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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퍼옴. 문제시 삭제 예정.
 


다음 카페 유혁진님의 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드디어 수양대군의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왕과 비'는 사실 전작(前作)인 '용의 눈물'의 후광에 힘입어 출발한 기획이었고, 지금까지의 시철률 역시 '용의 눈물'에게서 물려 받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딘지 전작에 비해 김 빠진 구성과 동어반복적이고, 재탕에 삼탕에 가까운 플롯의 배치로 시청자를 짜증나게 만든 부분으로 인해 전작 만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에서 그려지 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극히 일관되지 못해서 중간에 한두회를 보지 않은 시청자로서는 저 인물들이 왜 갑자기 저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금일(99. 1. 23.) 방영분의 경우 단종의 양위와 관련한 매우 급박한 상황전개가 이뤄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연출에 실패하고 있다.



그냥 저냥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보면 되는(?) 무력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몇가지 거슬리는 점이나 좀 언급해 보려고 한다.



1. 세종대왕은 정말로 수양대군을 왕재(王才)로 생각했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다루는 문예작품(영화와 방송을 포함하여)중 최근의 작품들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신봉승의 '설중매(雪中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가 이뤄진 그의 작품은 무명이던 연극배우 정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으며, 드라마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까지 이뤄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심도있게 파헤친 역작(力作)이었다.


때문에 후작들은 싫건 좋건 '설중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학술적 연구가 아닌 드라마나 영화화 될 경우에는 거의 그런 혐의를 피하기 힘들어 진다.



그런데, '왕과 비'는 방영 초반부터 '안티 설중매'의 노력을 곳곳에 드러내고 시작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을 심화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의 독단(獨斷)을 부각시키고, 종친들을 심하게 무력해 보이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국법을 조금만 유추해 보아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조선의 국법상 종친은 관직에 오를수 없다.


조선의 종친인 자로 고위관직에 오른 예는 이방원(태종: 제 1 차 왕자의 난 수습), 이화(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 : 태종의 외척 제거), 이유(세조 : 계유정난 수습), 이준(귀성군으로 세조의 조카, 영응대군의 아들 : 이시애의 난 진압) 뿐으로 이는 국초(國初)에 한한다.


때문에 종친은 관직에 오르는 길인 과거를 볼 필요가 없고(자격도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진사나 생원 같은 하위직을 받지도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호칭은 그의 군호(君號)를 부르거나 '나으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 대감이나 영감같은 고위직 관리의 존칭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대군과 군들에게 '대감'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무지(無知)의 소치인지, 작가의 의도적 시도인지, 아니면 필자의 무식인지 몰라도 적어도 '왕과 비' 이외의 작품에서 **대군'대감'이라는 호칭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사육신 사건(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서 성삼문 등이 세조를 그의 예전 호칭대로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불러서 세조를 진노케 한 그 유명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각설하고, 조선의 종친은 관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 없고, 종친으로서 왕실 의전과 종묘의 제사에 참석하는 등의 예우만을 받을 뿐이었으나, 세종대왕은 제위 말년에 이르러 세자(문종)를 비롯해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대군등을 국정의 곳곳에 침투시켜 실무를 맡게 한다. 이는 세종의 말년에 유례 없이 이뤄진 일로서 이는 태종으로부터 이어진 관료집단 불신의 가풍(家風)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세조의 왕재(王才)를 논하는 이들은 이때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많은 국정 업무에 참여하여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사실 소헌왕후 (세종의 정궁(正宮))의 소생들은 한두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그 정도 쯤은 되는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다만 세조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세종대왕의 브레인 집단이던 집현전 출입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 보면 태종때부터의 숙원사업이던 국방강화의 최우선 과제인 화포(火砲)의 개량 사업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이 총책임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실적에 대해 세종께서 크게 치하하며 평가한 육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의 세자 시절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문종이 워낙에 세종이 이양한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지 수양대군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아무리 성군 (聖君)이라 불리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군주라 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 말년에는 절대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내관이 화약제조담당업무의 총책임자가 되기도하고, 문종은 한 술 더 떠서 내관의 처우를 대폭 개선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시절이라 평가받 는 세종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대립이 없었을 뿐이고,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관료집단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김종서와 황보 인)의 경우는 세종시대에 순전히 자기 능력만(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마 태종시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태종조에 급제하기 때문이다.)으로 입신에 성공한 부류로서 세종-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조를 풍미한 훈구파와는 그 뿌리가 다르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족벌이나 문벌보다는 군왕에 대한 1:1의 충성심과 성리학의 철학으로 무장한 부류였다.


