 더욱더 궁지로 몰리고....

이 와중에 희빈측 궁녀들이 대궐일각의 땅을 파는 것을 목격한 귀인 측은

분명히 중전을 음해 하려는 희빈의 모사라며 그 증거를 찾고자 하나

땅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숙종에게 발각되어
희빈을 저주하려했다는 죄목으로 궐 밖으로 내쳐지는데...



 


[47회]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희빈 장씨는 떠나는 귀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운다.

중전 인현왕후는 다음차례는 자기라는 것을 예감하는데....

한편 중전 인현왕후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희빈은 숙종에게 청하여
인현왕후에게 어떠한 하례도 올지 못하게 하고 단자도, 음식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중전의 위치는 더욱 초라해지고...

하지만 인현의 어머니 부부인 조씨는 명을 거역하고 조금의 음식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중궁전에 음식상이 차려진 모습을
숙종이 보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진노하며 중전을 나무란다.

마침내 폐비의 일을 서두르라는 숙종의 어명이 떨어진다.

남인들조차 놀라 반대의 정청을 초래하는 이 일은 일단 우암 송시열을
사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이를 참다못한 박태보와 오두인의 상소로 대궐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는데...


[ 제 47회 용어풀이 ]

폐출절목 : 폐출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상세히 나열한 문서





[48회] 인현왕후는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결국 박태보와 오두인은 잡혀 들어오고 숙종의 친국이 시작된다.

모진 고문에도 그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숙종과 맞서지만 숙종은 상소의 배후는

반드시 인현의 오빠인 민진후라며 그 화살을 중전 인현왕후에게로 돌리는데...

놀란 인현왕후는 오라버니의 구명을 위해 숙종을 만나려 하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미움만 살뿐이다.

반면 중전 자리에 대한 희빈 장씨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숙종은 훈구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현왕후 폐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옥책과 장복을 불태우기에 이르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어명에 중궁전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결국
인현왕후는 가마를 탄 채 한 많은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떠나는데...





[49회]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폐비된 인현의 가마가 도성거리로 나서자 수많은 유생들과 백성들은

가마를 막아서고 통곡을 하며 슬퍼한다.

안국동 사가에 도착한 인현은 어머니와 회한의 재회를 하고

자신은 죄인이므로 황량하게 허물어져 가는 별채에 머물겠노라 한다.

다시 한번 집안은 울음바다를 이루고...

한편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대해 괴로워하지만
중전자리에 오른다는 희망에 부푼 장희빈은 중궁전에 들러 인현이 쓰던
물품들을 모두 갖다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라 하고 또 인현의 사가에
사람을 보내 거동을 소상히 살피라고 명하기까지 하는 등 점점 더 위세등등해진다.

그러나 역사상 역관의 자식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는데...


[ 제 49회 용어풀이 ]

역관 :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로서 중인신분

구운몽 :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사실을 풍자한 소설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0회]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장희빈을 중전자리에 올리기 위한 장희재의 노력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 역관(통역관, 중인)들이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태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호기라 생각한 희재는 뒷돈을 대는 등 그들을 부추기고

마침내 사건이 확대되어 숙종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고심 끝에 숙종은 대신들 앞에서 역관출신인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
올려 역관들의 분노를 다스리겠노라 선포한다.

반대하던 대신들도 숙종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할 수 없고...

국상중이라 정식 책비례를 치르지 않았지만 엄연한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그녀는 장희재를 내금위장으로 승진시키고 모친 윤씨에게 작호를 내리는 등

그동안 쌓였던 한들은 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수리 최씨는

분노의 이를 갈며 인현왕후의 복위에 온 몸을 던지겠노라 결심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도 애써 담담해 하는 인현왕후!

그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식사도 잡곡으로 하는 등 폐서인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고,

뿐만 아니라 숙종을 위한 치성도 매일 빠지지 않고 드린다.

그러던 중 복면한 사내들이 폐비 인현왕후 거처 담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고, 순간 인현왕후는 위기를 느끼는데...

 

 

[ 제 50회 용어풀이 ]

부운계 :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 모여서 만든 비밀조직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1회]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하늘을 치를 듯 하고

옥정의 사가는 벼슬아치들이 보내는 봉물들로 넘쳐난다.

반면 폐비 민씨의 집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민진후와 어머니 조씨는
출입조차 제한 당한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민진후는 홍치상과 만나 인현을 복위시킬 방도를 강구하고

마침내 민심을 얻기 위한 익명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한다.

온 도성에 나붙은 익명서는 또 다른 파란을 예고하고 민심이 돌아설 것이 두려운

옥정과 장희재는 익명서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한편 남인대신들은 이 일을 기회로 서인 잔당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숙종에게 청한다. 숙종 역시 흔쾌히 동의하고 어서
익명서의 주모자를 찾으라 명한다.

걱정이 앞서는 폐비 민씨는 오라버니를 불러 주의로 주지만 쉽게

그 의지를 꺽을 수가 없고...

결국 익명서의 필적을 대조한 끝에 익명서의 주인공이 홍치상으로
밝혀지고 급한 장희재는 왕명도 받지 않은 채 숙안공주의 집으로
처들어가 홍치상을 포박하는데...

 


[ 제 51회 용어풀이 ]

경국대전 : 국정 전 분야에 걸친 교지. 조례 등을 모은 법전

언문 : 한글을 속되게 이르는 말

왕비주청사 : 새 왕비의 책봉을 청나라에 알리기 위한 사신



 


[52회]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아들의 일로 다급해진 숙안공주는 숙종을 찾아와 홍치상 스스로 떳떳하게 자진할

기회를 줄 것이며 이후 더 이상 익명서 사건을 거론하지 말 것을 청한다.

괴로운 숙종은 눈물로서 호소하는 숙안공주의 청을 거절할 수 없고...

결국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이를 지켜본 민진후는 분노의 눈물을 삼킨다.

이 일로 민심은 더욱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고 이를 걱정하던 민장도는
폐비 사사를 거론하지만 아버지 민암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한편 옥정은 익명서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민진후와 민심을 호도하려한
숙안공주를 법도로서 다스려 달라 청하자 곤혹스런 숙종은 옥정에게
원자의 세자 책봉을 확약하며 마음을 달랜다.

이 소식을 들은 장희재와 어머니 윤씨는 기쁘기 그지없지만

왕명을 사칭하며 경거망동하는 장희재를 못마땅해하는 동평군은 희재를 불러
계속 이러다가는 폐비 복위운동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니 조심하라 경고하는데...


[ 제 52회 용어풀이 ]

구운몽 : 주인공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간세상에 유태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고대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을 둘러싼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을 풍자한 소설로 폐비복위의 정당성을 담음

매설 : 소설의 옛말

 



 

 

 

[53회] 숙종은 대신들을 불러 나이 어린 원자를 세자로.




숙종은 대신들을 불러 나이 어린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전례를 살피라고 명하고

대신들이 머뭇거리자 중전 장씨는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며 대신들에게 세자책봉을 서두르라 강요한다.

동평군은 걱정을 뒤로한 채 왕비책봉주청사로 길을 떠나고 김춘택은
중전폐위를 풍자한 서포의 소설 ‘사씨남정기’를 받으러 남해로 내려간다.

마침내 옥정의 진노를 두려워한 대신들은 대소신료들의 연명을 받아
세자책봉을 강력히 주청하고 숙종의 윤허가 내려진다. 숙안공주등은
반대를 하고 나서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렸고...

그러던 중 폐비 민씨가 신열로 앓아 눕자 숙안공주는 군부인 신씨에게
병문안이라도 가 의원을 불러야 하지 않겠냐고 청해 신씨는 어려운
발걸음을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장희재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고
마침내 중전 장씨가 알게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 제 53회 용어풀이 ]

사씨남정기 : 인현왕후 폐위를 풍자한 소설로 폐비복위의 정당성을 담음

곤위 : 왕비의 자리

저위 : 세자의 자리

삼전 : 임금, 왕비, 세자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





[54회] 옥정의 중전 책봉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동평군의 귀국.

그러나 중국 황제를 알현도 못하는 등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자 숙종은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되고 옥정 역시 난감해한다.

반면, 민진후등은 천우신조로 여겨 폐비 복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포에게서 사씨남정기를 받아온 김춘택은 그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아이들을 통해 널리 유포, 옥정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이용하기로 한다.

마침내 이 노래는 대궐에까지 알려지고 위기를 느낀 옥정은

숙종에게 일러 이 노래의 유포를 막아달라 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왕비주청의 실패로 의기소침하던 동평군은 정국의 새바람을 위해
숙종에게 옥정의 정식 책비례를 청한다.

마침내 옥정의 중전 책봉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이는 폐비 복위는
있을 수 없다는 숙종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 제 54회 용어풀이 ]

목자득국 : 이씨가 왕이 된다는 참설로 이성계의 회군과 건국의 큰 힘이 됨

삼전 : 임금, 왕비, 세자의 자리를 상직적으로 일컫는 말



 

 

[55회] 청나라 사신이 올 날이 다가오자...




청나라 사신이 올 날이 다가오자 조정에는 청사신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는 말이 돌아

숙종 역시 걱정이 앞선다.

김춘택은 자근아기의 도움으로 최무수리의 집을 찾게되고 최무수리의
아비에게 최무수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한편 최무수리는 인현왕후 복위를 빌다가 궁녀들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빠지지만

아버지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휴가까지 얻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드디어 사신들이 평양에 도착하고 동평군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급파된다.

사색이 되어 돌아온 동평군.

그들이 조총 3000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지만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현왕후 폐비를 문제삼을 것이 자명하기에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데...


[ 제 55회 용어풀이 ]

가자 :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인 관직을 부여하여 예우해줌을 이르는 말

가선대부 : 종2품인 종친, 의빈, 문무관의 품계

 

 

 

 

 

 

 

[56회]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과의 첫만남을 이루는데...




조총 3000정을 마련할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상납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자 청나라 사신들은 폐비 민씨와의 면담을 강행하고 나선다.

이 소식에 애가 끓는 중전 장씨는 편전 앞에 꿇어앉아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라 청한다.

결국 사신들이 폐비를 알현하는 순간 조총 3000정의 요구를
들어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그들의 발걸음 돌리게 된다.

사신을 만난 민암과 동평군등은 그들에게 조총 3000정을 상납하는 대신
옥정의 중전 책봉을 확약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한때나마 기대에
부풀었던 폐비 민씨와 민진후등은 허탈감에 빠지고...

일단 위기를 모면한 숙종은 나라재정이 어려워 질 것에 대해 한숨이
나오고 모든 재정에 근검절약 하라 명한다.

하지만 중전 장씨의 낭비는 심해가고 결국 내탕금이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중전 장씨는 민암을 불러 당장 내탕금을 채워놓으라 으름장을 놓는데...

한편, 김춘택은 사가로 나온 최무수리를 만나 훗날을 도모하고

중전 장씨의 동태를 잘 살필 것이며 하루빨리 주상의 승은을 입으라 부탁한다.

대감에 부풀어 궐로 돌아오는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과의 첫만남을 이루는데...


[ 제 56회 용어풀이 ]

내탕금 : 왕실에서 사용되는 일상 경비

전정 : 토지에 세를 부과하여 수취하는 제도

군정 :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는 제도

환정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제도

광선부원군 : 숙종의 첫쨰 왕비였던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



 

 

[57회] 사씨남정기는 빠르게 퍼져나가고...

 




단속에도 불구하고 장다리 미나리 노래와 사씨남정기는 빠르게 퍼져나가고

김춘택이 폐비 복위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폐비 복위의 움직임은 점차 무르익어 가는데....

이를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희재는 미칠 노릇이고 동평군과 민장도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중전 장씨의 횡포에 참다못한 숙안공주는 종친들을 선동하여

숙종에게 새로운 후궁을 맞아들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추진하자

이 소식을 들은 남인들은 환국의 전조라며 불안해하고

위기를 직감한 중전 장씨는 숙종에게 그 후궁이 누구냐며 따져 묻는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숙종은 왜 그리 투기하냐며 오히려 중전을
심하게 나무라고는 중궁전을 나가 버린다.

중전의 투기는 더욱더 정도를 더해가고 급기야는 무수리 최씨를 불러
매질하기 시작하는데...


[ 제 57회 용어풀이 ]

내탕금 : 왕실에서 사용되는 일상 경비

부덕 : 부녀자로서 지녀야 할 어질고 너그러운 덕행

부용 : 부녀자의 몸맵시

부언 : 부녀자의 말씨

부공 : 부녀자의 솜씨





[58회] 민심은 더욱더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어지고...





중전장씨의 모진 매질 소리는 대궐에 퍼져나가고
마침내 숙종까지 목격하게 되어 이를 말린다.

국모의 체모를 짓밟는다고 악을 쓰는 중전 장씨에게

숙종은 폐비 민씨처럼 너그러움을 지니라고 충고하지만

중전은 어떻게 폐비와 자신을 비교하냐며 더욱더 이성을 잃게 된다.

숙종은 난감해지고 마음한 쪽에 중전 장씨에 대한 실망감과

폐비 민씨에 대한 아스라한 감정이 살아나는데...

이 소식은 최무수리에 의해 바로 궐밖으로 알려지자 민진후, 김춘택등은

더욱 더 큰 희망을 지니게 되고 김춘택은 최무수리를 통해 사씨남정기를 궐 안으로 들여보낸다.

민심은 더욱더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어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숙종은 미복을 한 채로 궐 밖으로 미행에 나선다.

백성들에게서 직접 사씨남정기의 이야기를 들은 숙종은 충격을 받게되고

중전 장씨의 채근으로 사씨남정기를 압수하여 불에 태우는 장희재의 광분한 행동을 목격하게 되는데...

 

 

 

 

 

[59회] 궐안에도 사씨남정기는 널리 퍼져나가고..





최무수리에 의해 궐안으로 반입된 사씨남정기는
널리 퍼져나가고 중전 장씨에게까지 전해진다.

불같이 격노하는 중전 장씨! 최근에 최무수리가 사가를 들락날락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는 최무수리의 거처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씨남정기는 발견되지 않고...

중전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장희재를 총융사로 봉해줄 것을
숙종에게 청하고 총융사가 된 장희재는 사씨남정기의 진원지를
밝혀내고자 광분하나 민진후나 김춘택이 관여했다는 단서조차 잡지 못한다.

이 와중에 숙종은 지난날 미행 나갔던 사실을 대신들에게 밝히고
앞으로 민심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사사로운 상소라도 모두 보고하라고 한다.

이 사실에 동평군은 환국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며 불안해하는데...

한편, 폐비 민씨의 생신 날에 최무수리는 남몰래 폐비복위를 바라는
정성을 들이고 때마침 미행을 다녀오던 숙종의 눈에 띄게 되는데...


[ 제 59회 용어풀이 ]

총융청 : 서울 외곽인 경기일대의 경비를 위해 사직동에 설치하였던 관청

차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





[60회]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되는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되는 최무수리!

숙종은 최무수리에게서 전해 받은 사씨남정기를 다 읽고는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가자 최무수리와 김춘택은

회심의 미소를 짓게되고 폐비 민씨의 복위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폐비 민씨의 몸은 자꾸만 야위어만 가고...

한편, 한중혁등은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하지만 민장도가
심어놓은 첩자에 의해 장희재에게 이 사실이 노출된다.

 

드디어 서인잔당들을 쓸어버릴 기회를 포착했다며 장희재는 한중혁과 이몽을 잡아들이는데...

민심을 알기 위한 숙종의 미행은 잦아지고 그만큼 무수리 최씨의
거처를 들르는 기회도 많아져 궐안에는 이상한 소문이 번져나간다.

 

바로 무수리 처소에 갓을 쓴 외간남자가 자주 드나든다는 것인데 이에
최무수리를 제거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중전 장씨는 당장 최무수리를 잡아들이라 명한다.

최무수리에 대한 잔혹한 고문이 시작되고 중전 장씨는 어서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치지만

최무수리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숙종은 다급히 국문장으로 달려오고 중전 장씨의 패악함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최무수리를 구하기 위해 숙종은 최무수리의 거처를 오고가던
외간남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중전에게 밝히자 중전 장씨는 아연실색하는데..

 

[ 제 60회 용어풀이 ]

서반직 : 무관의 반열을 이르는 말

동반직 : 문관의 반열을 이르는 말

한성부좌윤 : 서울을 지키며 다스리던 한성부의 종2품 벼슬,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12 22:03

 

 

 

 

[21회] 대비는 물벌로 인하여 쓰러지고 마는데..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비의 물벌을 계속
맞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

드디어 하늘도 감읍하였는지 숙종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모두가 기뻐하는 찰나 주상에게로 가고자 일어서던 대비는 그만 쓰러지고 만다.

