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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복:(주상전하, 돌아오시옵소서)를 외치는 왕과 나의 내시 조치겸


상위복 [上位復] :조선의 국가의례인 오례(五禮)에서 흉례(凶禮)의 절차 가운데 하나인 복(復)을 말함. 상위(上位)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며, 복은 돌아오라, 회복하라는 뜻.

본문
내시(內侍)가 평상시에 입던 임금의 웃옷을 왼쪽으로 메고, 앞 동쪽 지붕 처마로 올라가서 지붕 한가운데 마룻대 위를 밟고,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옷 허리를 잡고서 북향하여 세 번 상위복이라 불렀음. 동쪽은 생명의 방향을 뜻하며, 북쪽은 죽음의 방향을 뜻하므로 동쪽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외친 것임. 복은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돌아오라는 뜻이며, 세 번 부르는 것은 셋을 성스러운 수로 여겼기 때문임. 내상(內喪) 즉 대비나 왕비의 경우라면 중궁복(中宮復)이라고 하였음. 이를 마치면 옷을 앞으로 던지는데 내시가 함으로 이를 받아 들어와서 대행왕(大行王)의 위에 덮고, 덮은 사람은 뒷 서쪽 지붕 처마로 내려갔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실려 있음. 민간의 초혼(招魂) 의식과 같음.

용례
복.<내시가 상시에 입고 있는 상의를 왼쪽에 메고 앞 동쪽 처마로부터 올라가서 왼손으로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하여 세 번 부르기를, “상께서는 돌아오소서.” 하였다.> (원문)復<內侍以常御上服 左荷之 陞自前東霤 左執領 右執腰 北向三呼曰 上位復> [순조실록 권제34, 21장 뒤쪽, 순조 34년 11월 13일(갑술)]


[조선시대 왕의 장례식]

국상은 국가사업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경비와 인력이 소요되는 중대사로, 새로 등극한 왕이 맡게 되는 첫번째 국사이기도 했다. 국상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행해졌으며 5개월 장으로 지냈다.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왕릉을 조성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 임종과 장례준비

<국조오례의>에는 왕의 임종이 다가오면 법궁인 경복궁의 사정전으로 모셔 왕의 유언의 날조 가능성을 막고자 하였으나 실제로 사정전에서 임종을 맞이한 왕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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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정조실록 中

- 영조 52년 (1776년 병신년) 3월 3일 : 임금의 병환이 악화되다
- 같은 해 3월 5일 :  묘시에 임금이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하다
- 같은 해 3월 12일 :  대행 대왕의 시호·묘호·전호·능호를 정하다
- 같은 해 7월 27일 : 유시에 원릉에 장사하다


2. 국휼고명과 촉광례
왕의 병환이 위급해지면 액정서에서 평소 왕이 정사를 돌보던 곳에 휘장을 치고 병풍을 두른 후 왕세자와 대신들을 불러놓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마지막 왕위를 전하는 유교를 작성하게 하며, 이것을 국휼고명이라고 한다. 숨이 멎으려 하면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돌아가시면 왕의 입과 코 사이에 명주솜(고운 햇솜)을 얹어 놓고 솜이 움직이는 지를 보았다. 이 절차를 촉광례(觸纊禮) 또는 속광이라고 했으며, 솜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왕의 몸에서 혼이 완전히 떠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산 영조 사망시 속광(촉광례)


왕의 임종을 지키던 사람들은 임종을 확인하고 나면 이 순간부터 곡(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의 혼이 죽은 자의 혼들이 모여 있는 북쪽으로 더 멀리 가기 전에 다시 불러오는 초혼(招魂)의식, 즉 복(復)을 하였다.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 이었고, 이 동안은 왕이 계속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즉위하지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 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치렀다.

영조 사망시 곡하는 이산 정조


3. 고복(초혼과 발상의식)과 빈소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내시는 복의(죽은 왕이 평상시 입던 옷)를 들고 왕이 승하한 궁의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흔들며 '상위복'(왕이여 돌아오소서)을 세번 외치고 돌아와 복의로 왕의 시신을 덮고 곡을 한다. 이를 고복이라 하는데 상위복을 외치는 것은 왕의 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체취가 밴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 의식이 끝나면 국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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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의 빈소를 마련하고 육신을 떠난 혼을 위해서
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흰색비단을 묶어 혼백을 만들어 관 앞에 두었다. 왕세자와 대군 이하의 친자, 왕비와 내명부 등은 모두 관과 웃옷을 벗고 머리를 풀며 비취, 노리개 등의 사치스러운 것을 제거한 뒤 흰옷과 흰 신과 거친 베로 된 버선을 신으며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를 역복불식이라 한다.


