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주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 '맹꽁이 서당'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기생(인줄 알았어요.) 어우동(어을우동).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국민배우 안성기씨까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어 왠만한 사람들도 그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테지요.
그래도 안성기씨가 나오는데... 너무 Sex 쪽으로만 중점을 둔 듯한 포스터가 마음에 안듭니다.-_-;
김문희/박근형 주연의 영화, 요화 어을우동 포스터 - 왕에서 종까지 그녀 품안의 모든 남자는 단지 노리개;;
제작 : 이태원
감독 : 이장호
원작 : 방기환
각색 : 이현화
촬영 : 박승배
음악 : 이종구
출연 : 이보희, 안성기
태흥영화 주식회사 제작
1985년 9월 28일 단성사 개봉
이처럼 주로 '야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해서 성종 시대의 다양한 야사 인물 중의 하나려니... 했던 사람인데.. 최근 드라마 '왕과 나'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어우동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자료를 한 번 뒤져보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입니다.
야한 소설 속의 남자들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그대로 갖춘 여자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단한 여자네요.ㅋ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마지막 주자는 어을우동(혹은 어우동)이다.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세를 탄 이 여성의 남성 편력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들여다 보기로 하자.
어을우동은 성종 시절 승문원 관리 박윤창의 딸로서 태강수(수는 왕실 친척에게 내리는 작호) 이동(李仝)이라는 남자에게 시집을 간, 잘 나가는 집안의 여성이었다. 그런데 바람기가 몹시 심해 버림받은 후 남자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간통하다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교수형으로 일생을 마감한 희대의 음녀(淫女)다.
어을우동 사건은 성종 11년 7월 11일, ‘어을우동이 수많은 남자와 간통하고도 승복하지 않으니 국문해 달라’는 의금부 보고로 시작된다.
9월 2일 실록에는 어을우동과 간통한 남자들의 명단이 줄줄이 기재되어 있으니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무원 이기, 이난, 구전, 공부하는 유생 홍찬과 이승언, 서리(하위직 관원) 오종련과 김의형, 전의감 생도(왕실병원 실습생) 박강창, 평민 이근지, 노비 지거비 등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어을우동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람과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의금부는 어을우동의 형량은 곤장 100대에 유(流) 2000리(서울에서 2000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해당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 시절에도 음행을 일삼은 어을우동에 대한 강경론과 동정론이 팽팽하게 맞서자 성종은 여러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성종 11년 9월 2일 실록.
<정창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선비의 딸로서 음욕을 자행한 것이 창기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 세종 때 선비의 부녀로서 음행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지만 그 후로는 모두 율에 의해 단죄했으니 어을우동도 율에 의해 단죄해야 합니다.”
김국광·강희맹:
“어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서로 간통해서 인륜을 손상시켰습니다. 청컨대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해 저자에 세워 도읍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서 징계가 되게 한 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윤필상:
“어을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으면 음란한 풍속을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춘추시대 정나라, 위나라의 풍속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이 여자를 큰 벌에 처하여 후세 사람을 경계하소서.”
홍응·한계희:
“국가에서 죄를 정할 때는 한결같이 율문에 따르고, 임의로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형장을 강등하여 관대한 법전을 따랐으며 법외로 논단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을우동의 추악한 행실은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되나 임금의 은덕은 죽음 중에서도 살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청컨대 율에 의해 결정하소서.”
이극배:
“태종조에 승지 윤수의 처가 맹인 하천경과 간통하고, 세종조에 관찰사 이귀산의 처가 승지 조서로와 간통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 후 판관 최중기의 처 유감동이 창기라 칭하면서 음행을 자행했는데,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습니다. 지금 어을우동은 종실의 처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꺼리는 바가 없었으므로 극형에 처해야 하나 율에 의하면 사형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청컨대 사형을 면하여 먼 곳에 유배하소서.”>
이처럼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임금이 결단을 내렸다.
