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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8.03.19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었다?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외 책 소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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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08.03.01 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56)
  12. 2008.02.27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3)
  13. 2008.02.27 [펌] 연보(年譜)로 보는 연산군의 생애 (수정중)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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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08.01.16 왕과 나 VS 왕과 비(妃) 비교분석: 역사에로시트콤인가? 새로운 해석인가?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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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2007.11.09 장희빈 VS 장녹수 - 그녀들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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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 6권 - 연산군편 참조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권세도 없는 일개 궁인이었던 폐비 윤씨의 왕비 간택도 그렇지만 그녀의 폐출, 사약으로 인한 죽음에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 군주이자, 최초된 폐출된 왕인 연산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다.



2007/11/09 -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2007/11/09 -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2007/11/09 -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2008/03/11 - 연산군의 광기를 깨우는 폐비 윤씨(금삼의 피)에 대한 진실은?
2008/03/24 - 폐비 윤씨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부제: 폐비는 인수대비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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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야사 일부분.
이것들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태종>

태종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가 헛발질한 것도 적음. 태종 그거는 제발 지워라 쪽팔리다 했는데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가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적음.


하도 사관이 따라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말타고 거기까지  쫓아오는 사관....



<세종>


북방 개척한다고 도망가고, 모친상 핑계로 낙향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上參)에서 부터 과업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했다.
밤 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들고 나선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나도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 하려한다.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더 시킨다.


흔히 청백리라고 알려진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처절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그리고 나름대로 참 비리가 많은 황희

황희가 청렴결백 두루뭉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해요~
자기 사위가 사고친걸 무마하려다가 파면당하기도 하고,
수령에게 땅을 받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네요 ;
만화로 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알게된 건데
항상 좋은면만 보여주던 사람들이 이런다니까 좀 실망이기도 하고 그래요 ㅋㅋ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을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중이었는데

태종임금님이 특별히
충녕[세종대왕] 을 모시는 하인들한테 충녕이는

삼시 세끼 고기 꼭 챙겨먹이라고 안 그럼 밥 안 먹는다고 ㅋㅋ
충녕이에게만 고기 먹는 걸 허락한다고하고

또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상을 물리고 반찬 다시 가져오라고 하고
결국 고기반찬이 없던 밥상을 먹고 나서는 길에는 기운이 없어서 못 움직인다고
주저 앉아주시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 고기 당신없인 못살아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삼시 세끼 꼬박 고기를 드셔야했던 세종대왕님 ㅋㅋ


친경 한다고,소 끌고 밭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배고픔을 못견뎌,
밭갈던 소를 때려 잡아서 국 끓여 드심



<문종>



문종은 부인 복이 정말 없었음.


문종의 부인은 용모가 그리 예쁘지 않아서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마음을 얻지 못헀는데

자나깨나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골몰하던 그녀가 쓴 방법은 주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그 가루를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기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기 등등......  그러다 걸려서 폐출당했음.


근데 좀 불쌍 ㅠㅠㅠ 그리고 그 후에 또 고른 봉씨는 너무 다혈질이라

세자와 성격이 안맞았고,


그 후에 세명의 후실을 들였는데 그중 권씨와 겨우 아이가 생겼음

근데 문제는 다혈질 봉씨로, 임신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 자기도 임신했다고 거짓말하고

외간남자 엿보고 대낮부터 술주정등등 문제가 많이 생김.

그래도 두번이나 폐출시킬순 없어서 그냥 세종이 눈감아주고 있었는데 일이 터짐

궁녀중 동성애자인 궁녀를 불러들여서 사부작사부작 한거임...... ㄷㄷㄷ 결국 걸려서 폐출됨.



<세조>



세조가 왕이 되기전에 문종이 죽은지 나흘 뒤에,

단종의 즉위식이 있었던 날 (당시에는 수양대군이라 불림) 세조는

"대행의 은덕을 어찌 말로 다 할수 있으랴? 나더러 바르고 충성스러우며 지식이 남다르다고

항상 더불어 의논하셨지. 진법을 만들었더니'제갈량인들 수양보다 나을까?' 이러시는거야.

또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하셨어. 형제간의 정이 이와 같았거늘 흐규긓그그"

........... 음. 조,좋은 자기 칭찬이다 !!  


하루는 신숙주 한명회(세조의 오른팔격)와 술을 마시다가 신숙주의 팔을 비틀고는

아프냐며 자기팔도 비틀어보라 했는데 진짜 했는데 일단 술자리가 끝난뒤 생각해보니

괘씸해서 신숙주가 뭐하고 있는지 몰래 알아보라고 했는데 이미 신숙주는 한명회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밤에 책을 보는 습관을 오늘도 한다면 그대의 목숨이 위험해지리라

는것을 전해들어 불을 끄고 자고 있어서 화를 면할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건 너무 간단히 쓰여있어서 제가 좀더 자세하게 고쳤어요)


세조는 후궁이 단 한명 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조선의 왕비가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고 나와있었음.

정희왕후는 좀 여장부인듯.



<연산군>



성종이랑 연산군이랑 오랜만에 밖에 바람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했다고...


엄청 꽃미남이었다고 함 여리여리한 미소년


연산군은 시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그가 우는 연기라고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울어

연회장이 통곡의자리가 되기도 했다고한다.



<중종>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오면 눈물흘림.
버선발로 뛰어남감



<명종>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하나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고 명종은 그거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본투 댄싱 ㅋㅋㅋㅋㅋㅋ  

꾀병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 받음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임.



<효종>



나르시즘에 빠져서  항상 거울을 보고 웃음 [한마디로 왕자병]


인조를 닮아 얼굴이 예뻤는데 지 예쁜거 알았다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울을 끼고 자기 얼굴보며 만족하며 웃었대요.



<숙종>



따뜻한 온돌방에서 신하들이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려서 얼음장에서 일하게 만들었음




<정조>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저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했으나 오래도록 계속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실험정신이 참 투철하시군녀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해 숙제 내줘 숙제 제대로 안하면 개망신 줘

술 못마시는 신하한테 술마시라고 강요 기절할 때까지 마셔

활 못 쏘는 신하한테 활 연습시켜

술을 무진장 좋아라 해서.
정약용에게,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서 원샷을 강요
그래서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함.
그때당시 필통에 술붓기라면..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거랑 맞먹는것.


학식, 인품, 외모 딸리는건 건강이 약한것 밖에 없음



출처 : 엽혹진 '병풍뒤향냄새'님이 쭉빵에서 퍼오신 글
         http://blog.naver.com/khs9182/8010704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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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사랑에 살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최정미 (유레카엠앤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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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옷을 입은 칙릿 소설 (※Chick Lit; chick + literature)은 젊은 여성을 겨냥한 영미권 소설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한 여인이 있었다. 신분의 그늘이 재능을 압도하던 시절, 왕비가 되기에는 조금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탁월한 지성과 재능으로 이를 극복한 여자, 장옥정.

역사는 그녀를 아름다움에 의존해 치맛자락을 휘둘러댔던 희대의 요부로 기록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장옥정의 내면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자들은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의 리더십을 배우고,
여자들은 <사랑에 살다>를 통해 시대의 알파걸 장희빈의 지성과 열정을 배워야 한다."


장희빈, 역사가 왜곡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실 1, 그녀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조선 시대의 알파걸이었다

역관의 딸로 태어나 침방나인이 되었고, 훗날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의 어머니였으며, 6년여 동안이나 왕비의 자리에 머물렀으나 희대의 요부 장희빈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 장옥정.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계비(繼妃)였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장희빈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료는 인현왕후의 삶을 그린 '인현왕후전'이 전부. 그런데 이 소설은 인현왕후를 모시던 한 궁녀가 썼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누가 썼든, 아마도 '인현왕후전'은 철저히 그녀의 입장에서 쓰인 승자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영화로, 책으로, TV 드라마로 그려진 장희빈은 이렇게 편향될 수밖에 없었던 기록에 기대어 세상에 둘도 없는 요부로, 조선시대 최고의 팜므파탈로 박제되었다.


작가 최정미는,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인현왕후전'의 대척점에서 장희빈의 억울했을지 모를 사연을 대변해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서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해설을 기반으로, 장옥정이라는 한 여인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1688년, 이순이 즉위한 지 열네 해째 되던 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온 궁궐을 들뜨게 했다. 왕자의 탄생이었고, 훗날 숙종 이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의 탄생이었다! 서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왕자의 출산이 남인들의 복귀를 열어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람들은 옥정이 미인계로 단번에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치마폭에서 놀게 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천하의 이순을 모르고 하는 낭설이었다. 오히려 이순에게 옥정은 서인에게 긴장감을 유발시켜 권력 독점을 막는 데 유용한 방패막이일 수 있었다. -p.237


몇 번에 걸쳐 TV 역사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장희빈'은 음모와 술수가 능하고 투기가 심한 악녀였던 데 반해 인현왕후는 온화하고 덕이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악독한 요녀는 오히려 인현왕후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컨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였는데, 죄상이 드러나자 성종께서 종사를 위해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폐출했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던 행동까지 했으니 종사에 죄를 얻었다. 이에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저로 돌려보낸다."

이 상반된 견해에 대해 작가 최정미는 이렇게 단언한다. 장옥정은 패션 감각과 재능, 영민함으로 왕비에 등극한 조선 최고의 알파걸이었다고. 더불어 이 당당한 여인의 죽음은 한 여자로서 한 남자에게 주었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이순은 복잡한 머리를 털고 편전을 떴다. 옥정과 가볍게 농을 주고받으면 머리가 가벼워지려나. .. 모처럼 응향각에 든 이순이 소주방에 일러 주안상을 내오라 했다. 평소에도 옥정이 영민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룰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 갖췄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근심을 털어놓고자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옥정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꺼낸 이야기였다. .. 그런데 옥정은 의외로 말귀를 잘 알아듣고 응수도 제법 잘했다.

이는 김인호 교수의 장희빈에 대한 평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500년의 조선 역사 중에서 최고의 어머니와 최고의 여성상을 또 한 사람 꼽는다면 그녀는 바로 장옥정 즉 장희빈이다. 특히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못하고 정치적 훈련이 전혀 없던 시절, 그래도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남성의 국왕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후세에 남긴 장옥정이야말로 오늘날 다시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라 보인다."
가난한 역관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를 둔 장옥정.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관과 특유의 영민함 그리고 국왕 이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진실 2, 그녀는 조선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다

장희빈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알려진 사실은 그녀가 역관 장현의 종질녀였고, 침방나인으로 궁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침방나인에게 주어진 소임은 왕실의 옷과 이불을 만드는 것이었다. 팩션을 써 나가는 데 있어, 장옥정이 침방나인이었던 점에 착안해 옷을 만드는 여인, 즉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돌아보게 되었다. 패션은 현대 독자들, 특히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다. 조선시대에 디자이너 혹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여인 장옥정.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역관인 아버지와 최하층 계급인 천민 노비를 어머니를 두었음에도 신분의 굴레에 함몰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개척, 당대 최고 지성 집단의 독설과 공격을 온몸으로 받았으면서도 끝내 조선 최고의 여인인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매혹적인 여성에 재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스토리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현대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서 죽어갔다는 비극성은 그녀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그 비극성이란 그렇게 재기발랄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 장옥정이 국왕 이순이라는 최고 권력가를 만나게 되고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가, 권력가의 이기에 의해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진실 3, 그녀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전하는 처첩 간의 갈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시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셨다. 전하가 잃으신 것은 없으시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한과 모욕을 준신 것도 전하시고, 희빈 장씨에게 역시 광영과 상처를 번갈아 주신 것도 전하시다. 전하는 나와 희빈 장씨를 번갈아 쥐었다 폈다 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내셨다. 내가 중전의 자리를 다시 찾으면 기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어. 위안이 되는 것은 있지. 가문이 다시 일어서고 왕비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대신 전하께서는 적절한 시기마다 왕비전의 주인을 바꾸어 환국을 일으키시고, 그 반대급부로 왕권을 극대화하셨지. 희빈 장씨와 나 모두 그분의 희생양인 것이야....."

다시 환궁하여 중전 자리에 오른 인현왕후의 회환 어린 말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성은 단순히 숙종의 여인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 각파가 벌이는 권력쟁탈의 상징이었다. 권력과 함께 그들의 운명은 부침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 여인들은 모두 권력의 희생양으로 혹독한 업보를 치르고 말았다. 요녀가 아니라 정객으로서, 나아가 미모보다는 시대를 넘보는 재주로서 장옥정은 자식을 왕으로 만들었고, 잠시간 정권 교체라는 신선한 광풍을 역사에 남겨놓았다. 진정 멋진 여성의 운명은 미모보다는 시대와 역사 앞에 얼마나 정열적이었던가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장옥정의 죽음을 새롭게 바라본다. 옥정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진정 사랑 때문이었다고.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이순과 옥정의 대화 장면이다. 이순이 옥정에게 죽음을 명한 뒤 옥정이 되묻는다. "그것으로는 죽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이유를 말씀해주시오! 어찌해서 내가 죽어야 합니까?" 왕은 왕세자를 위해서 죽어달라고 말하지만, 옥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미 없이 커갈 자식을 두고 눈에 밟혀서 어찌 떠납니까? 그리는 더욱 못해드리겠습니다." 이때 이순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는다. "나를 위해 죽어다오, 옥정아! 내가 너의 죽음을 원한다. 그것이면 되겠느냐?"

시대의 알파걸이었던 옥정은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다. 이순을 위해 죽어주겠다고. 이것은 시대에 의해 희생된 죽음이 아니라, 사랑 앞에 정열적이었던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장희빈은 정치적 야망 때문에 죽음에 내몰린 것이 아니라 순결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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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사극의 배반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정두희 외 (소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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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장희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미 영화로 2번, 드라마로 5번 제작되어 온갖 음모와 질투의 화신의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신분상승을 꾀했던 진취적인 여성으로 우리 앞에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원했던 장희빈, 시대가 원했던 장희빈의 실체를 파헤친 이 책은 사극와 역사의 미묘한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장희빈 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종화 (범우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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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 장편역사소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1백여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궁중과 조정의 거유, 석학과 재상, 충신과 모사, 미희와 요녀, 음부 등 온갖 군상의 인물들의 파노라마 속에서 어머니의 정부와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가, 궁녀의 신분에서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희대의 요녀 장희빈을 유장한 문체로 생생하게 형상화했다. KBS에서 방영인 100부작 드라마 장희빈(김혜수 주연)의 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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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거의 6개월간 블로그를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방치 중인 파란토마토입니다.
실은 요즘은 싱싱한 파란 토마토라기 보다는 멍들어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린 느낌이지요. 음하하...


요즘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생 정향이라는 분이 인기던데...

바람의 화원신윤복의 여인, 정향






갑자기 그동안 기생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게 되었어요.




작년 한 해에만도 두 명의 황진이가 탄생했으니....
매력적인 기생들이 너무 많아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네요^^.

다들 아름다운 배우들이지만 예전 배우들 구경도 할 겸,
특히 유명한 역할 혹은 작품에 출연한 분들만 몇 몇 분을 선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누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본격 기생은 아니었지만 기생이 될 뻔했던 난정이 역할을 맡았던 여인천하의 강수연씨입니다.
(어찌나 동안이신지~)

여인천하의 난정이와 윤원형강수연씨와 이덕화씨



하지만 요건 맛배기구요, 강수연씨는 사극 연기를 상당히 많이 했었고,
실제로 기생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대근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연산군에서 기생 출신의 후궁 장녹수 역을 맡으셨죠.
너무 요염하신가요? ㅋ

영화 연산군에서 이대근과 강수연연산군과 장녹수



보너스: 여인천하에서 난정이 친구 옥매향 역을 맡았던 박주미씨입니다.
이 분은 너무 단아하셔서 양반댁 규수 같은데요?

여인천하 기생 옥매향옥매향 역할의 박주미




장녹수 역할은 연산군 만큼이나 매력적인 역할이라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멋진 여배우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참으로 즐겁게 보았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씨입니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강성연과 정진영



장녹수 강성연정말 매력적이죠?



한편,  故 유니씨도 멋지고 매력적인 장녹수 역할을 제대로 해주셨습니다.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찌나 맛깔스럽게 연기를 해주시던지...
아직도 깔깔거리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장녹수에서 유동근씨와 짝을 맞추어 연기해주셨던 장녹수다운 장녹수 박지영씨도 빼놓을 수가 없죠^^

박지영 장녹수박지영 장녹수




기생이 장녹수 밖에 없냐구요??


그렇진 않죠^^


아름다운 기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황진이가 남아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며, 풍류에 예술적인 면모까지 갖추었다던 황진이...
황진이 역을 맡은 분들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도금봉,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그간 황진이 역을 맡았던 배우들




황진이 포스터황진이 장미희



지금보면 좀 낯 뜨겁고 웃긴 포스터지만..
그 당시에는 도도한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작품, 영화 황진이에서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장미희

황진이

황진이




지금에 비하면 여러 모로 꾸밈새가 촌스럽고 포즈가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세련된 미모를 빛내주시는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생 치고는 너무도 도도하고 품격있는 모습이군요.


한편,
작년에 새로이 태어난 예인 황진이, 하지원씨입니다.

황진이하지원



제가 상상하는 황진이와 딱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인 황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보너스: 황진이를 질투하는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씨입니다.

부용 왕빛나멋드러진 춤을 추고...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아마도 벽계수를 유혹하는 모양입니다.


이 분 눈이 정말 크고 이쁘시네요.
황진이의 요염함과는 다르면서도 색다른 여성스러움이 흐르는 분입니다.


귀여운 송혜교씨가 황진이를 맡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화, 황진이입니다.

송혜교의 황진이 포스터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리 봐도 귀여운 작은 마님으로 보입니다만...
제 눈에 황진이 역할의 기생으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요.


이 분처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황진이가 예전에도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너무도 착하게 생긴 선우은숙표 황진이;;

선우은숙 황진이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기생은 아닙니다만...
왠지 이 분도 후보에 넣고 싶어지네요..


왕의 남자 공길이 황진이는 어떠십니까? 좀 징그러운가요? ㅋ



하하하^^;;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지금 즉시 투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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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VS 인수대비는 정말로 라이벌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아니라 성종에게 미움받아서 쫓겨났다!??

