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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평가가 갈리는 왕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

요즘에는 꽤 좋은 평가가 더 많은 듯 하지만 (세종의 아버지이자 딱 필요한 만큼만 숙청)

나 어릴때만 해도 상당히 많은 책에서 이방원은 나쁘게 평가되어 있었다.

https://youtu.be/c1O0H_49G2U?si=R10HWOlklVR1fJEE

 

태종 이방원을 가장 많이 알린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 이방원

 

https://youtu.be/MrAn80VnsUQ?si=undGWeVdUlEBTTW1

 

https://youtu.be/J97sPTGXbV4?si=sAQUJh8AkNARItij

 

 

권력욕에 미쳐서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고,

친아버지를 유폐하고,

친동생을 죽이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치고,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일으키고,

자신을 도와준 처가를 몰살시킨,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에게도 잔인했던 피가 아닌 철로 이루어진 듯한 사람.

 

이러한 이방원에게도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으니... 

공적인 면, 특히 권력을 넘보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잔인하고 끝까지 철퇴를 내렸으나,

사적으로는 의외로 허술하고, 아랫 사람의 잘못도 눈감아주는 관용과 너그러움도 있었다.

 

============================================= 아래 글 출처는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기사혜정교 근처의 아동들이 주상·효령군·충녕군의 이름을 빌어 타구 놀이를 하다

『 명하여 형조(刑曹)의 계본(啓本)을 불태우게 하였다. 혜정교(惠正橋) 거리에 아동 곽금(郭金)·막금(莫金)·막승(莫升)·덕중(德中) 등이 있어 타구(打毬) 놀이를 하는데, 매 구(毬)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하나는 효령군(孝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충녕군(忠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伴人)이라 하였다. 서로 치다가 구(毬) 하나가 다리 밑의 물로 굴러 들어가자,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
하였다. 효령군의 유모(乳母)가 마침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 대사헌 정역(鄭易)에게 고하였다. 정역이 형조에 고하여 옥에 가두고 물으니, 말하기를,
“곽금(郭金)이 제창하여 장난한 지 이미 3일입니다.”
하였다. 행행(行幸)하는 때이므로 아뢰지 못하고,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요언률(妖言律)로써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모두 10세에 불과하니, 요언(妖言)을 조작한 것으로 논함은 불가하며, 또 동요(童謠)라 이를 수도 없다. 예전의 이른 바 동요란 이런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동요라 하더라도 또한 무죄(無罪)이니, 동요의 율은 즉시 대언사(代言司)로 하여금 형조와 함께 불태우게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였다.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

 


공에 다가 임금 이름 붙여서 발로 차는 아이들 용서...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기사시골 사람 손귀생이 창덕궁을 구경하고 광연루까지 들어와 구금되었으나 석방하다

『손귀생(孫貴生) 등 두 사람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손귀생 등은 시골 사람인데, 창덕궁(昌德宮)을 구경하고 들어와서 광연루(廣延樓)의 못 아래에 이르렀었다. 순금사(巡禁司)에서 장(杖) 80대로 조율(照律)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시골 사람이니 방면(放免)하는 것이 옳다. 예전에 조서(趙敍)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시골 선비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숙직하고 이른 아침에 내 보냈었는데, 그 사람이 갈 길을 잃어서 곧바로 침전(寢殿)의 뜰안으로 들어왔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서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나가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무지한 자이다. 좌우(左右)에서 들으면 반드시 법대로 처치하도록 청할 것이니, 빨리 놓아보내서 가게 하고, 이 말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었는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일이다.”』

술취해서 궁궐에 잘못 들어온 백성 용서...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4월 9일(기사) 2번째기사  『해온정(解慍亭)을 창덕궁(昌德宮) 동북 모퉁이에 지었다. 임금이 지신사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이제 새 정자(亭子)가 이룩되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저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天淸地寧]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적당하지 못한 듯하여, 내가 해온(解慍)으로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이 말을 내면 신하들이 반드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추켜 세우는구나. 다시 권근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물어보도록 하니, 권근이,
“좋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새 정자를 명명하였다.』


 혜온정이 만들어지자, 태종은 황희 등에게 "이 건물 이름을 혜온정으로 하자. 어떠냐?"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신하들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이고, 아주 좋습니다."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태종은 씩 웃으면서
"얘네들은 임금이 뭐라고 말만 하면 모두 예, 예, 좋습니다. 이런 말만 하는구만."
하고 권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내뱉는 말이지만 신하들에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발언 입니다.

아부하는 신하들에게 일침 날리는 왕;


자세한 글은 아래 출처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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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https://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2&id=4643945

 

이방원이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은 있는 사람이었죠 : MLBPARK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

mlbpark.donga.com

 

이러한 이방원의 강한 매력과 큰 아들 양녕대군과의 갈등을  잘 그린 드라마가 용의 눈물,

약하고 인간적인 고뇌하는 모습을 잘 그린 드라마는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이 왕되기 전에 겪는 여러가지 일들을 재미있게 표현한 글 모음

 

1화 https://theqoo.net/square/2272619492

 

더쿠 - 아빠가 쿠데타일으켰는데 청와대로 정상출근한 5급사무관ㄷㄷㄷㄷ

군인 아빠가 갑자기 쿠데타일으킴 https://img.theqoo.net/fKHHR 아빠가 그랬건말건 출근은 해야하는 K-직장인 방원이 https://img.theqoo.net/zVjdK 울공주님들 조심히 외할아버지네 가있어 아빠다녀올게~ 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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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https://theqoo.net/square/2273769433

 

더쿠 - 한밤중에 부하직원들이랑 집에 찾아온 직장상사... 먹고살기 정말 힘드네요.pann

오늘도 관청에 출근한 K-직장인 방원이 https://img.theqoo.net/lQcfl 아빠 쿠데타 후로 직장내 따돌림 당하는중 https://img.theqoo.net/pGOTx ㅈ같네...고용노동부 1350에 신고할까... 했지만 처자식 생각하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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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https://theqoo.net/square/2281346501

 

더쿠 - 기싸움 오지는 국무회의에 참석한 K-직장인 방원이.jpg

자객 잠입했단 소식듣고 집으로 달려가는 방원이 그런데 오늘은 https://img.theqoo.net/mtgWv 축제 기간이었던것임 https://img.theqoo.net/cLgTs 불쇼하고 난리남 https://img.theqoo.net/CFwtn 환장 https://img.theqoo.ne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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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https://theqoo.net/square/2282980382

 

더쿠 - 민심 떡락한 어느날 이리저리 구르는 K-미니역적 방원이.jpg

우왕창왕 주살하고 이성계 민심떡락한 어느날 https://img.theqoo.net/pOlxm 오픈카 끌고나왔다가 비맞는 방원이 https://img.theqoo.net/uOqOa 갓길에 주차하고 비 피하려는데 큰형등장 https://img.theqoo.net/kjY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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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https://theqoo.net/square/2290646129

 

더쿠 - 안그래도 복잡한 와중에 삼년상 치르게 된 K-효자 방원이.jpg

맘바꿔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성계 https://img.theqoo.net/LYMGs 하필 몽주를 만남 https://img.theqoo.net/LszDk 나 왕하려구ㅎㅎ 너도 같이하면 참 좋을텐데 좋은말로 넌지시 떠보지만 https://img.theqoo.net/Ava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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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https://theqoo.net/square/2298416919

 

더쿠 - 조장하실분...? 숨막히는 눈치싸움에 고통받는 K-조장 방원이.jpg

결국 몽주를 죽이지 못한 현 조정 상황은 팀 캡틴고려 vs 팀 회군맨 https://img.theqoo.net/XVWdm 확연히 드러나는 쪽수차이 https://img.theqoo.net/fMitW 성계야 너 내 아들 마중 좀 다녀와라 https://img.theqoo.ne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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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https://theqoo.net/square/2299480887

 

더쿠 - 기껏 밥상 다 차려줬더니 집에서 쫓겨난 K-총대 방원이.jpg

몽주킬 팀플 조장이 된 방원이 https://img.theqoo.net/eGbti 공동발표 할사람 혹시 있음? 내가책임지겠음 https://img.theqoo.net/VDTLL 철퇴맨 영규가 자원 한편 성계 병문안 가려는 몽주를 대신이 말림 http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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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https://theqoo.net/square/2306393916

 

더쿠 - 드디어 아버지가 왕좌에 올랐지만 미운털박혀 서러운 K-방원이.jpg

고려 왕대비를 압박해 국새를 받아낸 신하들 https://img.theqoo.net/TYXFw 성계야 너가 원하던 국새받아왔어 https://img.theqoo.net/AvwAJ 염치가있지 어떻게 덥석 받아 https://img.theqoo.net/OgAXt 무릎꿇었다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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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https://theqoo.net/square/2307219626

 

더쿠 - 드디어 시작된 세자자리 둘러싼 조선막장드라마 속 K-주인공 방원이.jpg

막내 방석이가 세자됐단 소식에 빡친 방원이 https://img.theqoo.net/UJvNM 뭐라고? 방석이가 세자라고? https://img.theqoo.net/FxoqG 울엄마 무시하는건데 가만히 있을거야? 의욕을 잃은 방과형 https://img.theq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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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https://theqoo.net/square/2314263205

 

더쿠 - 권모술수 판치는 와중에 죽을지도 모르는 명나라로 가게된 K-왕자 방원이.jpg

갑자기 방원이 집에 찾아온 강씨 https://img.theqoo.net/uJGnT 귀한 약재란다 https://img.theqoo.net/DVAkJ 이거먹고 금쪽이 낳아야지 https://img.theqoo.net/tMGgK 병주고 약주고임? https://img.theqoo.net/HwGbE 중전마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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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https://theqoo.net/2315181298

 

더쿠 - 6개월 해외출장길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K-사신 방원이.jpg

방원이가 명나라로 떠나고 https://img.theqoo.net/vPvni 그래도 자식이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 https://img.theqoo.net/Orzph 중전마마에게 들려온 충격적 소식 https://img.theqoo.net/mHLIY 내시랑 세자빈이 간통함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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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 지우지 말길... 제발..

 

요즘 드라마는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하던데... 

재밌는 사극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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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식목일을 지정할 정도로 나무가 없는 민둥산에 황무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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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벌거벗은 붉은 산엔 살 수 없어 갔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가 사는 곳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불러도

아무도 대답 없는 벌거숭이 붉은 산

메아리도 못살고서 가버리고 없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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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래를 부를 정도로 황무지였는데..

2차세계대전 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최초의 국가 대한민국.

 

https://youtu.be/HuNW5DGmbVE?si=hnAM-qM6qi-nk0kv

 

1960년대 구파발 일대의 산림모습,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1. 한국은 온돌로 난방을 하는 국가 였음.

2. 온돌 난방은 마른 나무인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나무 소비가 엄청난 난방방식 이었음.

3. 한반도 기후도 나무가 크는데 장애가 됨

4. 한반도는 가을부터 봄까지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서, 수시로 일어나는 산불에 산이 홀라당 타버리는 일이 계속 생김

5. 한국의 난방 방식은 변함이 없어서 해방 이후에도 지리산과 개마고원같이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 제대로된 숲이 사라져 갔음

6. 6.25전쟁이 터지자 그나마 남아있는 산림도 파괴되어버려 당시 유엔 보고서는 한국의 산림은 복구될 수 없다고 보고하였음

7. 당시 월드뱅크는 개발도상국들에게 나무를 심는 자금을 지원했었음.
​​
8. 하지만, 개도국들은 나무를 심는 자금을 돈으로 주면 삥땅을 처먹어버리고, 돈 대신 묘목으로 주면 대충 심고 관리를 안해 나무가 죽지읺고 뿌리를 내리는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 상황이었음.
​​
9. 6.25전쟁으로 산림이 폐허가 된 한국에도 월드뱅크의 지원자금이 나옴.
​​
10. 처음에 한국도 삥땅 의혹을 받았음.
​​
11. 월드뱅크의 식목 지원자금으로 묘목을 사는게 아니라 석탄과 시멘트 탄광을 개발한 것임
​​
12. 월드뱅크가 삥땅이라고 ㅈㄹ했지만, 한국의 설명을 듣고는 납득을 해버림.
​​
13. 장작으로 난방을 하고 나무로 집을 짓는 한국에 나무를 심기만 해서는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땔감이나 기둥이 된다.나무대신 땔감과 건출자재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먼저 제공해 줘야 한다는 논리 였음.

