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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수양대군을 욕하는 건 현대의 시각이니 어쩌니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충효 사상이 강했던 그 당시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이 된 수양대군이 얼마나 욕을 먹었으면 천재적인 학자였던 신숙주가 몇 백년 간 숙주나물로 불리며 미움을 받았을까? 

또한 몇 십년간 왕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간 한명회가 최악의 간신 이미지로 남아있을까?

왜 그렇게나 수많은 사람들이 세조에 대항하여 성공 가능성도 미미한 반란을 그렇게 많이 일으켰을까??


그는 왜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되고 난 후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만 했을까?

그가 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죽은 현덕왕후의 묘를 파기까지 했을까?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장녀인 세희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는 금계필담 같은 야사가 널리 널리 퍼진 이유가 무엇일까??



수양대군과 그의 공신(?)들은 그들은 본인들의 권력 쟁취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세조에게 충성심 경쟁을 하던 시대에 쓰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쌀이 찌푸려지는 부분이 많은 것은 왜일까?

그래도 수양대군과 그 아래 공신들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정말로 김종서가 종친들을 누르고 권세를 부리려고 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더라. 조금만 더 자세히 조사를 해보면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사상으로 보아도 수양대군의 행위는 패륜 중의 패륜였기 때문에 수양대군의 후손들조차도 김종서, 사육신과 생육신들을 만고의 충신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1453년 10월 계유정난

김종서 - 우의정. 수양의 부하 임운에게 철퇴를 맞고 자리를 피했다 은신처에서 피살됨
김승규 - 김종서의 장남. 김종서와 함께 피살
김승벽 - 김종서의 차남. 김종서와 함께 피살
김승유는 김종서의 3남이란 말도 있고 손자라는 주장도 있음
민신 - 이조판서. 입궐 중에 삼군진무 서조에 의해 피살
이양 - 우찬성. 입궐 중 피살
조극관 - 병조판서. 입궐 중 피살
황보인 - 영의정. 우의정 김종서, 좌의정 정분과 함께 수양의 주요 정적. 입궐 중 피살
황보석 - 황보인의 아들
황보은 - 황보인의 아들
황보흠 - 황보인의 아들


1453년 이징옥의 난

이징옥 - 김종서의 최측근, 함경도절제사. 종성판관 정종에 의해 피살


1454년

안평대군 이용 - 유배 후 사사
정분 - 좌의정. 유배 후 사사


1456년

엄자치 - 내시, 문종의 상선
혜빈 양씨 - 세종의 후궁, 교수형


1456년 제1차 단종복위운동(병자사화)

사육신

성삼문 - 전 집현전학사, 승지, 거열형
박팽년 - 전 집현전학사, 형조참판, 거열형 예정일 전날 옥에서 고문독으로 사망
하위지 - 참판, 거열형. 부인과 딸은 권언의 노비
이개 - 전 집현전학사, 거열형
유성원 - 집현전학사, 음모 발각 후 자결. 부인과 딸은 한명회의 노비
유응부 - 무관 출신, 동지중추원사, 거열형. 부인이 권반의 노비가 됨

