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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문명

[ 世界 四大 文明 , cradle of civilization ]

[네이버 지식백과]세계 4대 문명 [世界 四大 文明, cradle of civilization] (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발달시킨 황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등 4개의 문명을 지칭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황하문명을 말한다. 4대 문명의 발생지들은 모두 큰 강을 끼고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기후가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지역들이다. 특히 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 등 이들 지역이 4대 강을 끼고 있어 기후ㆍ교통ㆍ토지 등 고대 농업 발달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문명 발생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인더스문명은 BC 3000년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바탕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대표적 유적은 당시의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인데,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를 받았던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따서 고고학적으로는 하라파 문화라고 부른다.





아랍 - 페르시아 제국 건설. 대략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페르시아 문명이라 함은 이란과 그 주민의 역사를 지칭한다. 


BC 6500년경 농경, 목축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 유역에서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바빌로니아ㆍ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ㆍ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중국 - 항우, 유방의 천하 결전 끝에 유방의 승리로 한나라가 건국됨. 


황하문명: 황허[黃河] 유역에서 발생한 중국의 고대 문명으로 양쯔강[揚子江]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中國文明)을 대표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문명을 형성한 황하문명은 중국 황하강 중ㆍ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이다. BC 5000년~4000년경부터 신석기 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좁쌀ㆍ기장 등이 재배되고 개ㆍ돼지 등도 사육되었다. 황하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양사오 문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룽산 문화로 대별된다.






북아프리카 - 고대 이집트 건설.


BC 3000년경의 이집트문명은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위치가 폐쇄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비하여 정치ㆍ문화적 색채가 단조롭다. 사막과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 없이 2000년 동안 고유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 해마다 겪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 나일강변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홍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범람 때문에 태양력, 기하학, 건축술,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남유럽 - 신생국 로마의 성장과 그리스의 몰락. 







시베리아 - 수렵 채집

북아메리카 - 수렵 채집

북서유럽(영국,독일,노르웨이, 덴마크) - 수렵 채집

동유럽 - 수렵 채집

아프리카(누비아, 북아프리카, 이집트 제외) - 수렵 채집

동남아시아 - 수렵 채집

일본 - 수렵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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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줄넘기 (19세기 말)






브로드웨이 (1900년)







자전거 타고 나들이 가는 가족 (1900년)






여성 전용 지하철칸 (1903년)








신문팔이 소년들 (1910년대)







 1차 대전에 참전하는 미군 (1916년)








멀리서 뉴욕을 바라보는 이민자 가족 (1925년)








자동차에서 내리는 부유한 여인 (1928년)








대공황 시기, 무료 배식소에 줄을 선 실업자들 (1930년)










맨해튼 (1931년)









맨해튼 야경 (1937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1939년)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안내원들 (1942년)







 
일본 패망에 환호하는 시민들 (1945년)








맥아더의 귀국을 환호하는 시민들 (1951년)









락앤롤쇼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있는 청소년들 (1957년)









눈덮힌 센트럴파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1958년)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세련된 남녀 (1963년)









시위 도중에 연행되는 흑인 여성 (1964년)








비틀즈가 머무는 호텔에 난입하려는 소녀들 (1965년)









히피커플 (1967년)









베트남전 반대를 외치는 대학생들 (1969년)









건설 중인 국제무역센터 (1970년)









클럽에서 춤추는 여자들 (1977년)










 

브레이크 댄스 (1984년)







공격당한 세계무역센터 (2001년)










오늘날의 센트럴 파크 - 우와.. 좋다..ㅠ






불과 60여년 전에도 대부분의 집이 초가집이었던 한국과 비교해서..
그들은 100년 전에도 너무도 현대화되어 있었다..

처음에 한국 왔을 때 아마 문화 충격 받았을 것 같다..

우리야.. 우리 역사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들 눈에는
한국인들의 생활이 너무도 비위생적, 더럽고 미개인/야만인 같았을 것 같다.


암튼 서양의 근대화 시절 모습은 봐도 봐도 놀라울 뿐...
또한 100년 만에 따라잡은(?) 우리나라도 놀라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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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고무신처럼 수놓인 꽃신들... 참 이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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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들의 사연을 아십니까?





