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면, 특히 권력을 넘보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잔인하고 끝까지 철퇴를 내렸으나,
사적으로는 의외로 허술하고, 아랫 사람의 잘못도 눈감아주는 관용과 너그러움도 있었다.
============================================= 아래 글 출처는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기사혜정교 근처의 아동들이 주상·효령군·충녕군의 이름을 빌어 타구 놀이를 하다
『 명하여 형조(刑曹)의 계본(啓本)을 불태우게 하였다. 혜정교(惠正橋) 거리에 아동 곽금(郭金)·막금(莫金)·막승(莫升)·덕중(德中) 등이 있어 타구(打毬) 놀이를 하는데, 매 구(毬)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하나는 효령군(孝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충녕군(忠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伴人)이라 하였다. 서로 치다가 구(毬) 하나가 다리 밑의 물로 굴러 들어가자,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 하였다. 효령군의 유모(乳母)가 마침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 대사헌 정역(鄭易)에게 고하였다. 정역이 형조에 고하여 옥에 가두고 물으니, 말하기를, “곽금(郭金)이 제창하여 장난한 지 이미 3일입니다.” 하였다. 행행(行幸)하는 때이므로 아뢰지 못하고,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요언률(妖言律)로써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모두 10세에 불과하니, 요언(妖言)을 조작한 것으로 논함은 불가하며, 또 동요(童謠)라 이를 수도 없다. 예전의 이른 바 동요란 이런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동요라 하더라도 또한 무죄(無罪)이니, 동요의 율은 즉시 대언사(代言司)로 하여금 형조와 함께 불태우게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였다.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
공에 다가 임금 이름 붙여서 발로 차는 아이들 용서...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기사시골 사람 손귀생이 창덕궁을 구경하고 광연루까지 들어와 구금되었으나 석방하다
『손귀생(孫貴生) 등 두 사람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손귀생 등은 시골 사람인데, 창덕궁(昌德宮)을 구경하고 들어와서 광연루(廣延樓)의 못 아래에 이르렀었다. 순금사(巡禁司)에서 장(杖) 80대로 조율(照律)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시골 사람이니 방면(放免)하는 것이 옳다. 예전에 조서(趙敍)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시골 선비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숙직하고 이른 아침에 내 보냈었는데, 그 사람이 갈 길을 잃어서 곧바로 침전(寢殿)의 뜰안으로 들어왔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서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나가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무지한 자이다. 좌우(左右)에서 들으면 반드시 법대로 처치하도록 청할 것이니, 빨리 놓아보내서 가게 하고, 이 말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었는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일이다.”』
술취해서 궁궐에 잘못 들어온 백성 용서...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4월 9일(기사) 2번째기사 『해온정(解慍亭)을 창덕궁(昌德宮) 동북 모퉁이에 지었다. 임금이 지신사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이제 새 정자(亭子)가 이룩되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저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天淸地寧]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적당하지 못한 듯하여, 내가 해온(解慍)으로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이 말을 내면 신하들이 반드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추켜 세우는구나. 다시 권근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물어보도록 하니, 권근이, “좋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새 정자를 명명하였다.』
혜온정이 만들어지자, 태종은 황희 등에게 "이 건물 이름을 혜온정으로 하자. 어떠냐?"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신하들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이고, 아주 좋습니다."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태종은 씩 웃으면서 "얘네들은 임금이 뭐라고 말만 하면 모두 예, 예, 좋습니다. 이런 말만 하는구만." 하고 권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내뱉는 말이지만 신하들에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발언 입니다.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쓴 글은 역시 옛날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역사니까 옛날 이야기 맞구나..ㅋ)
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 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인기 드라마였던 동이 속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실제 만남은 어땠을까? 궁녀와 지존의 극적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수문록: 조선 후기의 문신 이문정(李聞政)이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연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책.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입궁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 공간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봤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위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한 사료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숙종 18년(1692) 이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1656~1726년)이 지은 <수문록>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1721~1722년)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 이문정의 <수문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밤중에 궁궐을 거닐던 숙종은 조명이 유독 화려한 어느 궁녀의 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이 방안을 몰래 엿보니, 웬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종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렇게 해서 최 숙빈과 숙종이 조우하게 되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숙종이 방문을 열어젖힌 뒤의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을 통해, 우리는 최 숙빈이 그 순간에 얼마나 대담성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방문을 열어젖힌 숙종은 "너 지금 뭐하냐?"고 물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이문정의 <수문록>에서는 "선대왕(先大王, 숙종)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고 기록했다.
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최 숙빈의 '대담성'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한밤중에 잔칫상을 차려 놓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숙종이 묻자, 최숙빈이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수문록>
"선대왕(先大王,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
숙종은 좀 '솔직한' 군주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최측근들에게 숨기지 않았던 듯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그 의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방문 앞에 다가선 숙종은, 창호지에 침을 묻혔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의 체면을 내팽긴 채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그 궁녀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이 궁녀가 바로 훗날 영조를 낳게 될 최씨였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다.
이후의 기사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날 밤 궁녀 최씨는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홀로 거행하다가 숙종에게 우연히 들켰고 그런 모습에 감동된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문록>의 설명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 젖히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임금의 얼굴이 보인다면, 웬만한 궁녀들은 기겁을 하고 놀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임금이 "너 지금 뭐하냐?"라고 물어보면, 아마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최 숙빈은 마치 사전에 준비라도 해놓은 듯이 매우 침착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녀는 중전(폐비 인현왕후)의 시녀로서 특별히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 지금 뭐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네, 저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인현왕후의 시녀였다며 자기소개부터 먼저 했다. 최 숙빈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현왕후와의 관계를 밝힌 다음에 최 숙빈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은 중전의 탄신일입니다.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계시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드시는 것이라곤 거친 현미뿐입니다. 내일이 탄신일인데 누가 좋은 음식을 올리겠습니까? 소녀로서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이것을 차린 겁니다. 중전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진헌할 길이 없어서, 마치 실제로 진헌하는 것처럼 소녀의 방안에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인현왕후가 죄인이고 장 희빈이 중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대답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현왕후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그런 숙종 앞에서 폐비를 두둔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숙종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웬만한 궁녀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자기 부모님 생신이나 기일 등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인현왕후의 생일을 들먹인 것은 최 숙빈이 보통 이상의 대담성을 소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위의 행위를 결코 '무모함'이라 표현하지 않고 '대담성'이라 표현한 것은, 최 숙빈의 행동이 평소에 축적된 고도의 상황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숙종은 '폐비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서인들의 상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숙종은 그런 상소들을 무시하곤 했지만, 계속 올라오는 상소문이 숙종의 심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폐비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다고 최숙빈이 대답하자, 숙종이 그로부터 감동을 받아 최숙빈을 가까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다.
ⓒ <수문록>
최 숙빈은 인현왕후전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숙종의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폐비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말해도 숙종이 진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황판단을 했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폐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이 바뀌고 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아직까지는 폐비가 죄인의 신분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전을 쫓아낸 것은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칭찬을 들을 가능성보다는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일이었다.
결국 최 숙빈의 대담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숙종은 "죄인의 생일을 기념하다니! 이런 발칙한!"이라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최 숙빈의 행동으로부터 신선한 감동을 받아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수문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그제야 생각해 보니, 다음 날이 정말로 중전의 탄신일이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시고는 마침내 그를 가까이하셨다."
침방나인으로 바느질 생활을 하던 최 숙빈이 숙종과 친분을 맺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결정적 요소는 위와 같이 최 숙빈 특유의 대담성이었다. 판단력을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인 대담성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임금(김수현 분)은 죽은 세자빈을 닮은 연우(한가인 분)를 무척이나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훤의 소망은 수많은 장애물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칫 연우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연우가 무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우가 무녀가 아닌 궁녀라 해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왕대비와 중전과 외척세력이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훤의 처지는 옛날 왕들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모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관심 있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란 관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관념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의 '베드신'은 오직 후계자 생산을 위해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베드신'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든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신하들의 '막가는' 발언들이...
▲ 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 사진은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가야(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년 24일)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 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제2장에 따르면, '검찰과 긴장관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란 취지의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라고 답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을 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 곁에는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희빈 홍씨)을 특별히 가까이 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3월 12일(1518년 4월 21일)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 12월 14일(1687년 1월 27일)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계속해서 소의의 회임을 의심하던 귀인은 취선당의 어의까지 불러 확인해보지만 별소득이 없자 또 다른 계책을 꾸미기 시작한다.
대궐 안은 순식간에 소의의 회임이 가짜라는 소문이 돌기시작하고 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 일은 곧 소의에게 전해지고 소의는 숙종에게 고해바치지만 숙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몸조리만 잘하라는 당부를 내린다.
하지만 가회임의 논란은 계속해서 커져나가고 결국 참다 못한 숙종은 두경에게 보검을 가져오라 명하고는 취선당으로 어의를 불러 몸소 가회임 문제를 판결하고자 하는데...
[ 제 41회 용어풀이 ]
사속지망 : 왕자를 생산하여 왕실의 대를 이을 것을 바라는 마음
양사 : 사헌부와 사간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옥당 : 왕의 자문을 하는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
[42회] 장렬왕후의 별세와 장소의의 왕자생산...
희재와의 마찰로 대왕대비는 쓰러지고 대궐은 다시 긴장감이 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차마 숙종과 중전의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지 못하며 속으로만 노여워하고...
옥정의 출산이 가까워지지만 대왕대비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간다.
결국 65년의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자의대비 조씨는 숙종이 후사를 잇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숙종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데...
자의대비가 죽은 뒤 소의 장씨의 발호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고 숙안공주등 서인세력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으며 제발 소의의 후사가 왕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취선당의 산통이 시작되고 숙종은 왕자이기를 바라며 기대감에 부풀어오른다.
중전 인현왕후 역시 산실청의 일을 지휘하는 등 소의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대궐의 모든 귀와 눈이 취선당으로 모아진다.
드디어 취선당에서 소의의 비명소리와 함께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 제 42회 용어풀이 ]
권초지례 : 왕자가 태어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
[43회]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원자정호를 결심하고...
숙종은 왕자를 생산한 소의가 대견하기만 하고 서인들은 앞으로 몰고 올 환국을 예견하며 숙종의 의도와 남인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사가의 어미를 뵙고싶다는 소의에 청에 숙종은 흔쾌히 허락하고
윤씨는 급히 차비를 차리고 궁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궁궐대문앞에서 명패가 없다는 이유로 입궐이 거부당해
실랑이를 벌이다 지평 이익수에 의해 가마가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의 파문은 점점 번져나가고 마침내 숙종은 이익수를 당장 잡아들여 문초하라 명한다.