<어을우동은 음탕하게 방종하기에 꺼림이 없었다. 이런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이 어떻게 징계되겠느냐. 의금부에 명하여 사형시켜라.”>
꼬리쳐서 맞아들여
성종 11년 10월 18일 어을우동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어울우동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녀는 처음에 태강수 이동에게 시집을 갔는데 행실이 과히 좋지 못했다. 이동이 은장이를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계집종처럼 가까이 하려 했다. 태강수가 그것을 알고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돌아가 슬퍼하며 탄식했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련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가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주인을 위해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련을 데리고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또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그와 간통했는데 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또 단오날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기와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 노비 파는 일로 어을우동의 집에서 의논하다가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겼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할 마음으로 직접 그의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이근지를 보고는 문득 붙잡고서 간통했다.
내금위(왕궁 수비대) 구전은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담을 뛰어넘어가 간통했다.
생원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그렇습니다” 했다.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 침방에 들어가 비파를 가져다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이생원이다” 하니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했다. 이승원이 답하기를 “춘양군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며 마침내 동침했다.
홍찬이 처음 과거에 올라 시내 구경을 하다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이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려 홍찬이 마침내 그녀 집에 이르러 간통했다.
서리 김의형은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 그녀를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했는데 어을우동이 서리를 몹시 사랑하여 이번에는 등에다 이름을 새겼다.
밀성군(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아들)의 종 지거비가 이웃에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크게 떠들어 이웃에 알리면 큰 옥사(獄事)가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했다.
이때 방산수 이난이 간통사건과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유감동이 많은 간부(奸夫)를 연루시키는 바람에 사형을 면했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통한 남자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이난,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 김칭, 정숙지 등을 끌어댔으나 증거가 없어 죄를 면했다.
사람들이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도 음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 어미가 말하기를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간통사건이나 섹스 스캔들에 대해 극형으로 다스리고 유배 보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들도 스캔들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으니, 인간 사이의 욕정 문제는 발본색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연인의 몸에 이름을 문신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나 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편에 어우동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어우동이 방탕하여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잡혀와 국청에서 문초당한다. 이 때 어우동이 관계했다는 수 십 명의 남자들도 국청으로 불러들여 간음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대질을 하는 과정에서 들어난 일인데, 그들 중 세 남자가 어우동과 정이 두터워 정표로 몸에 문신을 했다는 것이다.........
어우동이 미복(변장)을 하고 종실 방산수를 만나 간통하였는데 정호가 매우 두터워서 방산수 난은 자기 팔뚝에 어우동 이름을 먹물로 새기었고, 박강청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가장 사랑하여 그 또한 먹물로 팔뚝에다 어우동 이름을 새기었으며 서리(사관) 김의향을 만나 어우동이 그를 사랑하여 그의 등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었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당시 사대부집 종들 사이에서, 혹은 평민 계층에서 사랑의 징표로 정인의 몸에 문신을 하는 것이 그 당시 시속(時俗)으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듯 싶다. 하여간 위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풀이하면 어우동은 그와 정분을 맺었다는 그 수많은 남정네들 중에서 세 사람, 종실 방산수와 전의감 생도 박강창 그리고 사관 서리 김의향을 깊이 사랑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우동은 조선시대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 정2품 벼슬인 지사 (知事) 박윤창의 딸로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李 仝)의 아내다.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양반집 규수가 왕족에게 시집가 귀부인이 되었는데 어쩌다 조선 오백년 역사 중 음행사건으로 당대의 사회에 대 파란을 일으키고 또 오늘날까지 음탕한 여자의 대명사로 불려지고 있을까?
어우동은 역사에 기록된 바 대로 과연 색을 탐하고 색기 넘치는 음탕한 여인이었을까?
여기서 잠시 조선조의 시대상을 유추해 보자. 조선시대는 여성의 인간적인 권위나 사회적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던 여성에게 있어 완전한 암흑의 시대였다. 여자는 재능이 있어도 그것을 펼 수 없고, 학문에 뜻이 있어 글 배우기를 갈망하여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다만 부덕 (婦德)을 기르는 기초교양에 필요한 정도의 학습을 허용하였다. 여자가 설령 학식이 있다해도 여자의 무식함이 오히려 덕이 된다는 사대부들의 통념에 눌려 여자는 자신의 학식을 들어내 놓고 자랑할 수조차 없었다. 같은 인간이면서 남녀의 귀천을 갈라놓은 남존여비 사상에 물들어 여자에겐 오직 유순과 맹목적인 순종 그리고 정절을 강요했던 시절이었다.