숙종의 환후에 이은 대비의 환후로 대궐은 다시 슬픔에 빠져들고
숙종은 성치 않는 몸으로 대비전을 찾아가나 대비는 숙종을 돌려보낸다.
대비의 환후가 깊어지자 세를 잃을까 두려운 김석주의 발걸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하고, 동평군과 민장도등 남인들 역시 훗날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경을 헤매던 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고...

대비의 죽음은 세력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숙종은 김석주 대신에
남구만을 우의정으로 제수하는등 서인들의 물갈이를 시도한다.

한편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옥정을 후궁으로 맞이하라 권하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등 서인들은 반대한다. 서인들이 옥정을 들이기 전에
먼저 새로운 후궁을 격식을 차려 들이기로 결정하자 재입궐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옥정은 이 소식에 분을 내며 동평군에게 달려가는데...





[22회] 후궁이 들여지자 옥정은 분을..




후궁이 들여지자 옥정은 책을 모두 불태우는 등 분을 삭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롭게 들여진 숙의 김씨(조여정) 역시 숙종의 총애를 받는데 실패하자

조부인 김수항은 안절부절못하고 결국 장옥정의 재입궁만이 숙종의 마음을 돌리 수 있다며

조사석을 찾아가 옥정의 재입궁을 추진하라 한다.

숙종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정사를 다시 챙기기 시작하고 북방정책을 재검토하며

그동안 북벌에 적극적이던 남인들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서인들을 견제하게 시작한다.

이 소식에 서인들은 긴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하고...

한편 김수항이 옥정의 재입궁을 추진하자 김석주는 그럴 수 없다며 반발하고

마침내 숙종에게 직접 찾아가 그 부당함을 아뢴다.

 

하지만 이미 숙종의 마음은 김석주를 떠난 상태고 결국 김석주는 쓰러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석주의 죽음은 옥정을 비롯한 남인들에게는 또 다른 호기가 되고
마침내 숙종은 옥정의 재입궁을 명하게 되는데...


[ 제 22회 용어풀이 ]

육진 : 세종때 여진족 내습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지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관리하는곳



 

 

 

[23회] 옥정의 6년만의 재입궁..




 

옥정의 6년만의 재입궁!

서인세력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긴장하고 숙종은 남구만을 좌의정에 제수함과

아울러 남인의 주장인 북방정책에 더욱 신경을 쓰며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옥정과 숙종의 재회. 그동안의 회한을 나누는 자리에서 옥정은
숙종에게 취선당에서 전하를 모시고 싶다고 청하자 숙종은 흔쾌히 허락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인들은 반대입장을 표명하며 들고 일어날 태세이다.

자의대비는 또다시 파란이 일까 걱정이 앞서고...

한편 옥정의 입궐로 세가 높아진 동평은 다음 차례로 희재를 입신시켜 이용하고자

숙정을 희재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희재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취선당 문제로 서인들이 상소를 올리자 분노한 숙종은

도승지를 투옥하고, 이징명을 문외출송시키는 등 파문이 확대되고,

인현은 옥정을 불러 이 문제를 수습하고자한다.

그러나 옥정은 곧 전하가 납실거라 핑계를 대며 거부하는데...


[ 제 23회 용어풀이 ]

 

삼사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

승문원 : 중국과 일본 등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

 

 

 

 

 

 

 

 

[24회] 숙종은 당색타파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서인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어지지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당색타파의 의지를 불태운다.

한편 옥정이 오질 않자 인현은 몸소 행차하여 취선당 문제로 전하께 누를 끼치고 있다며

완곡히 옥정에게 충고를 한다. 죽을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옥정.

그러나 인현이 가자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빙긋이 미소를 짓는데...

한편 세를 모으기 위한 행보를 시작한 동평군!

먼저 좌상 남구만을 찾아가지만 남구만은 그를 만나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오겠노라 돌아서는 동평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차있고..

옥정은 취선당 문제로 전하께 누를 끼쳤으니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며
아예 뜰에다 거적을 깔고 무릎을 꿇는다.

이에 숙종은 옥정의 청을 들어 다른 별당을 지어주기로 결심하자
옥정의 꿍꿍이속이 있다며 대궐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서인들은 첩지도 받지 못한 궁인에게 처소를 지어 주는 것은
부당하다며 들고일어나 공사를 중지하라 요구한다.

이에 고민하던 숙종은 드디어 옥정에게 첩지를 내릴 것을 명하는데...






[25회] 숙원이 된 옥정의 위세는 점점 높아지고..




숙원이 된 장옥정의 위세는 점점 높아지고
숙의김씨는 매우 못마땅해한다.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무안을 당한 최상궁을 불러 위로하고...

한편 옥정을 숙원으로 봉한 일에 대한 서인들의 반대 상소가 잇달아 숙종에게 전해지자

숙종은 노여워하며 상소를 올린 자들을 가차없이 삭탈관직시킨다.

서인들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는 반면 장희재에게는 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동평군도 세를 모으려는 행동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김익훈은 사가에서 머물고 있는
숙안공주(김영란)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데...

드디어 숙안공주는 입궐을 하고 숙원 장씨를 불러 잘잘못을 따진다.

그러나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는 숙원. 숙안공주는 머리끝까지 화가나
회초리까지 들려하나 인현왕후의 만류로 그만둔다.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근신할 것을 명하고...

근신명령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는 옥정. 숙종이 취선당으로 찾아오자
지금 근신중이라 전하를 뫼실 수 없다며 인현왕후의 처소로 달아나는데...

[ 제 25회 용어풀이 ]

체차 : 관리를 다른 사람으로 갈아 바꾸는 것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이르는 말





[26회] 무슨일인가 꾸미는 숙원장씨...

 




숙종이 내린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는등 다시 무슨 일인가 꾸미는 숙원 장씨.

이 일을 알게된 숙의 김씨등은 또다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노비들을 국밥까지 먹여 풀어주었다는 소문이 온 도성 안에 퍼지자
민심은 순식간에 숙원 장씨에게로 넘어간다.

아니 되겠다 싶은 숙안공주는 다시 입궐을 하고...

이러한 민심이 모두 중전의 회임이 늦어져 그렇다고 판단한 서인들은
대책회의에 들어가고 인현왕후는 대비의 신전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한다.

이 소식에 콧방귀를 뀌는 숙원 장씨.

인현왕후의 의관을 불러다가 훗날을 약속해주며

오히려 회임에 안좋은 약재들을 쓰라고 회유한다.

그리고 숙종이 오자 거짓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남인이라 저들이 자신을
홀대를 한다고하자 숙종은 무언가를 결심한다.

드디어 모든 신료들을 편전으로 불러모은 숙종은 조사석을 이조판서에
제수하는등 인사권의 수장을 남인에게 넘긴다.

이 소식에 옥정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대궐에는 조사석과 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통간을 하는 사이라는 괴소문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는데...





[27회] 숙원의 독기는 수그러 들지 않고...




인현왕후는 투기하는 숙원 장씨를 불러 꾸짖고
또한번 그런다면 규율로 엄히 다스릴 것이라며 경고한다.

숙원의 독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조사석과 윤씨의 관계를 알게된 숙안공주(김영란)는 이 일을 잘만 이용한다면

남인들에게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김익훈을 불러 널리 소문을 퍼트려 줄 것을 명한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온 도성으로 퍼져나가고...

후원으로 산책 나간 숙종은 그 곳에서 울고 있는 숙원을 만나 위로하고 취선당으로 침수를 든다.

그리고 소문 때문에 사직을 청하는 조사석을 오히려 우의정으로 제수를 하는 등 정국의 균형을 꾀한다.

그러나 조사석의 우의정 등용은 서인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중전 인현왕후의 처소에 의관들이 들락거리자

혹시 회임을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이에 숙원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전에 내통을 했던 의관을 불러 다그치며 아예 중전의 회임을
막을 방도를 처방하라 이르는데...





[28회] 숙원의 일로 인현은 회초리를 들고...




인현왕후의 회임은 아닌 것으로 판명 나고
숙원은 중전을 위로한다하며 의관이 처방한 대추를 가지고 인현왕후를 찾아간다.

감동하는 인현왕후와 숙종. 그러나 숙원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한편 궁중의 평화를 위해 숙의김씨에게 귀인의 첩지를 내려달라는
인현의 청을 숙종이 따르자 숙원은 분개한다.

숙원이 새로이 임명된 귀인(조여정)에게 문후드는 것도 거부하자

귀인은 가만두지 않겠다며 직접 숙원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갖은 핑계로 끝까지 버티는 숙원.

이 소식이 인현에게 전해지자 인현은 숙원을 불러 심하게 나무라지만
숙원은 마음에도 없는 짓은 할 수 없다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그러자 참다못한 인현은 회초리를 대령하라 명하는데...

남구만의 사직상소로 고뇌하던 숙종은 머리도 식힐 겸 취선당에
들었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무슨 짓이냐며 인현을 꾸짖는다.

그러나 인현 역시 내명부의 일이니 관여하지 말라며 숙종과 맞서자
숙종은 중전의 이런 모습은 투기에 지나지 않느다며 투기 때문에 내쳐진
중전도 있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데...





[29회] 조정의 일로 상심하던 민유중은 결국 쓰러지고...




귀인의 고자질로 숙원을 의심하기 시작한 인현은 숙원의 마음을 떠볼 생각에

숙원을 불러 지난번 그 대추를 같이 먹자고 한다.

순간 긴장하는 숙원. 그러나 숙원은 오히려 그 대추를 감사하다며 먹기 시작한다.

숙원을 의심하던 눈초리들은 일순간 수그러들고..

그러나 취선당으로 돌아온 숙원은 먹었던 대추를 다시 토해내는데....

뒷마무리를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숙원은 희재에게 서찰을 보내 도와달라 청하고,

희재는 마침 출사를 결심한 동평군과 함께 입궐하여 의관을 처치하고자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한편, 종친인 동평의 출사는 서인들의 반발을 사지만 조정의 쇄신을 꿈꾸는 숙종은

동평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하여 서인들의 반발을 일축한다.

조정의 일로 상심하던 민유중은 결국 쓰러지게 되고 이 소식이
인현에게 전해지자 뜻밖의 비보에 인현은 오열하는데...

숙원의 의도대로 의관은 감쪽같이 처치되지만 의관의 행방불명은 또
다른 의혹을 낳기 시작한다.

결국 대왕대비의 귀에까지 이 사실이 전해지고, 화가 난 대왕대비는
숙원의 궁녀인 자경을 당장 잡아들이라 명하는데...

 

[ 제 29회 용어풀이 ]

출사 : 벼슬에 임명되어 관아에 나아감

혜민서 제조 : 의약과 일반 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는 관청의 일을 다스리는 벼슬

 




[30회] 격노한 숙종은 김만중을 유배보내고...




잡혀온 자경이 부인을 하자 몸소 문초에 나선 대왕대비는 더욱 모진 고문을 하고

위기를 느낀 숙원은 대왕대비의 문초는 잘못된 것이라며 멈추어 달라 하지만

숙원의 방자함에 치를 떨던 대왕대비는 숙원을 당장 끌어내라 한다.

끌려 나온 숙원은 오히려 대전뜰에 꿇어앉아 자신의 억울함을 아뢰기 시작한다.

마침 김만중의 상소에 격노한던 숙종은 숙원의 아룀을 듣고 당장
대왕대비의 문초를 멈출 것을 명하자 대왕대비는 그 충격에 쓰러지고 만다.

이 기회에 자신과 숙종을 능멸하는 서인세력의 척결을 결심한 숙원은
계속 대전뜰에서 숙종에게 외치고, 이를 들은 숙종은 모함과 비방을 한
서인들을 당장 잡아들이라 명한다.

상소를 올렸던 김만중이 잡혀오고 숙종의 친국이 시작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김만중.
격노한 숙종을 김만중에게 유배를 명하는데...

숙종의 도리에 어긋나는 정사에 화가난 대왕대비는 숙종의 문후도 거부한채 숙종과 맞선다.

결국 숙종은 취선당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이 소식을 들은 숙원은 다시
취선당의 뜰에 거적을 깔고 앉아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자신을 죽여달라 외치기 시작하는데...



 


[31회] 중전의 회임을위한 대왕대비의 치성이 시작되자...

 




귀인의 궁녀를 친 일로 인현은 숙원을 불러 충고를 하고

또 대추에 관한 소문의 진상을 떠보려 하나 숙원은 오해라며 발뺌을 한다.

사가의 숙안공주 역시 의관의 행방불명이 숙원과 연관이 있다고 단정을
하고 김익훈을 시켜 희재의 뒤를 밟으라고 지시한다.

대왕대비는 숙종을 불러 숙종의 실정에 대해 몇가지 충고를 하고
조사석의 사직을 받아줄 것과 자신이 직접 중전의 회임을 빌테니 전각을 준비해주고

또 대궐문을 중전의 생시에 맞춰 열고 닫아줄 것을 요청한다.

숙종이 이 청을 받아들이고 중전을 위한 대왕대비의 치성이 시작되자
이 소식을 들은 숙원은 다시한번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된다.

바로그때 숙원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지난번 그 대추에서 수은이 검출되었다는 것과 대왕대비의 지시로

그 처방전을 찾으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는 숙원은 자경을 시켜 그 처방전을 먼저 찾아
없애버리라고 지시하는데...

 

 

 

 

 

 

[32회] 숙종은 내의원의 일을 재조사하라 명하고..




윤상궁의 소란으로 숙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소란을 알게된 인현왕후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윤상궁과 자경을 불러 대질심문을 한다.

결국 윤상궁의 거짓으로 결론이 나고 숙원은 다시한번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처방전을 찾아 자신이 직접 보관을 하자

숙원은 그것이 숙종에게 고해지지 않을지 긴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희재는 다시 홍주부를 시켜 대왕대비전의 처방전을 가짜로
바꿔치기를 할 것을 결심하는데.....

희재측의 움직임을 눈치챈 숙안공주는 대왕대비를 찾아가 처방전을
챙긴 대왕대비의 속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하지만 대왕대비는 냉정히
숙안공주를 물린다. 아니되겠다 싶은 숙안공주는 다시 대전으로 들어
숙종에게 자초지종을 다 고하자 숙종은 내의원의 일을 재조사하라 명한다.

이 소식에 숙원은 바로 대전으로 달려가지만 숙종은 조사가 끝날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며 숙원의 청을 거절하는데......





[33회] 인현왕후의 결정적 증거에 궁지로 몰리는 옥정..

 




인현왕후의 결정적 증거에 궁지로 몰리는 옥정.
한사코 발뺌을 해보지만 인현왕후의 노기에 당할 수가 없다.

누명을 쓰느니 차라리 죽여달라는 옥정의 청에 인현은 사약을 대령하라 명한다.

순간 긴장하는 옥정.

수은과 사약중 택일하라는 인현의 말에 옥정은 중기를 태워주면 사약을
마시고 죽겠노라 하자 인현은 옥정의 말에 따른다.

결국 옥정은 사약을 마시게 되나 이는 옥정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인현왕후의 의도된 계략이었는데...

하지만 위기를 넘긴 옥정의 방자함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인현이 보내준 궁녀들을 거절하고

산실청의 권상궁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아 중전보다 먼저 왕자를 낳겠노라 결심한다.

새로 들어온 권상궁은 불사를 열어 회임을 비는 중전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옥정의 말에 그것을 막을 방도가 있다하며 인현의 처소로 향한다.

인현왕후의 기운을 쇠하게 만들기 위해 중궁전의 혈자리에 쇠징을 박는
일은 꾸민 것이다.

그러나 이일 역시 인현의 상궁들에 목격되고 결국 인현왕후는 직접 나서

옥정의 수족들을 문초하기로 결심하는데...

 


[ 제 33회 용어풀이 ]

귀후서 : 관곽을 만들고 장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기관

중기 : 약재의 쓰임을 세세히 기록한 장부



[34회] 인현왕후는 석고대죄를 드리지만..




숙종이 노기를 띄며 인현왕후를 책망했다는 말에
미소를 띄우는 옥정.

취선당 내인들을 끌어내라는 인현왕후의 명까지 거역한채 버틴다.
하지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조금 뒤 순수히 내인들을 내어주는데...

중궁전에서 문초가 시작되고 옥정의 내인들의 비명소리가 궐안에
진동을 하자 드디어 옥정은 인현을 찾아가 모든 것이 중전의 회임을
바라는 의도로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 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전각밑에서는 쇠징이 아니라 회임을 위한 호랑이 발이 발견되고
이 소식은 숙종에게 전해진다.

중전이 후궁들을 투기하여 자꾸 분란만 만든다고 여긴 숙종은 대신들의
반발까지 사고 있는 불사를 당장 그만두라 명하자 인현왕후는 대전뜰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드린다.