인수대비와 폐비 윤씨


연산군을 다룬 그 동안의 많은 작품들에서처럼 인수대비(전인화)는 이번에도 폐비 윤씨와 가장 대립하는 인물로서 폐비를 궁 밖으로 내치는 장본인이며, 흔히 폐비 혹은 연산군과 역사의 라이벌로 비유되기도 한다.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폐비 윤씨의 강한 성품에 불만을 품었고, 폐비 윤씨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미워했다. 인수대비는 이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그녀를 사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임금 성종과 왕실 최고 어른이자 막후 실력자인 시어머니 정희대비(양미경)를 제치고 며느리와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우며 파국을 주도했고, 결국은 모두의 반대를 무릎쓰고 폐비를 사사시켰다는 것' 모두를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드라마는 패자의 편이라 양쪽 모두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기에 사건과 기록의 이면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폐비 윤씨를 죽음으로 내몬 역사 속 주인공은 과연 인수대비였을까?

일개 후궁에서 일국의 국모로 승천하다

폐비 윤씨(구혜선) 중전 책봉식


조선 초기 친여식이나 집안 여식을 후궁으로 들이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유력한 친지나 집안 권세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궁한 간택 후궁들은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성종의 간택 후궁으로 가장 먼저 입궁한 폐비 윤씨 역시 고려 시대때부터 꾸준히 벼슬을 해온 양반 가문 출신이다. 폐비 윤씨의 부친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할 만큼 경서와 문학에 밝았고 판봉상시사의 벼슬까지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윤기견의 둘째 부인으로 태종을 도운 공신 '신숙주'를 배출한 고령신씨 가문의 여식이다. 폐비윤씨가 입궁 당시 내명부 종2품 직위에 해당하는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은 것은 '상등급(上等級) 사대부집안' 출신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파평윤씨 명문가 출신의 정현왕후 윤씨는 같은 해 6월에 입궐했는데 그때 나이 12살로 통상적인 간택후궁의 나이보다도 더 어렸다. 그녀의 부친 윤호는 당시의 권력을 움켜쥔 실세인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양미경)의 조카뻘이 됐다. 두 숙의 윤씨가 입궐하던 당시 성종에겐 이들보다 앞서 승은을 입은 후궁, 엄귀인과 정소용이 있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한명회에 의해 간택 후궁으로 등장한다.)


숙의 윤씨(폐비)는 아들을 낳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종의 후궁인 소용 정씨와 엄씨였다. 소용 정씨는 초계정씨로 역시 명문가의 여식이고, 소용 엄씨는 영월 엄씨로 소용 정씨와는 소꿉친구이며 중인 집안의 여식이었다. 미색으로 따진다면 정소용쪽이 훨씬 더 미려했으며 소용 엄씨는 그저 그런 외모를 지닌 여자였다고 한다. (그럼 집안도 정소용이 좋고 미색도 뛰어난데 왜 엄귀인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는겨?)

그로부터 얼마 후 공혜왕후가 승하하며 교태전 자리가 비자 유일하게 회임 중에 있던 폐비 윤씨가 중전에 오른다. 후궁에서 세자빈이나 중전을 삼을 때 먼저 자식의 유무, 나이의 고하 등을 따져 간택한다는 세종조 관례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때 대왕대비 정희왕후가 내린 교서에는 폐비 윤씨의 후덕함과 겸손함이 왕비의 자질에 적합하다고 적었지만 내심 자신의 가문 출신인 정현왕후 윤씨가 중전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는 추후 조사 예정)


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폐비 윤씨는 중전에 오른지 석달만에 원자(연산군)를 낳으며 권력이동의 축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왕의 생모, 대비가 될 사람이라는 것만큼 막강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사서에선 상등급 사대부집안 출신이지만 자신을 뒷받침해줄 조정 세력이 미미했던 폐비 윤씨가 원자를 보호하기 위해 과도한 애정과 집착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폐비 윤씨는 왕비가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성종 8년 4월 덕종(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숙의권씨 처소에서 왕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중궁과 왕자를 모해하려 한다는 투서가 발견되면서부터 몰락의 길로 걷기 시작한다. 당시 사건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미진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때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측은 두 후궁을 적극 감싸는 한편 원자를 중전에게서 빼앗아 궁밖으로 보내 버린다. 성종은 중전을 폐비시켜 빈으로 강등시킨다는 교지를 내리지만 대신들은 벌떼같이 달려들어 원자를 낳은 왕비를 폐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라며 반대해 철회된다. 이는 원자를 낳은 지 4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므로, 폐비 윤씨가 권력을 탐해 일어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폐비 윤씨가 대군을 낳은 2년 후 일단락됐던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며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성종 10년 6월 윤씨는 중전에서 폐출돼 사가로 쫓겨났다.

왕과 나 폐비윤씨(구혜선) 폐출 장면

왕실의 윗전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사가에서 폐비와 만나지 못하도록 폐비가 폐출되는 날, 피접을 위해 궁 밖에 나가 있던 원자를 궁으로 불러들이는 한편 아직 100일도 채 되지않아 어미와 유모의 손길이 필요했던 둘째 대군을 손도 쓰지 못하게 해 5일 뒤 사망에 이른다. 성종은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에 숙의 권씨를 새로운 후궁으로 간택하여 입궁시킨다. (정희왕후는 '왕과 나'나 '왕과 비'에서처럼 인정많고 자애로운 시할머니가 아니었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수대비가 폐비 축출에 관여되지 않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당시 권력의 실세인 정희왕후나 성종의 뜻이 컷을 가능성이 많다. 기록을 살펴보아도 인수대비가 여러 사안에 의견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성정을 간섭한 것은 정희왕후 승하 이후다. 또 왕비의 투기든 후궁들의 이간질 때문이든 왕과 폐비 윤씨 간의 언쟁이 잦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성종-폐비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폐비 축출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 역시 실록에 정씨의 오라비를 속량하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그 출신이 천민이기에 중전자리를 노린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다. 이들이 폐비 윤씨를 향한 성종의 총애를 질투할 순 있지만 중전을 탐탁치않게 여긴 삼대비의 총애를 기반으로 자의든 타의든 중전폐출의 선봉에 섰을 것으로 보여진다.


성종은 왜 폐비윤씨를 버렸나

성종은 조선조를 통틀어 부인이 가장 많았던 왕 가운데 한명이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씨와 폐비윤씨 정현왕후 등 계비 2명, 그리고 9명의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신하들중엔 왕이 후궁을 너무 많이 두는 것에 대한 우려의 상소를 올린 사람도 있을 만큼 여자를 좋아했던 정력가이다. (어우동과의 로맨스에서 이생원이 진짜 성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성종이 그만큼 여자를 좋아했기에 그런 얘기도 떠도는 것이겠지.) 성종의 이런 성향들이 실제 폐비 윤씨의 투기로 이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정의 분란을 끊이지 않게 한 원인이 됐고 이는 부부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폐비의 사사가 성종의 의지였는지 인수대비의 뜻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정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폐비 윤씨를 다룬 사극마다 해석이 분분하다. 이덕화가 주인공인 드라마 한명회(1994년)에서는 인수대비(김영란)도 폐비(장서희)를 싫어했지만 무엇보다 성종(박진성)이 폐비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선 것으로 표현했고, 박지영, 유동근 주연의 장녹수(1995년)에서는 성종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지만 인수대비(반효정)의 의견이 강했던 것으로 표현했다.

왕과 비(1998년)에서는 성종(이진우)이 굉장히 미화되어 성종은 폐비, 사사 둘 다 원치 않았으나 인수대비(채시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폐비를 사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최근작 왕과 나(2007년)에서도 성종(고주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수대비의 명을 따른 것으로 나온다.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는 성종은 중전을 폐출시키던 당시 폐비에 대한 증오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폐비가 끝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던 방술책 문제에 대해 배후 조사를 청한 대신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중전이 후궁 측을 모함한 것으로 몰아간 비상과 투서에 대해서는 중궁전의 궁녀들을 고문한 끝에 원하는 답을 들은 후 참수했다.

또 성종은 중전의 폐위문제에 대해 대간과 성균관 유생 65명이 죄도 명확하지 않은 중전을 폐비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대상소를 올렸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폐출돼 사가로 나간 폐비에게 일절 도움을 허락하지 않는 냉정함을 보였다. 심지어 폐비 윤씨가 폐출되기도 전 후궁간택령을 내리기까지 했으며 윤씨를 사사한 다음날에는 그의 일가 모두를 매우 혹독한 지역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가족과 떨어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폐비는 기초 식량조차 부족했고 백성들은 가엾다고 그녀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성종은 이조차 금지시키고 벌을 내려 폐비를 내외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고 하니 폐비 사사에 성종의 뜻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폐비 사사 후에도 성종은 여전히 폐비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상을 보여주었는데, <성종실록> 성종 20년, 5월 16일자에 이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옛날 일을 생각하면 한밤중까지 두려워하며 홀로 앉아 잠못 이룬 날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영원토록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령에게 어찌 원통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겠는가?"

이런 마당에 폐비의 불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오직 인수대비였다는 것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관들과 이를 무분별하게 영상화한 작품들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성종이 그토록 총애했던 폐비 윤씨를 미워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용안에 상처를 냈다는 것은 성종 스스로 발표했던 교서에도 없던 내용이며 투기를 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실록이 분명한 설명을 해주지 못 하고 있다. 비상사건 역시 명확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종은 처음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나중에는 열렬히 미워했다는 슬픈 진실이다.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서 필요한 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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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39;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39; 목차 보기



Posted by 파란토마토

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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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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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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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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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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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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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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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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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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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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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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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Posted by 파란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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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랜만에 이산이나 왕과 나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볼 마음이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산이 지겨워서 왕과 나로 돌렸는데... 왕과 나는 지루한데다 유X하기까지 했거든요..ㅡㅡ;


어쨋든 왕과 나...

연산군에 대한 기대감 하나로 욕하기를 늦춰왔는데..
오늘 자 보고 완전 포기... 했습니다.

기대 끝.


왕과 나는 시청률 불패인 연산군을 가지고도 어찌 이리도 재미없게 만드는지... 위기감은 커녕, 드라마로서의 아무 클라이막스도 못 만들어내고.... 정말 지겹더군요.

'왕과 나'팀이랑 SBS 사극팀은 이 드라마 끝나면 1년 간 산에 들어가서 도 좀 닦고 내려왔으면 좋겠네요.

밋밋해빠진 연출,

역사적인 사실까지 다 바꿔서 시작해놓고도 인물에 아무 매력도 없고, 사건에는 개연성도 없고, 기대감조차 없는 지겨운 대본,

눈에 힘만 주면 카리스마 생기는 줄 아는 연기자들,


10년 전의 왕과 비보다도 더 촌스러운 한복 때깔과 디자인,


전부 무릎꿇고 앉아 있어도 오골오골 부딪힐까봐 불안한 조잡한 세트장......


정......... 말............... 대. 략. 난. 감.


그러나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연산군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미 익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만...
제가 다시 보고 싶은 장면이라 왕과 비에서 몇 장면 추려보았습니다.


우선 연산군이 폐비 윤씨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성종의 묘비문 문제로 우연히 폐비의 존재와, 자신의 생모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전에는 폐비의 일을 100년간 거론치 말라는 성종의 명 때문에 폐비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것이죠. 그 때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연산군은 저녁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지금의 대비(정현왕후)가 자신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동안 속아서 살았던 것에 대한 억울함, 20년간 자신을 향한 왠지 모를 수근거림, 늘 거리감 느껴지는 성종의 태도, 왠지 모르게 포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정현왕후의 품, 진성대군만을 이뻐해주던 인수대비의 태도 등...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면서 원통함과 분노가 터져나오는 순간인거죠.


왕과 비에서 폐비 윤씨에 대해서 물어보는 연산군(안재모)

"폐비에겐 아들이 있었다지요.?"
"폐비가 누구냐?"


라는 대사에서는 소름이 쫙~~~~~~ 끼칩니다.

이 짧은 대사에서 안재모가 어찌나 서늘하게 잘 해주시는지 그 당시의 위기감이 고대로 느껴지면서
안재모에게 마구 마구 애정이 솟아납니다.




안재모 뒤에 납작 엎드린 내시가 김자원으로, 지금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난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사는 효령대군 역으로 나오는 분입니다. 정하연 작가님이 쓰신 드라마 장녹수나 왕과 비에서의 김자원은 그리 간신배 같지는 않고, 그냥 주인의 명에 고대로 따르면서 적당히 비위 맞출 줄 아는 귀여운 내시였습니다. 저는 연산군과 김자원의 귀여운 장난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왕과 나에서는 내시 김자원도 너무 비호감으로 그리더군요. 전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것이.. 아무리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지만 그렇게까지 캐릭터를 재수없게 묘사할 필요가 있는지..;; 유동윤 작가님은 도대체 왜 항상 아주 나쁜 놈이 있어야 사건 진행이 가능한 지 모르겠어요. 정상적인 인물들이 필연적으로 엮이면서 사건이 진행되어야 흥미진진할 텐데, 날 때부터 나쁜 놈이 일을 저지르고 나머지 인물들이 속아서 사건이 발생하는 패턴이 50회 째 반복되고 있으니 드라마에 힘이 안생기지요.


그로부터 10년 후,
금삼의 피는 야사에서만 전해지지만 사극에서는 극적 재미를 위한 필수 요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으로 성장하였고,
왕권과 함께 자라지 못한 양심은 폐비 윤씨의 피를 본 순간 시커멓게 변해서 폭발해 버렸습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우는 연산군 동영상




확실히 이 장면은 참 표현하기 힘든 장면인 것 같습니다.

안재모의 연기도 놀라웠지만 약간.......은 좀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고...
왕과 나의 정태우는 뉴스에서 하루 종일 '정태우의 광기 연기' 어쩌구 떠들더니..ㅡㅡ;;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고 분노와 광기가 일시에 폭발하는 장면은
안보던 사람도 끌어당길 수 있는 부분인데.... 심하게 밋밋하더군요. 광기 연기는 커녕 목소리에 힘을 잔뜩 넣어 억지로 울려고 노력하는게 너무 표시가 많이 나서 시종일관 눈에 힘줄 생기도록 애쓰고 있는 정태우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정태우 광기어린 눈빛 연기
정태우 연산군 광기어린 눈빛 연기


폐비의 마지막 부탁인 금삼의 피를 원자(연산군)에게 전해달라는 유언도 야사에만 전해오는데... 야사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흥미진진한 건 사실입니다.


폐비 윤씨(김성령)가 금삼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 동영상

"어머니.. 울지 마세요.
원통해도 나는 웃으면서 죽습니다.. "  섬찟한 장면이지요.



이 동영상에서 폐비에게 차마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인물이 불운한 신하 이세좌입니다.


이게 끝.



오늘같이 글짧으면
뭔가약간 찜찜하나
이런날도 있어야지
그래야지 나도살지
쓰는사람 편리하고
독자역시 즐거운글
1 분만에 쓰고읽어
너도나도 시간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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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왕과 나’ 폐비 윤씨의 죽음을 연산군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폐비 윤씨 사사, 과연 역사 속 기록과 드라마 속 그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폐비 윤씨의 죽음이 야사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연산군은 어떻게 그녀의 죽음을 알았을까. 정말 금삼의 피를 보고 알게 된 것인가?

정태우 연산군의 광기어린 눈빛 연기


왕과 나(왕과 비) VS 조선왕조실록 및 야사서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 야사서(기묘록, 송와잡기, 파수편, 아성잡기)의 기록을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비교해보아요~
 



1.
폐비는 정말 성종의 얼굴에 흠집을 내었을까?

기묘록
폐비 윤씨와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삼은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 빠지지 않는 두 가지 사건은?

바로 폐비 윤씨(구혜선)가 성종(고주원)의 '용안에 흠집(손톱자국)을 낸 사건'과 '금삼의 피'로 불리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건네진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비단이나 적삼은 현재에 남아있지 않다.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금삼의 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정사에는 없지만 '금삼의 피'는 여러 야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성종 용안에 흠집을 낸 사건은 연려실기술의 기묘록에 기술되어 있다.

기묘록에는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를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크게 노하여..."라고 적혀있다.




2. 폐비에게 사약을 건넨 이세좌 부인의 한탄
"어머니가 죄없이 죽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느냐"


폐비윤씨의 죽음을 다룬 야사서들도 재미있다. 이들 야사서에서는 폐비윤씨의 죽음을 정당하게 표현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폐비윤씨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다.

기묘록에는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고 기록했다.

와잡기서에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한 이세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세좌가 사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약을 내려 죽였다"고 답하니 그 아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없이 죽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을 않겠는가"고 울었다' 고 한다.





3. 김처선이 소화에게 사약을 바쳤다?

드라마 속 김처선(오만석 분)은 평생을 사모한 소화(구혜선)에게 직접 사약을 바쳤다. 어쩔 수 없이 사사를 명한 성종(고주원 분)이 평생의 정인 소화가 가는 마지막 길을 처선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는 역사와 다르다. 그렇다고 작가가 허무맹랑하게 만들어낸 역사 왜곡은 아닌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하라는 어명을 좌승지 이세좌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세좌는 폐비를 사사할 경우 연산군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성종의 명을 따르기를 주저했다. 이세좌는 "나는 폐비의 얼굴을 모른다"라고 핑계를 대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길 두려워했다. 이세좌의 말에 성종은 이세좌에게 폐비윤씨의 얼굴을 아는 내시 한명과 동행할 것을 허락했고 결국 이세좌는 내시 한 명과 함께 폐비의 사가로 향했고 사약을 건넸다. (참 운도 없지;;)

김처선이 윤씨와 관련하여 사료에 언급된 사례로는 <성종실록> 성종 10년(1479) 6월 3일자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종이 김처선을 시켜 대비에게 윤씨 폐비에 관해 보고했다는 기록이다. 사료상으로 볼 때, 김처선과 폐비 윤씨가 관련된 사례로는 이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기록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할 수 없다.

그럼, 김처선이 사약 마신 폐비 윤씨를 등에 업는 <왕과 나> 제51회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인가?

김처선(오만석) 등에 업힌 폐비(구혜선)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8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종 임금이 윤씨의 사사 현장에 파견한 내시는 김처선이 아니라 조진이라는 인물이었다. 사료상으로 볼 때에, 김처선이 윤씨의 최후를 목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왕과 나'의 유동윤 작가는 이같은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극을 만들었다.





4. 조선을 피로 물들인 금삼의 피(피묻은 적삼)는 실제로 있었을까?
야사 속 윤씨 유언 "연산군이 목숨을 보전하면 피묻은 적삼을 보여 내 원통함을 말해달라"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그녀의 머리모양과 비단옷은 역사 왜곡)


야사 속에는 피묻은 적삼이 연산군에게 전해진 에피소드가 상세히 나와있다.

