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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9)] 실제 홍길동은 연산군 시절 도적 떼의 두목

고위관리 사칭한 강도 행각 실록에 남아…
당상관 등 비호세력 밝혀지며 조정이 시끌

그림. 이철원.


신출귀몰(神出鬼沒)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인물이 홍길동(洪吉童)이다. 지금도 우리는 동사무소나 구청에 가서 각종 서류양식을 작성하려 할 때 표본서류에서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한국 사람이 가깝게 느끼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홍길동상(像)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이후부터 홍길동은 조선 백성들이 학정(虐政)에 시달릴 때마다 메시아처럼 갈구하는 인물로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사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은 소설 속 홍길동과 다르다. 광해군 때 허균은 세종 때를 배경으로 해서 홍길동을 썼지만 역사 속 홍길동은 연산군 때 인물이다. 신출귀몰했는지는 모르지만 홍길동은 한낱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다. 폭정이 도적 떼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임꺽정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이 극에 달한 명종 때 도적이다. 숙종 시대를 폭정기(暴政期)라고 하기는 곤란하지만 잦은 당파 교체로 지방 수령들에 대한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지방 수령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다는 점에서 장길산의 등장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실록에서 홍길동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연산군6년(1500년) 10월 22일이다. 영의정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이 홍길동을 체포했다며 “기쁨을 견딜 수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이때 3정승은 홍길동을 ‘강도(强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단순 강도라면 국왕과 3정승이 이처럼 흥분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정에서 골치를 앓아야 했던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위관리 사칭이었다. “강도 홍길동은 옥(玉) 달린 모자를 쓰고 홍대(紅帶)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기탄 없는 행동을 자행했다.” 홍길동을 조사한 한치형의 보고서에 나오는 홍길동의 범죄 행각이다. 중추부 첨지면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었다. 홍길동의 활동 무대는 주로 충청도와 한양, 경기도 일대였다.

홍길동 체포로 그의 비호세력들이 속속 밝혀지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엄귀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무인 출신의 당상관이었다. 조사 결과 엄귀손은 홍길동이 도적질한 물건을 관리해주고 집도 사주었다. 조정에서는 약간의 논란도 있었다. 엄귀손의 홍길동 지원이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소극적인 것이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어세겸 같은 인물은 “엄귀손이 홍길동의 음식물은 받아 먹었지만 그것은 인정상 흔하게 있는 일이니 허물할 것은 못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치형을 비롯한 3정승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100대와 3000리 유배 그리고 고신(告身) 박탈이었다.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는다는 뜻이었다. 이 형벌은 조선 때 사형 바로 다음에 해당하는 중한 처벌이었다.

실록만 놓고 본다면 홍길동 사건보다 엄귀손의 홍길동 비호사건이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결국 한 달여의 조사 끝에 엄귀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연산군은 3정승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이런 인물이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은 당연히 3정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엄귀손이 당상관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어서이지 조행(操行)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변명했다. 조행이란 조신한 행실을 뜻한다. 엄귀손은 평안도 병마절도사 아래에서 우후(右候)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군공’이라고 함은 그때 국방의 공을 세웠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엄귀손은 품행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동래 현령으로 있을 때는 관물을 마음대로 도용하다가 파면된 일이 있었고, 평안도 우후 때도 공물을 훔쳤다가 퇴출되는 등 좋지 못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경우 분명 중앙조정에서 그로부터 뇌물을 받아 엄귀손을 비호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선 시대 무관의 관직은 대부분 돈과 뇌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공보다 뇌물이 엄귀손을 당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원래는 노비와 재산이 없었는데 홍길동 사건과 관련되어 조사 받을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었고 곡식도 4000석이나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대도(大盜)’ 홍길동 덕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실록에 기록된 홍길동 사건은 여기까지다. 흥미로운 것은 그에 관한 처벌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형을 시켰다면 분명 기록되었을 텐데 홍길동을 군기시 앞에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엄귀손에 준하는 형벌로 남쪽 섬으로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정에서도 홍길동 문제보다 엄귀손 문제를 더 중하게 다룬 것을 보더라도 사형에 처해지지는 않은 듯하다.