모든 것이 옥정의 계략이었다며 분해하는 대왕대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중전의 석고대죄를 거두라 하지만 왕명을 어긴 중전을 용서할 수 없다며 맞선다.

인현왕후의 석고대죄는 계속되고 동평군의 말을 들은 옥정은 인현의 옆에다

거적을 깔고 앉아 중전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함께 석고대죄를 드리기 시작한다.

인현은 모멸감에 부르르 떨지만 오히려 숙종은 옥정의 청을 받아들이는데...



 


[ 제 34회 용어풀이 ]

사은사 : 명나라와 청나라에 파견한 답례 사신

호패 : 16세 이상 남자가 차던 일종의 신분증명서





[35회] 대왕대비는 소의의 방자함에 진노하다가...

 




소의 장씨는 자신이 중전의 회임을 위해 치성을 드린거라 변명하지만 인현은 믿지 못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왕대비는 당장 소의를 데리고 오라 하지만

오히려 소의의 방자함에 진노하다가 쓰러지고 마는데...

한편 숙종이 도목정을 선포하여 서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재편하려
들자 송시열은 민심의 동요를 이유를 들어 반대의지를 천명한다. 하지만
도목정의 일로 온 도성이 술렁거리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숙종은 이조와 병조의 도목정 추진이 미흡하다는 동평군의 말을 듣고
동평군에게 직접 그 소임을 맡긴다.

그리고 또한 숙안공주의 궐 출입을 제한해 달라는 청도 받아들인다.
이렇듯 동평군의 입김이 세어지자 김수항은 숙종에게 독대를 청하여
종친으로서의 행동을 문제삼아 견제를 하려하지만 오히려 숙종의 진노만을 살뿐이다.

소의의 회임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지만 대왕대비 또한 인현에게 직접 탕제를 지어주는 등

정성을 다하고 숙종에게 중궁전에서 침수들 것을 청하기도 한다.

결국 숙종은 취선당을 뒤로하고 대왕대비의 청에 따라 중궁전으로 향하는데...


[ 제 35회 용어풀이 ]

도목정 : 이조와 병조에서 관원의 치적을 조사하여 벼슬을 떼거나 올리는 인사제도

혜민서 제조 : 의약과 일반 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36회] 숙안공주는 동평군과 맞서지만...




숙안의 입궐을 제한한 것은 왕실의 분란을 막기 위한 충정이었다는 동평의 말에

숙안공주는 혜민서 제조자리를 당장 그만두라며 맞서지만 동평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서인세력과 정면승부를 할 것을 결심한다.

동평군은 조사석을 찾아가 서인세력을 척결할 좋은 기회라며 도와달라 청하고

조사석은 숙종을 찾아가 남인측의 준재를 천거하여 등용시킬 것을 청한다.

조사석의 의견은 받아들이는 숙종.

더 이상 동평군을 이리 놔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 송시열은 몸소 입궐하여

혜민서 제조인 동평군을 탄핵하려 하지만 숙종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숙종의 서인세력에 대한 불신만 증폭시키는데...

한편, 대왕대비는 중전과 함께 병문안을 온 숙종이 흐뭇하기만 하다.

하지만 소의는 자신이 정해놓은 합궁날에도 숙종이 올 기미를 안보이자 다급해진다.

급기야는 궁녀들을 시켜 숙종의 동태를 파악하라 이르지만 귀인 김씨는
이제부터 후궁들이 대왕대비의 병구완을 해야한다며 소의를 대왕대비전에 묵어둔다.

동평군의 전횡을 막기 위한 서인들의 최후의 행동을 결심하는 송시열!

전국 유림들에게 사발통문을 띄워 유생들을 동평군의 집앞에 집결시키는데...




 

[37회] 서인들은 숙종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데...




왕명을 거역하는 유생들의 행동에 진노하는 숙종!

계속 왕명으로 다스린다면 더 큰 소요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대신들의
간언에 심사숙고하지만 결국 서인들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패초(왕명으로
신하를 부르는 것)를 보내어 동평군을 입궐시키라 명하는데...

그러나 계속된 유생들과의 대치로 동평군의 입궐이 무산되자 동평은
조사석을 불러 인사가 기록된 봉서를 전달한다.

좌의정에 조사석을 천거하는등 남인들 위주로 된 동평군의 봉서를
전해받은 숙종은 매우 흡족해하고 이를 반대하러 온 서인들 앞에서
공표를 해버린다.

입지가 줄어든 서인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숙종은 왕명에 정면으로
반대를 하던 민진후를 문외출송 시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자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들은 모든 대신들의 사직서를 받아 숙종에게 전달하는 등

숙종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나서 숙종은 일대 위기에 빠지는데...


[ 제 37회 용어풀이 ]


패초 : 승지가 왕명을 받아 신하를 부르는것

문외출송 : 죄 지은 자의 관직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내쫓는 형벌

양사 : 사헌부와 사간헌의 아울러 이르는 말

옥당 : 왕의 자문을 하는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





[38회] 취선당에서 장소의의 회임소식이 들려오는데...




합궁에 성공한 소의 장씨에게 숙종은 별채를 내릴 것을 약속하고

소의의 위세는 나날이 높아간다.

숙종은 서인들의 사직을 반려하고 동평의 인사권을 거두는 등 서인들과
타협점을 찾아가지만 강경한 서인들은 오히려 동평을 사직시킬 기회라
여기고 끝까지 싸움을 걸려한다.

하지만 더 이상 밀어부친다면 결국 피바람을 피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송시열은

이쯤에서 타협을 받아들이자 제안한다.

이로서 정국의 파국은 피하게 되는데...

한편 숙종은 소의 장씨의 사가에 노비 100명과 새집을 내려 소의를 위로하자

장희재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동평군은 발이 묶여있는 자신을 대신하여

일을 해날갈 장희재의 입궐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그런데 잠잠하던 궐안은 다시한번 복권된 이징명의 여총에 관련된 상소로 발칵 뒤집히고

숙종은 다시한번 노여워한다.

또다시 시작된 서인들과의 싸움이 숙종은 힘겹기만 하고...

그런데 그순간 취선당에서 장소의의 회임소식이 들려 오는데...


[ 제 38회 용어풀이 ]

경연 : 임금앞에서 신하들이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

 

 

 

 

 

 

[39회] 장소의의 회임으로 숙종은 연화를 열고...




어의들이 취선당을 오가자 소의 장씨의 회임 소문은 온 궁궐에 파다하게 퍼지고

중전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반면 숙종은 온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채 취선당으로 달려오고 왕자를 바란다는

속마음을 소의에게 털어놓는다. 이 자리에서 소의는 별채 낙성일 날 사가의 가족을

초청해달라고 청하고 숙종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인들은 반발을 해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고 소의 장씨의 위세는

더욱 높아져 이제부터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살려두지않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나 조사석이 연회를 주관하는 소임을 맡자 조사석과 윤씨의 옛 추문에 대한 소문이

다시 번져나가고 민진후는 중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막겠다고 나선다.

드디어 별채 낙성일 날, 연회가 시작되고 모든 대소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숙종은 왕자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의의 가족들을 환대한다.

그런데 숙종이 장희재에게 잔을 따르는 순간,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민진후가 숙종 앞으로 나아와 연회를 중지할 것을 주장하는데...


[ 제 39회 용어풀이 ]

 

사속지망 : 왕자를 생산하여 왕실의 대를 이을 것을 바라는 마음

윤기 : 윤리와 기강을 아울러 이르는 말


 

 

 

 

[40회] 숙종의 국문은 계속되고 대왕대비는 혼절...




민진후에 대한 숙종의 국문은 계속되고
대왕대비의 혼절소식을 들은 숙종은 대왕대비 전으로 달려간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대왕대비는 숙종에게 민진후의 죄를 용서하라 청하지만

숙종은 곧 태어날 왕손을 위협하는 일이라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부부인 조씨가 직접 나서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 하지만 숙종의 저의가 무엇인지

불안한 서인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데... 서인들이 민진후를 포기하고 있을 때

결국 조사석이 직접 나서 숙종에게 간하고 숙종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소의 장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해한다.

그러나 취선당을 찾아온 숙종은 토라져 있는 소의에게 자신의 행동에
숨은 뜻이 있음을 내비치는데...

결국 숙종의 행동은 동평군의 자유로운 취선당 출입과,

아울러 장희재를 입궐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드러나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허탈해한다.

내금위 별장으로 임명된 장희재는 그 부푼 가슴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숙종의 진심을 알게된 소의는 기쁘기 한량없다.

그런데 한껏 뽐을 내며 첫입궐하던 장희재는 자신이 지닌 칼문제로
대전내관 최상앙과 싸우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드라마 줄거리만 보면 정말 흥미진진함..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12 16:47

김혜수 장희빈은 역사적 사실에 굉장히 충실한 사극이다.

 

장희빈 - 김혜수, 숙종 - 전광렬 -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소소한 일은 그냥 드라마로만 보는게 맞을 것 같고,

역사적인 굵직굵직한 사건을 위주로 이해해보자.

 

 

[1회] 숙종의 제1비인 인경왕후의 승하




숙종의 제1비인 인경왕후의 승하!

그러나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김영애)의 반응은 싸늘했다.
숙종(전광렬)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국상조차도 간소하게 지내라 명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대비전을 찾지만 현종이 승하할 때도 인정보다

용상자리에 매달리셨던 분이셨기에 그런 대비에게 숙종은 점차 마음이 멀어진다.

서인인 인경왕후의 죽음은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인들과 서인들에게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역모를 준비하던 남인 허견과 복선군(송용태)의
계획은 급물을 타기 시작하였고, 역모를 눈치챈 서인들은
김석주(전인택)의 밑으로 단결하여, 역모사건을 기화 삼아 남인들을
몰아낼 것을 궁리한다.

한편, 허견의 역모에 뒷돈을 대던 장현의 집에는 조사석의 정부인이
행패를 부리는데 장현의 동생의 첩이자 옥정(김혜수)의 어머니인
윤씨(이보희)와 조사석(백윤식)이 정을 통한 것이 그 이유였다. 장현은
패물로 그녀를 달래 가까스로 돌려보내지만, 윤씨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하려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옥정은 사람이 사람을 은애하는
것이 죽을죄가 되느냐며 윤씨를 부여안고 울음을 삼키는데...

 


[ 제 1회 용어풀이 ]

친경례 (親耕禮) : 임금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친히 토지를 경작하는것

과전 (科田) : 문무양반들에게 특권을 갖도록 한 토지

공남 (貢納) : 지방특산물에 공세를 바치는 것

평시성 (平市瑞) : 시장에서 쓰는 저울과 물가를 통제하고
상도의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아 보는 관청

 

 

 

 

 

 

[2회] 숙종 제 1비의 승하와 복선군의 음모가...

 




허견과 복선군은 허적의 시호연을 역모날로 정하고, 이런 움직임을 비밀리에 보고받은 숙종(전광렬)은 병조판서
김석주(전인택)를 불러들여 역모사건을 처리할 것을 명한다.

한편 옥정(김혜수)은 장현으로부터 역모에 뒷돈을 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만, 오히려 잘한 일이라며 장현의 등을 떠민다.

숙종의 명으로 홀로 허견집으로 향하는 김석주.

그는 곧 복선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역모가 성공하는 듯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역모에 동조한 자들은 모두 잡히게 되고
장현의 집도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결국 옥정의
일가는 집 밖으로 내몰리는데...


[ 제 2회 용어풀이 ]

홍수의 변 : 인조의 손자인 복선군의
형제들이 궁녀와 간통했다는 소문으로 귀양을 간 사건

시호연 : 훌륭한 정승이나 유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이름을 추증하는 것을 축하하는 연회

 

 

 

 

 

 

[3회]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옥정(김혜수)일가.

희재(정성모)는 조사석(백윤식)의 집에 찾아가 큰아버지의 소식을
묻지만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에 힘없이 돌아선다.

복선군의 처리문제로 고심하는 숙종(전광렬)은 의외로 복선군을
죽이라는 자의대비(강부자)의 말에 갈등하기 시작하지만 결국의 왕법의
지엄함을 세우고자 역모에 참가한 남인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명한다.

큰아버지 장현의 죽음을 목격한 옥정은 궁녀가 되는 길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 윤씨(이보희)에게 이야기하는데....

한편 몰락한 남인들과 반대로 귀양가 있던 서인세력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이중 인현(박선영)의 아버지(송재호)도 돌아오게된다.
아버지의 무사함을 기원하던 인현은 이 소식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고...

노름판을 전전하던 희재는 결국 장사패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들 장사패들은 희재를 놓치자 옥정을 노리게 된다.

쫓기는 옥정. 이때 마침 미행을 나온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 제 3회 용어풀이 ]

회맹의 : 피로써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술시 : 저녁 7시부터 밤 9시까지의 동인


 

 

 

[4회]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송시열(이순재)을 중심으로 재집권한 서인들은
국혼을 서두르고 초간, 재간의 절차도 생략한 채 민유중(송재호)의
여식(박선영)을 중전자리에 올릴 것을 거론한다.

격식도 차리지 못한 채 보내야만 했던 인경왕후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숙종(전광렬)은 이 사실을 듣고 종사에는 관심 없이
자신들의 집권에만 눈이 팔린 서인들의 꼬락서니에 분개한다.

한편, 궁녀가 되고자 조사석의 집에 찾아간 옥정(김혜수).

결국 서찰하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동평군(유인촌)의 어머니인
숭선군부인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지만 집밖으로 내쳐지고야 만다.

국혼이야기에 불안한 민유중은 담대할 뿐만 아니라 중전의 자리는 큰
하늘을 만나는 것이라며 성심을 다하겠다는 인현(박선영)의 말에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비(김영애)와의 첫만남에서 인현은 대비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이소식을 접한 자의대비(강부자)는 긴장하게 된다.

동평군 집앞에서 무릎을 꿇은채 버티던 옥정은 만취해 집으로 돌아오던
동평군(유인촌)과 만나자 말자 실신해서 쓰러지게 되는데...


[ 제 4회 용어풀이 ]

전교 :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 일, 또는 그 명령

비변사 : 국방문제와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등 주요 국정 전반을 관장한 문무합의 기구



 

 

[5회] 자의대비와 만나는 옥정...





동평군(유인촌)의 간청으로 옥정은 자의대비(강부자)에게 알려지고

옥정이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라는 말에 자의대비는 내심 기대를 건다.

이에 동평군은 숙정(하유미)을 불러 옥정의 몸단장을 시키고 숙정은
옥정에게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도를 알려준다.

옥정은 하찮은 궁녀로만 살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중전간택날, 인현의 출중함에 명성왕후(김영애)는 기뻐하지만
자의대비는 인현의 여인스럽지 못함에 오히려 옥정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가진다.

가례논의에도 아랑곳 않는 숙종. 대신들의 탁상공론에 격노하고 답답한
마음에 미행을 나가 동평군을 만난다. 동평군은 자신의 속마음을
숙종에게 털어놓게 되고...

드디어 자의대비와 만나는 옥정. 옥정의 영민함에 자의대비는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자의대비는 총명함이 지나친 점이 마음에 걸리고
결국 옥정을 궐밖으로 쫓아내라고 지시하는데....


[ 제 5회 용어풀이 ]

서죽 : 천지 자연의 이법에 비추어 인사의 길흉을 판단하는 점의 한 방법

계사 : 임금에게 사실을 적어 올리던일 또는 그 서면을 일컫는 말

승정원 :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국왕의 비서기관

가례도감 : 국가의 가례행사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

 

 

 

 

[6회] 숙종과 운명적 재회를 하고 승은을 입게 되는데...




어렵게 위기를 모면하고 궁녀가 된 옥정.

새로운 거처에서 시영(곽진영)이라는 궁녀를 만나게 되나 시영의
괴상한 행동에 방밖으로 뛰쳐나온다. 바로 그때, 미행에서 돌아오던
숙종과 운명적 재회를 하게되고...

그 자리에서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 된다. 옥정은 숙종에게 전하의 마음을 달라 간청하고 이 소식에
자의대비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한편 간택에 내정된 인현은 입궁하게 되고 명성왕후는 인현을 만나 빨리

후사를 낼 것을 부탁한다. 인현은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전하의 땅이 되겠노라 다짐하고...

그러나 가례에는 관심이 없는 숙종은 대신들에 대한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인

호포법(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것)시행을 결행하고 서인세력은 발칵 뒤집힌다.

대신들과의 싸움에 지친 숙종은 다시 옥정의 처소로 향하고 기다리고 있던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 제 6회 용어풀이 ]

첩지 : 왕이 내리는 사소한 명령을 일컫는 말

호포 : 호를 단위로 면포나 저포를 징수하는 세제

 


 

 

 

 

[7회]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날...




