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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by 파란토마토 2008. 2. 26.

드라마 왕과 나에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의 원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알아보자.


세계일보 기사 일부 발췌: 원 출처는 제목에 링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SBS 사극 '왕과 나' 계기로 본 환관들의 세계


◆환관이 국왕 독살 주도?=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종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 점에서 독살설을 완전 허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재야 학자 이덕일씨는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등 600년 조선사에서 왕권과 신권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에 특히 국왕 독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예종 때 역시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 공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하지만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환관이 독약으로 영조(6년)를 살해하려 했던 모반사건을 연구한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조선 고종황제 폐위를 지켜보는 내시들. 경인문화사 제공

◆김처선과 성종의 관계는=극중 인물 김처선은 단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에 우호적이던 환관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김처선 역시 이때 지방 관노로 유배된다. 2년 뒤 복직된 그는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이른다. 특히 연산군 11년에 임금의 실정에 대해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직언한 충신’으로 알려진 김처선의 캐릭터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종이 반정 성공 후 김처선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청을 수차례 거부한 것도 그의 성품이 강직해서가 아니라 당시 만취해 실언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를 놓고 김처선과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된 성종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성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환관을 우대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 개입만은 철저히 막았다. 정희흥 교수는 “성종은 승정원으로 일원화된 왕명 출납을 편의상 환관이 대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등 환관의 정치 금지를 제도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이하 생략 -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내시들은 일부 악명높은 이름들(김자원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권력이 미약한 편이었고 왕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김처선에 대해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바램이다. 이는 비단 김처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사극의 주인공화 하면서 나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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