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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과 나에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의 원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알아보자.


세계일보 기사 일부 발췌: 원 출처는 제목에 링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SBS 사극 '왕과 나' 계기로 본 환관들의 세계


◆환관이 국왕 독살 주도?=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종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 점에서 독살설을 완전 허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재야 학자 이덕일씨는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등 600년 조선사에서 왕권과 신권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에 특히 국왕 독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예종 때 역시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 공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하지만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환관이 독약으로 영조(6년)를 살해하려 했던 모반사건을 연구한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조선 고종황제 폐위를 지켜보는 내시들. 경인문화사 제공

◆김처선과 성종의 관계는=극중 인물 김처선은 단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에 우호적이던 환관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김처선 역시 이때 지방 관노로 유배된다. 2년 뒤 복직된 그는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이른다. 특히 연산군 11년에 임금의 실정에 대해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직언한 충신’으로 알려진 김처선의 캐릭터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종이 반정 성공 후 김처선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청을 수차례 거부한 것도 그의 성품이 강직해서가 아니라 당시 만취해 실언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를 놓고 김처선과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된 성종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성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환관을 우대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 개입만은 철저히 막았다. 정희흥 교수는 “성종은 승정원으로 일원화된 왕명 출납을 편의상 환관이 대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등 환관의 정치 금지를 제도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이하 생략 -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내시들은 일부 악명높은 이름들(김자원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권력이 미약한 편이었고 왕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김처선에 대해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바램이다. 이는 비단 김처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사극의 주인공화 하면서 나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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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고무신처럼 수놓인 꽃신들... 참 이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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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발들의 사연을 아십니까?





EBS 지식채널e,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


EBS 지식채널e 영상에서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라는 짧은 영상을 본 후 나는 너무 놀라서 5분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냥 묶어서 성장이 안되어서 작은 정도인줄만 알고 있던 나에게 뼈가 부러져서 휠 정도로 꺾인 발은 충격이었고, 성인 여성의 발이 10cm도 안되게 만들었다는 진실은 어떤 공포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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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쏙 들어간 부분을 남자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한다-_-;;



처음에는 귀족들의 사치로만 퍼지던 풍습이 나중에는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었는데.. 무서운 것은 귀족층 여자들은 그나마 하루종일 하녀들이 일을 해주니 다행이지만 서민층 여자들은 무릎으로 기어다니면서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저 발을 해가지고는 어딜 갈 수가 없었겠지..
일도 할 수가 없었겠지..

게다가 마을마다 전족 대회가 열려서 누구 발이 더 작은가 점점 더 심한 경쟁을 하고,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발이 아주 크거나 아주 흉측하게 생긴 것으로 소문이 나서 시집도 못가게 되니.. 딸을 사랑할수록 그 어미는 더욱 심한 전족을 시켰다고 한다.

정말.. 무섭다.. 무서워.....ㅠㅠ



중국언론에 실린 중국인들까지도 충격에 몰아넣은 전족 사진들







_M#]




세상에.. 세상에.. ㅜㅜ ㅠㅠ 무서워라..
어쩌면 저런 짓을 했을까...

단순한 성적 유희를 위해서 모든 여자의 뼈를 부러뜨리다니..
저게 1000년이나 유행하다니.....

당대 유명 시인들이 저걸 낭만이랍시고 여성의 미를 예찬하는 시를 수백 수를 남겼더구나.

망할 놈들아.
작은 발이 그렇게 귀여우면 니들 발이나 자르든가.

왜? 니들은 남자니까 큰 게 좋아?
그러면 니들은 늘리면 되겠네!!

다리뼈가 부러지든 말든 다리 늘려서 철심 박지 그랬니?
이 자식들아.!!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풍습인 전족이 저렇게 유행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으며, 여성을 오직 성적인 도구, 유희의 대상으로서만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과거 유럽에서도 다른 형태의 전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과도한 보정 코르셋 때문에 철사에 숨이 막혀 죽거나 갈비뼈가 부러져 죽은 여성들도 있었고, 프랑스 여성들은 연약해 보이기 위해서 겨울에도 속살이 비치는 얇은 옷에 물까지 끼얹고 다니다가 폐렴걸려 죽었다는데..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핍박받지 않은 역사가 없구나.....

