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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은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문서이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대헌장이 불과 6개월 만에 1천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미국인 10명 중 9명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5분 기다리는 것을 죽을 죄라고 믿는다. 그런데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1천만 명의(!) 사람들이 읽기도 어려운 찢겨지고 얼룩진 양피지 문서인 대헌장을 아주 잠시 쳐다보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니, 도무지 놀라울 따름이다.

다른 유명한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대헌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다. 혹자는 대헌장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혹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대헌장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악명 높은 중세의 관행이었던 결투재판을 아는가? 대헌장에서 그 결투재판은 합법적이었다. 그러면 신성재판은? 이것 또한 합법적이었다(신성재판에서는 피고를 끓는 타르통에 처넣어 살아 남으면 무죄가 입증되었다).

배심재판은 어땠는가? 사람들은 대헌장에 배심재판이 규정되어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15년의 영국에서 배심재판은 없었다. 용의자들은 증인에게 반대심문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고, 전문증거를 배제할 권리도, 항변할 수 있는 권리도, 또 법정으로 가는 길과 법정에서 얼굴을 가릴 권리마저도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등한 신분의 배심원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있었는가? 모든 사람이 항유해야만 하는 이 권리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대헌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중요한 권리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유민들만이 대헌장에 적힌 새로운 권리들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215년에 영국인 가운데 자유민은 아주 소수로, 인구의 5/6가 농노였다.

그렇다면 대헌장으로 이익을 본 것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그들은 다름아닌 영국의 귀족들이었다. 대헌장은 귀족들이 자신들을 위해 왕에게서 얻어낸 새로운 권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다수의 영국인은 대헌장을 통해 단 하나의 권리도 더 얻어낸 게 없었다.

만약 대헌장이 군주정의 약화를 초래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맥 풀리게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215년에 보통의 영국인은 군주정에 의해 억압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영국인을 억압했던 것은 군주가 아니라 귀족 영주들이었다.

여하튼 대헌장이 군주정을 견제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국에 진짜 전제 군주가 생긴 것은 대헌장 이후의 일이었다.

이상의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대헌장을 그렇게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백 년 전 대헌장에 대해 밝히기로 마음 먹은 명석한 영국인 에드워드 코크 경 때문이다. 그는 먼지 낀 낡은 도서관 서가에서 마그나 카르타라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영국인에게 군주가 함부로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다였다. 그날 이후로 영국인은 그들의 모든 권리와 자유가 바로 그 문서,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는 그 마그나 카르타라는 문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다(셰익스피어는 존 왕을 다룬 희곡에서 이 문서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 원주).

마그나 카르타가 발견된 이후로는, 영국의 국왕이 인도에 침을 뱉기만 해도 누군가가 저잣거리를 누비면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그것을 지키시오"라고 절규하곤 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국왕으로서 맛볼 수 있는 온갖 즐거움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건 그렇고,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에 왕실의 옥새를 찍게 했다. 그러니 존 왕이 서명하는 모습이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는 잘못되었다. 왕은 서명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서명할 줄도 모르는 왕이 많았따 - 원주).

존이 사악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그냥 사악했는가 아니면 진짜로 사악했는가 하는 것이다. 노르망디를 잃고 패배한 전쟁에서 그는 자기 한 몸의 안위를 위해 병사들은 전장에 버려 두고 도망쳤으며, 사촌 아서를 살해했고, 아서의 누이를 40년 동안이나 감옥의 독방에 감금했다. 또한 신하의 부인을 겁탈했으며, 귀족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인질들을 잡아두었다. 인질들은 나중에 몸값을 받고 풀어 주거나 죽였다. 단지 재미로 옛 친구의 부인과 아이를 가두어서 굶겨 죽이기도 했다.

