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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에서 끝까지 왕을 버리지 못한 충신으로 나온 내시 김처선(장항선)


조선시대 내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글쓰는게 부담스러워서 늘 미루다 보니 생각날 때 한꺼번에 올리게 된다. 간략한 책소개를 해놓고 나도 두고 두고 참고해야겠다.

백과사전에는
내시가 조선시대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소제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이라고 나온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대궐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내시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소개를 하려고 '내시'로 검색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내시(eunuch)'가 나온다. 그것도 무려 안성기, 이미숙 주연이다! 영화 소개를 읽어보니 비극은 비극인데 뭔가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eunuch

안성기, 이미숙 주연 영화 내시 포스터


옛날 영화 포스터는 색감도 색감이지만 어찌 이리 칙칙하고 촌스러운지...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시!! 밤이 두려운 내시들의 몸부림
잘려버린 생生, 잘려버린 사死, 그리고 여女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 남자(王)가 하나, 여자가 수백 명
내시들의 서릿발 같은 성, 뜨거운 여자들의 불같은 성..이라니..ㅋㅋㅋ

이건 뭐 야설도 아니고.. 뭐라구 할 말이 없다.ㅋㅋ
그래도 아리따우신 이미숙님과 안성기님께서 나온 영화기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 몇 장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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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안난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내시들의 모습은 주로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가는 목소리로 "마마~" "눼이~"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현재 왕과 나에서 조치겸(조상선) 역을 맡은 전광렬씨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내시들은 여자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자손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 물론 권력형 내시들만.


어쨋든 내시 관련 서적들을 몇 권 찾아보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내시와 궁녀

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우리나라의 내시와 궁녀를 다룬 책.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내시의 유래에서부터 내시가 되는 과정과 그들의 결혼생활, 묘지, 일화와 함께 궁녀의 유래, 출궁과 죽음, 궁녀의 선발과 입궁 과정, 등 내시와 궁녀의 삶을 빠짐없이 복원하였다.



관련글: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중보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궁중의 은밀한 존재였던 내시와 궁녀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이자 왕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던 내시와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에 출간된「내시와 궁녀」의 개정증보판으로, 지금 시기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송은명 | 시아출판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이인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인자 19인의 인물 열전, 막이 오르면 그들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역사의 숨은 실력가- 이인자.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왕건,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조선판 내각주의자 정도전, 당 태종의 원정을 좌절시킨 고구려의 거인 연개소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한명회 등 역사의 또다른 주인공 19명의 삶을 조명한 책.


내시
내시
이정우 지음 | 관동출판사

일곱 분의 군주를 모신 충신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이정우의 역사소설 『내시』상 권. 희대의 폭군 연산왕에게 올바른 군왕이 되기를 수없이 아뢰다가 결국, 연산왕의 칼날아래 목숨이 끊어지면서도 충언을 아뢰었던 내시 김치선의 애환과 삶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관련글: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과 나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

SBS 대하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왕과 나의 원작이 되는 소설) 조선시대, 숙명적으로 내시가 되어 상처 받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급변하는 정치 현장에서, 암투가 치열한 구중궁궐에서 비록 자신의 몸은 거세를 당했지만 인생마저 거세당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내시들의 학문, 야망, 사랑을 치열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왕과 나 김처선(오만선), 폐비 윤씨(구혜선)에게 고백장면 동영상


관련기사: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 
왕과나 연산군 폭군 이끄는 세기의 간신 김자원 등장으로 눈길 
(몇몇 기사에는 김처선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절대 아님.
김처선은 나이로나, 품계로나 김자원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음.)


왕과 나의 김자원...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전혀 간신배 이미지가 아닌 걸~!!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쩔쩔매는 김자원



덧1. 내시와 궁녀는 몇 년전부터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올해가 가기 전엔 읽을 수 있을까?ㅋ
덧2. 김자원은 권력형 간신이라기보다는 주인 비위 잘 맞추는 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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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또다른 '왕의 남자' 내시... 역사학자 박상진씨가 말하는 오해와 진실  최육상(run63) 기자   
 
▲ 영화 <왕의 남자>의 한 장면. 영화에서 처선(장항선 분)은 연산 곁에서 충심을 다하는 내시로 그려진다. ⓒ 이글픽처스
연산: "처선아, 처선아. 내가 왕이 맞느냐? 선왕이 정한 법도에 매여 사는 내가 왕이 맞냔 말이다."
처선: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큰 사냥을 하시기 위해서는 발자국 소리를 죽이는 법이옵니다."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내시는 가늘고 징그러운 목소리를 지닌, 수염도 나지 않은 남자 아닌 남자로 혐오 혹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내시 '처선'은 달랐다.