홍길동의 ‘증발’ 이후 그에 대한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조정 관리들은 누구를 욕할 때 ‘홍길동 같은 놈’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조 때의 기록이다. 조헌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에 홍길동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정승을 잘못 골라 풍속이 탁해지고 강상의 윤리가 무너져 이제는 홍길동을 욕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홍길동보다 못한 인물이 정승에 올랐으니 굳이 홍길동을 욕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홍길동에 대한 호불호(好不好)가 당대의 정치 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었다. 광해군 때 비운의 혁명아 허균이 조선의 계급적 모순을 정면으로 질타하는 국문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은 이조판서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였다. 실제 홍길동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이조판서와 같은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록 어느 한 구석에도 언급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허균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은 ‘홍길동 그 후’이다. 현실 속 홍길동이 섬으로 유배를 갔다면 소설 속 홍길동은 체포된 후 병조판서직과 쌀 1000섬을 하사 받고 남쪽 저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병사들을 훈련시켜 율도국을 공략해 율도국의 왕이 된다는 멋진 상상이다. 지금도 율도국이 실존하느냐는 논쟁이 있을 만큼 허균의 상상력은 그럴듯했다.

숙종 때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과 관련된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겼다. 옛날에 홍길동이라는 도적이 주로 보부상을 습격하였기 때문에 보부상들이 홍길동이라는 이름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였는데 지금은 보부상들이 맹세를 할 때 홍길동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을 꼽았다. 홍길동은 조선 때 허균을 만나, 임꺽정은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를 만나, 그리고 장길산은 오늘날 황석영을 만나 되살아났다. 이들의 작품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허균은 광해군 때의 폭정을 비판하며 역모를 꾸미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폭정의 시기였으며, 황석영이 장길산을 쓴 때도 군사정권이라는 폭정의 시대였다. 폭정은 평범한 백성을 도적 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도적을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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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6)]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조선 건국 직후 강화도 등에 강제이주… ‘왕씨 제거’ 기습작전으로 집단 수장돼


왕씨 완전 제거 작전

그 많던 왕(王)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의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왕씨의 수는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씨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는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정 요인이 컸던 것이다. 태조3년(1394년) 1월 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형률을 맡고 있는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왕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불안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윤허하지 않았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 제거를 주장했다.


실상은 분명치 않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이런저런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성계는 사헌부에 명을 내려 강화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왕씨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왕씨 제거 주청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결국 4월 14일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한다. 왕씨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부 신하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지만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왕씨의 완전제거를 역설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 삼부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했으니 이성계와 왕우는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왕씨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와 거제도 외에 삼척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은 삼척,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모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의 최측근이었다.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바로 다음날 윤방경 등은 왕씨를 모두 색출해 강화나루에 수장(水葬)시켰다. 거제도의 작전은 4월 20일에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수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족이었고 그 밖의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모두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왕씨의 서얼들까지 잡히는 대로 참수했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닌 경우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렸다. 왕씨들의 관직진출이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였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완벽하게 왕씨를 제거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왕씨 색출작업은 태종 때도 계속된다. 태종13년(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동조하리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태종의 생각은 바뀐다.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다.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말한다.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그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었다.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신하들을 나무란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자고 고려 왕실을 박멸하려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현실주의자 태종다운 발언이었다. 이어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했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성을 전(全)이나 옥(玉)씨로 바꾼 사람도 많았다.

