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단종이 정순왕후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 데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두 사람의 슬픈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라고 말한 것이 현재의 영도교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다. 단종은 천재군주 세종대왕과 그 뒤를 이은 문종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여 세종과 문종의 기대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보호해 줄 그 어떤 세력도 없이 왕위에 오른 그는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도 잃은 단종이 그 때 의지할 곳은 자신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 밖에 없었을 텐데.. 그마저 함께 하지 못하도록 떼어놓은 걸 보면 세조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 싶다.
단종
아버지는 제 5대 왕 문종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이다.
짧은 재위기간중에도 1453년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간행하게 했다. 1454년 〈고려사〉를 인쇄·반포했으며, 그해 12월 각 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681년(숙종 7)에야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어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정순왕후가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 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 후 불과 넉 달 만에 죽음으로써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단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비운의 소녀왕비의 곡소리는 온 마을 여인네들의 가슴을 후벼파서 산 아래 온 마을 여인들도 일제히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끼니도 잇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송비를 동네 아낙네들은 불쌍히 여겼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에게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시.
원통한 새가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럴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가도 끝남없는 이 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정순왕후 송씨의 능호인 사릉(思陵)은 동망봉 산봉우리에서 통곡하며, 죽을 때까지 지아비인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세조 나쁜 X. 양녕대군 벼락맞아 뒈질 X..... 세종대왕이 그렇게 잘 대접해주었건만..ㅠㅠ)
중전:신첩이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서 지은 상왕전하의 옷입니다. 언젠가는 대궐 밖으로 나가시어 사시게 될 날이 올 듯해서 그리하였습니다
윤씨:......
중전:전하께옵서 설마하니 상왕전하께서 헐벗고 사시게야 해드리겠습니까마는 서툴고 투박하나마 신첩이 지어드린 옷을 입혀 드리고 싶었습니다
윤씨:마마
중전:(보더니)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바라건대 이런 날이 오드래도, 마마를 뫼시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백년해로를 하면 원이 없겠거니 하였는데 신첩의 욕심이 지나쳤나 봅니다. 마음 한구석에 마마께옵서 대궐을 나가시면 생이별을 하겠구나 생각돼서 틈나는 대로 실을 뽑아 마마의 옷을 지었습니다. 사가의 어미가 좋은 일은 맞지 않고 나쁜 일은 맞는 것이 인간사라고 하시더니 일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차곡차곡 쌓은 옷을 가만히 어루만지는 중전
중전:마마. 행여 신첩이 보고 싶거든 신첩이 지어드린 옷을 입으시고, 실오라기 하나마다 신첩의 손길이 배어 있으니 신첩을 본 듯 하세요. 그러면 신첩이 또한 마마의 손길을 느낄 것이 아닙니까
박상궁:마마
통곡하며 엎드린다
박상궁: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산 사람을 죽은 사람 갈라놓듯 하십니까 우는 박상궁
중전:...... 옷만 어루만진다
단종:.......
고개 푹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단종
윤씨:마마. 신첩이 오늘 못볼 것을 보았습니다. 불가에서 이르는 천길지옥이 이보다 더 참혹하겠습니까
중전:(본다).....
윤씨:(울음 참으며)나무관세음보살
중전:아니지요
윤씨:(본다) 중전:(미소하며)불가에서 이르기를 산 것이 더 괴롭다 하였습니다. (단종 보며)전하의 여생이 그와 같으니 신첩의 가슴이 찢어지는 까닭이 그래서지요. 차라리 구천을 떠도는 갈 곳 없는 넋이라면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동. 방 안(밤)
윤씨:상왕 전하
단종:......