서인진영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고 숙종을 찾아가 원칙대로 처리한 이익수를 구명하려하지만 숙종은 권도를 내세워 그들을 압도한다. 뿐만아니라 앞으로 패거리를 지어 왕실을 능멸하는 처사를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라며 경고한다.
원자가 태어난지 두달 후,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드디어 원자 정호를 결심하자 서인들은 다시 반발하며 나서지만 우암 송시열은 서인가의 몰락을 예견한다.
조정에 부는 뜨거운 바람. 원자정호를 둘러싼 숙종과 훈구대신들과의 극한 대결은 피바람을 예고하는데...
[44회]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드디어 이를 둘러싸고 서인대신들과 숙종의 극한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격렬히 반대하며 나서는 서인들을 향해 숙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강행할 것임을 천명한다.
뿐만 아니라 소의 장씨를 내명부의 최고 품계인 희빈으로 봉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희빈으로 봉해진 옥정이 문후를 들자 인현왕후는 원자를 한번 안아보고자 하나
기세가 등등한 희빈은 원자가 신열이 있다며 원자를 가까이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치욕스런 언사를 날린다.
또 다시 좌절감에 치를 떠는 인현왕후.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자정호와 희빈 등극으로 서인가의 최후가 다가왔다고 예견한 송시열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원자정호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문을 써내려간다.
불같이 화가난 숙종, 하지만 그 상대가 우암이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드디어 동평군이 나서고 동평군은 송시열에게 맞불을 놓듯이
옥정에게 서찰을 띄워 송시열의 상소를 문제삼을 것을 간하게 하고
삼사 언관들까지 회유하여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계략을 꾸민다.
차라리 자신과 원자를 죽여달라는 희빈 장씨.
그리고 때마침 숙종에게 나아와 송시열의 상소가 부당하다고 아뢰는 삼사 언관들.
숙종은 드디어 송시열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조정은 기사환국의 광풍으로 빠져드는데...
[45회]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상소는 기사환국이라는 일대 격변을 불러일으킨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대신들의 파직과 귀향이 잇따르고
숙종은 그 빈자리를 경신환국으로 출척되었던 남인들로 채운다.
귀인은 할아버지의 파직을 따지러 희빈에게 나아오지만
이미 자기보다 높은 품계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중전 또한 기고만장한 희빈을 찾아가 타이르려 하지만
오히려 어서 왕자나 생산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쓰러지는데....
동평군과 희빈의 의지에 따라 요직에 등용된 남인들은 앞을 다퉈
우암 송시열 등을 사사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던가....
고심 끝에 숙종은 송시열을 제외한 김수항, 김익훈등에게 사약과 극형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궐안은 일대 광풍이 휘몰아치는데......
한편 자애롭기 그지없는 인현왕후는 그래도 국모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원자에게 예쁜 옷을 선물한다.
그런데 그 옷을 입은 원자가 갑자기 경기를 시작하며 울기 시작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희빈은 옷을 살펴보다 바늘 두 개를 발견하는데.....
[ 제 45회 용어풀이 ]
경신 대출척 : 숙종 6년,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몰아낸 사건
상서 : 중국 전통산문의 근원으로써 서경을 달리 부르는 말
[46회] 희빈의 계략으로 귀인과 중전은 궁지로 몰리고...
중전이 선물한 옷을 전달한 침방무수리에 대한 매질이 시작되고
황급히 달려온 중전은 다 자기 잘못이라며 용서를 빌지만
희빈은 바늘을 넣으라 사주한 자를 밝혀내야한다며 계속 매질을 한다.
결국 이 일을 숙종까지 알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계속 희빈과 맞서던 인현왕후는 안되겠다 싶어 숙종에게 달려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니 자신을 벌하고 이 일을 마무리해달라고 요청한다. 숙종은 난감해하고....
이 일은 이 선에서 마무리되나 남인들은 이 사건은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여
원자를 해하려한 것이므로 내칠 명분이 충분하다며 드디어 중전 폐위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희빈 역시 요즈음 대비 명성왕후가 중전의 꿈에 현몽한다는 소릴 들었다며 숙종에게 고하자
숙종은 인현을 불러 이는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기 때문이 아니냐며 다그치기 시작한다. 인현왕후는 더욱더 궁지로 몰리고....
이 와중에 희빈측 궁녀들이 대궐일각의 땅을 파는 것을 목격한 귀인 측은
분명히 중전을 음해 하려는 희빈의 모사라며 그 증거를 찾고자 하나
땅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숙종에게 발각되어 희빈을 저주하려했다는 죄목으로 궐 밖으로 내쳐지는데...
[47회]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희빈 장씨는 떠나는 귀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운다.
중전 인현왕후는 다음차례는 자기라는 것을 예감하는데....
한편 중전 인현왕후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희빈은 숙종에게 청하여 인현왕후에게 어떠한 하례도 올지 못하게 하고 단자도, 음식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중전의 위치는 더욱 초라해지고...
하지만 인현의 어머니 부부인 조씨는 명을 거역하고 조금의 음식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중궁전에 음식상이 차려진 모습을 숙종이 보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진노하며 중전을 나무란다.
마침내 폐비의 일을 서두르라는 숙종의 어명이 떨어진다.
남인들조차 놀라 반대의 정청을 초래하는 이 일은 일단 우암 송시열을 사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이를 참다못한 박태보와 오두인의 상소로 대궐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는데...
[ 제 47회 용어풀이 ]
폐출절목 : 폐출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상세히 나열한 문서
[48회] 인현왕후는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결국 박태보와 오두인은 잡혀 들어오고 숙종의 친국이 시작된다.
모진 고문에도 그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숙종과 맞서지만 숙종은 상소의 배후는
반드시 인현의 오빠인 민진후라며 그 화살을 중전 인현왕후에게로 돌리는데...
놀란 인현왕후는 오라버니의 구명을 위해 숙종을 만나려 하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미움만 살뿐이다.
반면 중전 자리에 대한 희빈 장씨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숙종은 훈구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현왕후 폐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옥책과 장복을 불태우기에 이르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어명에 중궁전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결국 인현왕후는 가마를 탄 채 한 많은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떠나는데...
[49회]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폐비된 인현의 가마가 도성거리로 나서자 수많은 유생들과 백성들은
가마를 막아서고 통곡을 하며 슬퍼한다.
안국동 사가에 도착한 인현은 어머니와 회한의 재회를 하고
자신은 죄인이므로 황량하게 허물어져 가는 별채에 머물겠노라 한다.
다시 한번 집안은 울음바다를 이루고...
한편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대해 괴로워하지만 중전자리에 오른다는 희망에 부푼 장희빈은 중궁전에 들러 인현이 쓰던 물품들을 모두 갖다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라 하고 또 인현의 사가에 사람을 보내 거동을 소상히 살피라고 명하기까지 하는 등 점점 더 위세등등해진다.
그러나 역사상 역관의 자식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는데...
[ 제 49회 용어풀이 ]
역관 :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로서 중인신분
구운몽 :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사실을 풍자한 소설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0회]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장희빈을 중전자리에 올리기 위한 장희재의 노력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 역관(통역관, 중인)들이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태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호기라 생각한 희재는 뒷돈을 대는 등 그들을 부추기고
마침내 사건이 확대되어 숙종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고심 끝에 숙종은 대신들 앞에서 역관출신인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 올려 역관들의 분노를 다스리겠노라 선포한다.
반대하던 대신들도 숙종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할 수 없고...
국상중이라 정식 책비례를 치르지 않았지만 엄연한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그녀는 장희재를 내금위장으로 승진시키고 모친 윤씨에게 작호를 내리는 등
그동안 쌓였던 한들은 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수리 최씨는
분노의 이를 갈며 인현왕후의 복위에 온 몸을 던지겠노라 결심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도 애써 담담해 하는 인현왕후!
그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식사도 잡곡으로 하는 등 폐서인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고,
뿐만 아니라 숙종을 위한 치성도 매일 빠지지 않고 드린다.
그러던 중 복면한 사내들이 폐비 인현왕후 거처 담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고, 순간 인현왕후는 위기를 느끼는데...
[ 제 50회 용어풀이 ]
부운계 :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 모여서 만든 비밀조직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1회]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하늘을 치를 듯 하고
옥정의 사가는 벼슬아치들이 보내는 봉물들로 넘쳐난다.
반면 폐비 민씨의 집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민진후와 어머니 조씨는 출입조차 제한 당한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민진후는 홍치상과 만나 인현을 복위시킬 방도를 강구하고
마침내 민심을 얻기 위한 익명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한다.
온 도성에 나붙은 익명서는 또 다른 파란을 예고하고 민심이 돌아설 것이 두려운
옥정과 장희재는 익명서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한편 남인대신들은 이 일을 기회로 서인 잔당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숙종에게 청한다. 숙종 역시 흔쾌히 동의하고 어서 익명서의 주모자를 찾으라 명한다.
걱정이 앞서는 폐비 민씨는 오라버니를 불러 주의로 주지만 쉽게
그 의지를 꺽을 수가 없고...
결국 익명서의 필적을 대조한 끝에 익명서의 주인공이 홍치상으로 밝혀지고 급한 장희재는 왕명도 받지 않은 채 숙안공주의 집으로 처들어가 홍치상을 포박하는데...
[ 제 51회 용어풀이 ]
경국대전 : 국정 전 분야에 걸친 교지. 조례 등을 모은 법전
언문 : 한글을 속되게 이르는 말
왕비주청사 : 새 왕비의 책봉을 청나라에 알리기 위한 사신
[52회]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아들의 일로 다급해진 숙안공주는 숙종을 찾아와 홍치상 스스로 떳떳하게 자진할
기회를 줄 것이며 이후 더 이상 익명서 사건을 거론하지 말 것을 청한다.
괴로운 숙종은 눈물로서 호소하는 숙안공주의 청을 거절할 수 없고...
결국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이를 지켜본 민진후는 분노의 눈물을 삼킨다.
이 일로 민심은 더욱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고 이를 걱정하던 민장도는 폐비 사사를 거론하지만 아버지 민암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한편 옥정은 익명서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민진후와 민심을 호도하려한 숙안공주를 법도로서 다스려 달라 청하자 곤혹스런 숙종은 옥정에게 원자의 세자 책봉을 확약하며 마음을 달랜다.
