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와 이훤 임금(김수현 분).
ⓒ MBC

관련사진보기

미인 밝히던 조선 왕들의 '굴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일곱 번째 이야기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임금(김수현 분)은 죽은 세자빈을 닮은 연우(한가인 분)를 무척이나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훤의 소망은 수많은 장애물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칫 연우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연우가 무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우가 무녀가 아닌 궁녀라 해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왕대비와 중전과 외척세력이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훤의 처지는 옛날 왕들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모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관심 있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란 관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관념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의 '베드신'은 오직 후계자 생산을 위해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베드신'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든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신하들의 '막가는' 발언들이... 

 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 사진은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가야(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년 24일)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 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제2장에 따르면, '검찰과 긴장관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란 취지의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라고 답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을 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 곁에는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희빈 홍씨)을 특별히 가까이 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3월 12일(1518년 4월 21일)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 12월 14일(1687년 1월 27일)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덕궁 선정전. 왕의 편전(집무실)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이하 생략. 전체 기사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반응형
반응형

 

 

 

[61회] 숙원 최씨를 제거하기 위한 방도를 찾는 희빈과..




환란의 씨앗를 없애기 위해서는 숙원을 죽이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중전 장씨는

희재를 불러 숙원 최씨를 없애라고 명한다.

숙종의 발걸음은 자주 숙원전을 향하고 이 자리에서 숙원은 매번 폐비
복위를 입에 담는다.

숙종은 이러한 숙원의 마음이 한없이 갸륵하지만 폐비 복위에 대해서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한편 서인들의 폐비 복위 움직임은 수면위로 떠오르고 이들의 뒤를
캐고자 민장도는 자신이 심어놓은 첩자를 이용한다.

그리고 중전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희재는 숙원 최씨를 제거하기 위한 방도를 찾기에

골몰하다 숙원 최씨의 형부인 김해성을 협박반 회유반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마침내 서인들의 거사일이 정해졌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장희재는

그 거사일에 맞춰 숙원 최씨를 독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62회]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일!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일!

민장도등이 이미 그 정보를 입수하고 준비를 해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한중혁, 이시회등은 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거사를 시행하기도 전에 금군들에게 모조리 포박당하고...
한편, 이 거사일에 맞춰 숙원 최씨를 독살한다는 계획을 세운 장희재는

김해성을 이용해 독이 든 약재를 궐내로 반입하고자 한다.

자근아기로부터 김해성이 자주 숙원의 사가에 들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춘택은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장희재에게 포섭당한 김해성은 장희재에게서 받은,

독이 든 약재를 들고 숙원의 사가로 간다.

이 약을 먹으면 숙원이 왕자를 잉태한다는 감언이설을 들은 숙원의
아버지는 숙원전의 궁녀를 통해 그 약재를 궐내로 들여보낸다.

장희재 일패의 숙원 독살 기도를 직감한 김춘택은 뒤늦게 그 궁녀를
뒤따라 가는데...

 

 

 

 

 

[63회] 장희재의 숙원 독살 음모에 대해..




독이 든 탕재가 들어갔는데도 숙원이 죽었다는 소식이 없자

중전 장씨는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숙원을 문후들라 명한다.

너무나도 멀쩡하고 태연한 숙원의 모습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지경이고

뒤늦게 온 장희재에게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며 호통을 친다.

이번 일에 숙종이 관여하면 곤란해지므로 마음이 급해진 장희재와
민장도는 잡혀온 서인무리들에게 더욱 심한 고문을 가하지만 김춘택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폐비 복위의 정당성만을 강변한다.

바로 김인의 상소문이 올라올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택의 부탁을 받은 김인은 선뜻 붓을 들지 못하고...

서인들에 대한 고문이 날로 혹독해진다는 소식을 들은 폐비민씨는

다 자신 때문에 무고한 자들이 고통받는다는 자괴감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고

남인들의 이러한 정권유지 야욕에 회의를 느낀 동평군은
민암을 찾아와 당장 국청을 중지하라 요구한다.

그러나 장희재 입장에서는 숙원이 독약을 마시고 죽을 때가지는 국문을
중지할 수 없고...

숙종 역시 남인들의 정권 유지 야욕에 신물이 나 있던 터라 이번일에
자신이 직접나설까말까를 고민한다.