대비가 기다린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숙종은 계속 옥정과 함께 밤을 지내고

자신의 동곳으로 옥정의 머리까지 손수 올려주기까지 한다.

결국 대비도 숙종이 옥정과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숙종에게
격노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옥정의 뒷조사를 하라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숙종의 회한은 깊어만가고 옥정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날.

조현례때 대비는 인현왕후에게 조정이 편하기 위해서는 중전의 몸에서 후사가

빨리 나야한다는 것을 명심시키고, 자의대비 역시 옥정을 불러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회임을 해야한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가례의 초야. 중전이 된 인현왕후는 중궁전에서 숙종을 기다리고 옥정 역시

숙종이 오기만을 목놓아 기다린다. 하지만 숙종의 발걸음은 인현왕후에게로 향하고...


[ 제 7회 용어풀이 ]

호포 : 양반, 상민의 구별없이 호를 기준으로 군포를 평등하게 징수하는 세제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사사로운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친영 : 가례때 신랑이 신부를 맞아 데려오는 육례의 마지막 예식

조현례 : 새로 간택된 왕비나 세자빈이 가례를 지낸 뒤 처음으로 웃어른을 뵙는 의식

 

선온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과 음식



 

 


 

[8회] 대비는 옥정을 쫓아내라 명하는데...

 





숙종이 인현왕후쪽으로 들었다는 말에 옥정은 크게 낙담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사내로서 약속한 궁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인현왕후는 그렇게 숙종을 보내주고 숙종은 옥정에게 가 첩지를 내릴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옥정은 매일밤 숙종과 함께 하고싶다며 응석을 부린다. 숙종은 그런 옥정이 더욱더 좋아지고...

인현왕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 사실은 대궐전체로 소문이 퍼져나가

결국 대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한편 새로들어온 중전에게 하례를 올리는 날,

옥정은 아직 첩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되어 기분이 나쁘고,

기어코 인현을 찾아가 인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예에 맞지 않는 일이니 옥정의 인사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자신의 고집을 꺽지 못하는 옥정은 중궁전 밖에서 버티고

이 사실을 안 대비는 중궁전으로 달려와 옥정을 쫓아내라 명하는데...


[ 제 8회 용어풀이 ]

호포 : 양반, 상민의 구별없이 호를 기준으로 군포를 평등하게 징수하는 세제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사사로운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통칭하는 말




[9회] 중전과의 합궁을 약속하는
숙종은...





끌려나가는 옥정.

마침 옥정의 처소에서 옥정을 기다리던 숙종은 옥정의 처참한 모습에
화가나 인현왕후를 심하게 나무란다. 숙종은 눈물흘리는 옥정이  애처롭기만 하고....

회임에 대한 옥정의 의지는 더 강해지고 이 소식에 대비는 격노하며
옥정을 막을 방도를 찾고자 고심한다.

숙종이 옥정의 처소에서 나오질 않자 서인들은 초조해지고 송시열은
호포법을 받아들이는 대신 중전과의 합궁을 할 것을 숙종에게 제안한다.

숙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인현왕후와의 합방을 하러 중궁전으로 향한다.


이 소식에 토라지는 옥정. 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옥정의 첩지를
내려 주겠노라 고백하고 다시 옥정에게로 향하는데...


[ 제 9회 용어풀이 ]

내의원 :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기관

관상감 : 천문, 지리, 책력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


 


 

 

[10회] 대비는 옥정을 궐 밖으로 내쫓으려고...




 

숙종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옥정이 어머니 생각에 눈물짓자

숙종은 어머니 윤씨를 불러들여 옥정과 만나게 해준다.

모녀의 정을 나누는 두사람을 바라보는 숙종의 얼굴에는 미소가 쓸쓸히 지어지고...

날로 방자해지는 옥정의 행실이 마음에 걸리는 대비는 마침내 옥정을
모함해 쫓아낼 방도를 찾아낸다.

한편 옥정이 중궁전을 찾아 인현왕후에게 하례를 드리는 자리에서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부디 왕자를 생산하여 주상을 기쁘게 하라고 해
옥정을 놀라게 한다.

한편 숙종이 내린 첩지는 반려되었으나 대신 대비에 의해 새로운
처소가 내려졌으나 자의대비는 대비의 속셈이 무엇인지 불안해한다.

드디어 대비가 결심한 날이 다가오고 숙종이 궐을 비운 능행날을 틈타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김익훈의 수하들은 옥정처소로 쳐들어가 옥정을
궐밖으로 쫓아내려하는데...

 

 

 

 

 

 

 

 

[11회] 옥정은 궁궐에서 쫓겨나 위기의 순간에...

 




옥정은 정체 모를 장정들에 의해 깊은 산골로
끌려가고 동평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희재는 김익훈의 수하를
문초해 옥정이 끌려간 곳을 알아내 뒤쫓아간다.

대비의 음모에 분을 못 참던 자의대비가 능행을 다녀온 숙종을 찾아가
옥정의 일을 고하자, 격분한 숙종은 대비를 찾아가 왜 이리하시는지 따져 묻는다.

그리고 두경을 시켜 옥정의 행적을 알라보라 명하고...

한편 옥정은 위기의 순간에 희재에 의해 구해져 한적한 산사에
머무르게 되지만 대궐에서 쫓겨나 전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참지
못하고 그만 목을 매게 되는데...


[ 제 11회 용어풀이 ]

전설사 : 장막, 병풍 등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


 

 

 

[12회] 옥정에 대한 숙종의 그리움은 더해가고...

 


 



옥정에 대한 숙종의 그리움은 더해가고 점점더
인현왕후에게서 멀어지게 되자 대비는 난감해 한다.

숙종이 계속해서 옥정을 찾자 안되겠다고 판단한 대비는 김석주를 시켜
옥정을 찾아내 아예 한양 밖으로 내치라 명하고...

한편, 대왕대비는 인현왕후가 문후를 오자 받을 수 없다며 밖으로
내치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비는 노발대발하며 대왕대비전으로
달려오지만 능수 능란히 대처하는 대왕대비에게 오히려 심한 모멸만
당하고 물러선다.

옥정은 산사까지 찾아온 김익훈 무리에게서 간신히 도망치게되고
동평군은 숙종의 마음이 옥정에게 있다는 확신에 옥정을 다시 입궐시킬
것을 도모하고 옥정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온다.

그런데 때마침 동평군집에서 연회가 열리고 숙종은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미행을 나오게 된다.

뒤늦게 숙종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옥정은 기뻐하며
숙종에게로 달려가는데...


[ 제 12회 용어풀이 ]

잠화 : 숨어있는 돈, 즉 정치 비자금을 이르는 말




 

[13회] 숙종은 인현왕후의 정성에 감동을 받아, 하룻밤을....




동평군 집으로 옮겨온 옥정은 기운을 차리고

동평군은 방 밖에는 얼씬도 말고 숨어있으라고 명한다.

 

하지만 숙종이 동평군의 집에 와 있다는 신씨의 말에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이미 숙종은 가버린 후여서 실망이 크고...

한편 숙종은 옥정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가고 인현왕후는 이런 숙종을 묵묵히 기다린다.

대비는 이런 답답한 인현이 못마땅하기만 하고...

인현왕후는 숙종의 불면을 걱정한 나머지 매일 밤 대전으로 가 몸소
숙종의 잠자리를 준비하고 마침 숙종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다.

인현왕후의 이러한 지극정성에 감동 받는 숙종은 그냥 갈려고 하는
인현왕후를 자신의 침소로 불러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 일로 대궐에는 큰 연회가 열리고 대비는 숙종의 마음을 잡은 인현왕후를 경하한다.

이 사실은 마침내 동평군에게까지 알려지고 고심하던 동평군은 옥정을
불러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명하는데...





[14회] 숙종은 옥정과의 감격의 재회를 하고...





옥정은 전하를 만나게 해달라고 동평군에게 매달리고

동평군은 숙종의 진심이 옥정에게 있음을 알고는 옥정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한다.

마침내 동평군은 옥정이 동평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대왕대비는 숙종에게 다시 말한다.

숙종은 옥정의 소식에 눈물을 떨구고...

숙종은 인현왕후와의 잠자리에서도 옥정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고
결국 새벽에 중궁전을 나가고 만다. 숙종의 빈자리가 더욱 서럽기 만한
인현왕후는 씁쓸히 미소짓기만 하고...

드디어 숙종은 동평군의 집으로 향하고 옥정과 감격의 재회를 한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옥정의 무고함을 밝혀주겠노라 약속을 한다.

한편 옥정의 일을 소문내기로 작정한 동평군은 희재를 시켜 옥정의 회임에 쓸
약재를 사 모으라고 지시하고 마침 인현의 약재를 사려하던 서인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서인들은 바짝 긴장하는데...


 

 

 

 

[15회]옥정의 회임사실이 알려지자...




숙종이 계속 옥정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대비는

인현왕후를 불러 심하게 나무라고, 숙종에게도 찾아가

옥정만은 아니 된다며 노발대발한다.

하지만 숙종은 오히려 옥정의 무죄를 밝히겠노라며 직접 나서

옥정의 일과 관련된 자들을 문초하기 시작하고...

결국 숙종은 대비전의 최상궁이 이일에 연루된 사실을 밝혀내고
대비전을 압박하자 대비는 수라상도 거른 채 숙종과 맞선다. 걱정이
앞서는 인현왕후는 몸소 미음을 쑤어 대비전에 가지만 대비는 인현을
만나주지도 않고...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재조사에 대한 희망에 가득한 옥정에게 드디어
회임의 징후가 보이고 동평은 소문을 낼 요량으로 의원을 불러들인다.

결국 숙종도 옥정의 회임 사실을 알게되어 기뻐하고 또다시 옥정을 만나러

미행을 나선다. 이 일이 대비전에 알려지자 대비가 혼절하는 등 서인세력들은

발칵 뒤집히고 인현왕후는 자신도 모르게 질투와 분노가 끌어 오르는데...





[16회] 숙종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다고...

 




숙종은 대비를 찾아가 옥정의 재입궐을 윤허해줄 것을 간청하나

대비는 죽어도 옥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한다.

한편 숙종이 옥정에게 왕실물품을 보내자 급해진 서인세력은 중전의 회임을 서두른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첩지를 내리기로 결심하고 몸소 대비를
찾아가 그것을 알린다. 그러나 역시 대비의 반응은 싸늘하고...

한편 동평군은 조사석을 은밀히 만나 서인세력의 견제와 남인세력의
부활을 논의하며 뜻을 같이 해달라고 요청한다.

옥정의 왕자출산을 바라는 마음에 대왕대비와 숙종이 각각 사조룡과
금도끼를 보내자 대비는 안되겠다 싶어 김석주를 급히 부른다.

김석주는 옥정을 처결하고자 동평의 집으로 자객을 보내고 옥정은
또다시 큰 위험에 빠지는데...





[17회] 옥정은 반대세력들에게 복수를...




분노가 극에 달한 숙종은 금부를 동원하여
김익훈의 수하들을 문초하고, 대왕대비는 대비를 찾아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노라 하지만 대비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사건의 배후를 캐고자 희재는 깍정이 패를 동원하고 숙종 역시
김석주를 불러 직접 재조사하라 명한다.

다급해진 김석주는 김익훈의 집을 찾아가고 미행하던 두경은 배후가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숙종에게 고한다.

숙종은 대비가 이 일의 실질적인 배후임을 직감하고 대비를 찾아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노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다.

안되겠다 싶은 대비는 결국 이일에 서인대신들을 동원시킬 것을
결심하고 서인들은 대전밖에 부복하여 숙종에게 옥정의 재입궁을
거둬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숙종은 물러나지 않고 대신들과 맞서고...

한편 정신을 차린 옥정은 재입궁에 기대를 걸고, 만약 재입궁하게
된다면 자신의 반대세력들에 복수할 것을 결심하는데...





[18회] 옥정의 재입궐이 힘들어지는 찰나에...

 




희재가 땅문서의 정체를 밝히려 들자 김익훈과
김석주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한편, 숙종은 옥정의 재입궐을 미루는 대신 조정을 물갈이 하고자
별시(임시과거)를 시행할 것을 지시하자 서인들은 숙종의 의중을 간파하고자 분주해진다.

그런데 별시중에 옥정을 해하려한자의 신원을 밝힌 익명서가 발견되어
대궐은 발칵 뒤집히고 결국 숙종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대노한 숙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자객을 색출하라 명하고 조사석을 불러
이 일을 재조사하라 은밀히 이른다.

이 소식에 옥정측은 재입궐이 앞당겨질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오르지만
김익훈은 엉뚱한 인물을 잡아들여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옥정의 재입궐이 점점 힘들어지는 찰나 땅문서가 서인측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숙종은 서인세력의 정치자금 조달책인
칠패도주의 집을 샅샅이 뒤지라고 명하는데...

 


[ 제 18회 용어풀이 ]

별시 : 필요한 인재를 등용시키기 위해 수시로 시행되는 과거제도

문회출송 : 죄 지은 자의 관직을 빼았고 한양 밖으로 내쫓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





[19회] 숙종의 병이 두창으로 밝혀지고...




숙종의 병은 두창(천연두)으로 밝혀지고 사경을 헤매기 시작해

모두들 바짝 긴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동평군과 옥정의 미래는 불투명해지기만 하고 서인들은

그 후계까지 논의하며 동평군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이를 감지한 동평군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는데...

한편 대비는 전염의 위험에도 아랑곳 않고 숙종을 찾아가 극진히 간호한다.

그러나 숙종의 병은 차도가 없고 옥정을 찾으며 점점 더 사경을 헤매자

대비는 사가의 무당까지 불러 숙종을 깨어나게 하고자  한다.

이 소문은 도성 밖으로 퍼져나가고 이 소식을 들은 옥정은 자기가 직접
궁에 들어가 전하를 뵈어야 한다며 숙정에게 요청을 한다.

마침 사가의 무당과 숙정이 연결이 되고 옥정의 입궐에 희망이 보이는데...


[ 제 19회 용어풀이 ]

두창 : 오늘날의 천연두로, 열이 나고 온몸에 발진이 생기는 전염병

호구별성 : 천연두를 집집마다 가져다 주어 앓게 한다는 여신을 이르는 말





[20회] 무당의 가마에 숨어 입궐을 하는 옥정...




무당의 가마에 숨어 입궐에 성공하는 옥정.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동평군은 숙정을 심하게 나무라고 대왕대비 역시
옥정을 불러 왜이리 경거망동하느냐며 대노한다.

의녀로 변장을 하고 숙종에게로 향하는 옥정. 때마침 숙종을 간호 중이던 인현왕후와 마주치는데...

한편 들여진 무당은 숙종의 국상을 피하기 어려우며 숙종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비가 직접 칠성단을 지어 치성를 들여야 한다고 하자 대비는 죽기를 결심하고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 일이 서인들에 알려지자 법도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일어난다.

칠성단 공사로 인한 파장은 커져만 가고 대신들과 유생들이 들고
일어서지만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대비의 의지는 꺽을 수 없다.

대비는 죽음까지 결심하며 300번의 얼음물을 맞는 물벌까지 하기로 마음먹는데...


[ 제 20회 용어풀이 ]

소격서 : 도교의 일월성신을 구상화하여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 보는 관청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5.12 02:20

 

비슷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내 의견과 거의 일치하는 글이 있어서 가져와 봄.

 

 

기사 원본을 보려면 제목을 클릭~.

 

 

장희빈만 악녀?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사극에서 인자한 인물로 그려진 인현왕후, 우리가 잘 몰랐던 '두 얼굴'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인현왕후(홍수현 분)가 중궁전에 입성하면서 장옥정(김태희 분)의 악녀 본색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흥행 포인트'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가 본격화됨에 따라 시청률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장희빈을 그린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희생과 인고'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인현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인내하고 받아들였던 후덕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전의 자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 있는 여성이었을까.

