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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거의 6개월간 블로그를 자유(?)라는 이름 아래에 방치 중인 파란토마토입니다.
실은 요즘은 싱싱한 파란 토마토라기 보다는 멍들어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린 느낌이지요. 음하하...


요즘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생 정향이라는 분이 인기던데...

바람의 화원신윤복의 여인, 정향






갑자기 그동안 기생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누가 있을까 싶어서 찾아보게 되었어요.




작년 한 해에만도 두 명의 황진이가 탄생했으니....
매력적인 기생들이 너무 많아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네요^^.

다들 아름다운 배우들이지만 예전 배우들 구경도 할 겸,
특히 유명한 역할 혹은 작품에 출연한 분들만 몇 몇 분을 선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중에 누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우선 본격 기생은 아니었지만 기생이 될 뻔했던 난정이 역할을 맡았던 여인천하의 강수연씨입니다.
(어찌나 동안이신지~)

여인천하의 난정이와 윤원형강수연씨와 이덕화씨



하지만 요건 맛배기구요, 강수연씨는 사극 연기를 상당히 많이 했었고,
실제로 기생 역할을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대근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 연산군에서 기생 출신의 후궁 장녹수 역을 맡으셨죠.
너무 요염하신가요? ㅋ

영화 연산군에서 이대근과 강수연연산군과 장녹수



보너스: 여인천하에서 난정이 친구 옥매향 역을 맡았던 박주미씨입니다.
이 분은 너무 단아하셔서 양반댁 규수 같은데요?

여인천하 기생 옥매향옥매향 역할의 박주미




장녹수 역할은 연산군 만큼이나 매력적인 역할이라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멋진 여배우들이 많이 보입니다.


제가 참으로 즐겁게 보았던 영화 왕의 남자에서 강성연씨입니다.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과 장녹수강성연과 정진영



장녹수 강성연정말 매력적이죠?



한편,  故 유니씨도 멋지고 매력적인 장녹수 역할을 제대로 해주셨습니다.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어찌나 맛깔스럽게 연기를 해주시던지...
아직도 깔깔거리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를 잊을 수가 없네요.


드라마 장녹수에서 유동근씨와 짝을 맞추어 연기해주셨던 장녹수다운 장녹수 박지영씨도 빼놓을 수가 없죠^^

박지영 장녹수박지영 장녹수




기생이 장녹수 밖에 없냐구요??


그렇진 않죠^^


아름다운 기생에는 절대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황진이가 남아있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지적이며, 풍류에 예술적인 면모까지 갖추었다던 황진이...
황진이 역을 맡은 분들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도금봉,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그간 황진이 역을 맡았던 배우들




황진이 포스터황진이 장미희



지금보면 좀 낯 뜨겁고 웃긴 포스터지만..
그 당시에는 도도한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작품, 영화 황진이에서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장미희

황진이

황진이




지금에 비하면 여러 모로 꾸밈새가 촌스럽고 포즈가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세련된 미모를 빛내주시는 장미희씨입니다.

황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생 치고는 너무도 도도하고 품격있는 모습이군요.


한편,
작년에 새로이 태어난 예인 황진이, 하지원씨입니다.

황진이하지원



제가 상상하는 황진이와 딱 맞아떨어지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굉장히 매력적인 황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보너스: 황진이를 질투하는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씨입니다.

부용 왕빛나멋드러진 춤을 추고...

황진이 친구 부용 역의 왕빛나..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아마도 벽계수를 유혹하는 모양입니다.


이 분 눈이 정말 크고 이쁘시네요.
황진이의 요염함과는 다르면서도 색다른 여성스러움이 흐르는 분입니다.


귀여운 송혜교씨가 황진이를 맡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영화, 황진이입니다.

송혜교의 황진이 포스터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리 봐도 귀여운 작은 마님으로 보입니다만...
제 눈에 황진이 역할의 기생으로는 다소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이쁘긴 이쁘네요.