그러던 중 드디어 장희재의 숙원독살음모에 대해 김인등이 쓴 상소문이
숙종에게 전달되고 숙종은 당장 김인을 입궐시키라 명하는데...





[64회] 갑술환국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직접 숙원전에 들러 자신의 눈으로 독약을 확인한 숙종은

당장 장희재를 잡아들이라 명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입궐하던 장희재는 금군들에 의해 잡혀 투옥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대신들이 서로에게 탓을 하며 다투고 있는 사이
숙종이 내린 비망기가 도착한다.

앞으로 환국의 전개가 예고된 이 비망기는 남인들에 대한 숙종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남인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한편 오라버니가 잡혀갔다는 소식에 안절부절못하던 중전 장씨는
세자를 앞세워 숙종에게 나아가려 하지만 이미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드디어 남인들이 모조리 원지유배 또는 처형되고 대신에 남구만 등의
서인세력들로 의정부를 개편하는 등 숙종의 갑술환국은 숨가쁘게 진행되고

최상앙을 폐비의 사가로 보내 폐비의 동태를 살피라 명한다.

폐비를 만나고 온 최상앙이 민씨가 폐가나 다름없는 곳에서 환후중에
있다는 말을 전하자 숙종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찢어질 것만 같다.

이 소식을 들은 숙원 최씨는 곧 복위의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기뻐하지만, 숙종은 세자의 모후인 중전 장씨가 있으므로 폐비 민씨의
복위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데...






[65회] 숙종은 공식적으로 폐비 복위를 거론하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김춘택은 풀려나고 그를 만난 폐비 민씨는 고마움에 눈물을 흘린다.

독살음모의 주모자인 장희재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고 장희재는 물증을 대라며

혐의를 완강히 거부하지만 김해성과의 대질심문에서 모든 것이 밝혀지는데...

드디어 숙종은 조정대신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폐비 복위를 거론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친다.

그 결과로 한때 영화를 누리던 남인대신들은 모두 유배되거나
사사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중전 장씨는 발끈하며 세자를
데리고 대전으로 가려하나 이미 금족령이 내려진 상태라 어찌할 수가
없어 더욱 독이 오르고...

마침내 폐비의 복위 소식을 가지고 폐비의 사가로 향하는 최상앙.

그러나 이 기쁜 소식에도 불구하고 폐비 민씨는 자신의 병이 너무나
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복위가 왕실이나 조정에 이로울 것이 없다며
어명을 받들 수가 없다고 하는데...





[66회]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고...




복위의 어명을 받들 수가 없다는 폐비의 소식을 들은 숙종은 더욱더 가책을 느끼고

더욱 간곡한 자신의 소망을 담아 다시 한번 청하라 명한다.

옥에 갇힌 장희재의 광분은 날로 더해가고 심한 매질을 당하던
민장도는 거의 옥사할 위기에 처한다.

점점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중전 장씨!

세자를 방패삼아 폐비의 복위만이라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고...

한편, 계속해서 복위의 어명을 거절하던 폐비 민씨는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숙종의 비망기를 받아들고는 복위의 결단을 내린다.

마침내 숙종20년(1694년) 4월 12일, 폐비 민씨가 6년 간의 고초를 끝으로 재입궁을 하던 날,

온 도성은 중전마마를 외치는 백성들의 감격으로 가득 찬다.

숙종 역시 몸소 마중을 나오고,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숙종의 말에
인현왕후는 그만 눈물을 흘린다.

반면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그 거처도 취선당으로 쫓겨가게 되는데...

 

 

 

 


[67회] 불태워지는 중전 장씨의 옥책과 교지!

 




불태워지는 중전 장씨의 옥책과 교지!

중전 장씨의 6년 간의 영화는 이렇게 사라지고 눈물바다를 이룬 가운데
취선당으로 쫓겨간다.

뿐만 아니라 문초를 받던 민장도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고 장희재 역시
간신히 사사는 모면하고 제주도에 유배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반면 숙종은 재입궐한 인현왕후의 중전 책비례를 성대히 치를 것을 명하고...

그런데 새중전을 맞이하기 위해 중궁전을 수리하던 중,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언문편지 한 장이 발견된다.