반면에 그는 영국 역사살 가장 유능한 행정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귀족들이 그에게 가장 불만이었던 것은 토지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해묵은 투쟁이었다. 그는 토지세를 올리기를 원했고, 귀족들은 반대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귀족들이 존 왕에 대항하여 뭉쳤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신의 군대'라고 불렀다. 존의 군대는 그냥 존의 군대였다. 그것은 시작부터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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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절대 왕정의 전성기를 갖게 한, 여왕 엘리자베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음모와 사랑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튜더의 파란만장한 삶과 열정을 비롯해 국가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엘리자베스에 관한 기본적인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


엘리자베스의 삶을 천천히 살펴 보면,,,


엘리자베스 1세

2000년에 뉴욕타임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 났던 지도자를 선정하였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꼽힌 인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였다. 16세기까지만 하여도 영국은 인근의 스페인과 프랑스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였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영국이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은 가장 위대한 여왕이었다. 20세기 초반 까지 지속되는 대영제국의 영광은 모두 이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마련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공주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그러나 개인사적으로는 가장 불운한 여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불행은 그녀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들을 원했던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한 첫번째 부인 대신에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한다. 그리하여 천년이상 이어온 구교 로마 카톨릭과 즉시 인연을 끊고, 영국을 신교 국가로 만든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사랑하는 여인 앤 볼레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억지로 이혼하고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그 여파로 로마의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작 앤 볼레인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즉 엘리자베스 공주 뿐이었다.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 볼레인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순간, 그대로 식어 버린다. 그는 앤 볼레인을 간통과 반역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도끼로 목을 내려쳐 죽여 버린다.

그 와중에 그의 3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어머니 앤 볼레인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졸지에 서출이 되어 버린다. 엘리자베스는 햇필드 하우스로 추방당해 외롭게 자라고, 이러한 시기, 세번째 왕비를 맞아 들인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얻어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졌다. 이 때부터 엘리자베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자라야 했다. 배다른 언니인 메리 공주와 또 다른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파란만장한 공주 시절을 딪고
 
잉글랜드의 여왕이 되기까지.

엘리자베스는 사실 국왕의 지위와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존재였다. 남동생 에드워드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는 일생을 공주로서만 살아갈 운명인 것처럼 보여졌다. 그러나 헨리 8세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만다. 이때까지도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는 멀어 보였다. 


헨리 8세의 첫째 부인 캐서린 소생의 메리가 있었고 그 외에도 할아버지 헨리 7세의 적손으로 인정된 많은 왕권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같은 서출로 공표되었던 언니 메리가 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경도되어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이 다짐으로 엘리자베스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지만 이후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에 연루되어 런던탑에 유폐된다. 그러나 반역 가담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풀려난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한다.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 메리 여왕에게는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암에 걸려 죽고 만다. 마침내 온갖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 온 듯한 공주,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숙적 메리 스튜어트


메리 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많은 국민들은 타 국가 왕족과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영국 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여왕 즉위를 환영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왕위 계승을 못마땅해 하는 세력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구교 귀족 세력들로서 엘리자베스보다는 헨리 7세의 적손이면서 프랑스의 왕비였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 또한 공식적으로 아무런 의사표시 없이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그려넣었다. 이것은 즉 엘리자베스는 명분상으로는 자격없는 왕이며 사실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혈통적으로 고귀하고 당당했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서출이며 자격없는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결코 메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후 두 여인의 일생을 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 스튜어트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끝이 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있어 메리 스튜어트는 혈통상으로도, 여성으로서도 일생을 걸고 질투했던 대상이었음에 틀림이 없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 신교를 회복시키고, 메리 시절의 유혈 정치를 끝냈다.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국가와 결혼한 여인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하지 않았다. 국가 안정을 위해 속히 결혼하여 아이를 얻어야 한다는 초기 신하들의 권유도 번번히 뿌리쳤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언하였지만 불같은 사랑속에서 세 번 결혼하고 왕자를 낳은 메리 스튜어트를 진정으로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명의 애인을 두기는 하였으나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고, 혹여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냈다.

영화에서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부터의 애인이었던 그는, 훗날 엘리자베스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고 노포크공의 반역 음모에 연루된다. 



아래에 있는 사진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얼마 후, 로버트 더들리 백작과 춤을 추기 전, 인사하는 모습이다. 굉장히 인상깊고 멋졌던 장면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분분하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었다던가, 아버지로 인해 남자를 불신하게 되었다던가, 어린 시절 계모 제인 시모어의 첫 번째 남편으로부터 성적희롱을 당해서라던가 등의 말들이 많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th)’라는 칭호를 당대에 듣기도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더불어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시켰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엘리자베스1세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한 세익스피어도 이 시대 사람이다.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내 국가를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인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전체가 함께 성장하였다.

