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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 6권 - 연산군편 참조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 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권세도 없는 일개 궁인이었던 폐비 윤씨의 왕비 간택도 그렇지만 그녀의 폐출, 사약으로 인한 죽음에 조선시대 최악의 패륜 군주이자, 최초된 폐출된 왕인 연산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는지 전해지는 이야기도 참 많다.



2007/11/09 - 연산군 이야기 (성종, 폐비 윤씨 이야기 추가)
2007/11/09 - 폐비 윤씨 이야기 - 그녀는 왜 폐비가 되었나?
2007/11/09 - 비운의 왕비,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
2008/03/11 - 연산군의 광기를 깨우는 폐비 윤씨(금삼의 피)에 대한 진실은?
2008/03/24 - 폐비 윤씨가 쫓겨난 진짜 이유는? (부제: 폐비는 인수대비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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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 카페 역사 스페셜  역사 토론 게시물



11월 2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1)



■ 세조 (1417 - 1468, 재위 : 1455-1468)는 어떤 인물이었나?

조선 7대 임금으로 1455년 에서 1468년 까지 약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시호는 혜장(명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



친형 문종보다 3년 늦은 1417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유, 자는 수지였다. 처음에는 함평대군이었다가 진평대군에 다시 진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 졌다. (1445-세종 27)


어릴 때부터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친형 문종이 학문에 능했던 데 비해 수양대군은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 성격이 대담했다. 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궁정 내에 불당을 조성하고 승려 심미의 아우인 김수온과 함께 불서 번역을 관장했으며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문종 2년인 1452년에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단종이 즉위하자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다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1455년 윤 6월 단종을 강압하여 왕위를 찬탈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7대 임금에 즉위하니,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혀 우대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킨다. 그리고 1457년 9월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 강화 정책에 착수했다. 의정부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고, 세종 이후 대표적인 학자 양성소로 자리잡았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폐지시켜 예문관으로 그 기능을 옮기는 한편, 정치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반면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시켰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동국통감」을 편찬, 「국조보감」을 편수,「경제육전」을 정비,「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을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관제도 대폭 뜯어고쳤다. 영의정부사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종래에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 관원에게 나눠주던 과전을 현직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같은 중앙 문신 위주의 정책은 지방 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민생 안정책으로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농업을 위해「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한 지방민들을 괴롭혀 오던 유향소를 전격 폐지하는 등 민생의 안정에도 주력하였다. 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 중심이 아닌 공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측근 중신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이러한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우는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 (예종)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 참고 문헌-



1. 조선왕조 실록 -시디롬- 서울 시스템, 1997

2. 연려실기술 -국역- 민족문화추진회, 1972



3. 임용한, [조선국왕 이야기], 혜안, 1998

4.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5. 이성무, [조선왕조사], 1권 -태조~현종- 동방미디어, 1999

6.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운영]. 신서원, 2000

7. 최정용, [수양대군 다시 읽기]. 학민사, 1995

8.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 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9.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10.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11.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1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들녘, 1996

11. 사이트 : 한국의 역대 왕 - www.urinara.com





11월 3일 토론 참고 자료 - 세조에 대한 재평가 (2) 세조 공신들의 횡포


1.
조선 3대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 문종 재위중에는 더 이상의 공신책봉이 없었다. 세종과 문종 재위 기간에는 정변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신의 존재 자체가 정변의 산물임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그런데 병약한 세종의 장자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또다시 정변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모사 한명회의 도움을 받은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륙하고 동생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에 유배한 후 사약을 내려 죽이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명분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했다는 것. 그러나 실제 역모를 꾸민 것은 안평대군과 김종서가 아니라 수양대군과 한명회였다. 쿠데타를 성공시켰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반란의 주역인 수양대군 자신을 비롯해 한명회, 정인지, 한확 등 43명이 정난공신에 책봉됐다. 정난(靖難)이란 「나라의 위태로운 난리를 평정했다」는 뜻이다.


이는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축나야 함을 의미했다. 수양대군에게는 식읍 1000호와 식실봉 500호, 전 500결, 노비 300구(口) 외에도 별봉(別俸)으로 해마다 600석의 쌀과 금 25냥, 은 100냥 등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다. 한명회, 정인지 등 다른 1등공신에게도 전지 200결과 노비 25구, 구사 7명, 반당(병졸) 10인이 내려졌으며 부모와 처는 3등을 올려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올려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아들이 없는 경우 조카와 사위에게 2등을 올려주는 특혜가 주어졌다. 2·3등 공신에게도 각각 전지 150결과 100결이 주어지고 노비 등이 차등있게 배분됐다. 이들 정난공신에게 하사된 전지만 6550결로서 산천을 경계로 했다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농장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헌법에 따라 즉위한 단종이 계속 재위했으면 이런 정치·경제적 특권층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협박해 영의정부사·영집현전·경연·춘추·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중외병마도통사라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종 3년(1455) 윤6월에 드디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면서 스스로 임금이 됐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즉위했으니 또 한 번의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세조 즉위 직후 책봉된 공신은 임금이 되는 것을 도왔다는 뜻의 좌익(佐翼)공신으로 총 46명이었다. 또다시 막대한 국고가 이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축나야 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왕이 된 대가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치러야 했고 조선은 공신들의 세상이 되어 갔다.


