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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문명

[ 世界 四大 文明 , cradle of civilization ]

[네이버 지식백과]세계 4대 문명 [世界 四大 文明, cradle of civilization] (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발달시킨 황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 등 4개의 문명을 지칭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황하문명을 말한다. 4대 문명의 발생지들은 모두 큰 강을 끼고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기후가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지역들이다. 특히 황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나일강 등 이들 지역이 4대 강을 끼고 있어 기후ㆍ교통ㆍ토지 등 고대 농업 발달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문명 발생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인더스문명은 BC 3000년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바탕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대표적 유적은 당시의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인데,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를 받았던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따서 고고학적으로는 하라파 문화라고 부른다.





아랍 - 페르시아 제국 건설. 대략 오늘날의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 페르시아 문명이라 함은 이란과 그 주민의 역사를 지칭한다. 


BC 6500년경 농경, 목축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 유역에서 발달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바빌로니아ㆍ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ㆍ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중국 - 항우, 유방의 천하 결전 끝에 유방의 승리로 한나라가 건국됨. 


황하문명: 황허[黃河] 유역에서 발생한 중국의 고대 문명으로 양쯔강[揚子江] 문명과 함께 중국문명(中國文明)을 대표한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문명을 형성한 황하문명은 중국 황하강 중ㆍ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이다. BC 5000년~4000년경부터 신석기 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좁쌀ㆍ기장 등이 재배되고 개ㆍ돼지 등도 사육되었다. 황하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양사오 문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룽산 문화로 대별된다.






북아프리카 - 고대 이집트 건설.


BC 3000년경의 이집트문명은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위치가 폐쇄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비하여 정치ㆍ문화적 색채가 단조롭다. 사막과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 없이 2000년 동안 고유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또한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 해마다 겪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 나일강변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홍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범람 때문에 태양력, 기하학, 건축술,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남유럽 - 신생국 로마의 성장과 그리스의 몰락. 







시베리아 - 수렵 채집

북아메리카 - 수렵 채집

북서유럽(영국,독일,노르웨이, 덴마크) - 수렵 채집

동유럽 - 수렵 채집

아프리카(누비아, 북아프리카, 이집트 제외) - 수렵 채집

동남아시아 - 수렵 채집

일본 - 수렵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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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줄넘기 (19세기 말)






브로드웨이 (1900년)







자전거 타고 나들이 가는 가족 (1900년)






여성 전용 지하철칸 (1903년)








신문팔이 소년들 (1910년대)







 1차 대전에 참전하는 미군 (1916년)








멀리서 뉴욕을 바라보는 이민자 가족 (1925년)








자동차에서 내리는 부유한 여인 (1928년)








대공황 시기, 무료 배식소에 줄을 선 실업자들 (1930년)










맨해튼 (1931년)









맨해튼 야경 (1937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1939년)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안내원들 (1942년)







 
일본 패망에 환호하는 시민들 (1945년)








맥아더의 귀국을 환호하는 시민들 (1951년)









락앤롤쇼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있는 청소년들 (1957년)









눈덮힌 센트럴파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1958년)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세련된 남녀 (1963년)









시위 도중에 연행되는 흑인 여성 (1964년)








비틀즈가 머무는 호텔에 난입하려는 소녀들 (1965년)









히피커플 (1967년)









베트남전 반대를 외치는 대학생들 (1969년)









건설 중인 국제무역센터 (1970년)









클럽에서 춤추는 여자들 (1977년)










 

브레이크 댄스 (1984년)







공격당한 세계무역센터 (2001년)










오늘날의 센트럴 파크 - 우와.. 좋다..ㅠ






불과 60여년 전에도 대부분의 집이 초가집이었던 한국과 비교해서..
그들은 100년 전에도 너무도 현대화되어 있었다..

처음에 한국 왔을 때 아마 문화 충격 받았을 것 같다..

우리야.. 우리 역사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그들 눈에는
한국인들의 생활이 너무도 비위생적, 더럽고 미개인/야만인 같았을 것 같다.


암튼 서양의 근대화 시절 모습은 봐도 봐도 놀라울 뿐...
또한 100년 만에 따라잡은(?) 우리나라도 놀라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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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고무신처럼 수놓인 꽃신들... 참 이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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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들의 사연을 아십니까?





EBS 지식채널e,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


EBS 지식채널e 영상에서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짧은 영상을 본 후 나는 너무 놀라서 5분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냥 묶어서 성장이 안되어서 작은 정도인줄만 알고 있던 나에게 뼈가 부러져서 휠 정도로 꺾인 발은 충격이었고, 성인 여성의 발이 10cm도 안되게 만들었다는 진실은 어떤 공포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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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쏙 들어간 부분을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_-;;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치로만 퍼지던 풍습이 나중에는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는데.. 무서운 것은 귀족층 여자들은 그나마 하루종일 하녀들이 일을 해주니 다행이지만 서민층 여자들은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 발을 해가지고는 어딜 갈 수가 없었겠지..
일도 할 수가 없었겠지..

게다가 마을마다 전족 대회가 열려서 누구 발이 더 작은가 점점 더 심한 경쟁을 하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발이 아주 크거나 아주 흉측하게 생긴 것으로 소문이 나서 시집도 못가게 되니.. 딸을 사랑할수록 그 어미는 더욱 심한 전족을 시켰다고 한다.

정말.. 무섭다.. 무서워.....ㅠㅠ



중국언론에 실린 중국인들까지도 충격에 몰아넣은 전족 사진들







_M#]




세상에.. 세상에.. ㅜㅜ ㅠㅠ 무서워라..
어쩌면 저런 짓을 했을까...