'엘리트 코스' 밟았던 인현왕후의 자존심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홍수현.
ⓒ 키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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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당시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서인세력 중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던 여흥 민씨 집안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으며 외척으로는 우암 송시열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숙종의 계비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왕비로 적극 추천한 이는 송시열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였다. 한 마디로 집권세력과 왕실세력의 비호를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렇듯 날 때부터 최고의 양갓집 규수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지존의 짝인 왕비가 되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인현왕후 특유의 자신감은 궁 밖에 쫓겨나 있던 장희빈의 환궁 과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장희빈은 명성왕후에게 '남인의 간자'로 찍혀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숙종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한 마디로 남편의 첩을 제 손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인현왕후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남인세력이었던 시할머니 장렬왕후 조씨가 장희빈의 환궁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 셋째는 인현왕후 스스로 장희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장희빈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로서 그것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숙종을 거쳐 가는 여러 여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두고두고 신경 쓸 '라이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안일한 생각과 달리 장희빈은 훨씬 영리했고 정치적이었으며 숙종의 사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 지는 장희빈의 위세는 인현왕후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왼쪽부터)김태희(장희빈 역)-한승연(최숙빈 역)-홍수현(인현왕후 역)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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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예의범절이 생활화된 데다가 왕비의 체면과 체통을 중시했던 인현왕후는 대놓고 장희빈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다과를 함께 하는 등 후덕한 조강지처의 품격을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인현왕후 또한 중전 이전에 여자이니 어찌 투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장희빈이 매우 교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장희빈으로선 아무리 윗전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것이 보통 고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너무 지나치자 서인의 거목 중 한 명인 김수항의 증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장희빈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재밌는 것은 김수항의 증손녀는 명문세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숙원이었던 장희빈보다 윗전인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소의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에 책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미천한 출신을 환기시키며 내심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귀인 김씨의 입궁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 진 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직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현왕후는 "장씨는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험담까지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인현왕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 아들인 경종을 낳으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아들도 낳지 못한데다가 체통을 잃고 '투기'까지 한 죄목을 함께 물었다. 몇몇 사료에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죽는 순간까지 장희빈을 궁지로 몰아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라이벌이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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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빼앗긴 인현왕후는 5년간 안국동 본가인 감고당으로 돌아가 폐출 생활을 감내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없었던 이 시기에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손상됐다. 인현왕후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유도 바로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병증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장희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과거의 악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데다가 세자의 친모이기도 한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가만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인현왕후는 승하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는 모두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이 빌미란 것이 바로 장희빈의 저주를 뜻한다. 인현왕후의 이 같은 말은 차후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승하 2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인현왕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린 것과 다른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깍듯한 예의와 품격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애첩에게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인현왕후는 궁인 출신의 장희빈이 자신의 라이벌이란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평생을 장희빈에 대한 콤플렉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숙종과 함께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에 묻혀 있는 인현왕후는 지금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끝끝내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10 03:26

 

그동안의 장희빈들이다. 동영상으로 한 번 비교해보자!

 

 

 

 

 

8대 장희빈이 등장하는 동이, 이병훈 감독이 알려주는 예전 장희빈과의 비교

 

 

 

 

제 5대 장희빈인 전인화 장희빈

 

 

이때의 숙종은 강석우 - 청춘스타였음ㅋㅋㅋㅋㅋ

인현왕후는 박순애 - 후덕한 왕후에 정말 잘 어울림. 

 

 

 

 

제 6대 장희빈인 정선경 장희빈의 오프닝.

 

 

숙종은 임호, 인현왕후는 김원희. 지금과 사뭇 다른 이미지.

 

 

 

장안의 화제였던 정선경 장희빈 사약 받는 장면

 

 

특히 사약 그릇 발로 차서 임호 임금 얼굴에 맞고 떨어지는 장면!!ㅋㅋㅋㅋㅋ

 

 

 

 

 

 

7대 장희빈 김혜수 장희빈과 그 외의 여인들 연기

인현왕후 - 박선영, 숙종 - 전광렬, 숙빈 최씨 - 박예진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송일국씨가 김춘택으로 열연..

너무 잘 생겼어..ㅠㅠ 근데 너무 미워.. ㅠㅠ

 

 

 

 

 

김혜수 장희빈 사약 받는 모습

 

 

 

 

 

 

 

8대 장희빈인 이소연, 동이 속에서 이소연 장희빈 사약받는 장면

 

 

예전에 소리지르고 발악하던 장희빈들에 비하면 너무도 점잖고 기품있다.

이때 숙종 - 지진희, 인현왕후 - 박하선, 숙빈 최씨(동이) - 한효주... ㅋ

 

 

 

 

 

 

마지막으로 김태희 장희빈...

아직 극 초반이라 이렇다 할 장희빈의 성격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이제 본격적인 대결이 펼치질 듯 하여 기대중..

 

 

역대 장희빈들의 동영상을 보니 잠깐인데도 너무 너무 재미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도 높은 시청률로 좋은 결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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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5.08 01:48

 

 

 

요즘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비록 시청률은 삼사 드라마 중 꼴찌이지만 (직장의 신, 구가의 서, 장옥정)

적어도 사극빠인 저한테는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이 드라마 속에서 궁인들의 가벼운 행동거지나, 서인들의 지나친 왕권 도전 등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숙종 이순의 불같은 성정, 냉철한 성격, 결단력있는 성격과 과단성,

그가 장희빈(희빈 장씨, 장옥정)을 사랑할 때의 모습 등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집니다.

 

 

요즘도 게시판, 카페, 블로그 등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문제점 및 시청률이 낮은 이유는 역사 왜곡이라고들 하는데...
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 착한 장희빈, 악녀 인현왕후 때문이라고 말을 하네요.

이 드라마의 문제점은 뚝뚝 끊기는 편집과, 과한 설정, 감없는 연출이지
캐릭터 설정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아, 물론 익숙하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요.


하지만 숙빈 최씨를 무조건적인 선역으로 그렸던 동이에서조차도
장희빈을 이전의 무모한 악역으로 그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 따지면 동이야 말로 역사 왜곡 환타지 동화였음.)

 

 



장옥정(장희빈)을 보는 시선이 이리 달라지게 된 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실록이 국역되면서 점점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장희빈이 악독하게 굴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 어떤 장면에서도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숙종이 마지막에 자진을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만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전의 기록에는 없는 말입니다.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후에 인현왕후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사악한 행동이 없습니다. 적혀진 사실 자체가 없어요.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조차도 제대로 된 물증이 없습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최숙빈이 그리 말했고,

그것을 인현왕후 사후에, 장희빈 자진 어명이 떨어진 후에 조사하는 이상한 조사과정이 나올 뿐입니다.

실록을 찾아서 읽으면 읽어볼수록 장희빈이 좀 불쌍한 구석이 있네?라고 느끼게 될 정도입니다..

 


오히려 현숙하고 조신한 왕후의 이상형인 인현왕후가 우리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름에 놀라게 됩니다.

 

실록 속에는 인현왕후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희빈을 불러서 매질을 했다는 기록과

'숙원 장씨는 숙종이 전생에 죽인 짐승으로 원한을 품고 태어났다'고 폭언(?)을 퍼부은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15년 (1689년 기사) : 왕비 민씨의 간특한 정상을 참지 못하는 비망기

 

 

위키피디아 인현왕후 -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5]

 

 

사악한 장희빈과 불쌍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소설인 '인현왕후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수많은 사극과 드라마에 의해서 확대, 왜곡, 재생산되었습니다.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경종을 고자;;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약을 마실 때 발버둥쳤다는 것조차도 실록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임금의 사랑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자를 낳고도 희빈으로 강등된 것만으로도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인데

사약 먹고 죽은 후에도 (이것도 실록에는 안나옴.) 몇 백년간이나 악녀의 상징으로 기억이 되다니...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쯤 되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는 인현왕후가 투기했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 - 여인이자, 서인정권의 상징으로서 당연하다고 봅니다)

 

장희빈이 착하디 착했는데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예전의 이분법적인 선악구도 속의 인형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  납득 가능한 인간이었음을 믿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새로운 장희빈, 재해석된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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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5.06 03:29

우리가 알고 있는 (사극 속의) 장희빈....

 

 

미모와 요사스러운 색기로 우유부단한 숙종을 홀리어서 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성정이 표독하고, 천성 자체가 사악해서 자신을 다시 불러준

순박하고 지고지순한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저주해서 죽게 만들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대체적으로 사극에서 보여준 모습에 힘입은 바가 큰데..

이 사극 속의 장희빈의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조선시대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인 혹은 서인이 쓴 것으로

짐작되어지는 작가 미상, 연대 미상의 작품, 인현왕후전'에 등장한 장희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 인현왕후전 원문 ------------------- 

 

 

 

"옛 한무제도 무죄한 구익부인을 죽였거니와 이제 장녀는 오형지참(五刑之斬)을 할 것이요. 죄를 속이지 못할 바로되 세자의 정리를 생각해서 감소감형하여 신체를 온전히 하여 한 그릇의 독약을 각별히 신칙하노라."

 

 

궁녀를 명하여 보내시며 전교하사,

 

 

"네 대역부도의 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약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죽을 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임이 네게 영화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로 일시도 머무르지 말라."

 

 

"네 중궁을 모살(謨殺)하고 대역부도함이 천지에 당연하니 반드시 네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梟示)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은으로 경벌을 쓰거늘 갈 수록 태만하여 죄 위에 죄를 짓느뇨?"

 

 

장씨 눈을 독하게 떠 천안(天顔=용안)을 우러러뵈옵고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

 

 

"민씨 내게 원망을 끼치어 형벌로 죽었거늘, 내게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게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의 도리가 아닙니다."

 

 

살기가 자못 등등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사 두 눈을 치켜 뜨시고 소매를 걷으시며 여성하교하여 이르시기를,

 

"천고에 저리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이라."

 

 

장씨, 손으로 궁녀를 치고 몸을 뒤틀며 발악하여 말하기를,

 

"세자와 함께 죽이라. 내 무슨 죄가 있느뇨?"

 

 

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좌우에게,

 

"붙들고 먹이라." 하시니,

 

 

여러 궁녀 황황히 달려들어 팔을 잡고 허리를 안고 먹이려 하나 입을 다물고 뿌리치니

상감께서 내려보시고 더욱 대노하사 분연히 일어나시며,

 

"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 하시니, 여러 궁녀 숟가락 청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

 

 

(중략) 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아니 계시고,

 

"빨리 먹이라." 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

 

경각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섬돌 아래 고꾸라져 유혈이 샘솟듯 하니,

 

 

(중략) 상감께서 그 죽음을 보시고 외전으로 나오시며,

 

"시체를 궁 밖으로 내라." 하시고

 

----------- 이하 생략 -------------------------------

 

 

 

 

한편 실록 속의 장희빈...

 

장옥정, 흔히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자못 아름다웠다"고 짧게 표현됐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인정한 유일한 미인인 만큼

장옥정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일하게 실록에 그 자태가 자못 아름다웠다고 적혀져 있는 여인,

유일하게 낮은 신분의 궁인에서 신분이 급상승한 여인,

유일하게 궁녀 신분으로 쫓겨나서 재입궁한 여인,

유일하게 6년이나 궁 밖에 있으면서도 왕의 마음을 쥐고 있던 여인

유일하게 후궁의 신분으로 궁 안에서 죽은 여인. (대비, 중전, 세자빈 외에는 무조건 출궁해서 죽어야 함.)

 

 

여러가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여인이다.

 

 

실제로 실록 속에는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에 대한 물증이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려고 했다거나, 표독스러웠다거나, 이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약올려서 

인현왕후가 참다 못해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올 뿐인데...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현왕후를 찾아가서 자랑한 거;;;)

 

임금이 실수로 한, 혹은 농담으로 했던 작은 이야기까지도 다 적혀있는 실록에

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때리게까지 만들었던 건방진 행동은 하나도 적혀있지 않는 것일까??

 

 

이쯤 되면.... 

그동안의 장희빈 드라마나 장희빈 영화 속에서의 장희빈 모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혹시 서인들이 승리한 역사에서 남인들에게서조차도 서인을 내리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졌던

천한 신분의 장희빈이 오히려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쓰인 가엾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장희빈 상상화라는데... 서양화가가 그린 것이라서 우리 정서에 좀 안맞는 듯 하다.

실제 장희빈 이렇게 생겼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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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영화랑 드라마2013.05.06 03:01

 

 

시청률은 낮은데 관심도와 비난받는 양은 국민드라마급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지금 장옥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김태희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희가 나오니까 관심도는 높으나
그에 맞는 드라마의 질적인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를 볼수록 저는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이 현상이 이해가 되질 않아요.
보면 볼수록 김태희는 기대보다 너무 너무 잘 해주고 있거든요.
김태희 때문에 안봐야지..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잘 해주고 있는 걸로 보여요. 

 - 팬이 아닌 제 눈에도 -


오히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연출, 대본, 편집이 가장 큰 문제에요.


사극 매니아인 저한테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하나 하나 다 들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 단 몇 가지만 들어도..



1. 임금의 곤룡포..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붉은 옷이라야 하지 않나요?
세자도 아니고.. 옷 색깔은 또 왜 그렇게 하늘색;; 조선시대 임금옷으로 너무 어색합니다.


2.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 설정도 약간 뭐잉; 했는데 오늘도 보이는 마네킹;



3. 하이힐은 실수로 보였다고 하더라도.. 김태희만 너무 짧은 저고리 ㅡㅡ;;



4. 임금에게 일반 존대어를 쓰면 안되는데... 너무 막 대하는 느낌이에요.
ex) 주상이.. ~ 하셨소 (X) ==> 전하께오서 ~ 하시었소... 등 극존칭을 써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임금 앞에서 대신들은 커녕, 낮은 신분의 사람들조차도 너무 조심이 없네요.

원래 임금 앞에는 똑바로 서지도, 얼굴을 들지도 못해야 하지 않나요.

그 모든게 불경죄에 들어가거늘...


5. 명색이 일국의 중전인데..  중전옷이 나인들보다 더 초라한 건 왜일까요?


6. 또한 양반집 규수라는 애들의 말버릇이 너무 교양이 없군요.


감히 대궐에서 중전에게...
"전하는 요즘도 네가지가 없어요?" 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ㅡㅡ;;
주리를 트는 정도가 아니라.. 삼족이 멸함을 당할 정도의 말버릇입니다.

 

400년 전의 궁녀가 "기분 째져~"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도 너무 얼척이 없고요..



6. 임금이 자신을 칭할 때 짐(X) ==> 과인(O)으로 해야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임금이 애정행각을 벌일 때 옆에 궁인들 왜 가만 있나요?
다 뒤로 돌아서야죠.. 이런 디테일이 극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데...


7. 스토리는 왜 그래 중구난방인지.. 장옥정과 이순 위주로 가야할 것 아닌가요.
7회 뒷부분은 재미있긴 재미있었지만.. 30분 넘게 허적의 난.. 어이구..
실제 사건도 아니고 허구의 역모 사건(복선군 말고 허적)으로 30분 간 망나니 씬을 보여주네요.

 

정치 드라마로 가려면 기존의 정치드라마처럼 진지하게 만들든가...
송시열도 등장시키고, 액션도 제대로 시키고,
리얼하게 사극 분위기를 제대로 내든가..

로맨스 사극으로 가려면 정치 분량도 좋지만..  
장옥정 - 이순 사이의 감정 발전을 보여줘야
헤어졌을 때나 장옥정 사약 받을 때 절절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8회는 재미있네요.

아.. 역사랑 상관없이 말입니다.


 


8. 위에서 빼먹고 말 안한 게 몇 가지 있었는데요...
동평군, 치수 등이 옥정이랑 엮이는 건... 도대체 언제..??
지금쯤이면 인물들 관계 설정 다 끝나야 되는 회차 아닌가요? 휴..ㅠㅠ



게다가 이순과의 '호색한' 신에서 김태희 얼굴은 위에서 그렇게 클로접;;;
김태희니까 살아남았지.. 왠만한 미녀라도 그 각도에서 잡으면 다 오징어 됩니다ㅠㅠㅠ



이런 저런 것들로 해서 드라마가 좀 유치하고 고급스럽지 못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김태희의 연기력이라든지,
유아인과의 어울림(이모 - 조카, 큰누나 - 막내동생..) 이런 건 전혀 안거슬려요. (적어도 저한테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요약:  7회 후반부 재미있었고, 8회부터는 제법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제 대본 상의 미숙함을 연출에서 잘 조절해서 톤 다운해주고,

편집에서 잘 좀 섞어 주면 시청률도 쑥쑥 오를 것 같네요.

 

 

간만에 진짜 숙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숙종다운 숙종이 나왔는데...

시청률 때문에 다시 우유부단한 숙종과,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하기만 한 장옥정은 보기 싫거든요.


 

김태희 유아인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 연출, 대본, 편집이 정신차리길 빌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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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5.03 07:37

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복창군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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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 환국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아네스·이장우·정두희·최선혜,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숙종실록], 휴머니스트, 2009;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1~3, 역사문화, 2009.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 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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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4.26 04:56

숙종이 여느 임금들보다 암행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에서 이순이 자꾸 나가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되네요.

암튼..  숙종시대 일화 및 숙종의 암행에 대한 일화를 찾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았습니다.


#1. 숙종이 명릉에 묻힌 이유는?  

숙종대왕(조선조 19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이신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기가 죽은 선비에게 이젠 당당하게 반말까지 하는 갈처사,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대왕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리성.拜 

.............................................................. 