EBS 지식채널e,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


EBS 지식채널e 영상에서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짧은 영상을 본 후 나는 너무 놀라서 5분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냥 묶어서 성장이 안되어서 작은 정도인줄만 알고 있던 나에게 뼈가 부러져서 휠 정도로 꺾인 발은 충격이었고, 성인 여성의 발이 10cm도 안되게 만들었다는 진실은 어떤 공포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간에 쏙 들어간 부분을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_-;;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치로만 퍼지던 풍습이 나중에는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는데.. 무서운 것은 귀족층 여자들은 그나마 하루종일 하녀들이 일을 해주니 다행이지만 서민층 여자들은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 발을 해가지고는 어딜 갈 수가 없었겠지..
일도 할 수가 없었겠지..

게다가 마을마다 전족 대회가 열려서 누구 발이 더 작은가 점점 더 심한 경쟁을 하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발이 아주 크거나 아주 흉측하게 생긴 것으로 소문이 나서 시집도 못가게 되니.. 딸을 사랑할수록 그 어미는 더욱 심한 전족을 시켰다고 한다.

정말.. 무섭다.. 무서워.....ㅠㅠ



중국언론에 실린 중국인들까지도 충격에 몰아넣은 전족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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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세상에.. ㅜㅜ ㅠㅠ 무서워라..
어쩌면 저런 짓을 했을까...

단순한 성적 유희를 위해서 모든 여자의 뼈를 부러뜨리다니..
저게 1000년이나 유행하다니.....

당대 유명 시인들이 저걸 낭만이랍시고 여성의 미를 예찬하는 시를 수백 수를 남겼더구나.

망할 놈들아.
작은 발이 그렇게 귀여우면 니들 발이나 자르든가.

왜? 니들은 남자니까 큰 게 좋아?
그러면 니들은 늘리면 되겠네!!

다리뼈가 부러지든 말든 다리 늘려서 철심 박지 그랬니?
이 자식들아.!!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풍습인 전족이 저렇게 유행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으며, 여성을 오직 성적인 도구, 유희의 대상으로서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과거 유럽에서도 다른 형태의 전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과도한 보정 코르셋 때문에 철사에 숨이 막혀 죽거나 갈비뼈가 부러져 죽은 여성들도 있었고, 프랑스 여성들은 연약해 보이기 위해서 겨울에도 속살이 비치는 얇은 옷에 물까지 끼얹고 다니다가 폐렴걸려 죽었다는데..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핍박받지 않은 역사가 없구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왔을까..ㅜㅜㅠㅠ


지식채널e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러한 악습이 현대의 여성에게도 이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뚱뚱한 여성, 혹은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비하와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많은 TV프로들, 아름다움만이 여성의 미덕인 것으로 주입시키는 이 시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는 이 시대가 수많은 거식증 환자들, 다이어트 중독자들, 성형중독자들을 만든 게 아닌가.

여성의 몸은 사랑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담고 있는 그릇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마음의 눈으로 보려나..  그렇게 되면 목소리 좋은 사람만 선택되려나. 훗.)


티비프로도, 남자분들도, 여자분들도.... 상대방을, 자신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말길 바라며,  
21세기형 전족이 사라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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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문서이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대헌장이 불과 6개월 만에 1천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미국인 10명 중 9명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5분 기다리는 것을 죽을 죄라고 믿는다. 그런데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1천만 명의(!) 사람들이 읽기도 어려운 찢겨지고 얼룩진 양피지 문서인 대헌장을 아주 잠시 쳐다보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니, 도무지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유명한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대헌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혹자는 대헌장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대헌장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악명 높은 중세의 관행이었던 결투재판을 아는가? 대헌장에서 그 결투재판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면 신성재판은? 이것 또한 합법적이었다(신성재판에서는 피고를 끓는 타르통에 처넣어 살아 남으면 무죄가 입증되었다).

배심재판은 어땠는가? 사람들은 대헌장에 배심재판이 규정되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15년의 영국에서 배심재판은 없었다. 용의자들은 증인에게 반대심문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고, 전문증거를 배제할 권리도, 항변할 수 있는 권리도, 또 법정으로 가는 길과 법정에서 얼굴을 가릴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배심원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있었는가? 모든 사람이 항유해야만 하는 이 권리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대헌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유민들만이 대헌장에 적힌 새로운 권리들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15년에 영국인 가운데 자유민은 아주 소수로, 인구의 5/6가 농노였다.

그렇다면 대헌장으로 이익을 본 것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아닌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대헌장은 귀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에게서 얻어낸 새로운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영국인은 대헌장을 통해 단 하나의 권리도 더 얻어낸 게 없었다.

