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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평가가 갈리는 왕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

요즘에는 꽤 좋은 평가가 더 많은 듯 하지만 (세종의 아버지이자 딱 필요한 만큼만 숙청)

나 어릴때만 해도 상당히 많은 책에서 이방원은 나쁘게 평가되어 있었다.

https://youtu.be/c1O0H_49G2U?si=R10HWOlklVR1fJEE

 

태종 이방원을 가장 많이 알린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 이방원

 

https://youtu.be/MrAn80VnsUQ?si=undGWeVdUlEBTTW1

 

https://youtu.be/J97sPTGXbV4?si=sAQUJh8AkNARItij

 

 

권력욕에 미쳐서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죽이고,

친아버지를 유폐하고,

친동생을 죽이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파헤치고,

왕자의 난을 두번이나 일으키고,

자신을 도와준 처가를 몰살시킨,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에게도 잔인했던 피가 아닌 철로 이루어진 듯한 사람.

 

이러한 이방원에게도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으니... 

공적인 면, 특히 권력을 넘보는 듯한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잔인하고 끝까지 철퇴를 내렸으나,

사적으로는 의외로 허술하고, 아랫 사람의 잘못도 눈감아주는 관용과 너그러움도 있었다.

 

============================================= 아래 글 출처는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기사혜정교 근처의 아동들이 주상·효령군·충녕군의 이름을 빌어 타구 놀이를 하다

『 명하여 형조(刑曹)의 계본(啓本)을 불태우게 하였다. 혜정교(惠正橋) 거리에 아동 곽금(郭金)·막금(莫金)·막승(莫升)·덕중(德中) 등이 있어 타구(打毬) 놀이를 하는데, 매 구(毬)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하나는 효령군(孝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충녕군(忠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伴人)이라 하였다. 서로 치다가 구(毬) 하나가 다리 밑의 물로 굴러 들어가자,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
하였다. 효령군의 유모(乳母)가 마침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 대사헌 정역(鄭易)에게 고하였다. 정역이 형조에 고하여 옥에 가두고 물으니, 말하기를,
“곽금(郭金)이 제창하여 장난한 지 이미 3일입니다.”
하였다. 행행(行幸)하는 때이므로 아뢰지 못하고,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요언률(妖言律)로써 갖추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모두 10세에 불과하니, 요언(妖言)을 조작한 것으로 논함은 불가하며, 또 동요(童謠)라 이를 수도 없다. 예전의 이른 바 동요란 이런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동요라 하더라도 또한 무죄(無罪)이니, 동요의 율은 즉시 대언사(代言司)로 하여금 형조와 함께 불태우게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였다.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

 


공에 다가 임금 이름 붙여서 발로 차는 아이들 용서...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기사시골 사람 손귀생이 창덕궁을 구경하고 광연루까지 들어와 구금되었으나 석방하다

『손귀생(孫貴生) 등 두 사람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손귀생 등은 시골 사람인데, 창덕궁(昌德宮)을 구경하고 들어와서 광연루(廣延樓)의 못 아래에 이르렀었다. 순금사(巡禁司)에서 장(杖) 80대로 조율(照律)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무지한 시골 사람이니 방면(放免)하는 것이 옳다. 예전에 조서(趙敍)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 시골 선비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와 숙직하고 이른 아침에 내 보냈었는데, 그 사람이 갈 길을 잃어서 곧바로 침전(寢殿)의 뜰안으로 들어왔었다. 궁인(宮人)들이 놀라서 꾸짖으니, 대답하기를, ‘나가려고 한 것뿐입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무지한 자이다. 좌우(左右)에서 들으면 반드시 법대로 처치하도록 청할 것이니, 빨리 놓아보내서 가게 하고, 이 말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었는데, 바로 이와 똑같은 일이다.”』

술취해서 궁궐에 잘못 들어온 백성 용서...


태종 11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4월 9일(기사) 2번째기사  『해온정(解慍亭)을 창덕궁(昌德宮) 동북 모퉁이에 지었다. 임금이 지신사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이제 새 정자(亭子)가 이룩되어 권근(權近)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였더니, 청녕(淸寧)으로 명명(命名)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저 하늘이 맑고 땅이 편하다[天淸地寧]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적당하지 못한 듯하여, 내가 해온(解慍)으로 고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좌우에서 말하기를,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이 말을 내면 신하들이 반드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추켜 세우는구나. 다시 권근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물어보도록 하니, 권근이,
“좋습니다.”
하였으므로, 이에 새 정자를 명명하였다.』


 혜온정이 만들어지자, 태종은 황희 등에게 "이 건물 이름을 혜온정으로 하자. 어떠냐?"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신하들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이고, 아주 좋습니다."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태종은 씩 웃으면서
"얘네들은 임금이 뭐라고 말만 하면 모두 예, 예, 좋습니다. 이런 말만 하는구만."
하고 권근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내뱉는 말이지만 신하들에게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발언 입니다.

아부하는 신하들에게 일침 날리는 왕;


자세한 글은 아래 출처에서 확인... 

