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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영국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헨리 8세

by 파란토마토 2007. 11. 9.


헨리 8세 여섯의 아내

영국 역사에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인물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긴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도 없었거니와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6명의 아내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영국 역사에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나라에 숙종과 비슷한 임금)


헨리 8세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8살의 청년으로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이 여섯 왕비 모두에게 성병 옮겨준(자식들에게까지 태내 감염됐음)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왕자 하나가 태내서부터 성병옮아 태어나 10살도 안돼 어린 나이에 저 세상갔고 또 한 왕자는 성병때문에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빠진 모습으로 살기도.........했다고 한다. -_-;

그의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였던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 공주였다. 이 결혼은 그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순전해 정치적 이유(에스파냐의 덕을 보기위한)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결혼하여 ‘메리’라는  딸을 낳았는데  ‘메리’는 나중에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이 된다.

어쨌던 사랑없는 결혼은 오래 못가고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시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래서 헨리 8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혼신청은 로마 교황의 권한아래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에스파냐의 압력 때문에 이혼을 거절했다.

독실한 카토릭 신자였던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혼의 사유-아들을 못 낳는다)과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니 나중에 이 두 종교로인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나라는 갑자기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앤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앤 볼레인을 통해 딸하나와 죽어서 태어난 아들 까닭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못다했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비극의 왕비 ‘앤 볼레인’의 딸, 이가 곧 엘리자베스 공주로 뒷날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앤 왕비를 사형시키고 며칠후 헨리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머’와 결혼, 드디어 왕자를 낳았으나 며칠만에 왕자가 죽고 얼마안가서 왕비 ‘제인 시머’도 죽는다. 그리고 헨리 8세는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무뚝뚝한 도이치 여자인 앤 공주를 왕비로 맞았으나 금방 이혼을 해버리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왕비 캐서린 하워즈의 외도 때문에 앤 볼레인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고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아라곤 왕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카탈리나(캐더린)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5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사이의 막내딸
1485년 12월 15일 마드리드에서 출생
1536년 1월 7일 헌팅던 킴볼튼 성에서 사망
피터버러 성당에 묻힘

원래 카탈리나(캐더린)는 헨리 8세의 형인 아더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더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카탈리나는 시동생인 헨리 왕자와 재혼하였다. 헨리 왕자는 이후 즉위하여 헨리 8세라 불렸고, 카탈리나와 헨리 8세는 6명 정도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중 오로지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린 메리 1세이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에 목말라 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정부였던 메리 볼린의 여동생이자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42세로 나이가 많았던 카탈리나 왕비가 건강한 후계자를 낳아줄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 했고, 교황이 이를 인정치 않자 카톨릭과 결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33년 헨리 8세는 카탈리나 왕비와 이혼하였다.

채 다섯달도 안 되는 결혼생활을 한 첫남편보다는 헨리 8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한다.
헨리 8세에게 이혼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비 앤 볼린(앤 볼레인)

윌트셔 백작 1세 토마스 볼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 사이의 딸
1501년 또는 1507년 노퍽 주 블리클링 홀에서 출생
1536년 5월 19일 타워 그린에서 참수형으로 사망

앤 볼린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헨리 8세가 원하는 후계자는 낳아주지 못했다. 세번째 아이가 아들이긴 했으나 그  만 사산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간통죄로 몰려 유폐된 후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앤 볼린의 첫 아이는 훗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으니 이가 곧 엘리자베스 1세이다.

헨리 8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차가운 도도함에 반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길 원했고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맺으면서 영국 성공회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

앤 볼레인은 헨리 8세가 간절히 원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게 돈다.
공주의 출생은  뜨겁던 사랑이  잔혹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유산, 아들의 사산을 거치면서 헨리의 사랑은 식고  앤과 이혼이 어렵자 앤에게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런던타원에 갇워 버리고는 처행을 시킨다.



잉글랜드 왕비 제인 시모어

존 시모어 경과 마저리 웬트워드 사이의 딸
1505년 윌트셔의 울프 홀에서 출생
1537년 10월 24일 리치몬드의 햄프턴 코트 궁에서 사망

제인 시모어는 1536년 5월 20일 요크 궁에서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53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로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살아 생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가  묻힌  윈저 성의 성 조지 교회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로써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헨리 8세와 함께 묻힌 아내가 되었다.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모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헨리 8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앤불린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앤 불린에 대한 열정만큼 제인 세이모어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고
앤이 캐서린의 가슴을 찢었듯 앤의 가슴도 제인 세이모어에 의해 상처받았다.