​14. 탄광들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목재 가옥은 시멘트 양옥으로 대체되기 시작함.
​​
15. 두번째 한 일은 화전민을 없애는 것이었음.
​​
16. 그나마 나무들이 있는 깊은 숲속에는 화전민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 나무를 태워 없애고, 그 자리에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있었음.
​​
17. 화전민들을 산 밑으로 이주시킴.
​​
18. 화전민들에게도 있는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을 자극하고, 먹고 살 일거리를 마련해 줌.
​​
19. 어린 자식들까지 교육도 안시키고 화전민으로 키울거냐는 말이 화전민들에게 먹힘.
​​
20. 화전민 정착촌을 근사한 양옥으로 지어주고, 그 곳에 학교를 만들어 줌.
​​
21. 화전민 여자는 국가가 운영하는 묘목 키우는 농장에 일군으로 고용했고, 남자는 벌을 치는 양봉을 할 수 있게 지원했으며, 산에 있고 싶으면 산을 지키는 산지기로 채용해주고 임금을 줌.
​​
22. 도시에 살고싶다는 화전민이 있으면, 환경미화원으로 고용해서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해주며 화전민을 줄여나감.
​​
23. 당시 숲이 많은 강원도에만 3만명의 화전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을 이렇게 정리함.
​​
24. 이렇게 사전정비를 한 후 나무를 심기 시작함.
​​
25. 공무원들을 활용했음.
​​
26. 당시에도 공무원들은 해당 지역 출신들이 읍사무소, 면사무소를 장악하고 있어 묘목을 주고 나무를 심으라고 하면 민관이 한통속이 되어 제대로 정부 지시가 작동이 안되었음.

27. 교차 검사가 신의 한수 였음.
​​
28. 경상도 공무원은 전라도로, 전라도 공무원은 경상도로 보내는등 타 지역으로 보내서 교차 검사를 하게 함.
​​
29. 여기에 공무원들간에 경쟁을 붙임.
​​
30. 묘목이 심어서 죽지않고 제대로 자라나는 활착율이 높은 지역의 공무원들에게는 특진과 성과급을 줬고, 낮은 지역의 공무원들은 성과평가를 까버림.
​​
30. 자기가 속한 지자체가 성과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는 타지역 점수를 까내려야 함. 어설프게 술한잔 접대받고 타지역 점수를 잘 주면 자기 조직 평가가 망가지기때문에 공무원들이 눈에 불을 킴.

31. 이렇게 깐깐하게 검사를 하다보니, 활착율 100%라는 숫자가 나옴.
​​
32. 월드뱅크는 활착율 100%라는 숫자를 믿지 않았음. 개도국들 평균 활착율이 10%도 안나오는데, 묘목 하나도 안죽이고 100% 다 키운다는 활착율은 사기라고 평가함.

​33. 그런데 활착율 100%는 사실이었음.

​34. 묘목을 공급할때 이동 과정이나 심는 과정에서 묘목이 죽는것을 감안해서 110%를 보통 공급했음.
​​
35. 곰무원들은 110%의 묘목을 받으면 100%를 일단 지정된 장소에 심고, 남은 10%를 다른 곳에 심어서 키움.
​​
36. 타지역 공무원들이 활착율을 점검하러 오는 시기가 되면, 나무를 심은곳에 다시 가서 말라죽거나 비실비실하는 나무가 있으면 딴곳에 짱박아 심은 나무로 교체를 해버림.
​​
37. 해픙과 돌산으로 나무가 자랄수 없는곳으로 간주받던 포항시까지 녹화사업이 완료될 정도였음.

38. 포항 영일구의 경우 흙도 없이 암반층만 노출된 상태로 풀도 자라기 힘든 지역임. 이 가파른 암반층에 허리에 줄을 묶고 인부들이 올라가서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퇴적암반이 풍화되게 한 뒤 거름을 섞어 나무를 심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주고 매년 비료를 주는 생고생 끝에 산림이 복원됨

39. 당시 아카시나무 같은 외래종을 심어서 욕을 먹었으나, 아까시나무는 수명이 짧은 나무라 산림환경이 조성된후 자연적으로 죽으며 떡갈나무등 활엽수로 대체되고 있는 중임

​40. 당시 녹화사업은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산림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한 과정의 성격으로 당시의 척박한 토질환경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

41. 60년대에 메마른 토양에서 잘 자라는 큰 키나무는 리기다소나무, 사방오리, 아카시나무 정도밖에 없었고, 아카시나무의 경우 뿌리혹박테리아의 질소고정으로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나무였음

42. 외래종을 심어 생태계 교란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외래종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말라죽고 자생 활엽수림에게 자리를 내주면서 자연스럽게 산림 복원이 이뤄지게 됨

43. 최초 계획도 1차는 아카시나무등 생명력이 강한 픔종, 2차는 소나무등 중형목, 3차는 경제성이 좋은 대형종으로 10년씩 3차로 미리 게획된 초장기 프로젝트 였음

44. 하지만 정치적인 일로 인해 2차까지만 진행되었음

45. 여튼 1982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한국은 2차 세계대전이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 라고 보고서를 발간함



한줄 요약

 

1970년대까지 한국 산에는 나무들이 거의 없었는데.

100억 그루 이상 묘목을 심어

40년을 키워 전국토 63퍼센트가 산림인,

울창한 한국 산이 됨.

 

2차 세계대전이후 산림 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 우리나라.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1960년대에는 거의 민둥산 천지였다. 땔감으로 나무를 ...)

OECD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출처: https://theqoo.net/square/2563610521

 

더쿠 - 우리나라 산에 나무가 많은 이유 . jpg

1. 한국은 온돌로 난방을 하는 국가 였음. ​ 2. 온돌 난방은 마른 나무인 장작을 땔감으로 사용해서 나무 소비가 엄청난 난방방식 이었음. ​ 3. 한반도 기후도 나무가 크는데 장애가 됨 ​ 4. 한

theqo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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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참으로 훌륭한 필체.



태조


세종


문종

문종문종

세조세조

성종성종

선조선조

인조인조

효종효종

현종현종

숙종숙종

경종경종

정조정조

효명세자(익종)효명세자(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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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쓴 글은 역시 옛날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역사니까 옛날 이야기 맞구나..ㅋ)

 

 

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기사 이미지
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680년에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했다가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 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챔피언' 장옥정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든 숙종


기사 이미지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세 주역. 왼쪽부터 최숙빈(한효주 분), 장희빈(이소연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
ⓒ MBC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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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드라마였던 동이 속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실제 만남은 어땠을까?
궁녀와 지존의 극적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수문록: 조선 후기의 문신 이문정(李聞政)이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연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책.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입궁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 공간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봤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위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한 사료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숙종 18년(1692) 이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1656~1726년)이 지은 <수문록>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1721~1722년)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 이문정의 <수문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밤중에 궁궐을 거닐던 숙종은 조명이 유독 화려한 어느 궁녀의 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이 방안을 몰래 엿보니, 웬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종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렇게 해서 최 숙빈과 숙종이 조우하게 되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숙종이 방문을 열어젖힌 뒤의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을 통해, 우리는 최 숙빈이 그 순간에 얼마나 대담성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방문을 열어젖힌 숙종은 "너 지금 뭐하냐?"고 물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이문정의 <수문록>에서는 "선대왕(先大王, 숙종)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고 기록했다.

 


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최 숙빈의 '대담성'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한밤중에 잔칫상을 차려 놓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숙종이 묻자, 최숙빈이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수문록>

 

 

 

 

 "선대왕(先大王,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

 

 

숙종은 좀 '솔직한' 군주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최측근들에게 숨기지 않았던 듯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그 의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방문 앞에 다가선 숙종은, 창호지에 침을 묻혔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의 체면을 내팽긴 채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그 궁녀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이 궁녀가 바로 훗날 영조를 낳게 될 최씨였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다.

이후의 기사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날 밤 궁녀 최씨는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홀로 거행하다가 숙종에게 우연히 들켰고 그런 모습에 감동된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문록>의 설명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 젖히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임금의 얼굴이 보인다면, 웬만한 궁녀들은 기겁을 하고 놀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임금이 "너 지금 뭐하냐?"라고 물어보면, 아마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최 숙빈은 마치 사전에 준비라도 해놓은 듯이 매우 침착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녀는 중전(폐비 인현왕후)의 시녀로서 특별히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 지금 뭐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네, 저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인현왕후의 시녀였다며 자기소개부터 먼저 했다. 최 숙빈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현왕후와의 관계를 밝힌 다음에 최 숙빈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은 중전의 탄신일입니다.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계시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드시는 것이라곤 거친 현미뿐입니다. 내일이 탄신일인데 누가 좋은 음식을 올리겠습니까? 소녀로서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이것을 차린 겁니다. 중전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진헌할 길이 없어서, 마치 실제로 진헌하는 것처럼 소녀의 방안에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인현왕후가 죄인이고 장 희빈이 중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대답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현왕후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그런 숙종 앞에서 폐비를 두둔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숙종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웬만한 궁녀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자기 부모님 생신이나 기일 등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인현왕후의 생일을 들먹인 것은 최 숙빈이 보통 이상의 대담성을 소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위의 행위를 결코 '무모함'이라 표현하지 않고 '대담성'이라 표현한 것은, 최 숙빈의 행동이 평소에 축적된 고도의 상황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숙종은 '폐비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서인들의 상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숙종은 그런 상소들을 무시하곤 했지만, 계속 올라오는 상소문이 숙종의 심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폐비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다고 최숙빈이 대답하자, 숙종이 그로부터 감동을 받아 최숙빈을 가까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다. ⓒ <수문록>

 

 

 

최 숙빈은 인현왕후전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숙종의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폐비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말해도 숙종이 진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황판단을 했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폐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이 바뀌고 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아직까지는 폐비가 죄인의 신분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전을 쫓아낸 것은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칭찬을 들을 가능성보다는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일이었다.

결국 최 숙빈의 대담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숙종은 "죄인의 생일을 기념하다니! 이런 발칙한!"이라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최 숙빈의 행동으로부터 신선한 감동을 받아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수문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그제야 생각해 보니, 다음 날이 정말로 중전의 탄신일이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시고는 마침내 그를 가까이하셨다."

침방나인으로 바느질 생활을 하던 최 숙빈이 숙종과 친분을 맺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결정적 요소는 위와 같이 최 숙빈 특유의 대담성이었다. 판단력을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인 대담성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이하 생략 =======================

 

 

 

전체 기사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동이에게 껄떡댄 숙종? 실제론 최숙빈이 대담했다 

동이와 숙종의 만남, 실제론 더 드라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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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사전 인물사전 중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가장 거칠고 파괴적인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형태의 폭력은 전쟁이다. 이순신은 그런 전쟁을 가장 앞장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무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파해야 할 역경이 다른 분야의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했으리라는 예상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거대한 운명을 극복하고 위업을 성취한 인간의 어떤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만하다.


