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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나라 - 정조가 내친 실력자 홍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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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조 탕평정치의 시대를 일관되게 추적한 저자가 영정조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객관적으 로 조명한 저서. 신세대 정치세력 사림의 진출을 시작으로 도덕군자들의 붕당의 역사, 절대통치자에서 개혁정치가로 탈바꿈한 영,정조와 탕평책 등을 기술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tmek&logNo=30005024798

홍국영 , 그는 어떤 사람인가?

얼마 전 18세기 후반 정조년간 정치사를 다룬 TV사극들이 남긴 화두는 '홍국영,그는 어떤 사람인가'이다. MBC-TV의 역사물 '한중록'에서는 홍국영을 권모술수에 능하여 혼자 힘으로 다음 시대 정치판을 만든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전통적인 권모술수론에 따른 평가다.


반면 KBS-TV의 '왕도(王道)'는, 백성들 속에서 직접 생활한 경험을가지고 민중적 입장을 넓게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판을 바꾸어보려 했던 현실개혁적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정감록, 한중록』 등에 적힌 이야기를 홍국영에 가탁하여 쓴 어느 역사소설을 원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역사물들이 방영되던 당시, 당국자들이 '탕평' 국면을 표방한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과연 홍국영은 어떤 인물인가? 구한말 민씨 정권에 대항한 개화파들이, 이른바 19세기 세도정치'가 정조 초년 홍국영의 세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역사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인물이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 상에서 소설적 허구로 줄거리를 꾸며서 설명한 경우도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다.


당시 왕위계승권자는 중국 군주의 통치사인 『통감(通鑑)』을 반드시익혀야 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영조가 아들을 죽인 행위를 빗대어 비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 내용을 정조가 어떻게 배우고있는지 알아보라는 불한당들의 참소가 이어져 영조가 불시에 이를 확인해보려 했다.


그때 홍국영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종이로 가려서 내주든가, 칼로 베어버리고 내주었다. 그래서 왕세손(정조)은 할아버지의 깊은 신임을 받아 위기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일화를 비롯한 홍국영에 관한 이야기들은 정조의 당시 일기기록(尊賢閣 日 記)을 근거로 다시 꾸민 것이다.


정조는 홍인한(洪燐漢)과 정후겸(鄭厚謙) 등 특권 외척들이, 홍국영과 정민시(鄧民始) 등 사태판단에 기민한 측근들과 함께 자신이 어떤공부와 대화를 하는지 항상 염탐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왕위계승권을 위태롭게 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그렇다면 홍국영은 실제로 어떤 길을 택해서 어떻게 살아간 인물인가? 『한중록』, 『정조실록 『정종기사(正宗記事)』 『명의록(明義錄)』『과심낙수의 자산고(恩波散槁)』 중에 있는 『당역열전(黨逆列傳)』 등을보면, 그런 대로 홍국영의 생애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서틀에 뿌리틀 둔 쪽권적 문벌가문 臺신의 야심가‥‥홍국영은 1748년(영조 24)에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덕로(德老)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그의 집은 도성 밖인 서강에 있었다.

25세 때 과거에 합격하기 이전 그의 성격과 행적에 대한 평가는 어떠했을까? 젊었을 때의 그에 대한 기록으로는 혜경궁 홍씨의 기록과 심낙수(沈樂洙)의 기록이 가장 자세한데, 두 기록은 대체로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홍국영은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 얼굴 생김새가 예쁘고 준수했다고 한다. 즉 매력적으로 생긴 데다가 수완이 좋고 두뇌회전이 빨라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데 두 기록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만큼 말이 경망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혜경궁 흥씨에 의하면, 재주도 별로 없으면서 글을 잘한다고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여하들 글을 능숙하게 지어서, 늘상 사용하는 시와 문장은 재치 있고 예리하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다음의 일화는 혜경궁이 홍국영을 욕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그의 담대 하고 호기 있는 성격이 잘드러난다 .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주위의 같은 연배의 친구들에게 '천하의 모든 일이 모두 내 손아귀에 었게 되리라' 는 호언장담을 하고 다닌다. 그래서 이런 해괴한 행동거지를 싫어하고 비웃는 동년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혜경궁은 홍국영이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른바 일반 사람들의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을 살아간 인물이라는 의미다.