#2. 

조선시대 숙종 임금의 암행(暗行)에 관한 일화는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자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암행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고래등같은 어느 관료의 집에 다가갔습니다. 인적이 끊어지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 했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습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면서 손주와 이야기 하고 있고, 할머니는 짚을 고르며 거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들다가 놓은 망태기가 한편에 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띈 얼굴로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듯 한 움막에서 살며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지요.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 아니요. 어떻게 이 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2.07 05:06

연려실기술 제 6권 - 연산군편 참조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권세도 없는 일개 궁인이었던 폐비 윤씨의 왕비 간택도 그렇지만 그녀의 폐출, 사약으로 인한 죽음에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 군주이자, 최초된 폐출된 왕인 연산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다.



2007/11/09 -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2007/11/09 -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2007/11/09 -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2008/03/11 - 연산군의 광기를 깨우는 폐비 윤씨(금삼의 피)에 대한 진실은?
2008/03/24 - 폐비 윤씨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부제: 폐비는 인수대비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다??)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2.07 04:13


재미있는 역사 소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 초상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ㅋ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2.07 04:10

출처는 미상이긴 한데 여하간에 괜찮은 글 있어서 그대로 옮긴다.
이 분 너무 너무 대단하시다.. 어떻게 이런 학식과 지식과 글솜씨까지...
혹시 문제되면 삭제 예정. 원글자 나타나면 알려주시길.


무엇보다 조선은 무력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조선의 지배계급은 사적인 무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국가를 운용 유지하기 위해 군사적인 긴장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해결하고자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전쟁을 이유로 민중을 억압하거나 탄압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비교대상으로 언급하는 일본과 비교해보면 그 독특함과 뛰어남이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물론 조선의 양반들에게도 부정적인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부분들은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도 똑같이 안고 있던 문제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귀족에 비하면 우리나라 양반은 차라리 나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민중을 지배함에 있어 무력을 동원한 압제를 선택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민중에 비해 우월한 지성과 도덕성을 그 지배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성격의 지배계급이 나타난 것이 17세기 이후 시민계급의 등장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반은 그보다 2세기 이상 앞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양반이라 함은 신분이라기보다는 계급에 가까웠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자체가 어느정도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교육수준이라는 점에서 근대 유럽의 시민계급과 그 성격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 양민들도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려 있었다. 원래 노비였다가 면천하여 양인이 된 사람이 과거를 보아 양반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 또한 조선의 한 장점이다.


(내 이야기 추가. 조선 초기의 유명한 훈구파로 알려진 이극돈의 무려 적자는 잡과에 응시해서 그쪽으로 합격하기도 했지. 이건 내가 수능에서만 본 예시이고. 그거 외에도 꽤나 많은 사례가 있었어.)



조선의 놀라운 점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동시대 어떠한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던 그 높은 교육수준이다.

조선의 건국 자체가 신진사대부에 의한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조선의 지배계급은 조선의 민중의 교육에 대해 매우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는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한 교육서인 동몽선습, 명심보감, 삼강행실도 등을 간행 편찬함으로써 유교적 이상국가에 맞는 백성으로서 조선의 민중을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이 예학에 빠져 신분질서를 고착화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당이 전국에 보급됨에 따라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의 민중 상당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유교적 소양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유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중국이나 이웃의 일본과는 달리 민중의 생활 깊숙이까지 유교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던 이같은 일련의 교육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진보적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은 거의 이상적인 실험국가에 가깝다. 시대적 한계가 뒤따르기는 했지만 일단 신분제도를 혁파했고, 군사력이 아닌 지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문민통제로서 국가를 운영했으며, 이익보다는 옳은 가치를 추구하여 그 옳음을 밝히고 실천하고자 고민하고 논쟁했다. 이미 민중에 대한 교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주의 국가였으며 국가최고권력자인 왕조차 스스로를 계몽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여러가지 양반사회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다른 체제와 비교했을 때 가히 가장 진보적인 체제였다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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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마냥 닫혀있는 국가는 아니었어.

일본과의 교역은 왜관만 가지고 하는데도 현종시기 연간 은 5천근에 달하는 통화가 오갔고, 이 양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 중국과의 교역은 것보다도 컸고. 적어도 조선 후기만 놓고보면 조선이 마냥 닫힌 국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조선의 군사가 임진왜란 때 무조건 쫓겨다닌것은 절대 아니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통점은 적군이 파죽지세로 수도만 노려서 왕을 잡는 작전이었다는 것에 있었는데, 병자호란의 경우엔 백마산성같은 주요 요충지까지 재끼고 그냥 수도까지 무작정 달렸던 기동성을 바탕으로 승리하지만 (더구나 당시 청은 명군의 홍이포까지 가지고 있던 상황이니 공성전에선 무척 유리했지) 반면 임진왜란 때는 그게 실패하여 한양, 평양 까지 털리지만 후방에서 의병들과 지방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거고. 결국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의 일본군은 더이상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일본군에 대한 방어전략이 과거 왜적들에 대한 전략과 같았던게 패인의 원인이긴 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조선군은 순발력있게 적응했어.

병자호란때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데, 성위주의 방어 체계를 수도에서 막는 체계도 대비하는 법을 연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이 쫓겨난게 문제가 됐지. 인조 때는 임진왜란 처럼, 대몽항쟁처럼 하면 별일 없다라는 생각이 박혀있었걸랑. 근데 광해군의 걱정처럼 청군은 그냥 닥치고 왕만 잡자는게 돼었지. 고로 인조가 무능했던 거지 조선이 무능한건 아니었어. (게다가 그 시기 너무 급하게 활에서 총 위주로 병력을 바꾼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 더구나 효종대로 넘어가면 이런 경험에 따라 군사력을 증강하게 되었고 이것은 정조때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조선 궁궐 작다고 까는 넘들도 있는데, 조선 궁궐은 자금성 담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궁궐이고, 더구나 영토나 인구의 차이를 고려하면 조선 궁궐이 훨씬 큰 셈이야. 봉건사회의 후진성. 우리는 왜 일본/유럽만 못하냐 그러는데 일본은 러일전쟁, 한일합방 이전(아니 그리고 그 직후도 제법)만 해도 국가 재정이 상당부분 영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사실 러일전쟁에서 가까스로 이기지 않았으면 국가 재정이 파산날 지경에 처했었어.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단 소식이 온 전 날에는 내각 총사퇴와 그에 따른 여당과 야당의 전면적 갈등이 예고되어있기도 했고(원정에 의해 쉽게 봉합되었지만). 일본은 2차대전 이전만 해도 많은 부분 세금을 쌀로 걷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물론 조선이 망한건 고종이나 명성황후같은 지도자들의 무능도 원인이니까 무조건 옹호만 할 순 없지만. 조선이 니네들 이야기처럼 만만하게만 볼 나라는 절대 아니란 거야.

여하간에 긴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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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3.02.07 03:57



 


장희빈은 효종 10년(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차․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10월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월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월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월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년 6월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월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월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 지두환(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원글 출처: http://www.kostma.net/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4#Topic.



-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희빈은 철저한 희생자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는 장희빈은 죽어 마땅한 악녀라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원한 진리란 없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경종, 영조, 정조 때의 비극이 모두 숙종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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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1.09.22 04:30

지금에 와서 수양대군을 욕하는 건 현대의 시각이니 어쩌니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충효 사상이 강했던 그 당시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이 된 수양대군이 얼마나 욕을 먹었으면 천재적인 학자였던 신숙주가 몇 백년 간 숙주나물로 불리며 미움을 받았을까? 

또한 몇 십년간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 한명회가 최악의 간신 이미지로 남아있을까?

왜 그렇게나 수많은 사람들이 세조에 대항하여 성공 가능성도 미미한 반란을 그렇게 많이 일으켰을까??


그는 왜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되고 난 후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가 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죽은 현덕왕후의 묘를 파기까지 했을까?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장녀인 세희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는 금계필담 같은 야사가 널리 널리 퍼진 이유가 무엇일까??



수양대군과 그의 공신(?)들은 그들은 본인들의 권력 쟁취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세조에게 충성심 경쟁을 하던 시대에 쓰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쌀이 찌푸려지는 부분이 많은 것은 왜일까?

그래도 수양대군과 그 아래 공신들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정말로 김종서가 종친들을 누르고 권세를 부리려고 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더라. 조금만 더 자세히 조사를 해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사상으로 보아도 수양대군의 행위는 패륜 중의 패륜였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후손들조차도 김종서, 사육신과 생육신들을 만고의 충신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

김종서 - 우의정. 수양의 부하 임운에게 철퇴를 맞고 자리를 피했다 은신처에서 피살됨
김승규 - 김종서의 장남. 김종서와 함께 피살
김승벽 - 김종서의 차남. 김종서와 함께 피살
김승유는 김종서의 3남이란 말도 있고 손자라는 주장도 있음
민신 - 이조판서. 입궐 중에 삼군진무 서조에 의해 피살
이양 - 우찬성. 입궐 중 피살
조극관 - 병조판서. 입궐 중 피살
황보인 - 영의정. 우의정 김종서, 좌의정 정분과 함께 수양의 주요 정적. 입궐 중 피살
황보석 - 황보인의 아들
황보은 - 황보인의 아들
황보흠 - 황보인의 아들


1453년 이징옥의 난

이징옥 - 김종서의 최측근, 함경도절제사. 종성판관 정종에 의해 피살


1454년

안평대군 이용 - 유배 후 사사
정분 - 좌의정. 유배 후 사사


1456년

엄자치 - 내시, 문종의 상선
혜빈 양씨 - 세종의 후궁, 교수형


1456년 제1차 단종복위운동(병자사화)

사육신

성삼문 - 전 집현전학사, 승지, 거열형
박팽년 - 전 집현전학사, 형조참판, 거열형 예정일 전날 옥에서 고문독으로 사망
하위지 - 참판, 거열형. 부인과 딸은 권언의 노비
이개 - 전 집현전학사, 거열형
유성원 - 집현전학사, 음모 발각 후 자결. 부인과 딸은 한명회의 노비
유응부 - 무관 출신, 동지중추원사, 거열형. 부인이 권반의 노비가 됨

기타 관련자

권자신 - 단종의 외숙부, 호조참판, 거열형
김문기 - 공조판서
박종림 - 박팽년의 숙부
박중림 - 박팽년의 아버지
박기년 - 박팽년의 동생
박대년 - 박팽년의 동생
박인년 - 박팽년의 동생, 교리
박헌 - 박팽년의 장남
박분 - 박팽년의 차남
박순 - 박팽년의 3남
박쟁 - 성승, 유응부와 함께 별운검을 서기로 내정됐다 취소
봉여해 - 박팽년의 매부
성승 - 무관 출신, 성삼문의 아버지
성삼고 - 성삼문의 동생, 성승의 차남. 처자식이 정창손의 노비가 됨
성삼성 - 성삼문의 동생, 성승의 3남, 정랑. 부인이 홍달손의 노비가 됨
성삼빙 - 성승의 4남, 부사. 부인이 권개의 노비가 됨
성맹종 - 성삼문의 아들
성맹첨 - 성삼문의 아들
송석동
윤영손
이말생 - 사육신 유응부의 사위의 형. 부인과 딸이 유수의 노비가 됨
이유기 - 도진무, 이개의 사촌동생. 부인과 딸 셋이 정창손의 노비가 됨
이의영 - 별시위, 유응부의 사위. 부인이 양정의 노비가 됨
이지영 - 이말생, 이지영의 동생. 부인과 딸이 홍순로의 노비가 됨
이휘 - 공조참의, 이개의 이모부. 부인이 이계전의 노비가 됨
최득지
최면
최치지
허조 - 집현전 부제학, 이개의 매부. 어머니, 누이가 곽연성의 노비가 됨

이때 처형된 사람이 최소 70명 이상


1457년 제2차 단종복위운동

금성대군 - 순흥에 귀양갔다 단종복위음모가 발각되어 사사
손서륜 - 전 집현전학사, 단종 양위 후에 사임, 거열형
송현수 - 단종의 장인. 장 100대를 맞고 관노가 되었다 교수형
이보흠 - 순흥부사. 금성대군의 계획을 고했으나 동조한 죄를 물어 처형
단종 이홍위 - 유배지 영월에서 왕방연에 의해 교수형
금성대군이 귀양간 순흥의 향리들까지 모조리 처형

1461년

정종 - 문종의 사위, 단종의 매형, 영양위, 거열형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1.09.22 03:59
출처: 다음 카페 역사 스페셜  역사 토론 게시물



11월 2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1)



■ 세조 (1417 - 1468, 재위 : 1455-1468)는 어떤 인물이었나?

조선 7대 임금으로 1455년 에서 1468년 까지 약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시호는 혜장(명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처음에는 함평대군이었다가 진평대군에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 졌다. (1445-세종 27)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이 학문에 능했던 데 비해 수양대군은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 성격이 대담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7대 임금에 즉위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혀 우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양성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시켜 예문관으로 그 기능을 옮기는 한편,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지방민들을 괴롭혀 오던 유향소를 전격 폐지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도 주력하였다. 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러한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 (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참고 문헌-



1. 조선왕조 실록 -시디롬- 서울 시스템, 1997

2. 연려실기술 -국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혜안, 1998

4.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5. 이성무, [조선왕조사], 1권 -태조~현종- 동방미디어, 1999

6.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7. 최정용,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1995

8.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9.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10.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11.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1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들녘, 1996

11. 사이트 : 한국의 역대 왕 - www.urinara.com





11월 3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2) 세조 공신들의 횡포


1.
조선 3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의 공신책봉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 재위 기간에는 정변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신의 존재 자체가 정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병약한 세종의 장자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모사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륙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였다.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반란의 주역인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해 한명회, 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다. 정난(靖難)이란 「나라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축나야 함을 의미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식읍 1000호와 식실봉 500호, 전 500결, 노비 300구(口) 외에도 별봉(別俸)으로 해마다 600석의 쌀과 금 25냥, 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 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도 전지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 7명, 반당(병졸) 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 등이 차등있게 배분됐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헌법에 따라 즉위한 단종이 계속 재위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협박해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중외병마도통사라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3년(1455) 윤6월에 드디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면서 스스로 임금이 됐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즉위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의 좌익(佐翼)공신으로 총 46명이었다.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이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축나야 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왕이 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했고 조선은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 갔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정사·좌명·정난의 4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 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琵琶)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임금 앞에서 추는 악어들의 잔치였다.


잔치가 파한 후 동생 영응대군의 사저로 거동한 세조는 장난삼아 이구에게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내가 때리게 되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신 사이에 격식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에게는 새벽 2고(鼓)가 될 때까지 술마시고 춤추며 즐거웠을지 몰라도 이에 끼지 못한 다른 사대부나 백성들에게는 착잡하고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특권층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정난 1등(2등·3등)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공신 아무개가 죄를 범해도 용서하라는 주청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해도 영원토록 용서하라는 주청이었으니 공신 당사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함께 갔던 공신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박살낸 후 후원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사헌부도 듣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모는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다가오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아내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죽어도 국왕이 공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니 공신들에게 조선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3.
역사드라마「왕과 비」는 수양대군과 그 수하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도착적인가는 정난·익대공신들이 김종서와 사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사형당한 인물들의 남은 식구와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올바른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시대정신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와 형제 등 남자들도 연좌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난·익대공신 세력들은 이들의 사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이들의 부인·딸 등 여자식구들과 재산을 갈취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흥상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과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의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중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과 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과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 수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이 시대정신 구현에 인생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공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육신들의 토지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 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신들이 탐한 것은 반대파 정치인들의 여인이나 토지뿐이 아니었다. 신숙주가 단종의 왕비 송씨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이 임금으로 섬기던 군주의 여인까지 탐했던 파렴치한들이었다.



-참고문헌 및 출처자료 -



조선왕조실록 -씨디롬-

연려실기술 - 국역-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9

2. 이덕일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김영사. 1999

3. 이덕일 [역사산책 - 조선을 망친 주범은 공신들 ] - 신동아 연재물

4.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5.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6.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7.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1.07.31 05:11



김종서(金宗瑞)는 흔히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열여섯살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文官)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가 6진을 개척하여 북방을 경영한 공훈(功勳)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견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崔潤德)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컸거나 국토 확장에 대한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옛 땅을 얼마라도 더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김종서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조선의 분위기가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관(武官)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김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이루고 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世宗)은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며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김종서의 강직성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
지가 강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비명에 죽게 되는 원인
이 된다. 

 

●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2년(서기 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都摠制)로 있던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붙여진 '대호(大虎)'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불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서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는 소박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했을 때, 그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황희(黃喜)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김종서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그의 호방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신숙주(申叔舟)에 대해서도 그의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수양대군에게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열여섯살인 태종(太宗) 재위 5년(서기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종(世宗)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서로서는 청, 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이다.