- 이하 생략





세계 4대 해신

살리미스 해전 -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테미스토클레스'
칼레 해전 - 신흥 해양국가 영국의 해군제독 '찰스 하워드'
트라팔카 해전 - 영국 해군 총사령관 '허레이쇼 넬슨'

그리고,

한산 해전 - 조선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옥포해전

1592년 5월 7일 거제시 옥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1명 부상
  왜  : 군사 - 50척 / 피해 - 전선 26척 격침, 4080명 사망


합포해전

1592년 5월 7일 창원 마산 합포구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적진포해전

1592년 5월 8일 고성 적진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판옥선 2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 피해 - 전선 11척 격침, 2840명 사망


사천해전

1592년 5월 29일 경상도, 사천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 2척, 판옥선 26척 / 피해 - 이순신, 나대용 피격(사상자 기록없음)
  왜  : 군사 - 13척, 병력모름 / 피해 - 13척 모두격침, 2600명 사망


당포해전

1592년 6월 2일 토영 당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거북선(귀선) 포함 2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1척 / 피해 - 전선 21척 모두 격침, 2820명 사망


1차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5일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산 26척 / 피해 - 구루시마 미치유키 사망, 전선 26척 모두격침, 2720명 사망


율포해전

1592년 6월 7일 거제도 율포만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1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7척 / 피해 - 대선 2척·소선 1척 격침, 대선 3척·소선1척 나포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3명 전사, 10여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73척, 수군 1만 명 / 피해 - 47척 침몰, 12척 나포, 8980명 사망, 마나베 사마노조 할복자살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경상도 진해 안골포

조선 : 군사 - 전선 56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42척 / 피해 - 전선 42척 모두 격침, 3960명 사망


장림포해전

1592년 8월 29일 경상도 장림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전선 6척, 병력 30명 / 피해 -6척 모두 격침, 30명 도주


화준구미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 사하구 몰운대 인근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5척 / 피해 - 전멸


다대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8척 / 피해 - 전멸


서평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9척 / 피해 - 전멸


절영도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영도구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2척 / 피해 - 전멸


초량목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척 / 피해 - 전멸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166척, 판옥선 74척 / 피해 - 정운 등 6명 전사, 25명 부상
  왜  : 군사 - 전선 470척, 벙력 7만명 / 피해 -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 사상


웅포 해전

1593년 2월 10일 경남 진해시 웅천동

조선 : 군사 - 전선 89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40여 척 / 피해 - 100여 명 사망



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경상도 고성 당항포

조선 : 군사 - 연합함대 124척/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31척 / 피해 - 전멸


장문포 해전

1594년 11월 15일 거제 장목면 장목리

조선 : 군사 - 판옥선 50여척(거북선포함)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불명 / 피해 - 도주


어란포 해전

1597년 8월 27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8척 / 피해 - 도주


벽파진 해전

1597년 9월 7일 진도군 벽파진

조선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기록없음
  왜  : 군사 - 전선 13척 / 피해 - 도주


명량 대첩

1597년 9월 16일 명량 해협

조선 : 군사 - 판옥선 13척, 2400여 명 / 피해 - 2명 전사 및 3명 부상(총 사상자 불명)
  왜  : 군사 - 세키부네 133척, 아타케부네 200여 척, 그 외 500여 척, 27420여 명 / 피해 - 전선 31척 격침, 92척 전투력 상실,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미 미치후사 전사, 총 18466 사망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19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사면 신촌리 고라금해수욕장

조선 : 군사 - 판옥선 85척, 병력 1만 7000명, 명나라 사선 25척, 명 호선 77척, 명 병력 2만 6000명 / 피해 - 불명
  왜  : 군사 - 아타케부네 100여 척, 병력 1만 6600명 / 피해 - 아타케부네 50척 격침


장도해전 : 순천왜고성전투

1598년 9월 20일~10월 7일 순천 왜성

조선 : 군사 - 수군 1만 5000여 명 / 피해 - 조선 130명 사상, 명나라 전선 30여척 격침 및 파손, 명나라 수군 2000명 전사
  왜  : 군사 - 1만 4천여명/ 피해 - 전선 30척 격칙 및 파손, 11척 나포, 3천명 사상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어란포 앞바다

조선 : 군사 - 조선 전선 83척, 명 전선 63척 / 피해 - 이순신 장군 및 조선군 300명 사상, 명군 500여명 사상
  왜  : 군사 - 전선 500여 척 / 피해 - 전선 200여 척 격침, 150여 척 파손, 100여 척 연합수군에 나포



총 45전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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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이순신 장군 평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쫓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에서조차도 성웅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역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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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

 

왕실의 혼례인 '국혼'은 절차와 격식이 매우 엄격하고 복잡하다.


국혼에는 '가례'와 '길례'가 있는데 왕을 비롯하여 세자, 세손 등 왕통을 이어나갈 분들의 혼례를 가례라 하고, 그외 왕족이나 공주의 혼례를 길례라 한다. 이와 같은 궁중혼례는 그때 그때 절차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조선초부터 준칙으로 정해져 내려오는데 '세종실록예지' '국조오례의' '국혼정례' 등이 그것이다. 그 절차는 육례로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달에 걸쳐 수천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나라의 큰 잔치였다.


절차

 

① 납채(納采) : 간택된 왕비가 머물고 있는 별궁에 대궐에서 사신을 보내 청혼을 하는 의식
② 납징(納徵) :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정표로 대궐에서 사신을 시켜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의식
③ 고기(告期) : 대궐에서 길일을 택해 가례일로 정하여 이를 별궁에 알려주는 의식
④ 책비(冊妃)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과 왕비집에 사신을 보내 왕비로 책봉받는 의식
⑤ 친영(親迎) : 국왕이 별궁에 가서 왕비를 맞아들여 대궐로 돌아오는 의식
⑥ 동뢰(同牢) : 국왕이 왕비와 서로 절을 나눈 뒤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루는 의식

 

금혼령

 

국혼의 선행되는 간택에 있어서 먼저 금혼령을 내렸다.


금혼령은 국혼에 앞서 민간의 혼사부터 금하고 나서 처자봉단(處子捧單)을 걷어 들이기 위한 전제 절차로 그 기간에 혼인할 수 있는 범위와, 절대로 할 수 없는 범위를 밝히고, 국혼에 응할 자격이 있는 자녀를 가진 집을 대상으로 하여 자진신고를 강요하는 명령이다.


 

이와 같은 국혼의 거론은 대왕대비, 왕대비 등 궁중에서 가장 행렬이 높은 여성이 적령기에 들어선 왕 또는 세자 등의 배우자 선택을 발설하여 예조에서 금혼령 발포를 명령하는데, 순조 19년 4월 丁丑일에 명하신 것으로는 '9세에서 13세에 이르는 처자에게 혼인을 금할 것을 명하고 왕세자 가례를 위하여 간택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예조에서는 구체적인 허혼범위와 처자봉단을 받아들이는 기한을 정하여 한성부 및 팔도에 영포하며, 마감이 지나면 한성부 및 각 도에서 단자를 일일이 감봉(監封)하여 예조로 올려 보낸다.


 

허혼범위는 우선적으로 사대부 계급의 연령제한이 있고, 그밖에 異姓親의 촌부라든가, 이씨라든가의 금기 등이 있었다.

 

 

 

 

초간택

 

초간택에 참가하는 처자들의 복장은 송화색 저고리에 다홍치마, 저고리 위에 덧저고리를 입고 치마를 입는다.

 

이렇게 예복을 갖추고 입궁할 때에는 세를 내서라도 최소한 사인교를 타고 간다. 가마 앞, 뒤에는 몸종과 유모가 따르며 더 갖춰진 신분의 아가씨는 수모(미옹사)까지 딸린다. 없는 경우에는 유모가 대신한다.

 

대궐문에 당도하면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궁문턱을 넘어설 때 미리 준미해 놓은 솥뚜껑의 꼭지를 밟고 넘어가는 특이한 풍속이 있다. 입궁의 순서는 호주의 관직과 신분의 차에 의하여 고직과 신분이 높은 딸의 순서대로 입궁하게 된다.

 

심사방법은 30명 내외의 처자들을 한 줄로 세우고 왕을 포함한 왕족들은 발을 치고 보는데 이 경우 당사자인 신랑은 참여치 않는 것이 전례였었다. 간택의 심사가 끝나면 간단한 점심식사가 나오고 점심식사가 끝나면 처자들은 다시 먼저 들어왔던 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재간택 (두 번째 간택)

 

재간택은 초간택을 한 지 2주일 후 정도로 주로 하며 절차는 같으나 다만 인원수가 초간택에서 많이 줄어 5내지 7인이 입궁한다.

 

재간택에서 세 사람을 뽑는다 하더라도 대개 내정은 되지만 발표하지 않으며 벌써 보이도록 특별 대우를 한다. 임중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귀가할 때 육인교를 태우고 차지내궁 등 근 50명의 호송을 받고 내전에서 보내는 봉서까지 가진 글월 비자를 시켜 따르게 하였다.

 


삼간택

 

세 번째 간택은 주로 재간택을 한 지 15일 내지 20일 만에 행하여지는데 재간택에서 내정된 처자에 대하여 재삼 확인하는 것이다.

 

삼간택에서는 왕이 이름을 지적하여 영의정을 통하여 공시한다.

삼간택에서는 최후로 뽑힌 처자는 그 자리에서 벌써 왕비 또는 빈궁대우를 받아 다른 후보자들의 큰절을 받으며 왕, 왕비, 왕대비를 뵈옵고 나서 사가가 아닌 별궁으로 큰 상궁이 모시고 가게 된다.별궁으로 나갈 때는 대궐에서 준비한 원삼에 족두리를 쓴 대례복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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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 숙종 즉위년, 甲寅)  
  · 1월
: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승하
  · 7월 : 대왕대비(장렬왕후)의 인선왕후에 대한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함
  · 8월 : 현종 승하(해시(밤9-11)
  허적을 원상으로 삼음
  왕세자(숙종) 즉위(인정문에서)
  송시열을 서울로 들어오도록 함 - 오지 않음
  · 9월 : (영부사) 송시열에게 능지(묘비문)를 지어 올리도록 명함
  송시열이 사양하는 상소 올림
  정치화를 영부사로 삼고 송시열은 판중추부사(판부사)로 내림
  유생 곽세건이 송시열에게 내린 명이 부당하니 거두어 달라는 상소 올림
  (송시열은 선왕의 적통을 문제 삼은 이다)
  · 10월 : 송시열이 지문 짓기를 사양하자 김석주에게 짓도록 함
  (송시열에 관한 견제가 구체화)
  · 11월 : 이단하가 지어올린 대행왕의 행장을 고쳐 쓰게 함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라고 썼던 대목이 오인례였음을 명시하라)
  · 12월 : 기해년 의례(儀禮)를 정한 신하들을 추죄함.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을 삭탈함
     
  1675년(숙종 1, 己卯)  
  · 1월
: 송시열을 덕원(德源)에 유배.
  · 3월 : 복창군·복평군을 궁녀 간통죄로 유배
  · 4월 : 윤5월 송시열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함
  · 8월 : 윤휴의 건의로 복제를 3년으로 함.
  · 9월 :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올림.
  * 김우명(金佑明, 1619-1675) 죽음.
     
  1676년(숙종 2, 丙辰)
 
  · 2월
: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사액함.
  · 4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8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677년(숙종 3, 丁巳)
 
  · 3월
: 호패법 시행.
  · 9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11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2월 : 호포법(戶布法)의 시행을 논의함.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1678년(숙종 4, 戊午)
 
  · 1월
: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킴.
  · 3월 : 청의 사신이 조선의 문적(文籍)을 얻어감.
  · 4월 : 공명첩(空名帖)을 폐지.
  · 6월 : 관서, 호남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에게 주전(鑄錢)을 시킴.
  · 9월 : 각사노비(各司奴婢) 면천(免賤)의 한계를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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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9년(숙종 5, 己未)  
  · 6월
: 허목(許穆)이 허적(許積)을 논핵함.
  남인이 청남(淸南) 탁남(濁 南)의 나뉨.

 

1680년(숙종 6, 庚申)  
  · 1월
: 외방의 주전(鑄錢)을 금지.
  · 4월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남인축출 서인집권. 윤휴 허적 등 남인 (南人)을 유배 보냄.
  서인(西人)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됨.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의 추대를 도모하다 처형됨.
  · 5월 : 허적(許積, 1610-1680), 윤휴(尹휴, 1617-1680)를 사사(賜死)함.
  송시열을 석방함.
  윤8월 오정창(吳挺昌) 정원로(鄭元老) 등을 처형.
  · 10월 : 장옥정이 궁녀로 입궐
  송시열을 등용.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죽음.