심박수의 기록에 의하면, 홍국영은 성격이 경망하고 방종하여 술과 여색을 좋아하고, 또한 함께 모여 놀거나 이야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시중 무뢰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함께 술 마시고 장기두기를 즐겼으며, 시조와 창을 잘했다. 그리하여 장안에 그가 '나비야 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또한 가자'라는 창을 잘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질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의 숙부 홍락빈(홍락년)은 심한 질책을 퍼부었으며 , 사대부들은 그와 사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문벌 있는 집안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젊은 시절의 홍국영은 하는 일 없이 잘 놀기만 하는 한량배였다고 평가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술 더 떠, 그의 아버지 흥락춘이 『약간 미친 사람』광인이라고 하면서 그런 그가 자식교육인들 제대로 시켰겠는가라고까지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런 글들은 그가 권력의 정상에서 몰락한 뒤에 나온 평가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해서 판단할 만한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흔히 무뢰배, 곧 시정잡배란 성리학이 아닌 실무적인 지식을 지닌 중간계층, 혹은 양반가문이면서도 사대부로서의 길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잡다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홍국영은 그런 부류들과 어울렀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받은 것이다. 이른바 자신의 포부를 숨기기 위해 여항인(간항인)들과 어울렸다는 흥선대원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흥선군의 행동은 내심을 감추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홍국영은 포부를 감추지도 않았을 뿐더러 감출 필요조차 없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홍국영의 6대조는 선조 임금의 딸인 정명공주(정명공주)의 남편 영안위(영안귀) 홍주원이다 정명공주는 광해군 때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비명에 죽은 영창대군의 동복 누나로 인목대비 소생이다.


홍주원의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외교적으로 큰 공을 세운 이정귀(이연구)다. 홍주원은 처신이 깨끗하고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로, 국왕의 행차를 모시는 데 진력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하여 칭송받 기도 했다. 홍국영의 가문은 왕실과 연흔관계를 맺으면서 오랫동안 서울을 근거 로 뿌리를 내린 가장 유명한 문벌가문 중의 하나다.


당시 오랜기간 정승을 지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흥봉한과 이복동생 흥인한(홍린한)도 같은 가문 사람으로 홍국영에게는 10촌 할아버지가 된다. 또 경주 김씨 김면주(금면주)의 어머니가 흥국영의 종조고(종찬 당고모, 5촌)였다. 김면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는 8촌, 순조 초년의 실력자 김관주(금관려)와는 4촌 형제지간이다. 김면주는 홍국영이 승지로 등웅된 정조 즉위년 가을, 정조가 직접 시험을 통해 선발한 한림소시(3변』소시)에서 청요직인 사관에 뽑히기도 했다. 요컨대 흥국영은 영조 재위 당시 영조,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김씨와 인척관계였다. 이런 점에서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조와도 12촌형제로 인척간이 된다.


혜경궁은 그래서인지 영조가 홍국영을 특히 신임하여 수년 동안 사관으로 측근에 두고 '태 손자다'라고까지 하면서 아주 귀여워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홍국영이 1인 2년(영조 48) 가을 25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사실과, 급제하자마자 9월 하순경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보좌역이라는 좋은 보직을 제수받은 사실은 우연이라거나 권모술수에 의한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왕실과 연혼관계를 가진 데다가, 당시의 두 막후실력자 가문인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와 인척관계에있던 가계 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왕세손인 정조와의 만남


홍국영이 1인2년(영조48) 9월,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보좌하는 보직을 맡게 된 것은, 그의 출세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조 말년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외척간의 대립양상은 대단히 복잡했다. 당시 정조와 가까운 친인척인 흥인한과 정후겸 (사도세자와 함께 선희궁 태생인 화원옹주의 양자)은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이가 벌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 가문이 정국을 주도해야 동궁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다는 동궁보호론을 졌다.


그러나 정조는 외척간의대립에 왕세손을 이용하는 그러한 작태를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정조는 당시 일기에서 흥인한과 정후겸 세력이 앙앙불락하여 왕세손의 동정을 염탐하고 기회를 엿보면서 동궁의 지위를 흔들려는 책동을 별였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역시 앙앙불락했던 김귀주와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탕평당 중에 홍상간누간)과 민항열(각각같이 눈에 띄는신진기예들이 홍국영을 멀리하자, 홍국영 역시 굴복해서 그들에게 붙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홍상간은 남양 홍씨 출신으로 영조의 깊은 신 뢰를 받는 노론계의 주역 홍계희의 손자이자 흥술해(홍본측의 아들이다. 그는 홍국영에 앞서 정조의 보좌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민항열은여흥 민씨로숙종의 장인인 민유중(관유중) 이래 노론의 명문가문 출신 이다. 두 가문 모두 영조년간 홍양해 (홍양해)와 민우수(각우수)를 산림 으로 배출하기도 했다.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은 이유

정조는 홍국영이 어느 특정 정파를 편들지 않아 친구가 거의 없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를 신뢰하고 도와주려 했고, 홍국영 역시 당시는 곧은 마음으로 정조를 보좌하고 도왔다. 정조의 회상에 따르면, 외척당들은 홍국영을 정조 측근에서 제거하기 위해, 그가 궁철 밖 여염집으로 미행(미행)하고 오입하기도 하는 정조를 보좌했다느니 (이축사), 공부할 때 못된 책을 읽고 토론하도록 권유 했다느니(서료훈작) 하는 유언비어들을 퍼뜨렀다.


