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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도, 서기 512년부터 이미 한국 영토라는 증거가 있다.

153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 수록된 조선 8도 총도에서 독도의 그림이 선명하게 보인다.


 

독도는 서기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 영토가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 우산국은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2섬으로 구성된 고대 해상 소왕국이었다.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로 구성되었다는 사시른 [세종실록지리지] (1432년 편찬), [동국여지승람] (1481년),[신증동국여지승람] (1531년), [만기요람군정편] (1808년), 그 밖에 각종 고 문헌과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까지 독도의 이름이 우산도였던 사실도 독도(우산도)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2.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했다.

 

1737년에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우산도)가 조선왕조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 등에는 물론이고 서양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서기 1737년에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J. B. B. 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전도] (Royaume de Coree)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왕국영토로 그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동해안에 매우 근접하게 그려져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도처럼 우산도(독도)가 울릉도보다 안쪽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다.





3. 일본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에서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했다.

1785년에 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그린 [삼국접양지도]에도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에서 처음 기록했다고 지적한 1667년의 일본 관찬 고문헌 [은주시청합기]도 울릉도 (당시 일본 호칭 우도)와 독도 (당시 일본 호칭 송도)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은기도를 한계로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편찬한 [삼국접양지도]는 나라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녹색으로 표시했는데,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조선 색깔인 황색으로 정확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써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료하게 표시하였다.



4. 17세기 말에도 일본 정부는 독도,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했다.


일본이 1592년~98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왜군은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도 침략하여 주미을 학살하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조선조정이 울릉도를 비워두는 공도(空島) 정책을 강행했다.

이 틈에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 조정 몰래 일본 어부 2가문에게 1618년 울릉도에 건너가는 [죽도도해면허]를 1656년 독도에 건너가는 [송도도해면허]를 내주었는데, 이것은 외국에 건너갈 수 있는 허가장이었다.

이에 울릉도에 건너온 일본 어부들과 안용복 등 조선 어부들 사이에 1693년 큰 충돌이일어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의 대마도 도주가 중심이 되어 울릉도 및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려는 외교 분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은 수년간 계속 전개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일본도 굴욕할 수 밖에 없었다.




5.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가 공문서에서 독도,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했다.


일본에서 1868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정권이 붕괴되고 새 메이지 정부가 수립되자, 일본 새 정부의 태정관(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은 1869년 12월 외무성 고관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14가지 항목에 대한 내탐조사를 명령하였다. 그 가운데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 부속으로 되어 있는 시말"을 조사하라는 명령 항목이 있었다.

당시 일본 최고 국가 기관인 태정관과 외무대신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부속 영토'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탐 보고서가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이고 이는 일본 외무성이 1930년 대에 편찬한 [일본외교문서] 제 3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일본도 공지 공인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6. 일본 내무성이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한 기록이 있다.






7. 일본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결정했다.






8. 19세기 말 대한제국 정부가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하게 표시했다.


갑오개혁 후 새로이 작성된 근대적 한국 지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표시하였다.






9.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 41호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세계에 공표했다.





10.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제로 편입시켰다.


이 때부터 일본의 독도 침탈 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 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해군 망루를 독도에 세우고, 독도가 한국 소유의 땅임을 알면서도 '무주지'(주인 없는 땅)이라고 전제하면서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 때부터 이름도 다케시마(죽도)로 하며, 시마네현 행정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독도 영토 편입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서 관보에 싣지도 못했다.

분명히 독도는 1905년 1월 28일 이전에 이미 한국 영토였으므로, 유주지였는데 독도를 무주지이기 때문에 일본에 편입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불법적, 무효적인 결정이었다.!!




11. 연합국도 1946년 1월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군령을 발표했다.





12.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규정


연합국은 1952년에 일본을 재독립시켜 주기로 하고 이에 앞서 [對일본 강화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연합국은 그 준비로 1950년에 [연합국의 구 일본 영토 처리에 대한 합의서](Agreement Respecting the Disposition of Former Japanese Territories)를 작성하였다. 이 합의서 제 3항에서 한국에 반환할 영토를 명시하였는데, 그것들은 한반도 본토와 그 주변의 모든 섬(all offshore Korean islands)이었다. 이들은 즉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Lianccort Rocks)라는 서양 호칭으로 명기하여 한국 영토로 처리됨을 명료하게 밝혔고, 이는 연합국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판정하여 반환하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2. 연합국이 샌프란시스코 [對일본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누락시켰다.