  1681년(숙종 7, 辛酉)  
  · 1월
: 새중전의 간택에 관해 논의
  · 2월 : 인경왕후 발인
  · 3월 : 병판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다.
  민유중을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으로 삼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주전(鑄錢).
  · 4월 : 어의동의 별궁에서 납채례를 거행하다.
  납채례 : 대궐에서 간택된 왕비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식
  · 5월 : 장옥정이 대궐에서 쫓겨나감

  1682년(숙종 8, 壬戌)  
  · 1월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
  · 5월 :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함.
  · 10월 : 허새(許璽)등을 처형.
  · 11월 : 전라감영에서 주전(鑄錢)함.
  * 허목(許穆, 1595-1682) 죽음.

  1683년(숙종 9, 癸亥)  
  · 3월
: 송시열 치사(致仕)함.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완성.
  장희재가 인조반정 회갑 축하연에서 숙정을 데리고 달아남.
  · 4월 : 폐지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결정함.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
  · 7월 : 영남의 대동법을 개정함.
  · 12월 :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죽음.

  1684년(숙종 10, 甲子)  
  · 3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올림.
  무산부(茂山府)를 새로 설치함.
  · 10월 : 중용언해(中庸諺解) 완성.
  * 김석주(金錫胄, 1634-1684) 죽음.

 

1685년(숙종 11, 乙丑)  
  · 1월
: 호패의 지패(紙牌)를 목(木), 각(角)으로 바꾸게함.
  경성부의 사부(士夫)에게도 방역(坊役)을 부과함.
  종각(鐘閣)이 불에 탐.
  · 9월 : 호패 위조자를 사형에 처하기로 함.
  · 11월 : 삼금(蔘禁)범죄의 식(式)을 정함.

  1686년(숙종 12, 丙寅)  
  · 1월
: 안주(安州)에서 주전(鑄錢)하고 차자(車子)를 제조.
  · 7월 : 진도에서 표류한중국인 80여명을 송환.
  · 12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 설치의 다섯가지 이득을 말함.
  ▷ 이징명(李徵明), 상소하여 여총(女寵)을 논함.

  1687년(숙종 13, 丁卯)  
  · 5월
: 명안공주 죽음
  · 6월 : 동평군 이항을 혜민서제조로 봉함.
  · 7월 : 최석정(崔錫鼎)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개수함.
  · 8월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열조수교(列朝受敎)를 간행.
  · 9월 : 군문(軍門)에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연습시킴.
  · 12월 : 숙종이 탕평책(蕩平策)을 유시(諭示)함.
  ▷ 만수전(萬壽殿) 불탐.
  * 김만기(金萬基, 1633-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홍우원(洪宇遠, 1605-1687) 죽음.

  1688년(숙종 14, 戊辰)  
  · 2월
: 숙종이 남한산성에 행차.
  · 3월 : 평안도에 1년을 한도로 주전(鑄錢)케함.
  · 7월 : 소론 박세채(朴世采)을 내?i고 남구만 여성제(呂聖齊)를 유배함. 11월에 석방.
  · 8월 : 인조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죽음.
  · 10월 :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왕자(경종)을 출산함.
  · 11월 : 소의 장씨의 어머니가 옥교를 타고 들어오다 욕을 당한 일로 상소가 올라옴

  1689년(숙종 15, 己巳)  
  · 1월
: 왕자를 원자로 정함.
  소의 장씨를 희빈에 봉함
  · 2월 :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 실각, 남인 집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주도에 유배 안치(安置), 6월에 사사(賜死)함.
  · 3월 : 홍치상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절도에 위리안치함.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삭탈함. 윤3월 사사(賜死).
  김익훈(金益勳) 장(杖)을 맞고 죽음.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
  · 4월 : 귀인 김씨를 폐위해 사가로 돌려보냄.
  홍치상을 교형에 처함
  · 5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함.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해 비로 삼음
  장형을 옥산부원군, 부인 고씨를 영주부부인, 계실 윤씨를 파산부부인으로 봉작함.
  * 김만중(金萬重)이 구운몽(九雲夢) 등을 지음.
  * 이단하(李端夏, 1625-1689) 죽음.

1690년(숙종 16, 庚午)  
  · 6월
: 원자(元子)를 세자(경종)로 책봉.
  · 9월 :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음. 열흘 뒤 죽음.
  · 10월 :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
  · 11월 : 진제(賑濟)를 위해 공명첩(空名帖) 2만장을 판매함.
  호적법을 밝히고 지패(紙牌)를 목패(木牌)로 바꿈.
  *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죽음.

  1691년(숙종 17, 辛未)  
  · 7월
: 세자를 위해 ‘한석봉천자문’을 편찬함
  · 10월 : 주전(鑄錢).
  · 12월 :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림.
  삼남, 서북의 인재를 고루 등용함.
  북한산성의 축성을 결정함.

  1692년(숙종 18, 壬申)  
  · 3월
: 장희재를 총융사로 삼음
  · 8월 : 숙종이 창덕궁으로 돌아옴.
  총융청(摠戎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 10월 : 동(銅)을 북경에서 구입함.
  · 12월 : 8도감사에게 인명(人命) 남살(濫殺)의 폐를 엄금함.
  *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죽음.

  1693년(숙종 19, 癸酉)  
  · 4월
: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봉함
  · 7월 : 주전(鑄錢)을 호조(戶曹)에 전담시키고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함.
  · 10월 : 소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
  · 12월 : 소의 최씨가 낳은 왕자가 죽음.
  조사석(趙師錫, 1632-1693) 유배지에서 죽음.
  겨울에 대마도주가 본국인의 울릉도 어업의 금지를 요청함.

  1694년(숙종 20, 甲戌)  
  · 3월
: 왕세자가 서연을 시작함.
  갑술옥사(甲戌獄事). 남인 실각, 서인 집권.
  · 4월 : 소론 남구만(南九萬)이 영의정이 됨. 소론 등용.
  폐비 민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장씨를 폐위.
  · 5월 :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다시 종사.
  · 6월 : 숙원 최씨를 숙의로 삼음.
  · 8월 : 왜에게 왜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함.
  · 9월 :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연잉군)
  어영청(御營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1695년(숙종 21, 乙亥)  
  · 4월
: 경기 충청지방에 도적이 횡행함.
  · 6월 :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지함.
  · 10월 : 상평청(常平廳)의 주전(鑄錢)을 1년 기한으로 허가함.
  · 12월 : 버린 아이(遺棄兒) 수양(收養)의 법을 제정함.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죽음.

  1696년(숙종 22, 丙子)  
  · 1월
: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바로 고침.
  · 2월 :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사율(死律)로 처벌함.
  · 4월 : 세자빈을 심호의 딸로 간택함. 세자가 관례를 치름.
  옥산부원군의 비석 파괴 사건으로 업동 등이 잡혀옴
  · 5월 : 세자가 가례를 올림
  · 9월 :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도항한 동래인 안용복(安龍福)을 추문(推問)함.

  1697년(숙종 23, 丁丑)  
  · 2월
: 대마도주가 막부(幕府) 명으로 왜인 울릉도 왕래 금지 통지.
  도성안에 있는 거지들을 각 섬에 보냄.
  · 4월 : 기아민의 구제를 위해 송첩(松帖)을 내줌.
  · 8월 : 중인(中人) 서얼(庶孼)의 통사자(通仕者)는 찰방(察訪)을 거친 후 수령으로 서용함을 허락함.
  · 10월 : 전국에 대기근.

  1698년(숙종 24, 戊寅)  
  · 1월
: 청에서 개시(開市)를 허락하고 속미(粟米) 4만석을 보내옴.
  숙종이 탕평(蕩平)할 것을 내림.
  · 8월 : 궁인 유씨를 숙원에 봉함.
  · 10월 : 사간원에서 지방의 생사(生祠)의 폐단을 규탄함.
  · 11월 : 노산군(魯山君)을 복위.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함.
  상궁 박씨를 숙원에 봉함

  1699년(숙종 25, 己卯)  
  · 6월
: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국조보감속편(國朝寶鑑續編)을 편찬.
  · 7월 : 영월의 단종릉 장릉(莊陵)의 개수도감(改修都監)을 설치함.
  · 9월 : 남형(濫刑)을 엄금함.
  · 10월 : 숙의 최씨를 숙빈에 봉함.
  전염병이 유행하여 25만명이 사망함.
  * 권대운(權大運, 1612-1699) 죽음.

1700년(숙종 26, 庚辰)  
  · 3월
: 유생(儒生) 사제(賜第)의 범위를 정함.
  최석정(崔錫鼎)에게 속록(續錄),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수를 전담시킴.
  · 8월 : 선원보략(璿源譜略) 완성됨.

  1701년(숙종 27, 辛巳)  
  · 1월
: 문묘에 계성사(啓聖祠)를 세움.
  · 4월 : 청나라 사람이 압록강을 측량함.
  · 8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죽음.
  · 9월 : 대행왕비를 무고(巫蠱)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 명함.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림.
  · 10월 : 동평군(東平君) 항(杭)을 사사함.
: 빈(嬪)을 후비(后妃)에 올리지 못하게 명함.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사사(賜死)함.
  장희재를 처형함.
  ▷ 무고(巫蠱)의 옥(獄) 일어남.

  1702년(숙종 28, 壬午)  
  · 1월
: 세자가 장씨의 상(喪)에 감.
  희빈 장씨를 양주 인장리에 장사지냄
  · 5월 : 이준명(李浚明) 등이 울릉도 도형(圖形) 및 토산물을 바침.
  · 10월 : 김주신(金柱臣)의 딸을 왕비로 책봉. 인원왕후(仁元王后).
  귀인 김씨를 영빈, 귀인 박씨를 명빈, 숙의 유씨를 소의에 봉함
  · 11월 : 남구만, 유상운(柳尙運)을 유배지에서 석방함.

  1703년(숙종 29, 癸未)  
  · 1월
: 금위영을 폐지했다가 2월에 다시 부활시킴.
  · 7월 : 명빈 박씨가 훙서함.
  · 9월 : 명빈 소생의 왕자 이 헌을 연령군에 봉함.
  청나라에 황당선(荒唐船) 금지에 대해 통지함.
  * 이시백(李時白, 1635-1703),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죽음.

  1704년(숙종 30, 甲申)  
  · 2월
: 연잉군이 혼례를 올림.
  · 3월 : 도성 수축을 시작함.
  · 6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지.
  · 8월 : 해서대동시행절목(海西大同施行節目)을 정하게 함.
  · 11월 :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고침.
  · 12월 : 대보단(大報壇)이 완공.

1705년(숙종 31, 乙酉)  
  · 3월
: 숙종이 대보단에서 명의 신종(神宗)을 제사함.
  · 10월 : 숙종이 선위(禪位)를 명함.
  · 11월 : 세자가 선위의 명을 거두시기를 세 번째 상소하니 허락함.

  1706년(숙종 32, 丙戌)  
  · 2월
: 최석정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요청함
  · 5월 : 유생 임부(林溥)등이 동궁모해 혐의로 김춘택을 탄핵하는 상소
  · 6월 : 동궁(東宮) 모해설로 임부(林溥)를 국문함.
  · 8월 : 최석정이 전록통고(典錄通考)를 편찬하여 올림.
  · 10월 : 청에서 칠정력(七政曆)을 수입함.

  1707년(숙종 33, 丁亥)  
  · 1월
: 임보(林溥)가 장을 맞고 죽음.
  · 2월 : 이순신 사우(祠宇)에 현충(顯忠)이라 사액함.
  연령군이 가례를 올림
  · 4월 : 형장(刑杖)을 일체 금지함.
  · 11월 : 숙종이 당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신완(申琓, 1646-1707) 죽음.

