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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거리/먹고 듣고 보자!

정경호 보그걸 매거진 인터뷰

by 파란토마토 2008. 4. 28.
“휴양을 하기보다 휴식을 즐기러 가는 곳이야.” 말레이시아 랑카위로 떠나기 전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글쎄,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조급증에 시달리는 도시인에게 ‘휴식을 즐긴다’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 하지만 어둑어둑한 밤에 도착한 리조트의 침대에 지친 몸을 뉘인 몇 시간 후 서서히 잠에서 깨어날 무렵, 비로소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은 새소리에 눈을 뜨는 것. 그런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지 얼마나 됐는지 헤아려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루하다 치면 몹시도 지루한 공기가 흐르는 이곳에서 지극히 활달한 스물 다섯의 배우가 즐거이 버텨낼까 슬며시 걱정이 된 것도 사실. 다행히도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랑카위만의 작고도 소소한 몇 가지 기쁨을 찾아낸 정경호는 이곳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고 했다. 곧 촬영에 돌입할 영화 스케줄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휴식을 즐기러 온 배우에게 이런 한적함은 오히려 머릿속을 뒤엉키게 만드는 독이 될 법도 한데 그는 의외로 현실을 즐기며 느긋해했다. 그의 말대로 정경호에게 연기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즐거운 기회이기 때문인 걸까. 랑카위에서 머무른 5일 동안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라 즐기는 듯 보였던 그는 예의 그 담배를 문 채로 절친한 이와 대화하듯 스스럼없이 인터뷰의 말문을 열었다.

VOGUE GIRL(이하 V.G.) 인터뷰를 즐기는 편인가? 경직된 느낌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경호 긴장하진 않는다. 내가 달변가는 아니어서 말하는 걸 즐기는 편이 못 될 뿐이다. 화보 촬영할 때 나도 모르게 굳어버려서 그렇지, 인터뷰는 오히려 편하다. 지금은 서울이 아닌 곳에서 질문을 주고받으니 기분이 좀 새롭기도 하고.

V.G. 평소에도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인가?

정경호 가까운 나라에 주로 간다. 일본과 태국을 좋아하는데, 특히 태국은 ‘개와 늑대의 시간’ 촬영 때도 머물러서 그런지 왠지 나와 인연이 깊은 느낌이다. 미국도 가고 싶긴 한데 군대 때문에. 아, 푸켓도 좋아한다. 그곳에 가면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형과 함께 하루 종일 유유자적 바다 낚시를 하곤 하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V.G. 랑카위는 어떤가?) 말레이시아는 처음인데, 도시도 사람처럼 첫인상이 있지 않나? 그 첫 느낌이 맘에 들었다. 원래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점수를 주는 편이다. 시끌벅적한 휴양지보다 이런 곳에서 일상적인 재미를 찾는 게 더 즐겁다.

V.G. ‘개늑시’를 끝내고 이제 영화 두 편의 촬영 시작 전인데, 생각보다 일과 쉼의 간격이 짧다. 그만큼 작품 선택도 빨랐다는 건데 당신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를 검토할 때 가장 눈여겨보는 건 뭔가?

정경호
나란 배우가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 역할의 비중보다 작품 속에서 내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내가 가진 달란트로 온전히 조절할 수 있다고 판단이 서는 작품을 최종 선택한다.

V.G. 그렇다면 이제까지 경험한 역할은 대체로 정경호 본연의 모습과 닮아 있는 편인가?

정경호
닮은 점이 많다. 그다지 유별난 게 없는 역할들이기도 하지만 모두 정경호란 사람이 연기한 거니까 내 느낌이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부 나 같다고 해서 성공한 건 아니다. 그 캐릭터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갔다면 성공한 것이고, 단지 정경호스러운 것으로 끝났다면 실패한 거다. 내가 이제껏 맡았던 역할은 작품 속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난 그런 게 재미있다. 변화하는 모습 속에서 서서히 캐릭터에 동화되어 가기도 쉽고.

V.G. 그런 점에서 가장 성공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건 뭔가?

정경호
<허브>의 종범. 역할에 대해 그다지 몰입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잘 나온 작품이라고 할까. 촬영 현장도 너무 재미있었다. 나중에는 동료 배우나 스태프들과도 막역해져서 내 촬영 분량이 없을 때도 매일 현장에 나가 있을 정도였다.

V.G. 자신과 너무 닮은 캐릭터여서 과연 연기를 하기는 한 건지 헷갈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래서 더 편안할 수도 있다. 당신이 가진 연기관의 관점으로 본다면 후자를 더 선호하는 건가?

