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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미상이긴 한데 여하간에 괜찮은 글 있어서 그대로 옮긴다.
이 분 너무 너무 대단하시다.. 어떻게 이런 학식과 지식과 글솜씨까지...
혹시 문제되면 삭제 예정. 원글자 나타나면 알려주시길.


무엇보다 조선은 무력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동시대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조선의 지배계급은 사적인 무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국가를 운용 유지하기 위해 군사적인 긴장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해결하고자 군사력을 동원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전쟁을 이유로 민중을 억압하거나 탄압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비교대상으로 언급하는 일본과 비교해보면 그 독특함과 뛰어남이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물론 조선의 양반들에게도 부정적인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부분들은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도 똑같이 안고 있던 문제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의 사무라이나 유럽의 귀족에 비하면 우리나라 양반은 차라리 나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민중을 지배함에 있어 무력을 동원한 압제를 선택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민중에 비해 우월한 지성과 도덕성을 그 지배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이와 비슷한 성격의 지배계급이 나타난 것이 17세기 이후 시민계급의 등장부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양반은 그보다 2세기 이상 앞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양반이라 함은 신분이라기보다는 계급에 가까웠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자체가 어느정도의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그를 관철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교육수준이라는 점에서 근대 유럽의 시민계급과 그 성격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 양민들도 과거를 통해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려 있었다. 원래 노비였다가 면천하여 양인이 된 사람이 과거를 보아 양반이 된다거나 하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이 또한 조선의 한 장점이다.


(내 이야기 추가. 조선 초기의 유명한 훈구파로 알려진 이극돈의 무려 적자는 잡과에 응시해서 그쪽으로 합격하기도 했지. 이건 내가 수능에서만 본 예시이고. 그거 외에도 꽤나 많은 사례가 있었어.)



조선의 놀라운 점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동시대 어떠한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던 그 높은 교육수준이다.

조선의 건국 자체가 신진사대부에 의한 유교적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조선의 지배계급은 조선의 민중의 교육에 대해 매우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들이 읽고 쓸 수 있는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한 교육서인 동몽선습, 명심보감, 삼강행실도 등을 간행 편찬함으로써 유교적 이상국가에 맞는 백성으로서 조선의 민중을 길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이 예학에 빠져 신분질서를 고착화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당이 전국에 보급됨에 따라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의 민중 상당수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교육을 통해 유교적 소양을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유교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중국이나 이웃의 일본과는 달리 민중의 생활 깊숙이까지 유교적 가치가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던 이같은 일련의 교육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진보적 관점에서 봤을 때 조선은 거의 이상적인 실험국가에 가깝다. 시대적 한계가 뒤따르기는 했지만 일단 신분제도를 혁파했고, 군사력이 아닌 지성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한 문민통제로서 국가를 운영했으며, 이익보다는 옳은 가치를 추구하여 그 옳음을 밝히고 실천하고자 고민하고 논쟁했다. 이미 민중에 대한 교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주의 국가였으며 국가최고권력자인 왕조차 스스로를 계몽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여러가지 양반사회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다른 체제와 비교했을 때 가히 가장 진보적인 체제였다고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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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마냥 닫혀있는 국가는 아니었어.

일본과의 교역은 왜관만 가지고 하는데도 현종시기 연간 은 5천근에 달하는 통화가 오갔고, 이 양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 중국과의 교역은 것보다도 컸고. 적어도 조선 후기만 놓고보면 조선이 마냥 닫힌 국가는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어.



군사적으로도 조선의 군사가 임진왜란 때 무조건 쫓겨다닌것은 절대 아니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공통점은 적군이 파죽지세로 수도만 노려서 왕을 잡는 작전이었다는 것에 있었는데, 병자호란의 경우엔 백마산성같은 주요 요충지까지 재끼고 그냥 수도까지 무작정 달렸던 기동성을 바탕으로 승리하지만 (더구나 당시 청은 명군의 홍이포까지 가지고 있던 상황이니 공성전에선 무척 유리했지) 반면 임진왜란 때는 그게 실패하여 한양, 평양 까지 털리지만 후방에서 의병들과 지방 군사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는 거고. 결국 평양성을 빼앗긴 이후의 일본군은 더이상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 일본군에 대한 방어전략이 과거 왜적들에 대한 전략과 같았던게 패인의 원인이긴 했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조선군은 순발력있게 적응했어.