'두 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여인의 아들과 손자에게는 분과시험(과거)과 생원시, 진사시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라고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시해 놓았다.
한 여성의 행실에 따라 그 집안의 아들과 손자 대까지 벼슬길에 나가는 관문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법 앞에서 과부가 어떻게 재혼할 수 있으며 재혼할 엄두가 나겠는가? 이렇듯 여성에겐 정절을 강요하면서 그 당시 사대부 남자들은 수탉처럼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도 모자라 기방을 출입하며 기녀와의 유희를 즐기면서 그것이 마치 사내 대장부의 풍류인양 미화하였다.
왕족인 종실의 경우는 더 심했다. 왕자로 왕위 계승권에세 일찍이 밀려난 왕자와 왕자의 아들 들은 행동반경에 더욱 규제가 심했다.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고, 도성 밖으로 자유롭게 나가 살 수도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 역시 종실로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순응하며 살았다. 어느날 남편이 은세공장이를 집으로 불러 일감을 맡겼다. 어우동은 먼 발치에서 숙련된 솜씨로 집안의 오래된 은붙이를 녹여 새롭게 장신구를 만드는 은세공장이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녹아있는 은물을 틀에 부어 비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드는 세공기술이 신기하고 놀라워서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는 직접 가서 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탐구심이 강하고 호기심 많은 어우동은 자신의 계집종 옷을 빌려입고 은세공장이의 곁으로 다가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세공장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실의 귀부인이 헛간같은 곳에서 외간남자와 마주앉아 있는 그 자체가 법도를 어기는 일인데 그만 그 장면을 남편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태강수는 어우동이 천한 은장이를 좋아하여 가까이 지냈다고 화를 내며 그날로 아내를 친정으로 쫓아보냈다. 친정으로 돌아온 어우동은 어이없는 이유로 남편에게 소박맞은 자기신세를 한탄하며 슬퍼하였다. 남은 여생을 홀로 살아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억울해 하고 분해 하다가 문득 남편을 비롯해서 그 시대 모든 사대부 남성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우동은 떨쳐 일어나 외간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우동은 남자를 선택했다. 남자가 여자를 선택하는 시대에 어우동은 용감하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를 스스로 골라 잡았다. 때로는 변장을 하고서 길에 나가 직접 상대를 보고 마음에 드는 남자라면 서슴없이 다가가서 유혹했다 한다.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화를 꽂고 행진하는 홍찬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끌려 홍찬이 지나는 길목을지키고 있다가 그를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이 대목도 성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행실은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대궐 안까지 날아들었고 이 사실을 알게된 성종은 어우동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을 내렸다.
어우동은 의금부 나졸이 자신을 잡으러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달아났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다.
어전회의에서 어우동의 처벌 문제를 놓고 임금과 신하간에 오랜 논쟁이 벌어졌다. 대명률에 의해 간음죄의 처벌인 곤장 100대를 쳐 멀리 유배보내자는 의견과 사형의 중형을 주장하는 의견이 맞섰는데 종친녀의 음란은 중형으로 다스려서 사회기강을 잡아야 한다는 성종의 의지대로 ( 음행죄는 태형이나 장형이었으나) 사형이 내려졌다. 종실의 처로 근친들과 간음하여 왕실의 위상을 더럽힌 죄가 크기 때문이다.
성종 11년 10월 어우동은 교수형으로 말 많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실록에 명기된 성균관 유생 수십명에, 노비, 조관 등 그 많은 남자들과 그녀는 과연 사랑을 했던 것일까? 사랑의 징표로 팔뚝과 등판에 먹물로 인을 친 세 남자 만을 사랑했던 것일까? 어우동의 남성편력은 단순히 여자의 성품이 음란하여 저지른 음행사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자에게 불평등한 사회, 남성 우위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유교사회를 향해 몸으로 대항한 처절한 항변이 아니었을까? 생명을 담보로 한.
백마대 빈지 몇해를 지났는고
낙화암 서서 많은 세월 지났네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리
부여회고(扶餘懷古), 라는 이 시는 어우동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음은 어우동을 찾다가 발견한 다른 주인공, 유감동이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세종대왕이라는 성군을 만나서인지.. 운이 좋은 것인지, 교수형은 피해갔군요.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조선시대 3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중 하나인 유감동은 길거리에서 굴러먹던 여성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명예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검한성(檢漢城) 유귀수의 딸로서 빵빵한 집안의 규수였다.