여자들은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아왔을까..ㅜㅜㅠㅠ


지식채널e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러한 악습이 현대의 여성에게도 이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뚱뚱한 여성, 혹은 아름답지 않은 여성을 비하와 웃음거리의 대상으로 만드는 수많은 TV프로들, 아름다움만이 여성의 미덕인 것으로 주입시키는 이 시대... 여성에게 미를 강요하는 이 시대가 수많은 거식증 환자들, 다이어트 중독자들, 성형중독자들을 만든 게 아닌가.

여성의 몸은 사랑받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담고 있는 그릇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멀면 마음의 눈으로 보려나..  그렇게 되면 목소리 좋은 사람만 선택되려나. 훗.)


티비프로도, 남자분들도, 여자분들도.... 상대방을, 자신을, 눈으로만 판단하지 말길 바라며,  
21세기형 전족이 사라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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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가 임금의 용안에 흉터자국을 내어 폐비된 사건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일 지라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즉,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입혀서 폐위된 황후의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내려오고 있으니 이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송나라(960-1279)의 4대 황제는 인종황제(仁宗皇帝 : 재위 1022 - 1063)때의 일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인종은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이 활약하던 시대에 통치했던 황제이다. 사극 <포청천>을 보면 알겠지만, 살쾡이 태자의 사건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임금이다.(살쾡이 태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에서 검색하시면, 제가 올려놓은 지식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인종은 송나라가 최고 잘나가던 시기에 재위했던 현군(賢君)이었다.


인종의 첫황후는 곽씨(郭氏)였다. 곽황후는 인종이 태자였을 떄 황태자비가 된 어찌보면 조강지처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곽황후는 원래가 나서기를 좋아하여 항상 조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기를 좋아하였다. 인종이 생모였던 신비 이씨(宸妃 李氏 : 진종의 후궁이었다)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할 때, 적모(嫡母)였던 장헌황후 유씨(章獻皇后 劉氏)의 섭정기에 총애를 받았던 재상들을 좌천시켰다. 여기에는 여이간(呂夷簡/978 - 1043)이라는 재상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여이간은 장헌황후에게 인종의 생모가 죽었을 당시 후장(厚葬)할 것을 간한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천된 이유는 곽황후(郭皇后)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이간은 파면된 이유를 알아보고자 환관 염문응(閻文應)을 사주해서 어떻게 된 내막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곽황후가 인종에게 자신을 좌천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염문응과 함꼐 곽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우선 여이간은 자신이 장의황후의 장례를 위해 애쓴 사실을 인종에게 부각시켰는데, 그 공로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이간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자 염문응과 더욱 밀착해서 곽황후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했다.


바로 이 때 인종의 처첩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는데, 염문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당시 인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미인(楊美人)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미인(尙美人)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곽황후에 대처할 때는 단짝이 되었다. 따라서 곽황후와 두 미인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게다가 곽황후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툭하면 두 미인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곽황후가 인종 앞에서 상미인을 나무랐는데, 상미인은 인종만 믿고서 곽황후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 곽황후는 그만 분통이 터져서 상미인의 빰을 때렸다. 상미인은 감히 맞서지를 못하고 울며불며 인종의 뒤에 몸을 숨겼다. 곽황후는 쫓아가서 손을 날렸는데, 실수로 인종의 목을 때려서 손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크게 났다. 인종이 크게 화를 내자 곽황후도 속이 얼어붙었다. 곽황후가 얼른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인종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관 염문응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포착하고, 그는 불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곽황후의 고약한 점을 인종에게 고자질해서 마침내 인종으로 하여금 곽황후를 폐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종은 정이 많고 유약한 사람인지라 황후를 폐할 경우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염문응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어찌할 것이냐"

