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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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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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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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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맺힌 발언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44 회 / 2월 18일 (월) 밤 9시 55분

정조 드라마가 작년부터 계속적으로 인기를 끄니 영조, 정조 관련 서적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네요.
관련글: 정조 열풍 - '이산, 한성별곡,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에서 정조 이미지

시청자들은 극적인 것을 좋아하니 그동안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그 아들 정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저도 정조하면 '탕평책과 규장각'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더라구요.

사도세자의 비극이 크다면 노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손 자리를 부지한 정조의 아픔 또한 컸을텐데 정조 또한 세종대왕처럼 너무 성군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와 출판계에서 홀대받아왔습지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천재군주 정조가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조 관련된 서적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제가 못읽은 것도 많습니다..  "지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무슨 자격으로 소개해?"라고 생각지 마시고 정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조 중심의 책들입니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고즈윈 펴냄
18가지 키워드로 정조와 그의 시대를 해석하다 정조와 18세기 조선을 살펴보는 역사서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역사학자 이덕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철인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의 역사를 풀어낸다. 기존의 연대기식 서술이 아니라, 정조 시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반영한 18가지 주제를 통해 정조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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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는 책입니다.

이덕일 교수는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사도세자를 언급할 때마다 이 말을 인용합니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까지)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의 즉위 초기, 택군(임금을 고름)이 당연시되어 정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노론무리들 속에 쌓인 정조입장에서는  "과인(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고 합니다.

정조를 조명하겠다고 나선 드라마 이산에서도 절반 이상이 흐르도록 정조의 세손시절만을 다루는게 아쉬웠는데 이 책에서 그 아쉬움을 덜어줄 것 같네요.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여유당 펴냄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는 정조 전문가가 풀어 쓴 정조와 화성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정조 시대 정치사를 공부해 온 소장 연구자인 저자가 정조의 사상과 화성 건설의 의미, 그리고 시대 정신을 알려준다. 군왕 정조와 인간 정조를 함께 만날 수 있으며, 정조 시대 개혁 정치의 실체와 정조가 꿈꾸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백성을 위한 국왕 정조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이한우의 군주열전 6) 상세보기
이한우 지음 | 해냄출판사 펴냄
국가 개혁과 인간적 고뇌 사이에서 갈등한 군주, 정조 역사로부터 배우는 리더십 교과서『이한우의 군주열전』시리즈. 조선왕조의 6대 왕을 선정하여 그들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조선왕조를 빛낸 군주들의 활약상과 그들의 리더십을 현대적 감각에 맞는 문체로 풀어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흥미진진한 사료들을 추적하고, 그 행간의 의미를 포착하여 역사적 상황을 직조해

영조와 정조의 나라 상세보기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조 탕평정치의 시대를 일관되게 추적한 저자가 영정조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객관적으 로 조명한 저서. 신세대 정치세력 사림의 진출을 시작으로 도덕군자들의 붕당의 역사, 절대통치자에서 개혁정치가로 탈바꿈한 영,정조와 탕평책 등을 기술했다.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상세보기
신병주 지음 | 효형출판 펴냄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인 저자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대미를 장식한 반차도를 중심으로 조선 궁중의 예법을 소상히 기록한 책이 출간됐다. 1759년 영조가 정순왕후를 신부로 맞이하여 치른 혼례식의 그림으로 50쪽의 화폭에는 보행인물 797명, 말탄 인물 391명 등 총 1,188명이 조선시대 복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의궤의 자료적 가치에서부터 66세 신랑과 15세 신부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탐구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사도세자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책. 저자는 그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존하는 모든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고, 행간 사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그간 갈고 닦아온 역사학의 다양한 해석 기법들을 동원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까지도 저주와 조소, 그리고 동




영정조가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정조/영조/사도세자 관련 이야기가 상당량을 차지하는 책입니다.