그녀는 나이가 차자 평강 현감 최중기에게 시집을 갔는데, 최중기가 무안 군수로 나갔을 때 함께 부임했다가 병을 핑계로 먼저 서울로 올라와 음란한 행실을 일삼는 바람에 쫓겨난 여인이다.
유감동은 과연 어떤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기에 근엄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유감동 사건이 사회문제로 확산되자 세종은 신하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헌부에서 음부(淫婦) 유감동을 가뒀다는데 간통한 남자는 몇이나 되며, 본 남편은 누구인가” 하자 김자가 답하기를 “간통한 남자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이며 기타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본 남편은 평강 현감 최중기입니다.”>
간통한 남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 허허허. 좀 더 정밀한 관찰을 통해 유감동과 정분을 나눈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세종 9년(1427) 8월 20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유감동과 간통한 사람은 정효문, 이효랑, 오안로(해주판관), 이곡(전 도사), 장지(수정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 최문수(의자 만드는 기술자), 이성(은으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자), 전유성, 변상동 등이 더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사헌부는 “간통한 자 중에서 관리들은 직위해제하고 잡아다 국문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정효문과 이효랑은 직위해제하지 말고 일단 잡아오라”고 명하자 김종서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정효문은 그의 숙부 정탁이 간통한 사실을 알고도 고의로 유감동을 범했으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이효랑은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간통했으니 두 사람 행실은 짐승과 같습니다. 추궁하여 다스리소서.”>
이에 대한 세종의 답변.
<“이 여자를 더 추국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간통한 남자가 십수 명이 나타났고, 또 재상도 끼어 있으므로 일의 사연은 벌써 다 알려졌으니 이것을 가지고 죄를 결정해도 될 것이다. 다시 더 추국한다 해도 이 여자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에는 유감동의 음란행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유감동과 간통한전유성, 주진자, 김유진, 이효례, 이수동, 송복리, 안위 등은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살피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욕심을 마음대로 부렸습니다.
이자성은 비록 간통하지는 않았으나 간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황치신은 나루터 아전으로서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간통했는데, 후에는 지나온 내력을 알면서도 계속 간통했습니다.
변상동은 이승이 첩으로 정해 거느리고 살 때 몰래 훔쳐 간통했으니, 그 마음과 행실이 불초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달 간통했으니 어찌 이 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몰랐겠습니까. 이승과 이돈은 사정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간통하면서 유감동의 아버지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니 그 뻔뻔스러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안로는 지나온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아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습니다.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으니 그가 이 여자의 사정을 안 것은 확실합니다. 이효랑은 처남의 정처(正妻)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권격은 고모부인 이효례가 일찍이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간통했습니다.
김여달은 길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간통하고 음탕한 욕심을 내어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거느리고 도망했습니다.
유감동은 공직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娼妓)라 일컬어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가 없으니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절은 유교 사회의 법도와 기강이 강했던 시대인 만큼 남녀 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는 법도가 준엄했다. 사헌부는 유감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엄격하게 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보고했으니, 요즘 용어로 검찰의 구형에 해당하는 대목을 직접 들어보자.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같이 자다가 소변을 본다고 핑계하여 김여달에게 도망했습니다.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죄를 저질렀으니 교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여달은 1등을 감형하여 곤장 100대를 치고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낼 것이며, 간통한 최중기의 매부 이효랑은 곤장 100대, 오안로는 자자(얼굴에 칼 자국을 내는 것), 기타 간통한 자들은 곤장 60~100대를 쳐야 합니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 만큼 교수형을 주장했으나 마음이 너그러웠던 세종은 그녀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유배조치로 유감동 사건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다. 세종 15년(1433) 12월 4일 지방으로 유배된 유감동은 또다시 일을 벌였다. 이날 사헌부는 ‘임금께서 유감동을 너그럽게 살려주었기 때문에 비슷한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며 음행사건에 보다 단호한 조치를 내려 줄 것을 간청했다.