이 분처럼 다소 어울리지 않는 황진이가 예전에도 한 명 더 있었습니다.
너무도 착하게 생긴 선우은숙표 황진이;;

선우은숙 황진이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기생은 아닙니다만...
왠지 이 분도 후보에 넣고 싶어지네요..


왕의 남자 공길이 황진이는 어떠십니까? 좀 징그러운가요? ㅋ



하하하^^;;


여러분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지금 즉시 투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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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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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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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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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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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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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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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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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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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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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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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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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역대 최고의 연산군은 누구? 당신의 투표를 기다립니다 (동영상 비교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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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조에 살았던 조선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 어우동...


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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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 어우동 완벽 영화화 "왕에서 종까지 그녀의 품안에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에 불과했다."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실록에 의한 어우동 일지
어우동 영화 포스터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조선 오백년 역사에서 풍기문란죄로 사형당한 여인



출처 :  김용삼의 조선왕조 실록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 3탄) 
닥치는 대로 간통하다 교수형 당한 어을우동(어우동)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입력날짜 : 2006-08-21 (11:46)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조선의 3대 섹스 스캔들(제2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자와 간통한 유감동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드라마 왕과 나에서 어우동과 성종의 동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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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즐겁고 신성한 것이라 여긴 신라시대 여인들이 칠거지악을 내세우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갑갑해서 모두 기생이 됐거나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외국도 그런 것인지 우리 민족이 유달리 성을 사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어에 유독 음담패설과 성 관련 욕설이 많은 걸 보면 조선시대의 악랄한 억압은 강한 것에 대한 더 강한 것을 통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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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점잖은(?) 조선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던 섹스 스캔들'들을 모아보려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글을 쓰셨고, 이 블로그에도 황진이나 어우동에 대한 글이 있으니, 링크를 통한 소개만으로 내 수고를 덜고자 한다.

↓이 글↓은 카페글이라서 검색을 통한 조회는 되지만, 링크를 따라가면 조회금지로 나와서 원본 출처 명기 후에 표기한 것임.

조선시대 스캔들

영화 <스캔들>이 나오기 전에는 조선시대 스캔들이야 과부가 머슴과 도망가 숨어 살거나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 정도의 고루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우동, 사방지 등 한국형 에로 영화의 소재가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기억하자.


어우동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그리고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사랑을 나눈 여자이다. 조선 성종 때의 실존 인물인 어우동은 본래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간통 문제가 불거져 이혼당했고 그 이후 노소, 근친을 가리지 않고 숱한 염문을 뿌린다. 어우동은 한번 관계를 맺은 남자는 절대 헤어나오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었는데 애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몸에 문신하도록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애정 행각이 구설수에 올라 풍기문란 죄로 처형된다. 야사에 의하면 당시 어우동의 형량은 고작 곤장형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연루된 고위 관리들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사형을 고집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책임감없는 행동은 한결같다.



믿기지 않겠지만 500년 조선조 동안 왕실 여인들의 동성연애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궁궐 내 동성연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세종대왕이 이와 관련된 벌칙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 세종대왕이 자신의 며느리가 동성연애자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을 충격에 빠뜨린 며느리는 후에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둘째 부인인 봉씨. 실록에 의하면 봉씨는 거짓말로 임신과 낙태를 번갈아 하고 술을 즐겨 만취한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물론 이는 봉씨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은 관리들의 악의에 찬 기록일 수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궐내에 여종 소쌍이 세자빈과 같이 잔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왕의 문초를 받던 소쌍은 세자빈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고백한다. 결론? 물론 세자빈은 폐위됐고 친정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 아버지도 자결했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이 되는 중종 때 조정은 백정의 딸을 양반의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로 한바탕 시끄러웠다. 결국 중종이 어려운 시절에 동고동락한 천민의 딸을 양반의 정식 아내로 인정하라는 명령을 내려 일단락된 이 사건은 조선 전체가 들썩거렸던 백정의 딸 양씨 스캔들이다. 폭군 연산군은 예쁜 여자라면 유부녀건 처녀건 가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산군은 이장곤이라는 관리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이에 격분한 이장곤은 홧김에 아내를 죽이고 함경로 도망친다. 도망자 신분의 이장곤은 백정 양씨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정말 괜찮은 그 집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도망자 생활 몇 년 만에 중종의 즉위로 조정으로 돌아온 이장곤. 그동안 양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장곤은 동고동락한 아내를 버릴 수 없어 조정에 선처를 부탁한다. 결국 이장곤 덕에 부인 양씨는 정경부인이 되고 친정은 모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정경부인 양씨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하는데 임꺽정은 정경부인 양씨의 조카로 설정돼 있다.