만약 대헌장이 군주정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맥 풀리게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215년에 보통의 영국인은 군주정에 의해 억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국인을 억압했던 것은 군주가 아니라 귀족 영주들이었다.

여하튼 대헌장이 군주정을 견제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국에 진짜 전제 군주가 생긴 것은 대헌장 이후의 일이었다.

이상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헌장을 그렇게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헌장에 대해 밝히기로 마음 먹은 명석한 영국인 에드워드 코크 경 때문이다. 그는 먼지 낀 낡은 도서관 서가에서 마그나 카르타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영국인에게 군주가 함부로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다였다. 그날 이후로 영국인은 그들의 모든 권리와 자유가 바로 그 문서,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그 마그나 카르타라는 문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셰익스피어는 존 왕을 다룬 희곡에서 이 문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 원주).

마그나 카르타가 발견된 이후로는, 영국의 국왕이 인도에 침을 뱉기만 해도 누군가가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그것을 지키시오"라고 절규하곤 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으로서 맛볼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건 그렇고,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에 왕실의 옥새를 찍게 했다. 그러니 존 왕이 서명하는 모습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는 잘못되었다. 왕은 서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서명할 줄도 모르는 왕이 많았따 - 원주).

존이 사악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그냥 사악했는가 아니면 진짜로 사악했는가 하는 것이다. 노르망디를 잃고 패배한 전쟁에서 그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병사들은 전장에 버려 두고 도망쳤으며, 사촌 아서를 살해했고, 아서의 누이를 40년 동안이나 감옥의 독방에 감금했다. 또한 신하의 부인을 겁탈했으며, 귀족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인질들을 잡아두었다. 인질들은 나중에 몸값을 받고 풀어 주거나 죽였다. 단지 재미로 옛 친구의 부인과 아이를 가두어서 굶겨 죽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는 영국 역사살 가장 유능한 행정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귀족들이 그에게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토지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해묵은 투쟁이었다. 그는 토지세를 올리기를 원했고, 귀족들은 반대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귀족들이 존 왕에 대항하여 뭉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군대'라고 불렀다. 존의 군대는 그냥 존의 군대였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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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갖게 한, 여왕 엘리자베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모와 사랑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튜더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을 비롯해 국가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엘리자베스에 관한 기본적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의 삶을 천천히 살펴 보면,,,


엘리자베스 1세

2000년에 뉴욕타임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 났던 지도자를 선정하였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힌 인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였다. 16세기까지만 하여도 영국은 인근의 스페인과 프랑스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였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영국이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은 가장 위대한 여왕이었다. 20세기 초반 까지 지속되는 대영제국의 영광은 모두 이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마련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한 첫번째 부인 대신에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한다. 그리하여 천년이상 이어온 구교 로마 카톨릭과 즉시 인연을 끊고, 영국을 신교 국가로 만든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앤 볼레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레인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 공주 뿐이었다.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볼레인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순간, 그대로 식어 버린다. 그는 앤 볼레인을 간통과 반역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려쳐 죽여 버린다.

그 와중에 그의 3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볼레인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어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햇필드 하우스로 추방당해 외롭게 자라고, 이러한 시기, 세번째 왕비를 맞아 들인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얻어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졌다. 이 때부터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라야 했다.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파란만장한 공주 시절을 딪고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기까지.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존재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는 일생을 공주로서만 살아갈 운명인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헨리 8세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까지도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는 멀어 보였다. 


헨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 소생의 메리가 있었고 그 외에도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적손으로 인정된 많은 왕권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이 다짐으로 엘리자베스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이후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연루되어 런던탑에 유폐된다. 그러나 반역 가담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풀려난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한다.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암에 걸려 죽고 만다. 마침내 온갖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 온 듯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숙적 메리 스튜어트


메리 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은 타 국가 왕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영국 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여왕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구교 귀족 세력들로서 엘리자베스보다는 헨리 7세의 적손이면서 프랑스의 왕비였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 또한 공식적으로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그려넣었다. 이것은 즉 엘리자베스는 명분상으로는 자격없는 왕이며 사실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혈통적으로 고귀하고 당당했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서출이며 자격없는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결코 메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두 여인의 일생을 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 스튜어트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끝이 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메리 스튜어트는 혈통상으로도, 여성으로서도 일생을 걸고 질투했던 대상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 신교를 회복시키고, 메리 시절의 유혈 정치를 끝냈다.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다. 국가 안정을 위해 속히 결혼하여 아이를 얻어야 한다는 초기 신하들의 권유도 번번히 뿌리쳤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였지만 불같은 사랑속에서 세 번 결혼하고 왕자를 낳은 메리 스튜어트를 진정으로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는 하였으나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고, 혹여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부터의 애인이었던 그는, 훗날 엘리자베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노포크공의 반역 음모에 연루된다. 