왜? 독도는 우리땅이니까!!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명백하게 한국 영토인 것이다! 이는 일본을 제외한 국제 사회에서 공인되어 있는데
일본만이 영토에 눈이 멀어 저리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13. 유엔군도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시켰다.





여러가지의 정황과 증거가 모두 독도는 우리땅 = 독도는 대한민국/한국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일본이 저리 억지를 쓰는 것은 참으로 비양심적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차 대전 직후에 힘이 없을 때는 연합국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이제와서 미국에 이어 세계의 일등 선진국가가 되자 모든 역사 왜곡에 교과서에까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거짓말을 실어서 가르치려고 하는 걸 보면 일본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진정한 악의 축이요, 민폐국가이다.)

제발 우리나라에서 이 모든 증거자료들을 다 모아 일본 외교부에 가져다 주면서 큰 소리 좀 쳤으면 좋겠다.

"이것들아!!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2008/02/27 - '독도는 우리땅' 지켜낸 어부, 안용복 이야기
2008/03/06 - '독도가/는 우리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2008/05/02 - 노무현 독도연설 vs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는 우리땅인가에 대한 인식
2010/08/16 - 무릎팍도사 출연하신 독도 지킴이 서경덕씨, 당신이 진정한 한국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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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독도!! 이순신 장군님이 지하에서 통곡하실 일본의 악행..


무릎팍도사에 독도지킴이 서경덕씨가 나오셨다.
국가가 해야할 일을 개인으로서 참 힘들게도 묵묵히 하고 계신 이 분.

같은 한국인으로서 너무도 부끄럽고 감사할 뿐이다.




너무도 작은 한 개인이 큰 일을 하려니 자신의 노력에 비해서 너무 성과가 없는 것 같아서 마음도 아프다.
이번 방송출연을 계기로 이런 아름다운 행위가 널리 알려져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아니면 아름다운 기부천사 가수 김장훈씨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참여해서 관심을 끌었으면 좋겠다.
영리한 일본은 자국 내의 유명한 사람들이 미국이나 해외 유력 단체의 실세들에게 홍보활동을 하도록 시킨다는데.. 우리는 이렇게 개인에게 맡겨두고 국가는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나중에 뒤통수 맞아도 속수무책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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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2 - 노무현 대통령의 감동적인 독도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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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관련 명연설 동영상




보다 보면 속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끓어올라서 제가 좋아하는 영상입니다.



다음은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술에 대한 영상입니다.

영상이 하도 기발하고 그 안에 제가 찾던 장면이 많아서 가져오긴 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의도는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잘못한 것 있잖아요. 하지만 이 영상을 보다 보니... 대통령, 한 국가의 원수가 다른 국가 원수 앞에서 적어도 대한민국이 열등국가인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네요.





동영상 내용처럼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휴...
자존심도 없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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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 '독도는 우리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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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울릉도
독도는 우리땅??

정말입니까?
진짜입니까??
자신 있습니까??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증거가 없다.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황당하지만 어쩔 수 없다. 독도는 까딱 잘못하면 일본으로 넘어가게 생겼다. 왜 그럴까??

독도가 우리땅인지 일본땅인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는 아직도 일본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늘 그렇듯이 일본은 철저한 자료 준비로 치밀하고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아직도 감정이 먼저 앞서서 대응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만 앞세워서는 절대 일본에게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동네 골목대장을 뽑는게 아니기 때문에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럴려면 확실한 근거를 대어 논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제법상으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독도를 둘러싼 영토 논쟁은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7세기 말(1693년), 숙종 19년이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독도는 물론, 울롱도까지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료들은 아무도 독도를 지키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당파 싸움 하느라고 독도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때에, 버려진 독도를 지킨 사람은 이름난 학자도, 명재상도, 용맹한 장군도 아닌 경상도 동래(1936년 부산시에 편입)에 살던 평범한
어부 안용복이었다.