파란만장하고 불운하기도 한 삶을 살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막강한 여왕이었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간 여왕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그녀의 시대는 황금기로 불린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는 영화의 마지막, 그녀의 유명한 말이 인상깊다.


마지막 대관식에서 허옇게 분칠하고 빨갛게 볼터치하고 버진퀸임을 말하는 엘리자베스..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준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
http://www.themakeupgallery.info/period/c16/elizabeth/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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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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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여섯의 아내

영국 역사에 가장 이야깃거리를 많이 남긴 인물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긴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왕도 없었거니와 영국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었으며, 6명의 아내중에서 2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영국 역사에 숱한 뒷이야기를 남긴 헨리 8세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나라에 숙종과 비슷한 임금)


헨리 8세

1509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18살의 청년으로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이 여섯 왕비 모두에게 성병 옮겨준(자식들에게까지 태내 감염됐음) 아주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그래서 왕자 하나가 태내서부터 성병옮아 태어나 10살도 안돼 어린 나이에 저 세상갔고 또 한 왕자는 성병때문에 머리카락이랑 눈썹이  빠진 모습으로 살기도.........했다고 한다. -_-;

그의 첫 아내는 이미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였던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 공주였다. 이 결혼은 그가 원해서 된 게  아니라 순전해 정치적 이유(에스파냐의 덕을 보기위한) 때문에 신하들의 권유로 결혼하여 ‘메리’라는  딸을 낳았는데  ‘메리’는 나중에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을 사형에 처해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이 된다.

어쨌던 사랑없는 결혼은 오래 못가고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시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래서 헨리 8세는 앤 볼레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캐서린과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이혼신청은 로마 교황의 권한아래 있었고 로마 교황은 에스파냐의 압력 때문에 이혼을 거절했다.

독실한 카토릭 신자였던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이혼의 사유-아들을 못 낳는다)과 엔 볼레인과의 결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로마 카톨릭과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니 나중에 이 두 종교로인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나라는 갑자기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앤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으나 앤 볼레인을 통해 딸하나와 죽어서 태어난 아들 까닭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못다했다는 죄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비극의 왕비 ‘앤 볼레인’의 딸, 이가 곧 엘리자베스 공주로 뒷날 세계 제1의 바다의 왕자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가  된다! 

앤 왕비를 사형시키고 며칠후 헨리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머’와 결혼, 드디어 왕자를 낳았으나 며칠만에 왕자가 죽고 얼마안가서 왕비 ‘제인 시머’도 죽는다. 그리고 헨리 8세는도이칠란트와의 친선을 위해 무뚝뚝한 도이치 여자인 앤 공주를 왕비로 맞았으나 금방 이혼을 해버리고 다섯 번째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이 결혼도 왕비 캐서린 하워즈의 외도 때문에 앤 볼레인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렸고 여섯 번째로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아라곤 왕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카탈리나(캐더린)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5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라 사이의 막내딸
1485년 12월 15일 마드리드에서 출생
1536년 1월 7일 헌팅던 킴볼튼 성에서 사망
피터버러 성당에 묻힘

원래 카탈리나(캐더린)는 헨리 8세의 형인 아더 왕세자와 결혼했으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더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카탈리나는 시동생인 헨리 왕자와 재혼하였다. 헨리 왕자는 이후 즉위하여 헨리 8세라 불렸고, 카탈리나와 헨리 8세는 6명 정도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중 오로지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이 아이가 훗날 '피의 메리'라 불린 메리 1세이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에 목말라 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정부였던 메리 볼린의 여동생이자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인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42세로 나이가 많았던 카탈리나 왕비가 건강한 후계자를 낳아줄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헨리 8세는 왕비와 이혼하고 앤 볼린과 결혼하려 했고, 교황이 이를 인정치 않자 카톨릭과 결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533년 헨리 8세는 카탈리나 왕비와 이혼하였다.

채 다섯달도 안 되는 결혼생활을 한 첫남편보다는 헨리 8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다고 한다.
헨리 8세에게 이혼당했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비 앤 볼린(앤 볼레인)

윌트셔 백작 1세 토마스 볼린과 엘리자베스 하워드 사이의 딸
1501년 또는 1507년 노퍽 주 블리클링 홀에서 출생
1536년 5월 19일 타워 그린에서 참수형으로 사망

앤 볼린은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헨리 8세가 원하는 후계자는 낳아주지 못했다. 세번째 아이가 아들이긴 했으나 그  만 사산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간통죄로 몰려 유폐된 후 타워 그린에서 참수되었다. 앤 볼린의 첫 아이는 훗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으니 이가 곧 엘리자베스 1세이다.