윤씨:전하께옵서는 상왕전하의 숙부가 아니십니까. 지금은 대신들의 간청에 못이겨 대궐을 나가시라는 전교를 내리셨으나
단종:숙모
윤씨:...... 단종:숙부께 전해주세요. 우리 부부를 갈라놓으실 생각이시라면 이 자리서 나를 죽이라고 하세요
윤씨:전하 단종:차마 숙부의 손으로 죽이기가 민망하시다면 내 손으로 목을 매지요. (울면서)생이별은 못합니다. 못해요. 용상도 내주고 대궐도 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인마저 내놓으라는 겁니까. 나는 못합니다. 못해요
고개 숙이고 우는 단종.... 옷만 어루만지는 중전
윤씨:......
차마 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 돌리고 눈물 짓는 윤씨
#동. 방
단종:......
대군복을 받쳐들고 있는 박내관과 송내관
김질:황공하오나 마마. 흑룡포를 벗으시고 대군복으로 갈아 입으시옵소서
단종:.....
김질:전하
단종:......
홍내관:(나서며)날이 밝고 있사옵나이다. 어서 옷을 갈아 입으시옵소서
단종:......
홍내관:......
뒤에 섰는 내관들에게 눈짓한다
내관들이 단종에게 다가간다
중전:(소리)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중전의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는 내관들
중전이 소복 차림으로 서있다
중전:나는 전하를 바로 뫼시지 못한 죄로 소복을 걸쳤다마는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셨느니라
김질:하오나 마마. 상왕전하께서는 이미 노산군으로 강봉을 당하셨는지라
중전:임금이시니라. 비록 숙부의 탐욕으로 보위를 찬탈당하시고 창덕궁에 갇히신 몸이 되었으나 세종께서 물려주시고 문종께서 보위에 세우신 임금이 아니시냐
홍내관:말씀이 과하시옵나이다. 분수를 지키시는 것이 중전: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홍내관:(움칠) 중전:네 놈이 죽어서 무슨 낯으로 문종대왕을 뵐려고 하느냐.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홍내관:(신음)
김질:(나서며)마마. 신들의 처지를 살펴주시옵소서
중전:도승지에게 전하세요. 내가 전하를 뫼시고 나갈 것이니 모두 전각 밖으로 나가 기다리라고 하세요. 더 있으라 잡아도 있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김질:하오시면
김질이 기침하고 눈짓한다
밖으로 나가는 내관들
홍내관, 못마땅해서 눈을 부라리며 나간다
김질:서두르시옵소서 마마
허리 굽히고 나가는 김질
중전:전하 단종:아무 말씀 마세요. 나는 중전하고 같이 갈 겁니다
중전:그만 일어나세요 마마. 더는 치욕을 당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단종:.......
중전:전하 단종:(울음이 터질 듯)나더러 어찌 살라고 이러십니까.나는 영월 땅이 어딨는지도 모릅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나 혼자 어찌 살라고 이러십니까
중전:....... 단종:나 혼자는 못갑니다
고개 돌리는 단종
중전:마마
마주 앉는 중전
단종:......
더 고개 돌린다
중전:신첩을 보세요 마마
단종의 손을 마주 잡아쥔다
중전:마마께서 영월로 가시면 신첩이 숙모님께 부탁하여 영월로 보내달라고 할 것입니다. 신첩이 어찌 마마를 혼자 사시게 해드리겠습니까
단종:......
중전:마마. 저를 보세요
단종:(본다).......