  1708년(숙종 34, 戊子)  
  · 2월
: 숙종이 당론을 경계함.
  · 4월 :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佛狼機)를 만들게 함.
  · 10월 : 황해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 12월 : 서운관(書雲觀)에서 건상도(乾象圖)와 곤여도(坤輿圖) 올림.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죽음.

  1709년(숙종 35, 己丑)  
  · 1월
: 숙종이 노론 소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5월 : 서인(庶人) 상례(喪禮)의 제한을 엄격히 정함.
  김창집(金昌集)이 오륜전비언해(五倫全備諺解)를 완성.
  · 8월 : 강화도에 축성(築城)을 명함.

1710년(숙종 36, 庚寅)  
  · 3월 : 최석정(崔錫鼎)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가 올린 예기류편(禮記類篇)을 소각함.
  노론이 진출함.
  · 7월 : 왜관의 공작미(公作米)를 5년으로 연장해줌.
  · 10월 : 안정기(安鼎基)가 만든 차자(車子)를 제조함.

  1711년(숙종 37, 辛卯)  
  · 3월 :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을 시작하여 10월에 마침.
  · 5월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12월 : 왜인의 구은(舊銀, 八星銀) 사용 요청을 허락함.
  비변사에서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올림.
  * 남구만 죽음

  1712년(숙종 38, 壬辰)  
  · 4월
: 청의 목극등(穆克登) 일행이 후주(厚州)에 이름.
  · 5월 : 총융청에서 북한산성 중성(重城)을 축조함.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1713년(숙종 39, 癸巳)  
  · 7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단함.
  · 10월 : 북도 친기위(北道 親騎衛)를 설치함.
  · 11월 : 이이명(李이命)이 오례의(五禮儀)의 개정을 논함.

  1714년(숙종 40, 甲午)  
  · 1월
: 팔도에 지진(地震).
  · 2월 : 숭례문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남.
  · 7월 : 강원도의 군보단속절목(軍保團束節目)을 강구함.
  * 윤증(尹拯, 1629-1714) 죽음.

1715년(숙종 41, 乙未)  
  · 2월
: 동으로 도량형기를 주조하여 팔도에 반사함.
  · 4월 :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역서(曆書), 측산기계(測算機械), 자명종 (自鳴鐘) 등을 구해옴.
  · 12월 : 윤선거(尹宣擧)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跋文)으로 노소간의 분쟁이 격화됨.
  * 최석정(崔錫鼎, 1646-1715),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죽음.

  1716년(숙종 42, 丙申)  
  · 8월
: 윤선거(尹宣擧) 문집의 훼판(毁板)을 명함. 병신처분(丙申處分).
  · 10월 : 윤선거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 12월 : 윤증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1717년(숙종 43, 丁酉)  
  · 5월
: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함.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追奪)함.
  · 7월 : 왕이 이이명과 독대함.
  왕세자가 섭정을 함.

  1718년(숙종 44, 戊戌)  
  · 2월
: 세자빈 심씨가 훙서함.
  인장리의 장씨 묘를 천장하게 함.
  · 4월 : 소현세자빈 강씨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킴.
  · 9월 : 세자빈으로 어씨(魚氏) 책립.
  · 10월 : 마천령(磨天嶺)을 엄격히 막음.

  1719년(숙종 45, 己亥)  
  · 2월
: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이 들어감.
  · 7월 : 경상 전라 충청도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
  · 10월 : 연령군 죽음.

  1720년(숙종 46 / 경종 즉위년, 庚子)  
  · 6월
: 숙종 승하, 왕세자(경종) 즉위.
  · 10월 : 삼남의 양전을 끝냄.
  · 11월 : 청의 사신이 옴.
  조태구(趙泰耉)가 김창집(金昌集)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림.
  * 최창대(崔昌大, 1669-1720), 민진후(閔鎭厚, 1659-17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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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와 이훤 임금(김수현 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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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밝히던 조선 왕들의 '굴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일곱 번째 이야기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임금(김수현 분)은 죽은 세자빈을 닮은 연우(한가인 분)를 무척이나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훤의 소망은 수많은 장애물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칫 연우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연우가 무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우가 무녀가 아닌 궁녀라 해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왕대비와 중전과 외척세력이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훤의 처지는 옛날 왕들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모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관심 있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란 관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관념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의 '베드신'은 오직 후계자 생산을 위해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베드신'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든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신하들의 '막가는' 발언들이... 

 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 사진은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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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가야(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년 24일)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 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제2장에 따르면, '검찰과 긴장관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란 취지의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라고 답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을 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 곁에는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희빈 홍씨)을 특별히 가까이 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3월 12일(1518년 4월 21일)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 12월 14일(1687년 1월 27일)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덕궁 선정전. 왕의 편전(집무실)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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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이하 생략. 전체 기사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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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회] 숙원 최씨를 제거하기 위한 방도를 찾는 희빈과..




환란의 씨앗를 없애기 위해서는 숙원을 죽이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중전 장씨는

희재를 불러 숙원 최씨를 없애라고 명한다.

숙종의 발걸음은 자주 숙원전을 향하고 이 자리에서 숙원은 매번 폐비
복위를 입에 담는다.

숙종은 이러한 숙원의 마음이 한없이 갸륵하지만 폐비 복위에 대해서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한편 서인들의 폐비 복위 움직임은 수면위로 떠오르고 이들의 뒤를
캐고자 민장도는 자신이 심어놓은 첩자를 이용한다.

그리고 중전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희재는 숙원 최씨를 제거하기 위한 방도를 찾기에

골몰하다 숙원 최씨의 형부인 김해성을 협박반 회유반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마침내 서인들의 거사일이 정해졌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장희재는

그 거사일에 맞춰 숙원 최씨를 독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62회]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일!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일!

민장도등이 이미 그 정보를 입수하고 준비를 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한중혁, 이시회등은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거사를 시행하기도 전에 금군들에게 모조리 포박당하고...
한편, 이 거사일에 맞춰 숙원 최씨를 독살한다는 계획을 세운 장희재는

김해성을 이용해 독이 든 약재를 궐내로 반입하고자 한다.

자근아기로부터 김해성이 자주 숙원의 사가에 들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춘택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장희재에게 포섭당한 김해성은 장희재에게서 받은,

독이 든 약재를 들고 숙원의 사가로 간다.

이 약을 먹으면 숙원이 왕자를 잉태한다는 감언이설을 들은 숙원의
아버지는 숙원전의 궁녀를 통해 그 약재를 궐내로 들여보낸다.

장희재 일패의 숙원 독살 기도를 직감한 김춘택은 뒤늦게 그 궁녀를
뒤따라 가는데...

 

 

 

 

 

[63회] 장희재의 숙원 독살 음모에 대해..




독이 든 탕재가 들어갔는데도 숙원이 죽었다는 소식이 없자

중전 장씨는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숙원을 문후들라 명한다.

너무나도 멀쩡하고 태연한 숙원의 모습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지경이고

뒤늦게 온 장희재에게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며 호통을 친다.

이번 일에 숙종이 관여하면 곤란해지므로 마음이 급해진 장희재와
민장도는 잡혀온 서인무리들에게 더욱 심한 고문을 가하지만 김춘택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폐비 복위의 정당성만을 강변한다.

바로 김인의 상소문이 올라올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택의 부탁을 받은 김인은 선뜻 붓을 들지 못하고...

서인들에 대한 고문이 날로 혹독해진다는 소식을 들은 폐비민씨는

다 자신 때문에 무고한 자들이 고통받는다는 자괴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고

남인들의 이러한 정권유지 야욕에 회의를 느낀 동평군은
민암을 찾아와 당장 국청을 중지하라 요구한다.

그러나 장희재 입장에서는 숙원이 독약을 마시고 죽을 때가지는 국문을
중지할 수 없고...

숙종 역시 남인들의 정권 유지 야욕에 신물이 나 있던 터라 이번일에
자신이 직접나설까말까를 고민한다.

그러던 중 드디어 장희재의 숙원독살음모에 대해 김인등이 쓴 상소문이
숙종에게 전달되고 숙종은 당장 김인을 입궐시키라 명하는데...





[64회] 갑술환국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직접 숙원전에 들러 자신의 눈으로 독약을 확인한 숙종은

당장 장희재를 잡아들이라 명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입궐하던 장희재는 금군들에 의해 잡혀 투옥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대신들이 서로에게 탓을 하며 다투고 있는 사이
숙종이 내린 비망기가 도착한다.

앞으로 환국의 전개가 예고된 이 비망기는 남인들에 대한 숙종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남인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한편 오라버니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던 중전 장씨는
세자를 앞세워 숙종에게 나아가려 하지만 이미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드디어 남인들이 모조리 원지유배 또는 처형되고 대신에 남구만 등의
서인세력들로 의정부를 개편하는 등 숙종의 갑술환국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최상앙을 폐비의 사가로 보내 폐비의 동태를 살피라 명한다.

폐비를 만나고 온 최상앙이 민씨가 폐가나 다름없는 곳에서 환후중에
있다는 말을 전하자 숙종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찢어질 것만 같다.

이 소식을 들은 숙원 최씨는 곧 복위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기뻐하지만, 숙종은 세자의 모후인 중전 장씨가 있으므로 폐비 민씨의
복위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데...






[65회] 숙종은 공식적으로 폐비 복위를 거론하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김춘택은 풀려나고 그를 만난 폐비 민씨는 고마움에 눈물을 흘린다.

독살음모의 주모자인 장희재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고 장희재는 물증을 대라며

혐의를 완강히 거부하지만 김해성과의 대질심문에서 모든 것이 밝혀지는데...

드디어 숙종은 조정대신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폐비 복위를 거론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친다.

그 결과로 한때 영화를 누리던 남인대신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사사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중전 장씨는 발끈하며 세자를
데리고 대전으로 가려하나 이미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할 수가
없어 더욱 독이 오르고...

마침내 폐비의 복위 소식을 가지고 폐비의 사가로 향하는 최상앙.

그러나 이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폐비 민씨는 자신의 병이 너무나
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복위가 왕실이나 조정에 이로울 것이 없다며
어명을 받들 수가 없다고 하는데...





[66회]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복위의 어명을 받들 수가 없다는 폐비의 소식을 들은 숙종은 더욱더 가책을 느끼고

더욱 간곡한 자신의 소망을 담아 다시 한번 청하라 명한다.

옥에 갇힌 장희재의 광분은 날로 더해가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민장도는 거의 옥사할 위기에 처한다.

점점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중전 장씨!

세자를 방패삼아 폐비의 복위만이라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고...

한편, 계속해서 복위의 어명을 거절하던 폐비 민씨는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숙종의 비망기를 받아들고는 복위의 결단을 내린다.

마침내 숙종20년(1694년) 4월 12일, 폐비 민씨가 6년 간의 고초를 끝으로 재입궁을 하던 날,

온 도성은 중전마마를 외치는 백성들의 감격으로 가득 찬다.

숙종 역시 몸소 마중을 나오고,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숙종의 말에
인현왕후는 그만 눈물을 흘린다.

반면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그 거처도 취선당으로 쫓겨가게 되는데...

 

 

 

 


[67회] 불태워지는 중전 장씨의 옥책과 교지!

 




불태워지는 중전 장씨의 옥책과 교지!

중전 장씨의 6년 간의 영화는 이렇게 사라지고 눈물바다를 이룬 가운데
취선당으로 쫓겨간다.

뿐만 아니라 문초를 받던 민장도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고 장희재 역시
간신히 사사는 모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반면 숙종은 재입궐한 인현왕후의 중전 책비례를 성대히 치를 것을 명하고...

그런데 새중전을 맞이하기 위해 중궁전을 수리하던 중,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언문편지 한 장이 발견된다.

