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GUE GIRL(이하V.G.) 2006년 12월호에 인터뷰를 했으니 <보그 걸>과는 1년 만의 만남이다. 어떤가, 그동안 스타일도 눈빛도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소년에서 남자가 됐다고 해야 하나? 장근석 아직은 스물한 살이니 소년으로 봐주면 안 될까(웃음). 인터뷰했을 당시가 드라마 ‘황진이’가 종영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그때 이후로 확실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V.G.어떤 면에서 그렇게 달라진 건가? 장근석 ‘황진이’를 하기 전에는 연예인과 연기자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한창 고민 중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TV에 나오는 수많은 연예인 중 한 명으로 보는 건지, 아니면 진정한 연기자로 보는 건지 몹시 궁금했다. 그 해답을 내려준 게 ‘황진이’였고, 그로 인해 처음으로 배우란 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후에는 행복했다. <보그 걸>과의 인터뷰도 그때 한 것이고. 그런데 차츰 그 행복에도 만족이 되질 않았다. 배우로서의 정체성은 찾았지만 진짜 성인으로 인정받는 스물한 살이 되면서 인간적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된 거다. 스무 살 때는 뭘 해도 재미있었고 ‘황진이’로 인해 주목받은 것도 즐거웠는데, 그만큼 책임감이 커졌기 때문인 것 같다.
V.G.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으로 살아서 그런가, 또래보다 생각이 참 많은 것 같다. 장근석 외동으로 자라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힘든 게 있어도 남에게 털어놓지 않고 속앓이를 하는 편이고. 그러다 차츰 개인적으로나 작품 면에서나 내 주장을 펼 때가 되니까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이 늘어갔던 거다. 그동안 매니지먼트나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있는 온실 속의 화초였다면 이제는 독립도 하고 싶고, 인생의 달콤한 면만 맛봤다면 쓴 면도 좀 맛보고 싶고. 지난 1년간이 내겐 그렇게 넘치는 호기심 속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알게 된 시기였다. 제2의 사춘기였던 게지.
V.G.남들 다 겪는 학창 시절의 사춘기에는 그런 게 없었나? 장근석 평범한 학생들과는 내가 처한 상황이 달랐지 않나. 내겐 사춘기를 느낄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엔 어른스러운 척하던 10대 장근석의 책임감 또한 너무 컸고. 어른들에게 반항할 생각도 전혀 안 해봤다. 어쩌면 남들 다 겪을 때 안 겪어서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배우, 두 가지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준익 감독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V.G.영화 <즐거운 인생>의 현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나? 로커의 이미지가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는 기분 좋은 평도 많이 들었으니…. 장근석 캐릭터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아도 어울리게 만드는 게 배우의 역할이긴 하지만, 현준은 내가 봐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님과 일했다는 사실에 비할 건 아니다. 그건 내 일생 동안 한 번 올까 말까 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값지다. 존경하던 영화계 선배들과 함께 작업한 것도 마찬가지다. 서로 녹초가 될 때까지 촬영했고, 때론 소탈하게 술잔도 기울이면서 여러모로 많이 배웠다. 영화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런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가 너무 좋았고, 그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잡을 수 있었다. 고민의 터널을 <즐거운 인생>과 함께 빠져나온 느낌이다.
V.G.그런 고민은 마치 1집에 성공한 가수가 가지는 서포모어 징크스와도 같다. 장근석 맞다. ‘황진이’로 새롭게 주목받은 후에 다가온 <즐거운 인생>이 내겐 배우로서 숙제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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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G.새로운 변신에 성공한 지금, 이제는 해답을 찾은 건가? 장근석 아직 못 찾았다. 하지만 이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가 고민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V.G.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 아닌가? 장근석 맞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정말 행운아다. 아역 배우들이 흔히 성인 역할로 인해 겪는 딜레마가 내겐 없었다. ‘황진이’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어른의 층위에 들어섰고 지금도 천천히 자라고 있다. 대중이 성장하고 있는 나를 그렇게 애쓰지 않고 서서히 받아들이는 느낌이 너무 좋다. 아, 요즘은 내가 숨을 돌리고 나니까 원더걸스가 좀 걱정되더라. 하하. 나도 그 나이일 때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V.G.원더걸스에게, 혹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조언하고픈 말이 있나? 장근석 누구도 정답을 제시해줄 순 없다. 결국 자신이 알아서 견뎌야 한다. 어느 정도 긍정적인 말을 해줄 순 있어도 그게 해결책은 아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니 보기 좋긴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의 허탈감이 분명 있을 것 같아서 괜한 걱정이 드는 거다. 난 배우인데도 그런 맘이 드는데 그들은 오죽하겠나.