바로 숙의 최씨의 독살을 모의하기 위해 장희재가 옥정에게 보냈던 그
편지가 발견되어 서인대신들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희재뿐만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화를 불러올 편지인지라
희빈 장씨는 그 편지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 제 67회 용어풀이 ]

삼사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헌부,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





[68회] 재집권한 서인정권은 또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재집권한 서인정권은 또다시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져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다툼이 시작된다.

특히 김춘택의 방면에 비해 귀양간 한중혁의 일을 빌미로 분열은 가속화된다.

결국 김춘택과 한중혁은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재조사를 받게되고
우의정 윤지완의 주장으로 장희재의 숙의최씨 독살 음모 역시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대신들의 이런한 주장에 혹여 세자가 해를 입지 않을까 숙종은
심사숙고에 들어가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다.

중요한 단서가 되는 언문편지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게 되고
희빈 장씨는 위기감에 몸을 떤다.

고심하던 희빈 장씨는 세자를 앞세워 중전을 찾아가 읍소를 하며
장희재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무리한 희빈의 요구에 중전이 대답이 없자 희빈 장씨는 세자를
음해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데...




 

 

[69회]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남구만에게 편지를 받아온 희빈 장씨는 이를 불태우며 훗날을 도모할 것을 결심한다.

한편 김춘택, 한중혁등에 대한 재심문이 진행되지만 새로이 밝혀진 것이 없어

김춘택은 다시 방면되고 영의정 남구만은 처음에 이 일을 거론했던 한구를 유배시켜 버린다.

또한 세자의 외숙을 죄줄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려 장희재를 다시
제주도로 돌려보내자 희빈 장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그러나 이 일을 빌미삼아 젊은 유생들 사이에는 남구만을 탄핵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일고

남구만은 숙종에게 사직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숙종은 윤허하지 않고...

그러던 중 양주에 있는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은 숙종에게 달려가 이는 세자를 음해하고자 하는
무리들의 소행이므로 반드시 색출하여 처단해야한다고 청한다.






[70회] 숙의에게 산기가 있다는 급한 전갈이 당도하는데...




희빈의 부친묘가 파헤쳐진 사건의 파문은 점점 더 커져가고

민진후등은 희빈의 패거리가 스스로 꾸민 일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던중 산소 주위에서 발견된 호패를 단서 삼아 이조판서 최석정은
마침내 범인을 색출하기에 이른다.

범인은 다름 아닌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속이었다.

의금부 병사들은 당장 그를 잡아들이는데, 이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희재의 수하들이었다.

잡혀온 범인에 대한 숙종의 친국이 시작되자 병조판서 신여철은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을 죽여달라며 대전 앞에서 석고대죄를 한다.

희빈 장씨는 더욱 기세가 올라 숙종에게 빨리 배후를 밝혀달라 조르고...

그런데 범인과 목격자의 대질심문을 하려는 중 그만 범인이 숨을 거두고 만다.

이 사건은 다시 미궁 속에 빠지고 화가 난 희빈은 다시 대전으로 든다.

희빈은 숙종에게 그 범인은 바로 세자를 음해 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므로 하루빨리 그 무리들은 색출해달라고 재촉한다.

난감한 숙종이 희빈을 외면하고 있을 때 바로 숙의에게 산기가 있다는
급한 전갈이 당도하는데...


 

 

 

[71회] 숙종은 세자의 보위를 약속하며 세자빈을 들이라...




숙의의 산기소식에 대궐의 모든 이목이 숙의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

숙정은 막례라는 무당을 찾아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드디어 숙의가 왕자를 생산하자 숙종과 인현왕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지만 희빈은 그 핏덩이를 살려둘 수 없다며 더욱 독이 오르는데...

한편, 피의자의 죽음으로 난감해진 최석정은 파묘사건의 목격자인
농부를 데리고 도성거리로 나가 범인 색출을 시도하고 마침내 업동이
걸려들기에 이른다.

이 와중에 업동이 장희재의 가솔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배후에 희빈이
있다는 생각에 주저하는 최석정에게 숙종은 배후가 누구든 간에
철저하게 사건을 조사하라 명하고...

이 소식을 들은 희빈은 놀라 쓰러지고 윤씨와 숙정은 혹여 업동이
진실을 발설할까 불안에 떨며 업동이를 처치할 궁리까지 한다.