조선 왕 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 펴냄
조선 왕 독살설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과 수수께끼를 낱낱이 파헤치는 책. 저자는 특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왕들의 독살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잘 알려진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었던 야사 속에 나타난 사실들까지 총정리하여 살펴본다. 이 책은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종 등 독살설에 휩싸인 왕들의 최후 순간을 되짚어보며 그 속에 숨겨진 권력과 암투, 음모와 배신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

왕을 낳은 후궁들(표정있는역사) 상세보기
최선경 지음 | 김영사 펴냄
후궁들의 삶을 통해 잃어버린 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다 역사의 다양한 표정을 전해주는『표정있는역사』시리즈. 당대인의 삶의 모습 그 자체, 그 시대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역사를 지향한다. 왕의 표정에서 노비의 표정까지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 여덟 번째 <왕을 낳은 후궁들>은 궁궐 안 깊숙이 감춰진 후궁들의 삶을 조명한 최초의 대중역사서이다. 조선왕조 역사에 비극으로 남

왕의 투쟁 상세보기
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펴냄
조선의 왕 4인의 정치투쟁을 조명하다 <왕의 투쟁>은 권력의 정점에서 사투를 벌인 조선 왕들의 정치투쟁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500년에 걸친 조선 왕들의 투쟁사를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라는 네 왕을 통해 보여준다. 성군이라 불리는 왕부터 폭군의 대명사로 유명한 왕까지, 조선 왕들의 투쟁사를 대표하는 네 왕의 생애를 추적하고 그들만의 특징적인 권력 사용법과 그 명암을 알아본다. 1부에서는 세종, 연산군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석필 펴냄
석필 테마 역사 읽기 시리즈 1. 조선의 당쟁사.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 퇴계 이황, 기호지역의 기반인 서인의 종주 율곡 이이, 서인 영수 우계 성혼, 동인 영수 성암 김효원, 북인 대북 영수 아계 이산해 등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당쟁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글자가 굉장히 작고 촘촘하니까 잘 선택하셔야 됩니다.





어린이용도 땡기는 군요~ 난 만화가 너무 좋아~~

정조(백성을 위해 새 새상을 열어라)(새시대큰인물 27) 상세보기
햇살과 나무꾼 지음 | 어린이중앙 펴냄
21세기 위인전『새시대 큰인물』시리즈 제27권 ≪정조≫. 본 시리즈는 어린이들이 꼭 알아야 할 위인들의 일생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27권은 <정조>는 조선 시대 22대 임금 정조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좀더 편안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개정판>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16대 인조 22대 정조)(만화 조선왕조실록4) 상세보기
허순봉 지음 | 은하수미디어 펴냄
『만화 조선왕조실록』시리즈 제4권《영조대왕과 이산 정조》. 본 시리즈는 조선 시대의 역사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만화로 풀어내, 416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4권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에서는 제16대 인조부터 제22대 정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는 영조께서 완전 산신령처럼 나오셨군요. 한국판 산타 할아버지라고 할까요? ㅋ


이산 정조(백성을 사랑한 개혁 군주) 상세보기
김희석 지음 | 능인 펴냄
이 책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인물 만화로,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정조대왕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아버지를 죽게 만든 세력에 꿋꿋이 맞서고, 당파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개혁 정치에 앞장섰습니다. ☞ 이런 점이 좋습니다! 이 책은 가장 역동적인 시대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정조(웅진 생각쟁이 인물06)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씽크하우스 펴냄
새로운 시선, 새로운 구성으로 바라보는 역사 인물! 『웅진 생각쟁이 인물』시리즈 제6권《정조》. 본 시리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는 인물 위인전이다. 각 권은 기존의 동화 형식의 구성을 탈피하여, 다양한 시사 상식과 역사 정보를 곁들여 구성했다. 수준 높은 일러스트와 풍부한 사진 자료는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고 있다. 6권은 '정조 연구'로 박사 학

정조(인물로 보는 한국사 29) 상세보기
표시정 지음 | 파랑새 펴냄
『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 제29권《정조》. 본 시리즈는 역사학자 33인이 선정한 인물을 통해 한국사를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책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인물 57인이 소개됐습니다. 각 권은 해당 인물을 깊이있게 연구한 역사학자의 감수를 받았습니다. 29권에는 조선 시대 제22대 왕 정조의 일대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켜 정치를 안정시키고, 새

 

여러분이 혹시 이 중에 읽고 싶은 책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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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도 벗기지 못한 '혜경궁 홍씨' 의 가면.