이 소식을 들은 장희재와 어머니 윤씨는 기쁘기 그지없지만
왕명을 사칭하며 경거망동하는 장희재를 못마땅해하는 동평군은 희재를 불러 계속 이러다가는 폐비 복위운동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니 조심하라 경고하는데...
[ 제 52회 용어풀이 ]
구운몽 : 주인공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간세상에 유태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고대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을 둘러싼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을 풍자한 소설로 폐비복위의 정당성을 담음
그러나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김영애)의 반응은 싸늘했다. 숙종(전광렬)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국상조차도 간소하게 지내라 명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대비전을 찾지만 현종이 승하할 때도 인정보다
용상자리에 매달리셨던 분이셨기에 그런 대비에게 숙종은 점차 마음이 멀어진다.
서인인 인경왕후의 죽음은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인들과 서인들에게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역모를 준비하던 남인 허견과 복선군(송용태)의 계획은 급물을 타기 시작하였고, 역모를 눈치챈 서인들은 김석주(전인택)의 밑으로 단결하여, 역모사건을 기화 삼아 남인들을 몰아낼 것을 궁리한다.
한편, 허견의 역모에 뒷돈을 대던 장현의 집에는 조사석의 정부인이 행패를 부리는데 장현의 동생의 첩이자 옥정(김혜수)의 어머니인 윤씨(이보희)와 조사석(백윤식)이 정을 통한 것이 그 이유였다. 장현은 패물로 그녀를 달래 가까스로 돌려보내지만, 윤씨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하려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옥정은 사람이 사람을 은애하는 것이 죽을죄가 되느냐며 윤씨를 부여안고 울음을 삼키는데...
[ 제 1회 용어풀이 ]
친경례 (親耕禮) : 임금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친히 토지를 경작하는것
과전 (科田) : 문무양반들에게 특권을 갖도록 한 토지
공남 (貢納) : 지방특산물에 공세를 바치는 것
평시성 (平市瑞) : 시장에서 쓰는 저울과 물가를 통제하고 상도의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아 보는 관청
[2회] 숙종 제 1비의 승하와 복선군의 음모가...
허견과 복선군은 허적의 시호연을 역모날로 정하고, 이런 움직임을 비밀리에 보고받은 숙종(전광렬)은 병조판서 김석주(전인택)를 불러들여 역모사건을 처리할 것을 명한다.
한편 옥정(김혜수)은 장현으로부터 역모에 뒷돈을 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만, 오히려 잘한 일이라며 장현의 등을 떠민다.
숙종의 명으로 홀로 허견집으로 향하는 김석주.
그는 곧 복선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역모가 성공하는 듯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역모에 동조한 자들은 모두 잡히게 되고 장현의 집도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결국 옥정의 일가는 집 밖으로 내몰리는데...
[ 제 2회 용어풀이 ]
홍수의 변 : 인조의 손자인 복선군의 형제들이 궁녀와 간통했다는 소문으로 귀양을 간 사건
시호연 : 훌륭한 정승이나 유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이름을 추증하는 것을 축하하는 연회
[3회]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옥정(김혜수)일가.
희재(정성모)는 조사석(백윤식)의 집에 찾아가 큰아버지의 소식을 묻지만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에 힘없이 돌아선다.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인현왕후(홍수현 분)가 중궁전에 입성하면서 장옥정(김태희 분)의 악녀 본색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흥행 포인트'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가 본격화됨에 따라 시청률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장희빈을 그린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희생과 인고'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인현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인내하고 받아들였던 후덕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전의 자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 있는 여성이었을까.
인현왕후는 당시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서인세력 중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던 여흥 민씨 집안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으며 외척으로는 우암 송시열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숙종의 계비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왕비로 적극 추천한 이는 송시열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였다. 한 마디로 집권세력과 왕실세력의 비호를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렇듯 날 때부터 최고의 양갓집 규수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지존의 짝인 왕비가 되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인현왕후 특유의 자신감은 궁 밖에 쫓겨나 있던 장희빈의 환궁 과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장희빈은 명성왕후에게 '남인의 간자'로 찍혀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숙종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한 마디로 남편의 첩을 제 손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인현왕후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남인세력이었던 시할머니 장렬왕후 조씨가 장희빈의 환궁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 셋째는 인현왕후 스스로 장희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장희빈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로서 그것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숙종을 거쳐 가는 여러 여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두고두고 신경 쓸 '라이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안일한 생각과 달리 장희빈은 훨씬 영리했고 정치적이었으며 숙종의 사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 지는 장희빈의 위세는 인현왕후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왼쪽부터)김태희(장희빈 역)-한승연(최숙빈 역)-홍수현(인현왕후 역)
기본적인 예의범절이 생활화된 데다가 왕비의 체면과 체통을 중시했던 인현왕후는 대놓고 장희빈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다과를 함께 하는 등 후덕한 조강지처의 품격을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인현왕후 또한 중전 이전에 여자이니 어찌 투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장희빈이 매우 교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장희빈으로선 아무리 윗전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것이 보통 고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너무 지나치자 서인의 거목 중 한 명인 김수항의 증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장희빈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재밌는 것은 김수항의 증손녀는 명문세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숙원이었던 장희빈보다 윗전인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소의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에 책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미천한 출신을 환기시키며 내심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귀인 김씨의 입궁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 진 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직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현왕후는 "장씨는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험담까지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인현왕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 아들인 경종을 낳으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아들도 낳지 못한데다가 체통을 잃고 '투기'까지 한 죄목을 함께 물었다. 몇몇 사료에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빼앗긴 인현왕후는 5년간 안국동 본가인 감고당으로 돌아가 폐출 생활을 감내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없었던 이 시기에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손상됐다. 인현왕후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유도 바로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병증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장희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과거의 악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데다가 세자의 친모이기도 한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가만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인현왕후는 승하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는 모두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이 빌미란 것이 바로 장희빈의 저주를 뜻한다. 인현왕후의 이 같은 말은 차후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승하 2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인현왕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린 것과 다른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깍듯한 예의와 품격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애첩에게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인현왕후는 궁인 출신의 장희빈이 자신의 라이벌이란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평생을 장희빈에 대한 콤플렉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숙종과 함께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에 묻혀 있는 인현왕후는 지금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끝끝내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숙종은 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5]
사악한 장희빈과 불쌍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소설인 '인현왕후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수많은 사극과 드라마에 의해서 확대, 왜곡, 재생산되었습니다.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경종을 고자;;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약을 마실 때 발버둥쳤다는 것조차도 실록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임금의 사랑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자를 낳고도 희빈으로 강등된 것만으로도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인데
사약 먹고 죽은 후에도 (이것도 실록에는 안나옴.) 몇 백년간이나 악녀의 상징으로 기억이 되다니...
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 복창군, 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입대 기다리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유승호.
어린 것이 개념도 꽉 찼고 생긴 것은 왜 이리 잘 생겼나.
암튼 잘 건강하게 다녀오길.
스무 살 청춘, 유 승 호 (2013. 3월호)
하와이의 서퍼들은 강하다. 노스쇼어의 사나운 파도를 거슬러 헤엄치는 이들은 파도가 가장 높아졌을 때 비로소 파도를 뚫고 나온다. 파도는 얼마나 잘 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다루느냐의 문제다. 지금 바다를 등지고 촬영중인 유승호도 세월과 시간, 세상과 대중의 시선이라는 파도를 뚫고 나오길, 그렇게 춤추듯 걸어오길. 이것은 하와이에서 날아온 유승호의 입대 전 마지막 화보이자 미리 보내는 첫번째 위문편지다.
글/ 윤혜정 진행/ 김민경 Photographed by Lee Youngjin
하와이의 하늘은 순진하다. 하와이 오하우 섬은 적도 가까이에 있는 탓에 늘 하늘은 땅에 낮게 깔려 있고, 구름도, 별도, 달도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옛날 옛적 하와이 사람들이 하늘의 움직임만 보고 시간과 내일 날씨까지 알아 맞출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하와이의 하늘이 정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촬영 전날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차로 이동하던 중에는 "하늘이 참 드라마틱하다"고 감탄했다가 일행들로부터 대체 무슨 소리냐고 비웃음만 샀고, 촬영 중에는 구름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통에 해변에서 모래로 두꺼비 집을 지으며 해가 나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지만, 어쨌든 난 하와이 땅의 따분한 평화로움을 '드라마틱한' 하늘이 채워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이렇게 구름이 빨리 움직이는 게 다 보일 줄은 몰랐다.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게 있고 귀를 닫아도 들리는 게 있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지금도 신기한 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유승호와의 인터뷰 사이사이, 말문이 막힐 때마다 떠올랐다는 거다. 유승호는 매우 예의바르고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었다. 청춘들은 별 이유 없이 웃어도 아름답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낯을 많이 가린다는 소문에 영화<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의 주인공처럼 잔뜩 움츠려 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예거밤을 마시면서 쏟아지는 별을 지붕 삼아 수다나 떨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런 다정한 선문답이나 나누고 싶은 밤이었다. "승호씨, 세상이 깜깜해져도 여전히 볼수 있는게 있지 않을까요? 특히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더 그렇죠.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말아요."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 일행은 잠깐 틈을 내서 함께 와이키키에 있는 쇼핑센터에 갔다. 각자의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만났을 때, 유승호는 트렁크만 한 레고 세트를 들고 있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주 무대가 되는 거대한 우주선, 밀레니엄 팔콘 레고 세트, 1천 개가 넘는 피스로 구성된 이 밀레니엄 팔콘은 레고를 좀 하거나 혹은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로망의 시리즈로 통한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만드는 데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리기 때문이다. 주책없이 반색하며 달려들어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내게 유승호는 이렇게 말했다.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 작품 활동 좀 해보려고요, (웃음)" 또래남자들만큼이나 쇼핑에는 관심이 없던 그가 구입한 물건이 레고인 건 무슨 사연이었을까? "처음 CF를 찍을 때 조그만한 레고 하나 사줄테니까 찍자, 그렇게 촬영하곤 했었어요. 만드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그래서 어렸을 때 엄청 많이 샀어요.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애들이나 하는 건데? 싶어 친척 동생들 줬죠. 그래서 지금도 레고 보면 너무 사고 싶어요. 좀 창피하기도 한데, 그래도 내가 좋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면서, 여자들이 쇼핑 좋아하고, 남자들이 차 좋아하듯이, 나도 레고가 좋을 뿐이니까요." 레고를 사고 '새콤달콤'을 먹고 싶어서 카메라 앞에 섰던 천진한 아이가 지금 청년이 되어 내 앞에 앉아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입대 날짜를 받아둔 스무 살 청년이라면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청춘을 불살라도 시원찮을 판에, 군대 가기 전까지 한 달 동안 집에서 조용히 레고 조각이나 맞추고 있겠다니. "솔직히, 만날 사람도 많이 없어요.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거든요. 스태프 누나들이랑 가족들, 친한 친구 몇 명, 그렇게 밖에 없어요. 친구 사귈 시간도 없었고, 거의 일만 했으니까. 솔직히 놀아봤자 딴 생각만 더 들고, 제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 사람 사는데니까. 무엇보다 제가 너무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니까. 너무 원했던 일이니까. 전 그래서 요즘 기분이 너무 좋아요. 진짜 좋아요. (웃음)"
이번 해외 화보 촬영은 처음부터 '유승호의 입대 전의 마지막 화보이자 인터뷰'로 화제가 됐다. 유승호의 입대 사실은 드라마 <보고싶다> 방영 중 발표됐고, 그날 <바자> 사무실은 난리가 났었다. '유승호가 군대를 간다'는 사실을 두고 아쉬움을 표하는 지점은 꽤 여러 가지였다. 다름 사람이 아닌 유승호가, 2년동안 사라진다는, 그리고 하필이면 지금처럼 소위 '잘나갈 때'여야 하냐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전해도 그저 웃기만 하던 유승호에게 왜 그곳에 그렇게 가고 싶었냐고 물었다. "군대를 가는 이유는 되게 많아요. 단순히 이미지 변신을 위해서는 아니에요. 물론 말 못할 이유도 많지만 일단 전 2년동안 그동안과는 다른 생활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인천에서 남자 중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때 <마음이>를 찍었었는데, 학교에 거친 남자 아이들 밖에 없었어요.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었고요. 아이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그 때 아마 해병대에 간다고 했을 거예요. 어린 눈에도 해병대가 강해 보였나봐요. 물론 대학을 안 가는 대신 해병대도 포기해야 했지만.(웃음)" 그러고는 다녀와서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고 오리발을 내밀지 모르겠다며 웃는 유승호.
