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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카페 역사 스페셜  역사 토론 게시물



11월 2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1)



■ 세조 (1417 - 1468, 재위 : 1455-1468)는 어떤 인물이었나?

조선 7대 임금으로 1455년 에서 1468년 까지 약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시호는 혜장(명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처음에는 함평대군이었다가 진평대군에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 졌다. (1445-세종 27)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이 학문에 능했던 데 비해 수양대군은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 성격이 대담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7대 임금에 즉위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혀 우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양성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시켜 예문관으로 그 기능을 옮기는 한편,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지방민들을 괴롭혀 오던 유향소를 전격 폐지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도 주력하였다. 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러한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 (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참고 문헌-



1. 조선왕조 실록 -시디롬- 서울 시스템, 1997

2. 연려실기술 -국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혜안, 1998

4.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5. 이성무, [조선왕조사], 1권 -태조~현종- 동방미디어, 1999

6.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7. 최정용,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1995

8.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9.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10.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11.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1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들녘, 1996

11. 사이트 : 한국의 역대 왕 - www.urinara.com





11월 3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2) 세조 공신들의 횡포


1.
조선 3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의 공신책봉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 재위 기간에는 정변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신의 존재 자체가 정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병약한 세종의 장자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모사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륙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였다.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반란의 주역인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해 한명회, 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다. 정난(靖難)이란 「나라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축나야 함을 의미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식읍 1000호와 식실봉 500호, 전 500결, 노비 300구(口) 외에도 별봉(別俸)으로 해마다 600석의 쌀과 금 25냥, 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 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도 전지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 7명, 반당(병졸) 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 등이 차등있게 배분됐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헌법에 따라 즉위한 단종이 계속 재위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협박해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중외병마도통사라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3년(1455) 윤6월에 드디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면서 스스로 임금이 됐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즉위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의 좌익(佐翼)공신으로 총 46명이었다.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이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축나야 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왕이 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했고 조선은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 갔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정사·좌명·정난의 4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 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琵琶)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임금 앞에서 추는 악어들의 잔치였다.


잔치가 파한 후 동생 영응대군의 사저로 거동한 세조는 장난삼아 이구에게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내가 때리게 되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신 사이에 격식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에게는 새벽 2고(鼓)가 될 때까지 술마시고 춤추며 즐거웠을지 몰라도 이에 끼지 못한 다른 사대부나 백성들에게는 착잡하고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특권층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정난 1등(2등·3등)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공신 아무개가 죄를 범해도 용서하라는 주청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해도 영원토록 용서하라는 주청이었으니 공신 당사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함께 갔던 공신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박살낸 후 후원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사헌부도 듣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모는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다가오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아내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죽어도 국왕이 공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니 공신들에게 조선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3.
역사드라마「왕과 비」는 수양대군과 그 수하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도착적인가는 정난·익대공신들이 김종서와 사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사형당한 인물들의 남은 식구와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올바른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시대정신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와 형제 등 남자들도 연좌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난·익대공신 세력들은 이들의 사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이들의 부인·딸 등 여자식구들과 재산을 갈취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흥상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과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의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중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과 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과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 수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이 시대정신 구현에 인생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공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육신들의 토지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 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신들이 탐한 것은 반대파 정치인들의 여인이나 토지뿐이 아니었다. 신숙주가 단종의 왕비 송씨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이 임금으로 섬기던 군주의 여인까지 탐했던 파렴치한들이었다.



-참고문헌 및 출처자료 -



조선왕조실록 -씨디롬-

연려실기술 - 국역-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9

2. 이덕일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김영사. 1999

3. 이덕일 [역사산책 - 조선을 망친 주범은 공신들 ] - 신동아 연재물

4.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5.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6.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7.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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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퍼옴. 문제시 삭제 예정.
 


다음 카페 유혁진님의 글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가 드디어 수양대군의 등극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 '왕과 비'는 사실 전작(前作)인 '용의 눈물'의 후광에 힘입어 출발한 기획이었고, 지금까지의 시철률 역시 '용의 눈물'에게서 물려 받은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딘지 전작에 비해 김 빠진 구성과 동어반복적이고, 재탕에 삼탕에 가까운 플롯의 배치로 시청자를 짜증나게 만든 부분으로 인해 전작 만한 카리스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에서 그려지 는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극히 일관되지 못해서 중간에 한두회를 보지 않은 시청자로서는 저 인물들이 왜 갑자기 저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특히 금일(99. 1. 23.) 방영분의 경우 단종의 양위와 관련한 매우 급박한 상황전개가 이뤄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는 연출에 실패하고 있다.