바로 숙의 최씨의 독살을 모의하기 위해 장희재가 옥정에게 보냈던 그
편지가 발견되어 서인대신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희재뿐만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화를 불러올 편지인지라
희빈 장씨는 그 편지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 제 67회 용어풀이 ]

삼사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헌부,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





[68회] 재집권한 서인정권은 또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재집권한 서인정권은 또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져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다툼이 시작된다.

특히 김춘택의 방면에 비해 귀양간 한중혁의 일을 빌미로 분열은 가속화된다.

결국 김춘택과 한중혁은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재조사를 받게되고
우의정 윤지완의 주장으로 장희재의 숙의최씨 독살 음모 역시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대신들의 이런한 주장에 혹여 세자가 해를 입지 않을까 숙종은
심사숙고에 들어가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다.

중요한 단서가 되는 언문편지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고
희빈 장씨는 위기감에 몸을 떤다.

고심하던 희빈 장씨는 세자를 앞세워 중전을 찾아가 읍소를 하며
장희재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무리한 희빈의 요구에 중전이 대답이 없자 희빈 장씨는 세자를
음해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69회]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남구만에게 편지를 받아온 희빈 장씨는 이를 불태우며 훗날을 도모할 것을 결심한다.

한편 김춘택, 한중혁등에 대한 재심문이 진행되지만 새로이 밝혀진 것이 없어

김춘택은 다시 방면되고 영의정 남구만은 처음에 이 일을 거론했던 한구를 유배시켜 버린다.

또한 세자의 외숙을 죄줄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려 장희재를 다시
제주도로 돌려보내자 희빈 장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그러나 이 일을 빌미삼아 젊은 유생들 사이에는 남구만을 탄핵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일고

남구만은 숙종에게 사직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숙종은 윤허하지 않고...

그러던 중 양주에 있는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은 숙종에게 달려가 이는 세자를 음해하고자 하는
무리들의 소행이므로 반드시 색출하여 처단해야한다고 청한다.






[70회] 숙의에게 산기가 있다는 급한 전갈이 당도하는데...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진 사건의 파문은 점점 더 커져가고

민진후등은 희빈의 패거리가 스스로 꾸민 일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던중 산소 주위에서 발견된 호패를 단서 삼아 이조판서 최석정은
마침내 범인을 색출하기에 이른다.

범인은 다름 아닌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속이었다.

의금부 병사들은 당장 그를 잡아들이는데, 이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희재의 수하들이었다.

잡혀온 범인에 대한 숙종의 친국이 시작되자 병조판서 신여철은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을 죽여달라며 대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한다.

희빈 장씨는 더욱 기세가 올라 숙종에게 빨리 배후를 밝혀달라 조르고...

그런데 범인과 목격자의 대질심문을 하려는 중 그만 범인이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사건은 다시 미궁 속에 빠지고 화가 난 희빈은 다시 대전으로 든다.

희빈은 숙종에게 그 범인은 바로 세자를 음해 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므로 하루빨리 그 무리들은 색출해달라고 재촉한다.

난감한 숙종이 희빈을 외면하고 있을 때 바로 숙의에게 산기가 있다는
급한 전갈이 당도하는데...


 

 

 

[71회] 숙종은 세자의 보위를 약속하며 세자빈을 들이라...




숙의의 산기소식에 대궐의 모든 이목이 숙의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

숙정은 막례라는 무당을 찾아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드디어 숙의가 왕자를 생산하자 숙종과 인현왕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지만 희빈은 그 핏덩이를 살려둘 수 없다며 더욱 독이 오르는데...

한편, 피의자의 죽음으로 난감해진 최석정은 파묘사건의 목격자인
농부를 데리고 도성거리로 나가 범인 색출을 시도하고 마침내 업동이
걸려들기에 이른다.

이 와중에 업동이 장희재의 가솔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배후에 희빈이
있다는 생각에 주저하는 최석정에게 숙종은 배후가 누구든 간에
철저하게 사건을 조사하라 명하고...

이 소식을 들은 희빈은 놀라 쓰러지고 윤씨와 숙정은 혹여 업동이
진실을 발설할까 불안에 떨며 업동이를 처치할 궁리까지 한다.

하지만 세자에게 피해가 갈 까 걱정되는 남구만의 주청으로 다행히
업동은 풀려나게 되고 희빈은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희빈을 찾아온 숙종. 이 자리에서 숙종은 세자의 보위를
약속하며 하루 빨리 세자빈을 들이라 명하는데...

 





[72회] 왕자를 생산한 숙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희빈...




자신이 살아있는 한 세자의 서열에는 변함이 없으며

세자빈 간택에도 적극적인 인현왕후의 행동에 희빈은 눈물을 쏟으며 감격한다.

하지만 왕자를 생산한 숙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는 못하고...

한편 젊은 간관들의 반발로 지난번 방면되었던 업동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고 더욱 모진 고문을 당하던 업동은 결국 입을 열게 된다.

업동의 입에서 희빈에 관련된 말이 나올 줄 기대했으나 업동은 전혀 엉뚱한

이홍발을 거론하자 서인들은 모두 황당해한다. 어쨌든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한숨을 돌린 숙정은 다시 막례를 찾아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희빈의
복위를 도모하고자 일을 꾸미기 시작하고 희빈 역시 근래 자주
인현왕후가 혼절한다는 소식에 득의의 미소를 짓는데...


[ 제 72회 용어풀이 ]

탕탕평평 :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공평하게 정치를 하겠다는 말





[73회] 직접 인현왕후의 병간호를 하는 숙종...




중전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숙종은 직접
병간호를 하는 등 인현의 완쾌를 위해 정성을 쏟는다.

한편 희빈은 세자빈의 간택단자 들어오는 것이 신통치 않자 직접 나서
동평군에게 하루빨리 서두르라 명하지만 사대부들이 의도적으로 희빈을
멀리하는 이유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숙종과 인현이 직접 나서 간택단자의 일을 챙기고...

귀양을 가있는 희재는 숙정과 희빈에게 훗날을 도모하는 내용의 편지를
올리고 이를 눈치챈 김춘택은 희재의 수하들에게 미행을 붙인다.

편지를 받아든 희빈은 다시 한번 결기를 다지고 세자의 가례를 기회로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할 것을 결심하는데...





[74회] 세자빈의 간택을 놓고 심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인현과 희빈

 




세자빈의 간택을 놓고 심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인현과 희빈.

희빈은 인현이 간택한 심호의 딸이 마음에 들지 않자 인현 앞에서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심호의 딸이 최종 간택되어 가례가 치러지고

희빈은 첫대면에서 자신의 지원극통함을 한시라도 잊지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한편 장희재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 김춘택은 윤씨가
숨어들었다는 막례집을 알아내 몰래 염탐하기 시작하지만 그의 수하들이
장희재의 수하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음모가 중전이나 숙의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판단한 김춘택의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가례를 올린 세자와 세자빈은 희빈보다는 오히려 인현왕후에게서

더 큰 자애로움을 느끼고 가깝게 지낸다.

이 사실을 안 희빈은 매우 못마땅해하고 당장 세자를 불러오라 호통치는데...





[75회]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신당을 차릴 것을 명하는데..

 





희빈장씨가 숙종에게 지금 세자의 외조모가 사람들에게 쫓겨 숨어산다고 말하자

숙종은 당장 그들을 옛집으로 옮기게 하고 금군들이 직접 지켜주도록 명한다.

감읍하는 희빈 장씨.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김춘택등 노론들은 발끈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일을 빨리 진행시키고자 희빈은 막례의 입궐을
명하고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숙의 최씨는 인현왕후에게 이를
고하지만 인현왕후는 투기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다.

입궐에 성공한 막례는 희빈에게 중전의 자리에 다시 오르기 위해서는
궐안에 신당을 짓고 비방을 해야 한다고 고하자 희빈장씨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막례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 김춘택과 숙의최씨는 방도를 강구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고 마침내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신당을 차릴 것을 명하는데...





[76회] 희빈은 결국 신당 차리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권상궁등의 반대에 부딪힌 희빈은 결국 신당 차리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지만

언제고 기회만 되면 다시 부르겠노니 그동안 필요한 신구들을 준비하라 막례에게 명한다.

그러던 중 유배된 업동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희빈은 옛일이
탄로날까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다.

윤씨를 만나기 위해 막례집에 들린 업동은 막례와 함께 금군에 잡히게
되고 희빈 쪽은 업동이 모든 것을 발설할까 업동을 살해하고자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또 다시 남구만의 진언으로 업동은 방면되어 희빈은 한 숨을
돌리게 되지만 김춘택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기만하다.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희빈의 위세!

희빈은 조그마한 일을 트집잡아 숙의의 궁인을 문초하는 일이 벌어지고
찾아온 숙의에게도 종아리를 걷으라 명하는데..



 


[77회] 희빈이 숙의를 매질한다는 소릴 들은 인현왕후는..




희빈이 숙의를 매질한다는 소릴 들은 인현왕후는 급히 취선당으로 와

매질을 말리려 하지만 오히려 희빈에게서 모욕스런 말을 듣는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

참다못한 인현왕후는 희빈의 뺨을 때리게 되고 희빈장씨는 통렬하게 울부짖는다.

그러던 중 숙종이 몹시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돌고 인현왕후는 최상앙을
불러 숙종의 환후를 확인한다.

아니라며 부인하는 숙종 앞에서 인현왕후는 옥체를 보전해야한다며
눈물로 간청을 하여 마침내 숙종의 몸에 뜸을 뜨는 등 치료를 위해
정성을 다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현왕후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며 눈물을 흘리고...

이 소식을 들은 숙안공주는 대궐로 달려와 숙종의 환후는 심한 격무
탓이므로 격무를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집으로 피접올 것을 주청하고
거절하던 숙종도 인현왕후의 청을 들어 피접을 결정한다.

하루라도 빨리 인현왕후의 국상을 바라던 희빈 장씨에게 숙종의 피접은
엄청난 기회가 되고 마침내 이 혼란을 틈타 막례의 재입궐을 추진, 신당
차리는 일을 서두르게 되는데...

 


[ 제 77회 용어풀이 ]

경연청 참찬관 :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에 참예하는 관원

피접 : 장소를 옮겨서 병을 치료하는 일




[78회] 재입궐한 막례는 비밀리에 신당 차리는 일을..




재입궐한 막례는 비밀리에 신당 차리는 일을 서두르고

이를 바라보는 희빈 장씨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린다.

한편 지난번 일을 사과하러 취선당에 들린 인현왕후는 다시 한번
희빈에게 모욕을 당하고 혼절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막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김춘택은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되어져간다는 것을 직감하고 숙의최씨를 사가로 불러내 취선당의 동태를
잘 살피라 경고한다.

하지만 숙의최씨가 궐밖에 나간 사이 희빈의 신당은 완성되고 마침내
저주의 의식이 시작된다.

첫 번째 화살은 숙의의 소생인 연잉군!

신기하게도 실제로 연잉군은 이유없이 심한 고열에 쓰러지고 숙의 최씨
대신에 왕자를 돌보던 인현왕후는 당황해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희빈과
막례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갖은 처방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신열은 높아만 가자 인현왕후는 숙의의
사가로 급히 연통을 띄우고, 숙의 최씨는 허둥지둥 서둘러 입궐하는데...


 



[79회] 희빈은 중전복위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왕자의 신열 소식에 대궐은 발칵 뒤집히고
숙의와 숙종은 급히 입궐한다.

반면, 막례의 영험함을 더욱 신임하는 희빈장씨! 다음으로 중전 인현왕후를

목표로 하여 의식을 진행할 것을 명하고 중전복위의 의지를 더욱 불태운다.

취선당의 행태가 계속 의심이 가는 숙의최씨는 희빈의 동정을 살피러
몸소 취선당으로 문후들고 김춘택과 자근아기 역시 아들 휘를 통해
취선당의 정보를 캐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일은 곧 취선당으로 알려지고 위험을 느낀 희빈장씨는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막례를 다시 궐밖으로 내보낸다.