<왕의 남자>는 가장 비천한 존재인 광대 장생과 공길이 가장 존귀한 임금 연산군을 상대로 벌이는 한판 연희를 풀어낸 영화다. 여기에서 장항선이 연기한 내시 김처선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서 극을 이끌어 가는, 이른바 '무대총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폭군이지만 자신이 모셔야 하는 임금이기에 떠날 수 없었던 처선은 광대를 궁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수하며 연산과 나라를 바로잡기를 시도한다.

비록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처선은 자결을 선택하지만 그는 임금을 모시는 데 충실한, 충직한 내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처선으로 분한 배우 장항선의 무게감 있는 연기가 어우러지면서 처선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점에서 영화 <왕의 남자>는 '예쁜 남자' 이준기의 재발견인 동시에 '카리스마 있는 내시' 장항선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실제 내시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내시를 흔히 왕 뒤의 숨은 권력자라고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기마다 환관이 득세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비서실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하지만 내시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지난 1월 26일, 내시와 궁녀들을 연구한 역사학자 박상진씨를 만나 그 궁금증을 풀어봤다. 박씨는 지난 해 <내시와 궁녀>(가람기획)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다음은 박상진씨와 나눈 일문일답.

"장항선이 연기한 처선, 연산군 때의 실존 내시"

▲ 내시에 대한 연구를 해온 박상진씨.
ⓒ 최육상
- <왕의 남자>에서 장항선씨가 연기한 내시 '김처선'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김처선은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표적인 충신 내시입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직접 춤을 춘 '처용무'의 내용이 무척이나 음란한 것을 보고, 처선이 '지금껏 네 분의 선대왕을 모셔왔지만, 주상 같이 무도한 임금을 본 적이 없다'고 직언을 했다가 '왕을 능멸하려 든다'며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영화에서는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기록은 그렇지 않아요."

- 내시와 환관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관직이었어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내시직을 역임한 인물들이죠. 고려 조정에서 내시 출신 관료 중 재상에 오른 인물만 무려 22명이나 되었으니 내시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거세된 남자들인 환관들로 대체됐어요. 고려 말인 공민왕 때에는 121명의 정원을 가진 정2품 관아인 독립적인 내시부를 두게 됐고요. 조선에 와서는 인원을 좀 더 늘려 140명의 내시부라는 거대한 관청이 설립될 정도로 내시제도가 번성했죠."

- 내시는 관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네요.
"정리하면 환관(宦官)은 시대를 불문하고 남자의 성이 상실되고 관직에 있는 자이고, 내시는 성 상실과는 관련이 없는 관직을 말합니다. 고려 때는 내시와 환관이 분명히 구분됐는데, 조선에 이르러 내시와 환관이 동일해지는 바람에 개념상의 혼란이 생긴 겁니다. 고려의 내시가 왕명을 받드는 '공식 비서관'이었다면, 조선의 내시는 환관들로 왕의 개인적인 명령을 전하는 '사설 비서관' 성격이었죠."

박상진

1963년 예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한국철학(문학석사)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서울시 사료조사 위원, 은평향토사학회 부회장, 서울문화사학회 회원으로 있으며 꾸준히 우리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는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짝짓기로 배우는 세계사> <한국의 로맨스> <에피소드로 본 한국사> <베일 속의 한국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평성부원군 충렬공실기> <한성주보> <조선조 영의정 박원종 연구> 등이 있다.
-<내시와 궁녀> 소개글에서
- 중국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하셨는데 중국의 환관과 우리의 내시는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의 환관은 말 그대로 거세돼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경>에 의하면 중국에는 국부를 거세하는 궁형(宮刑)이 있었는데, 사형 다음가는 형벌이었어요.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이나 중국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연년 등이 궁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죠. 많게는 1만3천 명, 적게는 3천 명 정도의 환관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에게 궁형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내시는 고려 때 국왕의 최측근 엘리트 집단에서 출발했죠. 물론 그때도 거세한 환관이 있었는데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어요. 그러데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에 바쳐진 고려의 환관들이 수완을 발휘하면서 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죠. 그 후 환관들은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고국인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각종 비리를 일삼으며 교만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려 초의 내시가 고려 중기 이후 환관들로 대체된 겁니다."

충신 내시 김처선, 간신 내시 김자원

▲ 내시들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 중 '김처선'과 관련된 내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사본.
ⓒ 최육상
- 내시들이 힘없는 왕 뒤에 숨어서 국정을 뒤흔들었다는 좋지 않은 인식도 있습니다. 내시들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나요?
"조선은 조금 덜하지만, 고려 때는 막강했죠. 특히 원나라에 가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들의 세도는 말도 못해요. 황제 다음의 지위에 있던 승상을 마음대로 부릴 정도의 권세를 가진 고용보(高龍普)나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하며 충선왕을 귀양 보낸 고려인 출신의 원나라 환관 '임빠이앤투그스(임백안독고사)'가 대표적이에요."