4.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 설치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에 소렴과 대렴에 입을 옷, 찬궁(관을 설치하는 일), 성복(상복을 입는 일) 등을 맡는 '빈전도감'과 장례기간 동안 제사와 의례(염, 습 등)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국장도감', 그리고 왕릉 축조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이 설치되었다. 병조에서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군사들을 동원해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겹겹이 둘러싸고 통제합니다. (장례가 끝나는 날까지)


5.
목욕례와 습 및 반함  
왕이 임종한 날에 시신을 목욕시키는 목욕례를 행하는데, 머리와 상체는 기장뜨물과 쌀뜨물을, 하체는 단향(향내나는 나무)을 달인 물을 사용하였다. 목욕례 후에는 흰 비단옷을 9겹으로 입히는 을 행하였고, 그 뒤에는 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를 넣는 반함을 하였다. 입 오른쪽에 쌀을 채우고 진주를 함께 넣은 후 왼쪽과 가운데 부분도 그와 같이 하였다. 이를 반함이라 한다. 내시들이 왕세자·대군·왕비·내명부빈·왕세자빈 등의 위(자리)를 마련하고 각자의 위에 나아가 곡을 하는데 이를 위위곡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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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염과 입관
반함 이후 왕의 시신을 평상에 모셨는데, 그 앞에는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쓴 명정(銘旌)을 설치했다. 죽은 지 2∼3일 내에 하는 소렴(小殮)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힌다. 소렴에서는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끈으로 묶지도 않고 얼굴을 덮지도 않았다. 4∼5일 후에 하는 대렴(大殮)에는 90겹의 수의를 입힌 뒤 입관한다.
(5개월이나 되는 긴 장례기간 동안 시신에서 나는 악취를 막기 위한 나름의 지혜일 수도.)

반함 이후에는 왕의 시신을 평상에 모셨는데 평상 밑에는 빙반이라고 하여
석빙고에서 떠온 얼음을 채워 시원하게 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함) 평상 앞에는 붉은 비단에 대행왕재궁이라고 쓴 명정(죽은 자의 관직명을 쓴 깃발)을 설치했다.


7.
성복과 졸곡제
염이 끝나고 입관을 하면 왕과의 관계에 따라 왕세자 이하 모두 상복을 입게 된다. 이를 성복이라 한다. (보통 상이 난 지 나흘 정도 지난 뒤 입게 됩니다) 왕과 부자 관계이면 3년 복, 조손(할아버지와 손자)관계이면 1년 복을 입고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은 흰 소복을 입는다. (관리들의 경우 5일 입었다고 한다) 이후 빈전에 아침과 저녁의 문안과 곡(조석곡전급상식),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예식(삭.망전)이 장례날까지 이어진다.

승하 후 보통 3개월이 지난 뒤 졸곡제를 행하는데 졸곡 전까지 음악과 혼인 및 도살이 금지된다. 왕의 시신이 들어가는 관인 재궁(梓宮)은 안의 ‘벽[稗]’과 바깥의 ‘대관(大棺)’으로 이루어진 이중관이었다.

입관 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國葬)을 치렀는데, 이 기간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이라 하였다. ‘빈(殯)’이란 집안 내에 시신을 가매장한 장소를 뜻하며 빈전은 왕이 임종한 곳에서 편리에 따라 적당한 건물에 설치했다. 이 기간 동안 후계왕은 빈전 옆의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하였다.


8. 사위와 반교서 
성복례가 끝나면 왕이 자리를 비워 둘 수가 없기 때문에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이때 새 왕의 복장은 즉위시에는 면복(면류관과 곤룡포)을 입고, 졸곡 후 국사를 볼 때 백포(白袍)와 익선관을 사용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뒤 그 사실을 교서로 대내외에 알리고(반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이산 정조 즉위


9. 상시책봉과 장사  
대행 왕의 시호를 책정하여 종묘에 고유한 뒤 빈전에서 상시(죽은 임금에게 묘호를 올리는 것)의 예를 행한다. 이를 상시책봉이라 한다. 장례식은 왕릉이 모두 완성된 후 길일을 골라 행한다.