기타 관련자

권자신 - 단종의 외숙부, 호조참판, 거열형
김문기 - 공조판서
박종림 - 박팽년의 숙부
박중림 - 박팽년의 아버지
박기년 - 박팽년의 동생
박대년 - 박팽년의 동생
박인년 - 박팽년의 동생, 교리
박헌 - 박팽년의 장남
박분 - 박팽년의 차남
박순 - 박팽년의 3남
박쟁 - 성승, 유응부와 함께 별운검을 서기로 내정됐다 취소
봉여해 - 박팽년의 매부
성승 - 무관 출신, 성삼문의 아버지
성삼고 - 성삼문의 동생, 성승의 차남. 처자식이 정창손의 노비가 됨
성삼성 - 성삼문의 동생, 성승의 3남, 정랑. 부인이 홍달손의 노비가 됨
성삼빙 - 성승의 4남, 부사. 부인이 권개의 노비가 됨
성맹종 - 성삼문의 아들
성맹첨 - 성삼문의 아들
송석동
윤영손
이말생 - 사육신 유응부의 사위의 형. 부인과 딸이 유수의 노비가 됨
이유기 - 도진무, 이개의 사촌동생. 부인과 딸 셋이 정창손의 노비가 됨
이의영 - 별시위, 유응부의 사위. 부인이 양정의 노비가 됨
이지영 - 이말생, 이지영의 동생. 부인과 딸이 홍순로의 노비가 됨
이휘 - 공조참의, 이개의 이모부. 부인이 이계전의 노비가 됨
최득지
최면
최치지
허조 - 집현전 부제학, 이개의 매부. 어머니, 누이가 곽연성의 노비가 됨

이때 처형된 사람이 최소 70명 이상


1457년 제2차 단종복위운동

금성대군 - 순흥에 귀양갔다 단종복위음모가 발각되어 사사
손서륜 - 전 집현전학사, 단종 양위 후에 사임, 거열형
송현수 - 단종의 장인. 장 100대를 맞고 관노가 되었다 교수형
이보흠 - 순흥부사. 금성대군의 계획을 고했으나 동조한 죄를 물어 처형
단종 이홍위 - 유배지 영월에서 왕방연에 의해 교수형
금성대군이 귀양간 순흥의 향리들까지 모조리 처형

1461년

정종 - 문종의 사위, 단종의 매형, 영양위, 거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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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카페 역사 스페셜  역사 토론 게시물



11월 2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1)



■ 세조 (1417 - 1468, 재위 : 1455-1468)는 어떤 인물이었나?

조선 7대 임금으로 1455년 에서 1468년 까지 약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시호는 혜장(명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처음에는 함평대군이었다가 진평대군에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 졌다. (1445-세종 27)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이 학문에 능했던 데 비해 수양대군은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 성격이 대담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7대 임금에 즉위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혀 우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양성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시켜 예문관으로 그 기능을 옮기는 한편,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지방민들을 괴롭혀 오던 유향소를 전격 폐지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도 주력하였다. 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러한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 (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참고 문헌-



1. 조선왕조 실록 -시디롬- 서울 시스템, 1997

2. 연려실기술 -국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혜안, 1998

4.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5. 이성무, [조선왕조사], 1권 -태조~현종- 동방미디어, 1999

6.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7. 최정용,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1995

8.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9.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10.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11.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1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들녘, 1996

11. 사이트 : 한국의 역대 왕 - www.urinara.com





11월 3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2) 세조 공신들의 횡포


1.
조선 3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의 공신책봉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 재위 기간에는 정변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신의 존재 자체가 정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병약한 세종의 장자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모사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륙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였다.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반란의 주역인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해 한명회, 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다. 정난(靖難)이란 「나라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축나야 함을 의미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식읍 1000호와 식실봉 500호, 전 500결, 노비 300구(口) 외에도 별봉(別俸)으로 해마다 600석의 쌀과 금 25냥, 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 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도 전지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 7명, 반당(병졸) 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 등이 차등있게 배분됐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헌법에 따라 즉위한 단종이 계속 재위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협박해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중외병마도통사라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3년(1455) 윤6월에 드디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면서 스스로 임금이 됐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즉위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의 좌익(佐翼)공신으로 총 46명이었다.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이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축나야 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왕이 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했고 조선은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 갔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정사·좌명·정난의 4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 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琵琶)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임금 앞에서 추는 악어들의 잔치였다.