이러한 정치공작은 정조의 왕위계승권을 흔들기 위해 익명으로 왕세손을 모함하는 투서를 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이로 인해 염탐설, 자객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외척당의 모함은 그 정도가 날로 심해져 왕세손의 지위가 위험한 수 위에까지 다다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영조가 왕세손에게 대리청 정을 시키거나 왕위 자체를 선양하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정조는 이 때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에 서서 이러한 모함에 좌절하지 말고 대항하도록 조언하면서 보좌한 사람은 홍국영 1인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혜경궁은 왕세손을 충실히 보좌하던 당시의 흥국영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렀다. 홍국영의 자질이 본디 그러하므로 유언비어가 딘무한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영조가 왕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과 정후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당 세력은 각각 조정과 궁궐 안에서 이를 필사적으로 뒤집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광좌와 이종성을 잇는 소론 준론계의 서명선이 앞장서서 그들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영조는 비로소 사태의 추이를 정확히 깨닫게 되었다. 결국 대리청정을 막으려 했던 세력들이 제거됨으로써 위기상황은 해소되었다.


서명선의 상소는 실은 정조가 동궁으로서 자신이 직접 올리려 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서명선이 정민시, 홍국영과의 막후교섭을 통해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위험부담을 떠맡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정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영조가 죽고 즉위하게 되자 자신을 핍박했거나 홍국영을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모조리 반역집단으로 처단했다.


홍상간 민항열 이외에도 이경빈 윤약연 이성운 홍찬해 등에 대한 국문기록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홍국영을 죽이려는 계획'을 논의했다는 것이 중요한 죄목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 중 윤약연은, 정후겸을 역적이라고 공격한 반면 홍인한은 정조와 국가를 위했던 인물(국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상 언급한 인물들은 계동에 살던 적도들로, 홍지해와 윤양후를 지도자로 하는 정파이자 홍인한의 우익세력이기도 했다.


또한 이들뿐만 아니라 호서지방 노론세력의 지도자이자 홍계희와 같은 집안 사람인 산림 홍계능과 이담 김상익도 흥인한을 돕다가 제주도로 유배당했다. 이 옥사는 결국 다음해 홍상범이 궁철에 자객을 보내 정조를 죽이려 한 사건으로까지 이어겼다.


홍국영은 16년 3월 정조가 즉위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측근비서인 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보직은 흥국영이 정계를 은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정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명의록』에 의하면,이 조치는 정조를 보호한 의리의 주인(의리주인)으로서의 공로로 내려진 것이라 한다. 이후에도 정조는 홍국영에게 '만약 경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홍국영이 정조의 깊은 신임을 얻은 이유가 이런 공로 때문만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혜경궁이 재미있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홍국영이 궁중에만 박혀 있던 정조에게 세상 여항간의 모든 일을 꾸밈없이 전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궁께서는 (흥국영이)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얼굴도 예쁘고 눈치 빠르고 민첩하기도 하니, 별써 세상이 어지러웠던 때를 당하여 한 번 보고 크게 좋아하셔서 권우가 깊으셨다. 처음에는 요 작은 놈이 간사한 피를 내어 동궁께 곧게 충고하는 체 하나 실은 다 듣기 좋은 말이라 ‥‥‥ 한 번 국영이 들어오면 외간의 일들을 여룹지 않는 일이 없고, 전하지 않는 말이 없으니 동궁께서 신기하고 귀하게 여기셨으니 ‥‥‥ 마치 사내 대장부가 간사한 첩에게 미혹당한 것과 같으셨다. '


이는 홍국영이 군주의 공부인 강학(강학), 즉 성리학 공부는 안 시키고 쓸데없이 신기한 세상 일만 정조에게 알려주었다는 비난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정조가 홍국영을 왜 필요로 했는지를 알게 해준다.


즉 홍국영은 정조에게 세상의 일들을 그 모습대로 알려주는 중요한 통로이자 선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세상 돌아가는 일상적인일들과 사람을 보는 시야를 갖고,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높이는중요한 체험이 되었다. 또한 이는 정조가 백성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임금으로 통치하는 데 큰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론의 돌격장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은퇴 당일까지 도승지에 두었다. 도승지라는 직책은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 같은 보직이다. 홍국영은 노론계 중에서 청명당계열 정파의 지도자인 김종수,정이환과 합세하여, 노․소론 탕평당계열인 흥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세력을 사도세자에 불경하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동시에 조재한, 이명휘 이덕사 같은 소론, 남인 일부 역시 사도세자를 위한다고 하면서 실은 신임의리를 세운 영조에게 불경하다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그 다음에는 정조의 외척인 홍봉한 집안을 무차별 공격하여 정치일선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말끔히 제거했다 이때만 해도 경주 김씨 중심의 정파지도자인 김귀주도 흥국영과 함께 홍봉한을 공격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홍봉한을 제거한 후 정조의 뜻을 움직여 정순왕대비의 친동생인 김귀주 계열까지 공격하여,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 분산시켰다.