때문에 왕족의 국정개입이나, 내관의 발호같은 '상식이하'의 처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왜 이들이 어떤 식으로건 제거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세종시절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사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왕재로서 평가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를 왕재라고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 이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이 세자(문종)에게 향하고 있었음은 세종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얻기 위해 사대부 체면 다 버리고 몸을 날리기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뭐가 어찌 됐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의 국정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창조에 가까운 혁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그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
기 자신의 국정운영철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세자(문종)는 세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합격 정도가 아닌 자신의 또다는 버전업된 인격이었다. 세자책봉 불과 몇 개월만에 국왕이 된 세종은 세자의 지위에서 섭정을 담당하는 '수습'기간이 부족했던 것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했고, 문종이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무렵부터 각 분야별로 조선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드림팀'으로 하여금 세자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가 없는 분야 같은 경우 스스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떡잎을 아예 만들어 버렸다. 어린 세자는 이 같은 부왕의 처절한 학습을 정말 놀랍도록 잘 받아 들여 신료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조차 10살을 갓 넘긴 세자를 접견하고서 '하늘이 조선에 내린 홍복'이라 극찬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초인적인 왕업을 계승할 인물로서 세자와 수양대군이 비교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경우 스스로도 '14세때부터 기방출입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잡기(?)에 능했다. 사냥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고, 특히 활솜씨를 자랑했다.(이는 세자와의 왕위계승권 분쟁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의 카리스마를 계승하려 했던 제스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몸이 세자에 비해 무척 건장했다고 하며, 후일 등극해서 벌인 일련의 불사(佛事)에서 보듯이 불심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문의 경우에서는 세자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집현전에 출입하며 신숙주, 성삼문등과 함께 정인지 밑에서 수학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면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이런저런 낭설이 많이 있지만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결정적으로 태종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을 매우 심한 권력혐오증 환자로 그리고 있지만, 후일 보여준 그의 면모로 봤을 때, 그는 권력혐오증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왕인 태종과 닮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의 의향이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한 세자(양녕) 보다는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조선을 모든 분야에서 문명대국으로 성장시킬 왕재를 원했고, 그에 부합한 인물이 충녕대군(세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녕대군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부왕의 숙청 스타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발호하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자식의 경우가 예외 일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세종의 치세에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말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통이 계승해서 왕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자까지 했던 왕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왕권에 심각한 도전요소가 된다.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양년대군은 파락호의 길을 선택하므로서 광인(狂人)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어필했고, 효령대군은 동방유학의 나라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님처럼 전국 심산유곡의 사찰만을 배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만일 그 둘중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세력을 모으는 기미를 보였다면, 지체 없이 태종의 손에 살해 되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세종 말년에 세자(문종)의 병약함을 보면서 양녕대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년의 세종은 종친을 중용하는등 왕실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국왕이 문종이라는 전제에서 벌린 일이다. 세종이 덕이 중후한 인군(仁君)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태종의 아들이고 권력을 어찌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사후 이후의 권력구도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명민한 두뇌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붕어(崩御)직전 가장 강직한 왕당파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의정부에 배치하고 행정권은 황보인에게, 군권은 김종서에게 장악시킨 것이다. 심지어 문종의 단명을 예견하고서 세손(단종)의 치세까지를 염두에 둔 고명을 남긴다.


세종은 절대 수양대군이 보위를 이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태종 - 양녕대군 - 수양대군은 어디까지나 난세(亂世)의 인물로 세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난세에 필요하지, 태평성대에는 사회불안세력일 뿐이다.


어쩌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수양대군측의 주장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자신을 위해 죽이려 했던 것처럼 수양대군이 발호할 기미를 보이면, 군권을 장악한 '충성의 화신' 김종서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밀명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양대군도 그쯤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세에 기방은 공연히 간 것이 아니다.



