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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엇갈린 정조 평가, 사료로 보면

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노론 독재체제에서 집권… 주자학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사상적 다원화 추구
실용과학에 관심 많아… 이가환과 대화 나누며 “지구는 둥글다” 주장도
일체의 잡기 외면한 채 수양에 힘써… 비단옷 대신 무명옷 입고 백성 걱정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 photo 조선일보 DB

정조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를 주제로 한 저술·드라마가 잇따르고 있다.

근래 정조(正祖)에 관한 각종 저술, 드라마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에 따라 정조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시대를 앞서 간 계몽군주”라고 평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에선 “저 혼자 잘난 헛똑똑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정조의 참모습일까. 중립적 입장에서 사료에 담긴 기록을 바탕으로, 그러나 사료의 한계도 감안해가며 임금 정조의 실상을 살펴봤다.

정조에 대한 기본적 사료로는 ‘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정조가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의 뜻을 취해서 작성한 ‘일성록(日省錄)’과 정조가 또한 매일 반성하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한 ‘일득록(日得錄)’ 등도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도 기본 사료이다.

그러나 이런 관찬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부분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 사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점이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는 문제점이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 왜곡이다. 따라서 이런 사료들을 이용할 때는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먼저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팔자흉언(八字凶言·여덟 자로 된 흉언)’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세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씻어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당일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0일)라며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스스로 천명했다.


"과인은 세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노론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정조(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세손 정조에게 “임오년의 일(사도세자가 죽은 사건)은 의리상 충분히 옳은 것 같더라도 이는 곧 나를 모함하는 것으로서, 단지 나에게만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일)라면서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정후겸의 최후 (사진 출처 MBC 이산 홈페이지)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호대법(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여색(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문사(文士)와 경전(經典)을 이야기하고 시(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閣臣) 김조순(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성인(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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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독살사건(부제; 누가 왕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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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왕과 나에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중국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의 원래의 목적을 알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근거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일부의 통념은 다분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알아보자.


세계일보 기사 일부 발췌: 원 출처는 제목에 링크

내시들이 정말 왕 독살 주도했을까? SBS 사극 '왕과 나' 계기로 본 환관들의 세계


◆환관이 국왕 독살 주도?=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예종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는 점에서 독살설을 완전 허구라고 단정지을 순 없다. 재야 학자 이덕일씨는 인종,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 등 600년 조선사에서 왕권과 신권 대립이 첨예했던 시기에 특히 국왕 독살 가능성이 높았다고 주장했다.

예종 때 역시 한명회를 비롯한 계유정난 공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하지만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환관이 독약으로 영조(6년)를 살해하려 했던 모반사건을 연구한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조선 고종황제 폐위를 지켜보는 내시들. 경인문화사 제공

◆김처선과 성종의 관계는=극중 인물 김처선은 단종실록에서 처음 등장한다.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에 우호적이던 환관들을 대거 숙청하는데, 김처선 역시 이때 지방 관노로 유배된다. 2년 뒤 복직된 그는 성종 때 대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공을 세워 정2품 자헌대부에까지 이른다. 특히 연산군 11년에 임금의 실정에 대해 바른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할 때 유일하게 직언한 충신’으로 알려진 김처선의 캐릭터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중종이 반정 성공 후 김처선을 명예회복시켜야 한다는 중신들의 간청을 수차례 거부한 것도 그의 성품이 강직해서가 아니라 당시 만취해 실언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를 놓고 김처선과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된 성종도 사실과는 다소 다르다. 성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환관을 우대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치 개입만은 철저히 막았다. 정희흥 교수는 “성종은 승정원으로 일원화된 왕명 출납을 편의상 환관이 대신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등 환관의 정치 금지를 제도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 이하 생략 -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내시들은 일부 악명높은 이름들(김자원 등)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권력이 미약한 편이었고 왕만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후대에 이르러 김처선에 대해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바램이다. 이는 비단 김처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사극의 주인공화 하면서 나오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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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한맺힌 발언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44 회 / 2월 18일 (월) 밤 9시 55분

정조 드라마가 작년부터 계속적으로 인기를 끄니 영조, 정조 관련 서적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네요.
관련글: 정조 열풍 - '이산, 한성별곡,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에서 정조 이미지

시청자들은 극적인 것을 좋아하니 그동안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는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그 아들 정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저도 정조하면 '탕평책과 규장각'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더라구요.

