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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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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의 병세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에서 조선시대 영조 장조 정조 3대의 편지를 촬영한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해 ‘장조’인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을 번역했다고 14일 밝혔다.

현재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는 거의 없으며 알려진 자료도 개인적 고백이 아닌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권 교수에 따르면 1910년대 초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홍봉한의 5대손인 홍승두 집안의 원본을 거간꾼에게서 구입해 일본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에 있는 3대 임금의 서적과 서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고 밝혔다는 홍씨 가문의 글이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전했다.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태어나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로 추존됐다.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조선왕실 여인의 회고록으로 유명한 ‘한중록’에서 남편의 비화를 소개했다.


○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미친 듯합니다” 탄식▼

권 교수는 “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세자가 직접 고백하는 내용이므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에 관해 아들 정조가 만든 문집은 있지만 개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며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이 맞는다면 역사의 모호한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묘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융릉.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의 고백이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궁내에서 의관에게 자신의 병세를 전하면 갈등을 빚고 있는 아버지 영조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역력히 나타난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모일로 추정)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 끊임없는 국정에 대한 관심

사도세자는 편지를 통해 병중에도 나라살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병을 앓을 때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다가도 이성을 되찾을 때는 합리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1755년 11월 회일)

사도세자는 편지 여러 통을 장인에게 보내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한 뒤 학자들과 자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장모에게 바친 제문 등도 번역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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