내 주위에는 유승호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들도 없지만, 그를 칭찬하지 않는 남자들도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특히 군대 문제는 도덕성과 직결되는 상황이고, 유승호는 신문 사설에서도 아주 올바른 예로 여러번 언급됐다. "감사한 일이지만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어리둥절하긴 해요. 군대를 가는 타이밍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다른 거잖아요. 또 어떤 연예인이 연예사병을 선택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제 친구들은 모두 올해 입대해요. 그냥 전 친구들과 똑같이 군대 가고, 제대해서, 사회생활 하는건데 그걸로 시선을 받는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얼마 전 유승호는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또 한번 주목 받았던 것 같다. "그것도 사연이 긴데... 난 어릴 때부터 현장에서 연기를 배워왔어요. 간다면 연극영화과일 텐데, 대학 졸업장을 위해 제가 그 기회를 독점하긴 싫었어요. 사람들이 다 인정할 수 있끔 열심히 연기하고, 대학은 공부하고 싶을 때 가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우린 대학이나 군대 같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의 솔직하고 명료한 대답에서 유승호가 그 동안 무엇이 힘들었고, 앞으로는 어떤 어른으로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단서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아가는 듯했다. 분명한건 아역 배우로 살던 그가 나이와는 상관없이 프로페셔널이 됐다는 거다.
내가 유승호에 대해 가장 처음 받은 인상은 그는 자신에 대한 고민을 숨 쉬듯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다. 내가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며, 나의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길 바라고, 이윽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어떤 연예인인지가 아니라) 고민하는 것. "언젠가 대한민국 배우가 한 번도 하지 않은 걸, 하지 못한 걸 내가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물론 군대든, 대학이든 그 말 때문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게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요"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난 아마도 '하지 못한 것' 이라는게 연예인처럼 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모두들 정확한 입대 날짜를 몰라요. 훈련소에 마음 편하게 오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웬 배우 취재한다고 길 막고 그러면 얼마나 싫겠어요. 저도 싫고요. 최대한 조용히 가고 싶어요."
세상은 당연하다고 하는데, 유승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 대학과 군대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만약 연예인이 아니었다면 전 사회복지를 공부했을 거예요. 예전에 <사랑의 리퀘스트 희망로드 대장정>을 했을 때였는데, 아... 너무너무 느껴졌어요.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어도요. 사실 연예인이라는 사람이 사회봉사를 하면, 이미지 때문이라고 당연히 생각하잖아요. 만약 진심이라고 해도, 그런 소리 듣기 싫으니까 사람들 모르게 봉사를 하는 거죠." 그리고 그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환경 캠페인 같은 것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여름 파주에서 잠실까지 운동을 다녔는데, 여름 내내 에어컨을 한 번도 켜지 않았었다는 에피소드와 함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했죠.(웃음) 모든 사람들이 에어컨을 켜는데, 나만 안 켜고 살 수 있을까. 사실 사소한 일인데, 굉장히 뿌듯하더라고요." 당연하다는 것과 당연하지 않다는 것, 그에 대한 고민이 유승호를 또래 연예인들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첫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승호의 다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드라마 <보고싶다> 때문이었다. 물에 빠진 치킨 말고 프라이드 치킨을 달라고 절규하던 꼬마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남자가 됐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유승호의 존재감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드라마에서 그는 '결핍'이 낳은 '괴물'을 연기했다. 불편한 육체, 모성의 부재,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기는 상실의 정서를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그를 보며 소름 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날 선 인간의 욕망과 분노를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조절하는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지막 회, 창고에서 세 주인공이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있을 때, 그가 손에 권총을 묶은 채 조이에게 "나 너무 아파, 나 좀 봐줘." 애절하게 부탁(혹은 명령)하는 부분은 정말 무서웠다. 눈, 코, 입 중 어디가 변화했는지 딱히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표정이 변화하는 모습에는 혀를 내둘렸다. 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여기가 나의 천국이야."라고 말할 때, 다른 사람이었으면 심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대사와 장면도 완벽하게 해리 보리슨의 것으로 만들었다. 스무살의 남자가 표현하기에는 너무 무겁거나 복잡했을 선악의 공존의 상태를, 유승호는 의연하게 끌고 나갔다. 게다가 원래 해리역할이 나이 지긋한 남자로 설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유승호의 에너지는 강렬했다. 그건 대체 어디서 나오는 삼손 같은 힘이었을까?
"사이코패스 같은 역할을 너무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나간 부분도 있어요. 분명히. 감독님이 컷 하고 나서 야, 너무 심하지 않냐, 그런 적도 있고.(웃음) 사실 더 보여주고 싶었죠.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잖아요. 매체의 한계도 있었고 그래서 아쉬웠던 부분도 많아요."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라도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맨날 분노하는 표정 짓는 건 힘들었어요. 대본의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를 참는 해리'라는 지문이 신 끝에 꼭 있어요. 가면 갈수록 분노를 더 참아야 하잖아요. 이미 끝까지 참았는데, 어떻게 더 참아야 하지? 진짜 막 울어야 하나? 분노를 참지 못해서 내 심장이 아픈 걸 어떻게 표현하지?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참다가 마지막에 한 번 터졌죠.(웃음)" 그런 장면들을 보고 유승호만의 감성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했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말한다. "해리가 분노를 참는 성격이었는데, 제가 그랬어요. 원래 전 화를 내지 못했어요. 집에서 혼자 울고 그랬거든요. 이게 오래되다 보니 조절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분노를 참지 못하면 심장이 아프다, 라는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인지 난 말문이 막혔다.
<보고싶 다>의 방영과 함께 유승호의 연기에 관심이 집중되자, 인터넷에서는 유승호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다시 무섭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런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보고싶다>가 유승호라는 배우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드라마였다면, 그 호기심의 방향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여야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난 다음에, 다음에는 영화에서도 이런 사이코틱한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전 유승호라는 배우의 작품을 원하거든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물론 상업적인 결과를 생각해야 하지만, 한번쯤은 그런 거 상관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요? 제 필모그래피에 제가 원하는 그런 영화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영화, 너무 이기적인가요?(웃음)" 우리가 이렇게 유승호의 근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건 그가 재능을 발휘한 덕분이지만, 그는 말끝에 "운이 좋았다"며 모든 공을 운명에 돌려버렸다.
화보 촬영을 할 때 유승호는 내가 본 그 어떤 배우보다 열심이었다. 해변에 누워 있다 밀려오는 파도에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짠물과 모래를 먹고, 찬 지하수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그는 원하는 방향의 사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평소 내성적이고 숫기 없는 그가 현장에서 카메라만 돌아가면 확 돌변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났다. "변하는 게 아니라 편해지죠. 어쨌든 대본이라는, 이미 예정되어 있거나 준비된 상황을 갖고 유승호라는 배우 느낌대로 표현하는 거니까요. 사람들은 연기할 때 창피해서 어떻게 하냐고 하는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건 일이잖아요. 제대로 하고 빨리 빨리 오케이 사인을 받아야 스태프들도 얼른 집에 보낼 수 있잖아요. 물론 주어진 대로 해보기도 하고, 내가 좀 달리 해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어쨌든 연기를 안 하고 있으면 되게 하고 싶어요." 카메라 앞에서 차라리 편해진다고 말 할 때에는 내 앞에 비누 냄새 폴폴 풍기며 앉아 있는 그가 잔뼈 굵은 베테랑으로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웬만하면 아역배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묻고 싶지 않았다. '청년 유승호'에게 '귀여운 꼬마 유승호'란 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것일 테니까. 하지만 또한 그건 부정할 수 없이 안고 가야 하는 가족 같은 존재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는 그 시간들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까? "글쎄요.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배우는 절대 안 할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고 있는 건 내가 그나마 잘하는 거라는 건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어느덧 촬영할 때가 가장 편하니까요. 사람은 재능을 하나씩 갖고 태어난대요. 나의 재능은 뭘까 생각해봤어요. 공부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고. 사실 연기도 아니었거든요? 주변에서 재능을 살려주고 만들어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결핍으로 에너지를 얻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나는 그만의 감성과 생각을 만드는 것, 그 시선의 원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전 혼자 있는 걸 좋아해요. 휴대폰에 저장된 사람이 80명도 채 안 돼요. 제가 마음을 안 여는 이유도 있고요. 사실 혼자 있어도 별 거 안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어색하고 재미없어요.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도 해봤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어떻게 변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가 이게 가장 편하니까 맞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웃음)"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학교 다닐 때 친구가 없었던 이유가 있어요. 그냥 연예인이니까, 신기하니까 접근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마음을 안 열었을 테고요. 물론 진심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그 사람만 아는 거니까요."