아래에 있는 사진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얼마 후, 로버트 더들리 백작과 춤을 추기 전, 인사하는 모습이다. 굉장히 인상깊고 멋졌던 장면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분분하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던가, 아버지로 인해 남자를 불신하게 되었다던가, 어린 시절 계모 제인 시모어의 첫 번째 남편으로부터 성적희롱을 당해서라던가 등의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라는 칭호를 당대에 듣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엘리자베스1세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한 세익스피어도 이 시대 사람이다.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내 국가를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전체가 함께 성장하였다.

파란만장하고 불운하기도 한 삶을 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막강한 여왕이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왕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그녀의 시대는 황금기로 불린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는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유명한 말이 인상깊다.


마지막 대관식에서 허옇게 분칠하고 빨갛게 볼터치하고 버진퀸임을 말하는 엘리자베스..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준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
http://www.themakeupgallery.info/period/c16/elizabeth/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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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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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의 아내

영국 역사에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인물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긴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도 없었거니와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6명의 아내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영국 역사에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나라에 숙종과 비슷한 임금)


헨리 8세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8살의 청년으로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이 여섯 왕비 모두에게 성병 옮겨준(자식들에게까지 태내 감염됐음)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왕자 하나가 태내서부터 성병옮아 태어나 10살도 안돼 어린 나이에 저 세상갔고 또 한 왕자는 성병때문에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빠진 모습으로 살기도.........했다고 한다. -_-;

그의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였던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 공주였다. 이 결혼은 그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순전해 정치적 이유(에스파냐의 덕을 보기위한)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결혼하여 ‘메리’라는  딸을 낳았는데  ‘메리’는 나중에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이 된다.

어쨌던 사랑없는 결혼은 오래 못가고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시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래서 헨리 8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혼신청은 로마 교황의 권한아래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에스파냐의 압력 때문에 이혼을 거절했다.

독실한 카토릭 신자였던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혼의 사유-아들을 못 낳는다)과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니 나중에 이 두 종교로인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나라는 갑자기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앤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앤 볼레인을 통해 딸하나와 죽어서 태어난 아들 까닭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못다했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비극의 왕비 ‘앤 볼레인’의 딸, 이가 곧 엘리자베스 공주로 뒷날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앤 왕비를 사형시키고 며칠후 헨리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머’와 결혼, 드디어 왕자를 낳았으나 며칠만에 왕자가 죽고 얼마안가서 왕비 ‘제인 시머’도 죽는다. 그리고 헨리 8세는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무뚝뚝한 도이치 여자인 앤 공주를 왕비로 맞았으나 금방 이혼을 해버리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왕비 캐서린 하워즈의 외도 때문에 앤 볼레인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고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아라곤 왕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카탈리나(캐더린)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5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사이의 막내딸
1485년 12월 15일 마드리드에서 출생
1536년 1월 7일 헌팅던 킴볼튼 성에서 사망
피터버러 성당에 묻힘

원래 카탈리나(캐더린)는 헨리 8세의 형인 아더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더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카탈리나는 시동생인 헨리 왕자와 재혼하였다. 헨리 왕자는 이후 즉위하여 헨리 8세라 불렸고, 카탈리나와 헨리 8세는 6명 정도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중 오로지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린 메리 1세이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에 목말라 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정부였던 메리 볼린의 여동생이자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42세로 나이가 많았던 카탈리나 왕비가 건강한 후계자를 낳아줄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 했고, 교황이 이를 인정치 않자 카톨릭과 결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33년 헨리 8세는 카탈리나 왕비와 이혼하였다.