2. 수양대군은 문종조와 단종 즉위초에 왕위에 뜻이 없었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왕자란 무엇인가? 그것도 정궁(적실이라는 말은 여염의 용어로 왕실에 오면 정궁(正宮)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소생의 왕자란 후일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 그 호칭에서부터 즉위에의 욕망을 내포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는데,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다면, 즉위의 꿈을 단념하고 권력에 대한 불안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홍보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수양대군은 세조 제위시가 아닌 태종 제위시에 태어났다. 형인 문종과는 3살 터울로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형인 문종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어 있었다. 철나기 전부터 처세를 생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를 내내 형의 그늘 밑에서 지내야 했다.


형과 아우가 비교가 되는 상황조차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형인 문종은 불과 7살의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고서 무려 29년을 세자로 생활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때문에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어설프게 가졌을 때쯤에는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부왕과 세자가 동시에 신병을 앓는 일이 아주 흔했다. 이때쯤의 국정은 거의 세종과 세자(문종)중에서 약간이라도 덜 아픈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부왕이나 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왕이 조만간 붕어하고, 세자가 후사 없이 세상을 버린다면, 그 다음의 보위는 당연하게 후보 순위 1번인 수양대군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은 세종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석보상절도 편찬에 관여하고, 규표를 바로잡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도 몇 번 씩 오른 것이다. 늙고 병든 국왕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자, 신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때 '너희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라.'는 시위로 태조의 카리스마를 등에 엎기 위해 활솜씨를 자랑하고 다니고 건장한 체구를 과시하며, 자신의 강건한 육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냥만 나갔다 하면, 왕자 체면에 팔뚝을 드러내길 즐겼던 것이다.


아마 그런 수양대군을 보며, 다른 경쟁자 안평대군은 냉소를 지으며 난을 치고 시문을 읊조렸을 것이다. 부왕이라면 차라리 동(動)적인 수양대군보다는 정(靜)적이고 문예에 능해 문예 진흥의 가능성이 매우 큰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두 사람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이 태어난다. 그리고 5년 뒤 5살이 되자마자 세종은 그를 세손으로 책봉해, 자신의 후계구도가 확보부동하게 세자에게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세손이 그 보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장기 구상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집에서 난이나 치고 시인묵객이나 상대한 안평대군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서 한발만 더 나가서 풍류객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냥다니며 곳곳에서 자신의 왕재를 드러낸 수양대군은 그게 힘들다. 양녕대군처럼 미친척을 할 수도 없고, 안평대군처럼 시인묵객을 만날 수도 없다. 그때 사냥은 요즘처럼 몇몇이 고즈넉히 4WD 자동차에 총이나 하나씩 들고 떠나는 게 아니다.


몰이꾼에 같이 사냥할 장사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행하는, 약간만 변형하면 군사훈련의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는 행위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예법에는 수렵의라 하여 왕이 사냥하는 의식이 있다. 말이 사냥
이지 그것이 군사훈련과 동원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인 것을 동방유학의 나라 신료가 모를 리가 없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제거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으로서도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야 어쩔수 없이 수양대군을 선택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원손이 태어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강보에 쌓인 원손을 안고 다니며 정사를 펴고 기회 있을때마다 신료들에게 원손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후계구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제스쳐였던 것이다.


세자의 후사가 없었을 때는 수양대군의 발호를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겠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마 이때쯤 김종서에게 유사시 수양대군 제거의 밀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수양대군이 살 길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형인 세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왕과 비' 초반에 수양대군이 등장만 하면 나왔던 대사인 '형님이신 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주상전하를 보위한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이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수양대군의 비극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원손이 태어난 후로도 세종대왕께서 생각보다 장수하신 것이다. 세종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세자시절의 건강상태에서 국왕이 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면, 문종은 1년 이내에 붕어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무리 세자이어도 10살도 안되는 나이로 국왕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지지만,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알 것 아는 나이인 12살(앞서 수양대군이 14살에 기방에 출입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12살 정도면 나름대로 성숙한 청소년시기가 된다.)에 당당히 즉위한다.


단종의 모후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긴 하지만, 그때까지의 단종의 옥체는 수양대군파에서 보기엔 후일 장성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잔병치레 없이 강건했다. 누가 봐도 단종 즉위 초에 그는 장수(長壽)가 예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 역시 10대 초반의 몇몇 정사처리를 두고 신료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부활이
다.'라고 이야기 될 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서 만큼은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3. 계유정난의 명분은 정당한가.


