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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장희빈, 당쟁의 주모자인가? 희생자인가?
장희빈은 효종 10년(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차․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10월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월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월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월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년 6월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월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월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원글 출처: http://www.kostma.net/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4#Topic.
-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희빈은 철저한 희생자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는 장희빈은 죽어 마땅한 악녀라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원한 진리란 없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경종, 영조, 정조 때의 비극이 모두 숙종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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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폭군이 아니었다?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외 책 소개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며 "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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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독살사건(부제; 누가 왕을 죽였는가)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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