사도세자의 비극이 크다면 노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손 자리를 부지한 정조의 아픔 또한 컸을텐데 정조 또한 세종대왕처럼 너무 성군이라서 그런지 드라마와 출판계에서 홀대받아왔습지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천재군주 정조가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조 관련된 서적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제가 못읽은 것도 많습니다..  "지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무슨 자격으로 소개해?"라고 생각지 마시고 정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정조 중심의 책들입니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고즈윈 펴냄
18가지 키워드로 정조와 그의 시대를 해석하다 정조와 18세기 조선을 살펴보는 역사서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역사학자 이덕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철인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의 역사를 풀어낸다. 기존의 연대기식 서술이 아니라, 정조 시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반영한 18가지 주제를 통해 정조 시대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는 책입니다.

이덕일 교수는 이 말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사도세자를 언급할 때마다 이 말을 인용합니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까지)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의 즉위 초기, 택군(임금을 고름)이 당연시되어 정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노론무리들 속에 쌓인 정조입장에서는  "과인(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대단한 용기였다고 합니다.

정조를 조명하겠다고 나선 드라마 이산에서도 절반 이상이 흐르도록 정조의 세손시절만을 다루는게 아쉬웠는데 이 책에서 그 아쉬움을 덜어줄 것 같네요.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여유당 펴냄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는 정조 전문가가 풀어 쓴 정조와 화성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정조 시대 정치사를 공부해 온 소장 연구자인 저자가 정조의 사상과 화성 건설의 의미, 그리고 시대 정신을 알려준다. 군왕 정조와 인간 정조를 함께 만날 수 있으며, 정조 시대 개혁 정치의 실체와 정조가 꿈꾸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백성을 위한 국왕 정조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이한우의 군주열전 6) 상세보기
이한우 지음 | 해냄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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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나라 상세보기
박광용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조 탕평정치의 시대를 일관되게 추적한 저자가 영정조시대 개혁의 참모습과 역사적 지혜를 객관적으 로 조명한 저서. 신세대 정치세력 사림의 진출을 시작으로 도덕군자들의 붕당의 역사, 절대통치자에서 개혁정치가로 탈바꿈한 영,정조와 탕평책 등을 기술했다.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상세보기
신병주 지음 | 효형출판 펴냄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인 저자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대미를 장식한 반차도를 중심으로 조선 궁중의 예법을 소상히 기록한 책이 출간됐다. 1759년 영조가 정순왕후를 신부로 맞이하여 치른 혼례식의 그림으로 50쪽의 화폭에는 보행인물 797명, 말탄 인물 391명 등 총 1,188명이 조선시대 복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의궤의 자료적 가치에서부터 66세 신랑과 15세 신부의 이야기를 흥미있게 탐구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사도세자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책. 저자는 그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해 사도세자와 관련된 현존하는 모든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고, 행간 사이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 그간 갈고 닦아온 역사학의 다양한 해석 기법들을 동원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남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살아서는 물론 죽은 후까지도 저주와 조소, 그리고 동




영정조가 중심 주제는 아니지만 정조/영조/사도세자 관련 이야기가 상당량을 차지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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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석필 펴냄
석필 테마 역사 읽기 시리즈 1. 조선의 당쟁사.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 퇴계 이황, 기호지역의 기반인 서인의 종주 율곡 이이, 서인 영수 우계 성혼, 동인 영수 성암 김효원, 북인 대북 영수 아계 이산해 등 주요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당쟁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책은 글자가 굉장히 작고 촘촘하니까 잘 선택하셔야 됩니다.