새로 시작된 단종의 치세. 역대 어느 왕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새 임금이 즉위하면, 정권에 위협요소로 작용할 세력을 숙청한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종과 약간이나마 친분이 있던 모든 관원을 모조리 거세했고, 문종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다.


세종 조에만 예외라고 생각되지만, 세종조에는 태종이 알아서 다 해줬다. 세조 즉위초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니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의 아들 예종은 남이의 옥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마저도 세조와 예종의 총애를 받은 친적이며, 세조때 이시애의난을 진압한 공신이며 종친인 귀성군 준을 거세한다. 당연히 숙창당한 남이와 귀성군 준은 군공이 매우 높으며 실력과 학문을 겸비한 인제로 세조가 무척이나 총애한 인물이다.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림직 하다.


단종 즉위초, 왕권에 가장 강력한 위협요소는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왕당파 김종서로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단종의 장성시까지 수양대군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선에서 세종조의 무혈통치를 완성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수양대군파가 말하는 황표정치로 인한 훈구대신의 국정독단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훈구파가 아니었다는 전술의 내용으로 설득력을 잃고, 황표정치는 주로 인사문제에서만 사용된 것인데, 즉위초 단종이 관원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나 단종이 재빨리 관원의 이름을 숙지한 이루 폐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훈구파는 세조 즉위시 그를 지지한 세력이다. 권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권근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서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초 드러내 놓고 집안자랑을 해도 무방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수양대군의 측근중의 측근들이 오히려 훈구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오히려 세종조에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왕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과 충성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에 눌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 즉위 이후 이뤄진 숙청에서 거세당한 훈구파는 한 명도 없는 반면, 집현전을 위시한 신진사대부가 남김 없이 숙청 당한 사실은 훈구대신의 국정 전단이라는 수양대군파의 명분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신진사대부가 육성되고 성장하던 집현전을 '사육신의 난' 이라는 일련의 숙청이벤트 이후 그 뿌리를 뽑아 버린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단종이 너무 어려 국정을 맡길수 없었다?


지금의 센스로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상술한 조선시대청소년의 성숙도(?)를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나이로 코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하는 어린 아이가 당당히 세자와 세손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다.


약간의 억지일수도 있지만, 어린 단종의 눈에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종대왕이 강보에
싸 안고 다니며 이런저런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버지인 문종 또한 세자 생활만 29년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이가 어려도 집안의 분위기를 가지고 자랄 수밖에 없다.


단종실록을 마구 난도질한 세조시대의 사관들 조차도 단종의 당당한 왕재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주청에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측면이 있을때는 불윤(不允)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소' 라며 버티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단종(12세 즉위)과 비슷한 연배에 즉위한 자산군 헐(성종 : 13세 즉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왕위를 물렸어야 한다. 수양대군파의 논리로 본다면 왕재로서 가장 강력한 왕권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귀성군 준이다.


그러나 귀성군은 거세당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고, 성종은 세조의 훈구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훈구대신의 국정전단'의 체제에서 훌륭히 성장해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참 묘한 역사의 순환이다.


강한 군주 다음에 단명한 군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린 왕이 등극하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와 내통해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어
쩌면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허나 세조와 그 자신의 공신들이 이후에 벌린 일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속빈 강정같은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로 세조와 그 공신들은 세조 치세 내내 올미부(나중에 후금(:청나라) 를 새운 누르하지가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을 토벌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자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며, 오히려 성종시대에는 정도전이 야심차게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무원칙하게 훈구대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버림으로서 조선 사회를 매우 경직된 귀족적 사대부들과 그들의 좌장인 국왕이 지배하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고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로 퇴락 시키고 만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이 글의 시발이 된 '왕과 비'라는 드라마가 너무 세조 측의 입장에서 은근히 그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한 것에 분개(?)하여 이런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왕들의 뒤를 이은 국왕이라면 세조도 무리 없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작인 용의 눈물이 철저하게 쿠데타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반면, '왕과 비'는 전작의 이러한 인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체 중심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히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혹은 그러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한) 세조와 희대의 풍운아이며 마키아벨리즘(혹은 관중(管仲)의 신봉자 한명회, 개국공신의 후예로 세종조에 고려사의 개수로 세종으로부터 고신을 박탈 당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새우려 했던 권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현실적 정치이념을 가진 신숙주등 수세에 몰린 훈구파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권력쟁탈의 양상을 그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재미와 농도를 갖춘 수준 높은 역사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어설피 전작의 화두였던 '왕권주의 (대통령중심제)와 신권주의(내각책임제)'의 대립을 이어가는 것은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된 '왕과 비'의 갈등 양상은 훈구파와 신흥사대부의 갈등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세조의 왕위찬탈을 '구국의 결단' 인양 묘사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구국의 결단으로 보위에 힘으로 올라선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상 아무도 없다. 차라리 한 인간의 처철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농도 짖게 표현하는 편이 인기 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써놓고 나니 이걸 왜 썼나 싶네