그냥 저냥 보여주면 보여주는대로 보면 되는(?) 무력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몇가지 거슬리는 점이나 좀 언급해 보려고 한다.



1. 세종대왕은 정말로 수양대군을 왕재(王才)로 생각했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을 다루는 문예작품(영화와 방송을 포함하여)중 최근의 작품들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신봉승의 '설중매(雪中梅)'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중반에 드라마화 되고, 영화화가 이뤄진 그의 작품은 무명이던 연극배우 정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 놓았으며, 드라마 캐스팅 그대로 영화화까지 이뤄질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심도있게 파헤친 역작(力作)이었다.


때문에 후작들은 싫건 좋건 '설중매'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학술적 연구가 아닌 드라마나 영화화 될 경우에는 거의 그런 혐의를 피하기 힘들어 진다.



그런데, '왕과 비'는 방영 초반부터 '안티 설중매'의 노력을 곳곳에 드러내고 시작했다.


'계유정난'의 명분을 심화하기 위해 김종서와 황보인의 독단(獨斷)을 부각시키고, 종친들을 심하게 무력해 보이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조선의 국법을 조금만 유추해 보아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조선의 국법상 종친은 관직에 오를수 없다.


조선의 종친인 자로 고위관직에 오른 예는 이방원(태종: 제 1 차 왕자의 난 수습), 이화(태조 이성계의 서제(庶弟 : 태종의 외척 제거), 이유(세조 : 계유정난 수습), 이준(귀성군으로 세조의 조카, 영응대군의 아들 : 이시애의 난 진압) 뿐으로 이는 국초(國初)에 한한다.


때문에 종친은 관직에 오르는 길인 과거를 볼 필요가 없고(자격도 아마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진사나 생원 같은 하위직을 받지도 못한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호칭은 그의 군호(君號)를 부르거나 '나으리'를 붙여 부르는 것이 예법에 맞다. 대감이나 영감같은 고위직 관리의 존칭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왕과 비'에서는 수양대군을 위시한 대군과 군들에게 '대감'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무지(無知)의 소치인지, 작가의 의도적 시도인지, 아니면 필자의 무식인지 몰라도 적어도 '왕과 비' 이외의 작품에서 **대군'대감'이라는 호칭은 들어본 바가 없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있었다면, 뒤이어 벌어질 사육신 사건(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서 성삼문 등이 세조를 그의 예전 호칭대로 '수양대군 나으리'라고 불러서 세조를 진노케 한 그 유명한 사건을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각설하고, 조선의 종친은 관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권을 가질 수 없고, 종친으로서 왕실 의전과 종묘의 제사에 참석하는 등의 예우만을 받을 뿐이었으나, 세종대왕은 제위 말년에 이르러 세자(문종)를 비롯해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대군등을 국정의 곳곳에 침투시켜 실무를 맡게 한다. 이는 세종의 말년에 유례 없이 이뤄진 일로서 이는 태종으로부터 이어진 관료집단 불신의 가풍(家風)이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세조의 왕재(王才)를 논하는 이들은 이때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많은 국정 업무에 참여하여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사실 소헌왕후 (세종의 정궁(正宮))의 소생들은 한두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그 정도 쯤은 되는 업적을 쌓았던 것이다.


다만 세조가 주목 받는 이유는 그가 세종대왕의 브레인 집단이던 집현전 출입담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을 찾아 보면 태종때부터의 숙원사업이던 국방강화의 최우선 과제인 화포(火砲)의 개량 사업에 금성대군과 임영대군이 총책임자로 참여하고 있으며, 그 실적에 대해 세종께서 크게 치하하며 평가한 육성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의 세자 시절 업적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문종이 워낙에 세종이 이양한 국정 전반에 관여하였기 때문이지 수양대군보다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논외로 하더라도 신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대가 아무리 성군 (聖君)이라 불리는 절대적 카리스마의 군주라 하더라도 국가기강을 문란케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세종 말년에는 절대적으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내관이 화약제조담당업무의 총책임자가 되기도하고, 문종은 한 술 더 떠서 내관의 처우를 대폭 개선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시절이라 평가받 는 세종조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대립이 없었을 뿐이고, 내부적으로는 왕실과 관료집단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어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김종서와 황보 인)의 경우는 세종시대에 순전히 자기 능력만(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마 태종시대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태종조에 급제하기 때문이다.)으로 입신에 성공한 부류로서 세종-문종-단종-세조-예조-성종조를 풍미한 훈구파와는 그 뿌리가 다르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족벌이나 문벌보다는 군왕에 대한 1:1의 충성심과 성리학의 철학으로 무장한 부류였다.


