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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는 흔히 무장(武將)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열여섯살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文官)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가 6진을 개척하여 북방을 경영한 공훈(功勳)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견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崔潤德)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컸거나 국토 확장에 대한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옛 땅을 얼마라도 더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김종서가 문신(文臣)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조선의 분위기가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관(武官)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김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면서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이루고 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世宗)은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고 말하며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했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김종서의 강직성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
지가 강한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대립하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해 비명에 죽게 되는 원인
이 된다. 

 

●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2년(서기 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都摠制)로 있던 김추(金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붙여진 '대호(大虎)'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불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김종서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지만,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는 소박한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하고 돌아와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했을 때, 그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황희(黃喜)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받아들였다는 일화는 김종서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그의 호방함 때문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신숙주(申叔舟)에 대해서도 그의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수양대군에게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열여섯살인 태종(太宗) 재위 5년(서기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세종(世宗)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날 때까지 큰 문제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종서로서는 청, 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이다.


김종서가 관료로서 성장하고 있던 태종(太宗)대에는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는데다가, 아직 나이가 젊어 큰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세종(世宗)대 전반에 와서야 김종서는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는데, 세종 원년(서기 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世宗)대에는 관료들의 세대 교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자로서 20여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탐하지 않는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라는 직책도 북방 경영의 대업(大業)을 지시받고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방관에 불과했다. 성공 여부 또한 불투명한데다 반드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정계에 복귀했다.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때 김종서의 나이 45세였는데, 30여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道伯)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다.


고려 말, 길주에 만호부(萬戶府)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여진족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만주 지방에 뿌리를 둔 부족으로서 고려 때는 세력이 강성하여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淸)을 건국하였다. 당시 만주의 남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여진족은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 지역을 침범하였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중국의 동남부와 조선의 북부 지역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분쟁은 끝이 없었다.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으로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세종(世宗)대에 이르러 국내 정치가 안정되고 나서야 국토가 침탈될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이성계가 조선왕조 건국이라는 크나큰 업적의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땅이었으므로 국가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마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太祖) 때에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慶源府)였는데, 세종(世宗) 재위 9년(서기 1409년)에 경성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재위 14년(서기 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寧北鎭)을 여진족이 출몰하는 지역인 석막에 추가로 설치하여 방어 지역을 좀더 확장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아말로 북쪽을 향한 세종의 영토 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 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 기회만 생기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 여진족 사이에서 부족 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정으로 날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 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세종은 이때를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준으로 개선했으며, 군졸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노고를 치하하는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었다. 그런데 그 씀씀이가 너무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 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 군사들은 국경을 지키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을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만큼 김종서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지 뚜렷한 목적 아래 행했던 것이다.


또 영토 확장의 실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이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고, 이주민 정착에 기여한 향리(鄕吏)들에게는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 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로 이 지역에서는 삼남 지역에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가 했던 방식을 따라 천인을 양인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에게는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들의 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김종서는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천성적으로 강직한 데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아 원체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휘관으로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군사들에게 의식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김종서는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화살 하나가 날아와 김종서의 앞에 놓인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급작스런 사건으로 모두 혼란에 바졌지만, 김종서만은 그 자리에 꼼작 않고 앉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활을 쏜 범인은 붙잡지 못했지만 더 이상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아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너무도 태연자약한 김종서의 태도에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그런 나를 군사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는가?"




●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민심이 안정되고 군사들을 통솔하기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여지자, 김종서는 허술했던 국경 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석막에 있던 영북진(寧北鎭)을 경원부(慶源府) 북쪽의 백안수소로 옮기고 종성군(鍾城郡)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북방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김종서가 주목한 곳은 알목하(斡木河)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또 그 근처에 주로 거주하고 있던 오도리 부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으로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잇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 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이곳에 회령진(會寧鎭)을 설치했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후방이 되어 버린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會叱家)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백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孔城縣)을 설치했다. 공성현은 세종(世宗) 재위 19년(서기 1437년)에 경흥읍이 되었다가 세종 재위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재위 22년(서기 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로 옮겨 회령부와의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 있는 다온평(多溫平)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군(穩城郡)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거의 7년만에 북방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 재위 22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재위 25년(서기 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에서 연대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 경계를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서기 1449년)에 처음 영북진이 있던 석막에 부령부(富寧府)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즉,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으로 신라의 삼한 통일 이후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북방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친 것이다.