염문응은 당나라때 고종이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웠던 고사를 들먹이며 그 때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말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황후 폐립은 본래 폐하의 가정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시겠다면 그 또한 영명하신 조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는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재상 여이간만을 불러서 그가 대표로 확인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이 이의가 없다면 다른 대신들도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인종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즉시 여이간을 궁중으로 불러들었다. 여이간은 이미 염문응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의 목에 난 상처를 보자 즉시 마음이 아픈 척 했다. 그리고 옛사례를 들어가면서 곽황후를 폐하라고 권유했으며, 이 일을 반대하는 대신이 있다면, 군신간의 대의를 모르는 자이므로 관직을 파면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인종은 황후폐립을 공론에 붙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인종과 여이간의 뜻에 영합하였으나, 어사대 간관(諫官)이었던 범중엄(范仲淹/990 - 1053)은 그의 직책상 경망하게 황후를 폐할 것이 아니라고 인종에게 극간하였다. 그러나 여이간은 범중엄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고, 범중엄에 동조하는 간관들을 범중엄의 도당으로 낙인찍어 모조리 탄압하고 좌천시켜버리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여이간의 농간에 의해 인종은 어쨌든 곽황후를 폐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곽황후가 임금의 용체에 상처를 입혀서가 아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 때가 명도 2년(1033년)의 일이다.


곽황후를 폐한 후 염문응은 더욱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궁의 비빈들도 그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나 상미인과 양미인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했다. 두 미인은 원래 경박한 자들이어서 곽황후를 폐한 후에는 인종에게 밀착하여 매일같이 인종의 시중을 들었다. 결국 인종은 병상에 드러눕게 되는데(쉽게 말하면,,,매일 두 미인과 방사를 벌린 셈이지요)궁정 안팎에서는 두 미인이 너무 방탕해서 인종을 해쳤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염문응은 황제로부터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을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여러차례 인종에게 건강에 유의할 것과 두 미인을 멀리할 것을 권유했다. 인종은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승낙했다. 염문응은 인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미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두 미인을 강제로 수레에 실어서 궁전 밖으로 내쳤다. 두 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으나 염문응이 인종의 뜻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튿날 염문응은 인종에게 두 미인을 내쫒은 일을 보고했다. 인종은 깜짝 놀랐서 후회했으나, 이미 쫓아낸 사람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어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종은 건강이 호전되자 염문응의 충성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고, 조정 안팎에서도 염문응을 나라에 충성하는 환관이라고 했다. 두 미인을 축출한 후 인종은 다시 곽황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곽황후를 다시 황후로 복위시킬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염문응은 그 소문을 듣고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씨가 복귀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곽황후를 죽이려 했다. 마침 궁중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머물던 곽황후가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렸는데, 염문응은 의사를 협박하여 병에 맞지 않는 처방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곽씨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곽황후를 죽인 염문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권력을 등에 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사람을 해쳐서 인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어사대 간관의 탄핵을 받아 귀양지인 상주(相州)에서 죽었다.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1. 곽황후가 그렇게 죽은 뒤 인종은 후궁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들을 반성하고, 명문가의 조신한 처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개국공신 조빈(曺彬)의 손녀였던 광헌자성황후 조씨(光獻慈聖皇后 曺氏)였다. 역시나 그녀는 인종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항상 예의와 법도를 잃지 않았다.

2. 여이간이 범중엄을 축출한 이후 벌여져던 10년간의 당쟁을 경력의 당의<慶曆黨議>라고 한다. 1033년 범중엄을 좌천시킴으로써 여이간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이 보였으나 1034년 다시 범중엄은 컴백하여 여전히 여이간을 비평하다가 1036년 다시 여이간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때 윤수(尹洙), 구양수(歐陽修) 등도 같이 축출되었다. 조정의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은 범중엄의 편에 서고, 여이간의 편에는 왕공진(王拱辰), 하병(夏倂)등이 있었다. 여이간이 10년간의 재상임기를 마치고 병으로 은퇴하자, 조정은 범중엄 파에게 장악되어 갔다. 이 때 구양수가 범중엄의 당을 진붕(眞朋 : 군자의 당), 여이간의 당을 위붕(僞朋 : 소인의 당)이라고 정의하였고, 황제는 위붕을 배척하고 진붕의 당과 같이 정치해야한다고 <붕당론>에서 설파하였다. 이것이 송대 붕당정치의 시작이고, 이것이 후대에 신법-구법당의 대립 더 멀리는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계속해서 간간히 중국의 역사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제를 중심으로 올려보겠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참고 <宋史, 후비열전> http://blog.naver.com/ilove_sungho(본인의 블로그)

=========> 이 사람은 이 글을 퍼갈 때, 반드시 출처를 밝히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네이버에서 탈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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