기묘록에는
'사약을 먹은 폐비 윤씨가 피묻은 수건을 어머니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연산군)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폐비 윤씨의 묘인 회릉은 연산군이 거동했던 태조의 묘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후 어머니 신씨가 나인과 통해 연산군에게 원통함을 호소하며 수건을 올렸더니 연산군이 놀라서 슬퍼했다.

파수편에도 관련된 글이 있다. "윤씨가 죽을 때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하얀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폐주에게 전해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고 적혀있다. 재미있게도 파수편은 폐비윤씨 사사사건을 두고 성종을 꾸짖고 있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어린 연산군은 친어머니인 폐비를 몰랐을까?

동시대를 다룬 드라마인 '왕과 비'를 포함하여 대다수 연산군 드라마들이 '금삼의 피'를 받은 연산군이 그때서야 윤씨의 죽음을 알게된 것으로 그린 반면에 '왕과 나'는 그 시점을 대폭 앞당겼는데 드라마 '왕과 나'는 역사와 다르다.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피묻은 적삼 일화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지 않다. 다만 즉위 후 연산군이 성종의 묘지문 관계로 우연히 폐비 윤씨의 아버지 이름을 듣고 궁금해하다 폐비 윤씨 사사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실록(연산군 1년 3월 16일)은 이 때의 연산군을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廢位)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水剌)를 들지 않았다'고 전한다.

기묘록이나 파수편 등의 야사서에도 폐비윤씨 사사가 알려진 시점이 연산군이 왕으로 등극한 이후로 기록돼 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연산군 정진영을 제외하고 드라마 한명회의 연산군 이민우, 장녹수의 연산군 유동근, 왕과 비의 연산군 안재모는 폐비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외할머니 신씨에게 피묻은 적삼을 받으면서 폐비 사사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6. 정현왕후와 연산군의 관계는 좋았을까?

조선왕조실록은 폐비윤씨에 이어 중전에 오른 정현왕후(이진)가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고 나와있다.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를 친어미로 알고 따랐다고 적고 있다. 이는 별로 믿어지지는 않는 기록이다. 반정의 주역들이  '연산군이 정현왕후나 성종, 인수대비의 구박 때문에 비뚤어졌다'고 적지는 않을 것 아닌가.

재미있는 야사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어머니가 폐비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다.

아성잡기에는 연산군이 성종에게 거리에 나갔다가 어미 소의 젖을 맛있게 빠는 송아지를 본 일을 고하며 "미물도 저렇게 키워주는 어미가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나를 키워준 어머니가 안 계신단 말이냐? 송아지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송아지도 소리를 내어 응하니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7. 연산군은 원래 성격이 광폭했을까?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안 후 성격이 광폭해졌다고 전하는 야사서도 있다. 파수편에는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죽음을 안 후 성정이 광폭해졌으나 등극 초기엔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왕으로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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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연산군 일기는 그의 시적 재능까지도 유치하다며 연산군을 깎아내리기는 하지만 사실적인 기록을 살펴보아도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누명(?)을 벗기는 어려워보인다. 애써 그를 비하할 필요도 없을 만큼 연산군의 기행은 무자비하고 엽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산군이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똑똑히 안 것은 그가 즉위한지 10년이 지난 4월이다.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왕과 비 연산군(안재모)와 인수대비(채시라)


이처럼 야사는 폐비윤씨에 대해 정사와는 사뭇 다른 시각으로 담고 있다. 대중들이 알고 있는 폐비 윤씨에 대한 이미지는 흥미를 위해 야사를 마구 수용한 작품들의 책임이 크다.

야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위험하다. 정사가 아무리 승리한 자의기록이라고는 하나 정사를 바탕으로 하고, 야사를 참고로 해야 올바른 역사의 인식이 가능할 것이다. 야사는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유추하는데 도움을 받고 풍부한 살을 붙이는데 도움을 주는 사서이다.

그러나 야사에 적힌 기사들을 '진실한 역사'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왜곡이 시작된다. 야사는 어디까지나
정사에서 지워지거나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야사는 결과론적으로 그린 이야기가 많고, 또한 책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편협한 시각으로 야사를 100%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역사왜곡의 지름길이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정사와 야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행간에 숨은 뜻을 잘 찾아내고, 그에게서 교훈을 얻는 것으로 그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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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Posted by 파란토마토

전국에 계신 신사숙녀 언니옵하 누나형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왕과 나에 성인 연산군이 등장합니다.. 제가 이 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지요.. 흑흑.ㅠㅠ
왕과 나에 연산군이 등장하려고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봅니다. 
마치 10년 만에 보는 님 보듯 두근두근하는 내 심장 같으니라구~ 음하하..

역대 연산군 모음 - 최고의 연기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연산군역 배우들 모음

위에서부터 정진영, 정태우, 임영규, 이민우, 유인촌, 유동근, 안재모, 신영균



연산군은 조선왕조 아니 우리나라 전 역사를 다룬 사극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여러 연산군들끼리 연기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실은 역대 연산군으로 투표를 하고 싶었는데 왕과 나 연산군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요상한 사명감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아기다리고기다리었습니다. (30년도 더 된 유머죠. 눼눼. 죄송합니다.) 다른 작품에서의 내시 김처선과 김자원도 비교해보세요~

우선 객관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작품과 캐릭터 성격에 대해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각자의 매력이  흘러 넘쳐서 고르기 힘듭니다.

먼저 오래전 영화에서 활약해주신 신영균 연산군..
광기는 별로 안보이는 신영균 연산군


당시 사극은 뭐 옷을 찰흙으로 만들었는지.. 왠 한복 색깔이 저리 눈부신 보라색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고증까지 잘 하기가 쉬웠겠습니까? 고증 따윈 필요없어~ 적당히 이해하시면서 봐주시고요.

저 때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역 완역되어 있지도 않았고, 지금에 비해서 영화 제작 환경도 나빴기 때문에 고증을 따지는 건 저한테 '이효리 춤 따라하면서 표정까지 뇌쇄적으로 지으라'고 하는 요구와 같다고 봅니다. 어쨋든 이 분의 연산군 연기는 과잉된 듯한 느낌이면서도 확 폭발하는 부분이 없으니 좀 갑갑합니다. 딱히 나쁘다고 생각은 안하지만 특유의 구식 연기 스타일 때문에 몰입은 상당히 힘드네요.


유인촌씨는 왕 역할을 도맡아 하셨던 분인데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라는 영화에서도 활약해주셨고, 저는 잘 모르지만 연극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SBS 드라마 임꺽정 초반부에서도 연산군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다음은 각각 영화 연산일기와 임꺽정에서의 유인촌씨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

임권택 감독님의 연산일기에서의 연산군 유인촌(갑자사화 일으키기 전 문제의 술 따르는 장면이죠.)



연산군 연기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이 연기를 보고 최고라고 감탄에 감탄을 하시더군요.  


자원아, 활을 준비해라. 조선 최고의 활에 독화살을 재어서
우리 어머니를 죽인 원수들의 가슴에 피꽃을 피우자.  피꽃을.

뭬야? 그 놈 초상 끝나는 대로 사약 한 사발 퍼 멕여라.
우리 어머니가 먹고 죽은 펄펄 끓는 부자탕을 그 놈 아가X에 ㅊ넣으란 말이다!

소름이 쫙 끼치는 대사들입니다...


금삼의 피를 보고 통곡하는 안재모 연산군..
(야사서 파수편에는 금삼의 피를 본 임금이 그 천을 부여안고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나옵니다.)

저는 좋고 안좋고의 판단은 보시는 분들께 맡기고 제 느낌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유인촌씨의 연기는 감정의 진폭이 굉장히 큽니다. 뒤에 보실 유동근 연산군이 너무 정적이라서 실감이 안나고, 젊은 연산군 이민우(당시 19세), 안재모(당시 20세)의 연기가 너무 폭발적인 쪽에 치우친 느낌이라면 유인촌씨 연기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진짜 맛이 살짝 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최근에 연산군 중에서는 정진영씨의 연산군이 유인촌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실록에 쓰여진 연산군의 행동들을 토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갑자사화 당시 그는 이미 제대로 미친 X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자신을 욕할까봐 두려워하여 궁녀들이 웃는 것도 싫어했다고 합니다. 신언패를 채우고, 훈민정음 사용금지를 시킬 정도로 심한 언론 탄압을 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을 아무도 못믿으니 모든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그게 뜻대로 안되면 죽이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여인을 그 다음 날 찢어죽이고, 그런 식이죠. (편집증, 경계선 인격장애, 사회성 부족, 자기애적 성격장애, 애정결핍, 의존적 성격장애 등 다수 짐작 가능)

김처선에게 그가 그렇게 가혹했던 것도 그런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붙일 곳 없던 연산군이 김처선을 믿고 의지했기에 김처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뼈아팠던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김처선에게 활화산같이 분노를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연산이 장녹수를 그렇게 사랑한 것,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의지한 것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연산군을 굉장히 단순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냥 원래 천성이 나쁜 놈, 섹스에 미친 놈 정도로만 몰아갔거든요. 그러나 현대의 사극작가분들은 연산군 행동의 배후 심리를 추측하여 대본을 쓰신 것입니다. 그 당시 연산군이 단순하게 나쁜 놈이라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신병적인 문제가 일시에 폭발하여 그리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시각에서 보니까 각 작품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유인촌씨의 연산군은 경계선 인격장애 + 자기애적 인격장애, 유동근씨의 연산군은 편집증 + 애정결핍 + 자기애적 성격장애, 이민우, 안재모의 연산군은 편집증 + 경계선 인격장애, 정진영씨의 연산군은 애정결핍 + 사회성 부족 + 의존적 성격장애 + 피해망상증 등이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랬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세요. 틀린 점 지적이나 올바른 정보 또한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광기어린 눈을 번득이는 안재모 연산군과 김자원


유동근씨는 역시 실망을 시키지 않는 연기자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연히 재방으로 장녹수를 잠깐 봤는데 10년이 넘은 연기임에도 어색함이 없으시더이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성종, 폐비 윤씨, 인수대비 연기, 장녹수에서 박지영씨의 장녹수, 인수대비의 연기는 전 조금 어색했어요. 뭔가 구식 연기라서 민망하더라구요. 다른 배역의 연기와 당시 상황 묘사, 스토리 전개까지 다 따졌을 때 현재 왕과 비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을 보고 나면 폭군 연산군이 불쌍해보일 것입니다.


유동근의 연산군은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괴로워하는 연산군입니다. 폐비의 자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상처와 열등감, 폐비를 신원시키고 폐비의 복수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갑자사화가 끝난 후 평화가 찾아올 줄로 기대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향락과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폭발력을 너무 안보여주는게 좀 아쉽습니다. 유동근씨는 무슨 주문을 받았는지 너무 절제를 하십니다.
확~ 폭발해줘야 할 시점에도 조곤 조곤 속삭이면서 타이르듯 말을 하거든요.

늙은 내관의 말처럼 공포가 대궐 안팎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 자신이 그 공포의 희생자였으니...

장녹수 보고 있으면 연산군은 성군 같고, 정귀인 엄귀인이 임금한테 바락바락 대들어서 맞은 것 같다니까요. 설마 연산군이 저 장면에서 정귀인한테 곱게 타일렀겠습니까? 이민우, 안재모는 이럴 때 확 폭발을 해주니까 시원하더군요.  위의 동영상과 비슷한 부분입니다. 안재모의 연산군과 유동근 연산군이 거의 똑같은 대본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는지 비교해보세요. 간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내시 김자원도 여기서는 그닥 나빠보이지 않습니다.

안재모 연산군에게 충언을 고하는 김처선 동영상 (삭제됨.


이민우는 한명회(1994)에서, 안재모는 왕과 비(1998)에서 귀신같은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글 쓰기 전까지는 안재모 연산군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글쓰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안재모, 이민우는 광끼(광기)가 너무 안보였다는 점에서 -1점. 연산군이 너무 정상적으로 보였거든요. 그냥 정상인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길길이 날뛰는 것으로 보였을 뿐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제적 인간으로는 안보이네요.

한명회에서 엄귀인, 정귀인, 인수대비 찾아가서 행패 부리는 이민우 연산군


한명회 연산군에서 짧게 지나간 장면을 왕과 비에 두 영상으로 나누어 보여드리겠습니다.

 

엄귀인, 정귀인을 죽이는 연산군 장면 대본 보기(왕과 비)


 


연산군 폭발씬에서 꼭 나오는 세 장면: 금삼의 피 확인, 이세좌한테 술 따뤄주기, 인수대비한테 술 따뤄주기에서 가장 유명한 금삼의 피는 실록에 안나옵니다. 월탄 박종화 작가님의 소설 금삼의 피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이는 야사에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극은 정사와 야사를 섞기 때문에 이 장면도 흥미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지만요.

금삼의 피


이 장면 말고 나머지 두 장면은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인수대비에게 정귀인, 엄귀인의 아들을 끌고 간 연산군이 술을 따르라고 시키면서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연산군일기에 적혀져 있습니다. 성리학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알던 조선시대에 저런 짓을 하다니 연산군은 잘잘못을 떠나서 쫓겨날 만 했다고 봅니다. 윗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그의 행동이 결국 자기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이죠.


한편, 정진영씨를 보십시다.

왕의 남자 정진영 연산군 강성연 장녹수


저 눈빛 보이시죠?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저 눈빛,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불안해보이는 행동이 딱 제대로 정신 나간 인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이 부분이 너무 적응이 안되서 정진영씨 연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폭군을 왜 정신병자로 만들어놨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ㅋㅋ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 시점에 연산군은 이미 맛이 갔다고 보는게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정신병 때문이든,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든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의 눈빛 아닙니까?


아.. 한 명을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그려.. 흑흑..ㅠㅠ

그래서~~
저같은 괴로움을 겪으실 여러분을 위해서 복수 선택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투표도 하시고 결과도 재미있게 즐기시길 바랍니다.




Posted by 파란토마토

정태우는 왜 매번 비극의 주인공 역할만 맡을까요?


정태우가 왕과 나의 성인 연산군으로 등장한다는 소식은 그간 신문, 뉴스, 인터넷(저 포함)에서 하도 떠들어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드라마 왕과 나 비판을 많이 했지만 정태우가 나온다니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리네요~ 으흐흐~~

니들 이제 다 죽었다고 말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연산군 눈빛..


정태우는 '사극하고 싶지 않다, 슬픈 왕 역할은 정말 다시는 하기 싫다'고 합니다. 하긴... 그는 사극이 싫을 만도 합니다. 그동안 맡은 역할 중에 행복한 역할이 없었거든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매번 요절하는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만 맡았으니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이민우는 한명회에서 연산군,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을 맡아 광인(狂人) 역할이라도 해봤으니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싸이코 연기는 배우들이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역할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태우는 매~~번 죽거나 쫓겨나는 역할이네요. 그것도 이순신처럼 비장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삼촌한테 쫓겨나서 죽는 노산군(=단종) 역.. 흑.ㅠ


그가 맡은 역할들을 한 번 볼까요?

* 출연작(시대순)

1) 대조영 - 발해 - 검이 역, 2007
2) 태조 왕건 - 통일신라~고려 - 최응 역, 2000
3)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4)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5)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 단종, 1984 (댓글 지적받고 수정)
6) 한명회 - 단종 - 단종 역, 1994
7)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9) 왕의 여자 - 광해군 - 페세자 질 역, 2003


이중 대부분이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 통일신라 ~고려 - 최응 역, 2000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단종(이렇게 어릴 때 쫓겨나진 않았는데; 너무 깜찍하군요ㅋ)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한명회 - 단종 역, 1994
위의 사진은 조선왕조오백년 설중매 캡쳐인지 한명회 캡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아기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좀 더 어릴 때인 설중매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댓글 지적받고 수정했습니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왕의 여자 - 광해군의 아들 페세자 질 역, 2003


정태우도 참 잘생긴 배우인데 요즘 사람들 취향이 아니라서 큰 스타가 안된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의 인물은 사극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연기력도 타 젊은 배우들과는 천양지차라서 단연 눈에 띕니다. 이 계열의 배우들에는 정태우, 이민우, 안재모 등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사극 이미지로 굳어질까봐 사극은 더이상 하기 싫다고 하지만 솔직히 사극에 너무 잘 어울리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사극에는 젊은 피가 필요합니다. 제발 사극에서 활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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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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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로 보는 연산군(燕山君)의 생애(生涯)


이 분의 블로그에 스크랩글이 많아서 이 글도 이 분이 원본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찾은 곳들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글이므로 이 글을 원본 출처로 링크시켰다. 대부분의 연산군 기록이 그렇듯이 이 글 역시 야사의 기록을 실록과 섞어넣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야사서나 실록의 일부분은 내가 찾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직접 링크를 시켰으며, 연대 또한 틀린 점이 많아서 실록에 맞게 수정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정확히 남아 확인 가능한 부분은 실록에 링크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고전번역원의 야사서에 링크했다. 앞으로도 조금씩 실제 기록을 찾아서 링크시킬 예정이다.



1476년 성종 7년 (1세)

11월 7일 삼경 오점(0시), 조선왕조 9대 임금 성종(成宗)과 후궁에서 중전이 된 윤씨(尹氏) 사이의 적장자로 탄생. 아이때 부르는 임금은 무작금(無作金). 이름은 융.

성종은 첫 중전이었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韓)씨를 여읜 후 후궁들의 투총 속에서 숙의(淑儀)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 우여곡절 끝에 연산군을 얻었다. 성종의 이때 나이 19세. 보위에 오른 후 이해 봄까지 대왕대비(大王大妃)인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喜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고, 예종비(睿宗妃)인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왕대비(王大妃)로,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있어 정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의 세자빈으로서 다음 대의 중전이 될 막강한 자리에 있다가, 세자(德宗으로 추존)가 죽고 그 아우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수빈(粹嬪)으로 지낸 뒤,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자 다시 궁 안으로 들어와 아직 어린 성종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477년 성종 8년(2세)

2월 21일. 연산군이 창진(瘡疹)인 듯한 병을 앓자 성종은 종묘(宗廟)·사직(社稷)·목멱산 등에 기도를 드리도록 명했다.  여기서 병의 차도가 없자, 이조판서 강희맹(姜希孟)의 집에 피병(避病)을 갔다. 이때 원자의 피병지가 된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은 명문(名門)인 데다 그의 아내 안(安)씨는 효와 덕으로 알려진 부인이었다. 원자가 실꾸러미를 삼켜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씨 부인이 구해 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또 원자가 강희맹의 집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곤 했었는데 뒷날 왕위에 오른 후 그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금띠를 소나무에 둘러 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는데, 그 문의 이름을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고 하기도 했다.