"남편을 잃었는데 아들까지 잃겠습니까. 그 때의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겁니다."


[이산] 의 '혜경궁 홍씨' 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자애로운 부인이고, 당파에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뻔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역사 속 혜경궁의 모습은 과연 그러할까. 드라마 [이산] 이 벗기지 못한, 아니 어쩌면 벗기지 않은 혜경궁 홍씨의 '참모습'. [한중록] 으로 만들어 진 혜경궁의 가면을 벗겨보자.


남편을 버리다.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즉위를 방해하지 마라.


모두가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아사했다. 온 몸이 굳고,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지냈던 사도세자는 대처분 8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뱃놀이를 떠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를 도운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임을 고해바쳤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한 충성의 반 만큼만 혜경궁이 사도세자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사도세자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비명에 횡사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훗날 뒤주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어 '일물(一物)' 이라고 불리는 이 뒤주는 홍봉한이 직접 영조에게 귀뜸해 대처분 현장속으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혜경궁도, 홍봉한도 이 뒤주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중록] 에서 볼 수 있듯 혜경궁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한 듯 구구절절한 변명만을 꺼내 놓을 뿐이다.


그렇게 노론의 '대처분' 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혜경궁의 착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마당에 노론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산군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세손이 살아 있는 세상은 노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노론은 사도세자에 이어 '세손' 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택군의 정치' 였다.


"남편을 죽였으니 아들도 죽여라." 노론이 혜경궁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허나 혜경궁은 차마 아들까지 버릴 순 없었다. 혜경궁은 노론과 가문의 '세손 제거 결정' 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예상 외로 거센 혜경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손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이상 어차피 세손과 노론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 이었다. 혜경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이 아버지 홍봉한이고, 혜경궁의 아들인 세손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 숙부 홍인한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혜경궁의 모순이었다. 사도세자 제거 음모와 달리 혜경궁은 가문의 일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세손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혜경궁과 영조 뿐이었다.


영조 51년, 영조는 백관들을 불러 놓고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또한 그것을 보고 싶다." 며 사실상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노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과 같은 하명이었다. 영조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는데 그 대답이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즉, 세손은 나랏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세손이 절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즉위를 막고야 말겠다는 노론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한 마디였다.


홍인한의 이 발언은 훗날 홍인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현장에서 들은 영조와 세손 역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참으로 흉하다. 어찌 국사를 함께 논하겠는가." 라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숙부의 기가막힌 발언을
들은 혜경궁은 숙부에게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지 말라." 라는 경고문을 발송했다. 홍인한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있는 바가 없으나 아마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혜경궁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발언을 30년이 흐른 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충성심 어린 발언으로 뒤바꿔 조작해 놨다. 세손이 이 세가지를 모두 안다고 대답하면 영조가 "내가 그리 금하는 당론을 세손이 안단 말이냐?" 라며 역정을 낼까 두려워 홍인한이 구구하게 변명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의 이 구절을 보다보면 끝끝내 자신의 가문을 버릴 수 없었던 혜경궁의 처지가 절절하게 드러나 보여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노론의 세손제거 공작은 대담하고 치밀했다. 다만, 다행인 것 한 가지는 노론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정권자 '영조' 가 세손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의 유일한 종손인 세손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며느리의 간청을 지켜보며 영조는 끝내 세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고, 세손은 1777년 조선조 제 22대 왕이 된다. 바로 '명군' 정조의 탄생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가문.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데에는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힘이 지대했다. 정순왕후 김씨를 위시한 외척가문의 발호와 풍산 홍씨 집안의 음모는 혜경궁에 의해 일차적으로 차단됐고, 영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남편은 버려도 아들은 버리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절절한 모성이었다. 훗날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온 몸을 내 던지지만 적어도 정조의 즉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비극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다. 사도세자 제거가 새로운 비극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정조의 즉위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노론에게도, 혜경궁에게도 가슴 철렁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된 정조의 첫 마디였고 혜경궁은 그 발언과 함께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혜경궁의 예상처럼 정조의 '복수' 는 처절하게 감행됐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순왕후 가문은 풍비박산 났고, 노론의 주요 대신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정조의 조용한 '복수' 의 마지막 타겟은 당연히 '세손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던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혜경궁이 받은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혜경궁이 정조의 '복수' 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식투쟁'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한 것처럼 혜경궁 역시 아버지와 숙부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했다. 혜경궁의 단식 때마다 정조는 "아! 내가 있는 것은 곧 자궁(혜경궁)의 덕이니 어찌 자궁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죽이는 순간 사도세자에게는 효도가, 혜경궁에게는 불효가 되는 것 역시 정조가 처한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정조조에 이르러 풍산 홍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망국동에 망정승' 이라고 불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위풍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고,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으로서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통탄이었으나 대 놓고 불평할 순 없었다. 이미 혜경궁이 살고 있는 나라 조선은 풍산 홍씨의 나라가 아닌 '정조의 나라' 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문의 부활을 꿈꾸다.


