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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 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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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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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의 병세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에서 조선시대 영조 장조 정조 3대의 편지를 촬영한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해 ‘장조’인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을 번역했다고 14일 밝혔다.

현재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는 거의 없으며 알려진 자료도 개인적 고백이 아닌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권 교수에 따르면 1910년대 초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홍봉한의 5대손인 홍승두 집안의 원본을 거간꾼에게서 구입해 일본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에 있는 3대 임금의 서적과 서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고 밝혔다는 홍씨 가문의 글이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전했다.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태어나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로 추존됐다.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조선왕실 여인의 회고록으로 유명한 ‘한중록’에서 남편의 비화를 소개했다.


○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미친 듯합니다” 탄식▼

권 교수는 “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세자가 직접 고백하는 내용이므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에 관해 아들 정조가 만든 문집은 있지만 개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며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이 맞는다면 역사의 모호한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묘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융릉.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의 고백이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궁내에서 의관에게 자신의 병세를 전하면 갈등을 빚고 있는 아버지 영조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역력히 나타난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모일로 추정)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 끊임없는 국정에 대한 관심

사도세자는 편지를 통해 병중에도 나라살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병을 앓을 때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다가도 이성을 되찾을 때는 합리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1755년 11월 회일)

사도세자는 편지 여러 통을 장인에게 보내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한 뒤 학자들과 자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장모에게 바친 제문 등도 번역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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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조선이야기] 일곱 임금 거친 환관 김처선의 비극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세력다툼에 치여 죽을 고비 수없이 넘겨
연산군 폭정에 맞서 직언했다 사지 찢기는 극형… 최근 드라마로 부활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조선 초 환관 김처선(金處善)의 스토리를 극화한 드라마를 시작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배우 장항선씨가 연기했던 바로 그 환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극용 인물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 행적도 흥미진진한 데다가 생존시기도 세종 말년부터 연산군 때까지 파란만장했던 격동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극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가미될 경우 우리는 오랜만에 멋진 팩션을 만나게 될 듯하다.

실록에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단종 1년(1453년) 10월 13일자다. “경상도 영해에 귀양 가 있던 김처선을 석방하라.” 이때는 수양대군과 한명회·권람 등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후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처선은 김종서 등과는 반대쪽에 섰던 인물로 보인다. 4개월 후인 단종 2년 2월 19일 김처선은 고신(告身)을 돌려받아 환관에 복귀했다. 고신이란 일종의 관리자격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1년 후인 단종 3년(1455년) 2월 27일 김처선은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 이유가 단종복위운동을 펼친 데 참여했다가 발각돼 고신을 빼앗기고 고향인 전의(全義)의 관노(官奴)로 전락한다. 그러나 처형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 열성적인 가담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만 해도 환관 중에서는 엄자치가 가장 유명했다. 엄자치는 세종으로부터 가장 큰 총애를 받은 환관이었다. 이후 계유정난에 참여해 공신에 책록됐던 엄자치는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며 사육신과 같은 길을 걷다가 세조에 의해 죽게 된다. 김처선은 2년 후인 세조 3년(1457년) 8월 18일 세조의 특명으로 관노의 신분에서 벗어났고 세조 6년(1460년) 5월 25일에는 뒤늦게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된다. 큰 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계유정난에 김처선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와 김처선은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제대로 시종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국문을 당하거나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세조 11년에는 희한한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덕중(德中)이라는 궁녀가 남몰래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 이영의 아들 구성군 이준을 흠모하다가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통해 한글로 된 언문연서(諺文戀書)를 보냈다가 임영대군과 구성군의 밀고로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덕중은 말할 것도 없고 최호와 김중호까지 사형을 당했다. 이때 김처선도 간접적으로 연루된 듯하다. 그러나 죄가 중하지는 않았는지 세조는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해 본격적으로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 8년(1477년) 다시 김처선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김처선은 주로 왕명을 비밀리에 받드는 중책을 맡았다. 김처선은 품계가 계속 올라 자헌대부에까지 올랐다. 자헌대부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단히 높은 관작이다.