중전:그래도 신첩을 보내주지 않으면 신첩이 정업원의 담을 넘어서 마마께 달려갈 것입니다. 천리길이면 어떻고 만리길이면 어떻습니까. 걷다가 못 걸으면 기어서라도 마마께 갈 것입니다
단종:(울음이 터지려는)
중전:제 말씀을 믿으세요. 반드시 전하께로 갈 것입니다
단종:꼭 오셔야 합니다
중전:가고 말구요 마마 단종:하루종일 기다릴 겁니다. 밤이든 낮이든 중전이 올 날을 기다리며 살 겁니다
중전:녜, 기다리세요, 마마
웃어보이는 중전
단종:.....(바라보더니)보내줄 리가 없어요. 중전을 보내줄 숙부면 이렇게 우리를 갈라놓지는 않을 겁니다
중전:마마 단종:싫습니다. 차라리 이 자리서 죽겠습니다 중전:마마. 왜 자꾸 이러십니까. 신첩의 넋이라도 마마께 달려간다고 하질 않습니까 단종:(와락 중전을 얼싸안으며)내가 바본지 아십니까.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중전을 볼 수가 없을 겁니다. 내가 그것도 모르는 줄 아십니까
목을 놓아 울어버리는 단종
목이 메어 말을 못하는 중전
그저 어린애처럼 울고 있는 단종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는 중전
#동. 뜰
들어오는 도원군
양녕과 정인지가 양 옆에 섰고 한명회가 전각을 향해 섰다전각에서 단종이 나오고 있다
도원군:(신음)
뒤따라 소복의 중전이 나온다
도원군:전하
피맺힌 절규 단종:......
전각 위에서 힐끔 도원군을 바라본다
도원군:전하
또 한번 외친다
홍내관이 한명회에게서 전교를 받아 단종에게 내민다
단종:전교를 받들기 전에 부탁이 있느니라
한명회:......
단종:왕대비의 거처를 정업원으로 정하였으니 이는 부부간에 생이별을 하라는 소리가 아니냐
한명회:아직도 미련이 남으셨소이까 단종:부탁일세, 도승지. 왕대비와 같이 가게 해주구려
한명회:......
홍내관 등이 재빨리 단종을 좌우에서 껴안는다
단종:놓아라 이놈들. 놓지 못하겠느냐
중전:마마
상궁, 내인들에게 후원으로 끌려가는 중전,
버둥거리는 단종, 내관들을 뿌리치고 달려간다
서너 사람의 내관들이 달려들어 단종을 잡는다
힘 좋은 상궁이 중전을 등에 들쳐업는 모습이 보인다
울부짖는 단종
중전을 업고 달려가는 상궁, 그 모습이 멀어진다
이윽고 울음이 터지며 땅바닥에 주저 앉는 단종, 땅을 치며 목놓아 우는 단종
#대궐의 길
중전을 업고 받치고 달려가는 상궁, 내인들
#동. 길 목놓아 울고 있는 단종
해설: 실록에는 그날의 정경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적기를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에게 명하여 군사 오십명을 거느리고 단종을 영월로 호송하게 하였고, 군자감 정 김자행과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따라갔다고만 하였고, 다음날 실록에는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가니 임금이 환관 안노에게 명하여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하였는데 노산군이 안노에게 이르기를, 성삼문의 역모를 나도 알고 있었으나 아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내 죄이다, 하였다고 적고 있으니 조선왕조실록의 이러한 기록들은 왜곡되고 생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청령포의 강 해설: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절해의 고도와 같은 곳이었으니 강물이 휘감고 지나가는 삼면을 제외한 나머지 한 곳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단종을 지키는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감옥이었으니 죽는날 까지 외부의 사람들은 단종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청령포의 언덕 위 단종이 올라온다
해설: 단종은 틈만 나면 산 위로 올라가 서울을 바라보다 내려왔는데 그때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하듯 돌을 하나씩 주워 탑을 쌓았다고 한다
단종이 돌을 돌탑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해설: 단종이 돌로 쌓은 탑을 망향탑이라고 했다. 지금도 청령포에는 단종유지비각, 관음송, 망향탑, 노산대, 청령포 금표비 등이 전해온다. 이 때에 남긴 단종의 시 한 수가 또한 전해오니 다음과 같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온 후/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는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왜 듣지 못하나/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영도교에 남겨진 사랑 (출처: 오마이뉴스, 원본을 보려면 이 제목 누르기)
청계천에는 유서 깊은 다리가 많이 있었다.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애증이 서려 있는 광통교. 세종대왕이 하천의 수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웠으나 훗날 숙종 임금과 장희빈의 로맨스가 더 진하게 전해지는 수표교.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사업을 벌였던 영조대왕의 체취가 서려있는 오간수교. 그리고 하류에 있는 영도교다.