언젠가 KBS <역사 스페셜>에서 지독한 사랑으로 소개된 바 있는 홍랑과 김덕창의 스캔들은 이렇다. 김덕창은 함경도 변방에 발령을 받고 그곳에서 시와 음악에 뛰어난 관기 홍랑을 만난다. 서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결국 김덕창의 임지 변경으로 헤어지게 되는데 어느 날 홍랑은 한양에 있는 김덕창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관기는 임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음에도 홍랑은 연인을 찾아 한양에 오게 되고, 한양에서 둘은 다시 한번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양 한복판에 아내까지 있는 양반 관리가 법을 어긴 관기와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고 김덕창은 파직 후 객지에서 살해됐다. 사실 개인적이기까지 한 이야기가 이렇게 자세하게 전해지는 이유는 후에 홍랑이 김덕창을 위해 평생 수절했고 결국 김덕창과 나란히 묻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회 금기를 깨고 사랑을 이룬 그녀의 용기가 더 부럽다.


양녕대군은 동생을 위해 일부러 패륜아 행세를 한 꽤 멋진 왕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녕대군을 호탕한 풍류가로만 생각하기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스캔들이 많다. 양녕대군이 일으킨 스캔들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웠던 것은 유부녀인 어리 강간 사건이다. 어리는 한 정승의 첩으로 병이 있고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양녕대군은 그녀를 납치해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심지어 양평대군은 어리를 궁궐과 지방 유배지에까지 끌였들이는데 이는 연산군의 스캔들을 제외한 조선시대 최고의 섹스 스캔들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는 이 어리 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됐다는 사실을 들어 당대의 로맨스로 미화하지만 결국 양평대군이 어리를 버리고 왕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어쨌든 그 이후의 어리의 삶은 기록에 전해오지 않는다.

출처
:아름다운 만남의 동행  원문보기





영웅은 수많은 미녀들을 취해도 호남으로서의 기개나 풍류로 포장하는데 비해, 여자들은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의 미국에서도 추악한 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걸 보니 이 또한 남녀차별의 일종인 것 같아서 과히 유쾌하진 않다만.. 나 역시도 그녀들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똑같은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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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삼절 황진이의 일화와 시 - 30년 생불을 파계시킨 그녀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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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과 시로 당대의 문장가들과 세도가들을 무릎  꿇게 했던 황진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녀이기 전에 철학자요,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동서고금을 통해 몇 안되는 여장부였다.

30년을 수행한 지족선사를 하룻밤에 파계시킨 미모, 화담 서경덕과의 우정, 그녀가 그리워한 벽계수, 당대의 가인 송순과의 만남,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 술을 올렸다 하여 관직헤서 파면당한 벽파...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맴돌고 있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까닭

비록 황 진사의 서출로 태어난 그녀였지만 어느 여염집 여자아이보다도 총명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진이가 집을 뛰쳐나가 기생이 된 까닭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다. 황진이가 사는 마을의 한 총각이 먼발치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는 그만 상사병에 걸려 누워 있다 결국 죽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황진이는 어느 날 집 앞에서 상여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웅성거렸다. 황진이가 사는 집 앞에서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상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그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벌일세.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황진이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옷장 속에 곱게 접어 둔 적삼과 치마를 꺼내 사람들에게 주었다. 상여꾼들이 그 옷을 관 위에 얹어 놓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황진이는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상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 때문에 한 남정네가 죽었다. 내 용모가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내가 시집을 간다면 다른 남정네들이 또 죽게 될지 모른다.'