잔치가 파한 후 동생 영응대군의 사저로 거동한 세조는 장난삼아 이구에게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내가 때리게 되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신 사이에 격식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에게는 새벽 2고(鼓)가 될 때까지 술마시고 춤추며 즐거웠을지 몰라도 이에 끼지 못한 다른 사대부나 백성들에게는 착잡하고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특권층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정난 1등(2등·3등)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공신 아무개가 죄를 범해도 용서하라는 주청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해도 영원토록 용서하라는 주청이었으니 공신 당사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함께 갔던 공신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박살낸 후 후원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사헌부도 듣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모는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다가오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아내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죽어도 국왕이 공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니 공신들에게 조선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3.
역사드라마「왕과 비」는 수양대군과 그 수하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도착적인가는 정난·익대공신들이 김종서와 사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사형당한 인물들의 남은 식구와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올바른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시대정신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와 형제 등 남자들도 연좌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난·익대공신 세력들은 이들의 사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이들의 부인·딸 등 여자식구들과 재산을 갈취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흥상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과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의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중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과 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과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 수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이 시대정신 구현에 인생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공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육신들의 토지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 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신들이 탐한 것은 반대파 정치인들의 여인이나 토지뿐이 아니었다. 신숙주가 단종의 왕비 송씨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이 임금으로 섬기던 군주의 여인까지 탐했던 파렴치한들이었다.



-참고문헌 및 출처자료 -



조선왕조실록 -씨디롬-

연려실기술 - 국역-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9

2. 이덕일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김영사. 1999

3. 이덕일 [역사산책 - 조선을 망친 주범은 공신들 ] - 신동아 연재물

4.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5.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6.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7.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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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는 흔히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열여섯살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文官)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가 6진을 개척하여 북방을 경영한 공훈(功勳)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견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崔潤德)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컸거나 국토 확장에 대한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옛 땅을 얼마라도 더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김종서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조선의 분위기가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관(武官)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김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이루고 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世宗)은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며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김종서의 강직성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
지가 강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비명에 죽게 되는 원인
이 된다. 

 

●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2년(서기 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都摠制)로 있던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붙여진 '대호(大虎)'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불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서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는 소박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했을 때, 그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황희(黃喜)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김종서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그의 호방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신숙주(申叔舟)에 대해서도 그의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수양대군에게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열여섯살인 태종(太宗) 재위 5년(서기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종(世宗)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서로서는 청, 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이다.


김종서가 관료로서 성장하고 있던 태종(太宗)대에는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데다가, 아직 나이가 젊어 큰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세종(世宗)대 전반에 와서야 김종서는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는데, 세종 원년(서기 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世宗)대에는 관료들의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자로서 20여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는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라는 직책도 북방 경영의 대업(大業)을 지시받고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방관에 불과했다. 성공 여부 또한 불투명한데다 반드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때 김종서의 나이 45세였는데, 30여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道伯)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다.


고려 말, 길주에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진족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만주 지방에 뿌리를 둔 부족으로서 고려 때는 세력이 강성하여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淸)을 건국하였다. 당시 만주의 남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은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 지역을 침범하였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중국의 동남부와 조선의 북부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분쟁은 끝이 없었다.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으로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세종(世宗)대에 이르러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나서야 국토가 침탈될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이성계가 조선왕조 건국이라는 크나큰 업적의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땅이었으므로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太祖) 때에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慶源府)였는데, 세종(世宗) 재위 9년(서기 1409년)에 경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寧北鎭)을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인 석막에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 지역을 좀더 확장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아말로 북쪽을 향한 세종의 영토 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 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 기회만 생기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여진족 사이에서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정으로 날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세종은 이때를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으로 개선했으며, 군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노고를 치하하는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었다. 그런데 그 씀씀이가 너무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 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김종서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지 뚜렷한 목적 아래 행했던 것이다.