1999. 1. 24.

유 혁 진




.이 분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박식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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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인 공주의 남자가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이 드라마는 수양대군이 문종 사후에 계유정란을 일으켜서 충신들을 다 몰살한 후에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에 오르는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종서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나누는 수양대군의 딸이 주인공이니까 아무래도 수양대군이 가해자로, 그에 따라 김승유(김종서의 막내 아들 - 역사적으로는 손자라고 함.)가 피해자로 나올 가능성이 크겠죠?




어릴 때 읽었던 맹꽁이 서당 등의 만화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신기한데요.. 그럼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공주의 남자에서는 궁궐에서 먼저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두 주인공 김승유와 세령은 금계필담이라는 야사집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수양대군(세조)의 첫째 딸인 세희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아버지에게 반대의견을 강력히 피력하다 미움을 받습니다. 이에 수양대군의 아내인 정희왕후가 유모와 함께 세희를 피난시켰습니다. 시골로 도망을 가던 중 한 총각의 도움을 받게되고 결국 세희와 이 총각은 사랑을 나누며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서로의 숨겨놨던 인생을 털어놓다 깜짝 놀랍니다. 세희가 수양대군의 딸이고 이 남성은 할아버지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할 당시 천신만고 끝에 도망, 시골에 숨어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의 집안의 자녀가 결혼을 하게된 것이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털어버리고 사랑을 키워나갔으며 수양대군이 이들을 찾으려하자 굴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지냈다는 설화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정사에는 기록된 바 없습니다. 수많은 설화와 민담이 담긴 금계필담 속 이야기로 존재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세희공주나 김종서의 손자 역시 실존 인물인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정사엔 세희공주나 김종서의 손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가 김종서에게 멸문지화에 가까운 벌을 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김종서의 직계 후손들이 쉽게 살아남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8권에 따르면 김종서 등 계유정난에 관계된 자들의 아비와 자식으로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영원히 변군 관노에 붙이고 나이 15세 이하인자 모녀 처첩 조손 형제 자매 처첩은 영구히 외방관노에 붙였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대신들이나 절에 나눠주었습니다.

(이 명단을 보면 수양대군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 반대파 세력을 핍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종실록 9권엔 따르면 이들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종서 등의 친자로서 나이 16세 이상은 교형에 처하고 15세 이하는 어미를 따라 자라게 해 성년이 된 후 관노로 영속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사실상 16세 이상의 자식은 죽임을 당했고 어린 아이도 노비로 전락한 셈이요. 이 뿐 아니다. 집안의 여성은 모두 노비로 삼아 대신들의 집에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난 부분은 세조 말년인데요, 금계필담 속 에피소드에 따르면 말년이 된 세조(수양대군)은 우연히 세희공주를 만난 후 과거를 후회하며 세희공주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물론 세희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이를 피해 굴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는 것이 결말이지만 세조의 태도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사도 비슷합니다. 세조는 말년 김종서 등 계유정난 적신들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34권에 따르면 김종서 등의 숙질을 편한 곳에 거주하도록 했고, 또한 고신(告身)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조실록 47권엔 아예 계유정난에 관련된 자들의 친인척을 모두 방면토록 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실록에 따르면 계유년 이래 난신의 숙질과 자매의 연좌자 무릇 2백여 인을 의논해 방면했습니다.


물론 정사 속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의 사랑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실존인물인지도 의아한 부분이 많구요. 왕이 화장실에 가는 소소한 일상까지 모두 적어놓은 조선왕조실록이 공주의 실존을 적지 않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왕이 조선왕조실록을 보는 것 조차 금기시되고 불가능했던 당시 현실을 봤을 때 왕의 명령으로 공주의 존재가 지워졌을 가능성도 없다고 크지는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조가 말년에 계유정난에 관련된 자들을 보다듬는 행태를 보인 것이 민담 설화화 된 것일 가능성도 큽니다.