==================================

출처는 https://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2&id=4643945

 

이방원이 그래도 인간적인 매력은 있는 사람이었죠 : MLBPARK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

mlbpark.donga.com

 

이러한 이방원의 강한 매력과 큰 아들 양녕대군과의 갈등을  잘 그린 드라마가 용의 눈물,

약하고 인간적인 고뇌하는 모습을 잘 그린 드라마는 태종 이방원 

 

 

태종 이방원이 왕되기 전에 겪는 여러가지 일들을 재미있게 표현한 글 모음

 

1화 https://theqoo.net/square/2272619492

 

더쿠 - 아빠가 쿠데타일으켰는데 청와대로 정상출근한 5급사무관ㄷㄷㄷㄷ

군인 아빠가 갑자기 쿠데타일으킴 https://img.theqoo.net/fKHHR 아빠가 그랬건말건 출근은 해야하는 K-직장인 방원이 https://img.theqoo.net/zVjdK 울공주님들 조심히 외할아버지네 가있어 아빠다녀올게~ 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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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https://theqoo.net/square/2273769433

 

더쿠 - 한밤중에 부하직원들이랑 집에 찾아온 직장상사... 먹고살기 정말 힘드네요.pann

오늘도 관청에 출근한 K-직장인 방원이 https://img.theqoo.net/lQcfl 아빠 쿠데타 후로 직장내 따돌림 당하는중 https://img.theqoo.net/pGOTx ㅈ같네...고용노동부 1350에 신고할까... 했지만 처자식 생각하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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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https://theqoo.net/square/2281346501

 

더쿠 - 기싸움 오지는 국무회의에 참석한 K-직장인 방원이.jpg

자객 잠입했단 소식듣고 집으로 달려가는 방원이 그런데 오늘은 https://img.theqoo.net/mtgWv 축제 기간이었던것임 https://img.theqoo.net/cLgTs 불쇼하고 난리남 https://img.theqoo.net/CFwtn 환장 https://img.theqoo.ne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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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https://theqoo.net/square/2282980382

 

더쿠 - 민심 떡락한 어느날 이리저리 구르는 K-미니역적 방원이.jpg

우왕창왕 주살하고 이성계 민심떡락한 어느날 https://img.theqoo.net/pOlxm 오픈카 끌고나왔다가 비맞는 방원이 https://img.theqoo.net/uOqOa 갓길에 주차하고 비 피하려는데 큰형등장 https://img.theqoo.net/kjY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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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https://theqoo.net/square/2290646129

 

더쿠 - 안그래도 복잡한 와중에 삼년상 치르게 된 K-효자 방원이.jpg

맘바꿔 다시 개경으로 돌아온 성계 https://img.theqoo.net/LYMGs 하필 몽주를 만남 https://img.theqoo.net/LszDk 나 왕하려구ㅎㅎ 너도 같이하면 참 좋을텐데 좋은말로 넌지시 떠보지만 https://img.theqoo.net/AvaM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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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https://theqoo.net/square/2298416919

 

더쿠 - 조장하실분...? 숨막히는 눈치싸움에 고통받는 K-조장 방원이.jpg

결국 몽주를 죽이지 못한 현 조정 상황은 팀 캡틴고려 vs 팀 회군맨 https://img.theqoo.net/XVWdm 확연히 드러나는 쪽수차이 https://img.theqoo.net/fMitW 성계야 너 내 아들 마중 좀 다녀와라 https://img.theqoo.ne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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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https://theqoo.net/square/2299480887

 

더쿠 - 기껏 밥상 다 차려줬더니 집에서 쫓겨난 K-총대 방원이.jpg

몽주킬 팀플 조장이 된 방원이 https://img.theqoo.net/eGbti 공동발표 할사람 혹시 있음? 내가책임지겠음 https://img.theqoo.net/VDTLL 철퇴맨 영규가 자원 한편 성계 병문안 가려는 몽주를 대신이 말림 http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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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https://theqoo.net/square/2306393916

 

더쿠 - 드디어 아버지가 왕좌에 올랐지만 미운털박혀 서러운 K-방원이.jpg

고려 왕대비를 압박해 국새를 받아낸 신하들 https://img.theqoo.net/TYXFw 성계야 너가 원하던 국새받아왔어 https://img.theqoo.net/AvwAJ 염치가있지 어떻게 덥석 받아 https://img.theqoo.net/OgAXt 무릎꿇었다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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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https://theqoo.net/square/2307219626

 

더쿠 - 드디어 시작된 세자자리 둘러싼 조선막장드라마 속 K-주인공 방원이.jpg

막내 방석이가 세자됐단 소식에 빡친 방원이 https://img.theqoo.net/UJvNM 뭐라고? 방석이가 세자라고? https://img.theqoo.net/FxoqG 울엄마 무시하는건데 가만히 있을거야? 의욕을 잃은 방과형 https://img.theq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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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https://theqoo.net/square/2314263205

 

더쿠 - 권모술수 판치는 와중에 죽을지도 모르는 명나라로 가게된 K-왕자 방원이.jpg

갑자기 방원이 집에 찾아온 강씨 https://img.theqoo.net/uJGnT 귀한 약재란다 https://img.theqoo.net/DVAkJ 이거먹고 금쪽이 낳아야지 https://img.theqoo.net/tMGgK 병주고 약주고임? https://img.theqoo.net/HwGbE 중전마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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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https://theqoo.net/2315181298

 

더쿠 - 6개월 해외출장길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K-사신 방원이.jpg

방원이가 명나라로 떠나고 https://img.theqoo.net/vPvni 그래도 자식이라고 걱정은 되는 모양 https://img.theqoo.net/Orzph 중전마마에게 들려온 충격적 소식 https://img.theqoo.net/mHLIY 내시랑 세자빈이 간통함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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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 지우지 말길... 제발..