정조의 충직한 대변자

이러한 정국 상황은 홍국영이 주도하였다. 이는 홍국영이, 외척의 정치 간여를 배제해야 정국이 안정될 수 있다고생각한 정조의 뜻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후에도 외척당 및그들과 연결된 일부 노론 산림 집단의 반발로 여러 번의 옥사가 계속일어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청명당 정파의 지도자 김종수가 옥사에 깊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드러났지만 이를 사전에 삭제하여 문제되지 않게 처리했다. 이는 청명당과 김귀주 정파의 연결내지 제휴 관계를 차단하려 한 정조와 홍국영이,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따라 행동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혜경궁은 이런 정국운영 방식에 대해, '홍씨의 타코를 의리로 삼은 청명당계의 김종수가 홍국영을 이용하여 자기 가문을 역적으로 만들었다' 고 기록했다. 당시 정순왕대비 역시 자기 가문도 역적으로 몰린 정치적 수순에 대해 혜경궁과 마찬가지로 분노하였을 게 틀림없다.


혜경궁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홍국영 개인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즉 흥국영이 왕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노론계의 유력한 정파들을 무력화시켜야만 자신이 노론계의 지도적 존재로 부상할 수 있다는개인적인 계산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 김씨 계열까지 제거해버린 수순을 감안한다면 혜경궁의 판단은 일면적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이는 '열은 또 하나의 열로써 다스리고[懶治熱]' 동시에 '한 쪽의 그릇됨은 다른 쪽의 그릇됨으로,한 쪽의 올바름은 다른 쪽의 올바름으로 대비시켜 다스림으로써, 옳고그름이나 충신과 역적을 대비시켜 처리할 때 나타나는 커다란 희생을줄이겠다』(兩是兩非論)'정조의 통치철학 내지 통치술에서 나온 것이다. 즉 위와 같은 정치적 수순은 사실 정조의 뜻이고, 이것이 노론정파의 주체세력으로 떠오르려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욕구와 맞아 떨어져앞장서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홍국영은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정조 즉위년부터 실천에 옮겼다.


첫째, 노론계의 주의주장『義理』을 다시 널리 떨치는 작업에 앞장 섰다. 그는 정조가 즉위한 해가 바로 숙종이 노론 송시열의 의리가 옳다고 선언한 병신처분을 내린 지 飾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십분 활웅했다.


그래서 그해 5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결국 정조 2년4윌, 영조 위패 옆에 김창집(金昌集)과 민진원(閣鎭遠)을 배향할 때를 기다려서 송시열을 배향함으로써 이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정조로 하여금 직접 노론당의 신임의리가 옳다는 것을 다시 천명하도록 했다.


12월에는 영조 즉위 직후 최초로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했다가죽음을 당한 이의연(李義洲)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노론 산림 김창흡(金昌翁) ․이재 등의 벼슬도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시 높였다. 또한 일찍이 노론당의 맹장인 산림학자 중에서 충청지역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즉위년 5월에 불림), 송환억과 경기지역의 지도자 김종후를 산림으로 불러 올려서 자신이 주도하는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동시에 노론계 산림인 흥계능, 홍양해 김한록이라든지 송시열 계열의 송능상(宋能相) 등 홍국영에게 적대적인 호서 산림계 일부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영조년간에 폐지된 통청권, 즉 이조낭관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고 당하관의 천거를 장악하는 제도도 즉위년 5월에 복구했다. 이는 영조가 탕평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없애버린 제도다. 당시 이러한 정치적 조치는 홍국영이 절대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의리에 맞는 인재를 대폭 등용하겠다는 의미로 추진된 것이다. 곧 주자 성리학을 토대로 남송적 국가운영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노론계의 오랜 강령이 다시 실현된 것이다.


둘째 , 소론당에 대한 대대적 인 탄압국면을 조성하여 소론계가 독립된정파로서 기능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역시 정조가 즉위한지 두 달 만인 5월에 추진되었다. 송시열을 받들어 올린 반면 그 정적이었던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거슬러 빼앗는 조치를 취했다.


영조는 통치 말년에 노론 중에서도 특히 청명당 정파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탕평책의 일환으로 윤선거 ․윤증의 관작을 되돌려주었다. 그런데 정조가즉위하자마자 이 조치는 영조의 본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뒤집어버린 것이다.


당시 『정조실록  의 기술을 담당했던 사관은 정조의 조치에 홍국영의 건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기록했다. 정조는 곧이어 8월에 2품 이상의 소론계열 재상급 관료들만을 소집하여, 당으로 군자와 소인을 가를 수는 없지만 의리 측면에서는 노론이옳고 소론이 잘못되었다는 점과, 붕당에 근거한 정치집단을 없애는 탕평을 강조하였다.