혜경궁은 '가문의 부활' 을 23년 동안 꿈꿔왔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가문은 부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면서 자신의 가문은 몰락한 이 현실은 혜경궁 스스로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것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혜경궁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문의 부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혜경궁이 꿈 꾼 '가문의 부활' 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난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 의 서막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했다. 말할 나위 없이 사태가 급박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구보다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었다. 정조가 죽어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혜경궁은 아들과 가문을 맞바꿀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순왕후가 대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곤 혜경궁은 그 즉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의 대신들은 혜경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므로 잠시 물러났고 정조를 둘러싼 노론 대신들의 방어벽은 혜경궁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혜경궁은 동궁을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 정조를 죽여야 하는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혜경궁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조의 안색을 살핀 혜경궁은 자전과 함께 처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혜경궁이 처소로 돌아간 뒤 정순왕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치료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끝내 가문을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 홍씨.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했다. 정순왕후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는 한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풍산홍씨 가문에는 잔혹한 대처분을 내렸다. 외척은 자신의 집안 하나면 된다는 정순왕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다시금 혜경궁 홍씨를 절망에 빠뜨렸다. 훗날 혜경궁이 "흉하도다, 흉하도다." 라고 탄식한 정순왕후의 인품은 바로 이토록 잔혹했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었던 때는 정순왕후가 죽는 그 순간이었다.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죽음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며 [한중록] 을 편찬했다. 그리고 순조에게 "내 아버지와 가문의 신원을 회복 시켜달라." 며 이는 "선왕의 유지" 라고 강변했다. 정조도, 혜경궁도, 정순왕후도 모르는 주장이었지만 혜경궁은 일방적으로 이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 에서 펼쳐지는 풍산 홍씨 가문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변명과 순조에게 펼치는 생떼와 같은 일방적 주장은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극 조차 외면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자기 변명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혜경궁은 한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뜻을 저버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70평생 혜경궁을 옥 죈 것은 '가문의 부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가문을 위해 [한중록] 을 지었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그 업보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낳았고, 정조의 비극을 낳았고, 결국은 조선을 소통과 변화의 시대에서 폐쇄와 퇴보의 시대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지금껏 드라마에서의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실제 혜경궁은 강인한 어머니는 되었을지언정 자애로운 부인이나 현명한 여성은 되지 못했다. 혜경궁이 처한 모순이 정조의 모순이었고, 그 모순이 결국 정조의 개혁을 주춤거리게 할 수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혜경궁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정조의 개혁은 조금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집의 복을 닦으라' 라는 아비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풍산 홍씨' 의 여인.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잔혹한 여인. [한중록] 과는 전혀 다른 실제 역사 속 혜경궁 홍씨의 슬픈 가면은 지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절절한 삶을 정 반대로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 로 숨쉬고 있다.