1494년(성종 25년) 성종이 승하했을 때 김처선은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직인 시릉내시를 맡았다. 시릉내시란 왕의 무덤을 돌보는 내시를 뜻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성종의 무한총애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만 따져도 김처선은 그 사이에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여섯 임금을 모셨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세종 말이나 문종 때 대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김처선은 어려서부터 성장과정을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던 연산군을 모시게 된다.


연산군이 폭군화하는 것은 대략 재위 10년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그 때문인지 10년간 김처선에 관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다가 연산군 10년(1504년) 7월 16일 연산군은 “내관 김처선을 하옥하라”는 명을 내린다. “김처선은 무례한 일이 있었으므로 죄를 주어야 하나 도설리가 없으니 우선 장100대로 대신하라.” 도설리(都薛里)는 내시부 소속으로 궁궐의 음식을 맡아보던 설리를 관리감독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중벌을 범했으나 일단 궁궐의 음식을 주관해야 하니 곤장100대로 대신하겠다는 뜻이다.

정확히 김처선의 ‘무례(無禮)’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는 실록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락으로 볼 때 광기를 보이기 시작하던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김처선으로서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살펴야 하는 본분에 충직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9개월이 지난 연산군 11년 4월 1일 ‘환관 김처선을 궐내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의 양자 이공신도 죽였다’는 짤막한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김처선은 폭군 연산군의 미움을 사 죽게 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산군이 내린 가혹한 후속조치들을 보면 김처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에 제동을 걸려 했음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 죽게 된 이유와 관련해 딱 한 줄 나온다. “술에 몹시 취해 임금을 꾸짖었다.” 그 대가는 컸다. “왕이 직접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활을 쏘아 죽였다.” 가산을 몰수당했고 고향 전의도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7촌까지의 친척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김처선을 죽인 연산군은 이틀 후 ‘어제시(御製詩)’까지 지었다. 그 중에 자신이 김처선에게 당한 봉변은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라고 썼다. 그런 광기는 6월 16일 “관리와 무신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는 모두 고치도록 하라”는 명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7월 14일에는 절기를 나타내는 처서(處暑)에도 김처선의 처(處)자가 있다는 이유로 조서(暑)로 바꿔 부르도록 명했다. 술을 먹고 자신에게 직간(直諫)한 김처선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기 때문이다.

7월 19일에는 모든 문서에서 ‘처(處)’ 자를 쓰지 말할 것을 명했다. 선(善)자는 워낙 많이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 자만 쓰지 못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해 12월 오늘날의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사인(舍人) 성몽정이 문서에 처(處)를 썼다는 이유로 잡혀와 국문을 당했다. 다행히 성몽정이 그 글자를 쓴 때가 7월 19일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성몽정은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성담년의 아들인 성몽정은 이 일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4등에 책록되고 훗날 대사헌에까지 오른다.

연산군은 생각할수록 김처선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듬해인 연산군 12년 3월 12일 “김처선의 집을 흔적도 없이 파내고 그곳에 못을 만들어라. 그리고 그의 죄명을 바윗돌에 새겨 땅속에 파묻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내쫓겼다. 그리고 중종이 즉위했다.

그해 11월 24일 사헌부 헌납 강중진이 글을 올려 “모두가 폐주에게 아부 아첨할 때 김처선 홀로 직언을 하다가 죽었으니 포상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은 왜 김처선의 ‘복권’과 명예회복에 반대한 것일까? 중종 7년 12월 4일 ‘삼강행실’ 속편을 편찬하던 찬집청에서 김처선의 사례를 삼강행실 속편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를 묻자 중종은 이렇게 답한다.
“김처선은 바른말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술에 취해 실언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수록할 필요가 없다.”


김처선의 명예회복은 250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2월 3일 영조에 의해 이뤄진다. 영조는 이날 “내관 김처선이 충간(忠諫)을 하다가 죽게 됐다는 것은 내 일찍이 아주 익숙히 들었다”며 정문(旌門)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런 생애를 살았던 역사 속 김처선이 드라마 속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벌써 궁금하다.



세계사 연표
1455 세조, 단종 몰아내고 즉위
  영국, 장미전쟁 발발
1456 성삼문ㆍ박팽년 등 사육신 처형
1479 에스파냐 왕국 성립
1485 성종, ‘경국대전’ 완성
1492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4 연산군 즉위
1498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6 중종반정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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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와 왕과 나의 공통점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 '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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