3월 14일. 중전 윤씨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하는 날인데, 이 날 윤씨는 나인을 시켜 자신을 투기하고 성종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穰書)를 가져오게 했다. 윤씨의 나인 삼월이는 윤씨 일문과 짜고 투서로써 후궁들이 중전과 원자를 해치고 있다고 소문내게 하고, 비상과 방양서를 구해 준다. 비상 바른 곶감과 굿하는 방법이 적힌 방양서를 중전의 침실에서 발견한 성종이 격노하고 이를 안 삼대비 역시 대노하여 윤씨는 폐출 위기까지 몰린다.

3월 29일. 삼대비의 후원을 받은 성종이 중전 폐출을 명했다. 이때 윤씨는 수빈(壽嬪)으로 강등되고 자수궁(慈壽宮)으로 쫓겨갈 위기에서 승지(承旨) 임사홍(任仕洪) 등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복위된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윤씨는 말만 중전일 뿐이지 성종과 삼대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게 된다. 특히 성종은 아예 중전을 무시하고 생일날에도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으며 원자도 만날 수 없도록 한다. 자신은 다른 후궁들과 시첩의 방만 찾으니 윤씨와의 불화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1479년 성종 10년 (4세)

6월 1일. 원자의 모후 윤씨의 생일이었는데, 연 3년째, 이때도 성종은 하례(賀禮)를 정지하게 했다. 저녁에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윤씨가 그 방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윤씨는 성종의 얼굴에 상채기를 내는 정도의 대사건을 저지른다.

6월 2일. 마침내 윤씨 폐위를 결정하고 사저로 내쳤다. 윤씨가 궁에 든지 6년이고 곤위에 오른지 4년이었다. 처음엔 윤씨 어머니 신(申)씨와 함께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가 뒤에 오라비 삼형제의 출입까지 허락하였다.

이 무렵 원자가 피병을 마치고 환궁한 것으로 보인다.

1480년 성종 11년 (5세)

11월 8일, 윤호(尹壕)의 딸로서 숙의가 되어 있던 윤씨가 중전으로 정식 책봉된다. 이럴 무렵 사저로 내쳐진 윤씨 일문에서 거듭 복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행동을 꾸며댄다. 폐비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소문, 폐비가 문 밖 출입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나돌아, 성종과 삼대비는 여러 번 행실을 조심하라는 언문을 내린다. 윤씨 삼형제를 하옥시키기도 했다.

1482년 성종 13년 (7세)

8월 16일. 마침내 윤씨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다. 좌승지 이세좌(李世佐)·내관 조진(曺疹) 등이 명을 받들었다. 이때의 사약이 비상이었다. 윤씨 삼형제는 각각 외방에 유배되고, 신씨는 폐비를 건원릉(建元陵) 가는 길에 염장한 뒤 큰아들 구의 유배지 장흥(長興)으로 유배된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침이다.

폐비 윤씨 사사에 얽힌 많은 일화 중에, 좌승지 이세좌의 경우를 소개한다. 윤씨의 염장까지 지켜보고 오라는 어명을 행하고 이튿날 늦게서야 집에 돌아온 이세좌에게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 계속해서 폐비의 죄를 논한다고 하던데 어찌될 것 같습니까?" 이에 세좌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지금 내가 어명을 받들어 사약을 내리고 오는 길입니다."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 보복하지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원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거조(擧措)를 하는 것입니까!" 하며 통곡했다. 뒷날 폐비 사사에 관련된 자가 모두 화를 입게 되는데 이세좌도 그의 아들과 함께 죽게 된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2월 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대의 정승·학자들이 세자 사부(師傅)·빈객(賓客)이 되어 세자의 학업을 돕는다.

허침(許琛)과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 세자 시절 각각 필선(弼善)과 보덕(輔德)으로 있었던 사람들이다. 강(講)의 방법이 허침은 부드러워 어린 세자를 융통성있게 가르쳤고 조지서는 강직해서 일체의 나태함도 용서하지 않았다. 세자는 이를 두고 [趙之瑞大小人也 許琛大聖人也]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뒷날 갑자년(甲子年)사화 때 조지서는 베임을 당하고 , 허침은 여러 사람을 구했으나 그 역시 울화로 피를 토하다가 죽고 만다.

3월 30일.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다. 성종은 정희왕후 등 삼대비를 편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새로 짓고, 연회도 자주 열었다. 뒷날 연산군이 주색에 빠지게 된 것이 어릴 때부터 연락(宴樂)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실제로 정희왕후가 죽은 다음해 완공된 창경궁은 연산군의 환락의 놀이터가 된다. 기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풍월정(風月亭)은 월산대군의 처 박씨를 찾아 범하게 하는 불륜의 연회장이 되기도 하고,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風原尉) 임숭재(任崇載)의 풍광 좋은 집,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 등은 연산군의 잦은 연회지로 제공되어야 했다.

1487년 성종 18년 (12세)

3월 1일. 병조판서 신승선(愼承善)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혼인 때 아침부터 비바람이 일어 모두들 언짢게 여기고 있는데, 성종이 신승선의 집에 어서를 내렸다.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이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어서를 내리고 나자 오후부터 비가 개어 무사히 혼례를 마칠 수 있었다. 세자빈 신씨에게는 수근(守勤)·수영(守英)·수겸(守謙) 세 오라비가 있었는데, 아버지 신승선은 성종조에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 오라비는 연산조에 각각 좌의정, 형조판서, 개성 유수를 지내게 된다. 그 세도 부림이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연산군이 축출될 때 신씨 일문 또한 큰 화를 입는다.

1489년 성종 20년(14세)

5월 20일. 7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폐비 윤씨의 무덤을 <윤씨의 묘>라 칭하고 속절(俗節)에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는 백 년 뒤에도 명을 고치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윤씨일가가 모두 유배 중이라, 속절이 되어도 제사 지내는 이 없어 연산군 2년 무렵에 가면 윤씨 묘는 허물어질 형국이 되어있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행적 기록은 그다지 많은편이 아니다. 그중 연려실기술의 것을 소개한다.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에 따라다녔다. 어느날 세자가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세자를 핥았다. 세자가 발로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해서 [사람이 좋아 따르는 짐승을 너는 어찌 잔인스럽게 대하느냐!]고 소리쳤다. 뒷날 연산군은 이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

1494년 성종 25년 (19세)

12월 24일. 성종 승하했다. 29일 연산군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조선왕조 10대 임금이다. 임금이 되자마자 연산군은 성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水陸齎)를 올릴 것을 명한다. 불가에서 물, 뭍의 여러 귀신들에게 음식을 차려 올리며 경을 읽는 행사가 수륙재라 성종 밑에서 숭유(崇儒)를 행해온 삼사(三司)에서 반대하고 나선다. 연산군이 이를 묵살하고 재를 강행함으로써 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연산군은 이에 귀양형·장형 등으로 맞섰다.

1495년 연산군 1년 (20세)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처음으로 자신의 친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안다.
4월 11일, 폐비· 사사· 묘 이름 정할 때의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9월 20일, 안치된 폐비 윤씨 어머니 신씨와 윤씨 삼형제를 풀어 주었다.

1496년 연산군 2년 (21세)

윤 3월 13일. 내시를 시켜 폐비 묘를 살펴 보게 하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 장차 해골이 나와 여우와 삵에게 먹힐 지경이다]하여 천장(遷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는 성종의 유교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삼사의 관원·유림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1497년 연산군 3년 (22세)

4월 9일. 폐비의 묘가 이장되고 신주와 사당이 세워져 그 이름이 효사묘(孝思墓)·회묘(懷墓)로 붙여진 이날까지 반대 상소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만큼 많았다. 여기에 대간들의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귀양길에 들었던 임사홍을 그 아들 임숭재와 가까웠던 까닭에 중용코자 했으나 또 유림의 세력과 부딪친다.

12월 18일. 원자 황(惶)을 낳자, 사면· 복직령을 내리는데 임사홍의 직급이 따라서 높아졌다. 이무렵 성종 때 탄핵을 받아 중책에 쓸 수 없도록 하명한 바 있는 유자광(柳子光)도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와 충훈부(忠勳部)에 속해 있었다.

1498년 연산군 4년 (23세)

7월 11일.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시작이다. 성종실록 편찬시 성종 때 사관이던 김일손(金馹孫)의 사초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세조의 불륜 행각과 소릉(단종 어머니의 묘) 복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되어 김일손이 붙잡혀 옴으로 피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에 검열된 몇 개의 사초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조義帝文)이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사초와 관련있는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조종(祖宗)을 멸시한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한(漢)의 유방(劉邦)이 초(楚)의 회왕(懷王)을 친 것에 비유한 글이다. 여기에 또한 김일손의 사초에 [정희왕후의 국상 중에 이극돈(李克墩)이 장흥 관기(官妓)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좌찬성으로서 실록청 당상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관여하고 있던 이극돈이 이 사실을 접하고 격노하여 그 부분을 삭제코자 함으로써 실록 편찬의 낭청(郎廳)이던 이목(李穆)·권경유(權景裕) 등의 미움을 사는 등 김일손의 사초는 대사건의 불씨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또한 유자광은 사적으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멸시받아온 처지인데가 이극돈의 비밀까지 알고 있어 여러모로 권위 회복의 일대 전기를 마련할 시기였다.

연산군은 유자광·윤필상(尹弼商) 등으로부터 사초에 관한 모든 일을 전해 듣고 이때를 신진사류의 기세를 꺾는 최적기로 생각한 듯하다. 죽은 김종직으로부터 그의 제자 김일손·이목·권경유·성중엄(成重奄)·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강겸(姜謙)·임희재(任熙載)·허반(許磐) 들은 항상 자신에게 반대만 해온 새파란 말단관리나 신진관리들, 아니면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 따진 유생 출신들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일이 연산군으로서는 더 없이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일에 관련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난 것이지 결코 그 원인이 이극돈의 사감, 유자광의 사감, 연산군의 병적인 폭정 등 단순한 말로써 설명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7월 26일.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강겸·허반 등의 주살이 명해졌다. 이어 김종직의 불온 서책, 문제의 사초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 등과 이 7월의 사건에 격분하고 모의하던 어린 유생, 즉 유학(幼學) 10여명까지 뒤이어 처형되는 것 등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이에 반해 유자광·윤필상 등은 연산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으니 무오년에 훈신들에 의해 신진사류가 화를 입었다 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도 하고, 사초가 발단되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史禍)라 하기도 한다.

뒷날 사관들은 성종 9년(1478년) 무술년에 유자광· 임사홍이 유배된 일과 이 무오사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무술의 옥은 정류(正類)가 사당(邪黨)을 다스린 것이요, 무오사화는 사당이 정류를 모함한 것이다.]

한편 이때 사호의 여파로 유배길에오르는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여 후일 시가 연산군에게 보여져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연산군의 광포한 기질은 무오사화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갖가지 고문과 형벌도 이때부터 다양화되어 도적의 무리가 전국에서 창궐하던 연산군 6년을 거쳐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까지 가면 극에 달한다.

12월 23일. 인혜왕대비(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했다.

1499년 연산군 5년 (24세)

1월. 원자 황이 천연두를 앓는다. 월산대군의 집에 피병을 간 듯하다.
2월. 무오사화를 전후해서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연산군과 가까이지내며 도총관(都總官)으로 병권을 흔들던 유자광이 뇌물사건과 관련, 탄핵받아 물러난다.

3월. 편찬 과정에서 사화를 불러일으켰던 성종실록이 완성되었다.

5월. 월산대군의 처 박(朴)씨에게 콩 50석 등을 주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인데 풍류를 좋아했다. 풍월정이 그의 집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연회하는 일이 잦았다. 월산대군은 이미 성종 19년(1488년), 연산군 13세 때 죽었고 그 처 박씨가 후사도 없이 혼자 있으면서 피병 온 원자를 간병했다. 전부터 탐할 뜻이 있던 연산군이 박씨를 처음 범한 것이 이 무렵인 듯하다.

이후, 연산군이 박씨를 위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준다. 재물을 내리고 박씨 동생 박원종(朴元宗)에게도 많은 혜택을 주었다. 대간들이 이를 두고 끈질기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듣지 않는다. 원자의 피병지가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거리다.

연산군의 탐욕 생활이 이때부터 극성스러워진 듯하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연산군에는 숙부가 되는 제안대군(齊安大君) 등이 연산군의 탐욕을 채워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궐 안의 정자는 연산군의 주연, 기녀들의 알몸놀이장이 되었다.

1500년 연산군 6년 (25세)

1월.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장자 진성대군(晋城大君)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여 사저로 출합(出閤)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에 의해 진성대군이 보호된 셈이다.

이 해 문경 새재 부근에서 도적 홍길동(洪吉童)의 무리가 창궐했다. 6월 21일, 홍길동이 잡히지만, 이후 오랜 세월 홍길동은 도적의 세계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501년 연산군 7년 (26세)

7월.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 어무적(魚無跡)이 시국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어무적은 부(賦)에 뛰어난 문학가였지만 서얼이라 천대받았다. 백성들이 핍박받는 내용의 부를 썼다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글 몇 편이 남아 전해온다.

이 해쯤 연산군은 제안대군 사저의 가비(家婢)였던 장녹수(張綠水)를 궁에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품계를 뛰어넘어 녹수는 내명부의 높은 지위의 후궁이 되어 갖은 세도를 부린다. 이미 색에 눈이 먼 연산군은 장녹수가 행하는 모든 뇌물 사건을 덮어주고 원하는 집은 아무 집이나 장녹수에게 주었다.

1502년 연산군 8년 (27세)

원자 황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까지 황은 월산대군 저에 있다가 돌아온다.

1503년 연산군 9년 (28세)

연산군에게는 약간의 자폐증세(自斃症勢)가 있었던 듯싶다. 창덕궁 후원에서 갖가지 기이한 연회를 벌이다가 궐밖의 가까이 있는 집을 모두 허물게 했고, 도성 밖 인가를 백리 바끙로 내쫓고 그곳을 사냥터로,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백성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알몸의 여인들만 옆에 두려 했다. 이때 없어졌다 후에 다시 생긴 고을이 양주(楊州)·파주(坡州)·고양(高陽) 등이다.

내시들이 따라와 바른 소리를 간하는 것이 듣기 싫어 <신언패(愼言牌)>를 목에 걸게도 했다. 신언패의 글은 이렇다.

  口是禍之門   입은 재화를 부르는 문
  舌是斬身刀   혀는 목을 베이는 칼

  연산군 말년에는 중신들도 이 신언패를 차야 했다.

1504년 연산군 10년 (29세)

전국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모두 뽑아 궁에 두었으니 궁은 기녀들의 세상이었다. 중신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 중 미모가 나은 부인을 범하기도 했다. 미인을 구하는 일은 임사홍 부자가 주로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 부자는 옛 직위를 회복하여 연산군의 측근에 있게 된다.

3월 20일, 연산군이 임사홍 부자의 도움으로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를 만나 폐비 때의 일을 얘기듣는다. 다음날 새벽, 폐비 사건 당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귀인·엄귀인의 투총과 크게 관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두 여인을 잡아들여 그 아들들을 시켜 때려 죽이게 했다. 이어 연산군은 몸이 편치 않은 인수대왕대비에게로 달려가 폐비의 일을 격렬하게 항의했다.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쓰러진 인수대왕대비는 그로부터 한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폐비 사사(賜死)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들추어 처벌하고, 이미 무오사화 때 귀양간 사람들까지 주살당하고, 그 이전에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도 폐비 사사 때 반대하지 않았다 해서 부관참시 당하는 이 사건. 이것이 갑자사화(甲子士禍)다. 이공으로 임사홍은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세도를 부린다.

1505년 연산군 11년 (30세)

4월 1일. 내시 김처선(金處善)이 연산군의 추태를 보지 못하고 간하다가 어전에서 연산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 정 2품 벼슬에 있었다. 연산군에게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알지만 주상전하 같으신 분은 처음 보겠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화가 나서 활로 김처선의 갈빗대를 맞혔으나 김처선은 "신은 죽음을 두려워 않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보위에 오래 머물지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했다.

또 연산군의 화살이 몸에 맞아 무릎을 꿇자 연산군이 "일어나 걸어라 이놈!" 했다. "주상전하께선 다리가 부러져도 일어나 다니실 수 있겠습니까?" 라고 김처선이 말하자 연산이 그 혀를 끊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게 했다. 시체를 범에게 주고 <處>자를 못 쓰도록 명했다. 김처선의 아들 이공신(李公信)도 죽이고 가산을 적몰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 1년 (31세)

7월 1일. 월산대군 처 박씨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되었으므로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 아우 박원종이 이 무렵 거사를 결심한 듯하다.

여름, 가을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귀양간 사람들마저 무리를 이루어 화적떼가 되는 등 해서 도성을 치려 했다. 그 중 대표되는 이가 이장곤(李長坤)이었는데, 이 무리가 클 것이라는 풍문이 있었고, 연산군마저 이장곤에 대한 시를 쓸 정도였다.

9월 1일.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보위에 올리는 것을 주골자로 하는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며칠 전 연산군은 자신의 종말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인생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민심이 이미 기울어진 때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辛允武)·유순정(柳順汀)·홍경주(洪景舟)·김감(金勘) 등의 혁명 주체 세력들의 움직임은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었다.

임사홍이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임숭재는 그 전에 병으로 죽었다) 신수근 형제와 연산군에게 총애받던 궁녀들의 가인(家人)들도 무차별 참수되었다. 연산군도 옥새를 내놓았고, 진성대군은 그의 어머니 자순대비의 재가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뒤늦게 혁명 세력에 동조한 유순(柳洵)이 영의정이 되었고, 좌이정도 역시 연산군 시절 우의정을 지내면서 많은 살상을 막아왔고 거사 당시에도 다른 뜻 없이 인명 피해를 막는데 더 힘쓴 김수동(金壽童)이 되었으며, 거사의 핵심 박원종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거사 세력에 붙어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마지막 세도를 누렸다.

연산군은 처음에 동궁(東宮)으로 밀려났다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쫓겨나고, 신씨 또한 폐비의 몸이 되어 정청궁(貞淸宮)으로, 폐세자된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각각 쫓겨났다. 진성대군 시절 신수근의 딸인 부인 신씨 덕으로 살아남아 보위에까지 오른 중종은 그 부인이 역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정식 중전 책봉을 하지 않은 채로 폐비시키고 새 중전을 맞아야 했는데, 그 폐비 신씨가 죽을 때까지 중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 간 자리엔 <치마바위>의 이야기가 남아 전하고 있다.

