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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 통치자이자 스승, 학문정치의 주역, 천재군주, 학자이자 문예군주, 무인군주였던 정조의 업적, 정조의 모든 것.

by 파란토마토 2008. 6. 5.
통치자이자 스승이었던 학문정치의 주역, 정조

출처:
디씨인사이드 이산갤러리

너무 좋은 자료라서 모두 함께 보고 싶어서 디씨 이산갤에서 퍼왔습니다.
(디씨 자료는 아시다시피 검색이 잘 안되거든요.)

정조 (正祖) [1752 ~ 1800] [1776.03 ~ 1800.06]
조선 제 22대 왕

前 왕자, 後 왕세손
휘 : 산(蒜)
자 : 형운(亨運)
태어난 곳 : 1752년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
승하한 곳 : 1800년 6월 28일 창경궁 정침
아버지 : 사도(장헌)세자(후 장조, 영조의 제 2왕자) [1735 ~ 1762]
어머니 : 혜경궁 홍씨(후 헌경왕후) [1735 ~ 1815]



◎정치이념

1.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여 왕권강화
2.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여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아 사회통합을 강화함으로써 백성을 중핵에 둔 사민국가를 확립
3. 과학기술과 상공업, 그리고 경쟁적인 시장경제가 발전하던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농업과 상공업이 병진하는 전향적인 경제질서를 구축하는 일
4. 스스로 군주이자 스승이기를 자처



◎업적

1777년
: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 인재, 융정, 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함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임. 또한 감사. 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함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함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음
            융정은 기존 5군영보다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고 서해의 해방을 위해 교동의 통어영과 강화도 경영에 힘씀      
1781년 :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음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함



초계문신제 : 조정의 37세 이하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 →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감

결과 :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함

1782년 :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 간행하게 함
1783년 : 장용위을 창설함
1791년 : 장용영을 창설함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 감에 따라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함
1792년 : [경림문희록]을 간행함 ; 한성부        
1793년 :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정례]를 저술하여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정례화 함
            [교남빈흥록]을 간행함 ; 영남
1794년 2월말 : 수원에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국방을 튼튼히 함
                     오늘날 1996년 세계문화유네스코에 선정, 1796년에 완성됨  
1794년 : [관동빈흥록]을 간행함 ; 강원도  
1795년 : 잔치의 모든 사실을 [정리의궤통편]으로 남김
            [탐라빈흥록]을 간행함 ; 제주도
            [풍배빈흥록]을 간행함 ; 함흥
            어머니 회갑연을 아버지의 원소가 있는 화성유수부에서 열어 전국의 노인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조치를 내리기도 함
1796년 : 화성 북쪽의 만석거와 대유둔을 축조함, 안양시에 만안제를 축조함        
1797년 :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임
1798년 : 화성 남쪽의 만년제를 축조함  
1799년 : 아버지 장헌(사도)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 3책을 남기고 자신의 저술, 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를 완성함
             화성 서쪽의 축만제를 축조함
1800년 : [관북관서빈흥록]을 간행함 ; 평안도

이처럼 각각의 빈흥록을 간행하여 도과(소과의 별칭)의 새로운 전범으로 삼고자 함, 무과에서도 몇 차례의 경과를 통해 다수의 출신들을 배출하면서 [병학통 1785년], [무예도보통지 1790년] 등 정예병 양성에 필요한 병서들을 편찬, 보급함



◎이 밖의 치적들
 
1792년 : 서울 선비들의 사대주의적 작태와 사치풍조를 막기 위해 "문체반정"을 폄
1795년 ~ 1798년 : 용인, 안산, 진위, 시흥, 과천의 군대 1만 3천여 명을 외영에 합속시켜 일종의 지역방어체제인 협수체제를 구축함
동쪽은 창룡위, 서쪽은 화서위, 남쪽은 팔달위, 북쪽은 장안위, 중앙은 신풍위가 맡아 이 이름들은 모두 화성의 4대문과 행궁의 정문에서 따온 것임
1795년에 화성행차시에 화성에 거의 4,000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두 차례나 실시함
→ 국방상의 뜻만 아니라 왕이 화성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됨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서울을 호위하는 남방의 요새지를 구축함
북 : 북한산성, 개성일대 : 대흥산성, 서쪽 : 강화도성, 문수산성, 동쪽 : 광주 남한산성 그리고 수원화성을 건설함으로서 서울외곽방어체제의 완결을 의미함