(해피엔딩, 권선징악을 바라는 백성들의 바램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까요?)




비극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주의 남자 포스터

비극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주의 남자 포스터


정사와 야사를 잘 버무린 재미있는 드라마가 모처럼 나오는 것일까요? 사극을 좋아하는 저같은 사람을 위해서 아무쪼록 이 드라마가 너무 사랑놀음에 빠지지 않고 재미있게 잘 흘러 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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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9 - 시조 소개 - 불사이군의 충절을 노래한 시조 세 편. (수양산 바라보며~, 이 몸이 주거가서~, 이 몸이 죽고 죽어~)
2011/03/14 - 재미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야사 일부..
2008/03/11 -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리는 다리
2008/01/27 - 대왕세종 VS 용의 눈물, 실록과의 비교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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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 이야기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
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단종이 정순왕후와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는 데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두 사람의 슬픈 모습을 지켜 본 사람들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라고 말한 것이 현재의 영도교의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리게 되었다.


단종과 정순왕후 - 왕과 비에서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재위 2년만에 병사하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이다. 단종은 천재군주 세종대왕과 그 뒤를 이은 문종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매우 영특하여 세종과 문종의 기대와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보호해 줄 그 어떤 세력도 없이 왕위에 오른 그는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도 잃은 단종이 그 때 의지할 곳은 자신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 밖에 없었을 텐데..  그마저 함께 하지 못하도록 떼어놓은 걸 보면 세조의 잔인함이 어디까지인가 싶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영월로 유배된 후 불과 넉 달 만에 죽음으로써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단종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비운의 소녀왕비의 곡소리는 온 마을 여인네들의 가슴을 후벼파서 산 아래 온 마을 여인들도 일제히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끼니도 잇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송비를 동네 아낙네들은 불쌍히 여겼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에게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시.

원통한 새가되어 궁궐에서 나오니
짝잃은 외로운 몸이 깊은 산중에 있구나
밤마다 잠들려도 그럴 겨럴이 없으니
수없이 해가가도 끝남없는 이 한이여
새소리 멎은 새벽  뫼엔 조각달만 밝은데
피눈물 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하늘도 귀가 먹어 슬픈 사연 못 듣는데
수심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게 듣는고



정순왕후 송씨의 능호인 사릉(思陵)은 동망봉 산봉우리에서 통곡하며, 죽을 때까지 지아비인 단종을 그리워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01








뱀꼬리: 편의상 본문에서는 평어체를 썼습니다. 영도교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슬픈 사연이 있는 다리였네요. 특히 단종이 죽고도 질긴 생명을 몇 십년이나 이어간 정순왕후가 끝끝내 세조의 도움을 거부했다는 것과 소녀왕비의 울음소리에 온 마을 아낙네들이 같이 울었다는 것도 참 감동적입니다. 80 평생 단종을 그리워한 부인이니 남편을 죽인 세조의 도움이 반가울리 없었겠지요. 지아비를 죽인 세조의 도움을 받을 여인이었다면 평생 그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부모도 부인도 다 잃고 감옥 속에서 짧은 생을 외로이 살다 간 단종,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망향탑을 쌓는 단종의 사연은 정말 많은 백성들을 울릴 만큼 충분히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이 글을 적게 독려해주신 천년목님께 감사드립니다. 천년목님: 여러가지 자료를 다 끼워넣다보니 결론이 없는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이해해 주실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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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연산군에 정태우... 정태우는 또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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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우는 왜 매번 비극의 주인공 역할만 맡을까요?


정태우가 왕과 나의 성인 연산군으로 등장한다는 소식은 그간 신문, 뉴스, 인터넷(저 포함)에서 하도 떠들어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드라마 왕과 나 비판을 많이 했지만 정태우가 나온다니 벌써부터 두근두근거리네요~ 으흐흐~~

니들 이제 다 죽었다고 말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연산군 눈빛..