때문에 왕족의 국정개입이나, 내관의 발호같은 '상식이하'의 처우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왜 이들이 어떤 식으로건 제거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명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들이다.


이들은 세종시절 집현전에서 수양대군과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사이다. 이들이 수양대군을 왕재로서 평가하지 않는데, 그 누가 그를 왕재라고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반면 이들 집현전 학사들의 마음이 세자(문종)에게 향하고 있었음은 세종실록 곳곳에서 나타난다. 세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얻기 위해 사대부 체면 다 버리고 몸을 날리기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뭐가 어찌 됐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의 마음이 누구에게 가 있었느냐는 점이다. 세종대왕은 누구나 다 알다싶이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분야의 국정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창조에 가까운 혁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다.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그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
기 자신의 국정운영철학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세자(문종)는 세종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합격 정도가 아닌 자신의 또다는 버전업된 인격이었다. 세자책봉 불과 몇 개월만에 국왕이 된 세종은 세자의 지위에서 섭정을 담당하는 '수습'기간이 부족했던 것을 뼈저리게 안타까워했고, 문종이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무렵부터 각 분야별로 조선 최고의 학자들로 구성된 '드림팀'으로 하여금 세자의 훈육을 담당하게 했다.

심지어 권위 있는 학자가 없는 분야 같은 경우 스스로 세자의 교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떡잎을 아예 만들어 버렸다. 어린 세자는 이 같은 부왕의 처절한 학습을 정말 놀랍도록 잘 받아 들여 신료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조차 10살을 갓 넘긴 세자를 접견하고서 '하늘이 조선에 내린 홍복'이라 극찬할 정도였다. 세종대왕의 초인적인 왕업을 계승할 인물로서 세자와 수양대군이 비교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수양대군의 경우 스스로도 '14세때부터 기방출입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던 것처럼 잡기(?)에 능했다. 사냥 실력도 상당했던 것 같고, 특히 활솜씨를 자랑했다.(이는 세자와의 왕위계승권 분쟁에 대비해 태조 이성계의 카리스마를 계승하려 했던 제스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몸이 세자에 비해 무척 건장했다고 하며, 후일 등극해서 벌인 일련의 불사(佛事)에서 보듯이 불심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문의 경우에서는 세자에 비할 바는 못되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집현전에 출입하며 신숙주, 성삼문등과 함께 정인지 밑에서 수학했다. 그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다.



여기까지 쓰면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양녕대군이다.


이런저런 낭설이 많이 있지만 양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은 결정적으로 태종의 눈밖에 났기 때문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양녕대군을 매우 심한 권력혐오증 환자로 그리고 있지만, 후일 보여준 그의 면모로 봤을 때, 그는 권력혐오증 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빠른 상황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면에서 부왕인 태종과 닮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종의 의향이다.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한 세자(양녕) 보다는 자신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조선을 모든 분야에서 문명대국으로 성장시킬 왕재를 원했고, 그에 부합한 인물이 충녕대군(세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녕대군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때, 부왕의 숙청 스타일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발호하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냉혹했다. 자식의 경우가 예외 일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세종의 치세에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거든 지체 말고 죽여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적통이 계승해서 왕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자까지 했던 왕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왕권에 심각한 도전요소가 된다. 부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왕위를 넘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연기를 할 필요가 있다. 양년대군은 파락호의 길을 선택하므로서 광인(狂人)이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어필했고, 효령대군은 동방유학의 나라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스님처럼 전국 심산유곡의 사찰만을 배회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만일 그 둘중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세력을 모으는 기미를 보였다면, 지체 없이 태종의 손에 살해 되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세종 말년에 세자(문종)의 병약함을 보면서 양녕대군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말년의 세종은 종친을 중용하는등 왕실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음 국왕이 문종이라는 전제에서 벌린 일이다. 세종이 덕이 중후한 인군(仁君)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후세에 남기고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태종의 아들이고 권력을 어찌 유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자신의 사후 이후의 권력구도를 어찌 가져가야 하는지를 그 명민한 두뇌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붕어(崩御)직전 가장 강직한 왕당파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의정부에 배치하고 행정권은 황보인에게, 군권은 김종서에게 장악시킨 것이다. 심지어 문종의 단명을 예견하고서 세손(단종)의 치세까지를 염두에 둔 고명을 남긴다.