또 영토 확장의 실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이주민 정착에 기여한 향리(鄕吏)들에게는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로 이 지역에서는 삼남 지역에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가 했던 방식을 따라 천인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에게는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김종서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천성적으로 강직한 데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아 원체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에게 의식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김종서는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인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급작스런 사건으로 모두 혼란에 바졌지만, 김종서만은 그 자리에 꼼작 않고 앉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활을 쏜 범인은 붙잡지 못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아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김종서의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그런 나를 군사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민심이 안정되고 군사들을 통솔하기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여지자, 김종서는 허술했던 국경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석막에 있던 영북진(寧北鎭)을 경원부(慶源府) 북쪽의 백안수소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북방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김종서가 주목한 곳은 알목하(斡木河)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또 그 근처에 주로 거주하고 있던 오도리 부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으로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잇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이곳에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했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후방이 되어 버린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會叱家)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백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했다. 공성현은 세종(世宗) 재위 19년(서기 1437년)에 경흥읍이 되었다가 세종 재위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재위 22년(서기 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로 옮겨 회령부와의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 있는 다온평(多溫平)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군(穩城郡)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거의 7년만에 북방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 재위 22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재위 25년(서기 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에서 연대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 경계를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서기 1449년)에 처음 영북진이 있던 석막에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으로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친 것이다.


세종(世宗)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민본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 '고려사(高麗史)'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世宗) 재위 32년(서기 1450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인 문종(文宗) 원년(재위 1451년)에는 우의정이 되어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政丞)의 반열에 올랐다.


[고려사절요] 권 1, 태조조(太祖條) 부분. 김종서는 [고려사]를 편년체로 다시 편찬하여 [고려사절요]를 만들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데, 이것은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만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려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1395년) 4월에 총 3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많은 사실을 왜곡시켰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으로 임금의 묘호에 조(祖), 종(宗) 등을 사용하였고, 황제국(皇帝國) 체제를 갖추었던 왕조였는데도 여몽전쟁 이후의 상태에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의 충신들인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 등은 깎아내리고 별다른 공로가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慶)은 청백리(淸白吏)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1424년에 유관, 윤희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분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다시 쓴 고려사는 왜곡된 사실은 대부분 고쳐졌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략하게 요약되어서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1432년에 신개(申槩), 권제(權踶), 안지(安池) 등을 시켜 다시 보완하도록 하였다.


두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전히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 조상인 권근(權近)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재위 31년(서기 1449년)에 세번째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판서를 관창하는 지춘추관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두번째 고려사 재수 작업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당시 우참찬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함게 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 등과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최항(崔恒) 등의 사관들이었다. 세번째로 개수된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재위 원년(서기 1451년) 8월 25일에 총 139권으로 완간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만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인지의 고려사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명단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 과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고명대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다


조선왕조 제5대 국왕인 문종(文宗)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의 뒤를 이어 외아들 홍위가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다. 이때 김종서는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단종대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 노재상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린 임금에게는 장성한 숙부들이 10명 넘게 있었고, 그 중에서도 야망이 크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암암리에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서기 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한 수양대군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인 한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수양대군을 의심하고 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경계하기는 했지만, 설마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방심하게 되는데, 그 틈을 타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철퇴(鐵槌)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히고,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의 전 과정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는 다행히 죽지 않고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잠시 아들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새벽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에게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김종서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그것조차 찾을 수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왕조 제7대 국왕인 세조(世祖)다.


김종서는 단종이 즉위한 후 독단적으로 정사(政事)를 처리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평소 그의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기보다 어린 국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장수요, 훌륭한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잘 보위하려다가 반대파들에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방 개척 시절에 얻은 경험을 살려 저술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병서를 남기기도 한 김종서는 영조(英祖) 재위 22년(서기 1746년)에야 복관(復官)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恨)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김종서가 남긴 시조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 공(功)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왕과 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극이지만 수양대군 미화가 너무 지나친 것은 정말 마음에 안든다.
김종서 같은 만고의 충신을 권력에 눈이 먼 사람으로 그리다니ㅡㅡ;;

나는 어떤 사실관계를 파악할 때 그 속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속의 내면이 보인다는 것도 믿지만,
사실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조 - 수양대군은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나쁜 놈이다.
역시 성삼문, 김종서가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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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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