세종(世宗)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민본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북방 지역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준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국토를 균형 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 '고려사(高麗史)'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世宗) 재위 32년(서기 1450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그 다음 해인 문종(文宗) 원년(재위 1451년)에는 우의정이 되어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政丞)의 반열에 올랐다.


[고려사절요] 권 1, 태조조(太祖條) 부분. 김종서는 [고려사]를 편년체로 다시 편찬하여 [고려사절요]를 만들었다.<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고려사(高麗史)'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바로잡는데, 이것은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만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려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1395년) 4월에 총 3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많은 사실을 왜곡시켰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으로 임금의 묘호에 조(祖), 종(宗) 등을 사용하였고, 황제국(皇帝國) 체제를 갖추었던 왕조였는데도 여몽전쟁 이후의 상태에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의 충신들인 정몽주(鄭夢周), 김진양(金震陽) 등은 깎아내리고 별다른 공로가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慶)은 청백리(淸白吏)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鄭道傳)의 고려사(高麗史)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1424년에 유관, 윤희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분을 바르게 고쳐 쓰도록 하였다. 하지만 다시 쓴 고려사는 왜곡된 사실은 대부분 고쳐졌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략하게 요약되어서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1432년에 신개(申槩), 권제(權踶), 안지(安池) 등을 시켜 다시 보완하도록 하였다.


두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친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여전히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 조상인 권근(權近)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재위 31년(서기 1449년)에 세번째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판서를 관창하는 지춘추관사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두번째 고려사 재수 작업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당시 우참찬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함게 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鄭麟趾), 호조참판 이선제(李先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 등과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양성지(梁誠之), 최항(崔恒) 등의 사관들이었다. 세번째로 개수된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재위 원년(서기 1451년) 8월 25일에 총 139권으로 완간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만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인지의 고려사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명단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 과정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고명대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다


조선왕조 제5대 국왕인 문종(文宗)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의 뒤를 이어 외아들 홍위가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다. 이때 김종서는 좌의정에 올라 있었다.


단종대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 등 노재상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어린 임금에게는 장성한 숙부들이 10명 넘게 있었고, 그 중에서도 야망이 크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암암리에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은 단종 원년(서기 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한 수양대군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하인 한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수양대군을 의심하고 있던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경계하기는 했지만, 설마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방심하게 되는데, 그 틈을 타서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철퇴(鐵槌)로 내리쳐 치명상을 입히고, 왕명을 빌려 대신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의 전 과정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는 다행히 죽지 않고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잠시 아들의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새벽 수양대군이 보낸 자객에게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大逆謀反罪)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김종서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지금은 그것조차 찾을 수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왕조 제7대 국왕인 세조(世祖)다.


김종서는 단종이 즉위한 후 독단적으로 정사(政事)를 처리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평소 그의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기보다 어린 국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장수요, 훌륭한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잘 보위하려다가 반대파들에게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북방 개척 시절에 얻은 경험을 살려 저술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병서를 남기기도 한 김종서는 영조(英祖) 재위 22년(서기 1746년)에야 복관(復官)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恨)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김종서가 남긴 시조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長白山)에 기(旗)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 공(功)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왕과 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극이지만 수양대군 미화가 너무 지나친 것은 정말 마음에 안든다.
김종서 같은 만고의 충신을 권력에 눈이 먼 사람으로 그리다니ㅡㅡ;;

나는 어떤 사실관계를 파악할 때 그 속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속의 내면이 보인다는 것도 믿지만,
사실 그대로가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조 - 수양대군은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나쁜 놈이다.
역시 성삼문, 김종서가 짱~




2011/07/30 - 세조의 킹메이커, 신숙주 (조선시대 최고의 King Maker) - KBS 한국사전
2011/07/30 - 공주의 남자로 보는 세조시대 역사, 역사 속의 결말 보기
2011/07/29 - 공주의 남자 vs 왕과 비 vs 한명회 출연진 살펴보기 (같은 시기를 다룬 사극들)
2008/02/27 -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조선왕조 역사/계보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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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인 공주의 남자가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이 드라마는 수양대군이 문종 사후에 계유정란을 일으켜서 충신들을 다 몰살한 후에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에 오르는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종서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나누는 수양대군의 딸이 주인공이니까 아무래도 수양대군이 가해자로, 그에 따라 김승유(김종서의 막내 아들 - 역사적으로는 손자라고 함.)가 피해자로 나올 가능성이 크겠죠?




어릴 때 읽었던 맹꽁이 서당 등의 만화책에서 나온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신기한데요.. 그럼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일까요?