정조는 혜경궁 홍씨 회갑연 때의 화성 행차를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했으며 화성의 도시 주변에 모범적인 수리시설과 농장(둔전)의 건설에도 순수 왕의 사유재산인 내탕금을 투자함으로서 백성들에게는 돈 한 푼 내지 않도록 함
재위 중에 치세의 방향 모색과 관련하여 규장각을 통해 어정, 어명으로 저술사업을 벌여 근 150종의 산저술들이 이루어짐

문장에 관한 것으로 [사원영화], [시악화성], [팔자백선]등 다수 저술이 이루어짐
경학에 관한 것으로 [경서정문], [역학계몽집전]등을 저술함
사서로 [송사전], [사기영선]등을 저술함
불서로 [범우고]를 저술함
지리서로 [도리총고]를 저술함
축정서로 [성제도설]를 저술함
왕조의 의례관계로 [속오례의]등 수다한 저술이 이루어짐
[이충무공전서], [김충장유사], [임충민실기], [양대사마실기]등을 편찬,간행함
왕조 전기에 만들어진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를 합쳐 [오륜행실도]로 편찬, 간행하게 함
향촌질서 유지에 필요한 각종 의례들을 종합 정리하여 [향례합편]을 펴냄
이렇게 많은 저술들의 출판을 위해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 여러가지 자체의 활자를 80여 만자 이상 만듦
규장각으로 하여금 중요한 정사를 매일 기록하게 하여, [일성록]이라는 새로운 연대기 작성을 시작하게 하고, 경연 석상에서 한 말은 참석자들이 기록하여 [일득록]으로 편집됨



◎다른 군주들과 달랐던 정조의 즉위 과정

정조가 등극했던 1776년은 바야흐로 당쟁이 격화되었던 시기로 말 그대로 갈때까지 간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정조가 성군 세종,성종과 비슷한 경향으로 르네상스를 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들과는 달리 불안한 형국속에서 정치를 펼쳤다.

왕세제 금이 즉위하면서 탕평책으로 한 때 두 당파를 조절했지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다시 노론이 형국을 이룬 상황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들은 그의 아들 세손이 즉위하는걸 막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우선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을 비롯하여, 홍봉한, 정순왕후, 김귀주, 정후겸, 화완옹주 등 세손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조정 곳곳에 있었고, 세손은 하루하루를 고통과 불안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아들 세손을 제거하자는 노론의 제의에 반대하면서 세손은 어머니와 할아버지 영조, 그리고 충신을 맹세한 홍국영의 보호속에 운명의 1775년 12월을 맞이한다.

1775년 12월 겨울... 영조가 승하하기 3개월 전이었다. 당시 영조의 나이 82세...더이상 생에 집착할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온갖 풍파를 겪었던 그가 아니던가. 손자 세손의 나이는 어느덧 장성하여 24세가 되었다. 영조는 집경당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영조 자신은 힘이 없고 지쳐 세손에게 기대어 누워 있을 정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던 상태였다.

영조는 이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은 신하된 자로서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고, 홍인한 뿐만 아니라 영의정 한익모 등 여러 대신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영조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다시 한번 선언하자 홍인한은 무엄하게도 절대 그 청을 받들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영조는 결국 승지를 불러 전교를 쓰게 했으나 홍인한이 쓰지 못하도록 막았고, 전교를 읽어보라고 하였으나 홍인한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결국 영조는 노련하게 군사들을 동원하겠다고 했고, 영의정 한익모가 반대하자 영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대신들을 물리쳤다. 그리고 즉시 순감군을 동궁에서 수점하도록 넘겨 세손을 보호했다.

또한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숙부인 홍인한에게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하지 말라는 언문 서찰을 보냈으나, 홍인한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세손이 영조의 눈밖에 나도록 할 참이었다.

홍인한을 비롯한 숙의 문씨, 문성국, 정후겸 등은 사도세자 때와 같은 방법으로 세손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렸고, 이들은 세손을 대신할 소론 계열의 젊고 강직한 부사직 서명선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홍인한을 탄핵한다. 그러자 홍인한도 부사직 심상운으로 하여금 상소를 쓰게 하였고, 이제 영조가 어느 편을 들어줄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며 심상운을 처벌하고 세손의 대리청정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해 주었다.