어린이용도 땡기는 군요~ 난 만화가 너무 좋아~~

정조(백성을 위해 새 새상을 열어라)(새시대큰인물 27) 상세보기
햇살과 나무꾼 지음 | 어린이중앙 펴냄
21세기 위인전『새시대 큰인물』시리즈 제27권 ≪정조≫. 본 시리즈는 어린이들이 꼭 알아야 할 위인들의 일생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27권은 <정조>는 조선 시대 22대 임금 정조의 일대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좀더 편안하게 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개정판>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16대 인조 22대 정조)(만화 조선왕조실록4) 상세보기
허순봉 지음 | 은하수미디어 펴냄
『만화 조선왕조실록』시리즈 제4권《영조대왕과 이산 정조》. 본 시리즈는 조선 시대의 역사를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만화로 풀어내, 416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4권 <영조대왕과 이산 정조>에서는 제16대 인조부터 제22대 정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는 영조께서 완전 산신령처럼 나오셨군요. 한국판 산타 할아버지라고 할까요? ㅋ


이산 정조(백성을 사랑한 개혁 군주) 상세보기
김희석 지음 | 능인 펴냄
이 책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인물 만화로,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소개합니다. 정조대왕은 온갖 위협 속에서도 아버지를 죽게 만든 세력에 꿋꿋이 맞서고, 당파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며, 개혁 정치에 앞장섰습니다. ☞ 이런 점이 좋습니다! 이 책은 가장 역동적인 시대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정조대왕의 일대기를

정조(웅진 생각쟁이 인물06) 상세보기
김준혁 지음 | 씽크하우스 펴냄
새로운 시선, 새로운 구성으로 바라보는 역사 인물! 『웅진 생각쟁이 인물』시리즈 제6권《정조》. 본 시리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는 인물 위인전이다. 각 권은 기존의 동화 형식의 구성을 탈피하여, 다양한 시사 상식과 역사 정보를 곁들여 구성했다. 수준 높은 일러스트와 풍부한 사진 자료는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고 있다. 6권은 '정조 연구'로 박사 학

정조(인물로 보는 한국사 29) 상세보기
표시정 지음 | 파랑새 펴냄
『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 제29권《정조》. 본 시리즈는 역사학자 33인이 선정한 인물을 통해 한국사를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책으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적 인물 57인이 소개됐습니다. 각 권은 해당 인물을 깊이있게 연구한 역사학자의 감수를 받았습니다. 29권에는 조선 시대 제22대 왕 정조의 일대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시켜 정치를 안정시키고, 새

 

여러분이 혹시 이 중에 읽고 싶은 책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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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도 벗기지 못한 '혜경궁 홍씨' 의 가면.



"남편을 잃었는데 아들까지 잃겠습니까. 그 때의 아픔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을겁니다."


[이산] 의 '혜경궁 홍씨' 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산] 속 혜경궁의 모습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자애로운 부인이고, 당파에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뻔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역사 속 혜경궁의 모습은 과연 그러할까. 드라마 [이산] 이 벗기지 못한, 아니 어쩌면 벗기지 않은 혜경궁 홍씨의 '참모습'. [한중록] 으로 만들어 진 혜경궁의 가면을 벗겨보자.


남편을 버리다.


영조 20년 1월 9일. 열살의 '세자빈' 을 앞에 두고 장차 임금의 장인이 되는 홍봉한이 입을 열었다. "궁중에 들어가면 3전 섬김을 삼가고 조심해 효성으로 힘쓰고 동궁 섬김을 반드시 옳을 일로 돕고, 말씀을 더욱 삼가해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소서." 어린 세자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과 나라에 복을 닦으라." 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 깊이 새기고 어린 세자빈은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사람이 영조와 정조, 순조의 시대를 관통한 여인, 혜경궁 홍씨였다.


이렇게 '집의 복을 닦으라.' 는 아버지 홍봉한의 말 한마디는 혜경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백두의 처지였던 홍봉한이 하루 아침에 세자의 장인이 되고, 숙부인 홍인한이 세도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노론 명가로 일어나기 시작한 풍산 홍씨 가문을 위해 혜경궁은 나라와 남편과 자신을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성공이자, 숙부의 성공이었고 곧 자신의 성공이기도 했다.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 을 잇는 단 하나의 혈육, 그리고 장차 왕통을 이어나가야 할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겉으로 보기엔 '최고의 결합'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합은 조선 최고의 비극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모순된 결합이었다. '소론' 을 지지하는 세자와 '노론' 명가의 세자빈은 섞일래야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은 남편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에서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편한 몸을 치유하러 나간 온양 행궁에서조차 백성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혜경궁의 말처럼 그저 '미치광이' 에 불과한 정신병자였다면 영조가 10여년 동안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나 혜경궁은 이상하게도 '일관되게' 사도세자 정신병자설을 고집했다.