즉위 직후 세조는 양녕·효령대군과 함께 개국·정사·좌명·정난의 4공신을 대동하고 창덕궁으로 상왕 단종을 찾아 공신 명단인 맹족(盟簇)을 바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양녕대군이 비파(琵琶)를 연주하니 여러 공신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흥이 난 세조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신이 왕위를 빼앗은 임금 앞에서 추는 악어들의 잔치였다.


잔치가 파한 후 동생 영응대군의 사저로 거동한 세조는 장난삼아 이구에게 주먹으로 이계전을 때리게 하자 신숙주가 『내가 때리게 되면 명의(名醫)가 좌우에서 구호해도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신 사이에 격식이 없었다. 4공신 회맹이 참석자에게는 새벽 2고(鼓)가 될 때까지 술마시고 춤추며 즐거웠을지 몰라도 이에 끼지 못한 다른 사대부나 백성들에게는 착잡하고 두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과 함께 춤추며 농담하는 이들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는 특권층임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의 공신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음을 국법으로 만들기도 했다. 단종 1년 11월 의정부는 『공신의 지위를 적장자에게 세습도록 하고 자손들을 정안(政案)에 「정난 1등(2등·3등)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공신 아무개가 죄를 범해도 용서하라는 주청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이 죄를 범해도 영원토록 용서하라는 주청이었으니 공신 당사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2.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베러 갈 때 함께 갔던 공신 홍윤성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사는 한 노파의 전재산인 논을 빼앗았는데 노파가 울면서 돌려달라고 호소하자 그 노파를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쳐 죽인 후 시신을 길 곁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그의 숙부가 아들의 벼슬을 부탁하자 논 20두락을 요구했다. 숙부가 『그대가 옛날 어려울 때 내게 의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제 재상이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가』라고 따지자 홍윤성은 숙부를 박살낸 후 후원에 묻어버렸다. 숙모가 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사헌부도 듣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의 온궁에 거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숙모는 전날 밤부터 버드나무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어가가 다가오자 나무 위에서 길게 호곡했다. 세조가 관리를 시켜 묻자 그의 아내는 『공신에 관계된 것이므로 한 걸음 사이에도 그 말이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세조가 직접 어가를 멈추고 말하라고 하자 그때서야 홍윤성의 만행을 호소했다.


세조는 분노했으나 공신이란 이유로 치죄하지 못하고 그의 종을 베는 것으로 대신한 후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힘없는 일반 백성들은 물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공신에게 맞아죽어도 국왕이 공신을 보호하는 상황이니 공신들에게 조선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3.
역사드라마「왕과 비」는 수양대군과 그 수하들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도착적인가는 정난·익대공신들이 김종서와 사육신 등 단종에게 충성을 바쳤다가 사형당한 인물들의 남은 식구와 유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보면 극명해진다.



올바른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시대정신에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역적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와 형제 등 남자들도 연좌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정난·익대공신 세력들은 이들의 사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땅에 채 스며들기도 전에 이들의 부인·딸 등 여자식구들과 재산을 갈취했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아내와 딸 및 박팽년의 아내는 정인지가 차지했고,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아내는 이흥상이, 성삼문의 아내와 딸과 이승로의 누이는 박종우가, 성삼고의 아내와 딸은 정창손이, 이현로의 아내와 김유덕의 아내와 딸은 이사철이, 김문기의 아내는 유수가, 김문기의 딸은 최항이, 이해의 아내와 딸과 김유덕의 누이는 박중손이, 최면의 누이와 조완규의 아내와 딸은 신숙주가, 권자신의 아내와 딸은 권준이, 김현석의 아내는 권람이, 김승규의 딸과 권저의 어미는 강곤이, 김승벽의 아내는 홍윤성이, 유성원의 아내와 딸과 이명민의 아내는 한명회가, 민보흠의 아내와 이윤원의 아내는 김질이, 하위지의 아내는 권언이 차지한 것이다.


이들 수백명에 달하는 여인들은 남편들이 시대정신 구현에 인생을 걸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양반가 규수에서 공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공신들은 사육신들의 토지도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휘의 평산 땅은 양녕대군이 차지했고, 금성대군 이유의 당진 땅과 성삼문의 당진 땅은 이구가, 김문기의 영동 땅은 정인지가, 하위지의 선산 땅은 한확이, 이개의 포천 땅은 정창손이, 유응부의 포천 땅은 신숙주가, 이개의 한산 땅은 홍윤성이 차지하는 등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신들이 탐한 것은 반대파 정치인들의 여인이나 토지뿐이 아니었다. 신숙주가 단종의 왕비 송씨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이 임금으로 섬기던 군주의 여인까지 탐했던 파렴치한들이었다.