9월 3일. 폐위된 왕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했다.

9월 10일. 중종은 연산군의 재위 시절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산군의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불태우게 했다. 연산군은 임사홍 등으로 하여금 어제시집 간행 도감을 설치했고, 도승지 강혼(姜渾) 등으로 하여금 시를 쓸 때마다 화답하게 하는 등으로 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반정 후 그에 대한 많은 기록과 시들이 불태워져, 간신히 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만 그의 시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11월 8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여러 차례 복용하다가 6일 하직했다.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지내게 했고, 연산군을 수발했던 수행시녀는 3년간, 수행한 방자들에게는 백일 간 상복을 입게 했고, 중종 자신은 3일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했다.

왕조실록에는 강화 교동에서 장사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산군의 무덤으 그의 아내 신씨의 무덤과 함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해 있다. <燕山君之墓>라고 새겨진 비면 뒤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 씌어 있다. 정덕 8년이면 1513년이니까, 연산군이 죽은 지 7년만에 이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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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과 나에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의 원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알아보자.


세계일보 기사 일부 발췌: 원 출처는 제목에 링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SBS 사극 '왕과 나' 계기로 본 환관들의 세계


◆환관이 국왕 독살 주도?=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종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 점에서 독살설을 완전 허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재야 학자 이덕일씨는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등 600년 조선사에서 왕권과 신권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에 특히 국왕 독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예종 때 역시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 공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하지만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환관이 독약으로 영조(6년)를 살해하려 했던 모반사건을 연구한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조선 고종황제 폐위를 지켜보는 내시들. 경인문화사 제공

◆김처선과 성종의 관계는=극중 인물 김처선은 단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에 우호적이던 환관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김처선 역시 이때 지방 관노로 유배된다. 2년 뒤 복직된 그는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이른다. 특히 연산군 11년에 임금의 실정에 대해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직언한 충신’으로 알려진 김처선의 캐릭터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종이 반정 성공 후 김처선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청을 수차례 거부한 것도 그의 성품이 강직해서가 아니라 당시 만취해 실언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를 놓고 김처선과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된 성종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성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환관을 우대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 개입만은 철저히 막았다. 정희흥 교수는 “성종은 승정원으로 일원화된 왕명 출납을 편의상 환관이 대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등 환관의 정치 금지를 제도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이하 생략 -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내시들은 일부 악명높은 이름들(김자원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권력이 미약한 편이었고 왕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김처선에 대해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바램이다. 이는 비단 김처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사극의 주인공화 하면서 나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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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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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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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에 대한 단상(부제: 왕과 나의 권력욕 없는 죽음에 대한 불만! )
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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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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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폐비 윤씨 죽음에는 중요한 이유가 빠졌다!

폐비 윤씨를 새롭게 조명한 SBS 사극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구혜선)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폐비의 잘못을 떠나 그녀가 처연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울하던 차에 슬픈 장면 나오면 울어버려야지 작정하고 봤는데... 눈물은 안났다 ㅡㅡ;

폐비의 눈물과 한이 담긴 금삼의 피는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었다

 


왕과 나 OST 임형주 부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국모에까지 올랐다가 사모하는 임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은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폐비 윤씨의 일생도 돌아볼 겸 사약 마시는 장면을 잠시 돌아보자. (사진 출처는 디씨인사이드 왕과 나 갤러리) 오만석, 구혜선 두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푹 빠졌는지.. 내 가슴도 아프다.

김처선(오만석)이 따라주는 사약을 받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소화, 구혜선) 사진



폐비 윤씨(=소화)의 한많은 일생과 그녀를 그리워하는 성종(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쯧.)



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폐비 윤씨 동영상(장화홍련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전부터 폐비 윤씨(제헌왕후로 추존)와 연산군에 대한 글을 하나 쓰려고 했는데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은 폐비가 죽는 날까지도 못썼다.ㅋ 우리나라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어 낸 사건이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짧게나마 쓰기로 했(는데 길어졌)다.

왕과 나의 착해빠진 폐비 윤씨는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폐비 윤씨도 억울한 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그 깐깐한 사회에서 평민에 가까운 그녀가 왕비가 되었으니 그녀를 핍박하던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안봐도 뻔하다.

왕과 비의 폐비 윤씨(김성령)와 성종(이진우)



솔직히 악독하기로 따지자면 며느리 쫓아내고 사약까지 내려 죽이고 손자까지 구박했던 인수대비, 그 착한 인종을 들들 볶아 죽인(?) 것도 모자라 아들 명종을 허수아비 만들어놓고 20년 동안이나 해먹은 문정왕후, 정조 독살 혐의를 받고 조선 후기를 다 말아먹은 요녀 정순왕후가 으뜸 아닌가.

폐비 윤씨가 성격적으로는 좀 모난 데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우는 여우이되 남의 눈에 표시 안날 만큼 앞과 뒤가 다른 여우는 아니었나보다. 진짜 여우는 시어머니 비위도 잘 맞추던데...  인수대비(전인화)와 폐비의 문제를 외아들 시어머니의 질투로 인한 고부갈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수대비가 둘째 며느리 정현왕후(이진)는 아주 이뻐했거든. 제헌왕후가 폐비가 된 것은 그녀의 뻣뻣한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실록에는 폐비가 중전이 된 후 거만하고 투기가 심하며, 윗 어른께도 공경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뭐 왕도 쫓아낸 마당에 충분히 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게 뭐 그리 나쁜 짓이라고 원자의 어미를 사약까지 먹여 죽이냔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분명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켜줄 친척도 없던 그녀의 가정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 회릉.


왕과 나에서 폐비를 새롭게 그리겠다는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권력의 역학관계를 너무 못그려냈다. 유동윤 작가는 정치권력의 교체와 이동이라는 것이 음모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러한 여인천하식 전개는 유동윤 작가의 한계인가 보다. 지금 드라마 왕과 나처럼 모든 주요 인물들이 선한데 음모와 오해에 의해서만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장화홍련 수준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ㅡㅡ;;

설영(전혜빈)이나 정내관(안재모) 따위의 공작에 의해 나라의 중대 국사가 좌지우지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본다. 더욱이 세조에게 갑옷입힌 정희왕후(양미경), 한명회와 사돈 맺어 왕의 모후로 인생역전한 인수대비같은 정치고수들이 '저런 별 것 아닌 이유로 중전을 죽인 후, 대책없이 그 아들을 왕에 올린다'는 건 인수대비 지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폐비는 인수대비와 권력욕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과 비에서는 이 부분이 잘 그려져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생기는 알력,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이 진행되어야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왕과 비나 하얀 거탑에서처럼 소름끼치도록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어쨋든 폐비 윤씨가 죽었으니 조금 있으면 성종 죽을 것이고, 그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될 것이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일어날 것이고, 연산군이 폐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왕과 나는 겨우 한 달 후면 끝난다고 한다. 어우동 나오는 걸 두 달이나 보여줬다는데 제일 중요한 연산군은 겨우 한 달??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다. 김처선, 성종, 폐비가 주인공이라고 김처선 할아버지 나이를 몇 십년이나 젊게 회춘시켜놓고 김처선이 보여준 게 없다. 50회 내내 울기만 하더니... 김처선이 이제 와서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폐비 윤씨가 죽을 때 김처선이 너무 가엾고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할 운명에 시청자들이 가슴 아파해야 나머지 한 달을 버텨 나갈 텐데.. 주인공 김처선이 나와도 흡입력이 있거나 가슴 아프거나 하질 않고, (아, 물론 우는 건 불쌍하고 마음 아팠지),  (성인) 연산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과 나.... 그동안 뭐한거니? 여인천하에서 명종 20년을 10분만에 압축하더니.. 설마 왕과 나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직은 왕과 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두 배우가 열연을 보여주었고, 구원투수 (성인) 연산군의 활약(?)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악독해도 연산군의 복수는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구혜선은 그 어떤 폐비 윤씨보다 억울하게 죽었으니 연산군이 나와서 피바다를 만들 때의 카타르시스는 어느 때보다 강할 것이다.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김자원



이제 남은 한 달간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는지라도 잘 보여주어 그간의 평가를 만회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드라마를 살릴 마지막 희망은 (성인) 연산군이다. 연산군,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요~

미워도 다시 한 번.
왕과 나 화이팅!


왕과 나 vs 왕(王)과 비(妃)의 폐비 윤씨 죽는 모습 동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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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에서 끝까지 왕을 버리지 못한 충신으로 나온 내시 김처선(장항선)


조선시대 내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글쓰는게 부담스러워서 늘 미루다 보니 생각날 때 한꺼번에 올리게 된다. 간략한 책소개를 해놓고 나도 두고 두고 참고해야겠다.

백과사전에는
내시가 조선시대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소제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이라고 나온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대궐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내시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소개를 하려고 '내시'로 검색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내시(eunuch)'가 나온다. 그것도 무려 안성기, 이미숙 주연이다! 영화 소개를 읽어보니 비극은 비극인데 뭔가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eunuch

안성기, 이미숙 주연 영화 내시 포스터


옛날 영화 포스터는 색감도 색감이지만 어찌 이리 칙칙하고 촌스러운지...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시!! 밤이 두려운 내시들의 몸부림
잘려버린 생生, 잘려버린 사死, 그리고 여女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 남자(王)가 하나, 여자가 수백 명
내시들의 서릿발 같은 성, 뜨거운 여자들의 불같은 성..이라니..ㅋㅋㅋ

이건 뭐 야설도 아니고.. 뭐라구 할 말이 없다.ㅋㅋ
그래도 아리따우신 이미숙님과 안성기님께서 나온 영화기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 몇 장을 저장했다.

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안난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내시들의 모습은 주로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가는 목소리로 "마마~" "눼이~"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현재 왕과 나에서 조치겸(조상선) 역을 맡은 전광렬씨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내시들은 여자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자손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 물론 권력형 내시들만.


어쨋든 내시 관련 서적들을 몇 권 찾아보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내시와 궁녀

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우리나라의 내시와 궁녀를 다룬 책.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내시의 유래에서부터 내시가 되는 과정과 그들의 결혼생활, 묘지, 일화와 함께 궁녀의 유래, 출궁과 죽음, 궁녀의 선발과 입궁 과정, 등 내시와 궁녀의 삶을 빠짐없이 복원하였다.



관련글: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중보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궁중의 은밀한 존재였던 내시와 궁녀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이자 왕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던 내시와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에 출간된「내시와 궁녀」의 개정증보판으로, 지금 시기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목차 및 책 소개 더 보기(조선시대 유명한 내시들은 여러 명이었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송은명 | 시아출판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이인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인자 19인의 인물 열전, 막이 오르면 그들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역사의 숨은 실력가- 이인자.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왕건,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조선판 내각주의자 정도전, 당 태종의 원정을 좌절시킨 고구려의 거인 연개소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한명회 등 역사의 또다른 주인공 19명의 삶을 조명한 책.

목차 보기


내시
내시
이정우 지음 | 관동출판사

일곱 분의 군주를 모신 충신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이정우의 역사소설 『내시』상 권. 희대의 폭군 연산왕에게 올바른 군왕이 되기를 수없이 아뢰다가 결국, 연산왕의 칼날아래 목숨이 끊어지면서도 충언을 아뢰었던 내시 김치선의 애환과 삶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관련글: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과 나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

SBS 대하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왕과 나의 원작이 되는 소설) 조선시대, 숙명적으로 내시가 되어 상처 받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급변하는 정치 현장에서, 암투가 치열한 구중궁궐에서 비록 자신의 몸은 거세를 당했지만 인생마저 거세당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내시들의 학문, 야망, 사랑을 치열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왕과 나 김처선(오만선), 폐비 윤씨(구혜선)에게 고백장면 동영상


관련기사: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 
왕과나 연산군 폭군 이끄는 세기의 간신 김자원 등장으로 눈길 
(몇몇 기사에는 김처선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절대 아님.
김처선은 나이로나, 품계로나 김자원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음.)


왕과 나의 김자원...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전혀 간신배 이미지가 아닌 걸~!!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쩔쩔매는 김자원



덧1. 내시와 궁녀는 몇 년전부터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올해가 가기 전엔 읽을 수 있을까?ㅋ
덧2. 김자원은 권력형 간신이라기보다는 주인 비위 잘 맞추는 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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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오프닝 화면 타이틀


방송 삼사의 사극 (SBS - 왕과 나, KBS - 대왕 세종, MBC - 이산) 중, 사극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KBS의 대왕 세종이 기대됩니다. 세종대왕은 그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대라서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은 왕인데, 드디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납셨습니다.!!!


"니들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고 묻고 계신 세종대왕님



요즘 삼사에서 사극을 앞다투어 그것도 조선 초기(대왕 세종)부터, 조선 초중기(왕과 나), 조선 후기(이산)까지 골고루 보여주니 역사에 관심(만) 많은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챙겨보질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이건 양녕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동시대를 다룬 위대한 사극 용의 눈물과의 비교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OST에 대한 비교도 하고 싶지만 제 깜냥도 그에 모자라고, 또 대왕세종은 아직 초반부이니, 인물들과 설정만 비교하겠습니다.



1. 태종
유동근 태종과 김영철 태종
 
유동근(용의눈물): 그야말로 태종이 살아있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와 캐릭터였습니다. 태종의 인간적인 고뇌, 태종의 결단력, 태종의 잔인성까지 다 보여주며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인지를 알 수 있는 드라마였죠.

유동근표 태종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적을 막다른 골목으로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동생 넷을 가히 살인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게 다 죽이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들과 흔들리는 조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라고 하지요.

이게 실록에 나오는 말인지 그가 직접 한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은 정말 진심으로 죄업은 자신이 지더라도 후대가 평탄할 길을 닦아놓은 듯 합니다. (이전 사극에서도 이 대사가 나왔다는데 아시는 분은 좀 도와주세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악업을 지더라도, 그게 자신의 야심때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후대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요즘 세상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말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앞으로도 이보다 더 나은 태종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면서 울부짖는 태종의 명연기 보기



김영철(대왕세종): 궁예의 말투가 아직도 좀 남아있는 것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분도 유동근씨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인상깊었을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력 외에 대왕세종의 태종에서 아쉬운 것은 현재 냉정함과 까칠함만 보일 뿐, 유동근표 태종에서 보았던 치밀함이 다소 부족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를 도끼로 내려찍은 사건 때문에 굉장히 무식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똑똑했고,  그렇기에 태조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늙은 공신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고수였습니다. 지금 김영철표 태종처럼 대신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 다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사건을 지휘해 나가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태종의 치밀함을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 중입니다.



2. 원경왕후 민씨 : 최명길(용의눈물)최명길(대왕세종) 으로 10년만에 다시 연기.

최명길 원경왕후

이렇게 같은 사람이 같은 역을 두 번 맡는다는게 굉장히 드문 케이스죠. 정말 잘 어울리고, 10년 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캐릭터도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지지 않고 대드는 강단있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3. 세종(충녕대군) :

안재모 세종과 김상경 세종

안재모(용의눈물): 안재모는 여기서 역대 최고의 성군 세종 역을 맡고, 바로 다음 사극인 왕과 비에서는 최악의 폭군 연산군 역을 맡았죠. 어린 나이에도 둘 다 소화를 잘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 왕과 비와 동시대를 다루는 사극 왕과 나에서는 임금에서 내시로 신분이 폭락했지만 연기 하나는 끝내주죠? 그야말로 사극의 젊은 피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특징이 없었죠.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왕에 오른 것으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죠? ^^)

김상경(대왕세종): 용의 눈물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던 안재모의 눈빛과는 달리 대왕세종에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와 세상에 뜻을 품은 충녕을 보여주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고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실제 충녕은 정치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충녕대군이 감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는 몇 가지 증거들 보기



4. 소헌왕후 심씨 :

도지원 소헌왕후와 이윤지 소헌왕후

도지원(용의눈물): 충녕 배역도 단역인데 세자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친정이 몰락할 때외에는 별로 나온 장면이 없습니다. 이 때 도지원은(여인천하의 뭬야~! 도지원 아님) 아주 어린 나이(중 3?)이었다고 하는데 정통 사극에 출연해서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이윤지(대왕세종): 용의 눈물처럼 까메오 수준이 아닌 배역이라 상당히 큰 배역인데 개인적으로 참 매력없다 생각하는 배우가 캐스팅되어 약간 아쉽네요. 

자기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소헌왕후라면 왕이면서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남편(세종)도 미웠을 것 같은데 그런 원망없이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고, 조선 왕비 중에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려, 태종에게 덕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땅에 닿는 여인이라는 칭송까지도 들었다고 합니다. 

왕비라는 이유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입은 그녀에게 세종대왕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사랑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녀를 많이 두는 것도 중전을 보호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의 금슬이 아주 좋았고, 조선 왕비 중에 남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자녀가 열이니 임신, 육아 기간만 해도 10년 이상이라 거의 애 낳는 기계였습니다. 늘 배불러 있는 걸로 분장하면 되겠군요.;;

어쨋든 그녀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후에 세종이 크게 슬퍼하여 소헌왕후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깊었나 봅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는 다른 오랜 우정과 믿음, 신뢰, 애착이 합쳐진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겠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세종에게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5. 양녕대군 :

이민우 양녕대군과 박상민 양녕대군

박상민은 여인천하에서 길상이로 나왔을 때


이민우(용의눈물): 이때 이민우가 20대 초반이었다는데 연기 끝내주죠. 원래는 충녕대군(세종) 역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는데 이민우가 양녕에 매력을 느껴 배역을 바꾸는 바람에 대본이 수정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재탄생되었나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양녕대군은 지하에서 이민우와 용의 눈물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입니다. 망나니 중에 X망나니였던 그를 이렇듯 멋~지구리하게 포장시켜 줬으니 말입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과 정치공작에 질려서 동생에게 지 자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나준 것으로 전해져온다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요.

후에 양녕대군에 대해서 따로 적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적겠지만 어쨋든 양녕이 권력욕이 없어서 동생에게 그
리 깨끗이 왕위를 물려줄 만큼 됨됨이가 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용의 눈물에서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건 다 참겠습니다만...  양녕대군만큼은 심하게 미화되었다는 거죠.

박상민(대왕세종): 대왕세종에서의 양녕은 용의 눈물에서의 양녕처럼 쿨한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양녕은 권력에 욕심도 있었구요. 솔직히 용의 눈물의 양녕은 쾌남아 정도도 아니고.. 무슨 도 통한 도사 같지 않나요?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도 없는 사람이 늙어서 목숨 구걸하려고 수양대군(세조)한테 붙어서 알랑방구 끼고 세종 손자인 단종 죽이자고 그 난리를 떨겠냐구요. 