이는 소론계 정치인들에게 영조와 노론계의 신임의리를 재확인시키는 조치였다. 이로써 소른 인사들로부터 지금의 소론당은 과거의 소론당과 다르다거나, 이제 소론당은 없다는 등의 반응을유도하였다. 이후 소론계에서도 영조 초반 정승에까지 오른 조문명의사례를 본받아, 이숭호(李崇祿)나 서명응(徐命膚)처럼 노론 산림에게학문을 수업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고, 아예 노론으로 전신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홍국영 은퇴 후에 달라졌고 그런세력들은 정조년간에는 대체로 정승으로 임명받지 못하였다.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셋째 , 홍국영은 1刃8년(정조 2) 당시까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이때의 작호는 원빈(元擴)이었다. 이는 조정뿐 아니라 궁궐 안에도 우군을 만들어놓겠다는 의도였으나, 그보다는 왕위계승권에 깊이 신경을 쓴 행동이었다.


또한 이는'산림세력을 우대하고, 왕실과의 흔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인조 년간 이래 서인의 기본적 입장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숙종 이후 청풍 김씨(김석주) , 광산 김씨 (김익훈) , 여흥 민씨 (민유중) 등은 모두 왕실과의 혼사를 바탕으로,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한 가문이다.


특히 안동 김씨(김수항)의 경우, 인현왕후 민씨가 후사(後視)가 없자자기 집안의 딸(김수항의 종손녀)을 측실로 들여 보냈는데(김귀인), 이 방식을 홍국영이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을 바탕으로 홍국영은 노론당의 주도세력으로서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반대 정파가 존립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홍국영은 즉위년부터 시작하여 수어사, 훈련대장 등 5개 군영의 대장을 다거쳤다.


그리고 1777년(정조 1) 초에 궁철에 숙위소가 설치되자, 도승지겸 숙위대장으로 대장패와 전령패를 가지고, 궁철 안에 자유로이 머물면서 숙위군사를 직접 통제하는 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실각하기직전에는 도승지로서 정책결정권을 통제하고, 오영도총숙위(五營都總宿衛) 겸 훈련대장으로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궁철에 들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홍국영을 찾아 보아야 했고, 퇴철하여 집에 가면 또한 손넘이 그득하였다고 한다. 당시 노론계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즉위 직후 정조 자신이 한말이다.


홍국영은 이 시기에 외척이 주도한 탕평당을 와해시켰고, 소론 남인청류당을 견제하는 데 전력을다했으며,노론 산림의 인정을 받는 왕실외척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즉 스스로 노론계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는 바로 전형적인 노론정권의 행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조의 입장에서는 양시양비론 또는 이열치열론에입각하여 정치세력을 재편성하는 단계였다. 홍국영은 1刃9년(정조 3) 9월 32세의 나이로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저는 7년 간 국가 일을 담당하였는데 (그동안) 조정의 명령이 대부분 제 손에서 나왔습니다' 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흥국영의 길은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정치의 길과는근본적으로 달랐다 홍국영은 갈수록 궤도를 이탈하여 정조의 통치방식에 근본적인 위협을 주었고, 이 때문에 결국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정조 탕평책의 걸림돌로 흑두봉조하가 되다

홍국영이 몰락한 것은 결국 정조의 탕평정치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정국안정을 위해서는, 왕실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막아야 한다는 점을 첫 번째 정치원칙으로 강조했다. 그래서 영조 말년에 형성된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 외척당과 생모 혜경궁의 풍산 흥씨 외척당을 모두 제거하여 와해시켜버렀다. 그런데 정조의 으뜸 공신인 홍국영 역시 외척으로서의 정국주도권 장악을 노렸다. 이는 정조의 통치원칙을 전부 무너뜨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상태에서,더 이상 늦기 전에 홍국영을 은퇴시켜버 린 것이다.



왕위계승권에 재입한 죄

홍국영이 은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그가 1刃9년(정조 3) 5월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청명당계열 김시묵(金時黙)의 딸 효의왕후(孝流王店 ;정조비)를 의심하여 핍박한 사건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으로는 정조를 직접 공격한것과 마찬가지다. 혜경궁은 당시 홍국영이 내전의 나인들을 여럿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혹형을 가하면서, 원빈이 독살당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멋대로 국문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홍국영이 원래 제 털끝만 건드려도보복하는 성미라서 자기에게 대항한 사람들을 함부로 무수히 죽였는데이제는 곤전까지 죽이려 한다고 수근거렸다 한다. 어했든 이로 인해 왕대비, 혜경궁, 왕비를 포함한 궁궐 내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적으로 규정하고 몰아붙이게 되었다.


정조로서는 이러한 압력을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홍국영이 왕위계승권 문제에 뛰어들어 간섭했다는 사실이다. '원빈'의 '원(元)' 자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계승권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 후궁은 사용할 수 없는 용어였다.