헨리 8세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그녀의 차가운 도도함에 반해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길 원했고 반대하는 교황청과 관계를 맺으면서 영국 성공회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

앤 볼레인은 헨리 8세가 간절히 원하는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고 딸을 출산하게 돈다.
공주의 출생은  뜨겁던 사랑이  잔혹하게 변하게 만들었다. 유산, 아들의 사산을 거치면서 헨리의 사랑은 식고  앤과 이혼이 어렵자 앤에게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런던타원에 갇워 버리고는 처행을 시킨다.



잉글랜드 왕비 제인 시모어

존 시모어 경과 마저리 웬트워드 사이의 딸
1505년 윌트셔의 울프 홀에서 출생
1537년 10월 24일 리치몬드의 햄프턴 코트 궁에서 사망

제인 시모어는 1536년 5월 20일 요크 궁에서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1537년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로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살아 생전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가  묻힌  윈저 성의 성 조지 교회에 자신의  묘지를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로써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유일하게 헨리 8세와 함께 묻힌 아내가 되었다.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모어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헨리 8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고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앤불린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처형한다. 앤 불린에 대한 열정만큼 제인 세이모어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고
앤이 캐서린의 가슴을 찢었듯 앤의 가슴도 제인 세이모어에 의해 상처받았다.

그녀는 첫 아내 캐서린도  두번째 아내 앤도  낳지 못한 헨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지만 출산중에 죽는다.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왕자가 바로 에드워드다.
10살에 왕이 되지만 16살에 요절한다.



클레페 공녀이자 잉글랜드 왕비 안나 폰 클레페

윌리히-클레페-베르크의 공작 요한 3세와 마리아 폰 겔데른 사이의 딸
1515년 9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출생
1557년 7월 16일 첼시 올드 궁에서 사망

안나는 1540년 1월 6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 직후 이미 헨리 8세는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헨리 8세는 안나가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1540년 7월 9일 이혼하였다.

대신 안나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앤 볼린의 집이었던
히버 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나는 사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정략결혼으로 헨리 8세의 네번째 아내가 된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금방 싫증을 내게 된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하워드

에드먼드 하워드 경과 조이스 컬페퍼 사이의 딸,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
1520년 출생
1542년 2월 13일 그린타워에서 참수형

캐더린 하워드는 19살 때 안나 폰 클레페를 모실 시녀로 궁정에 오게 되었다. 이후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더린의 숙부는 캐더린이 왕의 구애에 응하도록 조장하면서 이를 통해 왕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이 증대되길 바랬던 것 같다. 마침내 안나와 이혼한 헨리 8세는 1540년 6월 28일 캐더린 하워드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서른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났다. 49세의 왕과 18세의 캐서린. 왕은 청춘과 행복을 찾는 듯 했다. 헨리 8세는 그의 젊은 아내에게 아낌없이 선물을 주었고, 그녀를 '가시 없는 장미'나 또는 '보석같이 아주 귀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결혼한 지 1년이 안 되었을 무렵,  왕비의 결혼 전부터의 문란한 과거와 결혼 후의 불륜행각들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크랜머 대주교는 캐더린 왕비의 간통을 왕에게 고발했는데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이윽고 이 문제에 관한 조사를 계속 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캐더린 하워드가 결혼 전에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했고, 결혼 후에도 시종이나 악사등 여러 남자들과 밀통하며 불륜을 저질렀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충분히 수집되었다. 이것들은 그녀를 처형하기에 충분했다. 캐더린은 결국 유폐되고 런던탑(그린타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운명을 맞게 된다. 왕에게는 치욕이자 커다란 상처였다. 






잉글랜드 왕비 캐더린 파

켄달 경 토마스 파와 모드 그린 사이의 딸
1508년(또는 1512년/1520년) 런던에서 출생
1548년 9월 5일 서들리 성에서 사망

캐더린 파는 헨리 8세와 맺어지기 이전에 두 번의 결혼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헨리 8세와 캐더린 파는 1543년 햄프턴 코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이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이었다.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그녀는 토마스 시모어와 네번째 결혼을 했는데, 토마스는 바로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남동생이었다. 캐더린 파는 곧 아이를 갖게 되었고, 1548년 8월 30일 메리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러나 캐더린은 불행히도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9월 5일 세상을 떠났으며 서들리 성에 있는 성 메리 교회에 묻혔다.