-참고문헌 및 출처자료 -



조선왕조실록 -씨디롬-

연려실기술 - 국역-



1.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9

2. 이덕일 [거칠것이 없어라] -김종서 평전- 김영사. 1999

3. 이덕일 [역사산책 - 조선을 망친 주범은 공신들 ] - 신동아 연재물

4. 최승희 [조선초기 정치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2

5. 한영우 [조선전기 사회경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3

6.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 연구] 일조각, 1988

7. 지두환 [조선전기 정치사] 역사문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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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세조의 킹메이커,
신 숙 주



▣방송 : 2007. 7. 7(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현기PD
▣작가 : 윤영수

 


신숙주! 그의 선택이

조선의 왕, 그리고 역사를 바꾼다!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의 전성기!
그 찬란한 시대에
여섯 임금을 모시며 변신을 거듭해온 인물이 있다. 조선 500년사에 걸쳐 지금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
신.숙.주!

그는 처세에 능한 변절자인가?
혼돈의 왕조를 바로잡은 천재관료인가?


"이 나물을 만두 속으로 넣을 적에 짓이겨 넣는 고로 신숙주 를 이 나물 찧듯 하자고 하여 숙주나물 이 라 하였다"

                  이용기 『조선무쌍요리제법』 中


"세종(世宗)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하셨다."

                                             『문종실록』中


 

1453년 10월 10일(음), 그들의 선택이 조선의 역사를 바꾼다.

그 때 조정에는 조선건국 이래 최대의 피바람이 몰아친다. 단종 1년, 수양대군은 당시의 권력자였던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와 아들을 제거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살생계획에 따라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귀양을 보낸다. 치밀하고, 처절했던 조선 초 최대의 쿠데타, 계유정난! 대권을 거머쥔 수양대군의 뒤에는 시대를 넘어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의 인물,
                       
신숙주가 있었다.

수양대군! 명관(明官)을 알아본 최고의 선택 - 외교 전문가, 신숙주!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위징(魏徵)'은 당태종의 참모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이라 불렸던 인물. 수양대군은 세조 즉위 후 신숙주를 '위징(魏徵)'에 빗대어 총애하였다. 그렇다면, 세조의 남자, 신숙주는 누구인가?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되어 숙직할 때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책을 가져다가 남김없이 모두 열람하였다. 어떤 때에는 동료 대신 숙직을 청하여 밤새도록 잠자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中

그는 세종 때 집현전 8학사였고, 일본에 다녀온 촉망받는 신진 지식인이었다. 또한 몽고어, 일본어, 만주어 등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전문 외교관이기도 했다.

수양대군이 권람에게 중국에 보낼 정관이 될 만 한 자를 물었더니 신숙주를
추천하였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 동각잡기 中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명나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기 위해 능력 있는 외교 전문가가 필요했던 수양대군! 천재관료 신숙주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는데...

신숙주! 최고 권력을 향한 최선의 선택 - No.3 수양대군!
수양대군은 왜 계유정난을 일으킨 것일까? 당시 수양대군은 가장 정통성 있는 세력인 단종, 정가의 평판이 좋은 양평대군에 이어 제3세력 이었다.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조카 단종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종을 보위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도 탄탄대로를 걸었을 신숙주. 그는 왜 수양대군과 손을 잡고 시대를 뒤집으려 했을까? 왜 자신을 아꼈던 역대 왕들에게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300년 후, 그의 선택이 비난 받기 시작한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며 조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국가경영자 신숙주!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공로는 반대파였던 사림의 시조 '김종직'조차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단종을 몰아낸 후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를 공신비로 삼았다는 내용이 문헌에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뛰어난 관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왜 유독 신숙주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변절자의 상징으로 만든 것일까?


신숙주 재발견! 역사적 편견 속 가려져있던 그의 또 다른 면모!

1460년, 8000명의 조선군사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정벌에 나선다. 여진족을 괴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적이 불시에 조선군 진영을 기습한다. 당시 조선군의 군장이었던 신숙주. 한 밤중에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그는 가만히 누워서 시를 읊는데...


신숙주는 조선 전기, 문물제도 완성의 총지휘자였다. 한글편찬을 비롯하여 운문, 서예에서 해박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경국대전>, <동국통감> 등의 법전과 역사서 편찬을 주도하였고, 세조실록, 예조실록의 찬수까지 도맡아 했다. 말년에는 벼슬에서 간절히 물러나고 싶어 했지만 나라의 임금이 놓아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벼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신숙주인 것이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빌붙어서 권력을 잡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진정코 흔들리는 국가를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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