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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소개



정조의 비밀편지 299통 첫 공개




과격한 언사·노회한 정치··· 기존의 성군 이미지와 거리
다혈질적 성향 반영하듯 비속어·구어 남발 '눈길'
각 당파 원격조정 등 탕평 구도도 통념과는 차이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 그리고 조선 후기 정치구도는 어떻게 짜여 있었을까.



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조선 22대왕 정조가 신하에게 보낸 비밀편지가 발견됐다. 정조의 꼼꼼한 성격, 막후정치의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가 친필로 쓴 299통의 편지를 공개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작성된 편지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의 지도자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다.


정조는 편지를 없애라는 지시를 계속 남겼다. “불에 태워라”, “찢어버려라”, “세초하든지 돌려보내든지 하라”는 등의 문구가 다수 확인된다. 하지만 심환지는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없애라는 정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어찰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어찰을 받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어찰의 작성 시기도 명확하게 남겼다.


편지를 통해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를 자기 사람로 만들려던 정조의 노력을 엿 볼수 있다. 정조는 자신의 건강 상태 같은 기밀도 편지 첫머리에 써서 알려줘 심환지에게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곽란(癨亂)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며칠 동안 괴롭게 앓고 있다. 정사년(1797) 1월 5일.”

“며칠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놓인다. 나는 시사(時事)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마다 그저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게 만들 뿐이다. 불은 심장에 속하니, 여기에 따라 眼花가 나을 기미가 없으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동문(洞門) 무오년(1798) 7월8일.”



격정적인 군주, 정조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이 9일 발굴해 공개한 정조의 비밀 편지는 지금껏 알려져 있던 정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탕평책을 시행하고 문치(文治)를 내세워 '개혁 군주'이자 '실학(實學) 군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 정조다.


그러나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가 과격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며, 정치적 공작에도 상당히 능한 임금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정조가 노론(老論) 벽파(僻派ㆍ다수 강경파)와 대립하면서 남인(南人), 노론 시파(時派ㆍ소수 온건파) 등을 고루 등용했다는 탕평(蕩平)의 정치구도도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개에 물린 꿩 신세'(犬囓之雉), '꽁무니 빼다'(拔尻), '마누라 장의'(抹樓下長衣)….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들이다. 정조는 이처럼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저잣거리의 표현이나 비속어도 가리지 않고 편지에 썼다.



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1757~1824)에게 '호로자식'(胡種子)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김매순(1776~1840)에 대해서는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과 김이영(金履永)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편지와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에 대해 주둥아리를 놀렸다. 정말 망령된 일이다”면서 비난을 퍼붓는 내용이다.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우의정 심환지 초상

심지어 한문 편지 한가운데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라는 부분이 보인다. 즉, 한글로 '뒤쥭박듁'(뒤죽박죽)이라고 갈겨 쓴 부분도 있다.  흥분해서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생각이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ㅋ




비밀스러운 편지임을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격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자료에도 정조가 현릉원(사도세자의 묘)을 참배하면서 감정이 북받쳐 우는 부분 등이 묘사돼 있지만,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훨씬 적나라한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담고 있다.



특히 구어를 마구 섞어 쓴 문체는 기존에 알려졌던 문장가 정조의 이미지와 판이하게 다르다. 공식 사서(史書)들은 정조가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에 대해 "글이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며 고쳐 쓸 것을 명할 정도로 문체에 있어서 엄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정치공학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와 더불어 정조의 노련한 정치력, 그리고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정치구도를 짐작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편지가 던지는 가장 큰 의문은, 정조가 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와 내밀한 서신 교환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노론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드러내놓고 반대했던 세력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단편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며 "정조도 1795년부터는 벽파를 중요한 세력으로 인정하고 이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은 "정조는 정치적 수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며 "심환지를 자기 심복으로 여기지 않았더라도, 친밀감을 담은 편지를 통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편지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내는 약품 물목을 적은 것, 심환지의 아들이 과거 시험에 떨어지자 안타까워 하는 것 등도 포함돼 있다.


심환지가 "즉시 불태워버려라"는 정조의 명을 어기고 편지를 파기하지 않은 것은 정조의 정치 의도를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과, 임금의 친필 편지를 버리기 힘든 아쉬움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심환지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도 비슷한 방법으로 관리ㆍ조종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백승호 서울대 교수는 "정조는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체제공(1719~1799)과도 비슷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조가 편지를 통해 각 정치세력을 '원격 조종'하는 노회한 정치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편지 가운데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미리 짜고'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정도를 벗어나는 정치적 술수에도 주저함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환지는 누구인가

심환지(1730~1802)는 마흔 나이가 넘은 1771년(영조 47년)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言官ㆍ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리)으로 일했다.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여러 차례 유배에 처해졌으나 강직함과 업무 능력,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아 노론 벽파의 영수 자리에 오른다.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측과 가깝게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다. 말년의 정조가 벽파를 정치적 동반 세력의 하나로 인정한 후에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돼 있었다. 벽파의 우두머리라는 상징성 때문에, 후세에 정조 암살설을 제기하는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정조 독살의 배후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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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정치가였으나 실패한 아버지였던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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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英祖) [1694 ~ 1776] [1724.08 ~ 1776.03] 조선 제 21대 왕