당시 사헌부에는 재상의 딸인 어리가가 고위 공무원들과 떼를 지어 음행을 일삼다 체포되어 수감됐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사헌부는 유감동처럼 너그러이 유배시키면 앞으로 동일한 사건을 바로잡을 수 없다며 극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세종이 허락하지 않자 대신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종 15년 12월 8일, 사간원이 다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 유감동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전일에 어리가, 이의산, 허파회 등을 사형에 처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남녀 사이에는 큰 욕심이 있는 것이니, 엄중하게 금하고 방지하지 않으면 요사하고 음란한 무리들을 어찌 경계하겠습니까. 태종께서는 음란 행실을 일삼는 자들을 큰 죄로 징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감동이나 금동, 연생, 동자와 같은 무리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만약 어리가의 죄를 관대한 법으로 처리한다면 뒷날 방자한 행위를 하는 자가 끝이 없을 것이 두렵습니다.”>
입력날짜 : 2006-08-17 (10:47)
조선시대 別錢 규방의 성교육용으로 금속판 위에 성행위 장면을 새겼다.
세종 9년(1427) 9월16일자 사헌부의 사건 보고서는 유감동의 자유분방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유감동은 관리의 정처로서 남편을 버리고 도망하여 거짓으로 창기라고 일컫고 서울과 외방에 횡행하면서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하여 추악함이 비할 데 없다. 이 승과 이 돈은 간통하면서 감동의 아버지의 집에까지 드나들었으며, 오안로는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관청에 끌어들여 간통하고 관청의 물건까지 팔기도 하고 주기도 했으며, 전수생도 여러 달 동안 간통했다.
이효량은 처남의 정처와 간통했으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며, 김여달은 길에서 피병하러 가는 유감동을 만나자 순찰한다고 위협하여 강간하고, 드디어 음탕한 욕심에 남편 최중기의 집까지 왕래하며 거리낌없이 간통하다 마침내 유감동을 데리고 도망했다. 유감동이 최중기와 같이 살 때 밤에 남편과 자다 소변본다고 핑계대고 김여달에게 도망쳤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만큼 교수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세종은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어 종친의 아내로서 행동이 문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요부(妖婦) 어우동(於宇同, 정확하게는 於乙宇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때는 성종 시절, 아버지는 승문원 관리 박윤창, 남편은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 동(李仝). 일찍이 은장이(銀匠)를 맞이해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 하려고 했다.
그 사실이 알려져 어을우동은 친정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어느날 어을우동이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자 한 계집종이 이렇게 위로했다.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라는 이는 일찍이 사헌부 관리가 되었고 용모가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신분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불러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어느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하였다.
이후 어을우동의 남성 편력은 끝없이 이어진다. 어우동이 미복을 하고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방산수 이 난이 맞아들여 간통했다. 그 정이 매우 두터웠던 모양이다. 이 난이 자기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어우동의 이름을 새길 정도였다. 단오날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 도성 서쪽에서 그네 타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 이 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물었다.
“뉘 집 여자냐?”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의 첩입니다”라고 해서 서로 정을 통했다. 전의감 생도 박강창 역시 어우동과 놀아났다.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이미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대담해진 어을우동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과거 합격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고 거리를 돌며 좌주·친척 등을 찾아보는 일. 대개 방방후 사흘 동안 하였음)를 하는 홍 찬을 본 어우동은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후 길에서 홍 찬을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 찬이 그의 집으로 가 정을 통했다. 그 상대가 반드시 양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 감의향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집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했다. 어을우동이 사랑해 등에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귀천 안 따진 어을우동의 남성편력
삼척 원덕 지방에 지금도 남아 있는 해신당을 재현한 모습.
이 같은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어을우동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간통했는가 하는 것도 관심사였다. 그 때 방산수 이 난이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이 많은 간부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 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관계를 맺은 간부를 열거하고, 방산수 이 난도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 칭·김 휘·정숙지 등을 끌어대었다. 문초를 받은 관계자들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심 회는 “어을우동의 죄는 율을 상고하면 사형에는 이르지 않으나,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이 이와 같은 것은 강상에 관계되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여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라고 극형을 주장했다.