복원 후의 영도교
이 중에서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다리가 바로 영도교다. 조선 제 6대 왕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던 곳이다. 세종대왕의 왕세손으로 태어나 열한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야심 많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 죽음을 당한 비운의 왕이 단종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대궐에 연금하고 왕비 정순왕후는 서민으로 강등하여 성 밖으로 내쳤다. 대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가 거처하던 곳이 흥인문 밖 정업원이다. 낙산을 타고 내려온 산줄기의 북쪽에는 비구니들만의 가람 '탑골승방'이 있고 남쪽에는 정업원이 있었다.
정순왕후 송씨의 정업원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보고 싶은 지아비를 볼 수 없는 생이별이었다. 생활도 궁핍했지만 무엇보다도 정순왕후 송씨를 잠 못 이루게 한 것은 지아비 단종의 안위였다. 권력에 눈이 먼 수양대군 무리들이 단종을 어떻게 할까봐 피를 말리는 나날이었다.
이 때였다. 폐왕(廢王)을 대궐에 두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 수양대군이 단종을 멀리 영월로 유배 보낸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왔다.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에서부터 버선발로 뛰었다. 귀양 떠나는 지아비 단종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놓치면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배 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흥인문을 통과했다. 이제 성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유배 행렬은 동묘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에서 잠시 지체했다. 청계천 하류에 있는 이 다리는 광진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입성하는 길목으로 백성들의 통행이 많았다.
유배 행렬을 호종하는 금군(禁軍)들이 일반 백성들의 통행을 차단하고 단종이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정순왕후 송씨가 도착했다. 군졸들의 호종을 받으며 다리를 건너는 이는 분명 단종이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지아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 잠 못 드는 애틋한 사랑을 묘사한 공자의 관저(關雎)는 정순왕후 송씨를 두고 읊어 놓은 시 같았다. 단종을 발견한 정순왕후 송씨의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팔딱거리며 뛰던 가슴이 잦아들며 숨이 멎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전하! 전하!! 상감마마!!"
불러보았지만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고 입속에서 맴돌았다.
유배 떠나는 단종 역시 가슴이 아팠다. 부인을 한양에 남겨두고 영월로 떠나는 몸, 언제 다시 한양에 돌아와 사랑하는 부인을 만나게 될지 기약이 없었다. 흥인문 밖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었던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 때였다.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내 정순왕후가 있지 않은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망부석(望夫石)처럼 서있는 사람은 분명 사랑하는 부인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다. 눈동자가 불꽃을 튀겼다. 불꽃은 재가 되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단종은 멀어져 갔다.
이렇게 떠나가고 떠나보낸 두 사람은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 때 이들의 나이 단종 열다섯, 정순왕후 열여섯 살이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이 다리 원래의 이름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를 버리고 영도교(永渡橋)라 부르기 시작했다.
뱀꼬리:편의상 본문에서는 평어체를 썼습니다. 영도교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슬픈 사연이 있는 다리였네요. 특히 단종이 죽고도 질긴 생명을 몇 십년이나 이어간 정순왕후가 끝끝내 세조의 도움을 거부했다는 것과 소녀왕비의 울음소리에 온 마을 아낙네들이 같이 울었다는 것도 참 감동적입니다. 80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부인이니 남편을 죽인 세조의 도움이 반가울리 없었겠지요. 지아비를 죽인 세조의 도움을 받을 여인이었다면 평생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부모도 부인도 다 잃고 감옥 속에서 짧은 생을 외로이 살다 간 단종,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는 단종의 사연은 정말 많은 백성들을 울릴 만큼 충분히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적게 독려해주신 천년목님께 감사드립니다. 천년목님: 여러가지 자료를 다 끼워넣다보니 결론이 없는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이해해 주실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