세종은 절대 수양대군이 보위를 이어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태종 - 양녕대군 - 수양대군은 어디까지나 난세(亂世)의 인물로 세종이 이룩해 놓은 태평성대의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난세에 필요하지, 태평성대에는 사회불안세력일 뿐이다.


어쩌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수양대군측의 주장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도 태종이 양녕대군을 자신을 위해 죽이려 했던 것처럼 수양대군이 발호할 기미를 보이면, 군권을 장악한 '충성의 화신' 김종서로 하여금 그를 죽이라고 밀명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양대군도 그쯤은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것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4세에 기방은 공연히 간 것이 아니다.



2. 수양대군은 문종조와 단종 즉위초에 왕위에 뜻이 없었나?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왕자란 무엇인가? 그것도 정궁(적실이라는 말은 여염의 용어로 왕실에 오면 정궁(正宮)이라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소생의 왕자란 후일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다. 그 호칭에서부터 즉위에의 욕망을 내포하는 신분인 것이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위로 형이 있는데, 부왕의 총애가 대단하다면, 즉위의 꿈을 단념하고 권력에 대한 불안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부단히 홍보하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수양대군은 세조 제위시가 아닌 태종 제위시에 태어났다. 형인 문종과는 3살 터울로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했을때는 이미 형인 문종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어 있었다. 철나기 전부터 처세를 생각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성장기를 내내 형의 그늘 밑에서 지내야 했다.


형과 아우가 비교가 되는 상황조차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형인 문종은 불과 7살의 나이에 세자책봉을 받고서 무려 29년을 세자로 생활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때문에 수양대군이 권력욕을 어설프게 가졌을 때쯤에는 그 꿈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세종 말년에 이르면, 부왕과 세자가 동시에 신병을 앓는 일이 아주 흔했다. 이때쯤의 국정은 거의 세종과 세자(문종)중에서 약간이라도 덜 아픈 사람이 맡았다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다. 누가 봐도 부왕이나 세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부왕이 조만간 붕어하고, 세자가 후사 없이 세상을 버린다면, 그 다음의 보위는 당연하게 후보 순위 1번인 수양대군에게 돌아온다.


그것을 알아차린 수양대군은 세종의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석보상절도 편찬에 관여하고, 규표를 바로잡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도 몇 번 씩 오른 것이다. 늙고 병든 국왕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자, 신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때 '너희들이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잘 보아두라.'는 시위로 태조의 카리스마를 등에 엎기 위해 활솜씨를 자랑하고 다니고 건장한 체구를 과시하며, 자신의 강건한 육체를 드러내기 위해 사냥만 나갔다 하면, 왕자 체면에 팔뚝을 드러내길 즐겼던 것이다.


아마 그런 수양대군을 보며, 다른 경쟁자 안평대군은 냉소를 지으며 난을 치고 시문을 읊조렸을 것이다. 부왕이라면 차라리 동(動)적인 수양대군보다는 정(靜)적이고 문예에 능해 문예 진흥의 가능성이 매우 큰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그런 두 사람에게 정말 안타깝게도 세종 23년에 원손(단종)이 태어난다. 그리고 5년 뒤 5살이 되자마자 세종은 그를 세손으로 책봉해, 자신의 후계구도가 확보부동하게 세자에게 있으며, 여의치 않을 경우 세손이 그 보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장기 구상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집에서 난이나 치고 시인묵객이나 상대한 안평대군은 왕위를 노린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거기서 한발만 더 나가서 풍류객이 되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냥다니며 곳곳에서 자신의 왕재를 드러낸 수양대군은 그게 힘들다. 양녕대군처럼 미친척을 할 수도 없고, 안평대군처럼 시인묵객을 만날 수도 없다. 그때 사냥은 요즘처럼 몇몇이 고즈넉히 4WD 자동차에 총이나 하나씩 들고 떠나는 게 아니다.