헨리 8세의 딸 피의 메리

여섯 명의 아내, 그 가운데 두 아내의 목을 자른
헨리 8세, 영국의 종교까지도 앤과의 사랑을 위해 바꿔 버린 헨리 8세, 공포의 전제 군주였으며 지금도 영국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인물,

그의 통치는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피의 통치(카톨릭의 탄압과 화형)였다. 헨리 8세는 6명의 아내로부터 딸 둘과 아들하나를 얻었으나 아들 에드워드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허약한 체질로 6년만에 병으로 죽고 맏딸 ‘메리’에게로 왕관이 돌아갔다.
메리’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어머니(캐서린, 에스파냐, 철저한 카톨릭)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어야 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무관심속에 에스파니아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다.

헨리 8세는 국교를 카톨릭에서 성공회(영국 교회)로 바꾸었고, 그의 딸 메리 여왕은 다시 카톨릭으로 국교를 바꾸었으며 스페인 황태자와 결혼하니 성공회의 반발로 나라안은 크게 시끄러워졌고, 드디어 반란과 폭동이 일어났다. 메리 여왕은 반란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사형에 처했다.

당시 신교인 ‘청교도’들의 세력도 무시 못할 정도로 왕성했었는데 1555년부터 1558년까지 3년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메리 여왕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었다. 수만명의 신교도가 화형장에서 죽고 화형장의 불길은 하루도 꺼지지않을 정도로 무서운 탄압이였으므로 메리는 나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악명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그녀도 죽었는데 정신병 환자가 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 떠들썩한 이혼을 강행하며 앤 불린에게 후계자를 열망했던
헨리 8세의 실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아기때 어머니는 간통죄로 처형되었기에 왕위 계승권도 박탈되고 런던탑에 유폐되기도 했던 힘든 소녀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남동생인 에드워드, 언니인 메리에 이어 25살에 영국의 여왕이 되는 엘리자베스, 그녀는 영
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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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공길은 싫은 것이 분명한데도 억지로 양반에게 몸을 팔러 가고, 심지어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은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장생을 빼고는 아무도 공길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너무 한 것 아닌가요?

A. 남사당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랑집단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상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만 공길에게 몸을 팔 것을 강요한 사람은 공길이 속해 있는 남사당 패의 꼭두쇠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꼭두쇠는 무리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패거리 식구의 처우에 관련된 모든 처결을 할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패거리 중에 섞여 있기 위해서는 누구도 꼭두쇠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공길이 몸을 팔 경우 양반에게서 많은 노자돈과 음식이 나올 것을 장생을 제외한 패거리 전원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 사실을 다 아는 공길로서는, 싫어도 양반에게 몸을 팔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길이 양반에게 몸을 팔아 그 댓가로 패거리를 먹여 살린 것이 자주 있는 일이라는 것은, 공길이 팔아 먹고 사는 것 이제 좀 그만두라는 장생의 일갈이나 양반에게 팔던 몸뚱이 이젠 왕에게 팔겠다는 거냐는 장생의 빈정거림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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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길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장생을 구타하는 꼭두쇠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당황한 둘은 무리에서 도망쳐 한양으로 가는데요. 남사당패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조직이었을까요?

A. 그렇지 않습니다. 패거리에서 도망치는 것은 남사당으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남사당의 패거리가 된 자는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 규칙이란 무리 중에서 있었던 일을 다른 곳에 말하고 다니지 말 것, 놀이 중에 얻은 수입을 혼자 빼돌리지 말 것 등인데 그 중 가장 엄하게 다스려진 죄가 패거리에서 무단 이탈하여 함부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남사당 은어로 '망도'라 하며, 잡힐 경우 죽을 수도 있는 중죄에 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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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에는 공길처럼 여자 역할을 전문으로 맡는 배우가 있었나요?