前 연잉군, 後 왕세제
휘 : 금(昑)
자 : 광숙(光叔)
태어난 곳 : 1694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
승하한 곳 :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  
아버지 : 숙종(肅宗, 조선 제 19대 왕) [1661 ~ 1720]
어머니 : 숙빈 최씨(淑嬪 崔氏) [1670 ~ 1718]


◎정치이념

극단으로 치닫던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조정을 안정


◎업적

1740년 : 개성부 행차 때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선죽교에 비석을 세우는 등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실시함
1743년 : [수교집록]을 속편함 , [속대전]을 [속오례의]와 함께 편찬함
1745년 :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3군문이 도성을 분담하여 보수, 관리하게 함
1746년 : [자성편]을 지음
1748년 : 세입, 세출 제도의 확립을 목적으로 [탁지정례]를 편찬함
1749년 : [정훈]을 지음
1751년 : 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5부 방민이 유사시 삼군문 지휘 아래 방어할 구역을 분담하여 실제 훈련하기도 함
1755년 : [대훈]을 지음
1762년 : [경세문답]을 지음
1764년 : [경세편], [표의록]을 지음   
1765년 : [백행록]을 짓는 등 후세 왕들을 위해 왕자가 걸어할 저술을 많이 남김
1770년 : 세종의 측우기 만드는 법을 터득하여 호조에 명해 양궐 및 서운관에 만들어 설치하게 함
              또한 양도, 팔도에 분송하여 매번 비가 올 때마다 강우량의 척촌을 재서 보고하게 함
1771년 : 전주 경기전에 조경묘를 건립함
1773년 : 개천의 양변에 돌을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함
1773년 :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함
1774년 : 노비 신공 전면 혁파




◎다른 군주와 달랐던 영조만의 업적

국왕이 되기까지 당쟁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영조는 국정의 기본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탕평정치로 잡고, 성균관 탕평비문에 그 뜻을 새겨 넣었다.

" 편당을 만들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고,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만드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것은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왕위에 올랐던 영조가 노론에 진 부채를 갚지 않겠다는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이후 영조는 소론과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면서 탕평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확대에 주력하였다.

탕평책으로 왕권을 강화한 영조는 국가전례를 정비하고, 경제를 개혁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해동지도], [속오례의], [속대전],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책들은 모두 영조대에 편찬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또한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고, 어머니가 천민일 경우에만 노비가 되게 하는 종모법을 실시하여 많은 노비들을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영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였다. 그는 많은 어제(국왕의 저술)와 어필(국왕의 글씨) 작품을 남겼고, [대학]의 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경연에 대신들을 불러놓고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대 성왕들의 이상적 군주상인 군사(스승으로서의 군주)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또한 왕세제로 책봉되던 28세부터 승하할때인 83세까지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는데, 이런 군주는 세종, 영조,정조가 유일하다. 이러한 영조의 학구열이 손자에게 이어져 마침내 군사를 실현한 국왕 정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가르치기 위해 별도의 교재를 만들기도 했는데, 만년에 만든 [어제조훈]이 그 대표적인 책이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고 1756년 세손이 5살 때 서지수,김양택을 왕손 교부로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 했다. 이는 왕손에게 별도의 사부를 두지 않던 관례를 바꾼 것으로, 영조가 정조의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또한 서민적인 것을 좋아하는 검소한 군주였다. 정순왕후와의 결혼도 정성왕후 때의 사치를 근절하고자 역대 군왕 중 가장 간소하게 치뤄졌고 영조 초기까지 이어져 오던 귀빈들이나 왕실 여인들이 머리에 쓴 가채를 1756년부터 금지하였다. 무거운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원래의 이유는 사치를 막고자 함이었다.




◎영조가 실패한 것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그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즉위 초 영조는 소론이 퍼뜨린 경종독살설과 이인좌의 난을 겪는 등 많은 난관에 부딪쳤으나, 다행히 지속적으로 탕평책을 유지하여 당쟁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영조가 70세를 넘기고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 당쟁은 다시 격화되었다.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서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했다. 25세 때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본 효장세자(後 진종)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무려 7년간 후사가 비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조의 나이 42세 때인 1735년 1월 21일, 영빈 이씨에게서 드디어  원자 선(後 사도세자)를 얻었고, 그 이듬해인 1736년 3월 15일 원자 선을 2세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영조의 나이 56세 때인 1749년, 열다섯살의 사도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틈만나면 노론세력들과 충돌했던 세자는 결국 붕당정치의 희생양으로 뒤주 속에 갖혀 죽게 된다.

결국, 영조가 지향하고자 했던 탕평책은 사도세자사건을 계기로 1762년부터 영조 말년까지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하지만 다행인것은 영조가 인조처럼 후손은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인뒤 세손 석철, 석린, 석견 등 손자들까지도 제주도로 유배시켜 죽였으나,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에 뉘우치고 세손에게 정성을 다하여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있던 것을 아낌없이 주었다.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평생을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고,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고 오해까지 받은 상황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사이에서 탕평책과 잦은 선위파동을 일으키면서까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영조... 비록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긴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검소하고 이뤄냈던 업적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참... 영조는 애증이 가는 문제적인 군주이다.
정치만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만... 사도세자에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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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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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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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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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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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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