평범한 어부인 그가 어떻게 독도를 지킬 수 있었을까?

안용복은 1693년 봄, 다른 어부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하러 떠났다. 안용복은 어부인 동시에 조선 수군에서 노젖기를 담당하던 노군이었는데, 일본과의 교류가 잦은 동래에 살던 관계로 그는 일본어를 매우 잘했다고 한다. 동래에는 일본과 무역교류를 하기 위해서 설치한 왜관이 있었고, 거기에는 일본인들이 상주했기 때문이다.
울릉도 가는길


안용복이 울릉도에 다달았을 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까지 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고 안용복은 많은 일본 어부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일본 어부들은 안용복과 그의 친구 박어둔이 허락없이 고기잡이를 했다면서 그들을 일본의 오키섬(오랑도(五浪島))으로 그들을 납치해갔다.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거세게 항의했다.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내가 내 나라 땅에 와서 마음대로 다니는데 어찌하여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 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안용복의 일을 알게 된 일본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 장군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편지를 한 통 써주었다. 그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더 이상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서찰까지 담아주었다.

울릉도

안영복은 귀국길에 장기도에 도착했는데 당시 일본은 조선과 교류할 때 반드시 대마도를 통해야 했기 때문에 안용복도 대마도를 거쳐서 귀국해야 했다. 그런데 그곳의 도주는 이번 기회에 울릉도를 아예 대마도의 영토로 만드려는 속셈에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을 대마도로 보내버렸고 조선 조정에는 거짓말을 했다. 안용복이 일본 영토를 함부로 침입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안용복은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감옥에 갖혔다가 석 달 만에 겨우 풀려났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ㅡㅡ;


3년 뒤 안용복은 일본인들이 여전히 울릉도와 독도에 와서 고기잡이를 한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일본으로 가서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는 혼자 가지 않고 순천 송광사의 뇌헌 스님, 학자 이인성, 안용복의 아내, 열여섯 명의 다른 어부들과 함께 먼저 울릉도로 떠났다.

울릉도에 도착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안용복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호통을 치자 일본 어부들은
"우리들은 본시 송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으며 곧 송도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했다.
"송도는 우산도(독도)인데 그 곳 역시 우리 땅이 아니냐, 어찌 감히 너희들이 송도에 산다 하느냐?"

다음 날 새벽 독도에 가 본 안용복은 어제 만난 일본 어부들이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용복은 가마솥을 부숴버리고 도망치는 일본 어부들을 뒤쫓아서 오키섬까지 쫓아갔다. 안용복은 몇 년 전의 서찰 내용을 이야기 하며 오키 섬의 관리에게 따졌고, 그래도 소용이 없자 안용복은 직접 태수를 만나러 가게 된다. 그는 푸른 철릭을 입은 관리의 복장으로 꾸미고 태수에게 갔다.

"지난 번에 독도의 일로 막부의 서찰을 받았는데 대마도 도주가 그 서찰을 뺏고 거짓을 고하기까지 했으니 관백(장군)에게 그 죄상을 낱낱이 고하겠다."

안용복의 당당한 기백에 질린 태수는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영토 논쟁을 막을 내릴 수 있었고 조선 철종 때까지는 이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어떤 통신사도 얻어내지 못할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울릉도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낸 것은 안용복의 대담한 행동 덕분이었다.

그러나 안용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후한 상이 아니라 가혹한 형벌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심평이 안용복의 보고내용을 조정에 올리자 안용복 일행은 모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이 관리인 척 한 것과, 국경을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킨 것에 대한 죄를 물어 참형(斬刑)에 처하려 했다.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 중한 범죄가 되는 희한한 장면이 전개된 것이다. 대부분의 신료가 참형을 주장하자 숙종도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론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구만과 윤지완만 반대를 했다.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땅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안용복의 공로이니 사형은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이었다.