A. 있었습니다.
남사당에서는 처음 패거리에 들어온 사람(대부분 어린이들입니다)을 삐리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패거리의 가장 말단에 배치되어 잔심부름 및 잡일을 맡아 하였고 자신의 전문 연희가 정해지는 가열로 승급하기 전까지는 치마 저고리에 댕기를 들이고 여장을 하였습니다.

이들 삐리들은 행색만 여자였던 것이 아니라 패거리 중에서도 실제로 여자 노릇을 하였는데,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들과 한 명씩 짝을 지어 남색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이때 가열 이상이 대부분 남자 역할을 맡았으므로 숫동모라 하고, 여자 역할을 맡는 삐리들은 암동모라고 불렀습니다) 삐리의 수는 언제나 가열 이상 성인 패거리의 수보다 모자랐으므로, 패거리 전원이 짝을 지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남사당 내에서 남색에 관한 규율은 매우 엄격하여, 무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라 할지라도 한 사람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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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공길이나 장생 같은 광대들의 신분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A.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계급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상 광대는 백정, 화척, 기생, 무당 등과 같이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사당패는 광대 중에서도 가장 천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남사당패를 일러 흔히 '불가촉(不可觸)의 천민'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양인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정도로 천한 계급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유교 사회에서 중시하는 농업 등에 종사하지 않고 남에게 여흥을 팔아 연명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색 및 집단 혼숙 등 당시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패륜을 저지르는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사당은 양인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허가 없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양인들로부터 구타 및 모욕등을 당해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광대들을 핍박한 대부분은 양반이 아닌 농민이나 천민 계급이었다고 합니다.

양인과 거주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사당패는 전국을 유랑해 다니지 않을 수 없었고, 경기도 안성 및 경남 진양(현재의 밀양) 지역등 일대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그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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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생이나 공길과 같은 광대들은 여자와는 같이 다니지 않는 것 같은데요.

원래 광대패에는 여자가 없나요?

A. 남사당패에 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남사당이 특별히 여자를 천시해서라기보다는, 유랑이 잦은 남사당의 생활 특성상 남성에 비해 체력이 약한 여자가 무리에 끼어있을 경우 신속한 이동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독신 남성들로 구성된 패거리에 소수의 여자가 끼어 있을 경우, 그들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 들면서 남사당패에도 여자가 한 두 명씩 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여자들이 주로 맡았던 배역은 어름산이(줄광대)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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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화 마지막쯤에서, 장생이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하는 재담 중에 '기생들 요분질도 심드렁해지니 사내놈과 비역질을 일삼는데, 이 비역질이 예사 비역질이 아니라 쌀이 나오고 비단 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역질이란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A. 비역, 혹은 비역질이란 남성 간의 성교를 뜻하는 순 우리말입니다. 반대로 여성간의 성교는 밴대질이라고 합니다.

남사당 사이에서는 '비역을 출하다'는 등으로 사용하며, 주로 삐리나 외모가 반반한 남사당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머슴이나 한량 등의 남성에게 몸을 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때 받는 몸값을 남사당 은어로 허우채(解衣債의 변형)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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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육갑은 조정 중신들의 공길 살해 계획에서 공길을 살려내고 대신 활에 맞아 죽습니다.
그런데 그 장례 장면을 보면 달구지에 거적으로 덮은 시신을 두 사람이 밀고 나가는 것이 전부더군요. 왕의 총애를 받던 광대인데, 장례는 왜 그렇게 초라한가요?

A. 남사당 및 광대는 장례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광대의 경우는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땅에 시신을 매장할 수 있었지만, 광대보다도 천대를 받은 남사당의 경우는 땅에 시신을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사당은 대부분 천장(川葬)이라 하여 흐르는 강물에 시신을 띄워 보내거나, 깊은 밤을 틈타 몰래 시신을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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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작중 공길이 연산을 위해 하는 인형놀이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끼워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으로 현대의 인형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더군요. 남사당들은 정말로 그런 인형을 가지고 연희를 했나요?