채 다섯달도 안 되는 결혼생활을 한 첫남편보다는 헨리 8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한다.
헨리 8세에게 이혼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비 앤 볼린(앤 볼레인)

윌트셔 백작 1세 토마스 볼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 사이의 딸
1501년 또는 1507년 노퍽 주 블리클링 홀에서 출생
1536년 5월 19일 타워 그린에서 참수형으로 사망

앤 볼린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헨리 8세가 원하는 후계자는 낳아주지 못했다. 세번째 아이가 아들이긴 했으나 그  만 사산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간통죄로 몰려 유폐된 후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앤 볼린의 첫 아이는 훗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으니 이가 곧 엘리자베스 1세이다.

헨리 8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차가운 도도함에 반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길 원했고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맺으면서 영국 성공회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

앤 볼레인은 헨리 8세가 간절히 원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게 돈다.
공주의 출생은  뜨겁던 사랑이  잔혹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유산, 아들의 사산을 거치면서 헨리의 사랑은 식고  앤과 이혼이 어렵자 앤에게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런던타원에 갇워 버리고는 처행을 시킨다.



잉글랜드 왕비 제인 시모어

존 시모어 경과 마저리 웬트워드 사이의 딸
1505년 윌트셔의 울프 홀에서 출생
1537년 10월 24일 리치몬드의 햄프턴 코트 궁에서 사망

제인 시모어는 1536년 5월 20일 요크 궁에서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53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로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살아 생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가  묻힌  윈저 성의 성 조지 교회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로써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헨리 8세와 함께 묻힌 아내가 되었다.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모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헨리 8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앤불린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앤 불린에 대한 열정만큼 제인 세이모어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고
앤이 캐서린의 가슴을 찢었듯 앤의 가슴도 제인 세이모어에 의해 상처받았다.

그녀는 첫 아내 캐서린도  두번째 아내 앤도  낳지 못한 헨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지만 출산중에 죽는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왕자가 바로 에드워드다.
10살에 왕이 되지만 16살에 요절한다.



클레페 공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안나 폰 클레페

윌리히-클레페-베르크의 공작 요한 3세와 마리아 폰 겔데른 사이의 딸
1515년 9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출생
1557년 7월 16일 첼시 올드 궁에서 사망

안나는 1540년 1월 6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직후 이미 헨리 8세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헨리 8세는 안나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1540년 7월 9일 이혼하였다.

대신 안나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앤 볼린의 집이었던
히버 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나는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정략결혼으로 헨리 8세의 네번째 아내가 된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하워드

에드먼드 하워드 경과 조이스 컬페퍼 사이의 딸,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
1520년 출생
1542년 2월 13일 그린타워에서 참수형

캐더린 하워드는 19살 때 안나 폰 클레페를 모실 시녀로 궁정에 오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더린의 숙부는 캐더린이 왕의 구애에 응하도록 조장하면서 이를 통해 왕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증대되길 바랬던 것 같다. 마침내 안나와 이혼한 헨리 8세는 1540년 6월 28일 캐더린 하워드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다. 49세의 왕과 18세의 캐서린. 왕은 청춘과 행복을 찾는 듯 했다. 헨리 8세는 그의 젊은 아내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고,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나 또는 '보석같이 아주 귀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이 안 되었을 무렵,  왕비의 결혼 전부터의 문란한 과거와 결혼 후의 불륜행각들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캐더린 왕비의 간통을 왕에게 고발했는데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 문제에 관한 조사를 계속 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캐더린 하워드가 결혼 전에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했고, 결혼 후에도 시종이나 악사등 여러 남자들과 밀통하며 불륜을 저질렀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그녀를 처형하기에 충분했다. 캐더린은 결국 유폐되고 런던탑(그린타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게 된다. 왕에게는 치욕이자 커다란 상처였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파

켄달 경 토마스 파와 모드 그린 사이의 딸
1508년(또는 1512년/1520년) 런던에서 출생
1548년 9월 5일 서들리 성에서 사망

캐더린 파는 헨리 8세와 맺어지기 이전에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8세와 캐더린 파는 1543년 햄프턴 코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이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이었다.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그녀는 토마스 시모어와 네번째 결혼을 했는데, 토마스는 바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었다. 캐더린 파는 곧 아이를 갖게 되었고, 1548년 8월 30일 메리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캐더린은 불행히도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서들리 성에 있는 성 메리 교회에 묻혔다.