혜경궁은 남편의 원대한 꿈을 가장 지척에서 지켜보았다. 사도세자의 꿈은 '노론정권' 을 뒤집어 엎고 새로운 '소론정권' 을 세우는 것이었다. 썩을대로 썩어버린 노론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역학구도를 구상하는 사도세자의 꿈은 혜경궁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그녀는 사도세자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노론의 '스파이' 로 활약하기로 결심했다. 사도세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혜경궁의 입을 통해 궐 밖으로 빠져나갔고 노론은 혜경궁의 도움에 힘입어 사도세자 제거라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아무렇지도 않게 꾸밀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부인이 자신이 아닌 가문을 택했다는 처참한 상황에 영조의 어린 부인인 정순왕후 김씨가 가세하면서 사도세자의 입지는 더더욱 궁색해졌다. 사도세자는 노론이라는 강적이 밖에서 둘러 싸고 있는 위급한 형국에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부인 혜경궁과 법적인 어머니 정순왕후, 생모인 영빈 이씨 모두 바깥에서 이뤄지는 '사도세자 제거 음모' 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베겟머리 송사가 송사 중에 으뜸' 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사도세자는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바깥과 안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공격에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밖에 없는 강을 건넜다. 이것은 혜경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그날,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 목숨이 그 날 마칠 것도 스스로 염려하여 세손을 경계 부탁하고 왔었는데 동궁(사도세자)께서는 생각과 다르게 나더러 하시는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워." 하시기에 내가 눈물이 드리워 말없이 허황해서 손을 비비고 앉았더니, 이 때 대조(영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신다는 전갈이 왔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혜경궁을 향한 사도세자의 원망어린 발언이다. 지금의 말로 풀자면 "나는 죽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살 것 같으니 너의 뜻이 참 무섭다." 는 한탄이었다. 이어서 사도세자는 혜경궁에게 이런 말까지 남긴다. "자네가 참으로 무섭고 흉한 사람일세.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기에 오늘 내가 나가서 죽겠기로 그것을 꺼려 휘향을 내게 안 씌우려는 그 심술을 알겠네."


'나는 죽는데 너는 안 죽으니 이상하다.' '참으로 무섭고 흉하다' '내 아들을 데리고 혼자 오래 사려고 한다' '심술이 가득하다' 는 폭언은 10여년 넘게 자신과 함께 살아 온 부인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서슴없이 혜경궁에게 그런말을 퍼부었다. 운명의 그 날, 사도세자도 혜경궁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을 제거할 수 밖에 없는 혜경궁과 부인의 가문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도세자,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결합이었던 것이다.






아들의 즉위를 방해하지 마라.


모두가 알다시피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아사했다. 온 몸이 굳고, 손톱이 다 빠질 정도로 뒤주 속에서 고통의 시간을 지냈던 사도세자는 대처분 8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 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뱃놀이를 떠나 있었고, 혜경궁 홍씨는 그런 아버지에게 사도세자를 도운 인물이 소론 영수 조재호임을 고해바쳤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상관없이 그렇게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위해 성심을 다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한 충성의 반 만큼만 혜경궁이 사도세자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사도세자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비명에 횡사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사도세자를 죽인 '뒤주' 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봉한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훗날 뒤주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힘들어 '일물(一物)' 이라고 불리는 이 뒤주는 홍봉한이 직접 영조에게 귀뜸해 대처분 현장속으로 들여 놓았다. 그러나 혜경궁도, 홍봉한도 이 뒤주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중록] 에서 볼 수 있듯 혜경궁은 그 처참한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한 듯 구구절절한 변명만을 꺼내 놓을 뿐이다.


그렇게 노론의 '대처분' 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얻었다.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혜경궁의 착각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마당에 노론이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까지 죽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연산군의 비극에서 볼 수 있듯 세손이 살아 있는 세상은 노론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결국 노론은 사도세자에 이어 '세손' 까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른바 '택군의 정치' 였다.