A. 남사당 놀이 가운데는 '인형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사당 놀이는 풍물(흔히 말하는 농악), 버나(접시돌리기 비슷한 묘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이), 덜미(인형극)로 구성되는데, 이 중 덜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인형극입니다. 특히 그 중에 등장하는 상좌 인형은 작중 공길이 사용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이용해 연희하는 포대괴뢰 형식입니다. 남사당은 놀이에 필요한 모든 소품-인형, 탈 등-을 모두 직접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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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화로 살판 이란?
며칠전 왕의 남자 삭제 장면에 관한 기사를 보니, 화로살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화로살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A. 살판의 한 종류로서, 화로를 안고 넘는 재주를 말합니다
.
남사당의 살판은 현대의 덤블링에 가까운 땅재주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뒷곤두, 앞곤두, 번개곤두 등의 기예를 연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물건을 들고 재주를 넘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는데, 이 때 드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칼살판, 대접살판, 화로살판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화로살판은 벌겋게 불이 붙은 숯불을 담은 화로를 들고 재주를 넘는 것으로, 살판쇠의 기예가 출중하지 않으면 재주를 넘는 중 화로에 담긴 숯불이 쏟아져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묘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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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사당패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조선시대의 남사당은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만큼 인기가 있었을까요?

A. 남사당은 한국적 연예인의 원형입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보고 웃을 수 있는 오락거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그들에게 있어 가끔씩 보는 남사당의 각종 기예들과 재담 등은 실로 신기하고 흥미로운 구경 거리였습니다. 따라서 남사당은 회갑연 등 각종 잔치에 불려가 흥을 돋구기도 하였고 소작농들을 다독거리는 양반 지주의 회유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왕실에서조차도 경사가 있을 때는 가끔 광대를 궁으로 불러 그 놀이를 보며 즐겼다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남사당은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남사당 재인 중 한 사람인 바우덕이의 경우는 그녀가 자주 들렀던 안성 지방 인근에 '사또 이름은 몰라도 바우덕이 이름은 안다'는 속담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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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사당에는 절대 여자는 없었다?

X. 사실이 아니다.
원래 남사당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사당패라 하여 남사당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되는 의미에서 여사당이라는 집단도 존재하기는 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패거리에 한 두 명의 여자가 끼이는 경우가 있었다.

2. 남사당의 꼭두쇠는 투표로 뽑았다?

O
. 사실이다.
남사당은 신분이 천하기는 해도 매우 민주적인 조직으로서 꼭두쇠는 반드시 패거리 전원의 투표를 통해 뽑았다. 이렇게 선출된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이었으며 노쇠하거나 패거리의 신임을 잃어 꼭두쇠의 자리를 수행할 수 없을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3. 남사당은 모두 여장을 했다?

X
. 사실이 아니다.
노천명 시인의 '남사당'에 나오는 것과 같은 여장은 남사당 패거리 중에서도 신입 단원인 '삐리'들만이 하는 것으로서 삐리들은 여장을 하고 여자가 없는 무리 중에서 여자 노릇을 하였다.

4. 남사당은 죽으면 땅에 묻혔다?

X
.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의 남사당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던 관계로 지주들의 반대가 심하여 죽어서도 땅에 묻힐 수 없었고 천장(川葬)이라 하여 사체를 흐르는 개천에 띄워 보냈다. 남사당이 아닌 재인청 소속의 일반 광대들은 평장(平葬)이라 하여 봉분이 없는 편평한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5. 남사당 내에서는 동성애가 성행하였다?

O
. 사실이다.
남성들로만 조직된 남사당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동성애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신입 단원인 삐리가 여자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암동모'라고 하며 남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숫동모'라고 한다) 삐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절반을 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패거리 전원이 짝을 맺을 수는 없었다고 하며 비록 꼭두쇠라 하더라도 한 명 이상의 암동모를 거느릴 수 없었다.

6. 남사당은 자연발생적인 유랑집단으로, 내부에 아무런 규율이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X
. 사실이 아니다.
남사당의 내부 규율은 몹시 엄하고 일사불란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무리에서 추방되거나 그에 응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남사당 패거리 내에서 행해지는 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잔대미 공사'라는 것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멍석에 말고 벅구잽이들이 돌아가며 매를 치는 것이었다.

7. 남사당패는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유동적인 조직이었다?

O
. 사실이다.
놀이 허가가 잘 나지 않고 양식 조달이 여의치 않은 겨울이 되면 아예 무리 자체가 해산하여 각자 구걸 및 걸식으로 연명하다가 다음해 봄에 다시 뭉쳐서 패거리를 재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고 전한다.


http://blog.naver.com/baudeogifes(
안성바우덕이축제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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