헨리 8세의 딸 피의 메리

여섯 명의 아내, 그 가운데 두 아내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영국의 종교까지도 앤과의 사랑을 위해 바꿔 버린 헨리 8세, 공포의 전제 군주였으며 지금도 영국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인물,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카톨릭의 탄압과 화형)였다. 헨리 8세는 6명의 아내로부터 딸 둘과 아들하나를 얻었으나 아들 에드워드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허약한 체질로 6년만에 병으로 죽고 맏딸 ‘메리’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메리’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어머니(캐서린, 에스파냐, 철저한 카톨릭)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어야 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속에 에스파니아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헨리 8세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영국 교회)로 바꾸었고, 그의 딸 메리 여왕은 다시 카톨릭으로 국교를 바꾸었으며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니 성공회의 반발로 나라안은 크게 시끄러워졌고, 드디어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다. 메리 여왕은 반란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신교인 ‘청교도’들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는데 1555년부터 1558년까지 3년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메리 여왕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었다. 수만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죽고 화형장의 불길은 하루도 꺼지지않을 정도로 무서운 탄압이였으므로 메리는 나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녀도 죽었는데 정신병 환자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 떠들썩한 이혼을 강행하며 앤 불린에게 후계자를 열망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아기때 어머니는 간통죄로 처형되었기에 왕위 계승권도 박탈되고 런던탑에 유폐되기도 했던 힘든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남동생인 에드워드, 언니인 메리에 이어 25살에 영국의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 그녀는 영
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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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가 임금의 용안에 흉터자국을 내어 폐비된 사건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일 지라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즉,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입혀서 폐위된 황후의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내려오고 있으니 이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송나라(960-1279)의 4대 황제는 인종황제(仁宗皇帝 : 재위 1022 - 1063)때의 일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인종은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이 활약하던 시대에 통치했던 황제이다. 사극 <포청천>을 보면 알겠지만, 살쾡이 태자의 사건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임금이다.(살쾡이 태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에서 검색하시면, 제가 올려놓은 지식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인종은 송나라가 최고 잘나가던 시기에 재위했던 현군(賢君)이었다.


인종의 첫황후는 곽씨(郭氏)였다. 곽황후는 인종이 태자였을 떄 황태자비가 된 어찌보면 조강지처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곽황후는 원래가 나서기를 좋아하여 항상 조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기를 좋아하였다. 인종이 생모였던 신비 이씨(宸妃 李氏 : 진종의 후궁이었다)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할 때, 적모(嫡母)였던 장헌황후 유씨(章獻皇后 劉氏)의 섭정기에 총애를 받았던 재상들을 좌천시켰다. 여기에는 여이간(呂夷簡/978 - 1043)이라는 재상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여이간은 장헌황후에게 인종의 생모가 죽었을 당시 후장(厚葬)할 것을 간한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천된 이유는 곽황후(郭皇后)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이간은 파면된 이유를 알아보고자 환관 염문응(閻文應)을 사주해서 어떻게 된 내막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곽황후가 인종에게 자신을 좌천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염문응과 함꼐 곽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우선 여이간은 자신이 장의황후의 장례를 위해 애쓴 사실을 인종에게 부각시켰는데, 그 공로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이간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자 염문응과 더욱 밀착해서 곽황후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했다.


바로 이 때 인종의 처첩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는데, 염문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당시 인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미인(楊美人)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미인(尙美人)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곽황후에 대처할 때는 단짝이 되었다. 따라서 곽황후와 두 미인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게다가 곽황후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툭하면 두 미인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곽황후가 인종 앞에서 상미인을 나무랐는데, 상미인은 인종만 믿고서 곽황후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 곽황후는 그만 분통이 터져서 상미인의 빰을 때렸다. 상미인은 감히 맞서지를 못하고 울며불며 인종의 뒤에 몸을 숨겼다. 곽황후는 쫓아가서 손을 날렸는데, 실수로 인종의 목을 때려서 손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크게 났다. 인종이 크게 화를 내자 곽황후도 속이 얼어붙었다. 곽황후가 얼른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인종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관 염문응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포착하고, 그는 불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곽황후의 고약한 점을 인종에게 고자질해서 마침내 인종으로 하여금 곽황후를 폐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종은 정이 많고 유약한 사람인지라 황후를 폐할 경우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염문응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어찌할 것이냐"