병자호란때는 조금 이야기가 다른데, 성위주의 방어 체계를 수도에서 막는 체계도 대비하는 법을 연구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이 쫓겨난게 문제가 됐지. 인조 때는 임진왜란 처럼, 대몽항쟁처럼 하면 별일 없다라는 생각이 박혀있었걸랑. 근데 광해군의 걱정처럼 청군은 그냥 닥치고 왕만 잡자는게 돼었지. 고로 인조가 무능했던 거지 조선이 무능한건 아니었어. (게다가 그 시기 너무 급하게 활에서 총 위주로 병력을 바꾼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 더구나 효종대로 넘어가면 이런 경험에 따라 군사력을 증강하게 되었고 이것은 정조때까지 이어졌어.

그리고 조선 궁궐 작다고 까는 넘들도 있는데, 조선 궁궐은 자금성 담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궁궐이고, 더구나 영토나 인구의 차이를 고려하면 조선 궁궐이 훨씬 큰 셈이야. 봉건사회의 후진성. 우리는 왜 일본/유럽만 못하냐 그러는데 일본은 러일전쟁, 한일합방 이전(아니 그리고 그 직후도 제법)만 해도 국가 재정이 상당부분 영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고. 사실 러일전쟁에서 가까스로 이기지 않았으면 국가 재정이 파산날 지경에 처했었어.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단 소식이 온 전 날에는 내각 총사퇴와 그에 따른 여당과 야당의 전면적 갈등이 예고되어있기도 했고(원정에 의해 쉽게 봉합되었지만). 일본은 2차대전 이전만 해도 많은 부분 세금을 쌀로 걷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고. 물론 조선이 망한건 고종이나 명성황후같은 지도자들의 무능도 원인이니까 무조건 옹호만 할 순 없지만. 조선이 니네들 이야기처럼 만만하게만 볼 나라는 절대 아니란 거야.

여하간에 긴글 읽어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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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정치가였으나 실패한 아버지였던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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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英祖) [1694 ~ 1776] [1724.08 ~ 1776.03] 조선 제 21대 왕

前 연잉군, 後 왕세제
휘 : 금(昑)
자 : 광숙(光叔)
태어난 곳 : 1694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
승하한 곳 :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  
아버지 : 숙종(肅宗, 조선 제 19대 왕) [1661 ~ 1720]
어머니 :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정치이념

극단으로 치닫던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조정을 안정


◎업적

1740년 :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우는 등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실시함
1743년 : [수교집록]을 속편함 ,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함
1745년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함
1746년 : [자성편]을 지음
1748년 :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를 편찬함
1749년 : [정훈]을 지음
1751년 : 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하기도 함
1755년 : [대훈]을 지음
1762년 : [경세문답]을 지음
1764년 : [경세편], [표의록]을 지음   
1765년 : [백행록]을 짓는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할 저술을 많이 남김
1770년 : 세종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함
              또한 양도,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을 재서 보고하게 함
1771년 :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를 건립함
1773년 : 개천의 양변에 돌을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함
1773년 :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함
1774년 : 노비 신공 전면 혁파




◎다른 군주와 달랐던 영조만의 업적

국왕이 되기까지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영조는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고, 성균관 탕평비문에 그 뜻을 새겨 넣었다.

" 편당을 만들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만드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것은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던 영조가 노론에 진 부채를 갚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이후 영조는 소론과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면서 탕평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확대에 주력하였다.