그녀는 첫 아내 캐서린도  두번째 아내 앤도  낳지 못한 헨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지만 출산중에 죽는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왕자가 바로 에드워드다.
10살에 왕이 되지만 16살에 요절한다.



클레페 공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안나 폰 클레페

윌리히-클레페-베르크의 공작 요한 3세와 마리아 폰 겔데른 사이의 딸
1515년 9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출생
1557년 7월 16일 첼시 올드 궁에서 사망

안나는 1540년 1월 6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직후 이미 헨리 8세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헨리 8세는 안나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1540년 7월 9일 이혼하였다.

대신 안나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앤 볼린의 집이었던
히버 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나는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정략결혼으로 헨리 8세의 네번째 아내가 된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하워드

에드먼드 하워드 경과 조이스 컬페퍼 사이의 딸,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
1520년 출생
1542년 2월 13일 그린타워에서 참수형

캐더린 하워드는 19살 때 안나 폰 클레페를 모실 시녀로 궁정에 오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더린의 숙부는 캐더린이 왕의 구애에 응하도록 조장하면서 이를 통해 왕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증대되길 바랬던 것 같다. 마침내 안나와 이혼한 헨리 8세는 1540년 6월 28일 캐더린 하워드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다. 49세의 왕과 18세의 캐서린. 왕은 청춘과 행복을 찾는 듯 했다. 헨리 8세는 그의 젊은 아내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고,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나 또는 '보석같이 아주 귀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이 안 되었을 무렵,  왕비의 결혼 전부터의 문란한 과거와 결혼 후의 불륜행각들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캐더린 왕비의 간통을 왕에게 고발했는데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 문제에 관한 조사를 계속 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캐더린 하워드가 결혼 전에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했고, 결혼 후에도 시종이나 악사등 여러 남자들과 밀통하며 불륜을 저질렀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그녀를 처형하기에 충분했다. 캐더린은 결국 유폐되고 런던탑(그린타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게 된다. 왕에게는 치욕이자 커다란 상처였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파

켄달 경 토마스 파와 모드 그린 사이의 딸
1508년(또는 1512년/1520년) 런던에서 출생
1548년 9월 5일 서들리 성에서 사망

캐더린 파는 헨리 8세와 맺어지기 이전에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8세와 캐더린 파는 1543년 햄프턴 코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이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이었다.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그녀는 토마스 시모어와 네번째 결혼을 했는데, 토마스는 바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었다. 캐더린 파는 곧 아이를 갖게 되었고, 1548년 8월 30일 메리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캐더린은 불행히도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서들리 성에 있는 성 메리 교회에 묻혔다.


헨리 8세의 딸 피의 메리

여섯 명의 아내, 그 가운데 두 아내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영국의 종교까지도 앤과의 사랑을 위해 바꿔 버린 헨리 8세, 공포의 전제 군주였으며 지금도 영국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인물,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카톨릭의 탄압과 화형)였다. 헨리 8세는 6명의 아내로부터 딸 둘과 아들하나를 얻었으나 아들 에드워드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허약한 체질로 6년만에 병으로 죽고 맏딸 ‘메리’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메리’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어머니(캐서린, 에스파냐, 철저한 카톨릭)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어야 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속에 에스파니아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헨리 8세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영국 교회)로 바꾸었고, 그의 딸 메리 여왕은 다시 카톨릭으로 국교를 바꾸었으며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니 성공회의 반발로 나라안은 크게 시끄러워졌고, 드디어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다. 메리 여왕은 반란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신교인 ‘청교도’들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는데 1555년부터 1558년까지 3년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메리 여왕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었다. 수만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죽고 화형장의 불길은 하루도 꺼지지않을 정도로 무서운 탄압이였으므로 메리는 나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녀도 죽었는데 정신병 환자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 떠들썩한 이혼을 강행하며 앤 불린에게 후계자를 열망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아기때 어머니는 간통죄로 처형되었기에 왕위 계승권도 박탈되고 런던탑에 유폐되기도 했던 힘든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남동생인 에드워드, 언니인 메리에 이어 25살에 영국의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 그녀는 영
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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