"남편을 죽였으니 아들도 죽여라." 노론이 혜경궁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한가지였다. 허나 혜경궁은 차마 아들까지 버릴 순 없었다. 혜경궁은 노론과 가문의 '세손 제거 결정' 에 누구보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예상 외로 거센 혜경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손을 제거해야만 했다. 사도세자가 자신들의 손에 의해 죽은 이상 어차피 세손과 노론은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 이었다. 혜경궁의 남편인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 선 것이 아버지 홍봉한이고, 혜경궁의 아들인 세손을 죽이는데 앞장선 것이 숙부 홍인한이라는 사실은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혜경궁의 모순이었다. 사도세자 제거 음모와 달리 혜경궁은 가문의 일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것처럼 세손을 살릴 수 있었던 것도 오직 혜경궁과 영조 뿐이었다.


영조 51년, 영조는 백관들을 불러 놓고 "어린 세손이 노론-소론-남인-소북을 알겠는가? 국사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와 이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지 알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또한 그것을 보고 싶다." 며 사실상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는 노론에게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과 같은 하명이었다. 영조의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이 바로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는데 그 대답이 그야말로 명언(?)이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나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지 알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국사나 조사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즉, 세손은 나랏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세손이 절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즉위를 막고야 말겠다는 노론의 강인한 의지가 담긴 한 마디였다.


홍인한의 이 발언은 훗날 홍인한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데 현장에서 들은 영조와 세손 역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영조는 "참으로 흉하다. 어찌 국사를 함께 논하겠는가." 라며 자리를 빠져나갔고 숙부의 기가막힌 발언을
들은 혜경궁은 숙부에게 "세손의 즉위를 방해하지 말라." 라는 경고문을 발송했다. 홍인한이 이 편지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와있는 바가 없으나 아마도 콧방귀를 뀌지 않았을까.


그러나 혜경궁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이 발언을 30년이 흐른 뒤 혜경궁은 [한중록] 에서 충성심 어린 발언으로 뒤바꿔 조작해 놨다. 세손이 이 세가지를 모두 안다고 대답하면 영조가 "내가 그리 금하는 당론을 세손이 안단 말이냐?" 라며 역정을 낼까 두려워 홍인한이 구구하게 변명했다는 것이다. [한중록] 의 이 구절을 보다보면 끝끝내 자신의 가문을 버릴 수 없었던 혜경궁의 처지가 절절하게 드러나 보여 한스럽기까지 하다.


이처럼 노론의 세손제거 공작은 대담하고 치밀했다. 다만, 다행인 것 한 가지는 노론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손의 운명을 결정지을 결정권자 '영조' 가 세손을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영조는 삼종의 혈맥의 유일한 종손인 세손을 버릴 수 없었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과 며느리의 간청을 지켜보며 영조는 끝내 세손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고, 세손은 1777년 조선조 제 22대 왕이 된다. 바로 '명군' 정조의 탄생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무너뜨린 자신의 가문.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데에는 영조와 혜경궁 홍씨의 힘이 지대했다. 정순왕후 김씨를 위시한 외척가문의 발호와 풍산 홍씨 집안의 음모는 혜경궁에 의해 일차적으로 차단됐고, 영조에 의해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남편은 버려도 아들은 버리지 못했던 한 어머니의 절절한 모성이었다. 훗날 혜경궁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온 몸을 내 던지지만 적어도 정조의 즉위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 정조의 즉위로 이어지는 비극은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다. 사도세자 제거가 새로운 비극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정조의 즉위는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정조의 즉위 일성은 노론에게도, 혜경궁에게도 가슴 철렁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된 정조의 첫 마디였고 혜경궁은 그 발언과 함께 자신의 가문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했다. 혜경궁의 예상처럼 정조의 '복수' 는 처절하게 감행됐다. 자신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순왕후 가문은 풍비박산 났고, 노론의 주요 대신들이 귀양길에 올랐다. 정조의 조용한 '복수' 의 마지막 타겟은 당연히 '세손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던 혜경궁의 숙부 홍인한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혜경궁이 받은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혜경궁이 정조의 '복수' 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식투쟁'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오라비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한 것처럼 혜경궁 역시 아버지와 숙부를 살리기 위해 단식을 감행했다. 혜경궁의 단식 때마다 정조는 "아! 내가 있는 것은 곧 자궁(혜경궁)의 덕이니 어찌 자궁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라며 탄식했다. 홍봉한과 홍인한을 죽이는 순간 사도세자에게는 효도가, 혜경궁에게는 불효가 되는 것 역시 정조가 처한 딜레마라면 딜레마였다.