참고자료 : [이한우 군주열전-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이덕일 역사서-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이덕일-사도세자의 고백][신봉승-조선 정쟁사][혜경궁 홍씨-한중록][일성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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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신지식

이름 산. 자 형운. 호 홍재.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 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1775년(영조 51) 12월 노병이 깊어진 국왕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방해하여 조정이 한때 크게 긴장하였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기대를 모을 위치였으나, 탐포하고 무지한 그를 세손이 비천하게 여겨 멀리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완옹주()의 소생으로 어미와 함께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에게 붙어 세손의 적당이 되었다.

그는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시강원의 궁료 홍국영·정민시 등을 참소하기까지 했으나 세손이 이를 듣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손이 대청의 명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청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쓰려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기까지 했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 왕비를 왕대비로 올리면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으로 격을 높였다. 그 다음에 생부의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하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자신의 왕통에 관한 정리를 이렇게 마친 다음 곧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그 무리 70여 명을 처벌하면서
명의록을 지어 그들의 죄상을 하나하나 밝혔다. 즉위와 동시에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제도를 시행하여 후원에 그 본각인 주합루와 여러 서고 건물들을 지어 문치의 왕정을 펼 준비를 다졌다.

세손 때부터 시강원 열서()로 자신을 도운 홍국영을 도승지로 임명하고, 숙위소 대장도 겸하게 하여 측근으로 크게 신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1779년에 누이 원빈이 갑자기 죽은 후 권력 유지에 급급하여 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여 그를 내쫓고 정사를 직접 주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각신()들은 이때부터 문한의 요직들을 겸하면서 조정의 문신들의 재교육 기회인
초계문신() 강제()도 주관하였다.

이 제도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가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그 성과를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고자 한 것으로 규장각이 이를 주관하게 하여 왕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신하들을 확대해 나갔다. 근 20년간 10회 시행하여 100여 명을 배출하였다.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강시()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1783년의 장용위(), 1791년의 장용영() 등 친위군영 창설, 운영의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1784년에 지은 《황극편()》을 통해 주자·율곡의 시대에는 붕당정치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을 구분하여 전자가 우세한 정치를 꾀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각 붕당 안에 군자·소인이 뒤섞여 오히려 붕당을 깨서 군자들을 당에서 끌어내어 왕정을 직접 보필하는 신하로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논파하였으며, 편전의 이름을 탕탕평평실()이라고 하여 이를 실현시킬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재위 21년째인 1797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에서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공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라는 것을 정리해 보였다.

그는 만천에 비치는 밝은 달이 되기 위해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격쟁()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 재위 13년째인 1789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소()를 수원으로 옮긴 뒤로는 능행의 범위가 한강 남쪽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수원도호부 자리에 새 원소를 만들어 현륭원()이라 하고 수원부는 화성()을 새로 쌓아 옮기고,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는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횟수가 10회를 넘었다. 재위 9년에 경강(), 즉 한강의 상인들 소유의 배를 편대하여 각 창()별로 분속시켰는데 14년에 주교사()를 세워 그 배들을 이에 소속시켜 전라도 조세 운송권의 일부를 주면서 행차 때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정조는 재위 2년째인 1777년에 대고()의 형식으로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인재()·융정()·재용() 등 4개 분야로 크게 나누어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은(), 즉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각 전궁(殿)의 공선정례()를 고쳐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2년에는
내수사()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관직을 혁파하였다. 이렇게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응지() 상소의 기회를 만들고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竿)을 설치하여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으며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내탕()을 출연했다. 1782년에 서운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달력을 계산하여 천세력()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다.

민산은 경계()에서 비롯한다는 견지에서 전제()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치세 중에는 실현을 보지 못했다.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이른바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백성들이 부당한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계승하여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의금부 형조 등에 급파하여 기준을 어긴 형구()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에 실어 각도에 배포하였다. 책에 실은 자의 길이와 같은 유척()을 만들어 함께 보내면서 준수를 엄명하고 어사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확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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