난 드라마를 보는 내내 궁금했던 것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막내조카뻘인 유승호라는 배우에게 내가 (혹은 수많은 여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데미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상처 받은 사람은 살아남는 법을 안다." 유승호에게는 뭐랄까, 그런 사람만이 목격한 삶의 본질, 비밀을 이미 체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낯설면서도 자꾸만 마음이 갔던 건, 그런 느낌은 보통 대중매체에서 얼굴을 비추는 이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설가나 아티스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감흥이랄까. 유승호는 스무 살이지만, 다른 스무 살 아이돌과는 완전히 다른 대척점에 있다. 청춘스타들이 현재 빛나기 위해 미래를 망각하고, 유혹하고, 마초적인 근성을 풍기며 욕망한다면, 유승호는 건실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절제하는 느낌이다. 오랜 시간 쇼비즈니스라는 곳에 발을 들이고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죽을 만큼 애쓰고 노력하는 청춘스타. 의도하지 않아도 삶의 결과로 얻어지는 생각과 고민들은 유승호를 아주 고유한 배우로 만들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했다. "그 친구들이요? 저한테 별로 관심 없어요. 내가 나오는 드라마에도 관심없고, 만나면 일 얘기는 전혀 안 해요. 그러더니 어느 날 그러더라고요.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냐고. 내 참, 친구라는 놈들이 말이야. (웃음)" 그때 자신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는 걸 유승호는 알고 있었을까?
택배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라고 스스로의 상태를 명확하게 정의한 유승호는 군대를 다녀온 자신의 모습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좀 더 남자다워지고 싶어요." '남. 자. 답. 게'라는 네 글자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의 치기 어린 남자다움이 아니라 괜찮은 배우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의 남자다움. "너무나 많은 분들이 날 어릴 때부터 봐오셨으니까요. 내가 몇 살이 되든 <집으로>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테고요. 그래서 전 제 나이답게 그렇게 바뀌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배우들에게 단골로 하는 질문,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일상의 이야기로 이미 꿈을 말했으니까. 현실을 현실처럼 살고, 미래를 미래처럼 사는 것,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꿈을 꾸며 지금을 사는 것. 대신 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유승호에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요즘 느끼는 건데, 순수한 사람인 것 같아요. 돈 잘 벌고, 인기 있고, 예쁘고, 잘생기고 그런 것보다 정말 순수한 사람. 나이를 한 살 씩 먹으면서도 다 알게 되잖아요. 사람들의 행동을. 왜 어른들이 고등학교 때가 좋았다는 말씀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때가 탄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그런 걸 알아 가는게 싫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얼굴에 적나라하게 나타나요. 그럴때면 제 얼굴이 싫어요. 거울을 별로 안 보려고 해요. 예전엔 좋아했거든요. 샤워하고 나서, 젖은 머리 다 넘기고, 폼 잡고...(웃음)" 어떤 순간에도 순수하고 싶은 청년, 유승호의 눈이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길고 그윽해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몇 가지 스케쥴을 소화해야 한다더니, 그 중 하나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라는 걸 뉴스를 통해 알게 됐다. 그 출연료를 기부한다는 '유승호다운' 소식과 함께. 다큐멘터리에 목소리를 빌려준다는 건 대중에게 무한한 신뢰를 주는 배우라는 아주 결정적인 증거이기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엉뚱하게도 한편으로는 혹시 바쁜 스케쥴 때문에 밀레니엄 팔콘을 다 못 만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그는 지금 얼마나 조립했을까, 그 많은 레고 블록들을 끼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디 그가 포기하지 않고 밀레니엄 팔콘을 완성한 후 입대했으면 좋겠다. 지난 감정, 고민, 성장통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후, 다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다녀오길. 아마 그가 끼운 건 레고 블록이겠지만, 그리하여 그가 완성한 건 '유승호의 청춘'이라는 작품일 것이다. 유승호보다도 우리가 더 영원히 기억할 푸르른 스무 살 인생.
이 줄거리는 원작의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쓴 것으로서, 스포일러를 다량 포함하고 있으니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뒤로'를 눌러주세요~!!
작년에 대박 히트친 드라마인 정은궐 원작 소설 '해를 품은 달'도 원작도 재미있었지만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훨씬 더 재미있었던 것처럼 (원작이 허술하진 않습니다만 인물이 매력있게 바뀌었어요.) 드라마 '야왕'도 만화 '야왕'의 기본 설정은 그대로 가져오지만 아주 많이 각색이 되었습니다. - 너무나 가난했고, 가난에 신물이 난 여주인공이 영부인이 되는 과정과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친 남자의 복수극
뭐.. 아시다시피 원작 만화는 박인권 화백의 대물 시리즈 3부작 중 야왕전인데, 이야기의 허술함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야해도 너무 야합니다;;;
심심하면 남녀의 교합이;; 사실적으로 그려지니 이건 뭐 좋다가도 좋지 않다는 결론이지요.ㅋ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삼류 싸구려 소설 같아요. -_-;
굉장한 미남인 남자 주인공은 변강쇠적인 남성의 그것(=대물)을 가지고 있으며, 제비 기술까지 연마하여 어떤 여성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주요 자리에 있는 모든 여성을 이용하여 승승장구한다. 이때, 이 여성들은 이 남자가 자기에게만 올인하지 않는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남자의 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 거짓말이 아니라 이게 진짜 주요 내용입니다;;; 근데 어떻게 여주인 다해(=수애)는 남자를 떠날 수 있는지가 읽는 내내 이해가 안됐음.ㅋ 그래서 원작의 상당 부분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선 권상우의 하류 - 원작에서와 그나마 비슷하지만 원작에서의 하류는 너무 무식해 보이는데 드라마에서는 멋있고, 순진한 모습이 강조가 되었네요. ex) '등신' (등의 신: 호스트바에서 하류의 등이 멋있어서 붙여진 별명.)
그 다음 수애가 맡은 천사라고 불리는 원작의 김다해 (드라마에서는 주다해로 개명.)
원작에서는 외모적으로 굉장히 화려한 느낌인데 수애가 맡은 다해는 차분하구요, 원작의 다해는 박사학위까지 땄다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망스럽고, 말이 너무 양아치 말투라서 몰입이 안됩니다. 원작 다해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표독스러우며, 심리묘사가 전혀 안되기 때문에 그냥 나쁜 X으로만 보입니다.
원작에서는 백도야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백도훈. 엄마의 말을 거역 못하는 마마보이로 나오는데.. 결국 다해(수애)에게 죽임 당하는 제일 어이없는 피해자
원작에서는 백도야의 엄마로 나와서 제주도에서 말타다가 오잉? 하고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그녀.ㅋ 드라마에서는 누나로 바뀌었지만 다시 엄마가 되는데...(???!!!) 캐릭터가 되게 매력적으로 바뀐 것 같네요.
암튼.. 줄거리 시작하겠습니다~
고아원에 이름도 없이 버려져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라고 이름 붙여진 하류, 그는 달동네 판자촌에 다해(천사라고 부름)가 전학오자 마자 한눈에 반해서 10년을 쫒아다닙니다.
하류는 다해가 돈이 너무 가난하여 엄마의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서 3일 간을 시체와 함께 지내는 것을 보고 다해를 반드시 호강시켜주겠다고 다짐해요. 다해한테는 전자제품 외판원(영업사원)이라 속이고 호빠 나가면서 몸 팔아서 돈 벌어서 다해 먹고 싶은거 해달라는거 다 해줍니다. 처음으로 큰 투자를 한게 다해 코수술이었고, 드라마에서는 구두로 바뀝니다.
다해가 코수술만 하면 클레오파트라 될 수 있을 것 같대서 코 수술 시켜주니
공부하고 싶다고 유학을 가야겠다고 해요. 판자촌에 살면서 유학까지;;; 하류는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갔다와라." 합니다.. (아.. 이건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구나..ㅋㅋㅋ) 암튼 하류한테 유학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열심히 몸 팔아서 일을 하지만.. 그래도 돈이 부족합니다.
호빠에 돈 선불 요구하지만 거절 당하고 밤낮으로 틀니빠진 할머니까지 상대해가면서 열심히 돈 벌지만 그래도 돈 모자랍니다.
호빠 사장님이 그러다 몸 다 베린다고 차라리 크게 한껀 하라고 해요.
하류는 전설의 제비라는 사람을 찾아 자기를 큰 공사(여자 등처먹는걸 공사라고함)를 칠 수 있는
큰 제비로 만들어달라고 하거든요.
석달동안 큰 수입없이 교육만 받느라 다해는 더 돈이 없어요. 근데 진짜 여자 심리 너무 안나와서 짜증 이빠이;; 전혀 고마워하지도 않아요;; 다해가 전화와서 나 알바하면서 공부한다고 이게 뭐야고 ㅈㄹㅈㄹ하거든요.
전화와서 뭐 양놈이 자기 팬티 10불에 산다고 했다고 10불이면 몇시간 알바비인줄 아냐고
너 이럴려고 나 대학보냈냐고 ㅈㄹㅈㄹ.. 나 몸팔아서 공부하라는거니? ㅈㄹㅈㄹ 이런 식이에요;; 하류는 맘이 급해져서 제비사부를 막 졸라요. 이 사부가 온갖 정보를 다 알려주는데.. 진짜 웃긴 건 시골에서 인터넷만 하는 할배 정도인데.. 이 세상 여자들의 정보를 다 알고 있구요, 재벌가에 CC TV도 달아놓고 하여간 황당합니다. 암튼.. 하류가 모 상속녀를 꼬셨는데... 알고보니 상속녀가 새디스트라 생리 전후로 열흘 정도 채찍질을 해대요.
하류는 그래도 이걸로 몇년간 우리 다해 유학비 걱정 없다면 맞아 주겠다며 등짝에 피 나도록 맞아가면서 다해 뒷바라지 다 해주고... 다해 귀국할 즈음에... 상속녀는 사실 니가 여동생이 아니라 애인 뒷바라지 하는 거 알고 있었다며 그동안 고마웠다고(뭐가?? 돈은 니가 냈잖아?)빠이 빠이 선언합니다.
드디어 다해가 귀국하는데!!!!
다해는 경영학 전공해서 엄청난 논문을 두 편이나써서 공항은 기자들로 난리법썩인데요.. (이 만화에 등장인물은 전부 세계 최고 수준의 박사들이에요.. 전부 존나쎄 캐릭;;ㅋㅋ)
근데 공항에서 기다리는 하류를 보고도 다해는 모른 척 ~
착해빠진 하류는.. 그래 내가 여기서 나오면 우리 다해 쪽팔려서 안되지. 이렇게 눈치 없는 멍청한 놈이다.. 내가.. 이러면서 숨어 있으면서 며칠을 기다려요.