탕평책으로 왕권을 강화한 영조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고, 경제를 개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해동지도], [속오례의], [속대전],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책들은 모두 영조대에 편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고, 어머니가 천민일 경우에만 노비가 되게 하는 종모법을 실시하여 많은 노비들을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는 많은 어제(국왕의 저술)와 어필(국왕의 글씨) 작품을 남겼고, [대학]의 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경연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대 성왕들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스승으로서의 군주)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또한 왕세제로 책봉되던 28세부터 승하할때인 83세까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이런 군주는 세종, 영조,정조가 유일하다. 이러한 영조의 학구열이 손자에게 이어져 마침내 군사를 실현한 국왕 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가르치기 위해 별도의 교재를 만들기도 했는데, 만년에 만든 [어제조훈]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고 1756년 세손이 5살 때 서지수,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했다. 이는 왕손에게 별도의 사부를 두지 않던 관례를 바꾼 것으로, 영조가 정조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또한 서민적인 것을 좋아하는 검소한 군주였다. 정순왕후와의 결혼도 정성왕후 때의 사치를 근절하고자 역대 군왕 중 가장 간소하게 치뤄졌고 영조 초기까지 이어져 오던 귀빈들이나 왕실 여인들이 머리에 쓴 가채를 1756년부터 금지하였다. 무거운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의 이유는 사치를 막고자 함이었다.




◎영조가 실패한 것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즉위 초 영조는 소론이 퍼뜨린 경종독살설과 이인좌의 난을 겪는 등 많은 난관에 부딪쳤으나, 다행히 지속적으로 탕평책을 유지하여 당쟁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영조가 70세를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당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25세 때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본 효장세자(後 진종)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무려 7년간 후사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조의 나이 42세 때인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에게서 드디어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고, 그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열다섯살의 사도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틈만나면 노론세력들과 충돌했던 세자는 결국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 갖혀 죽게 된다.

결국, 영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탕평책은 사도세자사건을 계기로 1762년부터 영조 말년까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것은 영조가 인조처럼 후손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인뒤 세손 석철, 석린, 석견 등 손자들까지도 제주도로 유배시켜 죽였으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에 뉘우치고 세손에게 정성을 다하여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있던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을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고,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고 오해까지 받은 상황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사이에서 탕평책과 잦은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영조... 비록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하고 이뤄냈던 업적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영조는 애증이 가는 문제적인 군주이다.
정치만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사도세자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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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사도세자



출처:
디씨인싸이드 이산갤러리

1735년 1월 21일,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손꼽아 기다리던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리고 영조의 나이로 인해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선은 2세 때 천(天), 지(地), 부(父), 모(母) 등 63자를 해득할 정도로 조숙했다. 그는 3세 때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때 '동몽선습'을 독파했으며,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0세 때 노론과 소론을 구별하여 두 당파를 비교하기도 했고, 소론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던 세자 선은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세자의 나이 15세 때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8세 때 쓴 글씨

사도세자 10세 때 장인에게 쓴 편지


세자 선은 대리청정을 하며 노론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노론은 틈만나면 세자에게 소론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지만, 세자는 부왕를 믿고 독단적으로 날뛰는 노론을 배척하며 소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론은 사도세자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759년 노론 김한구의 딸을 왕후로 들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더욱 더 심화된다. 


노론은 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판단하고 세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 노론의 거두인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 숙부 홍인한, 정순왕후의 친오빠 김귀주,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 김상로, 김한록, 정후겸, 그리고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 숙의 문씨의 친오빠 문성국, 심지어는 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까지 세자를 24시간 감시하고 미행을 시켜 행적을 서로 주고 받는다. 또한 정순왕후와 영빈 이씨, 그리고 영조의 총애를 받던 숙의 문씨는 세자를 무고하였고,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세자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궁을 빠져나가 관서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세자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5월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영조로 하여금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둬 8일만에 굶어죽게 하였다. 공교롭게도 그 뒤주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영조에게 제공하였다.


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고종때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불렀고 장조로 추존된 뒤에는 융릉으로 불린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사도세자도 영조도 이상하다..
역사가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하다지.

분명한 건 영조는 편집증으로 아들을 미치게 만들었고, 사도세자도 정상은 아니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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