숙의의 왕자는 곧 회복이 되고 대궐은 다시 기쁨을 되찾지만 이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못내 아쉬워한다.

한편 취선당에 잡인이 출입한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자 숙종은 내금위
병사들을 취선당으로 보내 샅샅이 뒤지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80회] 희빈의 무례함을 목격한 숙종은...

 




중전의 오라비인 민진후를 배후로 여긴 희빈장씨는

중전에게 따지기 위해 중궁전으로 달려오고 숙종이 보는 앞에서 소란을 피운다.

희빈의 무례함을 목격한 숙종은 내금위 병사들의 일은 자신의 명령에 의한 것임과

자신 또한 취선당에 얽힌 풍설을 잘 알고 있다는 경고를 남긴 채 자리를 뜬다.

위축되는 희빈장씨!

반면 기세가 오른 숙의최씨는 희빈 장씨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등 이미
옛날의 나약한 모습이 아니다.

더욱 독이 오른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사가에 나와있던 막례는 또 다른 방술을 제안하고 충근을 시켜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바로 인현왕후 사가 마당에 사람의 인골과 중전당의를 함께 묻는 일.

하지만 민진후에게 발각되어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도리어 취선당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높아만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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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내 의견과 거의 일치하는 글이 있어서 가져와 봄.

 

 

기사 원본을 보려면 제목을 클릭~.

 

 

장희빈만 악녀?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사극에서 인자한 인물로 그려진 인현왕후, 우리가 잘 몰랐던 '두 얼굴'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인현왕후(홍수현 분)가 중궁전에 입성하면서 장옥정(김태희 분)의 악녀 본색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흥행 포인트'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가 본격화됨에 따라 시청률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장희빈을 그린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희생과 인고'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인현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인내하고 받아들였던 후덕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전의 자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 있는 여성이었을까.

'엘리트 코스' 밟았던 인현왕후의 자존심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홍수현.
ⓒ 키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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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당시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서인세력 중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던 여흥 민씨 집안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으며 외척으로는 우암 송시열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숙종의 계비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왕비로 적극 추천한 이는 송시열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였다. 한 마디로 집권세력과 왕실세력의 비호를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렇듯 날 때부터 최고의 양갓집 규수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지존의 짝인 왕비가 되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인현왕후 특유의 자신감은 궁 밖에 쫓겨나 있던 장희빈의 환궁 과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장희빈은 명성왕후에게 '남인의 간자'로 찍혀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숙종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한 마디로 남편의 첩을 제 손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인현왕후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남인세력이었던 시할머니 장렬왕후 조씨가 장희빈의 환궁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 셋째는 인현왕후 스스로 장희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장희빈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로서 그것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숙종을 거쳐 가는 여러 여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두고두고 신경 쓸 '라이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안일한 생각과 달리 장희빈은 훨씬 영리했고 정치적이었으며 숙종의 사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 지는 장희빈의 위세는 인현왕후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왼쪽부터)김태희(장희빈 역)-한승연(최숙빈 역)-홍수현(인현왕후 역)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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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예의범절이 생활화된 데다가 왕비의 체면과 체통을 중시했던 인현왕후는 대놓고 장희빈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다과를 함께 하는 등 후덕한 조강지처의 품격을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인현왕후 또한 중전 이전에 여자이니 어찌 투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장희빈이 매우 교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장희빈으로선 아무리 윗전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것이 보통 고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너무 지나치자 서인의 거목 중 한 명인 김수항의 증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장희빈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재밌는 것은 김수항의 증손녀는 명문세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숙원이었던 장희빈보다 윗전인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소의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에 책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미천한 출신을 환기시키며 내심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귀인 김씨의 입궁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 진 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직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현왕후는 "장씨는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험담까지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인현왕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 아들인 경종을 낳으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아들도 낳지 못한데다가 체통을 잃고 '투기'까지 한 죄목을 함께 물었다. 몇몇 사료에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죽는 순간까지 장희빈을 궁지로 몰아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라이벌이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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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빼앗긴 인현왕후는 5년간 안국동 본가인 감고당으로 돌아가 폐출 생활을 감내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없었던 이 시기에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손상됐다. 인현왕후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유도 바로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병증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장희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과거의 악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데다가 세자의 친모이기도 한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가만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인현왕후는 승하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는 모두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이 빌미란 것이 바로 장희빈의 저주를 뜻한다. 인현왕후의 이 같은 말은 차후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승하 2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인현왕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린 것과 다른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깍듯한 예의와 품격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애첩에게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인현왕후는 궁인 출신의 장희빈이 자신의 라이벌이란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평생을 장희빈에 대한 콤플렉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숙종과 함께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에 묻혀 있는 인현왕후는 지금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끝끝내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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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비록 시청률은 삼사 드라마 중 꼴찌이지만 (직장의 신, 구가의 서, 장옥정)

적어도 사극빠인 저한테는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이 드라마 속에서 궁인들의 가벼운 행동거지나, 서인들의 지나친 왕권 도전 등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숙종 이순의 불같은 성정, 냉철한 성격, 결단력있는 성격과 과단성,

그가 장희빈(희빈 장씨, 장옥정)을 사랑할 때의 모습 등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집니다.

 

 

요즘도 게시판, 카페, 블로그 등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문제점 및 시청률이 낮은 이유는 역사 왜곡이라고들 하는데...
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 착한 장희빈, 악녀 인현왕후 때문이라고 말을 하네요.

이 드라마의 문제점은 뚝뚝 끊기는 편집과, 과한 설정, 감없는 연출이지
캐릭터 설정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아, 물론 익숙하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요.


하지만 숙빈 최씨를 무조건적인 선역으로 그렸던 동이에서조차도
장희빈을 이전의 무모한 악역으로 그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 따지면 동이야 말로 역사 왜곡 환타지 동화였음.)

 

 



장옥정(장희빈)을 보는 시선이 이리 달라지게 된 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실록이 국역되면서 점점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장희빈이 악독하게 굴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 어떤 장면에서도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숙종이 마지막에 자진을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만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전의 기록에는 없는 말입니다.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후에 인현왕후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사악한 행동이 없습니다. 적혀진 사실 자체가 없어요.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조차도 제대로 된 물증이 없습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최숙빈이 그리 말했고,

그것을 인현왕후 사후에, 장희빈 자진 어명이 떨어진 후에 조사하는 이상한 조사과정이 나올 뿐입니다.

실록을 찾아서 읽으면 읽어볼수록 장희빈이 좀 불쌍한 구석이 있네?라고 느끼게 될 정도입니다..

 


오히려 현숙하고 조신한 왕후의 이상형인 인현왕후가 우리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름에 놀라게 됩니다.

 

실록 속에는 인현왕후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희빈을 불러서 매질을 했다는 기록과

'숙원 장씨는 숙종이 전생에 죽인 짐승으로 원한을 품고 태어났다'고 폭언(?)을 퍼부은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15년 (1689년 기사) : 왕비 민씨의 간특한 정상을 참지 못하는 비망기

 

 

위키피디아 인현왕후 -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5]

 

 

사악한 장희빈과 불쌍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소설인 '인현왕후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수많은 사극과 드라마에 의해서 확대, 왜곡, 재생산되었습니다.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경종을 고자;;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약을 마실 때 발버둥쳤다는 것조차도 실록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임금의 사랑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자를 낳고도 희빈으로 강등된 것만으로도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인데

사약 먹고 죽은 후에도 (이것도 실록에는 안나옴.) 몇 백년간이나 악녀의 상징으로 기억이 되다니...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쯤 되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는 인현왕후가 투기했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 - 여인이자, 서인정권의 상징으로서 당연하다고 봅니다)

 

장희빈이 착하디 착했는데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예전의 이분법적인 선악구도 속의 인형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  납득 가능한 인간이었음을 믿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새로운 장희빈, 재해석된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글

 

 

2013/05/08 - 장옥정은 역사 왜곡 사극이다?? '악녀 장희빈, 천사 인현왕후' 공식은 진짜일까??

 

2013/05/10 - 역대 장희빈들 연기 동영상 비교하기

2013/05/06 - 사극 속의 장희빈, 실제 역사 속의 장희빈은 어떻게 다를까?

 

2013/05/06 - 제 9대 장희빈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2013/05/03 - 장희빈(장옥정, 희빈 장씨)에 대한 이런 저런 기록들

 

2013/02/07 - [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자인가?

 

2010/03/25 - 장희빈 소재의 책들

 

2007/11/09 - 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2007/11/09 -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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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사극 속의) 장희빈....

 

 

미모와 요사스러운 색기로 우유부단한 숙종을 홀리어서 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성정이 표독하고, 천성 자체가 사악해서 자신을 다시 불러준

순박하고 지고지순한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저주해서 죽게 만들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대체적으로 사극에서 보여준 모습에 힘입은 바가 큰데..

이 사극 속의 장희빈의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조선시대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인 혹은 서인이 쓴 것으로

짐작되어지는 작가 미상, 연대 미상의 작품, 인현왕후전'에 등장한 장희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 인현왕후전 원문 ------------------- 

 

 

 

"옛 한무제도 무죄한 구익부인을 죽였거니와 이제 장녀는 오형지참(五刑之斬)을 할 것이요. 죄를 속이지 못할 바로되 세자의 정리를 생각해서 감소감형하여 신체를 온전히 하여 한 그릇의 독약을 각별히 신칙하노라."

 

 

궁녀를 명하여 보내시며 전교하사,

 

 

"네 대역부도의 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약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죽을 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임이 네게 영화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로 일시도 머무르지 말라."

 

 

"네 중궁을 모살(謨殺)하고 대역부도함이 천지에 당연하니 반드시 네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梟示)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은으로 경벌을 쓰거늘 갈 수록 태만하여 죄 위에 죄를 짓느뇨?"

 

 

장씨 눈을 독하게 떠 천안(天顔=용안)을 우러러뵈옵고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

 

 

"민씨 내게 원망을 끼치어 형벌로 죽었거늘, 내게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게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의 도리가 아닙니다."

 

 

살기가 자못 등등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사 두 눈을 치켜 뜨시고 소매를 걷으시며 여성하교하여 이르시기를,

 

"천고에 저리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이라."

 

 

장씨, 손으로 궁녀를 치고 몸을 뒤틀며 발악하여 말하기를,

 

"세자와 함께 죽이라. 내 무슨 죄가 있느뇨?"

 

 

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좌우에게,

 

"붙들고 먹이라." 하시니,

 

 

여러 궁녀 황황히 달려들어 팔을 잡고 허리를 안고 먹이려 하나 입을 다물고 뿌리치니

상감께서 내려보시고 더욱 대노하사 분연히 일어나시며,

 

"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 하시니, 여러 궁녀 숟가락 청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

 

 

(중략) 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아니 계시고,

 

"빨리 먹이라." 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

 

경각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섬돌 아래 고꾸라져 유혈이 샘솟듯 하니,

 

 

(중략) 상감께서 그 죽음을 보시고 외전으로 나오시며,

 

"시체를 궁 밖으로 내라." 하시고

 

----------- 이하 생략 -------------------------------

 

 

 

 

한편 실록 속의 장희빈...

 

장옥정, 흔히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자못 아름다웠다"고 짧게 표현됐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인정한 유일한 미인인 만큼

장옥정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일하게 실록에 그 자태가 자못 아름다웠다고 적혀져 있는 여인,

유일하게 낮은 신분의 궁인에서 신분이 급상승한 여인,

유일하게 궁녀 신분으로 쫓겨나서 재입궁한 여인,

유일하게 6년이나 궁 밖에 있으면서도 왕의 마음을 쥐고 있던 여인

유일하게 후궁의 신분으로 궁 안에서 죽은 여인. (대비, 중전, 세자빈 외에는 무조건 출궁해서 죽어야 함.)

 

 

여러가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여인이다.