당연히 다해는 연락이 안오고... 하류가 다해를 찾아가는데... 다해가 젤 좋아하는 달빛 안개꽃 들고 가려고 (약간 뿌연 빛이 난다나..) 전날 밤새서 한 시간에 한번씩 물 뿌려가며 만들어 가요. 근데 다해는 '잠깐 나가서 기다릴래?' 이러더니 하류 내보내고 나서 경호팀에 전화해서 저런 잡상인 나한테 들어붙지 못하게 경호 잘하라고 소리 질러요. 경비원은 애인이라고 큰소리치더니 꽃배달원인가 봐요? 이러고요.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다해 회사 방에 찾아간 하류는 꽃이 방바닦에 내동댕이 쳐져 있는 걸 목격 후,
다음날 뉴스에서 다해랑 대기업 아들이랑 열애설을 보게 되요.
하류는 다해 찾아가서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내가 더 잘해준다고 울고 불고..
다해는 너 지겨워. 나도 잘 살려면 상류사회 입성해야돼.
하류는 그 남편될 대기업 아들(백도야) 찾아가서 다해 돌려달라고 하면서 발에 못을 박아요.. 다해 돌려달라고... 하지만 역시나 걍 끌려나가요.. 괜히 발만 다치고 ㅠ
제비 싸부는 인생 공부 했다 생각하고 포기하라고 하지만 하류는 "나 어떻게든 복수할꺼얌!!" 이럽니다.
(이때만 해도 할 줄 아는 건 몸 파는 거 밖에 없는 니가 뭔수로? 이 생각이었죠.)
하류는 그 대기업 아들(백도야)의 엄마인 KDC 대기업 총수인 드라마의 백도경(일찍 남편과 사별 후 혼자 기업을 이끔)를 꼬시기로 결정, 그녀가 승마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제주도에서 말공부를 하며 이 아줌마 꼬실 준비를 하거든요.
한편 서울에서는 막상 아들이랑 다해랑 결혼했지만, 이 총수 아줌마는 다해가 마음에 안들어서
맨날 미아리로 돌아가라고 속을 박박 긁고 고부갈등, 다해는 KDC사에서 자리 좀 잡아볼라고 설치고, 아들은 우왕좌왕...
총수 아줌마는 넌 그냥 씨받이야.. 울 아들머리가 나빠서 니 머리만 빌릴 거라고~
아무튼 고부갈등이 극이 달합니다.
그러다 총수 아줌마가 몇 억 짜리 비싼 말 사들여오라고 다해를 공항으로 보냈는데
기상 악화로 비행기들이 착륙을 못하게 되요.
그 사이에 비행기 안에서 그 말이 갑자기 아파하고 수술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부하직원들이 빨리 공항에 압력 넣어서 우리 비행기부터 착륙시키자고 다해에게 제안합니다. 근데 다해는 대기업이라면 자기 애마를 위해 꼼수를 쓰면 안된다면서 그 말 안락사 시키세요~ 하고 죽여버립니다. 그게 차라리 기업 이미지에 도움될 거라고... 몇억짜리 말이 그렇게 떠나자 백도야 엄마 완전 폭발해서 둘이 이혼하라고 난리피다가 열받아서 말 타러 제주도에 가요... 가서 야성이 흐르는 벌거벗은 남자 하류를 만나 변강쇠 하류한테 푹... 나.. 드디어 여자인 걸 깨달았어.. *&^#())(!* ㅋㅋㅋㅋ 나 참;;;
아들내미랑 다해랑 엄마를 의심하지만... 이 엄마는 당당하게 나 애인생겨서 내 인생 더 즐길꺼야..
그러고 몇 달 후 아들 백도야가 잠깐 출장간 사이에 총수 아줌마가 하류를 데리고 서울에 돌아와요.
다해는 헐;;; 너였냐? 이러면서 하류보고 "남편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라~" 이러고 돈 주거든요. 하류는 노노노;; 니가 돌아가야지.. 이러고 둘이 싸우고요..
그러다 백도야가 돌아오는데... 발에 못박은 놈 얼굴을 어찌 잊겠습니까?
그래서 노발대발 엄마 미쳤어?????? 끝내!!!!!!!!!!! 이러지만 엄마는 니가 끝내 ㅋㅋㅋ 나도 이제서야 찾은 내 행복 포기못해!! 이럽니다..
다해한테가서 나 피터팬 증후군인가봐 ㅠㅠ 우리 이혼하자ㅠㅠ 미안ㅠㅠ 이러니까
다해가 너 같은게 사내놈이냐!! 늙어빠진 니 애미(이런 표현이 나옴)를 못이기냐.고 하면서 굉장히 저속한 표현을 많이 써요.. (이게 진짜 이상함. 작가님은 왜 이리 저급하게 묘사를 하는지..) 남편이 빡쳐서 하류한테 총들고 찾아가는데... 하류는 쏠 지도 못할게.. 하면서 풋~ 비웃자 아들 또 ㅡㅡ;;♨ 열받아서 돌아가는데.. 하류가 아들 두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방에서 불이 나고, 경찰에서는 하류가 대기업 아들을 죽일 이유가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방화 및 살인 혐의로 감옥살이..
사실은 다해가 버려질 까봐 남편 죽여서 하류한테 덮어씌운 거;
암튼 백도야(드라마의 백도훈.. 유노윤호 좀 있음 죽어요..ㅠ) 죽고 나니까 총수 아줌마가 내가 남자에 눈이 멀어서 아들을 죽였네 ㅠㅠㅠ엉엉ㅠㅠㅠㅠ 이러고 후회하는데
다해가 와서 아들은 죽었지만 손자는 있어요 ㅠㅠㅠ 어머니 ㅠㅠㅠ 이러면서 임신사실 밝힙니다. 시엄마는 말을 좋아하는 여자인 만큼 씨종자(?)를 중요시하는 여자였거든요.ㅎ 다해를 며느리로 삼은 것도 아들이 머리가 딸리니깐 그 부분을 채워줄 똑똑한 여자를 원해서였거든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아들을 가져?????????? 그것도 죽은 하나 뿐인 내 아들의 씨를??? 이리 되었죠. 급 전세역전되서 다해는 이제 시어머니에게 경영권도 인계받고 굉장히 승승장구해요.
사실 다해의 애는 딸이었지만 의사 친구를 시켜서 계속 아들인척 연기하고,
딸 낳자마자 쓰레기처럼 버려서 입양보내고 대충 신생아 아들 구해와서 자기 아들인척 키워요.
시어머니는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독립된 회사도 차려주는데..
다해가 초호화 레스토랑 노블레스를 차려서 유럽까지 진출.. 승승장구..
그 사이 깜빵간 하류는 무기징역형 받고요.
하류는 이대로 끝낼 순 없어~~!!! ㅠㅠ 이러면서 갖은 수를 다 쓰는데... 하류가 우연히 만난 검사가 알고보니 호빠 시절 하류 단골 손님!!
아싸~ 누님 나 좀 살려줘ㅠㅠ 하고 매달리고, 검사는 자기 호빠 죽순이인 거 알려질까봐 머리 써서 우발적 살인으로 판결, 7년형을 선고받아요.
다해는 7년 뒤면 하류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구나 하고 매일 노심초사하다가
깜빵 안에서 죽여달라고 자기 수하에게 명령합니다만... 수하가 머리가 좀 돌아가는지.. 그건 너무 위험하니 딱 깜빵 나오는 날 죽이자고 하죠. (너무 이해가 안되는건 어떻게 이렇게 상류층 사람이 살인을 이렇게 우습게 아는지..;;)
암튼 그러는 중에 아직 하류 나올 날이 안 되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하류를 만나요.
노발대발하며 하류 깜빵에 있는거 맞냐고 했는데 하류는 깜빵에 있었고,
알고 보니 하류는 쌍둥이었는데 그 형을 다해가 본거였어요.
그 형은 이름이 심봉구고, 봉구는 일찍이 어머니를 보내고 아픈 아버님을 보살피며 살고 있는 살아있는 보살이에요.
작은 요식업계 체인점 부뚜막에서 너무 유능해서 주위의 견제와 질시가 심하지만 그 누구가 욕을 해도 웃고 다 맞춰줘서 호구 봉구라고 불립니다. 봉구의 아버지는 심장이 엄청 약해서(종이심장) 조금만 충격을 받으면 쓰러져요.
그런 아버님이 자기 몸이 점점 나빠지니깐 봉구에서 어릴때 버린 쌍둥이 동생에 대해 말하면서
죽기 전에 동생을 보고 싶구나.. 이 애비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다오 ㅠㅠ 이렇게 부탁해요.
착한 봉구는 동생 찾아 사방팔방 다니다 동생이 깜빵에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동생 찾아가지요.
하류 : 버려놓고 왜 왔냐!!!!!!!!
봉구 : 그래도 니 아버지야!!!!!
뭐 대충 이런 대화를 하다 봉구가 출소하는 날 데리러 올게.
아버지에게는 하류 깜빵에 있다는 거 들으면 종이심장 찢어질까봐 그냥 대충 외국에 있다고 합니다.
약속대로 하류가 출소하는 날 봉구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같이 잠복하며 기다리던 다해 수하 킬러들은 밖에 있는 봉구를 보더니
사진이랑 얼굴 대조해보고 하류 맞네 하고 죽여요.
봉구는 너무 착해서 죽을 때 자기가 하류 아니라고 말도 안하고 그냥 죽어줍니다.
하류 나와보니 봉구가 없으니 황당하네요.
나 데릴러 온다더니.. 이러는데 바닦에 봉구 폰이 있구요.
뭐지? 하고 보니 차도 열려 있고, ... 대충 눈치를 차리게 됩니다. 차 안에 지갑도 있고 주소도 있고 그래서 봉구 집으로 찾아가요.
집에 가니 아버니가 니 동생 어쨌냐면서 동생 데려오라고 하는데요,
하류는 깜빵에서 봉구한테 아버님 심장이 약해서 조금만 충격 받아도 죽는 종이 심장이라고 들어서
이러고 사표를 찢고 저 다시 일할래요.. 이렇게 둘의 요식업 전쟁이 일어납니다. --------------------------- 이게 대충 2부 정도 -----------------------------
이렇게 복수극은 요식업간의 대결로 구도가 무지하게 커져요.