세손의 대리청정이 1776년 3월까지 계속될 무렵, 영조는 83세의 나이로 결국 세손 곁에서 승하했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그가, 이제 어느덧 25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정치를 펼칠 시대가 드디어 오게 된 것이다.



◎다른 군주들과 다른 정조의 업적

* 규장각 설치

당시 조정은 노론세력들로 가득차 있었고, 소론이나 남인 등 소수 정당들은 조정에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과거시험은 부정부패로 얼룩져 더이상 시험으로서의 의미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문한기구를 설치하여 종전의 문한기능과 비서실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강력한 친위문신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재위 5년째이던 1781년 이후에는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규장각에서 기성관료들을 재교육시켰다. 정조는 주기적으로 규장각에 나아가 직접 이들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고, 글을 지어바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책노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양성하였는데, 정조가 승하 할때까지 초계문신으로 뽑힌 사람은 모두 13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나서 재위 6년 이후이던 1782년 부터는 각 도의 인재들을 현지에서 발탁하는 별시문과를 자주 시행하여 정치권의 대폭적인 물갈이를 시도했다.

* 백성들을 위한 정치

정조처럼 백성을 사랑한 군주도 드물다. 정조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몸소 그들을 만나려고 행차를 즐겼다. 말만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여타 군주와는 달리, 직접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헤아린 군주였던 것이다.

정조는 화성 건설 때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계절에 따라 의복을 하사하고 최신식 공구를 제작하여 배려를 했을 뿐만 아니라 피해가 없도록 최고의 품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때문에 민가를 헐게되자 그곳의 백성들 모두에게 충분히 보상까지 해주었다.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때에는 그곳에 사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가난한 자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며, 자신이 직접 인재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정조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 조선 최대의 정치 이벤트 화성 행차와 화성 건설

정조는 화성을 신도시로 건설하였다. 화성 주민에게는 요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하고 주변 상인이나 장인들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화성에 모여 살게 하도록 함으로써 상공업 진흥을 촉진시켰다. 이제 화성은 살기 좋은 신흥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화성의 신도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그 자리는 효종의 무덤 자리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남아있다가 후에 정조가 그곳에 대신들의 지지를 얻어 아버지의 묘로 정하면서 이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덤을 옮겨서 화성을 건설한것이 아니라 화성 건설을 미리 생각해두고 무덤을 옮긴 것이다.

또한, 그는 화성행차를 이용해 자신의 친위부대인 장용영 3,000여 명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업적과 위용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노론을 견제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효도까지 하려했던 것이다. 정조의 화성건설과 화성행차는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정치 이벤트이자 조선 건축기술의 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역대 군주중 최고의 저작

정조는 국왕이기에 앞서 상당한 수준의 학문을 갖춘 대학자였다. 그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은 [홍재전서]이다. 정조의 개인 문집인 이 책은 총 분량이 184권인데, 학문이나 문장으로 명성을 날린 사대부의 문집이 20~30권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의 저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조는 청년 시절부터 저술을 시작했는데 평생토록 그가 편찬한 책은 2,500권, 그가 내린 지침에 따라 신하들이 편찬한 책은 1,500권에 이른다. 그렇다면 정조가 이처럼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은 무엇일까.

정조는 어릴 때부터 대학자가 될 소질을 보여주었다. 첫돌을 맞은 정조는 붓과 먹을 가지고 놀고 책 읽는 시늉을 하였으며, 좀더 자라서는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기를 좋아했다. 정조의 교육은 네 살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조는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책을 읽었는데, 그가 얼마나 독서에 열중했던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너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정조는 4살 때 [소학초해]를 금방 끝내버렸다. 어린 손자의 뛰어난 자질을 본 영조는 이례적으로 세손 정조에게 서지수, 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하는 등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이 결과, 정조가 즉위할 때인 25살인 그는 이미 학문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들어 신하들과 인재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스승이기를 자처했다. 그만큼 정조는 학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야말로 군주가 되기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지 않았던가.

정조가 승하하던 1800년, 왕세자 공이 즉위했지만 정국은 또다시 노론 벽파세력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정순왕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조가 그동안 일구었던 정책들은 또다시 노론의 입맛에 맞게 변하고 말았다. 정조 승하이후 조선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점을 감안하면, 조선 후기 정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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