황진이는 여러 모로 생각 끝에 기생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이건 좀 너무 유치한데..;;ㅋ)

황진이가 기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노라 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의 풍류객들은 황진이를 만나러 먼 길을 달려 송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황진이를 두고 하늘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선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황진이가 노래를 하면 모두들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절조는 처음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녀는 시를 잘 지어 시인 판서 소양곡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노래를 잘 불러 당대 최고의 가인 송순과 친하게 지냈으며, 풍류를 알아 당대의 풍류가인 이사종과 6년 동안 환상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내노라 하는 남정네들이 그녀 앞에선 맥도 못 쓰고 비실거렸다.

그녀는 이제 이런 부류의 남자들말고 색다른 남자들을 농락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은근히 들었다. 자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을 뿌리칠 남자가 과연 있을까? 결국 그녀는 커다란 모험을 시도하기로 했다.



하룻밤에 파계된 30년 생불 지족선사

황진이 인형
당시 30년 동안 불도를 닦아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가 그녀의 첫 번째 유혹 대상이었다.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있는 지족암으로 스님을  찾아간 날, 지족선사는 산 아래에서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알 만한 기생 황진이가 자신을 찾아온 것에 그만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산에서 불공만 드리던 스님은 눈이 부시게 빛나는 황진이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스님의 마음을 꿰뚫어본 그녀는 슬슬 스님을 농락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스님. 저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나이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못 잊어 죽을 수도 있나이까?"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요염한 자태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제대로 황진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잘못하다간 30년 수도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국이었다.

'과연 빼어난 미모를 가졌구먼.  저 정도의 얼굴이면 상사병이 걸릴 만도 하겠어.'


시간이 흘렀다. 산사의 밤이 깊어지자 지족선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덥석 안아 버렸다. 지족선사의 가슴에 안긴 그녀는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본격적으로 유혹했다. 그날 지족선사와 밤을 함께한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새벽녘 암자를 내려왔다. 30년 불공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기녀의 묘한 웃음 뒤에는 허탈감이 느껴졌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화담

지족선사를 화룻밤 사이에 파계시킨 장본인 황진이는 이번에 화담 서경덕에게 화살을 겨눴다. 대학자 서경덕을 만약 유혹할 수 있었다면 사내들은 늙은이고 젊은이고 모두 계집 치마폭에서 놀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서경덕 선생을 점찍은 다음부터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시정 잡사를 멀리하고 오로지 초당에 기거하며 학문에 정열을 불태우는화담 선생. 만인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를 반드시 자신의 미모로 유혹해 그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문을 일시에 땅에 떨어뜨려 보겠다는 일종의 오기가 충만해 있었다.

그러나 화담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상황은 달랐다.

지족선사는 자신의 미모에 너무 당황해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화담은 달랐다. 황진이가 큰절 올리자  편히 앉으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황진이의 미모따위엔 전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래, 어쩐 일로 날 만나러 왔소?"
"일찍이 선생님의 고매하신 인격과 높은 학문의 경지를 들었사옵니다. 미천한 제가 선생님의 고매한 정신을 배우기 위해 이렇게 불쑥 찾아뵙게 되었나이다."

황진이와 화담은 서로 학문과 시를 겨루어 보았다.
밤이면 술과 춤으로 화담 선생을 휴혹하려 했으나, 화담은 황진이를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 정도로만 여겼다. 황진이는 오기가 발동해 며칠 동안 화담을 유혹했지만 화담 선생은 전혀 그런 것과는 무관한 표정이었다.

황진이는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육탄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초저녁부터 황진이는 비를 맞고 돌아 다녔다. 탄력 있는 유방. 가는 허리, 물기를  머금은 그 자태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시켰다. 황진이는 온갖 교태를 다 보이며 드러난 물기 어린 몸으로 화담을 방에 들어갔다.

"선생님. 너무 추워요."

황진이는 화담 선생이 앉아 있는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화담과 그녀의 살갖이  부딪혔다.