계빈(발인하기 전날 빈전의 문을 열고 관을 닦고 점검한다)
조전(빈전에 예찬을 갖춘 뒤 왕이 직접 배곡하고 술을 올려 발인할 것을 고하고 관을 빈전에서 상여로 옮긴다)
견전(관을 상여로 옮기기 전에 중문 밖에서 상여로 옮긴다는 사유를 고한다)
발인(상여를 수행할 문무백관의 반차를 정하고 빈전을 출발하여 묘지로 향한다)
노제(발인하여 상여를 운반하는 중로에서 도성을 떠난다는 고유한다)
천전(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관을 현궁(관을 모실 구덩이)으로 운반하고 예찬을 갖추어 술잔을 드린 뒤 하관)

초우제(장사후 첫번째 지내는 제사로 보통 당일날 지냄)
반우제(신주를 모셔 오는 예식을 말합니다)
재우제(두번째 제사)
삼우제(세번째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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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실제 혜경궁은 그 제목처럼 구절양장 기나긴 목소리로 한을 토해냈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경궁이 맨 처음 이 책에 붙은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閑中錄]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의 극단적 차이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사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간단하다. 혜경궁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도세자 형제들, 아니 영조 일가는 왕족의 일원이었으나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세자의 두 누님인 화평.화협옹주는 세자가 10대 초.중반일 때 요절하였다.그리고 혼자 남게 된 세자의 막냇누이 화완옹주는 훗날 주위의 꾐에 빠져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조카인 세손(정조)의 반대편에 섰다가 끝내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이러한 여조 일가의 불행한 삶은 혜경궁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의심 없이 형성될 트릭이 숨겨져 있다.

혜경궁은 영조가 영빈 이씨 소생 중 큰딸 화평옹주는 매우 사랑했으나, 둘째 딸 화협옹주와 세자는 극도로 미워했다는 점을 가장 애끓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가 옥사 등 불길한 정사를 보고 오면, 꼭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담장으로 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귀를 씻는 차비(差備:사람)로다"라고 자조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처럼 영조를 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한 부왕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영조와 그 일가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잠깐 검토해보자.


영조가 화평옹주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조가 불길한 말을 들은 후 씻은 물을 버릴 정도로 저주했다는 화협옹주에 관한 기록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두 기록의 내용이 너무나 판이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미움의 대상이었다는 화협옹주가 병에 걸렸을 때 영조의 거동을 [영조실록]에서 살펴봄으로써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영성위(永城尉) 신광수(新光綏)에게 시집간 화협옹주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황급히 화협옹주의 사가로 거동하려 했다.

하지만 친딸이라 해도 국왕은 사가로 분병이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 영조 자신이 의원의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했고 부교리 채제공도 두 번씩이나 차자를 올려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호위 군사를 빨리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판서 김상성과 훈련대장 김성응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들의 부절(符節:군사 지휘권을 뜻하는 표신)을 빼앗으러 간 선전관이 표신(標信: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사용하던 문표)을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군율을 시행할 정도로 화협옹주의 병환에 당황하며 초조해하였다.

황황히 화협옹주의 사가에 행차한 영조는 밤이 깊도록 환궁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나 문병도 안 되는 판에 임금이 사가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약방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영조에게 환궁할 것을 거듭 청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영조가 환궁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틀 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화협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려 하였다. 이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영조 자신이 환자임을 상기시키며 만류했으나 영조는 끝내 문상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김약로가 말했다.

"지난해 화평옹주 상사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이 손상되셨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몸이 손상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 때문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한 것과 연관시키는가?" 