 

요즘 드라마는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하던데... 

재밌는 사극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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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참으로 훌륭한 필체.



태조


세종


문종

문종문종

세조세조

성종성종

선조선조

인조인조

효종효종

현종현종

숙종숙종

경종경종

정조정조

효명세자(익종)효명세자(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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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여느 임금들보다 암행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드라마에서 이순이 자꾸 나가는 것도 나름 이해가 되네요.

암튼..  숙종시대 일화 및 숙종의 암행에 대한 일화를 찾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찾았습니다.


#1. 숙종이 명릉에 묻힌 이유는?  

숙종대왕(조선조 19대왕)이, 수원성 고개 아랫쪽 냇가(지금 수원천 부근)를 지날 무렵, 허름한 시골 총각이 관 하나를 옆에 놔두고 슬피 울면서 땅을 파고 있는게 아닌가. 

상을 당해 묘를 쓰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파는 족족 물이 스며 나오는 냇가에 묘자리를 파고 있는 더벅머리 총각의 처량한 모습에 '아무리 가난하고 땅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송장을 물속에 넣으려고 하는지 희한도 하다'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며 다가갔다.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 것인고?"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여기는 왜 파고 있는고?" (짐짓 알면서 딴청으로 묻는다) 

"묘를 쓰려고 합니다." (짐작은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숙종이다.) 

"여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이리로 데려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이신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총각은 옷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자신의 곤혹스런 처지를 처음 보는 양반나리에게 하소연하듯 아뢰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하니 갈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 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 번 황당했다. 

아침에는 어머님이 돌아가셨지. 유명한 지관이 냇가에 묘를 쓰라고 했지. 이번에는 왠 선비가 갑자기 나타나 수원부에 서찰을 전하라 하지.도무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추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가게 되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되지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총각은 하늘이 노래졌다.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냇가에서 자기 어머니 시신을 지키고 서 있을 임금을 생각하니, 황송하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단단히 혼을 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 갈처사가 산다는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 찌그러져가는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 

"이리 오너라" 

".............."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 노인네 행색이다. 콧구멍만한 초라한 방이라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묻는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당치나 한 일이요? 골탕을 먹이는 것도 유분수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 

숙종의 참았던 감정에 어느새 격해져서 목소리가 커졌다. 
갈씨 또한 촌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잠시 두고 보자.') 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받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코도 모르면 잠자코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숙종은 갈처사의 대갈일성에 얼마나 놀랬던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공손해 진다.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 이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귀찮게 떠들기만 하네" 

"아니, 무슨 말씀인지" 


숙종은 이제 주눅이 들어 있었다. 

"저 아래 것들은 남 속이고 도둑질이나 해 가지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 가져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님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나랏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기가 죽은 선비에게 이젠 당당하게 반말까지 하는 갈처사, 숙종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이런 신통한 사람을 일찍이 만나본 적이 없었다. 꿈속을 해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면서 방 귀퉁이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한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임금을 알아본 것이다. 

"여보게.... 갈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오"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처사가 잡아준 숙종대왕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의 서오릉(西五陵)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대왕은 갈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 


신묘 하도다 갈처사여 
냇가에 묘를 쓰고 산마루 언덕에 초막을 지으니 

음택 명당이 냇가에 있고, 

양택 명당은 산마루에도 있구나. 


임금을 호통 치면서도 죄가 되지 않으니 

풍수의 조화는 국법도 넘어가네. 


볼품없는 초라한 몸이라도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하고 
나랏님께 충성하노니 

그 이름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리성.拜 

.............................................................. 



#2. 

조선시대 숙종 임금의 암행(暗行)에 관한 일화는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성들의 민심을 파악하고자 민간복으로 변장하고 암행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고래등같은 어느 관료의 집에 다가갔습니다. 인적이 끊어지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 했던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숙종은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움막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습니다. 

그 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면서 손주와 이야기 하고 있고, 할머니는 짚을 고르며 거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만들다가 놓은 망태기가 한편에 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습니다. 올망졸망한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얼굴이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띈 얼굴로 
“빚 갚으며 저축하면서 부자로 삽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 



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듯 한 움막에서 살며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이 의아해 몰래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그 집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예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웃으면서 대답했지요. 


"부모님 봉양하는 것이 곧 빚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 아니요. 어떻게 이 보다 더 부자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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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소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 초상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ㅋ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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