봉구는 부뚜막에서 굉장히 실력가였는데 자기 노하우 다이어리를 10년치 적어둬요.
그걸 보고 하류는 밤새서 공부하고요.
봉구가 일하던 곳은 부뚜막이라고 저가 음식 프렌차이즈였고,
다해가 하는건 초 고급 프렌차이즈 노블레스였는데...
둘이 붙어도 승산 없다고 사장은 그냥 우리 갈길을 가자고 하지만..
하류가.. 뭐 어쩌구 저쩌구 잘 해서 전쟁을 선포합니다.
중간에 다해가 그 부뚜막쪽 브레인이 하류라는걸 알게 되는데...
더 빡친 다해는 노블레스를 막 키워가지만 하는 부뚜막이 계속 방해해요.
대충 이런 식으로요. 노블레스가 모델로 어떤 연예인을 쓸려고하면 하류가 그 연예인 빼와서 부뚜막 모델로 쓰고,
노블레스가 접시에 거장의 글자를 쓸려고 하면 하류가 빼와서 또 그 글자 자기네 접시에 넣고,
(제비사부가 노블레스 본부에 감시 카메라랑 도청기 설치해놓고) 뭐 할려면 부뚜막이 방해하고 이런 식이에요. (이게 말이나 되냐고요.ㅋ 암튼 이 모든 것에서 하류의 변강쇠 스킬이 발동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잘 나가던 부뚜막에서 갑자기 식중독 환자가 막 생겨서 부뚜막 이미지 급 하락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노블레스 연구원이 자기가 과잉 충성에서 한 일이라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요. 사람들은 노블레스가 시켜서 라이벌 회사인 부뚜막 죽일려고 저런 거 아니냐 이러면서 노블레스 이미지 하락,
당연히 하류가 그 직원 꼬셔서 한 자작극.. 이 때 역시 하류의 변강쇠 스킬;;ㅋ
그렇게 노블레스가 엉망되고 다해는 빡쳐서... 여당에서 높으신 분들 찾아가서
아빠, 오빠 어쩌구 부르며 "부뚜막 좀 부셔주세요~ 뿌잉뿌잉~~" 이럽니다..ㅋㅋ
권력자는 당연히 그래, 그래~ 털어서 먼지 안나는 회사 있냐. 우리 다해 걱정마~ 내가 다 알아서 해줄께~ 이러구요.
그런데 고새.. 또 하류가 현 정권의 전직 대통령의 막내 딸을 꼬셔둔 겁니다..
그 막내딸은 사고를 당해서 그 이후로 하반신 마비되어.. 웃을 때마다 똥을 지립니다. 암튼 사고 이후 우울증에 걸려 지냈지만 하류를 만나 첨으로 웃었대요~ 아빠인 대통령은 그 딸이 해달라는거 다 해줍니다. (전직 대통령인데 굉장한 실세라서 정치인들이 쩔쩔 매요.)
그 딸은 꽃돼지라고 불리는데.. 암튼 꽃돼지를 꼬셔서 하류가 아까 그 여당 권력자보다 더 높은 거에요.
꽃돼지는 사실 하류가 자기 이용할려고 꼬신거 알고 있었지만 하류가 그 똥 다 닦아주면서 옆에 있어주고, 같이 자고.. 이러면서 꼬셔요. 꽃돼지는 그래서 하류 속셈 다 알지만 하류한테 넘어가고요.
꽃돼지는 다해랑 하류 사이도 알고 있어서 다해 볼때마다 속을 박박 긁으면서 다해 자극.
암튼 요식업 전쟁은 해외로도 나가게 되고 부뚜막은 프랑스에도 지사내고 승승장구하고... 진짜 말도 안되는 스토리로 승승장구해요.
대충 이런식. 어떤 사람이 프랑스 어떤 다리 위에서 자살한다고 막 그래서 경찰이랑 5시간째 대치중이었는데..
그러다 그 사람이 자기 부뚜막의 뭐뭐 음식 먹고 죽고 싶다고 하고.. 그게 생방송 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이라니 짱 맛있나봐! 나도 먹어보자..
그 음식을 먹고 그 자살 소동자가 막 울면서 내려오는데..
알고 보니 뭐 그 음식 아래에 자살 소동자의 아들 사진이 있었음. 이건 당연히 부뚜막의 센스~
이런 감동 스토리가.. 부뚜막 인기 급상승..
또 다른 마케팅은 어떤 거지가 부뚜막에서 음식을 먹고 돈 안내고 도망가는데.. 부뚜막 직원이 택시타고 막 쫒아와요. 이미 음식값보다 택시비가 더 커진 정도의 거리;;
그러다 결국 그 무전취식 거지가 잡히는데... 쫓아온 부뚜막 직원이 그 거지분 손을 꼬옥 잡으면서
사실 우리 가게 오픈 행사로 모든 음식이 무료였다. 도망가지 말라. 이런 말을 하면서
혹시라도 신사님(거지를 말함)이 마음 한켠에 이 일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할까봐 따라왔다고 하고..
거지 폭풍 눈물, 폭풍 감동.. 당연히 이 일도 다음 날 대서특필 되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근 둘 다 하류가 꾸민 일인데.. 이외에도 영국 공주, 영국 황실 기타 등등 다 꼬심.. 너무 황당하고, 속보이고, 여자 꼬시는데 바쁜 하류가 이런 건 언제 다 기획하는지..
암튼 뭐 대~충 이런 식으로 해외에서도 부뚜막 승승장구...
그 사이 다해는 잘 나가는 하류를 보면서 빡치고 있었고요..
그리고 꽃돼지를 보면서 재벌로 안된다면 내가 권력을 잡겠다고 다짐을 해요.
대한민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었는데
여당 후보 지지율이 70%고 야당후보 지지율이 10%였음
게임이 안되는 분위기 ㅋ 물론 여당쪽은 꽃돼지파임. 꽃돼지쪽 권력이에요.
다해는 야당 후보를 찾아가 이제부터 지지해주겠다고 하니
야당 후보가 왜 지금 권력에 꼬투리만 잡히게 이런 쭉정이를 지지하냐 하지만
다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후보님이 너무 좋아요.. 뿌잉뿌잉~
이 야당후보는 몇 년간 아픈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 생명은 길어야 2년 정도래요.
이 야당후보는 보수층을 자극하며 표를 모으기 시작해요. 대한민국 국력을 키우고 핵 보유하겠다 이러면서 홍보하다가 어떤 청년한테 칼 맞는데..
보수층의 마음이 흔들림. 당연히 다해가 짠 거에요. (대통령 만들기 태스크 포스;;)
자작극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찔린 자리가 너무 위험해서 이건 자작극이라기엔 무리가 있다고 결론나요.
암튼 대선 후보는 칼빵 맞고 누워있고요,
다해는 대선후보 마누라한테 가서 어차피 2년 뒤면 죽을 목숨인 거 후보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달라고 부탁.
마누라는 남편의 꿈을 위해서라면 내가 희생하겠다고 하면서 아픈몸을 이끌고 휠체어 타고 다니면서 홍보하러 다니고,
맨날 피 토하고 그런거 다 방송으로 전해지면서 야당 후보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그 와중에 가정적인 이미지를 앞세웠던 여당후보의 과거 스캔들이 터지고요.
옛날에 임신 중인 애인 버렸었는데 그 버림받은 애인이 폐인처럼 살고 있었고,
다해 쪼게서 빨리 기자회견하자고 했지만 그 버림받았던 애인은 이게 사랑이라며 굳게 입 다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의 딸이 울 아빠가 대선후보였냐면서 다 보상받을꺼라고 막 난리치다가
여당 후보가 그 딸을 죽임, 당연히 다해가 깔아놓은 덫이고요. (조금 헤깔림)
자기 여자 버리고, 딸 죽여 대통령 되려고 한 여당후보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그에 비해 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야당 후보는 지지율 막 올라가요.
다해는 안심이 안되어 야당 후보 마누라 담당 의사한테 가서
어차피 저 여자 죽을껀데 대선 당일이나 전날에 죽으면 얼마나 드라마틱하냐고
그러면 우리 후보님 당선 확정이라고 저 여자 빨리 죽이는 방법 없냐고 막 몰아부치고,
그 말을 야당 후보 마누라가 듣고 다해한테 와서 어차피 목숨 버릴 각오 했다고 하면서 고마워해요;;; (자기 죽이려는 여자한테!!!!)
암튼 야당 후보 홍보 하다 결국 마누라 대선 전에 죽고, 온 세상이 눈물바다가되며 야당후보 당선!!!! ----------------- 여기까지가 3부 쯤 될까요? ---------------------------------------------
권력을 잡은 다해는 그동안 거슬리던 것들 싹쓸이합니다. (대통령 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싹쓸이;; 야당 후보 당선인도 반대하는데.. 암튼 싹쓸이...ㅋ헐;;)
충격 받아서 꽃돼지 아빠인 전직 대통령 죽어요.
꽃돼지도 다해한테와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앞으로 쥐죽은듯 살겠다고 머리 조아리지만
다해는 꽃돼지가 사죄하러 왔을 때 반지 보고 이거 하류가 준 반진데 아직도 끼고 있네? 이러고 빈정거려요.
그러니깐 다음날 꽃돼지가 반지낀 자기 손가락을 속죄의 의미로 다해한테 보내지만..
꽃돼지도 깜방 보냅니다. 무셔라.
다해는 부뚜막 간부 다 감옥 집어넣고 전에 자작극한 그 연구원 감옥에 넣고 암튼 피바람이 불어요. 한국 부뚜막은 이미 초토화. 망한 거죠. 뭐.. 그 뒤로 더이상 안나오는 거 보면.
하류는 한국에 발 들여 놓는 순간 깜빡가거나 죽임 당할 위기라서 귀국을 계속 늦춰요.
다해는 하류가 한국을 안 오니깐 하류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서 협박을 해요.
그러자 그때까지 계속 하류를 도와주고 있었던 제비 사부가 (요식업 이후에는 아버지 돌봐줌)
그 종이심장 하류 아버지 (봉구 아버지)에게 "사실 봉구는 전에 죽었다. 갈기갈기 칼 맞아 죽었다.
봉구는 아직도 시체도 못찾았다. 지금 있는게 당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해줘서 그 아빠 당연히 충격 받아서 죽습니다.