윤필상도 “어을우동은 강상을 무너뜨렸는데도 죽이지 않으면 음풍이 어떻게 그치겠습니까. 남녀의 정은 사람들이 크게 탐하는 것이므로, 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욕정을 자행하여 정·위나라의 풍속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이 여자를 극형에 처하여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소서”라고 했다.
김국광과 강희맹은 의논하기를 “어을우동은 종실의 부녀로서 음욕을 자행하기를 다만 뜻에만 맞게 하여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서로 간통하여 이륜(彛倫)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마땅히 조종조의 법에 따라 중벌에 처하여 규문 깊숙한 속의 음탕하고 추잡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경계하고 반성하게 함이 옳겠습니다. 중국 조정의 예에 의하여 저잣거리에 세워 도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징계가 되게 한 연후에 율에 따라 멀리 유배하소서.”
결국 어을우동은 성종 11년(1480) 10월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울러 조선 최대의 음녀(淫女)로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종실의 아내로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유교 윤리를 표방했던 조선사회는 그를 포용할 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어우동과 간통한 것으로 알려진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실제로 문초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를 면했다. 성종 13년(1482) 8월8일 실록에 의하면, 어을우동과 간통한 자들은 이미 모두 석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요즘도 더러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는 동성애(同性愛)도 확인된다. 세종 시절, 세종의 아들로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의 두번째 부인 봉씨(奉氏)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자빈의 동성애 사건을, 세종은 측근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도승지와 동부승지(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관원,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서관)만 배석시킨 채 논의하고 있다. 세종 18년(1436) 10월26일의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난해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봉씨가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으로부터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 또 항상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요 근래 봉씨가 궁궐의 여종 소쌍을 사랑하여 항상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니 궁인들이 혹 서로 수군거리기를 ‘빈께서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한다.
어느날 소쌍이 궁궐 안에서 소제하고 있는데 세자가 갑자기 묻기를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하니 소쌍이 깜짝 놀라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듣건대 봉씨가 소쌍을 몹시 사랑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나는 비록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였고, 소쌍도 다른 사람에게 늘 말하기를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하였다.
소쌍이 또 권승휘의 사비(私婢) 단지와 서로 좋아하여 혹시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봉씨가 사비 석가이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봉씨가 새벽에 일어나면 항상 시중드는 여종들로 하여금 이불과 베개를 거두게 했는데, 소쌍과 함께 자리를 같이한 이후로는 다시는 시중드는 여종을 시키지 아니하고 자기가 이불과 베개를 거두었으며, 또 몰래 그 여종에게 그 이불을 세탁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궁중에서 자못 떠들썩한 까닭으로 내가 중궁과 더불어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으니 소쌍이 말하기를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하였다.”
궁궐 내부의 공공연한 동성애
동성애는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녀와 종비(從婢) 등이 사사로이 서로 좋아해 자리를 같이한다고 하므로, 그것을 매우 미워하여 궁중에 금령을 엄하게 세워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살피는 여관이 아뢰어 곤장 70대를 집행하게 하였고, 그래도 금지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를 더 집행하기도 하였다. 그런 후에야 그 풍습이 조금 그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도 이러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세자빈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기재할 수 없으니 우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른 너댓 가지 일을 범죄 행위로 헤아려 교지를 지어 바치게 했다. 결국 봉씨는 그 사건으로 폐출돼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나갔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은 두드러지는, 아니 어쩌면 예외적인 것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조선사회 전체가 그러했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남성들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면서 여성들에 대해서는 정절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평가 역시 시대에 따라,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들을 가리켜 요부(妖婦) 혹은 음부(淫婦)로 볼 수도 있겠고, 성해방론자 내지 인간해방론자 혹은 남녀평등론자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겠다.
결국 이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윤리와 도덕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뀔 수밖에 없겠지만, 윤리와 도덕의 존재 그 자체가 없어질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출판호수 2004년 01월호
출처 : [자료원 역사탐험]
사족.
어우동, 유감동을 비롯하여, 인수대비, 정순왕후, 문정왕후 등... 조선시대 유명한 여자들은 모두 악명 높은 사람들 밖에 없네요. -_-;; 이것도 남존여비 사회의 편견에서 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성종과 어우동보다 성종과 기생 소춘풍과의 이야기가 더 유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일단 유명하니까 어우동을 고른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