 

 

실제로 실록 속에는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에 대한 물증이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려고 했다거나, 표독스러웠다거나, 이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약올려서 

인현왕후가 참다 못해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올 뿐인데...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현왕후를 찾아가서 자랑한 거;;;)

 

임금이 실수로 한, 혹은 농담으로 했던 작은 이야기까지도 다 적혀있는 실록에

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때리게까지 만들었던 건방진 행동은 하나도 적혀있지 않는 것일까??

 

 

이쯤 되면.... 

그동안의 장희빈 드라마나 장희빈 영화 속에서의 장희빈 모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혹시 서인들이 승리한 역사에서 남인들에게서조차도 서인을 내리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졌던

천한 신분의 장희빈이 오히려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쓰인 가엾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장희빈 상상화라는데... 서양화가가 그린 것이라서 우리 정서에 좀 안맞는 듯 하다.

실제 장희빈 이렇게 생겼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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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6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2013/05/03 - 장희빈(장옥정, 희빈 장씨)에 대한 이런 저런 기록들

 

2013/02/07 - [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자인가?

 

2007/11/09 - 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2007/11/09 -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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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복창군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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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 환국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아네스·이장우·정두희·최선혜,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숙종실록], 휴머니스트, 2009;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1~3, 역사문화, 2009.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 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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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여느 임금들보다 암행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에서 이순이 자꾸 나가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되네요.

암튼..  숙종시대 일화 및 숙종의 암행에 대한 일화를 찾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았습니다.


#1. 숙종이 명릉에 묻힌 이유는?  

숙종대왕(조선조 19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이신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기가 죽은 선비에게 이젠 당당하게 반말까지 하는 갈처사,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대왕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리성.拜 

.............................................................. 



#2. 

조선시대 숙종 임금의 암행(暗行)에 관한 일화는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자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암행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고래등같은 어느 관료의 집에 다가갔습니다. 인적이 끊어지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 했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습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면서 손주와 이야기 하고 있고, 할머니는 짚을 고르며 거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들다가 놓은 망태기가 한편에 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띈 얼굴로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듯 한 움막에서 살며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지요.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 아니요. 어떻게 이 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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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 6권 - 연산군편 참조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권세도 없는 일개 궁인이었던 폐비 윤씨의 왕비 간택도 그렇지만 그녀의 폐출, 사약으로 인한 죽음에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 군주이자, 최초된 폐출된 왕인 연산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다.



2007/11/09 -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2007/11/09 -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2007/11/09 -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2008/03/11 - 연산군의 광기를 깨우는 폐비 윤씨(금삼의 피)에 대한 진실은?
2008/03/24 - 폐비 윤씨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부제: 폐비는 인수대비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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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소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 초상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ㅋ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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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미상이긴 한데 여하간에 괜찮은 글 있어서 그대로 옮긴다.
이 분 너무 너무 대단하시다.. 어떻게 이런 학식과 지식과 글솜씨까지...
혹시 문제되면 삭제 예정. 원글자 나타나면 알려주시길.


무엇보다 조선은 무력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조선의 지배계급은 사적인 무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국가를 운용 유지하기 위해 군사적인 긴장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해결하고자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전쟁을 이유로 민중을 억압하거나 탄압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비교대상으로 언급하는 일본과 비교해보면 그 독특함과 뛰어남이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물론 조선의 양반들에게도 부정적인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부분들은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도 똑같이 안고 있던 문제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귀족에 비하면 우리나라 양반은 차라리 나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민중을 지배함에 있어 무력을 동원한 압제를 선택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민중에 비해 우월한 지성과 도덕성을 그 지배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성격의 지배계급이 나타난 것이 17세기 이후 시민계급의 등장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반은 그보다 2세기 이상 앞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양반이라 함은 신분이라기보다는 계급에 가까웠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자체가 어느정도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교육수준이라는 점에서 근대 유럽의 시민계급과 그 성격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 양민들도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려 있었다. 원래 노비였다가 면천하여 양인이 된 사람이 과거를 보아 양반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 또한 조선의 한 장점이다.


(내 이야기 추가. 조선 초기의 유명한 훈구파로 알려진 이극돈의 무려 적자는 잡과에 응시해서 그쪽으로 합격하기도 했지. 이건 내가 수능에서만 본 예시이고. 그거 외에도 꽤나 많은 사례가 있었어.)



조선의 놀라운 점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동시대 어떠한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던 그 높은 교육수준이다.

조선의 건국 자체가 신진사대부에 의한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조선의 지배계급은 조선의 민중의 교육에 대해 매우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는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한 교육서인 동몽선습, 명심보감, 삼강행실도 등을 간행 편찬함으로써 유교적 이상국가에 맞는 백성으로서 조선의 민중을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이 예학에 빠져 신분질서를 고착화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당이 전국에 보급됨에 따라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의 민중 상당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유교적 소양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유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중국이나 이웃의 일본과는 달리 민중의 생활 깊숙이까지 유교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던 이같은 일련의 교육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진보적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은 거의 이상적인 실험국가에 가깝다. 시대적 한계가 뒤따르기는 했지만 일단 신분제도를 혁파했고, 군사력이 아닌 지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문민통제로서 국가를 운영했으며, 이익보다는 옳은 가치를 추구하여 그 옳음을 밝히고 실천하고자 고민하고 논쟁했다. 이미 민중에 대한 교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주의 국가였으며 국가최고권력자인 왕조차 스스로를 계몽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여러가지 양반사회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다른 체제와 비교했을 때 가히 가장 진보적인 체제였다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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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마냥 닫혀있는 국가는 아니었어.

일본과의 교역은 왜관만 가지고 하는데도 현종시기 연간 은 5천근에 달하는 통화가 오갔고, 이 양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 중국과의 교역은 것보다도 컸고. 적어도 조선 후기만 놓고보면 조선이 마냥 닫힌 국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조선의 군사가 임진왜란 때 무조건 쫓겨다닌것은 절대 아니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통점은 적군이 파죽지세로 수도만 노려서 왕을 잡는 작전이었다는 것에 있었는데, 병자호란의 경우엔 백마산성같은 주요 요충지까지 재끼고 그냥 수도까지 무작정 달렸던 기동성을 바탕으로 승리하지만 (더구나 당시 청은 명군의 홍이포까지 가지고 있던 상황이니 공성전에선 무척 유리했지) 반면 임진왜란 때는 그게 실패하여 한양, 평양 까지 털리지만 후방에서 의병들과 지방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거고. 결국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의 일본군은 더이상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일본군에 대한 방어전략이 과거 왜적들에 대한 전략과 같았던게 패인의 원인이긴 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조선군은 순발력있게 적응했어.

병자호란때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데, 성위주의 방어 체계를 수도에서 막는 체계도 대비하는 법을 연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이 쫓겨난게 문제가 됐지. 인조 때는 임진왜란 처럼, 대몽항쟁처럼 하면 별일 없다라는 생각이 박혀있었걸랑. 근데 광해군의 걱정처럼 청군은 그냥 닥치고 왕만 잡자는게 돼었지. 고로 인조가 무능했던 거지 조선이 무능한건 아니었어. (게다가 그 시기 너무 급하게 활에서 총 위주로 병력을 바꾼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 더구나 효종대로 넘어가면 이런 경험에 따라 군사력을 증강하게 되었고 이것은 정조때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조선 궁궐 작다고 까는 넘들도 있는데, 조선 궁궐은 자금성 담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궁궐이고, 더구나 영토나 인구의 차이를 고려하면 조선 궁궐이 훨씬 큰 셈이야. 봉건사회의 후진성. 우리는 왜 일본/유럽만 못하냐 그러는데 일본은 러일전쟁, 한일합방 이전(아니 그리고 그 직후도 제법)만 해도 국가 재정이 상당부분 영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사실 러일전쟁에서 가까스로 이기지 않았으면 국가 재정이 파산날 지경에 처했었어.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단 소식이 온 전 날에는 내각 총사퇴와 그에 따른 여당과 야당의 전면적 갈등이 예고되어있기도 했고(원정에 의해 쉽게 봉합되었지만). 일본은 2차대전 이전만 해도 많은 부분 세금을 쌀로 걷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물론 조선이 망한건 고종이나 명성황후같은 지도자들의 무능도 원인이니까 무조건 옹호만 할 순 없지만. 조선이 니네들 이야기처럼 만만하게만 볼 나라는 절대 아니란 거야.

여하간에 긴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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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효종 10년(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차․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10월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월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월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월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년 6월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월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월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 지두환(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원글 출처: http://www.kostma.net/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4#Topic.



-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희빈은 철저한 희생자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는 장희빈은 죽어 마땅한 악녀라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원한 진리란 없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경종, 영조, 정조 때의 비극이 모두 숙종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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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어디에 쓰는 게 맞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역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역사 카테고리로 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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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맞이하여, 한국 최고의 명문가 - 우당 이회영 일가를 소개합니다.
조선 최고 부유층 집안의 넷째아들, 이회영.




선조시절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름난 집안의 자제였음



1910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 일어난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것임



병합이 발표된 직후,
갑자기 집과 땅을 포함한 전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하는 이회영 선생
그 후, 형제들을 불러 모인다




"제가 이렇게 형님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입니다.
이 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저는 만주로 가 이 나라를 되찾을 방도를 찾을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했음을 알린다.
그러자...



둘째 이석영 : 나도...내 집을 내놓겠네
셋째 이철영 : 나도 내 땅을 내놓겠네


다른 다섯 형제들도 그를 따라 전재산을 처분한다.




그렇게 오로지 독립 운동에 쓰기 위해 여섯 형제가 모은 돈이 40만원 (현재가치 600억원)
급하게 처분해야했으므로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약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함.




만주로 가기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던 어느 날, 노비문서를 소각하는 이회영 선생
"이제 너희들은 자유의 몸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주로 갈 것이다.
내 너희들을 다시 만나는 날엔 꼭 이 나라를 되찾은 후일 것이다."





"어르신,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부디 이 비천한 것들이 큰일 하는 것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의 인덕을 알고있던 노비들은 자진해서 만주로 따나라섰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910년 12월, 이회영의 일가족 60여명은 만주로 떠난다.
병합 후, 일본 정부가 회유책의 일환으로 양반들의 지위와 재산을 인정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것을 버리고.





만주.
전재산을 독립 운동을 위해 쓸 것을 결심한 이회영 선생.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청년들에게 조국의 역사부터 무술까지, 지덕체를 고루 가르칠 것입니다."




그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인 신흥 강습소를 세우고,




이후 신흥 강습소는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해 10년동안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신흥 무관 학교의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큰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고
1932년 마지막 결심을 한다.



"아들아, 너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는 다시 만주로 돌아간다. 다시 가서, 이 손으로 꼭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만주땅을 다시 밟지도 못하고 일본 헌병에게 체포
그것이 이 분의 마지막이셨다




1932년 65세의 나이로, 고문 끝에 숨을 거두신다...




이렇게 6형제 중 5분이 돌아가시고




이회영 선생의 바로 아래 동생 만이 살아 남아 조국의 해방을 보았다.
저 사진 속에서 울고 계신 분...




우당 이회영의 6형제는,
첫째 이건영(1853~1940), 둘째 이석영(1855~1934)
셋째 이철영(1863~1925), 넷째 이회영(1867~1932)
다섯째 이시영(1869~1953), 여섯째 이호영(1875~1933)
이시다.

이분들을 우리 잊지 맙시다.






 





세계적으로 형제 6명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

통일신라,고려,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안 양반인 집안.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밀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첫째
[첫째 이건영, 이건영의 둘째아들 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 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가장많은돈을 보탠 둘째 이석영은 중국빈민가를 80의나이에 떠돌다 굶어죽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셋째 이철영은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모든계획에 중심에섰던 넷째 이회영은 일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고문끝에 숨짐.

이회영의 둘째아들 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꼐 밀정 암살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뒤 석방.]


다섯째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후 김구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막내
[막내 이호영은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아들 이규황,이규준도 함께 실종 (몰살당한걸로 추정)]


-이회영선생은 나라를 지키기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 안하시는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것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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