"허허, 이런. 온몸이 비에 젖었구려. 어서 옷을벗고 이리 들어오시오."

옷을 벗으라는 화담의 말에 황진이는 옳거니 너도 별수없구나 하며 화담 앞에서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이윽고 눈부신 그녀의 알몸이 드러났다. 그러나 화담은 아무렇지 않은 듯 젖은 옷을 주섬주섬 챙겼다.

'아니, 내 벗은 몸을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화담을 쳐다보았다.

"젖은 몸으로 그대로 있으면 감기가 드니 어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있으시게. 내 옷을 말려 줄 터이니."

화담은 알몸인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옷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는 황진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를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황진이는 저절로 화담의 인격에 고개가 숙여졌다. 한 여자가 남자에게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잠이 든 화담의 못습을 보면서 황진이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진이는 화담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이튿날 그녀는 마른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화담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송도의 삼절(三絶)을 아시나이까?"
 "송도삼절? 글세, 그게 무슨 뜻인고?""송도에는 삼절이 있사온데, 하나는 박연폭포이고, 또 하나는 황진이옵고, 나머지는  화담인가 하옵니다."

화담은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고는 황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연에서는 박연폭포이고, 여자 세계에서는 자신이며, 남자 세계에서는 화담이란 말이었다. 송도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그녀의 말처럼 황진이는 문장의 대가들과 시를 지으면서도 절대로 뒤떨어지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멋진 남자를 그리워한 황진이

그러나 그녀도 여자였으므로 멋진 사내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노라 하는  양반들이 그녀 앞에서 기어다니다시피 하였지만, 마음에 드는 사내가 있으면 언제 그를 다시 만날까 하는 그리움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다. 이렇듯 멋진 사내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외로움은 결국 시가 되어 오늘날 고전문학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이다.

어져 내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 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유유히 떠나간 사람이 화담말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벽계수였다. 그는 황진이의 아름다움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아무리 황진이가 유혹을 해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하고는 황진이와 풍류를 즐겼다. 황진이는 귀인 벽계수를 유혹하기 위해 별 수단을 다 써 보지만 결국 벽계수는 도도히 흐르는 물처럼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벽계수를 그리며 그 외로움을 시심으로 달랬다.

靑 山 裡 碧 溪 水 (청산리벽계수)
莫 誇 易 移 去 (막과이이거)
一 到 滄 海 不 復 還 (일도창해부복환)
明 月 滿 空 山 (명월만공산)
暫 休 且 去 若 何 (잠휴저거이약하)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자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을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임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그녀는 결국 임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 뜻을 펴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마흔이 채 못 된 그녀는 그때까지도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눈을 감았다. 생을 마감할 때는 누구나 자신을 뒤돌아보듯이, 황진이 역시 여자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죄책감을 유언 속에 담았다.

"내가 살아 생전 내 몸을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은 후에는 관에 넣어 매장하지 말고 동문 밖 모래 틈에 시체를 버려 세상 여인들로 하여 경계하게 하라."

그러나 황진이를 아는 이웃들은 결코 유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시체를 장단 근교 구정고개 남쪽 길가에 고이 묻어 넋을 위로해 주었다. 후에 당대의 문장가 백호 임제가 관의 일로 송도에 왔다가 제일 먼저 황진의 안부를 물었다. 황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그는 즉시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 주었다.

그때 임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을 어데 누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양반가의 사람으로 일개 송도 기생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제사를 지내 주었다는 소식이 장안에 퍼져 나갔다. 결국 조정에까지 이 사실이 알려져 그는공직에서 파면을 당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기생 따위의 죽음을 슬퍼하여 넋을 위로하다니. 당장 파면시켜라."

백호는 덤덤한 심정으로 관직을 내팽개쳤다. 당대의 손꼽히는 문장가였기에 그녀의 죽음을 두고 슬퍼했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황진이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은 기녀는 없었다.

그녀는 기녀이기 전에 예술과 철학을 통달한 신화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가장 완숙한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할 때 세상을 등졌다. 그래서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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