공주의 남자에서는 궁궐에서 먼저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두 주인공 김승유와 세령은 금계필담이라는 야사집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계필담에 따르면 수양대군(세조)의 첫째 딸인 세희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아버지에게 반대의견을 강력히 피력하다 미움을 받습니다. 이에 수양대군의 아내인 정희왕후가 유모와 함께 세희를 피난시켰습니다. 시골로 도망을 가던 중 한 총각의 도움을 받게되고 결국 세희와 이 총각은 사랑을 나누며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서로의 숨겨놨던 인생을 털어놓다 깜짝 놀랍니다. 세희가 수양대군의 딸이고 이 남성은 할아버지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할 당시 천신만고 끝에 도망, 시골에 숨어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의 집안의 자녀가 결혼을 하게된 것이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털어버리고 사랑을 키워나갔으며 수양대군이 이들을 찾으려하자 굴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지냈다는 설화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정사에는 기록된 바 없습니다. 수많은 설화와 민담이 담긴 금계필담 속 이야기로 존재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세희공주나 김종서의 손자 역시 실존 인물인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정사엔 세희공주나 김종서의 손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가 김종서에게 멸문지화에 가까운 벌을 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김종서의 직계 후손들이 쉽게 살아남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8권에 따르면 김종서 등 계유정난에 관계된 자들의 아비와 자식으로 나이 16세 이상인 자는 영원히 변군 관노에 붙이고 나이 15세 이하인자 모녀 처첩 조손 형제 자매 처첩은 영구히 외방관노에 붙였다. 또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대신들이나 절에 나눠주었습니다.

(이 명단을 보면 수양대군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 반대파 세력을 핍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단종실록 9권엔 따르면 이들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종서 등의 친자로서 나이 16세 이상은 교형에 처하고 15세 이하는 어미를 따라 자라게 해 성년이 된 후 관노로 영속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사실상 16세 이상의 자식은 죽임을 당했고 어린 아이도 노비로 전락한 셈이요. 이 뿐 아니다. 집안의 여성은 모두 노비로 삼아 대신들의 집에 나눠주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난 부분은 세조 말년인데요, 금계필담 속 에피소드에 따르면 말년이 된 세조(수양대군)은 우연히 세희공주를 만난 후 과거를 후회하며 세희공주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물론 세희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이를 피해 굴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는 것이 결말이지만 세조의 태도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사도 비슷합니다. 세조는 말년 김종서 등 계유정난 적신들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34권에 따르면 김종서 등의 숙질을 편한 곳에 거주하도록 했고, 또한 고신(告身)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조실록 47권엔 아예 계유정난에 관련된 자들의 친인척을 모두 방면토록 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실록에 따르면 계유년 이래 난신의 숙질과 자매의 연좌자 무릇 2백여 인을 의논해 방면했습니다.


물론 정사 속엔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의 딸의 사랑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실존인물인지도 의아한 부분이 많구요. 왕이 화장실에 가는 소소한 일상까지 모두 적어놓은 조선왕조실록이 공주의 실존을 적지 않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왕이 조선왕조실록을 보는 것 조차 금기시되고 불가능했던 당시 현실을 봤을 때 왕의 명령으로 공주의 존재가 지워졌을 가능성도 없다고 크지는 않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조가 말년에 계유정난에 관련된 자들을 보다듬는 행태를 보인 것이 민담 설화화 된 것일 가능성도 큽니다.

(해피엔딩, 권선징악을 바라는 백성들의 바램이 투영된 것이라고 할까요?)




비극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주의 남자 포스터

비극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공주의 남자 포스터


정사와 야사를 잘 버무린 재미있는 드라마가 모처럼 나오는 것일까요? 사극을 좋아하는 저같은 사람을 위해서 아무쪼록 이 드라마가 너무 사랑놀음에 빠지지 않고 재미있게 잘 흘러 갔으면 좋겠네요.




2011/07/29 - 공주의 남자 vs 왕과 비 vs 한명회 출연진 살펴보기 (같은 시기를 다룬 사극들)
2011/07/29 - 시조 소개 - 불사이군의 충절을 노래한 시조 세 편. (수양산 바라보며~, 이 몸이 주거가서~, 이 몸이 죽고 죽어~)
2011/03/14 - 재미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야사 일부..
2008/03/11 - 영도교: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을 기리는 다리
2008/01/27 - 대왕세종 VS 용의 눈물, 실록과의 비교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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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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