몰이꾼에 같이 사냥할 장사패등등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행하는, 약간만 변형하면 군사훈련의 의미까지도 가지게 되는 행위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예법에는 수렵의라 하여 왕이 사냥하는 의식이 있다. 말이 사냥
이지 그것이 군사훈련과 동원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인 것을 동방유학의 나라 신료가 모를 리가 없다. 어설프게 나섰다가 제거대상 1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종으로서도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야 어쩔수 없이 수양대군을 선택해 볼 여지가 있었지만, 원손이 태어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강보에 쌓인 원손을 안고 다니며 정사를 펴고 기회 있을때마다 신료들에게 원손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하라고 말하고 다닌 것은 할아버지의 손주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후계구도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대내외에 과시한 정치적 제스쳐였던 것이다.


세자의 후사가 없었을 때는 수양대군의 발호를 대책 없이 지켜봐야 했겠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아마 이때쯤 김종서에게 유사시 수양대군 제거의 밀명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수양대군이 살 길은 무엇인가. 목숨을 걸고 형인 세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왕과 비' 초반에 수양대군이 등장만 하면 나왔던 대사인 '형님이신 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주상전하를 보위한다.'는 말은 거의 입버릇이 되었을 것이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수양대군의 비극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간다. 원손이 태어난 후로도 세종대왕께서 생각보다 장수하신 것이다. 세종이 조금 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문종이 세자시절의 건강상태에서 국왕이 되어 신체적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면, 문종은 1년 이내에 붕어할 것이고, 그리되면 아무리 세자이어도 10살도 안되는 나이로 국왕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양대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지지만, 단종은 그런 수양대군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고 알 것 아는 나이인 12살(앞서 수양대군이 14살에 기방에 출입한 것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12살 정도면 나름대로 성숙한 청소년시기가 된다.)에 당당히 즉위한다.


단종의 모후인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긴 하지만, 그때까지의 단종의 옥체는 수양대군파에서 보기엔 후일 장성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될 정도로 잔병치레 없이 강건했다. 누가 봐도 단종 즉위 초에 그는 장수(長壽)가 예견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의 왕으로서의 자질 역시 10대 초반의 몇몇 정사처리를 두고 신료들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부활이
다.'라고 이야기 될 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 시기에서 만큼은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웃고 있었을 것이다.




3. 계유정난의 명분은 정당한가.


새로 시작된 단종의 치세. 역대 어느 왕의 치세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새 임금이 즉위하면, 정권에 위협요소로 작용할 세력을 숙청한다.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종과 약간이나마 친분이 있던 모든 관원을 모조리 거세했고, 문종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다.


세종 조에만 예외라고 생각되지만, 세종조에는 태종이 알아서 다 해줬다. 세조 즉위초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니 말하기도 민망하고, 그의 아들 예종은 남이의 옥사를 일으켰으며, 성종 마저도 세조와 예종의 총애를 받은 친적이며, 세조때 이시애의난을 진압한 공신이며 종친인 귀성군 준을 거세한다. 당연히 숙창당한 남이와 귀성군 준은 군공이 매우 높으며 실력과 학문을 겸비한 인제로 세조가 무척이나 총애한 인물이다.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림직 하다.


단종 즉위초, 왕권에 가장 강력한 위협요소는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왕당파 김종서로서는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단종의 장성시까지 수양대군을 죽이지 않고 무력화 시키는 선에서 세종조의 무혈통치를 완성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흔히 수양대군파가 말하는 황표정치로 인한 훈구대신의 국정독단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훈구파가 아니었다는 전술의 내용으로 설득력을 잃고, 황표정치는 주로 인사문제에서만 사용된 것인데, 즉위초 단종이 관원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해 이뤄진 것은 사실이나 단종이 재빨리 관원의 이름을 숙지한 이루 폐지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훈구파는 세조 즉위시 그를 지지한 세력이다. 권남은 그 이름도 유명한 권근의 손자이며, 한명회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명나라에서 받아온 문열공 한상질의 증손이다. 신숙주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초 드러내 놓고 집안자랑을 해도 무방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수양대군의 측근중의 측근들이 오히려 훈구였던 것이다.