정조조에 이르러 풍산 홍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했다. '망국동에 망정승' 이라고 불리던 홍봉한-홍인한 형제는 위풍당당한 위세에도 불구하고 손자에 의해 귀양길에 올랐고, 끝내 부활하지 못하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혜경궁으로서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는 통탄이었으나 대 놓고 불평할 순 없었다. 이미 혜경궁이 살고 있는 나라 조선은 풍산 홍씨의 나라가 아닌 '정조의 나라' 였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가문의 부활을 꿈꾸다.


혜경궁은 '가문의 부활' 을 23년 동안 꿈꿔왔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 있는 한 가문은 부활할 수 없었다. 아들이 임금이면서 자신의 가문은 몰락한 이 현실은 혜경궁 스스로 남편이 아닌 가문을 택한 것으로 자초한 일이었다. 혜경궁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가문의 부활을 곱씹었다. 그렇게 혜경궁이 꿈 꾼 '가문의 부활' 은 예상치 못하게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1800년 정조 24년 6월 28일, 종기로 투병 중이던 정조를 둘러싸고 치료상의 난맥이 드러난다. 정조 스스로 의학 지식이 뛰어난 군주였고 궁중 의원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치료는 쉽사리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정조의 최대 정적 중 한명이었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기 대문이다. 궁중의 한낱 아녀자로서 임금의 치료에까지 간섭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파격이었으나 노론 대신들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조 독살설' 의 서막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세가 선조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니 성향정기산이라는 탕약을 올려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순왕후의 하달을 당시 도제조 이시수가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아녀자의 말 한마디에 임금의 치료가 우왕좌왕 하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 정순왕후는 내시를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겠다며 직접 대전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했다. 말할 나위 없이 사태가 급박했다.


사태의 급박함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누구보다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이었다. 정조가 죽어야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처지였음에도 혜경궁은 아들과 가문을 맞바꿀 정도로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정순왕후가 대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곤 혜경궁은 그 즉시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전으로 향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처럼 외간의 대신들은 혜경궁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었으므로 잠시 물러났고 정조를 둘러싼 노론 대신들의 방어벽은 혜경궁에 의해 다시금 허물어졌다. 혜경궁은 동궁을 데리고 정조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대전에 들어갔다.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 정조를 죽여야 하는자와 살리고자 하는 자의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혜경궁이 대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조의 안색을 살핀 혜경궁은 자전과 함께 처소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정순왕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결국 혜경궁이 처소로 돌아간 뒤 정순왕후는 다시 한 번 정조의 치료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라는 명과 함께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 둘이 자리잡았다. 투병 중인 임금과 그 임금을 죽여야만 사는 대비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지어졌다. 잠시 뒤 방안에서는 정순왕후의 곡소리가 들렸고 정조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정조를 낳은 혜경궁도, 부인인 효의왕후도 아닌 정조의 최대 정적, 정순왕후였다.





끝내 가문을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 홍씨.


정조 사후, 어린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했다. 정순왕후는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하는 한편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을 사사하는 등 풍산홍씨 가문에는 잔혹한 대처분을 내렸다. 외척은 자신의 집안 하나면 된다는 정순왕후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다시금 혜경궁 홍씨를 절망에 빠뜨렸다. 훗날 혜경궁이 "흉하도다, 흉하도다." 라고 탄식한 정순왕후의 인품은 바로 이토록 잔혹했다.