게다가 원빈이 사망한 후 효의왕후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설과, 효의왕후가원빈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게다가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 인의 아들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작호를 주었는데, 여기서 '완(完)'은 전주 이씨, '풍(豊)'은 풍산흥씨의 관향을의미한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작호에 어머니 쪽의 관향을 사용한 경우가 없을 뿐더러, 이작호 역시 정조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붙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후 벽제역에 내용을 알 수 없는 괘서(掛書:대자보)가 붙어 민심이 흥흥해지기도 했다. 이때 노론계 산림 송환억 송덕상은 상소를 을려소론당이 반란을 일으켜 신임의리를 뒤집으려는 기미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조가 신임하던 소론 청류당 정파의 지도자 서명선 이복원(李福源) 등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정국은 이로 인해 흔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시전상인 일부가 철시하고 피난을 갈 정도로사태가 심각했다고 한다. 송덕상은 이 틈을 타서 다시 상소를 올려, 국세가 외롭고 고단하므로 가시적인 조치 (模樣道理)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았으나, 왕위계승권자를 딸리 책봉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심낙수는 이상과 같은 시도에 대해 완풍군을 조기에 후계자로 책봉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




정조시대의 한신(韓信)

홍국영은 절대적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도 소소한 은원관계까지 보복 보상함으로써 마치 한(漢)의 한신(韓信)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숙위대장으로 있을 때 그의 방자함을 담은 일화들이 많은데, 나이 많은 상위직급자가 와도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홍국영의 문객 흉내를 내지 않으면 대부분의 관료들도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노론 청명당으로서 오랜 동지인 정민시, 소론 청류당 지도자 로서 역시 동지인 서명선, 그리고 청남계 정파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른바 절대권력을 유지하려다 인간으로서의 도덕성 자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19년(정조 3)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과 처음 만난 바로 그 날짜에 아무도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홍국영으로 하여금 '신이 한 번 대귈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하늘의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정계은퇴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 홍국영은 그 자신이 말한 대로, 다른 사람 같으면 관료로 임명 되기 위한 예비 시험인 진사(進士)에 급제해도 빠르다고 할 32세의 나이였다.


정조는 즉석에서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다시 있을 수있겠는가', '넷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혹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도 있게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흥국영에게 은퇴한 정계원로에게 주는 봉조하의 직함을 수여하고숙위소도 즉시 없애버렀다. 그의 갑작스런 은퇴결정에, 산림 송덕상과 김종후는 이를 만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바로 홍국영이 노론계의 의리를 대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들은 흡날 홍국영을 지지한 데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의 은퇴를 수수방관한대신과 고위직 관료들을 비난한 호서지역의 지도자 송덕상은, 국왕에대한 의리 문제에 어두웠다는 것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제거되었다. 경기지역의 지도자였던 김종후도 이후 그 명망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시재상으로서 그의 은퇴에 엉거주출한 태도를 취한 김상철(金尙喆) 등도이후 정국에서 배제되었다.


반면 홍국영을 무사히 은퇴시키는 것 자체가 그의 죄악을 덮어두는 은전이므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서명선, 정민시, 유언호(兪彦鎬), 이병모(李秉模)는 이후 정조의 신임을 받아 정책결정권의 핵심에까지 도달했다.


홍국영의 가장 강력한 우익이자 개인적으로도 친밀했고 당시 노론계관료세력 사이에서 뚜렷한 지도력을 발휘한 김종수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은퇴한 지 5개월 여가 지난 다음해 2월 홍국영을 만나 위로한 직후.도리어 홍국영의 처별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신호가 된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려고 노력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결정적인 원인은, 흥국영이 원빈 사망 후에도왕위계승권 문제에 간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는오히려 외척세력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등 정치원척을 투철하게 지키는 인물을 중심으로 탕평정치를 달성하려던 정조의 길에 결정적인 장애가된 것이 근본적인 이유다 홍국영의 세력은 그해 12월 백부인 홍락순마저 정계에서 추방됨으로써 거의 제거되었으며, 홍국영 자신도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는 처벌(t故歸團里1)을 받았고,동시에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다.



정계에서 배제된 근원적 이유

결국 그는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경륜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은 정치가였다.그래서 이전 시대와 같은 독점적이고 특권적 권력을 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도덕성마저 파탄나버린 것이다. 즉 언젠가는 정계에서 배제될 운명의 길을 택하여 걸은 것이다.


정계에서 은퇴한 흥국영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경기도 해변가나 동쪽과 서쪽으로 여기저기 분주하게 옮겨 다였다. 그러다가 동쪽바다 강릉 해안에 거처를 정했는데, 거기서 매일 술을 마시고 산에 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몇 달 만인 다음해 4월 병(울화병인 듯)을 얻어 33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홍국영같이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 그래도 큰 인물이라고 주목하고 합리화시키는 너그러움을 갖고 있는 것같다. 홍국영은 무한권력을 추구하여, 당시 사람들에게는 '도덕성' 자체를 부정당한 인물인데도 말이다. 오늘날의 역사물에서는 왜 도덕성 파탄 같은 주제가 예외 없이 무시되는 것일까? 오늘날의 시대정신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해서일까? 이러한 걱정이 필자 개인만의 지나친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홍국영과 이산(정조)의 다정한 모습

홍국영과 정조는 이런 사이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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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 사도세자는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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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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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무인(武人) 정조대왕



▣방송 : 2007. 10. 27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작가 : 정윤미



태조 이성계를 능가하는
무인(武人) 군주, 정조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군권을 거머쥐다.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는가!