그런 게 세상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응? ㅋㅋ



6.  효빈김씨 : 두 분 다 88년 미스코리아 진(김성령)과 선(김혜리) 이랍니다

김혜리 효빈과 김성령 효빈

김혜리(용의눈물): 원래 성품이 온순한데다 원경왕후의 몸종이었다가 후궁이 되었고 원경왕후 덕에 목숨까지 건졌기에 원경왕후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저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김성령(대왕세종): 분명한 것은 현재 김성령표 효빈처럼 건방지지는 않았을 거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 앞에서 까불 수 있는 건 조강지처 뿐일텐데... 감히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욕심을 내다니... 이건 윤선주 작가가 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원경왕후도 기가 죽어서 조용히 지냈다지요.)



7. 그 밖의 인물들입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 정하완(용의눈물)최상훈(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20년을 해먹은 전설적인 정승 황희 : 박진성(용의눈물)김갑수(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 : 선동혁(용의눈물)김주영(대왕세종)
김주영씨는 10년전에 용의눈물에서 이방간역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장자방이었던 하륜 : 임혁(용의눈물)최종원(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주인공 어리 : 故 이혜련(용의눈물)오연서(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세자빈 김씨(양녕대군 부인) : 안연홍(용의눈물)유서진(대왕세종) 
남편 잘못 만나 졸지에 한양 밖으로 쫓겨난 세자빈 역 안연홍은 저 때만 해도 이미지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너무 까불이 이미지에 대출광고까지 찍어서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참 아깝네요.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5회부터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배우들이 바뀌었던데...  너무 어린 아역배우에서 갑자기 너무 삭은 성인배우로 넘어가니 영 적응이 안되네요. 
실제 양녕대군은 쫓겨나고 나면 나올 일도 별로 없을 텐데... 폐세자될 때 나이가 25인데 40에 가까운 박상민씨가 양녕대군으로 나오다니.. 너무합니다.ㅜㅜ 세종대왕 역을 20대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으로는 보여야 할 텐데.. 스물 다섯에 쫓겨난 양녕대군을 40살 아저씨가 연기한다니.. OTL 




대왕세종은 양녕대군의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욕심과 비행, 충녕대군의 왕위에의 욕심과 도전, 그로 인한 두 왕자 사이의 갈등과 알력... 이런게 재밌을 것 같은데 이를 표현하기에 주연 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패기있는 모습이 잘 안드러나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6회 방영분에서 양녕이 기생을 희롱하는 연기는 잘하시더군요. 나이를 잊고 보면 괜찮습니다. 어린 척하기가 어색했을 텐데 패기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어쨋든 앞으로 양녕대군의 행보가 어찌 그려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초반의 탄탄한 전개를 유지시켜 주길 바랍니다.



이산처럼 가벼운 사극에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
왕과 나의 궁중 내 여인암투에 질린 분들!

오랜만에 나온 선굵은 조선 사극, 대왕 세종 같이 안하실래요?

다 같이~~ 대세에 빠~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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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과연 왕과 나는 역사에로시트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을 만큼 실패한 드라마일까?? 이산, 대왕세종, 태왕사신기 모두 정통 사극은 아니라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태왕사신기는 그냥 환타지라는 비난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 중
유독 왕과 나가 욕먹는 이유는 뭘까?
아마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퓨전 사극이라고 보기에는 궁중 암투나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고, 정통 사극이라고 하기엔 역사왜곡이 너무 심하고, 너무 가벼워서 2% 부족해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역시 어중간하게 중간을 선택하는 것은 잘하면 중용이지만 못하면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절충이 어렵다.

     왕과 나 OST 중 오프닝    VS   용의 눈물, 왕과 비 오프닝


아직 중전 윤소화(구혜선)이 폐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성패를 논하기는 약간 이른 것 같으니,,
동시대를 다룬 사극 드라마
왕과 비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해보자.

1. 세조
왕과 비 - 임동진님. 무식한 멧돼지로 여겨졌던 세조를 카리스마 있고 고뇌하는 군주로 바꾸어 놓음.
왕과 나 - 김병세님. 너무 잠시 나와서 이미지 각인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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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희왕후/대비
왕과 비 - 한혜숙님. 세조에게 "나는 며느리가 무섭습니다."라고 했던 대사는 실제 역사 속의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기 위한 거사, 계유정난을 도모할 때 갑옷과 무기를 챙겨줄 정도로 야심차고, 대담했으며,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를 한 인물인데 왕과 비에서는 너무 인자하게 나왔다.

왕과 나 - 양미경님. 양미경님의 아름다운 미모는 사극에 출연하신 대비분들 중 최고이나, 대사의 억양이 종종 어색해 보여서 몰입에 방해될 때가 있다. 초반 몇 십회를 며느리인 전인화씨보다 더 젊어보일 정도로 젊고 아름답게 꾸미고 나왔을 때는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보여서 안타까웠다.

왕과 나에서 정희왕후 캐릭터는 너무 부드럽고 자애로운 면만 보여주고 있으나, 며느리인 인수대비를 나무라거나 자기 주장을 끝까지 내세우는 모습은 왕과 비보다 더 역사적으로 가까워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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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혜왕후/인수대비
왕과 비 - 채시라님. 그 전에 어떤 드라마를 보아도 악역도 선역도 아닌 인물이 저렇게 강하게 뇌리에 박힌 적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명연기. 젊은 나이에 그 연기를 어찌 하였는지 놀라울 뿐이다. 왕과 비에서는 채시라의 연기력으로도, 캐릭터로서도 인수대비를 아주 잘 표현했다고 본다. 그녀의 권력욕과 아들에 대한 소유욕, 며느리에 대한 질투를 잘 그려내었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시어머니에게 너무 반박하는 듯한 모습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별명이 폭빈이긴 했으나 그녀는 내훈을 펴낼 정도로 현모양처가 되고자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리가 멀었을 것임.ㅋ)

왕과 나 - 전인화님. 이런 최상의 연기자를 데려다놓고 왜 저렇게 밖에 이용을 못할까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채시라와는 또 다른 인수대비가 탄생할 것을 기대했는데 왕과 나의 인수대비는 판단력이 너무 흐려서 정희왕후보다 더 답답해 보인다. 캐릭터가 너무 단순하다. 남의 말, 비방, 소문을 잘 믿고, 정치적인 통찰력이 부족하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 또한 정권에 개입하지도 않는 모습.. 이건 좀 아닌데.. 인수대비의 매력이자 단점을 조금만 더 보여준다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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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종
왕과 비 - 이진우님. 왕과 비에서는 성종을 정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너무 미화했다. 폐비 윤씨를 중전에서 내칠 때 성종이 얼마나 고약하게 굴었는데 그리 인정많고 따사로운 사람으로 그리다니. 중전에서 폐서인으로 만든 것도 부족해 가족들 다 원지부처 시키고 식량조차 구할 방법이 없도록 만든 잔인한 사람인데... -_-;; 이런 사람을 몇 번의 오해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 때문에 왕비를 내친 걸로 그렸다. 이보세요, 유동윤 작가님, 성종은 연산군에게도 '어미를 닮아 그 모양'이라고(이건 숙종인데 제가 착각) 구박을 한 아비라고요!!

왕과 나 - 고주원님. 흠......... 이건 그야말로 찌질이 중에 상찌질이..-_-;; 주인공을 이렇게 매력없게 그려놓으면 어떡하나. 좀 있으면 윤소화는 폐비될텐데 극 후반부를 꽉 쥐고 가야할 사람이 성종인데 고주원의 연기도 어색하지만 인물 자체가 너무 매력이 없다. 오죽하면 왕과 나 팬들조차도 찌질성종, 바람性종, 색종이라고 부르겠나.

감독님, 성종이 엄마 말에 휩쓸려서 오락가락 하긴 했지만.. 연산군을 좀 구박하긴 했지만... 후궁이 좀 심하게 많긴 했지만.. 그래도 찌질이는 아니었거든요.. 제발 정치 좀 시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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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폐비 윤씨/제헌왕후
왕과 비 - 김성령님. 아름답지만 굉장히 사악하다. 이 정도로 악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성깔이 보통이 넘긴 했을 것이다. 처음에 그녀가 소박하다고 좋아했던 대왕대비(정희왕후)도 그녀의 성질머리에 질렸고, 후궁 단속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감히 인수대비한테도 반항을 했으니... 죽으려고 악을 썼다고 봐야지.;

그렇다고 피 토한 적삼을 굳이 아들한테 보여달라고 할 건 뭔가. 아들이 왕 위에 잘 오르기를 비는게 우선 순위지. 하긴 억울하게 누명쓰고 죽으니 그런게 보였을까마는..ㅋ

왕과 나 - 구혜선님. 일단 나잇대부터가 굉장한 왜곡이다. 그녀는 성종보다 12살이나 많았고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8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는데 - 그래서 인수대비가 더 싫어했음 - 성종과 동갑으로 나오니 굉장히 젊어졌다. 일단!! 어린 후궁들과 경쟁력이 생겼으니까 애정전선에서 좀 유리했졌다. 다만, 그녀의 성격이 너무 착하고 곧게 나오는 것이 불만인데 그것을 설정으로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의 성격을 유지해주니 그냥 받아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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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현왕후
왕과 비 - 이름 모름. 굉장히 단아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배우분이다. 그녀는 폐비 윤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왕과 비에서는 너무 유순하고 착하게 나온다. 폐비의 폐출 원인이 투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표시내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웠다고 하지만 당연한 거 아닌가? 계모인 거 들켜봐야 자신과 진성대군(훗날 중종)한테도 유리할 게 없는데.

왕과 나 - 이진님. 음.....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도, 연기도 정말 적응 안되지만 참는다.;; 폐비 윤씨와 우애가 아주 좋은 것으로 나오는데.. 솔직히 왜곡이라 생각하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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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엄귀인과 정귀인
(←엄소용과 정소용에서 후궁첩지 바뀜.)
왕과 비 - 윤유선님과 김정란님. 굉장히 얄밉게 나왔다.ㅋ
왕과 나 - 이름 모름. 젊은 연기자들이라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얄미운 역할에는 딱이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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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명회
왕과 비 - 최종원님. 이덕화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멋진 연기. 굉장히 정치적으로 유능하고 지혜로웠다. 날카로운 이성과 해학을 같이 보여준 인물.
왕과 나 - 김종결님. 정치 밖에 모르지만 그 방면으로도 비상해 보이지도 않고 유머도 없는 매력없는 캐릭터. 실제 한명회가 저 수준이었다면 그토록 오래 재상을 해먹긴 커녕 난세의 칼날에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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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일 중요한 김처선
왕과 비 - 김성환님. 너무 인자해 보였음. 크게 각인되지 않음.
왕과 나 - 오만석님. 심한 역사 왜곡. 7대 임금을 거쳤고, 5대 임금을 모셨던 할아버지인데 완전히 몇 대를 거슬러서 젊어지셨다. 이건 캐릭터 설정이니... 그렇다 치고, 너무 매력없고 답답한 캐릭터. 착하고 지조있는 건 알겠는데... 시청자가 몰입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한다. 주인공 아닌가. 큰일이다 큰일. 중전 곧 폐비될 것이고, 성종 죽고 나면 극후반에는 혼자 남는데, 이렇게 흡인력이 없어서 극을 어찌 이끌어 갈지.. 어쨋든 외골수같은 모습을 보여줬으니 칼 들고 날뛰는 연산군 앞에서 기 안죽고 끝까지 바른 말하는 인물로는 어울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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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폐비 윤씨의 엄마 신씨
왕과 비 - 여운계님. 불쌍한 모친 역으로 딱.
왕과 나 - 최정원님. 너무 젊고 고와서 불쌍하고 소박한 폐비의 모친으로 안어울린다. 나중에 할머니 역할을 어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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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동근 폭행사건이니, 피디교체니 해서 시끄러운 드라마 왕과 나,

매력적인 아역들의 깜찍한 연기, 두 거장 유동윤 작가, 김재형 피디님의 만남으로 처음에는 이산의 두 배에 가까운 시청률을 올렸던 왕과 나는 현재 20%도 안되게 시청률이 하락하여 초라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왕과 나는 김처선(오만석)에게 똥 먹이기, 출생의 비밀, 어우동과 성종의 짜릿한 만남 등 온갖 선정적인 설정까지 마다하지 않았지만 시청률 상승은 커녕 많은 사람들로부터 역사에로시트콤 아니냐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로 비웃음을 사고 있고, 하이에나처럼 씹을 거리를 찾아헤매던 찌라시 기자들은 신난 듯이 이 상황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과 나는 연기자들의 자질 부족, 무리한  설정, 역사 왜곡 등으로 유치하고 작위적이지만 사극 거장 김재형 피디님의 마지막 작품이 너무 초라해진 것 같아서 나도 안스럽다.

이제 폐비 되고, 연산군 자라서 궁궐 뒤집을 일만 남은 왕과 나,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멋진 사극으로 되살아나서 김재형 감독님의 명예를 지켜주길 바란다!


사족>
왕과 비
- 천~~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야.
왕과 나 - 네 어찌 사특한 말로 나를 기망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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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풍기문란죄로 교수형에 처해진 기생, 어우동(어을우동)과 살아남은 유감동
태왕사신기와 왕과 나의 공통점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역대 사극 속의 연산군 비교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Posted by 파란토마토

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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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으로 님의 블로그 - 섹스의 두 얼굴, 신라와 조선


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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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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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많이 다뤄진 왕은 누구일까? 조선왕조 비운의 왕인 10대 연산군과 14대 광해군, 19대 숙종이다. 세 군주는 모두 장녹수, 김개시, 장희빈이라는 희대의 요부를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소재의 왕으로 각광받아왔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어릴적 어머니(폐비 윤씨)를 잃고 외톨이로 자라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2번에 걸친 사화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 또 그로 인한 폐륜 등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실록이 아니라 일기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남아있는 연산군 일기

그리하여 역대 연산군에 대해서 써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던 차에 아주 좋은 게시물 하나를 발견했다. 이글루 블로그의 이준님이 쓰신 '역대 연산군 모음집'이라는 글인데 내가 쓰려던 주제와 제목까지 거의 똑같다.ㅋ 여기에 사진과 영상을 적당히 덧붙여서 보는 재미를 더하고자 한다.



역대 연산군(?) 모음집 -_-

1. 연산군을 다룬 최초의 괜찮은 작품은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 원작 '폭군 연산'이 있지요. 여기서는 신영균씨가 우리들의 연산군으로 나와서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사실 신영균씨가 의외로 연기를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매너리즘이었고 (세트도 압박) 다만 폭군이 된게 어머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이라는 월탄 선생 전통의 해석으로 나갑니다.

처음에 신영균인줄 알고 잘못 가져온 이미지(김진규)

신영균의 연산군


역시 압박중에 하나는 연산군 졸개 내시가 무려 "김희갑"이었고 -_-;;;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낀 연산이 자신이 죽인 모든 사람들을 사면 복권하고 장녹수같은 쪽을 내쫓고 충신들을 다시 쓰려고 마음먹은 바로 그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는 설정이지요 -_-;;;; 그래서 반정때 도망가면서 "내일 아침만 된다면.... " 운운하는 대사가 꽤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영화라, 므흣빵빵은 기대 안하시는게 좋지요 -_-;;;


2. 조선왕조 5백년 "설중매"에서의 연산은 견미리씨의 전남편 임영규씨가 했습니다. -_-;;; 성종은 국영방송판 대조영에서 보장왕을 하시는 길용우씨였지요. 항상 나라위해 머리쓰다 과로사한 성종의 아들인데, 어릴때부터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 쪽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 나올- 신영균씨도 마찬가지지만 - 연산처럼 "첨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 맛이 가는" 타입이 아니라 첨부터 개념 없는 아새퀴로 나와준다는 점이죠. 조선왕조 5백년 사상 - 사실 뭐 광해군 이희도도 꽤 폭군이 아니라 개념있는 임금으로 그렸으니- 최악의 캐릭터로 자리 잡을 정도이지요. 원작(그러니까 신봉승씨의 대하 소설)에 나오는 므흣빵빵은 안 재현했지만 재상들을 졸라 패고, 기생 이름 아니면 "폐비"라는 이름으로 시를 지으라고 협박치는 건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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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캐릭터


장녹수는 이미숙 아줌마가, 김처선은 박규채 옹이 열연을 했습니다.- 박규채옹이 죽는건 실록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3. 영화 "연산군"이 제작될때 연산군을 무려 "이대근" -_-;;씨가 한다고 많은 솔로들이 가슴을 설렌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게 낚시 중에 낚시인게 장녹수가 "강수연"이라는 점입니다. -_-;;; 강수연이야 영화에서 노출을 극히 싫어해서 씨받이 조차도 국내판과 해외판을 따로 편집할 정도였죠. 그러니 뭐 재대로 된 "그림"이 나옵니까 -_-;;;

여기서는 연산이 완전히 "부처님 가운데 도막"인데,  폐비 사사 사건을 수사하는게 무려 "장녹수"이고 그걸 수사하려는데 유력한 증인이 "선왕의 후궁"이 보낸 자객에게 수리검으로 살해당하는 압권도 보여줍니다. -_-;;; 후궁들을 손수 박살은 내는데 나중에 어느 노 대신을 팽형(진짜 삶는게 아니고 삶는 것처럼 하고 그냥 놔두는 형벌) 하려는데 대신이 자살하니까 끌어안고 울부짖습니다. 마지막은 폐위된후 (강화도는 안가고) 모친의 묘 앞에서 통곡하는 변강쇠 연산군...



4. 사실 안 알려졌지만 "연산일기"라는 걸작도 있지요. "왕의 남자"에서의 연산군이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신분들은 이 작을 안봤다고 자수하는 셈입니다. 사실 정진영씨의 연기 이전에 유인촌씨가 이 연기를 했거든요-_-;;; 감독은 무려 임권택 감독입니다. 여기서 앞부분은 "신료의 방해"로 인해서 자기의 큰 뜻을 펼칠수 없는 젊은 쾌남아 연산을, 나이가 들고 비밀을 안 후부터는 조금씩 미쳐가서 결국 칼리귤라 사촌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극렬하게 나오지요. 맛이 간후부터는 "후회"라는것도 없지만 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짜 광기 어린 연산군, 유인촌

결국 쫓겨난 후에 아버지의 유령 - 나오지는 않지만 - 에 덜덜 떨면서 화면을 응시하는게 마지막 장면이지요.