혜경궁이 자신의 가문을 살릴 수 있었던 때는 정순왕후가 죽는 그 순간이었다.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과 정조의 죽음의 가장 생생한 목격자임을 자처하며 [한중록] 을 편찬했다. 그리고 순조에게 "내 아버지와 가문의 신원을 회복 시켜달라." 며 이는 "선왕의 유지" 라고 강변했다. 정조도, 혜경궁도, 정순왕후도 모르는 주장이었지만 혜경궁은 일방적으로 이것을 주장하며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 에서 펼쳐지는 풍산 홍씨 가문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절절한 변명과 순조에게 펼치는 생떼와 같은 일방적 주장은 어쩌면 사도세자의 비극 조차 외면하려 했던 혜경궁 홍씨의 자기 변명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혜경궁은 한 평생을 가문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뜻을 저버린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70평생 혜경궁을 옥 죈 것은 '가문의 부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가문을 위해 [한중록] 을 지었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졌다. 그 업보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낳았고, 정조의 비극을 낳았고, 결국은 조선을 소통과 변화의 시대에서 폐쇄와 퇴보의 시대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지금껏 드라마에서의 혜경궁은 남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실제 혜경궁은 강인한 어머니는 되었을지언정 자애로운 부인이나 현명한 여성은 되지 못했다. 혜경궁이 처한 모순이 정조의 모순이었고, 그 모순이 결국 정조의 개혁을 주춤거리게 할 수 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혜경궁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더라면 정조의 개혁은 조금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집의 복을 닦으라' 라는 아비의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았던 '풍산 홍씨' 의 여인.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밖에 없었던 잔혹한 여인. [한중록] 과는 전혀 다른 실제 역사 속 혜경궁 홍씨의 슬픈 가면은 지금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절절한 삶을 정 반대로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 로 숨쉬고 있다.


참고자료 : [이한우 군주열전-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이덕일 역사서-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이덕일-사도세자의 고백][신봉승-조선 정쟁사][혜경궁 홍씨-한중록][일성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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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실제 혜경궁은 그 제목처럼 구절양장 기나긴 목소리로 한을 토해냈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경궁이 맨 처음 이 책에 붙은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閑中錄]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의 극단적 차이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사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간단하다. 혜경궁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도세자 형제들, 아니 영조 일가는 왕족의 일원이었으나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세자의 두 누님인 화평.화협옹주는 세자가 10대 초.중반일 때 요절하였다.그리고 혼자 남게 된 세자의 막냇누이 화완옹주는 훗날 주위의 꾐에 빠져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조카인 세손(정조)의 반대편에 섰다가 끝내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이러한 여조 일가의 불행한 삶은 혜경궁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의심 없이 형성될 트릭이 숨겨져 있다.

혜경궁은 영조가 영빈 이씨 소생 중 큰딸 화평옹주는 매우 사랑했으나, 둘째 딸 화협옹주와 세자는 극도로 미워했다는 점을 가장 애끓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가 옥사 등 불길한 정사를 보고 오면, 꼭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담장으로 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귀를 씻는 차비(差備:사람)로다"라고 자조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처럼 영조를 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한 부왕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영조와 그 일가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잠깐 검토해보자.


영조가 화평옹주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조가 불길한 말을 들은 후 씻은 물을 버릴 정도로 저주했다는 화협옹주에 관한 기록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두 기록의 내용이 너무나 판이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미움의 대상이었다는 화협옹주가 병에 걸렸을 때 영조의 거동을 [영조실록]에서 살펴봄으로써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영성위(永城尉) 신광수(新光綏)에게 시집간 화협옹주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황급히 화협옹주의 사가로 거동하려 했다.

하지만 친딸이라 해도 국왕은 사가로 분병이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 영조 자신이 의원의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했고 부교리 채제공도 두 번씩이나 차자를 올려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호위 군사를 빨리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판서 김상성과 훈련대장 김성응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들의 부절(符節:군사 지휘권을 뜻하는 표신)을 빼앗으러 간 선전관이 표신(標信: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사용하던 문표)을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군율을 시행할 정도로 화협옹주의 병환에 당황하며 초조해하였다.

황황히 화협옹주의 사가에 행차한 영조는 밤이 깊도록 환궁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나 문병도 안 되는 판에 임금이 사가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약방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영조에게 환궁할 것을 거듭 청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영조가 환궁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틀 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화협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려 하였다. 이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영조 자신이 환자임을 상기시키며 만류했으나 영조는 끝내 문상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김약로가 말했다.

"지난해 화평옹주 상사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이 손상되셨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몸이 손상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 때문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한 것과 연관시키는가?" 

