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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독도는 우리땅' 지켜낸 어부, 안용복 이야기

by 파란토마토 2008. 2. 27.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2)]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일본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이른 곳이 다시 백기주도였다. 이번에는 안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말 그대로 범인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장수라는 뜻인데 그런 직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안용복은 그만큼 담대한 인물이었다. 안용복은 당초 조선 정부와 에도막부 사이에 맺은 계약내용을 명시한 다음 중간에서 대마도 도주가 얼마나 떼먹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백기주도의 도주로부터 앞으로 울릉도를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 어떤 통신사도 얻어내지 못할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심평이 안용복의 보고내용을 조정에 올리자 안용복 일행은 모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이 국경을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켰다며 참형(斬刑)에 처하려 했다.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 중한 범죄가 되는 희한한 장면이 전개된 것이다.

돈녕부 영사 윤지완이 나서지 않았던들 안용복 일행은 참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윤지완은 1682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윤지완은 “안용복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대마도가 옛날부터 중간에서 사기를 쳐온 것은 우리가 직접 에도막부와 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안용복으로 인해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공도 있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이끈 장본인은 윤지완의 친형이자 좌의정 윤지선이었다. 형은 죽이자고 했고 동생은 살려야 한다고 했다. 윤지완의 논리는 이번 일로 대마도가 크게 자극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용복을 죽여 그들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관직을 사칭한 죄도 포함됐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료가 참형을 주장하자 숙종도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론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지완이 나섰던 것이다. 그제서야 중추부 영사 남구만이 나서서 상책 중책 하책을 나눠서 제시한다. 상책은 안용복의 죄에 대한 판결은 일단 보류하고 우선 조정의 이름으로 대마도에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자는 방안이다. 에도막부에 특별사신을 보내 그동안 대마도가 중간에서 사기친 전반적인 내용을 점검해보겠다는 것이다. 중책은 조정이 아니라 동래부에서 같은 내용의 편지를 대마도에 보내는 것이었고 하책은 대마도에는 따지지 않고 안용복만 처형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상당한 논란 끝에 중책을 채택했다. ‘울릉도 수호의 영웅’ 안용복은 이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신 귀양을 가야 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도 안용복이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식자층 사이에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실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상의 사실을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정리한 다음 안용복의 공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다.”

조정의 일처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준열하다. “이런 일은 걸출한 자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하려다가 뒤에 귀양을 보냈다. 그의 기상을 꺾어버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애통한 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서도 무(武)의 가치를 존중할 줄 몰랐던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서글픈 사건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