훈구파는 오히려 세종조에 순전히 자신의 능력과 왕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과 충성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들의 세력에 눌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양대군 즉위 이후 이뤄진 숙청에서 거세당한 훈구파는 한 명도 없는 반면, 집현전을 위시한 신진사대부가 남김 없이 숙청 당한 사실은 훈구대신의 국정 전단이라는 수양대군파의 명분의 설득력을 떨어트리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신진사대부가 육성되고 성장하던 집현전을 '사육신의 난' 이라는 일련의 숙청이벤트 이후 그 뿌리를 뽑아 버린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4. 단종이 너무 어려 국정을 맡길수 없었다?


지금의 센스로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수도 있지만, 상술한 조선시대청소년의 성숙도(?)를 고려해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금 나이로 코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하는 어린 아이가 당당히 세자와 세손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시대가 바로 그 시대였다.


약간의 억지일수도 있지만, 어린 단종의 눈에 이제 막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부터 세종대왕이 강보에
싸 안고 다니며 이런저런 국정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버지인 문종 또한 세자 생활만 29년을 한 사람이다. 아무리 아이가 어려도 집안의 분위기를 가지고 자랄 수밖에 없다.


단종실록을 마구 난도질한 세조시대의 사관들 조차도 단종의 당당한 왕재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후견인이며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인 김종서 황보인등의 주청에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한 측면이 있을때는 불윤(不允)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내가 충분히 알아들었소' 라며 버티기까지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단종(12세 즉위)과 비슷한 연배에 즉위한 자산군 헐(성종 : 13세 즉위)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왕위를 물렸어야 한다. 수양대군파의 논리로 본다면 왕재로서 가장 강력한 왕권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귀성군 준이다.


그러나 귀성군은 거세당해 유배지에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고, 성종은 세조의 훈구대신들이 만들어 놓은 '훈구대신의 국정전단'의 체제에서 훌륭히 성장해서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참 묘한 역사의 순환이다.


강한 군주 다음에 단명한 군주가 나오고 그 다음에 어린 왕이 등극하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다르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 금성대군이 혜빈 양씨와 내통해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다는 어
쩌면 사실이었을수도 있다.


허나 세조와 그 자신의 공신들이 이후에 벌린 일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이 얼마나 속빈 강정같은 것이었는지를 스스로 드러낸다. 실제로 세조와 그 공신들은 세조 치세 내내 올미부(나중에 후금(:청나라) 를 새운 누르하지가 바로 이 부족 출신이다.)을 토벌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업적 없이 자신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말며, 오히려 성종시대에는 정도전이 야심차게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을 무원칙하게 훈구대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쳐 버림으로서 조선 사회를 매우 경직된 귀족적 사대부들과 그들의 좌장인 국왕이 지배하는, 사실 그들이 그토록 비판해 마지 않던 고려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로 퇴락 시키고 만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이 글의 시발이 된 '왕과 비'라는 드라마가 너무 세조 측의 입장에서 은근히 그를 정당화 하려는 시도를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한 것에 분개(?)하여 이런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저 평범한 왕들의 뒤를 이은 국왕이라면 세조도 무리 없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전작인 용의 눈물이 철저하게 쿠데타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반면, '왕과 비'는 전작의 이러한 인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지 못한체 중심 없는 작품으로 남게 되어버린 것이 아쉬운 것이다.


오히려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혹은 그러려고 애처로울 정도로 노력한) 세조와 희대의 풍운아이며 마키아벨리즘(혹은 관중(管仲)의 신봉자 한명회, 개국공신의 후예로 세종조에 고려사의 개수로 세종으로부터 고신을 박탈 당해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새우려 했던 권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으로 현실적 정치이념을 가진 신숙주등 수세에 몰린 훈구파와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신흥사대부 세력의 갈등으로 빚어진 권력쟁탈의 양상을 그렸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재미와 농도를 갖춘 수준 높은 역사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라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어설피 전작의 화두였던 '왕권주의 (대통령중심제)와 신권주의(내각책임제)'의 대립을 이어가는 것은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진다. 적어도 지금까지 전개된 '왕과 비'의 갈등 양상은 훈구파와 신흥사대부의 갈등일 뿐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세조의 왕위찬탈을 '구국의 결단' 인양 묘사하는 것은 역겹기 그지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구국의 결단으로 보위에 힘으로 올라선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상 아무도 없다. 차라리 한 인간의 처철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농도 짖게 표현하는 편이 인기 몰이를 위해서도 바람직 할 것이다.



...써놓고 나니 이걸 왜 썼나 싶네


1999. 1. 24.

유 혁 진




.이 분 글 정말 재미있게 잘 쓰시네..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박식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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