염문응은 당나라때 고종이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웠던 고사를 들먹이며 그 때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말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황후 폐립은 본래 폐하의 가정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시겠다면 그 또한 영명하신 조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는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재상 여이간만을 불러서 그가 대표로 확인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이 이의가 없다면 다른 대신들도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인종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즉시 여이간을 궁중으로 불러들었다. 여이간은 이미 염문응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의 목에 난 상처를 보자 즉시 마음이 아픈 척 했다. 그리고 옛사례를 들어가면서 곽황후를 폐하라고 권유했으며, 이 일을 반대하는 대신이 있다면, 군신간의 대의를 모르는 자이므로 관직을 파면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인종은 황후폐립을 공론에 붙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인종과 여이간의 뜻에 영합하였으나, 어사대 간관(諫官)이었던 범중엄(范仲淹/990 - 1053)은 그의 직책상 경망하게 황후를 폐할 것이 아니라고 인종에게 극간하였다. 그러나 여이간은 범중엄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고, 범중엄에 동조하는 간관들을 범중엄의 도당으로 낙인찍어 모조리 탄압하고 좌천시켜버리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여이간의 농간에 의해 인종은 어쨌든 곽황후를 폐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곽황후가 임금의 용체에 상처를 입혀서가 아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 때가 명도 2년(1033년)의 일이다.


곽황후를 폐한 후 염문응은 더욱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궁의 비빈들도 그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나 상미인과 양미인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했다. 두 미인은 원래 경박한 자들이어서 곽황후를 폐한 후에는 인종에게 밀착하여 매일같이 인종의 시중을 들었다. 결국 인종은 병상에 드러눕게 되는데(쉽게 말하면,,,매일 두 미인과 방사를 벌린 셈이지요)궁정 안팎에서는 두 미인이 너무 방탕해서 인종을 해쳤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염문응은 황제로부터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을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여러차례 인종에게 건강에 유의할 것과 두 미인을 멀리할 것을 권유했다. 인종은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승낙했다. 염문응은 인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미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두 미인을 강제로 수레에 실어서 궁전 밖으로 내쳤다. 두 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으나 염문응이 인종의 뜻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튿날 염문응은 인종에게 두 미인을 내쫒은 일을 보고했다. 인종은 깜짝 놀랐서 후회했으나, 이미 쫓아낸 사람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어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종은 건강이 호전되자 염문응의 충성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고, 조정 안팎에서도 염문응을 나라에 충성하는 환관이라고 했다. 두 미인을 축출한 후 인종은 다시 곽황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곽황후를 다시 황후로 복위시킬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염문응은 그 소문을 듣고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씨가 복귀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곽황후를 죽이려 했다. 마침 궁중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머물던 곽황후가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렸는데, 염문응은 의사를 협박하여 병에 맞지 않는 처방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곽씨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곽황후를 죽인 염문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권력을 등에 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사람을 해쳐서 인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어사대 간관의 탄핵을 받아 귀양지인 상주(相州)에서 죽었다.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1. 곽황후가 그렇게 죽은 뒤 인종은 후궁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들을 반성하고, 명문가의 조신한 처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개국공신 조빈(曺彬)의 손녀였던 광헌자성황후 조씨(光獻慈聖皇后 曺氏)였다. 역시나 그녀는 인종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항상 예의와 법도를 잃지 않았다.

2. 여이간이 범중엄을 축출한 이후 벌여져던 10년간의 당쟁을 경력의 당의<慶曆黨議>라고 한다. 1033년 범중엄을 좌천시킴으로써 여이간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이 보였으나 1034년 다시 범중엄은 컴백하여 여전히 여이간을 비평하다가 1036년 다시 여이간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때 윤수(尹洙), 구양수(歐陽修) 등도 같이 축출되었다. 조정의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은 범중엄의 편에 서고, 여이간의 편에는 왕공진(王拱辰), 하병(夏倂)등이 있었다. 여이간이 10년간의 재상임기를 마치고 병으로 은퇴하자, 조정은 범중엄 파에게 장악되어 갔다. 이 때 구양수가 범중엄의 당을 진붕(眞朋 : 군자의 당), 여이간의 당을 위붕(僞朋 : 소인의 당)이라고 정의하였고, 황제는 위붕을 배척하고 진붕의 당과 같이 정치해야한다고 <붕당론>에서 설파하였다. 이것이 송대 붕당정치의 시작이고, 이것이 후대에 신법-구법당의 대립 더 멀리는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계속해서 간간히 중국의 역사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제를 중심으로 올려보겠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참고 <宋史, 후비열전> http://blog.naver.com/ilove_sungho(본인의 블로그)

=========> 이 사람은 이 글을 퍼갈 때, 반드시 출처를 밝히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네이버에서 탈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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