정경호
그렇다. 꾸미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언제나 카메라 앞에서 내가 얼마나 꾸미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멋지다 생각하는 배우를 꼽자면 단연 양조위. 그는 항상 캐릭터에 젖어 있는 것 같다. <화양연화>의 차우와 <무간도>의 진영인은 모두 다분히 양조위스러웠다. 웃고 있어도 슬픈 눈과 울고 있어도 씁쓸한 미소가 어울리는 입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V.G. 그래도 언젠가 자신과 전혀 다른 캐릭터를 하며 ‘연기’하는 보람을 느끼고 싶을 때가 올 거다.

정경호
배우라면 당연하다. 다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거지. 조만간 촬영에 들어갈 두 작품 역시 이제껏 맡았던 역할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상당히 욕심 나는 역할들이다. 하나는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준익 감독님의 <님은 먼 곳에>. 감독님의 ‘음악 3부작’ 완결편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감독님과는 캐스팅 직후부터 자주 만났는데 영화는 물론 음악에 대해서도 지식이 상당히 풍부하시다. 밴드의 역사부터 기타리스트의 일생까지 줄줄 외우실 정도니까. 같이 있기만 해도 뭔가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하나는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허브>의 허인무 감독님과 함께할 것 같다.

V.G. 다음 작품이 이미 줄을 서고 있는데 열혈 청춘이 연애는 언제 하나? 스물 다섯이면 연애 경험도 있을 것 같은데, 확률적으로 본 당신의 연애 패턴은 어떤 편인가?

정경호
첫눈에 반한 후에 오래 만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헤어진다. 그래도 오래 만났기에 미운 정도 드는지, 예전에 만났던 몇몇 여자 친구와 지금은 친구처럼 만나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감정 다툼의 기억은 사라지고 둘 사이가 그냥 수많은 인간 관계 중 하나처럼 되더라.

V.G. 신기하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되나?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대체 뭐기에?

정경호
믿음.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다. 서로 간의 믿음이 깨지면 그땐 난리 나는 거지.

V.G. 사랑할 때 믿음을 중요시 여긴다는 사람들의 머릿속의 절반은 믿음, 나머지 절반은 그 믿음을 증명할 만한 의심으로 채워져 있다던데….

정경호
난 의심보다 집착에 가깝다. 하루 스케줄은 당연히 꿰고 있어야 하고, 휴대폰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런 집착은 자연스레 생기는 거 아닌가?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기본의 선도 참으로 모호하다. (V.G. 그녀를 믿는다면 집착은 말아야 하지 않나? 믿음과 집착이 공존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러니까 모호하다는 거 아닌가. 그래, 널 믿어, 하지만 휴대폰 좀 잠깐 보자,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거다. 내 여자 친구인 너는 안 그럴 거라는 믿음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래도 휴대폰은 봐야 한다(웃음).

V.G. 의외다. 이제껏 브라운관에 비친 이미지는 사랑에 속을 앓는 순정파에 가깝지 않았나?

정경호
사랑할 땐 지극히 현실적인 편이다. 순정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지 않나? 다정이 병인 것처럼 지고지순한 순정도 때론 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한동안 연애에 너무 담을 쌓아서 그 느낌도 가물가물하다. 요즘은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다.

V.G. 맘은 간절해도 곳곳에 열혈 네티즌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얼굴이 알려진 배우가 연애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경호
사랑할 때의 난 배우가 아닌 남자 정경호일 뿐이다. 그녀를 위한 것이라면 아무리 스케줄이 바쁜 와중에도 바보처럼 애를 쓰게 된다. 사람들 시선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자랑하고 싶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도 날 별로 못 알아보던데 뭘, 하하.

V.G. 그건 이제껏 쌓은 당신의 이미지가 신비주의가 아니라 편안한 친구 쪽에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당신이 갖고 있는, 혹은 보여주는 현재의 이미지에 만족하는 편인가?

정경호
이제껏 맡은 역할 대부분이 관객들에게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이긴 했다. 확실히 남다른 캐릭터 하나를 잘 소화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정경호 하면 그 역할로 각인되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옆집 오빠 같은 지금의 느낌이 더 맘에 든다. 시간이 지나면 선택의 폭이 좀더 넓어질 때가 올 거고 현실에 충실하며 그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그땐 착한 놈, 나쁜 놈 가리지 않고 다 해볼 거다. 언젠가는 연극과 뮤지컬 등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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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www.voguegir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