하지만 세자에게 피해가 갈 까 걱정되는 남구만의 주청으로 다행히
업동은 풀려나게 되고 희빈은 한숨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희빈을 찾아온 숙종. 이 자리에서 숙종은 세자의 보위를
약속하며 하루 빨리 세자빈을 들이라 명하는데...

 





[72회] 왕자를 생산한 숙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희빈...




자신이 살아있는 한 세자의 서열에는 변함이 없으며

세자빈 간택에도 적극적인 인현왕후의 행동에 희빈은 눈물을 쏟으며 감격한다.

하지만 왕자를 생산한 숙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는 못하고...

한편 젊은 간관들의 반발로 지난번 방면되었던 업동에 대한 재조사가
시작되고 더욱 모진 고문을 당하던 업동은 결국 입을 열게 된다.

업동의 입에서 희빈에 관련된 말이 나올 줄 기대했으나 업동은 전혀 엉뚱한

이홍발을 거론하자 서인들은 모두 황당해한다. 어쨌든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한숨을 돌린 숙정은 다시 막례를 찾아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희빈의
복위를 도모하고자 일을 꾸미기 시작하고 희빈 역시 근래 자주
인현왕후가 혼절한다는 소식에 득의의 미소를 짓는데...


[ 제 72회 용어풀이 ]

탕탕평평 :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공평하게 정치를 하겠다는 말





[73회] 직접 인현왕후의 병간호를 하는 숙종...




중전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숙종은 직접
병간호를 하는 등 인현의 완쾌를 위해 정성을 쏟는다.

한편 희빈은 세자빈의 간택단자 들어오는 것이 신통치 않자 직접 나서
동평군에게 하루빨리 서두르라 명하지만 사대부들이 의도적으로 희빈을
멀리하는 이유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결국 숙종과 인현이 직접 나서 간택단자의 일을 챙기고...

귀양을 가있는 희재는 숙정과 희빈에게 훗날을 도모하는 내용의 편지를
올리고 이를 눈치챈 김춘택은 희재의 수하들에게 미행을 붙인다.

편지를 받아든 희빈은 다시 한번 결기를 다지고 세자의 가례를 기회로
자신의 입지를 새롭게 할 것을 결심하는데...





[74회] 세자빈의 간택을 놓고 심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인현과 희빈

 




세자빈의 간택을 놓고 심한 의견차이를 보이는 인현과 희빈.

희빈은 인현이 간택한 심호의 딸이 마음에 들지 않자 인현 앞에서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결국 심호의 딸이 최종 간택되어 가례가 치러지고

희빈은 첫대면에서 자신의 지원극통함을 한시라도 잊지말라고 신신당부한다.

한편 장희재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한 김춘택은 윤씨가
숨어들었다는 막례집을 알아내 몰래 염탐하기 시작하지만 그의 수하들이
장희재의 수하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음모가 중전이나 숙의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판단한 김춘택의 발걸음은 빨라지는데...

가례를 올린 세자와 세자빈은 희빈보다는 오히려 인현왕후에게서

더 큰 자애로움을 느끼고 가깝게 지낸다.

이 사실을 안 희빈은 매우 못마땅해하고 당장 세자를 불러오라 호통치는데...





[75회]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신당을 차릴 것을 명하는데..

 





희빈장씨가 숙종에게 지금 세자의 외조모가 사람들에게 쫓겨 숨어산다고 말하자

숙종은 당장 그들을 옛집으로 옮기게 하고 금군들이 직접 지켜주도록 명한다.

감읍하는 희빈 장씨.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김춘택등 노론들은 발끈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일을 빨리 진행시키고자 희빈은 막례의 입궐을
명하고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숙의 최씨는 인현왕후에게 이를
고하지만 인현왕후는 투기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다.

입궐에 성공한 막례는 희빈에게 중전의 자리에 다시 오르기 위해서는
궐안에 신당을 짓고 비방을 해야 한다고 고하자 희빈장씨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너무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막례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 김춘택과 숙의최씨는 방도를 강구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고 마침내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신당을 차릴 것을 명하는데...





[76회] 희빈은 결국 신당 차리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권상궁등의 반대에 부딪힌 희빈은 결국 신당 차리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지만

언제고 기회만 되면 다시 부르겠노니 그동안 필요한 신구들을 준비하라 막례에게 명한다.

그러던 중 유배된 업동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희빈은 옛일이
탄로날까 다시 긴장하기 시작한다.