사부는 하류한테 전화해서 내가 니 아비 자연사 시켰다며 어차피 죽을 목숨이셨던 분 때문에 니 목숨 버리지 마라고 하고,
네 아버지 죽인 벌은 평생 사죄하며 살겠다고 해요. 하류는 아버지 때문에 비행기 탈려다 그 소식을 듣고 그냥 유럽에 있구요.
아버지 죽여도 안 오니깐 다해가 이제는 그 싸부를 죽이는데..
싸부가 죽을때 하류한테 전화해서 이제 나도 죽으니깐 절대 오지 말라고 합니다. 정말 막장 OF 막장 스토리죠?? ㅡㅡ;
하류는 이제 아무 희망도 없고.. 하류 옆에는 몇 명이 하류가 진짜 남자라며 떠나지 않아요.
그러다 하류는 영국인가? 어디에서 또 공주를 꼬셔서 돈과 권력을 차근차근 쌓고 있었구요.
다해가 하류가 한국에 안오니깐 해외에서 죽일려고 했는데,
공주를 꼬셔놔서 하류 죽이면 국제적 문제가 되서 손을 못대고 있어요.. (웃기죠? ㅡㅡ;;)
암튼.. 그러다가 하류가 아차!! 그 딸이 있었지!!!!!!!!!! 이러면서 다해가 버린 딸을 데려와서 아저씨랑 결혼하자~ 이러면서 잘 키워요. (얘를 데려올 때 14살.. ㅋ 나중에 18살까지 키우니까.. 20년이 넘는 대하드라마임;;; )
중간에 다해가 하류를 죽일려고 또 일을 꾸미지만 하류가 대역을 써서 살아남고,
다해는 하류가 죽은줄 알고 있고요.. 뭐 하여간 황당 + 너무 허술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에요.
한편 한국에선,
다해가 헌법을 바꿔서 이번 임기부터 연임이 가능하도록 하고..
그런데 실제로는 대통령이 아니라 다해가 권력의 정점이었으니 세간에서 여자가 나라 말아 먹는다고 맨날 데모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나고 그래서 다해가 청문회에 나가게 되는데..
청문회 가기 전에 스스로 소량의 독을 먹고 독살의 위기에 있는 척 해서 청문회를 빠져나가고.. 하여간.. 갈수록 황당해져요.
도저히 위기 타국의 방법이 없으니까 이럴 때는 전쟁을 해야 한다며
일부러 북한이 매년 인사차 공격하는 연평도를 이용해서 북한이 먼저 넘어왔다~ 이러고 총쏘고 공격개시~
전쟁 시작!!
승전의 공이 있으면 대통령 연임 확정에 자기 갖고 사소한 꼬투리 잡지 않을꺼라고 합니다.
대통령한테 이건 너에게 최고의 면죄부가 될 거라면서 거의 명령; 하구요.
대통령은 전쟁은 안된다고 하지만 이미 아래 장군들은 다 다해한테 넘어가 있는 상태에요.
대통령은 목숨걸고 북한에 김정일 만나러 가고...
다해는 상관없이 좀 있다 10시간 뒤에 전쟁 선포하는데요..
갑자기 친딸(레미)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요.
다해가 전화를 받자마자 느낄 수 있는 친딸의 느낌~ 지금 일본이 있다고 곧 올거래요.
딸이 너무 밝고 명랑하고 행복하게 전화 걸어서 그동안 엄마가 미웠는데 이젠 괜찮다고,
자기 너무 행복하고 결혼할 사람도 있다고 그 사람이랑 지금 한국 가서 엄마 보고 싶다고 해요. 하지만 엄마가 지금 전쟁중이랑 안된다고 하니까 우째 우째 얘기해서 청와대로 헬기타고 바로 오기로 해요.
딸이랑 통화하고 다해는 눈물을 흘리면서.. 넌 잘 컸구나.. 이러면서 딸을 기다리는데 부하가 와서 사실 그간 걱정할까봐 말은 못드렸지만 하류가 살아있고, 아마 하류가 딸을 데리고 있는 것 같다고 해요.
다해는 눈물 뚝~ 그치고 내가 겨우 딸 있으면 지를 못 죽이는 신파 아줌마라고 생각했나 보지?
하고 총을 들고 헬기를 기다려요. (진짜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행복한 딸이랑 오는건 하류가 아닌 외국인 남자.
그 남자는 모로코 왕자ㅋ. 실권을 잡고 있는 왕자ㅋㅋㅋㅋ 미칩니다.ㅋㅋㅋㅋ
딸이 말하길 하류아져씨가 쓰레기처럼 살고 있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줬다고 해요. 처음에 하류가 레미를 찾았을 때 레미 진짜 양아치 같이 행동해요. 그것도 한국 양아치... (근데 작가님이 원래 그런 말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 ) 암튼 딸이 하는 말이 하류 아져씨가 이거 갖고 있었는데.. 하고 보여주는게 바로 다해의 어릴 때부터 커가는 모습이 찍힌 사진 수십장, 특히 다해가 하류랑 행복했던 시절 사진들 그런 것들..
딸은 하류 아저씨는 엄마랑 그냥 친구라고 했는데 엄마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니깐 이런걸 다 갖고 있는 거겠지? 이러면서 떠나요.
드디어 다해가 눈물을 흘립니다.
그동안 하류가 복수하면서 다해를 마주치면 늘 해오던 말이 있었는데요.
"지금 니가 있는 그 자리는 니 자리가 아니니 판자촌으로 돌아가라.
네가 살던 그 집은 내가 사뒀다. 다시 거기로 가라. 그럼 이 모든 복수를 끝내겠다."
다해가 나가보니 하류가 그 집 열쇠를 들고 있었고, 다해는 그 열쇠를 받아서 그 판자촌 집으로 갑니다. "나는 쓰레기처럼 버린 내 딸을 니가 이렇게 잘 키워줬구나, 날 충분히 이기고도 남았어. 난 너에게 안돼." 이럽니다. 빈틈이 없는 다해의 빈틈인 친딸을 찾아서 메꾸어준 하류.. 다해의 뒤에서 이렇게 말해요. "너는 내 안에 산다." 이 부분은 조금 ... 찡했어요.
암튼 다해는 예상한대로 자살.
다해가 죽기 전에 전쟁 하지 말라고 전화해서 전쟁 안하고
다해가 죽으니 하류가 3일동안 시체 옆에서 울고... 만화는 이렇게 끝이 나요.
하류가 다해 죽기 전에 아버지랑, 제비 사부랑, 심봉구 납골당에 찾아가거든요. 거기에서 하류가 그래요. "나는 머리가 나빠서 복수 같은 거 잘 못하겠다." 이러니까 제비 사부가 '그래 잘했다. 죽이는건 1번 복수하는 거지만 용서하는건 평생 죽이는거야' 뭐 이런 말을 하고..
나 또한 그 당시 만화방...이라고 하면 음침하고 불량한 학생들만 가는 곳으로 인식을 할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있다.
1980년대에 엄청난 히트작이었던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필두로 하여... - 당시 '공포'라는 말이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준다고 하여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바뀌어 영화화됨.
그 이후 허영만 작가 원작의 비트가 정우성을 주연으로 하여 영화화되었고, 그 외에도 타짜, 쩐의 전쟁, 꽃보다 남자, 장난스런 키스 등의 원작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송일국 주연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도 만화가 원작이며, 인터넷 웹툰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아파트, 26년 등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최근 권상우, 수애, 유노윤호 주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화제의 드라마 야왕은 박인권 화백의 대물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역작(?)인 야왕이 그 원작이다. 대물 시리즈에 계속 출연 중인 호스트바 출신 제비 '하류'가 그 주인공인데.. 19금 만화가 원작이다 보니 굉장히 야하고 자극적인게 그 특징이다. (대물 시리즈의 대물이... 그 대물일줄이야..;;)
빈민굴 고아원에 전학원 다해를 첫 눈에 보자 마자 반한 하류는 그녀를 천사라고 부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목숨까지도 걸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던 하류는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팔아서 그녀를 대학도 보내고 유학도 보내는데.. 드라마에서 악녀라고 손가락질 받는 다해는 만화에서는 정말 미안함을 모르는 더 심하게 뻔뻔한 악녀이다.
되게 웃긴 것은 만화에서는 주인공 하류가 전직 호빠 출신 전문 제비라서 모든 여자들을 마음만 먹으면 후릴(?)수 있다는 설정인데.. 이게 정말 황당무계한데 만화 속에서는 스토리 진행에 큰 역할을 한다. 필요할 순간 마다 그 집단의 주요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여자를 꼬셔서 일을 해결한다. 그래서 만화의 소제목 중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하하;;;
드라마에서는 만화의 황당한 설정을 다 없애지는 않고 만화에서의 몇 몇 장면은 그대로 가져왔다. 이를테면 다해가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서 3일간 시신과 함께 있는 장면은...
이렇게 바뀌었다.
아무래도 드라마에서는 만화만큼 극적인 감정표현을 할 수가 없으니 연출로 그것을 조절할 수 밖에 없을 듯.
몸 바쳐서 다해를 뒷바라지 하는 하류,
다해에게 구두를 사주고 대기업 면접을 보러가는 그녀의 구두를 만원버스에서 필사적으로 보호해준다. 그것은 원래 그가 다해에게 성형수술을 해주고 그녀를 만원 지하철로부터 보호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헤어졌던 쌍둥이 형을 교도소 안에서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여러 컷을 통해 보여주었지만, 만화에서는 달랑 두 페이지에 넣는 것으로 해결한다.
원작에는 없었던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원래 있던 설정이 바뀌기도 했다.
이에 대한 원작자의 생각은 어떨까?
이 드라마가 하도 화제가 되길래 궁금해서 원작을 본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원작 야왕은 다해가 너무 심하게 독하디 독한 악녀이고, 하류와 여자들과의 관계가 너무 끈적, 질퍽거려서 각색을 많이 하지 않고는 드라마화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헌신짝처럼 버림당함 + 사랑하는 딸의 죽음 + 쌍둥이 형의 죽음으로 하류는 드디어 복수의 칼을 뽑아 들었고, 하류가 형을 대신하여 변호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이 드라마의 원작이 만화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하지만 그 설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원작과 달리 <야왕>이라는 ‘드라마’가 갖는 재미이자 경쟁력이다. 조금씩 바뀐 캐릭터와 스토리, 각색이 힘이 만화적 설정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하류의 복수는 이제 시작이다. 그동안 지나치게 이용당하고 희생하기만 한 하류가 욕망의 화신 주다해에 맞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무척이나 기대된다. 각색으로 새로운 작품이 될 드라마 야왕을 기대하며, 마지막이 너무 조잡하게 끝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