 

정조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1.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아온 정조의 모습은 거짓이다!정조의 실제 외모는 어땠을까?
얌전한 학자군주로만 기억되어온 정조의 진실을 밝힌다.
그의 실제 얼굴은 우리가 이제껏 교과서에서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 구황실의 족보 <선원보략
>
에 담겨있는 정조의 어진.
문예군주보다는 늠름하고 활달한 무사의 기상이 뿜어져 나온다.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고, 24기예를 집대성해 <무예도보통지>와 진법서<병학통>을 편찬한 그는 무예에 관한 전문가였다.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조직해 직접 군사훈련을 진두지휘하고, 조선의 군권을 장악했던 정조대왕.
그는 조선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정조표준영정>                        <정조의 실제모습>

2. 신기에 가까운 활쏘기 실력, 신궁(神弓) 정조에 관한 진실.

"작은 가죽과녁에 1순을 쏘아 5발을 맞혀 7점을 얻고…
마치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 어사고풍첩 中 >


정조의 활쏘기 실력이 기록되어있는 <어사고풍첩>.
1792년 10월 30일의 기록에는 50발 중 49발을 맞춘 성적이 남아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정조는 과녁뿐 아니라 작은 부채, 곤봉, 편곤까지도 명중시킨 신궁(神弓)이었다.
"한국사 傳"에서는 정조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한국 최고의 국궁선수가 활쏘기를 재현해 당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을 검증해보았다.

 

조선 최고의 군사력을 키운 정조.
그는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나!

스스로 조선의 군권을 장악한 임금, 정조.
그는 우선 무예가 출중한 무사들을 직접 선발해, 자신의 호위를 맡을 새로운 군대를 만들었다. 장용영, 정조의 친위부대였다.
정조는 한.중.일 삼국의 무예를 모은 당대 최고의 무예, '십팔기'를 수련시키고, 무사 개개인의 무사실력을 일일이 확인하며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조선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게 된 장용영. 그것은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의미했다.

노론들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조선에서 정조 스스로 절대적인 왕권을 쥐게 된 것이다.


 

신하의 나라'에 선 왕. 정조의 정치적 승부수 "武(무예)"

정조는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武士)였다.
특히 활쏘기 실력에 있어서만큼은 조선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명중시키기도 했는데, 마지막 한 발을 맞추지 않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만점에 이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그는 장용영 군사들이 단련한 무예십팔기에 마상무예 6기를 더해 '24기예'를 완성시키고, 이를 <무예도보통지>에 기록하여 많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스스로 무사의 위용을 갖추고, 군대를 진두지휘하기 시작한 정조대왕.
그가 노론의 뿌리 깊은 권력을 잘라낼 정치적 승부수, 그것은 바로 무예(武藝)였다.


정조가 무사(武士)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 어린 시절, 공포와 절망의 기록 『존현각 일기』

"나는 일찍 아비를 여의고 죽었어야 하나 죽지 않은 사람."
-존현각일기 中-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은 정조.
그는 아버지의 역적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조정에서
늘 위협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손 시절, 어린 정조의 절박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존현각 일기>. 그 일기 속에는 노론에게 당한 노골적인 협박,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으로 인해 옷을 벗고 잠들지 못하는 불안함, 그리고 궁녀와 내시까지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드러나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노론대신들의 "손안의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조의 무력시위, 화성행차. 그리고 의문의 죽음...

1795년, 정조는 3천여 명의 장용영 군사를 포함한 6천여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화성을 향했다. 여전히 노론 세력이 우세한 서울을 떠나 화성에서 새로운 조선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그는 갑옷을 입고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벌였다. 이는 노론을 향한 무력시위였다. 노론신하들은 정조의 행보에 치를 떨며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혈서를 쓰기까지 했다.
정조와 노론의 대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무렵, 정조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오회연교를 내린 지 채 한달도 되지 않은때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은 사라져버린 것일까?

          <정조가 12세 때 쓴 친필
"선을 지키고 악을 막는 게 공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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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 2007. 7. 21(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윤한용PD
▣작가 : 정윤미



“3살 때부터 시작된 조기교육!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아들의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애민군주, 중흥군주,
18세기 조선 르네상스의 기반 마련,

왕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영조.

과연 아버지로서는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비극적 사건,
사도세자의 죽음!

역사 속에서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
영조와 사도세자.

그들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바라본다.





아들을 크게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 조기교육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당쟁의 한 가운데서 겪은 수많은 정치적 위기.
영조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딛고 평생 '근신'이란 두 글자를 실천한 애민군주였다.
신문고를 설치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균역법을 통해 공역 부담을 줄였다.

조선 왕조의 입지전적인 임금, 영조.

영조 나이 마흔에 얻은 조선 왕통의 유일한 후계자, 사도세자. 그리고 세 살 때부터 시작된 유례없는 왕세자 조기교육. 영조는 세자교육관을 직접 선발하고, 구체적인 공부내용과 방법을 지시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문답하여 세자의 능력을 시험하곤 하였다. 또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제자성록>, <어제상훈> 등의 교재를 직접 저술하기까지 했다.