김종서가 관료로서 성장하고 있던 태종(太宗)대에는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데다가, 아직 나이가 젊어 큰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세종(世宗)대 전반에 와서야 김종서는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는데, 세종 원년(서기 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世宗)대에는 관료들의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자로서 20여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는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라는 직책도 북방 경영의 대업(大業)을 지시받고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방관에 불과했다. 성공 여부 또한 불투명한데다 반드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때 김종서의 나이 45세였는데, 30여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道伯)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다.


고려 말, 길주에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진족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만주 지방에 뿌리를 둔 부족으로서 고려 때는 세력이 강성하여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淸)을 건국하였다. 당시 만주의 남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은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 지역을 침범하였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중국의 동남부와 조선의 북부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분쟁은 끝이 없었다.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으로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세종(世宗)대에 이르러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나서야 국토가 침탈될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이성계가 조선왕조 건국이라는 크나큰 업적의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땅이었으므로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太祖) 때에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慶源府)였는데, 세종(世宗) 재위 9년(서기 1409년)에 경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寧北鎭)을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인 석막에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 지역을 좀더 확장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아말로 북쪽을 향한 세종의 영토 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 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 기회만 생기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여진족 사이에서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정으로 날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세종은 이때를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으로 개선했으며, 군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노고를 치하하는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었다. 그런데 그 씀씀이가 너무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 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김종서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지 뚜렷한 목적 아래 행했던 것이다.


또 영토 확장의 실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이주민 정착에 기여한 향리(鄕吏)들에게는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로 이 지역에서는 삼남 지역에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가 했던 방식을 따라 천인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에게는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김종서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천성적으로 강직한 데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아 원체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에게 의식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김종서는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인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급작스런 사건으로 모두 혼란에 바졌지만, 김종서만은 그 자리에 꼼작 않고 앉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활을 쏜 범인은 붙잡지 못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아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김종서의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그런 나를 군사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민심이 안정되고 군사들을 통솔하기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여지자, 김종서는 허술했던 국경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석막에 있던 영북진(寧北鎭)을 경원부(慶源府) 북쪽의 백안수소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북방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김종서가 주목한 곳은 알목하(斡木河)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또 그 근처에 주로 거주하고 있던 오도리 부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으로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잇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이곳에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했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후방이 되어 버린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會叱家)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백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했다. 공성현은 세종(世宗) 재위 19년(서기 1437년)에 경흥읍이 되었다가 세종 재위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재위 22년(서기 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로 옮겨 회령부와의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 있는 다온평(多溫平)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군(穩城郡)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거의 7년만에 북방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 재위 22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재위 25년(서기 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에서 연대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 경계를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서기 1449년)에 처음 영북진이 있던 석막에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으로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친 것이다.


세종(世宗)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민본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 '고려사(高麗史)'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世宗) 재위 32년(서기 1450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인 문종(文宗) 원년(재위 1451년)에는 우의정이 되어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政丞)의 반열에 올랐다.


[고려사절요] 권 1, 태조조(太祖條) 부분. 김종서는 [고려사]를 편년체로 다시 편찬하여 [고려사절요]를 만들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데, 이것은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만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려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1395년) 4월에 총 3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많은 사실을 왜곡시켰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으로 임금의 묘호에 조(祖), 종(宗) 등을 사용하였고, 황제국(皇帝國) 체제를 갖추었던 왕조였는데도 여몽전쟁 이후의 상태에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의 충신들인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 등은 깎아내리고 별다른 공로가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慶)은 청백리(淸白吏)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1424년에 유관, 윤희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분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다시 쓴 고려사는 왜곡된 사실은 대부분 고쳐졌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략하게 요약되어서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1432년에 신개(申槩), 권제(權踶), 안지(安池) 등을 시켜 다시 보완하도록 하였다.


두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전히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 조상인 권근(權近)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재위 31년(서기 1449년)에 세번째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판서를 관창하는 지춘추관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두번째 고려사 재수 작업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당시 우참찬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함게 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 등과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최항(崔恒) 등의 사관들이었다. 세번째로 개수된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재위 원년(서기 1451년) 8월 25일에 총 139권으로 완간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만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인지의 고려사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명단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 과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고명대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다


조선왕조 제5대 국왕인 문종(文宗)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의 뒤를 이어 외아들 홍위가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다. 이때 김종서는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단종대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 노재상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린 임금에게는 장성한 숙부들이 10명 넘게 있었고, 그 중에서도 야망이 크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암암리에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서기 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한 수양대군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인 한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수양대군을 의심하고 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경계하기는 했지만, 설마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방심하게 되는데, 그 틈을 타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철퇴(鐵槌)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히고,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의 전 과정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는 다행히 죽지 않고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잠시 아들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새벽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에게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김종서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그것조차 찾을 수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왕조 제7대 국왕인 세조(世祖)다.


김종서는 단종이 즉위한 후 독단적으로 정사(政事)를 처리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평소 그의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기보다 어린 국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장수요, 훌륭한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잘 보위하려다가 반대파들에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방 개척 시절에 얻은 경험을 살려 저술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병서를 남기기도 한 김종서는 영조(英祖) 재위 22년(서기 1746년)에야 복관(復官)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恨)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김종서가 남긴 시조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 공(功)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왕과 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극이지만 수양대군 미화가 너무 지나친 것은 정말 마음에 안든다.
김종서 같은 만고의 충신을 권력에 눈이 먼 사람으로 그리다니ㅡㅡ;;

나는 어떤 사실관계를 파악할 때 그 속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속의 내면이 보인다는 것도 믿지만,
사실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조 - 수양대군은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나쁜 놈이다.
역시 성삼문, 김종서가 짱~




2011/07/30 - 세조의 킹메이커, 신숙주 (조선시대 최고의 King Maker) - KBS 한국사전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역사 속의 결말 보기
2011/07/29 - 공주의 남자 vs 왕과 비 vs 한명회 출연진 살펴보기 (같은 시기를 다룬 사극들)
2008/02/27 -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2011.07.31 01:16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퍼옴. 문제시 삭제 예정.
 


다음 카페 유혁진님의 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드디어 수양대군의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왕과 비'는 사실 전작(前作)인 '용의 눈물'의 후광에 힘입어 출발한 기획이었고, 지금까지의 시철률 역시 '용의 눈물'에게서 물려 받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딘지 전작에 비해 김 빠진 구성과 동어반복적이고, 재탕에 삼탕에 가까운 플롯의 배치로 시청자를 짜증나게 만든 부분으로 인해 전작 만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에서 그려지 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극히 일관되지 못해서 중간에 한두회를 보지 않은 시청자로서는 저 인물들이 왜 갑자기 저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금일(99. 1. 23.) 방영분의 경우 단종의 양위와 관련한 매우 급박한 상황전개가 이뤄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연출에 실패하고 있다.



그냥 저냥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보면 되는(?) 무력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몇가지 거슬리는 점이나 좀 언급해 보려고 한다.



1. 세종대왕은 정말로 수양대군을 왕재(王才)로 생각했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다루는 문예작품(영화와 방송을 포함하여)중 최근의 작품들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신봉승의 '설중매(雪中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가 이뤄진 그의 작품은 무명이던 연극배우 정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으며, 드라마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까지 이뤄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심도있게 파헤친 역작(力作)이었다.


때문에 후작들은 싫건 좋건 '설중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학술적 연구가 아닌 드라마나 영화화 될 경우에는 거의 그런 혐의를 피하기 힘들어 진다.



그런데, '왕과 비'는 방영 초반부터 '안티 설중매'의 노력을 곳곳에 드러내고 시작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을 심화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의 독단(獨斷)을 부각시키고, 종친들을 심하게 무력해 보이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국법을 조금만 유추해 보아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조선의 국법상 종친은 관직에 오를수 없다.


조선의 종친인 자로 고위관직에 오른 예는 이방원(태종: 제 1 차 왕자의 난 수습), 이화(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 : 태종의 외척 제거), 이유(세조 : 계유정난 수습), 이준(귀성군으로 세조의 조카, 영응대군의 아들 : 이시애의 난 진압) 뿐으로 이는 국초(國初)에 한한다.


때문에 종친은 관직에 오르는 길인 과거를 볼 필요가 없고(자격도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진사나 생원 같은 하위직을 받지도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호칭은 그의 군호(君號)를 부르거나 '나으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 대감이나 영감같은 고위직 관리의 존칭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대군과 군들에게 '대감'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무지(無知)의 소치인지, 작가의 의도적 시도인지, 아니면 필자의 무식인지 몰라도 적어도 '왕과 비' 이외의 작품에서 **대군'대감'이라는 호칭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사육신 사건(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서 성삼문 등이 세조를 그의 예전 호칭대로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불러서 세조를 진노케 한 그 유명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각설하고, 조선의 종친은 관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 없고, 종친으로서 왕실 의전과 종묘의 제사에 참석하는 등의 예우만을 받을 뿐이었으나, 세종대왕은 제위 말년에 이르러 세자(문종)를 비롯해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대군등을 국정의 곳곳에 침투시켜 실무를 맡게 한다. 이는 세종의 말년에 유례 없이 이뤄진 일로서 이는 태종으로부터 이어진 관료집단 불신의 가풍(家風)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세조의 왕재(王才)를 논하는 이들은 이때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많은 국정 업무에 참여하여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사실 소헌왕후 (세종의 정궁(正宮))의 소생들은 한두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그 정도 쯤은 되는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다만 세조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세종대왕의 브레인 집단이던 집현전 출입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 보면 태종때부터의 숙원사업이던 국방강화의 최우선 과제인 화포(火砲)의 개량 사업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이 총책임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실적에 대해 세종께서 크게 치하하며 평가한 육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의 세자 시절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문종이 워낙에 세종이 이양한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지 수양대군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아무리 성군 (聖君)이라 불리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군주라 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 말년에는 절대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내관이 화약제조담당업무의 총책임자가 되기도하고, 문종은 한 술 더 떠서 내관의 처우를 대폭 개선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시절이라 평가받 는 세종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대립이 없었을 뿐이고,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관료집단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김종서와 황보 인)의 경우는 세종시대에 순전히 자기 능력만(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마 태종시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태종조에 급제하기 때문이다.)으로 입신에 성공한 부류로서 세종-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조를 풍미한 훈구파와는 그 뿌리가 다르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족벌이나 문벌보다는 군왕에 대한 1:1의 충성심과 성리학의 철학으로 무장한 부류였다.


때문에 왕족의 국정개입이나, 내관의 발호같은 '상식이하'의 처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왜 이들이 어떤 식으로건 제거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세종시절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사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왕재로서 평가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를 왕재라고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 이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이 세자(문종)에게 향하고 있었음은 세종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얻기 위해 사대부 체면 다 버리고 몸을 날리기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뭐가 어찌 됐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의 국정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창조에 가까운 혁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그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
기 자신의 국정운영철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세자(문종)는 세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합격 정도가 아닌 자신의 또다는 버전업된 인격이었다. 세자책봉 불과 몇 개월만에 국왕이 된 세종은 세자의 지위에서 섭정을 담당하는 '수습'기간이 부족했던 것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했고, 문종이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무렵부터 각 분야별로 조선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드림팀'으로 하여금 세자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가 없는 분야 같은 경우 스스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떡잎을 아예 만들어 버렸다. 어린 세자는 이 같은 부왕의 처절한 학습을 정말 놀랍도록 잘 받아 들여 신료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조차 10살을 갓 넘긴 세자를 접견하고서 '하늘이 조선에 내린 홍복'이라 극찬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초인적인 왕업을 계승할 인물로서 세자와 수양대군이 비교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경우 스스로도 '14세때부터 기방출입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잡기(?)에 능했다. 사냥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고, 특히 활솜씨를 자랑했다.(이는 세자와의 왕위계승권 분쟁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의 카리스마를 계승하려 했던 제스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몸이 세자에 비해 무척 건장했다고 하며, 후일 등극해서 벌인 일련의 불사(佛事)에서 보듯이 불심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문의 경우에서는 세자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집현전에 출입하며 신숙주, 성삼문등과 함께 정인지 밑에서 수학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면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이런저런 낭설이 많이 있지만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결정적으로 태종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을 매우 심한 권력혐오증 환자로 그리고 있지만, 후일 보여준 그의 면모로 봤을 때, 그는 권력혐오증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왕인 태종과 닮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의 의향이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한 세자(양녕) 보다는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조선을 모든 분야에서 문명대국으로 성장시킬 왕재를 원했고, 그에 부합한 인물이 충녕대군(세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녕대군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부왕의 숙청 스타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발호하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자식의 경우가 예외 일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세종의 치세에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말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통이 계승해서 왕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자까지 했던 왕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왕권에 심각한 도전요소가 된다.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양년대군은 파락호의 길을 선택하므로서 광인(狂人)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어필했고, 효령대군은 동방유학의 나라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님처럼 전국 심산유곡의 사찰만을 배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만일 그 둘중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세력을 모으는 기미를 보였다면, 지체 없이 태종의 손에 살해 되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세종 말년에 세자(문종)의 병약함을 보면서 양녕대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년의 세종은 종친을 중용하는등 왕실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국왕이 문종이라는 전제에서 벌린 일이다. 세종이 덕이 중후한 인군(仁君)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태종의 아들이고 권력을 어찌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사후 이후의 권력구도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명민한 두뇌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붕어(崩御)직전 가장 강직한 왕당파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의정부에 배치하고 행정권은 황보인에게, 군권은 김종서에게 장악시킨 것이다. 심지어 문종의 단명을 예견하고서 세손(단종)의 치세까지를 염두에 둔 고명을 남긴다.


세종은 절대 수양대군이 보위를 이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태종 - 양녕대군 - 수양대군은 어디까지나 난세(亂世)의 인물로 세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난세에 필요하지, 태평성대에는 사회불안세력일 뿐이다.


어쩌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수양대군측의 주장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자신을 위해 죽이려 했던 것처럼 수양대군이 발호할 기미를 보이면, 군권을 장악한 '충성의 화신' 김종서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밀명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양대군도 그쯤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세에 기방은 공연히 간 것이 아니다.



2. 수양대군은 문종조와 단종 즉위초에 왕위에 뜻이 없었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왕자란 무엇인가? 그것도 정궁(적실이라는 말은 여염의 용어로 왕실에 오면 정궁(正宮)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소생의 왕자란 후일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 그 호칭에서부터 즉위에의 욕망을 내포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는데,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다면, 즉위의 꿈을 단념하고 권력에 대한 불안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홍보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수양대군은 세조 제위시가 아닌 태종 제위시에 태어났다. 형인 문종과는 3살 터울로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형인 문종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어 있었다. 철나기 전부터 처세를 생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를 내내 형의 그늘 밑에서 지내야 했다.


형과 아우가 비교가 되는 상황조차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형인 문종은 불과 7살의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고서 무려 29년을 세자로 생활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때문에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어설프게 가졌을 때쯤에는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부왕과 세자가 동시에 신병을 앓는 일이 아주 흔했다. 이때쯤의 국정은 거의 세종과 세자(문종)중에서 약간이라도 덜 아픈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부왕이나 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왕이 조만간 붕어하고, 세자가 후사 없이 세상을 버린다면, 그 다음의 보위는 당연하게 후보 순위 1번인 수양대군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은 세종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석보상절도 편찬에 관여하고, 규표를 바로잡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도 몇 번 씩 오른 것이다. 늙고 병든 국왕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자, 신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때 '너희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라.'는 시위로 태조의 카리스마를 등에 엎기 위해 활솜씨를 자랑하고 다니고 건장한 체구를 과시하며, 자신의 강건한 육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냥만 나갔다 하면, 왕자 체면에 팔뚝을 드러내길 즐겼던 것이다.


아마 그런 수양대군을 보며, 다른 경쟁자 안평대군은 냉소를 지으며 난을 치고 시문을 읊조렸을 것이다. 부왕이라면 차라리 동(動)적인 수양대군보다는 정(靜)적이고 문예에 능해 문예 진흥의 가능성이 매우 큰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두 사람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이 태어난다. 그리고 5년 뒤 5살이 되자마자 세종은 그를 세손으로 책봉해, 자신의 후계구도가 확보부동하게 세자에게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세손이 그 보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장기 구상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집에서 난이나 치고 시인묵객이나 상대한 안평대군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서 한발만 더 나가서 풍류객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냥다니며 곳곳에서 자신의 왕재를 드러낸 수양대군은 그게 힘들다. 양녕대군처럼 미친척을 할 수도 없고, 안평대군처럼 시인묵객을 만날 수도 없다. 그때 사냥은 요즘처럼 몇몇이 고즈넉히 4WD 자동차에 총이나 하나씩 들고 떠나는 게 아니다.