정태우는 '사극하고 싶지 않다, 슬픈 왕 역할은 정말 다시는 하기 싫다'고 합니다. 하긴... 그는 사극이 싫을 만도 합니다. 그동안 맡은 역할 중에 행복한 역할이 없었거든요.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매번 요절하는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만 맡았으니 얼마나 싫었겠습니까? 이민우는 한명회에서 연산군, 용의 눈물에서 양녕대군을 맡아 광인(狂人) 역할이라도 해봤으니 그나마 좀 나았습니다. 싸이코 연기는 배우들이 누구나 한 번 해보고 싶어하는 역할이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태우는 매~~번 죽거나 쫓겨나는 역할이네요. 그것도 이순신처럼 비장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삼촌한테 쫓겨나서 죽는 노산군(=단종) 역.. 흑.ㅠ


그가 맡은 역할들을 한 번 볼까요?

* 출연작(시대순)

1) 대조영 - 발해 - 검이 역, 2007
2) 태조 왕건 - 통일신라~고려 - 최응 역, 2000
3)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4)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5)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 단종, 1984 (댓글 지적받고 수정)
6) 한명회 - 단종 - 단종 역, 1994
7)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9) 왕의 여자 - 광해군 - 페세자 질 역, 2003


이중 대부분이 비극적인 왕이나 왕자 역할이었습니다.

태조 왕건 - 통일신라 ~고려 - 최응 역, 2000


무인시대 - 고려 무신집권기 - 21대 왕 희종 역, 2003


용의 눈물 - 조선 태조 - 이방번, 1996


단종(이렇게 어릴 때 쫓겨나진 않았는데; 너무 깜찍하군요ㅋ)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 편, 한명회 - 단종 역, 1994
위의 사진은 조선왕조오백년 설중매 캡쳐인지 한명회 캡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굴이 아기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좀 더 어릴 때인 설중매일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댓글 지적받고 수정했습니다. 드라마 한명회에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왕과 비 - 단종 - 단종 역, 1998


여인천하 - 중종~명종 - 인종 역, 2001


왕의 여자 - 광해군의 아들 페세자 질 역, 2003


정태우도 참 잘생긴 배우인데 요즘 사람들 취향이 아니라서 큰 스타가 안된 것이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의 인물은 사극에서 두드러지는데요, 연기력도 타 젊은 배우들과는 천양지차라서 단연 눈에 띕니다. 이 계열의 배우들에는 정태우, 이민우, 안재모 등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사극 이미지로 굳어질까봐 사극은 더이상 하기 싫다고 하지만 솔직히 사극에 너무 잘 어울리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사극에는 젊은 피가 필요합니다. 제발 사극에서 활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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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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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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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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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폐비는 폐비 윤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문에 한꺼번에 폐출당한 고모와 조카: 폐비 신씨, 단경왕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이긴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쫓겨난 중전은 몇 명 더 있었습니다. 

먼저 미친 남편 연산군과 혼인하는 바람에 조용히 살다가 날벼락 맞은 연산군의 부인,
폐비 신씨(廢妃 愼氏, 거창군 부인. 1472년~1537년)는 연산군의 정비(正妃)로 신승선과 임영대군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거창.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의 고모입니다.

연산군과 폐비 신씨(거창군 부인)


단경왕후의
아버지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으로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할아버지는 당대의 명신이었던 거창부원군 신승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기도 했으며 고모는 바로 연산군의 비(妃)로 그녀의 친정 거창 신씨 가문은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문 배경이 그녀의 인생 전반에 걸쳐 막대한 불행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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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자기가 폐비 윤씨(제헌왕후)와 연산군에게 한 짓이 무서웠는지 아니면 손자 융(연산군)의 광기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기 때문인지 몰라서 신수근의 딸을 진성대군(훗날 중종)의 처로 삼아줍니다. 그녀가 바로 단경왕후입니다. 연산군이 처가하고는 잘 지냈으므로 설마 자기 부인의 조카를 과부로 만들지는 않으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연산군이 완전 싸이코에 가까웠음에도 자신의 가까운 사람과는 살갑게 잘 지냈다는 이런 기록들을 보면 그의 광기는 인수대비한테서 키워진 건 분명한 듯 합니다. 그의 행실을 보면 성군감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적어도 폭군은 안됐을 것 같거든요.