‘울릉도 수호의 영웅’ 안용복은 이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면사 대신 귀양을 가야 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고 삼배구고두(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함)의 굴욕을 겪고도 무(武)의 귀중함을 모르고 그렇게 영웅을 역적 취급한 것이다. 귀양간 이후로 안용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안용복 충혼비


독도를 둘러싼 영토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은 안용복의 활약이 있은지 약 250년 뒤인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때였다. 250년 전의 논쟁과 비교하여 달라진 것은 울릉도에서 독도로 표적이 바뀌었다는 점 뿐이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증거로 1905년에 발표현 '시마네 현 고시'를 내놓았다.

시마네 현 고시는 일본의 법령인데 내용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 섬에서 85 해리에 있는 무인도는 다른 나라가 점령하고 있다고 인정할 만한 흔적이 없으므로 일본 영토로 사아 다케시마(죽도)라고 칭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한다."

그런데 시마네 현 고시가 발표된 1905년 당시, 우리나라는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1년 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일본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독도는 주인이 없는 무인도이며, 조선보다 일본이 먼저 알고 있었고, 무인도인 독도를 일본이 영토로 만들어 전 세계에 알렸으니 독도가 일본 땅인 것은 합당하며, 국제법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현재 국제법은 주인없는 땅을 먼저 차지할 권리를 인정해주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억지 주장을 깨뜨리려면 독도가 무인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조선) 영토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독도는 우리땅이 아니라 동해는 일본해라고 적힌 지도
야 한다.
'시마네 현 고시'가 발표되던 1905년 당시, 독도가 이미 우리 영토라는 것을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를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독도가 예전부터 우리 영토인 증거 ㅡ 옛 지도에 우리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리상으로 우리나라에 더 가깝다, 지질학상 백두산 줄기에 해당한다든지 하는 주장 ㅡ 국제법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독도를 일본땅으로 기록한 지도나 책들도 많기 때문이다.ㅡㅡ;;♨ 부르르~~~~

원통하게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국제법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독도 문제는 50년간이나 지속된 논쟁이다. 잊혀질만 하면 다시 살아나는 불씨 같은 것이라고 할까. 일본인들이 저렇게 철저히 우리를 농락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 감정적으로만 대응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우리 국민들이 독도 문제에 분개하여 흥분하지만 정작 학계에서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에 비해 일본 국민은 독도에 거의 관심이 없지만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놀랄 만큼 치밀하게 준비해 오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회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인정받으려면 좀 더 차분하고, 꾸준하게, 그러나 치밀한 연구를 통해 제대로 준비해서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한 증거를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지하에서 울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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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12)]
안용복 “일본인은 울릉도 접근말라” 에도 막부와 약속

숙종 때 노를 젓는 병사였다가 울릉도 수호신이 돼…
사공을 규합해 왜적의 침입 막아내
상은 커녕 국경 침범ㆍ관직 사칭으로 사형당할 뻔…
이익 “안용복은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



우리 역사를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자탄을 하게 되는 장면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럴 때마다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그나마 나라의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발적으로 나선 의병이 그런 경우다.

독도문제로 지금 일본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울릉도도 방치하다시피 해서 일본인이 수시로 점령을 하곤 했다. 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런 일이 훨씬 잦았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울릉도도 대마도처럼 일본땅이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숙종 때 사람 안용복(安龍福)이라는 민초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은 따질 것 없이 영웅과 짝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의 전함에서 노를 젓는 병사인 노군(櫓軍)이었다. 일본인 거주지인 왜관에 드나들면서 일본어를 익혔다고 한다. 숙종 19년(1693) 여름에 안용복은 표류를 하다가 울릉도에 다달랐다. 그런데 이때 울릉도에서 일본 배 7척이 와서 울릉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안용복은 그에 맞서다가 일본인에게 납치되어 오랑도(五浪島)라는 곳으로 끌려갔다.

▲ 그림·안영태

도주(島主)에게 끌려간 안용복은 “울릉도는 원래 조선에 속한 땅이다. 조선은 가깝고 일본은 멀다. 그런데 왜 나를 잡아가두고 돌려보내주지 않는가”라고 당당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伯耆州島)라는 섬으로 넘겨버렸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들어본 다음 안용복의 말에 동의를 하고서 에도막부에게 그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에도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했다. 특히 막부는 더 이상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까지 담아주었다.