단순한 성적 유희를 위해서 모든 여자의 뼈를 부러뜨리다니..
저게 1000년이나 유행하다니.....

당대 유명 시인들이 저걸 낭만이랍시고 여성의 미를 예찬하는 시를 수백 수를 남겼더구나.

망할 놈들아.
작은 발이 그렇게 귀여우면 니들 발이나 자르든가.

왜? 니들은 남자니까 큰 게 좋아?
그러면 니들은 늘리면 되겠네!!

다리뼈가 부러지든 말든 다리 늘려서 철심 박지 그랬니?
이 자식들아.!!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풍습인 전족이 저렇게 유행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으며, 여성을 오직 성적인 도구, 유희의 대상으로서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과거 유럽에서도 다른 형태의 전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과도한 보정 코르셋 때문에 철사에 숨이 막혀 죽거나 갈비뼈가 부러져 죽은 여성들도 있었고, 프랑스 여성들은 연약해 보이기 위해서 겨울에도 속살이 비치는 얇은 옷에 물까지 끼얹고 다니다가 폐렴걸려 죽었다는데..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핍박받지 않은 역사가 없구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왔을까..ㅜㅜㅠㅠ


지식채널e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러한 악습이 현대의 여성에게도 이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뚱뚱한 여성, 혹은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비하와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많은 TV프로들, 아름다움만이 여성의 미덕인 것으로 주입시키는 이 시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는 이 시대가 수많은 거식증 환자들, 다이어트 중독자들, 성형중독자들을 만든 게 아닌가.

여성의 몸은 사랑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담고 있는 그릇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마음의 눈으로 보려나..  그렇게 되면 목소리 좋은 사람만 선택되려나. 훗.)


티비프로도, 남자분들도, 여자분들도.... 상대방을, 자신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말길 바라며,  
21세기형 전족이 사라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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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문서이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대헌장이 불과 6개월 만에 1천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미국인 10명 중 9명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5분 기다리는 것을 죽을 죄라고 믿는다. 그런데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1천만 명의(!) 사람들이 읽기도 어려운 찢겨지고 얼룩진 양피지 문서인 대헌장을 아주 잠시 쳐다보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니, 도무지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유명한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대헌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혹자는 대헌장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대헌장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악명 높은 중세의 관행이었던 결투재판을 아는가? 대헌장에서 그 결투재판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면 신성재판은? 이것 또한 합법적이었다(신성재판에서는 피고를 끓는 타르통에 처넣어 살아 남으면 무죄가 입증되었다).

배심재판은 어땠는가? 사람들은 대헌장에 배심재판이 규정되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15년의 영국에서 배심재판은 없었다. 용의자들은 증인에게 반대심문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고, 전문증거를 배제할 권리도, 항변할 수 있는 권리도, 또 법정으로 가는 길과 법정에서 얼굴을 가릴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배심원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있었는가? 모든 사람이 항유해야만 하는 이 권리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대헌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유민들만이 대헌장에 적힌 새로운 권리들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15년에 영국인 가운데 자유민은 아주 소수로, 인구의 5/6가 농노였다.

그렇다면 대헌장으로 이익을 본 것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아닌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대헌장은 귀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에게서 얻어낸 새로운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영국인은 대헌장을 통해 단 하나의 권리도 더 얻어낸 게 없었다.

만약 대헌장이 군주정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맥 풀리게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215년에 보통의 영국인은 군주정에 의해 억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국인을 억압했던 것은 군주가 아니라 귀족 영주들이었다.

여하튼 대헌장이 군주정을 견제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국에 진짜 전제 군주가 생긴 것은 대헌장 이후의 일이었다.

이상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헌장을 그렇게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헌장에 대해 밝히기로 마음 먹은 명석한 영국인 에드워드 코크 경 때문이다. 그는 먼지 낀 낡은 도서관 서가에서 마그나 카르타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영국인에게 군주가 함부로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다였다. 그날 이후로 영국인은 그들의 모든 권리와 자유가 바로 그 문서,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그 마그나 카르타라는 문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셰익스피어는 존 왕을 다룬 희곡에서 이 문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 원주).

마그나 카르타가 발견된 이후로는, 영국의 국왕이 인도에 침을 뱉기만 해도 누군가가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그것을 지키시오"라고 절규하곤 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으로서 맛볼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건 그렇고,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에 왕실의 옥새를 찍게 했다. 그러니 존 왕이 서명하는 모습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는 잘못되었다. 왕은 서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서명할 줄도 모르는 왕이 많았따 - 원주).

존이 사악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그냥 사악했는가 아니면 진짜로 사악했는가 하는 것이다. 노르망디를 잃고 패배한 전쟁에서 그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병사들은 전장에 버려 두고 도망쳤으며, 사촌 아서를 살해했고, 아서의 누이를 40년 동안이나 감옥의 독방에 감금했다. 또한 신하의 부인을 겁탈했으며, 귀족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인질들을 잡아두었다. 인질들은 나중에 몸값을 받고 풀어 주거나 죽였다. 단지 재미로 옛 친구의 부인과 아이를 가두어서 굶겨 죽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는 영국 역사살 가장 유능한 행정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귀족들이 그에게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토지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해묵은 투쟁이었다. 그는 토지세를 올리기를 원했고, 귀족들은 반대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귀족들이 존 왕에 대항하여 뭉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군대'라고 불렀다. 존의 군대는 그냥 존의 군대였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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