윤씨를 만나기 위해 막례집에 들린 업동은 막례와 함께 금군에 잡히게
되고 희빈 쪽은 업동이 모든 것을 발설할까 업동을 살해하고자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또 다시 남구만의 진언으로 업동은 방면되어 희빈은 한 숨을
돌리게 되지만 김춘택은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기만하다.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희빈의 위세!

희빈은 조그마한 일을 트집잡아 숙의의 궁인을 문초하는 일이 벌어지고
찾아온 숙의에게도 종아리를 걷으라 명하는데..



 


[77회] 희빈이 숙의를 매질한다는 소릴 들은 인현왕후는..




희빈이 숙의를 매질한다는 소릴 들은 인현왕후는 급히 취선당으로 와

매질을 말리려 하지만 오히려 희빈에게서 모욕스런 말을 듣는다.

참는데도 한계가 있는 법.

참다못한 인현왕후는 희빈의 뺨을 때리게 되고 희빈장씨는 통렬하게 울부짖는다.

그러던 중 숙종이 몹시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돌고 인현왕후는 최상앙을
불러 숙종의 환후를 확인한다.

아니라며 부인하는 숙종 앞에서 인현왕후는 옥체를 보전해야한다며
눈물로 간청을 하여 마침내 숙종의 몸에 뜸을 뜨는 등 치료를 위해
정성을 다하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현왕후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다며 눈물을 흘리고...

이 소식을 들은 숙안공주는 대궐로 달려와 숙종의 환후는 심한 격무
탓이므로 격무를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집으로 피접올 것을 주청하고
거절하던 숙종도 인현왕후의 청을 들어 피접을 결정한다.

하루라도 빨리 인현왕후의 국상을 바라던 희빈 장씨에게 숙종의 피접은
엄청난 기회가 되고 마침내 이 혼란을 틈타 막례의 재입궐을 추진, 신당
차리는 일을 서두르게 되는데...

 


[ 제 77회 용어풀이 ]

경연청 참찬관 :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에 참예하는 관원

피접 : 장소를 옮겨서 병을 치료하는 일




[78회] 재입궐한 막례는 비밀리에 신당 차리는 일을..




재입궐한 막례는 비밀리에 신당 차리는 일을 서두르고

이를 바라보는 희빈 장씨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어린다.

한편 지난번 일을 사과하러 취선당에 들린 인현왕후는 다시 한번
희빈에게 모욕을 당하고 혼절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막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김춘택은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되어져간다는 것을 직감하고 숙의최씨를 사가로 불러내 취선당의 동태를
잘 살피라 경고한다.

하지만 숙의최씨가 궐밖에 나간 사이 희빈의 신당은 완성되고 마침내
저주의 의식이 시작된다.

첫 번째 화살은 숙의의 소생인 연잉군!

신기하게도 실제로 연잉군은 이유없이 심한 고열에 쓰러지고 숙의 최씨
대신에 왕자를 돌보던 인현왕후는 당황해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희빈과
막례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갖은 처방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신열은 높아만 가자 인현왕후는 숙의의
사가로 급히 연통을 띄우고, 숙의 최씨는 허둥지둥 서둘러 입궐하는데...


 



[79회] 희빈은 중전복위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왕자의 신열 소식에 대궐은 발칵 뒤집히고
숙의와 숙종은 급히 입궐한다.

반면, 막례의 영험함을 더욱 신임하는 희빈장씨! 다음으로 중전 인현왕후를

목표로 하여 의식을 진행할 것을 명하고 중전복위의 의지를 더욱 불태운다.

취선당의 행태가 계속 의심이 가는 숙의최씨는 희빈의 동정을 살피러
몸소 취선당으로 문후들고 김춘택과 자근아기 역시 아들 휘를 통해
취선당의 정보를 캐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 일은 곧 취선당으로 알려지고 위험을 느낀 희빈장씨는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막례를 다시 궐밖으로 내보낸다.

숙의의 왕자는 곧 회복이 되고 대궐은 다시 기쁨을 되찾지만 이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못내 아쉬워한다.

한편 취선당에 잡인이 출입한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자 숙종은 내금위
병사들을 취선당으로 보내 샅샅이 뒤지라는 명령을 하달하는데...



 


 

[80회] 희빈의 무례함을 목격한 숙종은...

