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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재미있는 역사

[펌] (현충일을 기리며) 진정한 한국 최고의 명문가

by 파란토마토 2012. 6. 6.

이 글을 어디에 쓰는 게 맞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역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역사 카테고리로 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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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맞이하여, 한국 최고의 명문가 - 우당 이회영 일가를 소개합니다.
조선 최고 부유층 집안의 넷째아들, 이회영.




선조시절 영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름난 집안의 자제였음



1910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 일어난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것임



병합이 발표된 직후,
갑자기 집과 땅을 포함한 전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하는 이회영 선생
그 후, 형제들을 불러 모인다




"제가 이렇게 형님들을 오시라고 한 이유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입니다.
이 곳을 떠나야겠습니다. 저는 만주로 가 이 나라를 되찾을 방도를 찾을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독립운동을 위해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했음을 알린다.
그러자...



둘째 이석영 : 나도...내 집을 내놓겠네
셋째 이철영 : 나도 내 땅을 내놓겠네


다른 다섯 형제들도 그를 따라 전재산을 처분한다.




그렇게 오로지 독립 운동에 쓰기 위해 여섯 형제가 모은 돈이 40만원 (현재가치 600억원)
급하게 처분해야했으므로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약 2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함.




만주로 가기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던 어느 날, 노비문서를 소각하는 이회영 선생
"이제 너희들은 자유의 몸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주로 갈 것이다.
내 너희들을 다시 만나는 날엔 꼭 이 나라를 되찾은 후일 것이다."





"어르신,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부디 이 비천한 것들이 큰일 하는 것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의 인덕을 알고있던 노비들은 자진해서 만주로 따나라섰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910년 12월, 이회영의 일가족 60여명은 만주로 떠난다.
병합 후, 일본 정부가 회유책의 일환으로 양반들의 지위와 재산을 인정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것을 버리고.





만주.
전재산을 독립 운동을 위해 쓸 것을 결심한 이회영 선생.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자 합니다.
청년들에게 조국의 역사부터 무술까지, 지덕체를 고루 가르칠 것입니다."




그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인 신흥 강습소를 세우고,




이후 신흥 강습소는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해 10년동안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한다.




신흥 무관 학교의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큰 공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고
1932년 마지막 결심을 한다.



"아들아, 너에게 힘든 삶을 살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는 다시 만주로 돌아간다. 다시 가서, 이 손으로 꼭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만주땅을 다시 밟지도 못하고 일본 헌병에게 체포
그것이 이 분의 마지막이셨다




1932년 65세의 나이로, 고문 끝에 숨을 거두신다...




이렇게 6형제 중 5분이 돌아가시고




이회영 선생의 바로 아래 동생 만이 살아 남아 조국의 해방을 보았다.
저 사진 속에서 울고 계신 분...




우당 이회영의 6형제는,
첫째 이건영(1853~1940), 둘째 이석영(1855~1934)
셋째 이철영(1863~1925), 넷째 이회영(1867~1932)
다섯째 이시영(1869~1953), 여섯째 이호영(1875~1933)
이시다.

이분들을 우리 잊지 맙시다.






 





세계적으로 형제 6명 모두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


전재산 600억(당시 40만원)을 순전히 독립운동하는데에만 바쳐,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
그러나 현실은 중국땅에서 객사하거나 행방불명

통일신라,고려,조선에서 최고의 벼슬을 한 집안 - 영의정 9명 배출, 오성과한음 주인공 이항복의 후손, 천년동안 양반인 집안.

일본이 조선 양반들에게 타협하는 대신 주는 귀족지위와 수십억의 돈을 거절한 집안 - 대부분 양반들 일제에 타협.

급하게 처분했어도 600~800억원(현재가치)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6형제가 모두 중국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 식솔60여명이 이동, 신분 해방된 노비들 일부도 주인들을 따라감.


*신흥무관학교 설립 , 공짜로 먹이고 가르쳐 수천명 독립군 배출 - 이밖에도 헤이그밀사 파견지원, 고종황제 중국망명계획등 독립활동.

이회영선생의 집에 시집온 명문가 규수들이 삯바느질과 고생을 많이해서 반지가 안들어갈 정도. - 육형제 모두 강냉이와 풀죽으로 연명

단군이래 가장 덕망있는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의 최후


첫째
[첫째 이건영, 이건영의 둘째아들 이규면은 신흥학교 졸업 뒤 머나먼 중국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

이건영의 셋째아들 이규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뒤 귀국, 국군 공군대위로 복무중 한국전쟁때 실종.]


둘째
[가장많은돈을 보탠 둘째 이석영은 중국빈민가를 80의나이에 떠돌다 굶어죽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은 김원봉의 의열단원으로 이해명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


셋째
[셋째 이철영은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


넷째
[모든계획에 중심에섰던 넷째 이회영은 일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독립활동하다 걸려 모진고문끝에 숨짐.

이회영의 둘째아들 이규학은 사촌 이규준과 함꼐 밀정 암살가담.
이회영의 셋째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고 광복뒤 석방.]


다섯째
[유일하게 살아남아 해방을 본 다섯째 이시영은 독립후 김구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초대부통령이 됨.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 학살사건등
이해할수없는 1인 천하 독재만행에 항거 부통령직 사임.]


막내
[막내 이호영은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3년 소식이 끊김.

이호영의아들 이규황,이규준도 함께 실종 (몰살당한걸로 추정)]


-이회영선생은 나라를 지키기위해 임시정부를 만들면 또 그안에서 분열된다 하여 임시정부를 참여 안하시는등 양반의 머리에서 이런 발상이 나온것자체가 엄청나게 진보적.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에 따르면 “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