몰이꾼에 같이 사냥할 장사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행하는, 약간만 변형하면 군사훈련의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는 행위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예법에는 수렵의라 하여 왕이 사냥하는 의식이 있다. 말이 사냥
이지 그것이 군사훈련과 동원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인 것을 동방유학의 나라 신료가 모를 리가 없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제거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으로서도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야 어쩔수 없이 수양대군을 선택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원손이 태어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강보에 쌓인 원손을 안고 다니며 정사를 펴고 기회 있을때마다 신료들에게 원손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후계구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제스쳐였던 것이다.


세자의 후사가 없었을 때는 수양대군의 발호를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겠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마 이때쯤 김종서에게 유사시 수양대군 제거의 밀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수양대군이 살 길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형인 세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왕과 비' 초반에 수양대군이 등장만 하면 나왔던 대사인 '형님이신 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주상전하를 보위한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이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수양대군의 비극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원손이 태어난 후로도 세종대왕께서 생각보다 장수하신 것이다. 세종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세자시절의 건강상태에서 국왕이 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면, 문종은 1년 이내에 붕어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무리 세자이어도 10살도 안되는 나이로 국왕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지지만,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알 것 아는 나이인 12살(앞서 수양대군이 14살에 기방에 출입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12살 정도면 나름대로 성숙한 청소년시기가 된다.)에 당당히 즉위한다.


단종의 모후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긴 하지만, 그때까지의 단종의 옥체는 수양대군파에서 보기엔 후일 장성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잔병치레 없이 강건했다. 누가 봐도 단종 즉위 초에 그는 장수(長壽)가 예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 역시 10대 초반의 몇몇 정사처리를 두고 신료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부활이
다.'라고 이야기 될 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서 만큼은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3. 계유정난의 명분은 정당한가.


새로 시작된 단종의 치세. 역대 어느 왕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새 임금이 즉위하면, 정권에 위협요소로 작용할 세력을 숙청한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종과 약간이나마 친분이 있던 모든 관원을 모조리 거세했고, 문종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다.


세종 조에만 예외라고 생각되지만, 세종조에는 태종이 알아서 다 해줬다. 세조 즉위초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니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의 아들 예종은 남이의 옥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마저도 세조와 예종의 총애를 받은 친적이며, 세조때 이시애의난을 진압한 공신이며 종친인 귀성군 준을 거세한다. 당연히 숙창당한 남이와 귀성군 준은 군공이 매우 높으며 실력과 학문을 겸비한 인제로 세조가 무척이나 총애한 인물이다.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림직 하다.


단종 즉위초, 왕권에 가장 강력한 위협요소는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왕당파 김종서로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단종의 장성시까지 수양대군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선에서 세종조의 무혈통치를 완성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수양대군파가 말하는 황표정치로 인한 훈구대신의 국정독단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훈구파가 아니었다는 전술의 내용으로 설득력을 잃고, 황표정치는 주로 인사문제에서만 사용된 것인데, 즉위초 단종이 관원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나 단종이 재빨리 관원의 이름을 숙지한 이루 폐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훈구파는 세조 즉위시 그를 지지한 세력이다. 권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권근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서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초 드러내 놓고 집안자랑을 해도 무방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수양대군의 측근중의 측근들이 오히려 훈구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오히려 세종조에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왕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과 충성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에 눌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 즉위 이후 이뤄진 숙청에서 거세당한 훈구파는 한 명도 없는 반면, 집현전을 위시한 신진사대부가 남김 없이 숙청 당한 사실은 훈구대신의 국정 전단이라는 수양대군파의 명분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신진사대부가 육성되고 성장하던 집현전을 '사육신의 난' 이라는 일련의 숙청이벤트 이후 그 뿌리를 뽑아 버린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단종이 너무 어려 국정을 맡길수 없었다?


지금의 센스로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상술한 조선시대청소년의 성숙도(?)를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나이로 코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하는 어린 아이가 당당히 세자와 세손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다.


약간의 억지일수도 있지만, 어린 단종의 눈에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종대왕이 강보에
싸 안고 다니며 이런저런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버지인 문종 또한 세자 생활만 29년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이가 어려도 집안의 분위기를 가지고 자랄 수밖에 없다.


단종실록을 마구 난도질한 세조시대의 사관들 조차도 단종의 당당한 왕재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주청에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측면이 있을때는 불윤(不允)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소' 라며 버티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단종(12세 즉위)과 비슷한 연배에 즉위한 자산군 헐(성종 : 13세 즉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왕위를 물렸어야 한다. 수양대군파의 논리로 본다면 왕재로서 가장 강력한 왕권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귀성군 준이다.


그러나 귀성군은 거세당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고, 성종은 세조의 훈구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훈구대신의 국정전단'의 체제에서 훌륭히 성장해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참 묘한 역사의 순환이다.


강한 군주 다음에 단명한 군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린 왕이 등극하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와 내통해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어
쩌면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허나 세조와 그 자신의 공신들이 이후에 벌린 일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속빈 강정같은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로 세조와 그 공신들은 세조 치세 내내 올미부(나중에 후금(:청나라) 를 새운 누르하지가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을 토벌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자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며, 오히려 성종시대에는 정도전이 야심차게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무원칙하게 훈구대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버림으로서 조선 사회를 매우 경직된 귀족적 사대부들과 그들의 좌장인 국왕이 지배하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고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로 퇴락 시키고 만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이 글의 시발이 된 '왕과 비'라는 드라마가 너무 세조 측의 입장에서 은근히 그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한 것에 분개(?)하여 이런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왕들의 뒤를 이은 국왕이라면 세조도 무리 없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작인 용의 눈물이 철저하게 쿠데타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반면, '왕과 비'는 전작의 이러한 인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체 중심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히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혹은 그러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한) 세조와 희대의 풍운아이며 마키아벨리즘(혹은 관중(管仲)의 신봉자 한명회, 개국공신의 후예로 세종조에 고려사의 개수로 세종으로부터 고신을 박탈 당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새우려 했던 권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현실적 정치이념을 가진 신숙주등 수세에 몰린 훈구파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권력쟁탈의 양상을 그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재미와 농도를 갖춘 수준 높은 역사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어설피 전작의 화두였던 '왕권주의 (대통령중심제)와 신권주의(내각책임제)'의 대립을 이어가는 것은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된 '왕과 비'의 갈등 양상은 훈구파와 신흥사대부의 갈등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세조의 왕위찬탈을 '구국의 결단' 인양 묘사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구국의 결단으로 보위에 힘으로 올라선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상 아무도 없다. 차라리 한 인간의 처철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농도 짖게 표현하는 편이 인기 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써놓고 나니 이걸 왜 썼나 싶네


1999. 1. 24.

유 혁 진




.이 분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박식하시고...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책이랑 좋은글2011.07.30 22:51



새로이 시작한 드라마 공주의 남자 때문에 조선시대 역사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공주의 남자'는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역사의 라이벌인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아들과 딸이 사랑을 나눈다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이며, 역사와 허구를 적절히 섞어놨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주의 남자'는 알려지다시피 정사가 아닌 야사집인 '금계필담' 속 한 에피소드를 변형시킨 드라마다. (금계필담 속의 공주의 남자 이야기, 역사 속의 결말 보기) 금계필담 속 에피소드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이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결말이 새드엔딩으로 반이상 정해진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수많은 야사들이 실려있다. 대부분의 제목이 낯이 익은 느낌이고 제목만 보아도 흥미를 끄는 것들이 다수인데 이들 중 다수는 우리가 어릴 때 보았던 이야기 책에 나온 것들이 아닌가 싶다.


공주의 남자의 한 장면





1873년(고종 10)
서유영(徐有英:1801~?)이 쓴 문헌설화집.


2권 2책. 한문필사본.

이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한문유인본(漢文油印本) 2책, 서울대학교 상백문고(想白文庫)에 한문필사본 1책,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한문필사본 2책 중 1책의 낙질본이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서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말년에 외로움을 느껴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자 심심풀이[破寂之資]가 될 수 있는 이 책을 쓴다고 했다.

고려대학교본은 원작을 지은 지 두 달 뒤에 저자가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각 편의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작품들을 수록하는 체재로 되어 있다.



제왕과 왕비·문신·이인(異人)·양반층여인·기생·하층여인·무인 및 장사(壯士)의 순으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배열하고, 풍속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함께 묶어서 끝에다 첨부하였다.

각 인물은 대체로 시대순으로 배열했는데,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 걸쳐 있다. 작품에서 다룬 주인공들은 하층인보다 상층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보다 현실에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左海逸事)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41편의 설화가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실려 있다. 조선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의 왕·왕비·문신·이인(異人)·양반층여인·기생·하층여인·무인·장사(壯士)의 차례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고, 풍속에 대한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주인공들은 하층계급보다 상층계급이 많으며, 현실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 많다.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많이 나오게 된 야담집들과는 달리 다른 문헌을 참고하지 않고, 저자 자신이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공동작인 구비문학이 개인의식을 통해 어떻게 변모되는가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육미당기(六美堂記)와 금계필담(錦溪筆談)의 비교분석을 통한 소설과 야담계 서사체의 관계양상 고찰」(이강옥, 『한국학보』42, 1986)
「육미당기(六美堂記)의 작자 재론(再論)」(장효현, 『고전소설연구의 방향』, 새문사, 198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차
 . 사육신의 피흘린 자취
 . 단종의 원한을 풀어준 사람
 . 현덕왕비의 무덤이야기
 . 정순왕비의 가여운 인생
 . 피눈물로 얽힌 갸륵한 인연
 . 태평성대의 사랑이야기
 . 뜻을 펴지 못하고 간 임금
 . 선조 임금의 신기한 꿈
 . 나라를 구하려는 임금의 노래
 . 백사가 귀양길에 오르면서
 . 말 그림의 임자를 찾아라
 . 도량을 떠보는 거친 행동
 . 임금과 사귄 어리석은 백성
 . 큰 뜻을 펴지 못하고 간 효종
 . 영웅과 짝짓겠다는 여인
 . 남몰래 볼기맞은 재상
 . 청렴결백한 남산골 선비
 . 헤어진 옷 입고 다니는 재상
 . 전복 한 그릇에 벼슬을 내놔
 . 건공탕으로 인한 두 가지 사건
 . 오십년만에 나타난 꿈의 징험
 . 영조의 생모인 숙빈의 참을성
 . 정순왕후의 남다른 총명
 . 치마 밑에 숨어 화를 면한 사람
 . 고향을 그리워하는 비파소리
 . 유기장의 딸이 정경부인이 돼
 . 질투 심한 홍정승의 어머니
 . 종아리를 맞고 돌아간 처녀
 . 사랑에 빠지지 않는 영의정
 . 큰 인물의 일처리는 남과 달라
 . 거지와 인연맺은 유명한 재상
 . 미움을 이겨낸 홍정승의 의리
 . 김정승과 동양위의 우정
 . 임금이 밝으면 신하도 바름
 . 정승될 사람의 인품
 . 사충사의 이야기
 . 영조를 도운 송정승의 꿈
 . 밥 한 말 먹고 백리를 뛴 정승
 . 이정승의 신통한 감별력
 . 김정승의 적선한 이야기
 . 기생의 도움으로 한을 풀어
 . 윤시동의 글짓는 재치
 . 대동강물에 빼앗긴 담뱃대
 . 벼슬아치들의 행동은 신중해
 . 어른 앞에서 말을 삼가야 해
 . 벗을 얻는 방법도 가지가지
 . 말 한 마디에도 복이 깃들어
 . 혼령을 데려온 김정승
 . 세 번 잘못한 하인을 죽여
 . 중요한 문서를 하나 더
 . 홍연천의 재치있는 글
 . 반토막 시에 짝을 채운 이야기
 . 신선이 됐다는 5세 신동 매월당
 . 실정에 알맞은 정치를 해야지
 . 세가지 의리를 어긴 인생
 . 화담선생 이야기
 . 좀더 살려고 애쓰는 사람
 . 죽은 친구를 살린 북창공
 . 십만 정병을 길러야 무사하리
 . 앞 일은 내다 본 토정
 . 양주 송산이 피난처다
 . 왜적은 솔송자가 든 마을은 피해
 . 신선이 되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
 . 안동부사가 된 김치의 옥관자
 . 가난 때문에 절개가 꺽인 선비
 . 아내 덕에 병마사된 사나이
 . 오랑캐의 침략을 미리 아는 중
 . 병자호란을 예언한 박무관
 . 우암에게 준 한 늙은이의 시구
 . 이충정공의 신수에 관한 이야기
 . 금족두리 조각이 사람을 살려
 . 선비의 운명을 알고 있는 여인
 . 신선이 없다는 건 거짓말인지
 . 작은 은덕으로 큰 복을 받다
 . 이평량자라는 사람의 시
 . 앞일을 환히 알고 있는 사람
 . 왜송동 흉가터에 어서각이 선 사연
 . 익사할 신수를 면한 이야기
 .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복을 준다
 . 죽은 아이의 후신이 된 재상
 . 꿈에 본 죽은 아들의 모습
 . 원통하게 죽은 한을 풀어
 . 죽을 고비를 모면한 이야기
 . 마술장이에게 속은 사람들
 . 문 밖에 제사를 차리는 풍속
 . 삼연선생의 오언시이야기
 . 송악산 신령의 싸움이야기
 . 대궐을 집으로 쓴 한 서생
 . 신사임당의 값진 일생
 . 황발부인의 뛰어난 전략
 . 영수각 서부인의 뛰어난 재주
 . 고도령과 박씨부인의 십 년 공적
 .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와
 . 남편을 돕는 지극한 정성
 . 절개지킨 아내를 오해한 남편
 . 헤어진 가족의 눈물겨운 만남
 . 명필 양봉래의 어머니의 이야기
 . 천재 시인 허난설헌의 죽음
 . 이씨부인의 효성이야기
 . 누명을 벗은 선비와 의로운 여성
 . 옛 주인의 원수를 갚은 하녀이야기
 . 한떨기 꽃이 된 여자
 . 안평대군과 최생의 풍류
 . 황진이와 벽계수
 . 출사표를 부르며 흐느끼는 가련이
 .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
 . 부채하나로 맺어진 인연
 . 의기 논개의 넋을 기리는 노래
 . 원님과 사랑한 어린 기생
 . 무정한 것이 아니라 늙어서 그래
 . 용모는 어미를 문장은 아비를 닮아
 . 고장군을 짝사랑하다 죽은 처녀
 . 박태보를 짝사랑한 하녀
 . 아랑의 원한이 깃든 영남루
 . 이완장군의 대담한 전략
 . 임경업장군의 한맺힌 말
 . 사람의 일생은 꿈같은 것
 . 원통하게 처형된 남이장군
 . 서생이 왜장 일곱명을 죽이다
 . 도둑의 마음을 움직인 이완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힘 자랑은 우물 안의 개구리
 . 민장사의 놀라운 힘
 . 큰 원한은 도움만으로는 풀기 어려워
 . 사소한 일에도 장수다운 지략
 . 은덕을 못잊어 역적 아들을 살려줘
 . 백학을 황학이라 속인 이야기
 . 속임수로 벼슬길을 도운 어사
 . 금주령에 얽힌 갸륵한 이야기
 . 공사를 분별하는 일처리
 . 심공의 기생놀이로 생긴 일
 . 금강산 유점사를 지은 유래
 . 도끼를 주면 하늘 기둥감을 찍으리라
 . 정월 대보름날 약밥을 먹는 유래
 . 진평왕의 옥대를 찾은 이야기
 . 처용무에 대한 옛날 이야기
 . 김생의 글씨가 세상에 알려져
 . 솔거의 황룡사 노송도
 . 거문고와 가야금의 유래
 . 여원을 풀어주지 않아 화를 입은 최진사
 . 호랑이와 무덤을 지킨 강효자
 索引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역사 속의 결말 보기

Posted by 파란토마토
읽을 거리/책이랑 좋은글2011.07.3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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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 10권까지는 조선왕실과 신하들의 야사
11권 ~ 15권까지는 고려왕실과 그에 얽힌 야사를 담고 있다.

어릴 때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었던 맹꽁이 서당 시리즈.
비록 지금은 그 당시 가졌던 임금님에 대한 환상이 거의 다 깨어져버렸지만...
역사 입문서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다.



이 아래로는 전부 박시백님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인데,
제목이 주는 중후한 느낌답게 에피소드나 인물 중심의 역사가 아닌
실록을 토대로 한 편년체 형식의 역사서이다.


너무도 재미있게 봤는데 아직 전권을 읽지는 못해서 아쉽다.
얼른 20권까지 완결되길 바라며 얼른 다 읽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