귀국길에 장기도()에 이르렀는데 그곳의 도주가 대마도와 작당을 해서 울릉도 침략을 금하는 내용의 문건을 압수하고 안용복은 대마도로 보냈다. 안용복은 대마도에서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대마도의 보고를 받은 에도막부는 재차 안용복을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대한 접근을 금한다고 밝혔다.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해오던 대마도주는 이번에도 다시 막부의 문건을 빼앗고 안용복을 50일 동안 감금해두었다가 동래부 왜관(倭館)으로 돌려 보낸다. 안용복은 왜관에서도 40일 동안이나 억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안용복이 이상의 일을 상세하게 동래부에 보고하자 동래부사는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죄목을 걸어 2년의 형벌을 내렸다. 상을 줘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옥에서 풀려난 안용복은 울릉도 사수의 전사(戰士)로 다시 태어났다. 숙종 21년 여름 안용복은 떠돌이 중 5명과 사공 6명을 규합해 울릉도로 향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필요가 있다. 중 5명은 뇌헌, 승담, 연습, 영률, 단책이고 사공 6명은 흥해 사람 유일부, 영해 사람 유봉석, 평산포 사람 이인성, 낙안 사람 김성길, 연안사람 김순립이다. 때마침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로 들어왔다. 안용복은 당시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왔던 조선 선원과 함께 일본인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인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끝까지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이른 곳이 다시 백기주도였다. 이번에는 안용복이 울릉도 수포장(搜捕將)을 자처했다. 말 그대로 범인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장수라는 뜻인데 그런 직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안용복은 그만큼 담대한 인물이었다. 안용복은 당초 조선 정부와 에도막부 사이에 맺은 계약내용을 명시한 다음 중간에서 대마도 도주가 얼마나 떼먹었는지를 조목조목 따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백기주도의 도주로부터 앞으로 울릉도를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 어떤 통신사도 얻어내지 못할 엄청난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안용복은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강원도 관찰사 심평이 안용복의 보고내용을 조정에 올리자 안용복 일행은 모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이 국경을 침범해 분쟁을 야기시켰다며 참형(斬刑)에 처하려 했다.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 중한 범죄가 되는 희한한 장면이 전개된 것이다.

돈녕부 영사 윤지완이 나서지 않았던들 안용복 일행은 참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윤지완은 1682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윤지완은 “안용복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대마도가 옛날부터 중간에서 사기를 쳐온 것은 우리가 직접 에도막부와 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안용복으로 인해 직접 통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공도 있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안용복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이끈 장본인은 윤지완의 친형이자 좌의정 윤지선이었다. 형은 죽이자고 했고 동생은 살려야 한다고 했다. 윤지완의 논리는 이번 일로 대마도가 크게 자극받을 것이기 때문에 안용복을 죽여 그들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관직을 사칭한 죄도 포함됐을 것이다. 대부분의 신료가 참형을 주장하자 숙종도 “안용복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론에 동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지완이 나섰던 것이다. 그제서야 중추부 영사 남구만이 나서서 상책 중책 하책을 나눠서 제시한다. 상책은 안용복의 죄에 대한 판결은 일단 보류하고 우선 조정의 이름으로 대마도에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자는 방안이다. 에도막부에 특별사신을 보내 그동안 대마도가 중간에서 사기친 전반적인 내용을 점검해보겠다는 것이다. 중책은 조정이 아니라 동래부에서 같은 내용의 편지를 대마도에 보내는 것이었고 하책은 대마도에는 따지지 않고 안용복만 처형하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상당한 논란 끝에 중책을 채택했다. ‘울릉도 수호의 영웅’ 안용복은 이렇게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신 귀양을 가야 했다. 지금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도 안용복이 귀양을 가게 된 것은 식자층 사이에 화젯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실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상의 사실을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정리한 다음 안용복의 공을 이렇게 요약했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해 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땅을 회복했다.”

조정의 일처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준열하다. “이런 일은 걸출한 자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하려다가 뒤에 귀양을 보냈다. 그의 기상을 꺾어버리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애통한 일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서도 무(武)의 가치를 존중할 줄 몰랐던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서글픈 사건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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