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관리 사칭한 강도 행각 실록에 남아…
당상관 등 비호세력 밝혀지며 조정이 시끌
그림. 이철원.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홍길동(洪吉童)이다. 지금도 우리는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서 각종 서류양식을 작성하려 할 때 표본서류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가깝게 느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홍길동상(像)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이후부터 홍길동은 조선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릴 때마다 메시아처럼 갈구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사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은 소설 속 홍길동과 다르다. 광해군 때 허균은 세종 때를 배경으로 해서 홍길동을 썼지만 역사 속 홍길동은 연산군 때 인물이다. 신출귀몰했는지는 모르지만 홍길동은 한낱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다. 폭정이 도적 떼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임꺽정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한 명종 때 도적이다. 숙종 시대를 폭정기(暴政期)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잦은 당파 교체로 지방 수령들에 대한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장길산의 등장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6년(1500년) 10월 22일이다.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이 홍길동을 체포했다며 “기쁨을 견딜 수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3정승은 홍길동을 ‘강도(强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면 국왕과 3정승이 이처럼 흥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골치를 앓아야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위관리 사칭이었다. “강도 홍길동은 옥(玉) 달린 모자를 쓰고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홍길동을 조사한 한치형의 보고서에 나오는 홍길동의 범죄 행각이다. 중추부 첨지면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홍길동의 활동 무대는 주로 충청도와 한양, 경기도 일대였다.
홍길동 체포로 그의 비호세력들이 속속 밝혀지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엄귀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무인 출신의 당상관이었다. 조사 결과 엄귀손은 홍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관리해주고 집도 사주었다.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엄귀손의 홍길동 지원이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소극적인 것이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어세겸 같은 인물은 “엄귀손이 홍길동의 음식물은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인정상 흔하게 있는 일이니 허물할 것은 못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100대와 3000리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 박탈이었다.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이 형벌은 조선 때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중한 처벌이었다.
실록만 놓고 본다면 홍길동 사건보다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결국 한 달여의 조사 끝에 엄귀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연산군은 3정승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당연히 3정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엄귀손이 당상관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어서이지 조행(操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조행이란 조신한 행실을 뜻한다. 엄귀손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아래에서 우후(右候)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군공’이라고 함은 그때 국방의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엄귀손은 품행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동래 현령으로 있을 때는 관물을 마음대로 도용하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고, 평안도 우후 때도 공물을 훔쳤다가 퇴출되는 등 좋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 분명 중앙조정에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 엄귀손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무관의 관직은 대부분 돈과 뇌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공보다 뇌물이 엄귀손을 당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 사건과 관련되어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대도(大盜)’ 홍길동 덕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 사건은 여기까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관한 처벌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형을 시켰다면 분명 기록되었을 텐데 홍길동을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엄귀손에 준하는 형벌로 남쪽 섬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정에서도 홍길동 문제보다 엄귀손 문제를 더 중하게 다룬 것을 보더라도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조정 관리들은 누구를 욕할 때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조 때의 기록이다.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홍길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홍길동보다 못한 인물이 정승에 올랐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홍길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때 비운의 혁명아 허균이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정면으로 질타하는 국문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은 이조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실제 홍길동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이조판서와 같은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록 어느 한 구석에도 언급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허균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은 ‘홍길동 그 후’이다. 현실 속 홍길동이 섬으로 유배를 갔다면 소설 속 홍길동은 체포된 후 병조판서직과 쌀 1000섬을 하사 받고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병사들을 훈련시켜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멋진 상상이다. 지금도 율도국이 실존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만큼 허균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숙종 때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주로 보부상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홍길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보부상들이 맹세를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꼽았다. 홍길동은 조선 때 허균을 만나, 임꺽정은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를 만나, 그리고 장길산은 오늘날 황석영을 만나 되살아났다. 이들의 작품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폭정을 비판하며 역모를 꾸미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폭정의 시기였으며,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때도 군사정권이라는 폭정의 시대였다. 폭정은 평범한 백성을 도적 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도적을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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