이 작 자체의 문제는 "유인촌"씨의 연기에 가린 나머지 다른 사람의 연기가 팍삭 죽었다는 점입니다. 내시 졸개를 무려 "김인문"씨가 했고 - 이 사람은 중종 반정 전에 연산군에게 홧김에 꼬치가 되버립니다.- 장녹수는 소시적 에로배우가 했지요(-_-;;;) 의외로 잔인하기는 잔인해서 참수장면이 그대로 나오고 신하들 모아놓고 방아찧으라는 장면과 찧기 싫으면 내가 찧겠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처선이 이거 말리다가 죽습니다) 아, 그리고 방아장면은 안 나와도 방에서 돈 없어서 옷을 하나도 안 입은 여햏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춤추는 장면은 나와줍니다.-_-


5. 국영방송 사극에서의 연산군은 이덕화 옹이 주연한 한명회에서의 이민우장녹수에서의 유동근씨가 열연했지요. 한명회야 뭐 연산군은 한명회 사후에 나오니까 별 비중은 없고(명령 내릴 때 북치는 압박) 소리 지르는게 일입니다. -_-;;

19세의 어린 나이로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이민우



드라마 장녹수 오프닝
 


유동근씨는 좀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는 편이지만 광기는 유인촌씨에 비해서는 영 아니었죠. 말년에 사이코가 된후에는 자신의 멸망을 항상 생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변하지만 "완전히 미친"쪽은 아닙니다.

역시 어린 나이(20세)에 놀라운 연기, 왕과 비의 안재모


6. "왕의 남자"의 정진영씨는 개인적으로 유인촌씨 다음에 가장 연산군 연기를 잘했다고 봅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에서의 해석을 그대로 살려서 서브스토리인 "공길" 이야기를 넣은거에요. 광기와 고민, 사모곡이 적절히 조합된 최고의 연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태조께서 입으시는 푸른 옷을 입는지는 미스테리) 사실 석류 낭자나 안습 장녹수보다도 연산의 연기가 죽었다면 영화 자체가 훨씬 질이 떨어졌을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PS: 연산이 두 후궁을 죽이는 장면은 실록이나 연려실기술의 "퍼포먼스"가 있지요. 어린이들 보는 책은 정서상 "연산이 손수 박살냈다" 식으로 그립니다. (이대근이 주연한 영화나 왕의 남자 - 뭐 이건 칼이지만 -  는 그렇게 그립니다.) 조선왕조 5백년 부분의 그 장면은 제가 못봤는데 신봉승씨의 원작에서는 죽이고 "다 벗기"고 뼈와 살을 분리시킵니다(말 그대로) 연산일기는 벗기는 걸 빼고는 퍼포먼스를 그대로 합니다.

실록대로 연산군을 찍으면 한국판 칼리귤라가 나올듯 하지요 -_-;;;;

유인촌씨는 서울방송 개념 사극 임꺽정에서도 첫회에 연산군으로 나와서 철퇴로 후궁을 박살내줍니다. (임꺽정의 애인 기생이 장녹수의 딸이라는 설정이 있지요)

의외로 궁중 므흣물은 연산군 이야기가 아니라 이두용 감독의 "내시"이지요. 원래 신상옥 감독이 만든 작품(박노식-신성일이 나옵니다.)인데 감독이 공화국에 간 후에 이두용 감독이 에로 에로로 만들었지요. 여기서 무려 길용우씨가 절대 정력의 왕으로 나와서 이미숙씨에게 허무하게 죽습니다. -_-;;;

왜 연산군마저 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기사 역시 "왕권강화"와 실록 운운인데 연산군 미화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실록은 졸라 허술하다"는 겁니다. 실록이나 다른 조선시대 기록을 교차검증 안하시는 건지 뭔지 -_-;;

그리고 박정희는 그렇게 싫어하시는 분들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나 할 이야기를 연산군 미화때 동원하는건 뭔지, 이환경씨처럼 제국이면 하악하악인가? - 글구보니 국영방송 장녹수도 좀 이런쪽이었고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연산군 미화 책은 소시적 이x 범의 원균 정론만큼이나 아스트랄의 영역을 넘나드는 책이지요. 두 후궁은 사실 연산이 죽인게 아니라 "자살"했는데(왜?) 후세 사람들과 사관들이 연산이 죽인걸로 조작했다는 - 근데 자살했다는 기록도, 전설도 없잖아? 실록의 일시 추정 - 헉 김전일?!! - 으로 봐서 죽인게 아닌데 죽었으니 자살이라는 논리- 스토리는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듯.



현재 방영 중인 SBS 사극 왕과 나에서 얼마 전에 연산군이 태어났다. 성인 배역을 누가 맡을 지는 모르지만 역대 연산군의 명성에 맞는 연기자가 탄생하길 바란다. 장성한 연산군이면 유인촌 수준, 젊은 연산군에 이민우 수준이면 내 욕심이 너무 과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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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태왕사신기 VS 왕과 나

요즘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환타지 사극 드라마 태왕사신기'달릴 뻔' 했던 코믹 사극 드라마 왕과 나
드라마 진행상황스토리 진행 방식,
플롯의 치밀성,
캐릭터의 일관성 및 입체성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전문 리뷰......는 못쓰겠고...;;; ㅋㅋ


간단명료한 공통점

1. 요즘 최고의 훈훈한 청소년, 유승호군이 나왔다.
태왕사신기에서는 담덕(광개토대왕)으로,
왕과 나에서는 성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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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역배우들이 끝내주게 잘했다. 이 놀라운 매칭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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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인 배우들 중에 연기나 이미지가 배역에 안어울린다고 욕먹는 사람이 있다. 누군지는 말 안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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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인공들이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 긴 사연이 있었다.

태왕사신기는 2천년 전 욘달프(환웅)와 세오(수지니)의 사랑과 그를 바라보는 가진(기하)의 질투,
왕과 나는 궁에 들어오기 전 자을산군(성종)과 소화(폐비 윤씨)의 사랑과 그를 바라보는 천동(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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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기하 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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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나 궁에 들어가기 전 인연



5. 화면 때깔에 돈이 많이 들었다.
태왕사신기는 무려 4백억을 투자한 한국 드라마 사상 최대의 블록버스터이고,
왕과 나는 중전 책봉식 한 장면에 1억원 이상이 들어간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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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사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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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중전 책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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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중전 하례



6. 제작자를 실망시켰다. 시청률이 기대에 못미친다.
태왕사신기는 '모래시계'의 김종학 피디, 송지나 작가 콤비에 배용준 주연, 엄청난 CG처리를 한 최대 블럭버스터급이라서 제작자 측에서는 50% 정도의 시청률을 기대했을 것이나 24회 중 19회까지 진행된 후에도 30%도 몇 번 못 넘었다.
왕과 나는 '용의 눈물"의 김재형 피디, (여인천하의) 유동윤 작가 콤비에 조연급이 전인화, 전광렬, 양미경이라는 호화캐스팅에, 초반의 파죽지세와도 같은 상승세도 불구하고 30%를 못넘었다.


7. 시청자를 실망시켰다. 작품성이 기대보다 불만족스럽다.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의 대륙 정복 이야기를 예상했던 (나같은) 사람은 19회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신이야기에 촛점이 맞춰진 이야기 구성과 느린 전개 때문에 실망했다.
왕과 나는 폐비 윤씨의 새로운 모습과,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시들의 뒷 이야기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여인천하 스타일의 궁중암투만을 반복함으로써 많은 시청자들을 실망시켰다.


8. 역사 왜곡이 심하다.
태왕사신기는 담덕이 왕에 오르는 과정을 강조하려다 보니 아버지 고국양왕을 너무 유약하게 그렸다.
왕과 나는 처선과 성종, 폐비 윤씨를 억지로 연결시키려다 보니 김처선의 나이가 엄청나게(세대를 뛰어넘어) 어려졌고 폐비 윤씨의 나이도 많이 어려졌다. 또한 연산군은 소화가 중전이 되고 나서 태어났다.


9. 주인공을 보면 왠지 전작이 떠오른다. 이는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비슷한 이미지의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태왕사신기에서 배용준을 봐도 겨울연가가 연상된다.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담사마라 불러야 할 것같다.
왕과 나에서 전인화를 보면 지엄한 인수대비가 아니라 자꾸만 여인천하의 문정왕후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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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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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교수
출처: 우리 역사와 오늘

글: 김인호교수
펌:
http://eroom.korea.com/eroom/default.aspx?bid=hsp_106045&pid=222064


▶ 인수대비는 조선의 릴리스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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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Posted by 파란토마토
출   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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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치도가 근본을 이루었던 500년 조선사회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대비의 위엄을 누렸던 여인, 소혜왕후. 16살의 어린 나이에 당시 수양대군 이었던 세조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시아버지 세조와 그 무리들이 지배했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씨의 처세술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조선조 가장 학식이 높고 유려했던 정치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소혜왕후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정치감각●

소혜왕후가 20대에 겪었던 풍파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그의 맏며느리였던 한씨는 당당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폭빈" 이라는 별명까지 받으며 위세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지아비 의경세자의 요절과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눈물을 쏟으며 출궁할 수 밖에 없었던 한씨는 '수빈' 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정계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빈은 한낱 '세자빈을 잠시 누렸던' 그저 그런 조선의 아낙으로 사라질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약해진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정계의 수장격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결탁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과의 결탁은 곧 결국 세조조의 격정의 세월을 주도했던 훈구파와의 결탁을 의미했다. 결국 수빈은 둘째 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셋째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왕권을 짓누르고 정계의 표면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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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저에 나가있는 동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수빈의 위세는 결국 세조의 승하와 함께 분출된다. 수빈은 이른바 예종조를 뜨겁게 달궜던 "석실 능묘 사건" 으로 권력의 핵심을 간파하며 왕권을 짓누르는 파란을 스스로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이러하다.

1467년 조정에 한 여인의 주청서가 날아 들어왔다.

"세조 대왕의 봉분이 초라하고 약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이 어찌 선왕께 황송스러운 일이 아니리까. 마땅히 세조 대왕의 봉분을 석실로 해야 할것입니다." 라는 간략한 주청이었다. 그러나 이 주청서의 주인공이 바로 수빈 한씨 였다는 점에서 조정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조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서 능묘제도를 개혁하면서 "석실 봉분은 없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며 "내가 죽어도 석실봉분은 없어야 할 것이며, 후대에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명했었는데 그것을 며느리인 수빈이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예종은 세조의 유지임을 전면에 내세우며 수빈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친다. 그러나 물러설 수빈은 아니었다. 수빈은 한명회, 신숙주 등을 앞세워 다시 한번 예종에게 청을 올리고 무례에 가까울만큼 첨예한 대립을 보여줬다.

당시 세조의 잠저에 나가있던 수빈이 이처럼 무례할 정도로 예종을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조 말년, 세조는 혈육과도 같던 한명회, 신숙주 등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을 전적으로 견제하며, 예종을 위한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결국 세조의 이러한 변심으로 이들의 위세는 꺾일 만큼 꺾였고 귀성군 준, 남이, 유자광 등의 신진 세력이 조정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이 후 남이가 역모사건으로 죽은 뒤에도 불구하고 유자광 등이 훈구세력과 대응할 만큼의 세력권을 키우기 시작하자 훈구파와 결탁했던 수빈으로써는 이들을 저지할 강경책이 필요했다.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예종의 형수라는 위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잘 알고 있었고 '석실 능묘 사건' 을 고의로 연출해내며 훈구파를 전면에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빈과 예종과의 갈등은 크게 증폭되었으나, 유약했던 예종이 수빈과 그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 정치 세력인 훈구파를 당해 낼리 만무했다. 마침내, 세조의 봉분은 석실로 둘려싸이게 되었고,수빈은 다시 한번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며 예종 말기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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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정희왕후와의 결탁으로 대비가 되다●

이렇듯 수빈과 갈등을 겪던 예종은 결국 2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국가로서는 1년 사이에 세조와 예종의 두 번의 국상을 겪은 것이지만, 수빈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예종의 아들은 겨우 4살 이었고, 왕권은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당시 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담당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신숙주 등 뛰어난 원훈들만이 조정을 안정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조 말기 한명회 등이 역모 사건으로 핍박 받을 때에도 항상 그들의 편이었던 것도 바로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수빈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올리며 수빈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파를 정계의 핵심으로 다시 부각시킨다.

당시 13살이었던 자산군이 왕위에 책봉되자 한명회 등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권유했고 정희왕후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가 바로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 이었다.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수빈 역시 '대비' 의 지위에 오른다. 법도상으로는 예종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대비의 책봉을 받을 수 없었으나 그 아무도 수빈의 대비책봉에 대해 문제 삼지 못했다. 대쪽같은 성미의 수빈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보복을 받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정희왕후는 대왕대비로, 예종비는 왕대비로, 수빈은 대비로 책봉이 되면서 내전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권력은 힘●


대비의 자리에 오른 수빈은 '인수대비' 의 칭호를 받으며 정계의 핵으로 당당하게 부상한다. 인수대비는 권력의 핵으로 부상 하자마자, 남은 신진세력의 싹수를 잘라 버리는데 총력을 다한다. 세조 생전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던 신진세력의 대표격 귀성군 준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귀양길을 떠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힘이었다.

정희왕후는 귀성군 준이 종친이고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명분하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려 했으나 인수대비는 이런 정희왕후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귀성군 준의 처벌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훈구파가 버티고 있었고, 이는 자신을 이만큼으로 성장시킨 훈구파에 대한 인수대비의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결국, 정희왕후도 인수대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치지 못했고, 30대에 영의정의 위세를 누렸던 귀성군의 인생도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귀성군의 몰락은 곧 신진세력의 몰락이었다. 다시 조정은 훈구파의 세상이 됐고 이들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비호 아래 그 영화가 극에 다달았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 때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 에 대비할 또 다른 대응책이 필요하다 느꼈다. 인수대비 자신이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던 만큼 그녀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들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고 아들 '성종' 을 위한 새로운 신진들을 끌어올리는 데에 주력한다.

이것은 세조 말년, 세조가 예종을 위해 훈구를 견제했던 것과도 같은 이유였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을 위해서는 왕권을 넘어서는 권신(權臣)들을 강력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끝내,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책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성종조에 사림파의 등장을 끌어내며 성공적으로 성종 자신이 훈구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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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기를 꺾어 놓다●

성종 시절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거의 50 : 50의 비율로 서로의 견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했던 때였다. 그러나 성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해서는 훈구파를 억제하고 사림파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파를 정계의 뒷편으로 밀어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정책은 종래에 어머니 인수대비와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사림파의 위세가 등등해지던 그 순간 인수대비는 '윤비 폐출' 을 위해 뒷편으로 밀려나 있던 훈구파를 다시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한다.

윤비 폐출 사건은 인수대비의 진두 지휘 아래 직접 진행되었던 사건이었기에 그녀는 한명회, 정창손 등을 다시 끌어올려 폐출을 뒷받침 하도록 지도한다. 윤비폐출을 기화로 인수대비와 훈구의 연대적 결속감이 강해지자 높은 위세를 누렸던 사림파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겪는다.

이렇듯 꺾인 사림파의 위세는 "불교 도첩제" 사건으로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성종 23년,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사림들은 도첩 없는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키고 엄중하게 단속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역시 유교 근본주의에 철저했던 임금이었고 불교를 그저 미신 중 하나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불교를 믿으며 "불교 열풍" 을 주도했던 인수대비에게 이 정책은 사림파의 정면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참다 못한 그녀는 긴 장문의 전교를 내려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불교는 세조대왕 때부터 믿어져 왔으며, 정희왕후 께서 믿으셨고, 나 또한 믿고 있는데 정책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니 이러한 불효가 어디 있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유교를 신봉했던 국가 '조선' 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인수대비' 라는 점에서 성종과 사림파는 한 발 물러서 도첩제를 완화하게 된다.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던 여걸●

세조, 예종, 성종의 3대의 권력의 핵심을 주도했던 인수대비는 결국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안정에 철저했던 정치가 였다. 인수대비는 대부분 훈구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으로 정치를 다스렸던 여걸이었으나, 절대로 그들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넘어서는 모습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치권력은 철저히 왕실 중심이었고, 아들 성종 중심이었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르른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출   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현재는 승복이님이 블로그를 폐쇄한 상태라서 원문을 볼 수가 없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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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dvd를 보다가
제가 생각하는 완소장면들을 모아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어서 몇 장면 모아 봤습니다..
홈에 올렸던 걸 그대로 복사해서 가져와서 좀 반말일색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역시 공길의 첫 등장을 빼놓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극장에서 울려퍼지던 탄성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처음 본 공길이 너무너무 예뻐서
'뭐야... 예쁜 남자 배우를 보니 뻔한 영화다...'
라는 선입견도 좀 가졌더랬다-_-;







장구치는 공길이 너무너무 예쁜 장면.
이 모습을 보고 나도 장구를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쁘기도 하지만
장생과 맞춰놀고 있는 이 모습이 더더욱 좋음.








그리고 설매재의 개망초 꽃.(개망초꽃이 맞던가...)
하얀 꽃송이들도 너무너무 예뻤고,
나란히 걷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도 인상깊었다.
장생의 뒤를 말없이, 후회스런 마음으로 걷고 있는 공길의 모습이
정말로 애처롭게 보였던 장면.