이처럼 [영조실록]은, 영조가 화평옹주는 편애한 반면 화협옹주는 저주했다고 한 혜경궁의 증언과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화평, 화협 두 옹주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영빈 이씨의 첫 소생인 화평옹주를 화협옹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또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간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그녀의 사가로 가서 밤을 새웠다. 화협옹주가 죽기 4년 전인 영조 24년(1748)의 일이다. 영조는 이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항상 마음이 답답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 중에서는 현빈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 중에서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을 당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영조는 화평옹주는 물론 화협옹주도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혜경궁의 묘사대로 "용모도 절숭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운" 화협옹주를 영조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2년 후 상일(祥日)에도 그녀의 집으로 거동했다. 화협옹주의 명복을 빌면서 이날 하루를 경건하게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어가 행차 때 일체의 취타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화협옹주의 옛집에 들러서는 깊은 밤까지 옹주의 명복을 빌다가 신하들이 여러 번 환궁을 간청한 끝인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화협옹주의 기일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런 모습 어디에서도, 귀 씻은 물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저주하는 영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조는 이처럼 다정다감한 성품이었고, 그답게 일가 모두를 사랑했으나 그중에서 첫딸인 화평옹주와 효장세자의 부인이자 큰며느리인 현빈조씨에게 더 마음이 쏠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실제 영조는 화평옹주 못지않게 현빈 조씨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영조 27년(1751) 11월, 현빈이 세상을 뜨자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무신년(효장세자가 죽은 해) 이후로 내가 의지한 바는 현빈이었는데, 이제 그가 또 세상을 뜨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현빈을 이처럼 아낀 것은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실과 그녀의 친정에 대한 남다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실을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여, 갑자기 삶은 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현빈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 뒤에 대비의 하교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삶아 왔다고 한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친정 어른이 고관이 되면 기뻐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현빈은 영돈녕(領敦寧:현빈의 숙부 조현명)이 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 숙부는 왜 물러가서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니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현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사신(思愼)파는 시종일관 영조의 탕평택에 호의적이었다. 현빈의 아버지 조문명(趙文命)과 숙부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때 탕평택을 이끌었던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그럼에도 현빈은 척리(戚理:임금의 외척)가 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현빈과 그 집안의 이런 자세가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문명과 조현명 형제, 그의 아들들은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훗날 사도세자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조재호도 바로 사도세자의 형수인 현빈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의 말대로 영조가 화평옹주만 사랑하고 화협옹주는 극도로 미워한 정신병자라면, 현빈 조씨를 사랑한 반면 혜경궁은 극도로 미워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헤경궁은 영조가 사도세자는 미워했어도 자신은 사랑했다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영조가 현빈 조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오지만 혜경궁을 사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 옹주, 아니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두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영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성품이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영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노비의 처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노비의 형편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 남종은 장가를 못 가며 여종은 시집을 못 간다. 부부가 있은 후에야 부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면하라"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이게까지 세심산 배려를 베풀 줄 아는 영조가,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물며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미워할 까닭이 있었을까?

영조가 극진히 아꼈던 화평옹주는 시종일관 세자의 편을 든 자상한 누이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조의 통곡 속에 화평옹주가 죽은 것은 세자가 대리청정하기 6개월 전인 영조 24년 6월로, 세자 나이 열네살 때였는데, 그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조는 화평옹주가 죽은 6개월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 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정사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처럼 여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 두 부자 사이에 영조가 극히 편애했던 화평옹주가 나서서 중재할 만큼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네 살짜리 외아들과 쉬흔아홉 살의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겁이 나서 못 하면 (영조가) 남 보는 좌중에서 꾸중하시고 흉도 보셨다"라고 하여, 영조가 시종 세자를 미워한듯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시키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량이 어떻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뒤에서 세자의 기반을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자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조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부담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혜경궁의 기술 중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선희궁이라 불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한 부분이다. 영빈 이씨는 천한 나인(內人)출신이었다. 혜경궁은 세자궁 나인들이,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선희궁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궁 소속의 궁녀들이라면 몰라도 세자를 모시는 궁녀들이 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0~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으로 기구하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惡妻)로 의심하였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이러한 처지에서 쓰여진 한중록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포할까??
한중록에서는 영조는 변덕이 심하고 치매 때문에 사람도 못알아봤다고 나오며, 사도세자도 광폭했다고 나오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MBC 사극 이산에서는 한중록의 기곡을 받아들여서 영조가 치매인 걸로 묘사하고 있던데... 과연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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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영조, 실제 치매 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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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 영조치매..발칙해진 정순왕후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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