V.G.당신도 요즘 무대에 많이 오르고 있지 않나? 무대 위의 모습을 보면 낯설어하기는커녕 그 순간을 정말 즐기는 것 같다. 장근석 다들 지겨워할 것 같아서 이제 좀 그만 하려고 한다(웃음). 하지만 막상 이렇게 말하면서도 무대에 올라가면 신나게 즐긴다는 걸 내가 더 잘 안다. 무대는 그만의 매력이 있다. 중학생 때 2만여 명의 관중들 앞에서 콘서트 MC를 봤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내 목소리를 듣고 있고, 그들의 함성을 내가 조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릴 때 느꼈던 그 마약 같은 희열이 아직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관객들의 반응이 바로바로 온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길게 준비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숨죽여 기다리는 영화 작업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V.G.MC로서, 혹은 가수로서 무대에 섰을 때의 느낌도 서로 다를 것 같다. 장근석 확연히 다르다. MC는 프로그램의 틀을 한 장의 지도처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건 물론이고, 게스트가 나오는 타이밍과 소개, 만약에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대비까지 전부 철저히 계산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가요 프로그램은 제한된 시간 안에 진행되는 생방송이어서 더욱 치열하다. 하지만 무대는 3분 30초 안에 나 자신을 던져버려야 하니까 계산할 정신이 없다. 어느새 무아지경이 돼버려서 가끔 예기치 않은 오버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솔직한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무대 위일 거다.
V.G.음반을 내자는 제의가 온다면? 장근석전 혀 생각 없다. 무대에 오르는 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라 가는 길 위에 놓인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은 배우다. 대중이 원하고 내가 즐긴다면 한 번쯤 해볼 순 있겠지만 결국은 배우라는 큰 나무의 가지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은 그저 재미있어서 하는 거다. V.G.하지만 한 분야에만 매진하기에는 당신의 끼가 너무 다분하지 않나.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게 요즘 젊은 배우가 가져야 할 미덕인 걸까? 장근석 나 역시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피할 생각은 없다는 거다. 고작 몇 편 찍었다고 영화 배우랍시고 목이 뻣뻣한 채로 직업적 틀에 갇힐 생각 또한 없다. 얼마 전 MKMF 시상식에서 헤드윅으로 분장하고 무대에 선 것도 화제가 됐는데, 그 반응도 찬반이 나뉘었다. 하지만 난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했으면 그걸로 만족하고, 사람들의 평가는 그 다음이다. 그로 인해 대중이 장근석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다면 그게 내겐 더 큰 수확이다.
V.G.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쾌도 홍길동’도 그런 도전의 일부인가? 장근석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사극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거절할 생각부터 했다. 하지만 대본을 읽어본 후에는 무조건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작가나 동료 배우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건 배우 장근석이 해야 할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이지적이고 차갑고 인정머리라곤 없는 악역 이창휘 역할인데, 유약했던 은호 도령과 정반대여서 더욱 좋았다.
V.G.한 분야에만 전문적인 스페셜리스트와 다방면에 두루 능한 제너럴리스트 중 지금 택하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장근석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연예인은 좀 억울하다. 전공과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많은데, 왜 유독 연예인만 한 분야에 집중해야 하고 다른 분야에 도전하면 박수는커녕 오해를 받는 건지 모르겠다. 난 내게 다가오는 다양한 경험들을 피하고 싶지 않다. 뭐든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 않나? 그래서 난 학교에서도 배우가 아닌 영화학도 장근석으로서의 삶을 최대한 즐긴다. 수업에도 열심히 출석하고, 가끔은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자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가 느끼고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권리가 내겐 있다고 생각한다.