 




중전의 오라비인 민진후를 배후로 여긴 희빈장씨는

중전에게 따지기 위해 중궁전으로 달려오고 숙종이 보는 앞에서 소란을 피운다.

희빈의 무례함을 목격한 숙종은 내금위 병사들의 일은 자신의 명령에 의한 것임과

자신 또한 취선당에 얽힌 풍설을 잘 알고 있다는 경고를 남긴 채 자리를 뜬다.

위축되는 희빈장씨!

반면 기세가 오른 숙의최씨는 희빈 장씨를 정면으로 공박하는 등 이미
옛날의 나약한 모습이 아니다.

더욱 독이 오른 희빈장씨는 막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사가에 나와있던 막례는 또 다른 방술을 제안하고 충근을 시켜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바로 인현왕후 사가 마당에 사람의 인골과 중전당의를 함께 묻는 일.

하지만 민진후에게 발각되어 이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도리어 취선당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높아만 가는데... 

 

 

반응형
반응형

 

비슷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내 의견과 거의 일치하는 글이 있어서 가져와 봄.

 

 

기사 원본을 보려면 제목을 클릭~.

 

 

장희빈만 악녀?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사극에서 인자한 인물로 그려진 인현왕후, 우리가 잘 몰랐던 '두 얼굴'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인현왕후(홍수현 분)가 중궁전에 입성하면서 장옥정(김태희 분)의 악녀 본색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흥행 포인트'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가 본격화됨에 따라 시청률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장희빈을 그린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희생과 인고'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인현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인내하고 받아들였던 후덕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전의 자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 있는 여성이었을까.

'엘리트 코스' 밟았던 인현왕후의 자존심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홍수현.
ⓒ 키이스트

관련사진보기


인현왕후는 당시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서인세력 중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던 여흥 민씨 집안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으며 외척으로는 우암 송시열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숙종의 계비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왕비로 적극 추천한 이는 송시열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였다. 한 마디로 집권세력과 왕실세력의 비호를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렇듯 날 때부터 최고의 양갓집 규수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지존의 짝인 왕비가 되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인현왕후 특유의 자신감은 궁 밖에 쫓겨나 있던 장희빈의 환궁 과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장희빈은 명성왕후에게 '남인의 간자'로 찍혀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숙종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한 마디로 남편의 첩을 제 손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인현왕후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남인세력이었던 시할머니 장렬왕후 조씨가 장희빈의 환궁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 셋째는 인현왕후 스스로 장희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장희빈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로서 그것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숙종을 거쳐 가는 여러 여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두고두고 신경 쓸 '라이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안일한 생각과 달리 장희빈은 훨씬 영리했고 정치적이었으며 숙종의 사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 지는 장희빈의 위세는 인현왕후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왼쪽부터)김태희(장희빈 역)-한승연(최숙빈 역)-홍수현(인현왕후 역)
ⓒ SBS

관련사진보기


기본적인 예의범절이 생활화된 데다가 왕비의 체면과 체통을 중시했던 인현왕후는 대놓고 장희빈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다과를 함께 하는 등 후덕한 조강지처의 품격을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인현왕후 또한 중전 이전에 여자이니 어찌 투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장희빈이 매우 교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장희빈으로선 아무리 윗전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것이 보통 고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너무 지나치자 서인의 거목 중 한 명인 김수항의 증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장희빈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재밌는 것은 김수항의 증손녀는 명문세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숙원이었던 장희빈보다 윗전인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소의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에 책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미천한 출신을 환기시키며 내심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귀인 김씨의 입궁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 진 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직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현왕후는 "장씨는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험담까지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인현왕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 아들인 경종을 낳으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아들도 낳지 못한데다가 체통을 잃고 '투기'까지 한 죄목을 함께 물었다. 몇몇 사료에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죽는 순간까지 장희빈을 궁지로 몰아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라이벌이었다.
ⓒ SBS