태종의 이 같은 명이 있은 이후 왕씨에 대한 살육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아마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그나마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1453년 왕희걸(王希傑·?~1553년)이 최초였다. 그는 이름 그대로 대단히 보기 드문 인재였을 것이다. 문장?琉?글씨 등에 두루 정통한 그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라갔다. 또 이황이나 노수신 같은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아마도 왕희걸을 바라보는 당시 왕씨 집안 사람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왕희걸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을 맺는 것은 명종 때 을사사화다. 당시 그는 함경도 어사로 있었다. 이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계림군을 역모로 얽어매려 했는데 계림군이 함경도 쪽으로 도망을 쳤다. 왕희걸의 조사 결과 중 보우(普雨)가 황룡사·석왕사 등지에 계림군을 숨겨주었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보우의 뒤에는 문정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20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 보우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게 피살되는데 보우의 승적을 박탈할 때 핵심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왕희걸의 장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왕씨에 대한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는 줄곧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 때에 오면 그마저 사람이 별로 없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선조22년(1589년) 7월 4일 조정에서는 50년 가까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의 사람이 제사를 주관해 온 것은 문제라며 새롭게 왕씨 중에서 주사자(主祀者)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선조와 신하들이 격론을 벌인다. 그것은 왕훈이라는 사람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종손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 벼슬이 높았던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였다. 종손의 경우 지방의 말직 정도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벼슬이 높았던 계통으로는 당연히 왕희걸의 후손이 거론됐다. 결국 왕씨 제사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왕훈이 숭의전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왕훈은 종손 계통이었다. 숭의전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왕씨를 중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그의 뜻은 고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8년 3월 6일 고종은 왕건의 현릉에 행차했다가 동부승지 왕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씨가 전조의 후손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부터는 공부에 힘써 이름을 날리도록 하라.”

즉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에야 제대로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


남효온의 추강냉화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남효온의 추강냉화: 왕씨 제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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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가지 패턴: 무의식에 작성된 프로그램이 인생을 관리한다.

▷패턴이 인생을 결정한다. : 오래된 패턴은 끈질기다.
==> 언제나 자기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언제나 자신에 대해 좋은 말만 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상상하라.

▷아픔은 방향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을 달리 보게 만든다.
==> 어리석은 일을 계속하면 아픈 것도 계속되는 법이다.


2. 인생은 한번뿐이다.
: 우리가 가진 것은 지금뿐이다.
==> 한번의 기회도 놓치지 말고 삶으로 뛰어들라!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이 괴롭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도 어렵지만, 자신을 용서하기란 더욱 어렵다.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고통받은 셈이다.

▷행복해지려면, 행복한 생각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인생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모든 것은 사소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좋은 것을 보라!

▷의식은 생각의 원천이고, 무의식은 힘의 원천이다.


성공. 성공. 성공.


==> 목표가 있으면 그것이 이미 성취된 것처럼 무의식에 새겨 넣어라!

1.당신의 마음은 자석이다. 원하는 것에 집중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2. 주문을 큰소리로 말하거나 글로 적어라.

3. 반복이 중요하다.


3. 마음먹기 나름이다.
: 침울할 때는 생각보다는 무엇을 말하는가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실패에서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
▷가진 것을 몽땅 털어 하는 일에 쏟아라.

실패는 고통스럽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 못햇음을 깨닫는 것은 몇 배로 더 고통스럽다.


▷세 가지의 좋은 습관:
일하는 습관, 건강관리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

▷사랑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 때는 가진 것을 사랑하라.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하면서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4. 목표는 성공의 어머니
: 절망의 순간에 역전된다.

==> 삶이란 그런 것이다. 참고 견디면 보상은 반드시 있다.
마지막까지 몰린 순간에 기적처럼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 눈 앞이 캄캄하고 다리힘이 풀리거든 차라리 축하하고 기뻐해라.

집에 거의 도착했으니까.


5. 행복하게 사는 법
: 끈덕지게 버텨라. 끈덕지게 버티는 힘은 비밀과도 같다.

~ 역사는 끈덕지게 버틸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든다.

▷행동 속에 행복과 성취감이 있다.    "움직여라" 안쓰면 녹슨다.
▷마음 속으로 연습하는 것이 실제로 효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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