V.G.학업과 새 드라마 촬영을 병행하면서 영화 홍보까지 덤으로 얹고 있는 상황이지만 피곤한 기색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삶의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 건가? 장근석 여유가 없는 가운데에서도 애써 여유를 찾는 편이다. 내가 말하는 여유는 잠을 몇 시간 자는지에 관한 시간적 여유가 아니라 내 맘이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에 대한 정신적 여유다. 그런데 요즘은 학교 공부와 촬영을 병행해 별로 여유롭진 못하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내 열정을 넘어 더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게 솔직히 혼돈스럽긴 하다. 또다시 그런 혼란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V.G.그 혼란기가 지나고 또다시 1년쯤 지난 후에는 뭐가 달라져 있을까? 장근석 그땐 삶의 요령이 더 늘어서 이 상황을 즐기는 나만의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술 한잔 하면서 인터뷰할 수도 있을 테고(웃음).
V.G. 술 좋아하는 편인가? 장근석술 자체도, 술 마시는 분위기도 모두 좋아한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용기가 생긴다는 사실이 좋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평소 내비치지 않았던 진짜 속마음을 보여준다. 고민도 조금씩 털어놓게 되고. 평소엔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과 공인으로서의 잣대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V.G.데뷔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주변의 시선쯤은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다. 장근석 오히려 어렸을 때는 그런 시선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논스톱’ 할 때쯤에는 어린 시절의 치기 탓에 차창 밖으로 쓰레기를 던지기도 하는 등 일부러 더 부도덕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좋다. 시선을 받는다는 게 행복하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 시선이 거둬질 때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이 일이란 게 언제나 잘 되지만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애써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래서 일 외에도 또 다른 삶의 재미를 많이 찾으려고 한다. 요즘은 그게 사진이다.
V.G.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뭔가? 장근석 외국에서였나, 모던한 코트를 입고 빈티지 가죽 가방을 멘 채 카메라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본 뒤로 나도 친구들과 장난 삼아 찍는 사진 말고 제대로 된 사진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DSLR 카메라를 장만했고, 최근에는 라이카 디지털 카메라를 마련해 세컨드 카메라로 함께 갖고 다닌다. 처음에는 찍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는데, 점점 고가의 렌즈와 장비에 욕심이 생겨 걱정이다.
V.G.당신이 생각하는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은 뭔가? 장근석 무심코 지나쳤을 순간을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사진은 어릴 적 쓰던 비누나 옛 연인의 향수 냄새와도 같다. 우연히 그 냄새를 맡았을 때 그때의 추억이 함께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사진도 역시 그렇다.
V.G.포토그래퍼로서가 아니라 피사체로서도 카메라가 익숙하지 않나.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다면? 장근석 1년 전에 <보그 걸>과 촬영한 그 사진. 내 방 벽에도 붙어 있을 정도로 맘에 든다. 그때와 지금은 내 모습과 주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그 사진을 볼 때면 진정한 배우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의 의지가 다시금 떠오른다. 배우로서의 초심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내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사진이다.
V.G.사진 외에 좋아하는 건 뭔가? 장근석 글 쓰는 걸 좋아한다. 수업 듣다가도, 차 안에서도 순간 좋은 글이 생각나면 메모지에 써놓곤 한다.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그 말이 어울리는 사진들과 함께 미니 홈피에 올리기도 하고. 요즘에는 책도 더 많이 보려고 한다.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댄스댄스>를 읽었다. 한때는 하루키 식의 세밀한 묘사가 좋아서 그의 책에 빠졌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때문에 좀 질리더라. 한 장르만 계속 보는 것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보는 게 좋다. 역시 독서 면에서도 호기심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