어쨋든 인수대비의 전략은 적절했고, 진성대군은 갑자사화의 피바람 속에서도 목숨을 건집니다. 근데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중종 반정을 도모하는 패거리들에게 '왕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영특하므로 세자를 믿어보자'고 하며 반정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처가와는 잘 지냈던 연산군에 대한 의리때문일수도 있고, 임금의 처남이 되든, 새 임금(중종)의 장인이 되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히 실패할지도 모르는 역적 모의을 일으켜서 자기 집안을 다치게 하기 싫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 다일수도 있습니다.


그의 바램과는 달리 중종 반정은 성공했고, 아버지
신수근의 선택으로 그 불똥은 엉뚱하게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에게 떨어집니다. 신수근이 참 불쌍하죠? 만약 찬성했으면 현재 중전인 자기 여동생은 쫓겨나더라도 자기 딸과 집안은 살렸을텐데... 연산군이 쫓겨나는 바람에 여동생도 폐비돼, 자기 집안도 망해, 딸도 반정 성공으로 국모의 자리에 오른지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서인이 되니 말입니다. 반대로 반정공신들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하여 왕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았거든요.

반정공신들도 웃긴 넘들이죠. 만약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가 아니었더라면 진성대군은 아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단경왕후 쫓아내려고 시위대 결성해서 단식투쟁하고(^^;) 난리를 떨었거든요.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겠죠. 뭐. 친정에 멸문지화를 입었으니 단경왕후가 칼갈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불과 몇 년 전에 연산군의 복수로 신언패(牌: 말조심 목걸이)까지 목에 찬 경험이 있으니 복수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이 떨렸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녀는 폐위된 후 중종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공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복위되지 못하고 71세의 나이로 한많은 인생을 쓸쓸히 마칩니다.

단경왕후가 중종에게 보여줄 붉은 치마를 걸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치마바위


중종은 높은 산에 올라 그녀가 거처하고 있던 사가를 바라보는 일이 많았고,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사가에서도 중종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자주 입던 붉은 치마를 펼쳐놓았다는 야사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중종의 임종 직전에 신씨를 궁궐 내에 들였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려는 생각이 없었으며,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중종실록 등에는 그녀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위의 야사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군요. 저도 솔직히 그 뒤 중종의 행동으로 보아서 반년도 안되어서 잊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쿨럭~;

결과적으로는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폐비 윤씨, 연산군의 아내인 폐비 신씨(신수근의 누이), 진성대군(중종)의 아내인 단경왕후 폐비 신씨(신수근의 딸)까지 연산군 주위의 여자 3명이 폐비 당했으니.. 연산군 근처에는 얼씬도 말아야겠습니다.ㅋ

도봉산 자락의 연산군묘. 강화도 교동에서 숨을 거둔 연산은 7년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 왼쪽이 연산군이고 오른쪽이 거창부원군 신씨 묘다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이정근 기자 
연산은 폭군이었나? 왕권주의자였나?


시삼촌한테 쫓겨나서 폐비된 단종(=노산군)비 정순왕후, 광해군비 혜장왕후도 있습니다. 그 외에 장희빈도 중궁의 자리에 있다가 쫓겨났지만 궐 밖이 아니라 후궁의 지위에서 사사당했고, 인현왕후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폐비 계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단종(정태우)과 함께 폐위 당한 단종비 정순왕후(김민정)



구혜선이 빠진 왕과 나에 정태우가 연산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극 전문이라 불릴 만큼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서 기대가 되네요. 왕과 비에서 단종 역을 맡았는데 정태우는 어찌 늘 쫓겨나는 역할만 맡게 되네요. 그래도 단종역을 세 번이나 맡았다는데 (한명회, 왕과비, 설중매) 이번에 또 폐위당하는 역입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성질이나 마음껏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요.ㅋ


임금께 사사당하고 아들까지 쫓겨난 폐비 윤씨(제헌왕후), 폭군 남편 덕분에 복위도 되지 못한 거창군부인 폐비 신씨,  남편이 왕이 된 대가로 쫓겨난 또 다른 폐비 신씨(단경왕후)....  남편 잘못 만나서 왕족에서 역적이 되어버린 그녀들이 참 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경왕후 능


쓸쓸히 저 세상으로 떠나갔을 그녀들이 편하게 쉬길 바라며 그녀들의 묘에 술 한 잔 바치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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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은 기사 중 일부. 출처는 링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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