장생이 너무 귀여워서 맘에 들었던 점쟁이 씬~
장생의 이런 능청스러움이 사랑스럽다;ㅁ;
사실 dvd에서 추가된 영상들은 죄다 좋담~








그리고 이 장면....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둘이 풍물소리를 듣고 뛰어가는 이 장면이 너무 좋다..
뭐랄까,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달까?
저렇게 기쁜 얼굴로 달려가는 둘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녹수의 저 의연하고 도도한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보면서 생각한 거지만,
강성연이나 정진영은 이목구비가 큼직하고 뚜렷해서 그런지
눈썹이나 입꼬리의 미세한 움직임이 큰 표정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표정 연기가 정말 일품~
감우성은 얼굴근육의 움직임보다는 대사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멋진 배우인 것 같고~







어찌 이 장면을 빼놓을 수 있을까....
말이 필요없는 서방 각시 놀이ㅜ_ㅜ








몽롱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많은 문들을 거쳐 걸어가는 공길이의 저 뒷모습도 너무 좋고...
무엇보다 저 큼지막한 리본이 예뻐서
저것이 바로 다른 광대들하고 비교되는 공길이의 포스라고 생각했었다;;
이 장면 뿐만 아니라
공길이가 연산의 손에 이끌려 수많은 문들을 거쳐 지나가는 장면도
볼 때마다 두근두근하다.
처음 영화볼 때 굉장히 가슴 졸였던 씬:D







영화 전체를 통틀어
공길이 가장 예쁘게 나왔다고 생각하는 장면.
아기자기한 저 꽃,나비 소품도 너무 사랑스럽다~







처음 볼 때는 공길이의 어깨밖에 보이지 않았지만-_-
보면 볼 수록 녹수 쪽에 집중해서 보게 된다.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가차없이 버림받은 녹수.
자신의 고집으로 공길을 잡아두고 싶은 연산.
연산이 허락하는 가운데서 떠나고 싶은 공길.
세 사람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장면...
(사실 연산에게 말하지 않고 얼마든지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육갑이 죽자 나머지 광대들은 전부 다 나갔고..
그럼에도 공길이 나가지 못했던 것은 연산이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지 않을까...
약속을 받고 나가고 싶은던 거라고 생각한다.
어린애같은 연산을 차마 두고 나갈 수 없어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장면.
장생은 어떤 심정으로 저 줄을 끊으려 하고
공길은 어떤 심정으로 막으려 했을지...
막연하게 그저 안된다고, 그만하라고
울부짖는 공길을 보면 가슴이 막막해진다.





처음 영화를 보고...
이 장면부터 눈물이 났던걸로 기억한다.
장생이 금붙이 이야기를 할 때는 저 상처가 저런 의미구나..
하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금붙이를 자기가 훔쳤다고 고백하는 공길을 보고 나니...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하고 생각하며 부데껴왔을
그 길고 긴 세월의 깊이가 느껴져서..

그야말로 안구에 대 해일이!!!ㅜ_ㅜ





너무 좋아하는 장면..
이때 흐르는 bgm도 너무 좋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저 연산의 표정도 너무 좋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연산을 보듬어주는 녹수도 너무너무 좋고...
'미친놈.' 이라는 대사를 듣고
온 몸이 찌릿 했던 기억이 난다.





장생의 흙묻은 발을 보니
그야말로 가슴이 후벼지는 기분이더라.
왕보다도 더 왕같았던 사람의 마지막이
저렇게도 초라하구나... 하는 생각에.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따위 생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지만;
역시 장생은 왕보다도 더 왕같은 사내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도 너무 좋담...
줄의 퉁김을 통해서 서로를 확인하는 두 사람.
이것 역시 말로 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ㅜ_ㅜ





그리고 영원히 잊지못할 마지막 비상.

쭉 모아놓고 보니 다른 분들도 모두 좋아하시는 장면이라 좀 식상하지만...
근 몇개월 동안 ost만 들어도 눈물이 나게 만든 왕의 남자를 어찌 잊으리오~~


출   처: 왕의 남자 / 카페 / *리겔* / 2007.05.20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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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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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다른 '왕의 남자' 내시... 역사학자 박상진씨가 말하는 오해와 진실  최육상(run63) 기자   
 
▲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영화에서 처선(장항선 분)은 연산 곁에서 충심을 다하는 내시로 그려진다. ⓒ 이글픽처스
연산: "처선아, 처선아. 내가 왕이 맞느냐? 선왕이 정한 법도에 매여 사는 내가 왕이 맞냔 말이다."
처선: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큰 사냥을 하시기 위해서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법이옵니다."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시는 가늘고 징그러운 목소리를 지닌, 수염도 나지 않은 남자 아닌 남자로 혐오 혹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내시 '처선'은 달랐다.

<왕의 남자>는 가장 비천한 존재인 광대 장생과 공길이 가장 존귀한 임금 연산군을 상대로 벌이는 한판 연희를 풀어낸 영화다. 여기에서 장항선이 연기한 내시 김처선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는, 이른바 '무대총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폭군이지만 자신이 모셔야 하는 임금이기에 떠날 수 없었던 처선은 광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수하며 연산과 나라를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비록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처선은 자결을 선택하지만 그는 임금을 모시는 데 충실한, 충직한 내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처선으로 분한 배우 장항선의 무게감 있는 연기가 어우러지면서 처선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점에서 영화 <왕의 남자>는 '예쁜 남자' 이준기의 재발견인 동시에 '카리스마 있는 내시' 장항선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실제 내시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내시를 흔히 왕 뒤의 숨은 권력자라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마다 환관이 득세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하지만 내시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1월 26일, 내시와 궁녀들을 연구한 역사학자 박상진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봤다. 박씨는 지난 해 <내시와 궁녀>(가람기획)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박상진씨와 나눈 일문일답.

"장항선이 연기한 처선, 연산군 때의 실존 내시"

▲ 내시에 대한 연구를 해온 박상진씨.
ⓒ 최육상
- <왕의 남자>에서 장항선씨가 연기한 내시 '김처선'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표적인 충신 내시입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직접 춤을 춘 '처용무'의 내용이 무척이나 음란한 것을 보고, 처선이 '지금껏 네 분의 선대왕을 모셔왔지만, 주상 같이 무도한 임금을 본 적이 없다'고 직언을 했다가 '왕을 능멸하려 든다'며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영화에서는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록은 그렇지 않아요."

- 내시와 환관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관직이었어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죠. 고려 조정에서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인물만 무려 22명이나 되었으니 내시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거세된 남자들인 환관들로 대체됐어요. 고려 말인 공민왕 때에는 121명의 정원을 가진 정2품 관아인 독립적인 내시부를 두게 됐고요. 조선에 와서는 인원을 좀 더 늘려 140명의 내시부라는 거대한 관청이 설립될 정도로 내시제도가 번성했죠."

- 내시는 관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네요.
"정리하면 환관(宦官)은 시대를 불문하고 남자의 성이 상실되고 관직에 있는 자이고, 내시는 성 상실과는 관련이 없는 관직을 말합니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분명히 구분됐는데, 조선에 이르러 내시와 환관이 동일해지는 바람에 개념상의 혼란이 생긴 겁니다. 고려의 내시가 왕명을 받드는 '공식 비서관'이었다면, 조선의 내시는 환관들로 왕의 개인적인 명령을 전하는 '사설 비서관' 성격이었죠."

박상진

1963년 예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철학(문학석사)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 사료조사 위원,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 서울문화사학회 회원으로 있으며 꾸준히 우리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짝짓기로 배우는 세계사> <한국의 로맨스> <에피소드로 본 한국사> <베일 속의 한국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평성부원군 충렬공실기> <한성주보>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등이 있다.
-<내시와 궁녀> 소개글에서
- 중국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중국의 환관과 우리의 내시는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의 환관은 말 그대로 거세돼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경>에 의하면 중국에는 국부를 거세하는 궁형(宮刑)이 있었는데, 사형 다음가는 형벌이었어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연년 등이 궁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죠. 많게는 1만3천 명, 적게는 3천 명 정도의 환관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에게 궁형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내시는 고려 때 국왕의 최측근 엘리트 집단에서 출발했죠. 물론 그때도 거세한 환관이 있었는데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어요. 그러데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에 바쳐진 고려의 환관들이 수완을 발휘하면서 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죠. 그 후 환관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고국인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각종 비리를 일삼으며 교만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려 초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환관들로 대체된 겁니다."

충신 내시 김처선, 간신 내시 김자원

▲ 내시들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 중 '김처선'과 관련된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사본.
ⓒ 최육상
- 내시들이 힘없는 왕 뒤에 숨어서 국정을 뒤흔들었다는 좋지 않은 인식도 있습니다. 내시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은 조금 덜하지만, 고려 때는 막강했죠. 특히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들의 세도는 말도 못해요. 황제 다음의 지위에 있던 승상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용보(高龍普)나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낸 고려인 출신의 원나라 환관 '임빠이앤투그스(임백안독고사)'가 대표적이에요."

- 내시 중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었을 텐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있나요?
"앞서 말한 대로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대로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습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 2품 상선 내시였고, 김자원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는 정 4품 상전 내시였습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죠.

선조 때 내시 이봉정은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로 유명했는데, 선조 곁에 머물면서 선조의 필법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선조가 부채에 어필로 직접 쓴 시를 하사 받기도 했으니까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죠."

- 내시들의 일상생활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내시가 궁 안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했어요. 또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일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양주, 고양, 남양주, 과천, 용인, 안양, 파주 등 거의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어요.

내시는 크게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는데,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나면 나갈 수 있어서 궁 밖에 가정을 두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어요. 내시들의 묘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상북도 풍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걸요."

내시도 음경은 있었다, 아내 두고 성관계도

- 사람들이 내시들의 성생활을 무척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내시는 거세된 자로 아는데, 고환만 없었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어요. 반면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이 모두 없어 불가능했지요. 이는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77)씨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내시의 성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예요.

김씨가 어릴 때 노인들한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음경은 남겨 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는 거예요. 김복동씨가 어렸을 때 옆집에 내시의 아내가 살았는데 김씨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 박상진씨가 2005년 펴낸 <내시와 궁녀>.
ⓒ 가람기획
- 원래 환관은 궁녀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기 위해 거세한 것 아니었나요? 그런 내시가 성관계가 가능했다니 좀 의아하네요.
"내시의 성관계 유무는 당시 내시들이 아내와 첩을 뒀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음경 자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거죠. 김동복씨가 들은 내시 부인들의 대화를 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어 아내들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시 아내들 대부분이 6개월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내시의 계보를 잇는 양자(養子) 제도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당연했던 거고요."

- 지난해 <내시와 궁녀>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3년 북한산에서 내시의 집단묘역 45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어요. 그 뒤 내시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도 관련 서적 하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시와 궁녀에 대해 파고든 거죠. 내시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와 내시들의 개인문집,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경국대전> 등 정사와 야사, 법전 자료집 등 100여 종의 문헌과 자료를 2년 정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연산군에게 죽임당한 김처선 vs 반정 앞두고 도망간 김자원

나라가 어수선할 때 충신과 간신은 둘 다 빛을 발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인 연산군 때 공교롭게도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조선의 내시가 모두 등장한다.

극중 연산군의 곁에서 공길과 장생을 돌봤던 김처선은 내시를 대표하는 충신이다. 그는 연산조에 성종릉인 선릉의 시릉관(侍陵官)을 지내고 140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로 있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스스로 지어낸 처용놀이를 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직언한다.

"전하,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전하, 이 늙은 놈은 세조대왕으로부터 무려 네 임금을 섬겨왔사옵니다. 또한 경서와 사서를 읽어 대강 통하오니 일찍이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속히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고금에 나 같은 자가 없었다?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네 원대로 죽여주마."

화가 치민 연산군은 처선을 향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

한편 김자원(金子猿)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나주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선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色掌)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그를 <조선왕조실록>은 간신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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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3 15:30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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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출처: 셜록홈즈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s203039/6725428

===> 이게 원 출처인줄 알았지만 그도 또한 아니고, 이 분도 출처를 안밝혀서 원래 출처는 알 수 없음....ㅠㅠ


조선의 3대 요부, 장녹수와 장희빈 그리고 정난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 중 임금의 사랑스러운 애첩이었던 장녹수와 장희빈은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실 정치' 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비슷한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장녹수와 장희빈, 이들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들 중 누가 더 조선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는가?

왕의 남자 장녹수 강성연



장녹수 - 미천한 출신, 그리고 야망.


장녹수와 장희빈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신분 상승에 대한 지독한 야망을 감추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종 19년에 충청도 문의현령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장한필의 첩이었고 신분도 노비출신으로 천인 중 천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녀는 자동으로 천인이 되었으며, 그 자녀의 소유권은 모계를 따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장녹수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의 딸' 로 평생을 노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신분도 미천한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했던 장녹수의 젊은 시절은 비참하리라만큼 불행했다. 제안대군의 종과 결혼해 아기까지 낳았던 장녹수는 돈을 벌기 위해 여러번 몸을 팔았고 돈에 쪼달리자 가정을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정을 버린 장녹수는 몸을 파는 천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술과 기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기생으로 데뷔했다. 뛰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앳된 외모와 여성스러운 애교를 지니고 있었던 장녹수는 단박에 명기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연산군의 눈에 띄어 궁궐로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실록에서 '자못 아름다웠다'라고 전하는 유일한 여인, 장옥정

희빈 장씨 얼굴 상상도.



장희빈 - 숙종을 유혹하다.

극적으로 궁궐에 들어간 장녹수에 비해 장희빈(장옥정)의 입궁은 철저히 계산적이었다. 장옥정의 숙부 장현은 실록에 "국중의 거부" 라고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부를 모은 인물이었지만 어머니가 노비출신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천인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노비로서 어미가 겪은 설움과 치욕을 보고 자란 옥정은 천인 딱지를 벗어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사회는 '서인'과 '남인' 의 정쟁이 극에 달았던 때였고 남인에 몸을 담고 있던 옥정의 가문은 남인을 위해 옥정을 궁녀로 입궐시킨다.

당시 궁궐은 남인이었던 장렬왕후(대왕대비) 와 서인이었던 명성왕후(대비)의 기 싸움이 한창이었던 때였고 장렬왕후는 옥정을 숙종에게 소개시킴으로써 정권획득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타고난 미모와 매력을 가지고 있던 옥정은 20살 혈기왕성한 숙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

숙종의 사랑을 받게 된 옥정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으나 당시 궁궐 최고의 권력자이자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명성왕후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명성왕후는 옥정을 "요악하고 사악하며, 덕이 없고 천하다." 라는 명목으로 궁궐 밖으로 쫒아냈고 서운해하는 숙종을 위해 민유중의 딸을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가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였다.


장녹수 - 왕을 가지고 놀다.

왕의 남자 장녹수, 연산군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연산을 가지고 논 것은 장생과 공길이었지만 실제로 연산을 가지고 놀았던 것은 장녹수였다. 그녀는 왕이라는 자리에, 궁궐의 법도에 지겨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연산을 가장 세속적이고 천박하게 만들어 놓는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연산의 불행한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녹수는 연산에게 '엄마' 와 같은 존재로 다가갔다. 이미 예전부터 그녀는 남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지독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녀는 연산에게 "야, 이놈" 등의 상소리를 해댔고 그를 조롱하기도 했으나 연산은 그런 녹수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녹수는 연산에게 '첩' 그 이상의 존재였다. 연산의 왕비였던 신씨는 엄숙하며 상당히 정숙한 인물이었고 연산은 그런 신비를 '왕비' 로써 존중했다. 연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일에 광분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쳐들어 갔음에도 대비를 쳐 죽이지 못했던 것은 대비전 앞에 중전 신씨의 가로막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정숙하고 위엄있는 신씨에 비해 녹수는 과하리만큼 본능에 충실하며 연산의 몸과 마음을 모두 품어냈다. 연산은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고 그녀에게 놀라울만큼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녹수의 집을 건축할 때 대간을 보내 감독을 시킨 것이나 내시와 승지 등에게 그녀의 가마를 뒤따르게 했다는 기록은 당시 녹수의 권세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장녹수는 연산의 총애에 비해 인사 청탁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았으나 종친과 조정관료들의 굽신거림을 받았고 뇌물과 투기, 재산모으기에는 혈안이 되어 있었다. 천한 출신의 기생이 임금의 비호 아래 갖은 이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조선사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오릉(장희빈의 묘)


장희빈 - 중전의 자리에 오르다.

장옥정의 재 입궁은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승하 이후에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그리워하는 숙종을 위해 장옥정의 재입궁을 손수 지휘했다. 살아 생전 명성왕후가 했던 "장옥정은 덕이 없고 사악하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라는 경고를 무시했던 것은 인현왕후의 가장 큰 실수였다.

궁궐에 다시 들어온 장옥정은 놀라우리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다. 석녀였던 인현왕후에 비해 자식복까지 있었던 장옥정은 숙원, 소의의 자리를 거쳐 정 1품 '빈' 의 자리에 올라섰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의 위치까지 밀어 올리며 기세 등등한 위엄을 누렸다.

장희빈의 성공은 곧 남인의 성공이었다. 남인은 장희빈의 비호 아래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곧 서인의 심볼마크 였던 인현왕후를 폐위 시키는데 성공한다. 장희빈은 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점으로 민비의 뒤를 이어 중궁전 주인자리를 꿰차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장희빈과 오라비인 장희재의 포악함은 극에 다달았다. 장희재의 집 앞은 뇌물과 각종 재물을 바치기 위한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뇌물의 값에 따라 벼슬이 나누어졌다. 인사청탁에 소극적이었던 장녹수에 비한다면 장희빈은 적극적일 정도로 매관매직에 혈안이 되있었다.

이 또한 남인 정권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장녹수와 장희빈,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렇다면 사랑을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치마폭 속에 놀렸던 장녹수와 장희빈 중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했을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판정승은 "장녹수" 이다. 장녹수는 혼군인 연산군을 이용해, 임사홍 등과 결탁하여 사화를 일으키고 인수대비를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 당시 최고의 정권자였다. 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도, 대궐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 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 이자 광인 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부귀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은 숙종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장희빈은 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는 했으나, 훗날 날이 가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이었다면, 장희빈은 한나라의 국모요,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의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를 위해 정적인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앞길을 막는 자는 저주나 모함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가차없이 내려친 인물이었다. 이에 비한다면 장녹수는 후궁의 직위나 국모의 자리보다 현재 보장되는 부귀와 영화를 철저히 즐기는 인물이었다.

즉, 장희빈이 철저하게 숙종의 승하 이후를 계산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길게 계산하는 미래지향적 인물이었다면 장녹수는 미래 보다는 현재의 위세를 더욱 중요시 하는 현재지향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장녹수와 장희빈의 죽음의 결말도 달라졌는데 장녹수는 그렇게도 자신이 철저하게 이용했던 연산군의 폐위와 함께 처참하게 칼질을 당하고 그 시체 또한 백성들의 침과 가래, 돌맹이 세례를 받아 까마귀 밥이 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은 그토록 사랑했던 지아비인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아 목숨을 끊었고 그 시체 또한 세자의 모후라는 이유로 대빈묘에 안치되어 끝까지 예의를 갖춘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니 장녹수와 장희빈의 비참한 결말은 이토록 궤도를 달리했다.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묘가 있는 서오릉


난세는 영웅을 만들고, 영웅은 미인을 탐낸다고 한다. 뛰어난 여성적 매력으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그녀들은 대단한 난세 속에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왕'을 휘어잡았던 단 한명의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이 비참하게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는 영웅을 소명하고 시기가 지났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는 만고불변의 진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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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
※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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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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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란토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