- 내시 중에도 충신과 간신이 있었을 텐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누가 있나요?
"앞서 말한 대로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대로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습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 2품 상선 내시였고, 김자원은 왕명 출납 등을 담당하는 정 4품 상전 내시였습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죠.

선조 때 내시 이봉정은 글씨를 잘 쓰는 명필가로 유명했는데, 선조 곁에 머물면서 선조의 필법을 흉내 내기도 했어요. 선조가 부채에 어필로 직접 쓴 시를 하사 받기도 했으니까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죠."

- 내시들의 일상생활은 어땠나요?
"사람들은 내시가 궁 안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시들의 관서인 내시부(內侍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위치했어요. 또 오늘날 종로구 봉익동, 운니동 일대, 은평구 신사동, 응암동 일대, 서대문구 연희동, 가좌동 일대, 양주, 고양, 남양주, 과천, 용인, 안양, 파주 등 거의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어요.

내시는 크게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출퇴근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는데, 장번 내시도 일정 기간 근무하고 나면 나갈 수 있어서 궁 밖에 가정을 두고 일반인들처럼 생활했어요. 내시들의 묘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도봉구 쌍문동, 노원구 월계동, 고양, 양주, 남양주, 파주 심지어 평안남도 강동, 경상북도 풍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에 산재해 있는 걸요."

내시도 음경은 있었다, 아내 두고 성관계도

- 사람들이 내시들의 성생활을 무척 궁금해 합니다.
"사람들이 내시는 거세된 자로 아는데, 고환만 없었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어요. 반면 중국의 환관은 음경과 고환이 모두 없어 불가능했지요. 이는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77)씨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내시의 성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예요.

김씨가 어릴 때 노인들한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쪽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해요. 당시 음경은 남겨 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 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는 거예요. 김복동씨가 어렸을 때 옆집에 내시의 아내가 살았는데 김씨의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 박상진씨가 2005년 펴낸 <내시와 궁녀>.
ⓒ 가람기획
- 원래 환관은 궁녀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기 위해 거세한 것 아니었나요? 그런 내시가 성관계가 가능했다니 좀 의아하네요.
"내시의 성관계 유무는 당시 내시들이 아내와 첩을 뒀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음경 자체가 없었다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이거죠. 김동복씨가 들은 내시 부인들의 대화를 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어 아내들이 무척 괴로워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시 아내들 대부분이 6개월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거죠. 내시의 계보를 잇는 양자(養子) 제도는 정자를 생산할 수 없었기에 당연했던 거고요."

- 지난해 <내시와 궁녀>라는 책을 펴내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003년 북한산에서 내시의 집단묘역 45기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세상에 알렸어요. 그 뒤 내시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딜 가도 관련 서적 하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시와 궁녀에 대해 파고든 거죠. 내시의 일화를 담은 <내반원기>와 내시들의 개인문집,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경국대전> 등 정사와 야사, 법전 자료집 등 100여 종의 문헌과 자료를 2년 정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연산군에게 죽임당한 김처선 vs 반정 앞두고 도망간 김자원

나라가 어수선할 때 충신과 간신은 둘 다 빛을 발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한다.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인 연산군 때 공교롭게도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조선의 내시가 모두 등장한다.

극중 연산군의 곁에서 공길과 장생을 돌봤던 김처선은 내시를 대표하는 충신이다. 그는 연산조에 성종릉인 선릉의 시릉관(侍陵官)을 지내고 140명을 통솔하는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로 있었다.

어느 날 연산군이 스스로 지어낸 처용놀이를 하며 온갖 음란한 짓을 다하자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연산군에게 바른말로 직언한다.

"전하,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네 지금 뭐라 했느냐?"
"전하, 이 늙은 놈은 세조대왕으로부터 무려 네 임금을 섬겨왔사옵니다. 또한 경서와 사서를 읽어 대강 통하오니 일찍이 전하와 같은 놀이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사옵니다. 속히 처용무를 중지하시옵소서."
"뭐라, 고금에 나 같은 자가 없었다? 그래,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게로구나. 죽는 게 소원이라면 네 원대로 죽여주마."

화가 치민 연산군은 처선을 향해 활을 당겨, 그를 죽였다.

한편 김자원(金子猿)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인도한 대표적인 간신이다.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데 능했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나주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선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色掌)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 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그를 <조선왕조실록>은 간신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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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남자> 출연 장항선씨 "내시 해보라길래 망설였어요"
2006-02-03 15:30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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