관련사진보기


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빼앗긴 인현왕후는 5년간 안국동 본가인 감고당으로 돌아가 폐출 생활을 감내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없었던 이 시기에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손상됐다. 인현왕후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유도 바로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병증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장희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과거의 악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데다가 세자의 친모이기도 한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가만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인현왕후는 승하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는 모두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이 빌미란 것이 바로 장희빈의 저주를 뜻한다. 인현왕후의 이 같은 말은 차후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승하 2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인현왕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린 것과 다른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깍듯한 예의와 품격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애첩에게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인현왕후는 궁인 출신의 장희빈이 자신의 라이벌이란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평생을 장희빈에 대한 콤플렉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숙종과 함께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에 묻혀 있는 인현왕후는 지금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끝끝내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반응형
반응형

 

 

 

요즘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비록 시청률은 삼사 드라마 중 꼴찌이지만 (직장의 신, 구가의 서, 장옥정)

적어도 사극빠인 저한테는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이 드라마 속에서 궁인들의 가벼운 행동거지나, 서인들의 지나친 왕권 도전 등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숙종 이순의 불같은 성정, 냉철한 성격, 결단력있는 성격과 과단성,

그가 장희빈(희빈 장씨, 장옥정)을 사랑할 때의 모습 등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집니다.

 

 

요즘도 게시판, 카페, 블로그 등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문제점 및 시청률이 낮은 이유는 역사 왜곡이라고들 하는데...
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 착한 장희빈, 악녀 인현왕후 때문이라고 말을 하네요.

이 드라마의 문제점은 뚝뚝 끊기는 편집과, 과한 설정, 감없는 연출이지
캐릭터 설정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아, 물론 익숙하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요.


하지만 숙빈 최씨를 무조건적인 선역으로 그렸던 동이에서조차도
장희빈을 이전의 무모한 악역으로 그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 따지면 동이야 말로 역사 왜곡 환타지 동화였음.)

 

 



장옥정(장희빈)을 보는 시선이 이리 달라지게 된 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실록이 국역되면서 점점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장희빈이 악독하게 굴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 어떤 장면에서도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숙종이 마지막에 자진을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만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전의 기록에는 없는 말입니다.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후에 인현왕후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사악한 행동이 없습니다. 적혀진 사실 자체가 없어요.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조차도 제대로 된 물증이 없습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최숙빈이 그리 말했고,

그것을 인현왕후 사후에, 장희빈 자진 어명이 떨어진 후에 조사하는 이상한 조사과정이 나올 뿐입니다.

실록을 찾아서 읽으면 읽어볼수록 장희빈이 좀 불쌍한 구석이 있네?라고 느끼게 될 정도입니다..

 


오히려 현숙하고 조신한 왕후의 이상형인 인현왕후가 우리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름에 놀라게 됩니다.

 

실록 속에는 인현왕후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희빈을 불러서 매질을 했다는 기록과

'숙원 장씨는 숙종이 전생에 죽인 짐승으로 원한을 품고 태어났다'고 폭언(?)을 퍼부은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15년 (1689년 기사) : 왕비 민씨의 간특한 정상을 참지 못하는 비망기

 

 

위키피디아 인현왕후 -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5]

 

 

사악한 장희빈과 불쌍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소설인 '인현왕후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수많은 사극과 드라마에 의해서 확대, 왜곡, 재생산되었습니다.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경종을 고자;;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약을 마실 때 발버둥쳤다는 것조차도 실록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임금의 사랑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자를 낳고도 희빈으로 강등된 것만으로도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인데

사약 먹고 죽은 후에도 (이것도 실록에는 안나옴.) 몇 백년간이나 악녀의 상징으로 기억이 되다니...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쯤 되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는 인현왕후가 투기했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 - 여인이자, 서인정권의 상징으로서 당연하다고 봅니다)

 

장희빈이 착하디 착했는데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예전의 이분법적인 선악구도 속의 인형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  납득 가능한 인간이었음을 믿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새로운 장희빈, 재해석된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글

 

 

2013/05/08 - 장옥정은 역사 왜곡 사극이다?? '악녀 장희빈, 천사 인현왕후' 공식은 진짜일까??

 

2013/05/10 - 역대 장희빈들 연기 동영상 비교하기

2013/05/06 - 사극 속의 장희빈, 실제 역사 속의 장희빈은 어떻게 다를까?

 

2013/05/06 - 제 9대 장희빈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2013/05/03 - 장희빈(장옥정, 희빈 장씨)에 대한 이런 저런 기록들

 

2013/02/07 - [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자인가?

 

2010/03/25 - 장희빈 소재의 책들

 

2007/11/09 - 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2007/11/09 -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