대리청정으로 인해 만사가 탈이 났다 <한중록中>


영조는 즉위 때부터 노론에 의해 선택된 '노론의 임금'이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과 같이 당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던 아버지, 영조. 1749년, 15세의 아들은 아버지를 대신해 옥좌에 앉게 된다. 당쟁해소를 위한 영조의 승부수, 대리청정!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성격차이를 넘어 정치적 입장까지 갈라지기 시작한다.

1755년, 결정적으로 부자 갈등의 씨앗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승정원일기>를 보면 당시의 내용이 집중적으로 지워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대화의 단절,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가로막은 벽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멀어진 가운데 직접 만나는 기회조차 줄어들게 된다. 아들이 부왕의 문안을 미루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왕과 왕세자 사이의 멀어진 틈.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력이 있었다.
노론은 소론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연일 상소를 올렸지만 세자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부종(不從: 따르지 않겠다)"
이 때 부터 노론은 세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부자의 관계가 멀어진 가운데 왕세자가 낙선당에 불을 지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온갖 비행들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상소가 계속해서 올라온다. 게다가 이 모두가 아들의 정신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되는데...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킬까 불안했고, 그 지독한 꾸짖음이 두려웠다.


"동궁께서 평상시에도 입시하라는 명령만 들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며 비록 쉽게 알고 있는 일이라도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너무 엄외한 데에 연유한 것입니다."
                                                                           -영조33(1757)

아버지를 뵙고 물러나오던 중 까무라쳐서 기절한 사건도 있었다.
특히 노론, 소론과 맞대면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마다 옷을 찢어버리는 등의 돌출행동을 보인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며
민망해 할 따름입니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中 (1755년 12월 8일)

그러나 아픈 와중에도 장인에게 남한형지와 양향군무도서(한강 이남의 군사, 지도 등에 관한 책)와 같은 책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는 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1755년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여야만 했는가?

"아무래도 내가 오늘 죽는가 보오..."
1762년 5월 13일, 아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창경궁 앞뜰로 간 아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나무뒤주.

궁궐문을 봉쇄하고, 조정 대신들조차 출입하지 못한 사도세자 죽음의 현장!
당시 바로 그 곳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다.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설서, 권정침! "한국사 傳"에서는 임오화변의 목격자, 권정침의 문집 <평암집>을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풀어보았다.
<평암집> 그 날, 창경궁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아버지, 영조

아들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고 만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그는 아들이 죽은 뒤 내린 시호. 사도(思悼)... '안타깝게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할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 오늘처럼 마음이 괴롭기란 진실로 태어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장헌대왕지문(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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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첫 공개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사도세자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들이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사도세자의 병세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명확히 설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권두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도쿄()대에서 조선시대 영조 장조 정조 3대의 편지를 촬영한 흑백사진 자료 11첩을 발견해 ‘장조’인 사도세자의 편지 내용을 번역했다고 14일 밝혔다.

현재 남아 있는 사도세자의 편지는 거의 없으며 알려진 자료도 개인적 고백이 아닌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다.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 장인에게 보낸 편지
 
권 교수에 따르면 1910년대 초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홍봉한의 5대손인 홍승두 집안의 원본을 거간꾼에게서 구입해 일본에 들여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현립도서관에 보관돼 있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다가와 고조()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 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혜경궁 홍씨가 ‘친정에 있는 3대 임금의 서적과 서찰을 첩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라’고 밝혔다는 홍씨 가문의 글이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임을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전했다.

비운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태어나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아들 정조가 장헌()이란 이름을 올렸고 1899년 고종 때 다시 장조()로 추존됐다. 아내인 혜경궁 홍씨는 조선왕실 여인의 회고록으로 유명한 ‘한중록’에서 남편의 비화를 소개했다.


○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가 만 14세인 1749년 어느 날 장인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미친 듯합니다” 탄식▼

권 교수는 “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도 이 같은 내용이 전하지만 이 편지는 사도세자가 직접 고백하는 내용이므로 아버지와의 갈등을 더 정확히 보여 준다는 설명이다. 안대회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사도세자에 관해 아들 정조가 만든 문집은 있지만 개인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며 “이 편지가 사도세자의 친필이 맞는다면 역사의 모호한 부분을 해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묘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융릉.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의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의 고백이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궁내에서 의관에게 자신의 병세를 전하면 갈등을 빚고 있는 아버지 영조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역력히 나타난다.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모일로 추정)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 끊임없는 국정에 대한 관심

사도세자는 편지를 통해 병중에도 나라살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나타냈다. 사도세자는 병을 앓을 때는 불안한 심리를 보이다가도 이성을 되찾을 때는 합리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에 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1755년 11월 회일)

사도세자는 편지 여러 통을 장인에게 보내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한 뒤 학자들과 자료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토론한다. 권 교수는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장모에게 바친 제문 등도 번역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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