이처럼 [영조실록]은, 영조가 화평옹주는 편애한 반면 화협옹주는 저주했다고 한 혜경궁의 증언과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화평, 화협 두 옹주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영빈 이씨의 첫 소생인 화평옹주를 화협옹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또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간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그녀의 사가로 가서 밤을 새웠다. 화협옹주가 죽기 4년 전인 영조 24년(1748)의 일이다. 영조는 이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항상 마음이 답답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 중에서는 현빈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 중에서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을 당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영조는 화평옹주는 물론 화협옹주도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혜경궁의 묘사대로 "용모도 절숭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운" 화협옹주를 영조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2년 후 상일(祥日)에도 그녀의 집으로 거동했다. 화협옹주의 명복을 빌면서 이날 하루를 경건하게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어가 행차 때 일체의 취타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화협옹주의 옛집에 들러서는 깊은 밤까지 옹주의 명복을 빌다가 신하들이 여러 번 환궁을 간청한 끝인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화협옹주의 기일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런 모습 어디에서도, 귀 씻은 물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저주하는 영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조는 이처럼 다정다감한 성품이었고, 그답게 일가 모두를 사랑했으나 그중에서 첫딸인 화평옹주와 효장세자의 부인이자 큰며느리인 현빈조씨에게 더 마음이 쏠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실제 영조는 화평옹주 못지않게 현빈 조씨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영조 27년(1751) 11월, 현빈이 세상을 뜨자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무신년(효장세자가 죽은 해) 이후로 내가 의지한 바는 현빈이었는데, 이제 그가 또 세상을 뜨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현빈을 이처럼 아낀 것은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실과 그녀의 친정에 대한 남다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실을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여, 갑자기 삶은 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현빈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 뒤에 대비의 하교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삶아 왔다고 한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친정 어른이 고관이 되면 기뻐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현빈은 영돈녕(領敦寧:현빈의 숙부 조현명)이 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 숙부는 왜 물러가서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니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현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사신(思愼)파는 시종일관 영조의 탕평택에 호의적이었다. 현빈의 아버지 조문명(趙文命)과 숙부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때 탕평택을 이끌었던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그럼에도 현빈은 척리(戚理:임금의 외척)가 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현빈과 그 집안의 이런 자세가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문명과 조현명 형제, 그의 아들들은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훗날 사도세자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조재호도 바로 사도세자의 형수인 현빈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의 말대로 영조가 화평옹주만 사랑하고 화협옹주는 극도로 미워한 정신병자라면, 현빈 조씨를 사랑한 반면 혜경궁은 극도로 미워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헤경궁은 영조가 사도세자는 미워했어도 자신은 사랑했다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영조가 현빈 조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오지만 혜경궁을 사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 옹주, 아니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두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영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성품이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영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노비의 처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노비의 형편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 남종은 장가를 못 가며 여종은 시집을 못 간다. 부부가 있은 후에야 부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면하라"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이게까지 세심산 배려를 베풀 줄 아는 영조가,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물며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미워할 까닭이 있었을까?

영조가 극진히 아꼈던 화평옹주는 시종일관 세자의 편을 든 자상한 누이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조의 통곡 속에 화평옹주가 죽은 것은 세자가 대리청정하기 6개월 전인 영조 24년 6월로, 세자 나이 열네살 때였는데, 그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조는 화평옹주가 죽은 6개월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 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정사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처럼 여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 두 부자 사이에 영조가 극히 편애했던 화평옹주가 나서서 중재할 만큼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네 살짜리 외아들과 쉬흔아홉 살의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겁이 나서 못 하면 (영조가) 남 보는 좌중에서 꾸중하시고 흉도 보셨다"라고 하여, 영조가 시종 세자를 미워한듯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시키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량이 어떻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뒤에서 세자의 기반을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자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조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부담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혜경궁의 기술 중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선희궁이라 불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한 부분이다. 영빈 이씨는 천한 나인(內人)출신이었다. 혜경궁은 세자궁 나인들이,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선희궁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궁 소속의 궁녀들이라면 몰라도 세자를 모시는 궁녀들이 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0~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으로 기구하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惡妻)로 의심하였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이러한 처지에서 쓰여진 한중록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포할까??
한중록에서는 영조는 변덕이 심하고 치매 때문에 사람도 못알아봤다고 나오며, 사도세자도 광폭했다고 나오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MBC 사극 이산에서는 한중록의 기곡을 받아들여서 영조가 치매인 걸로 묘사하고 있던데... 과연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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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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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훈방 처방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정순왕후의 세상

8. 식민지 조선 백성들의 군주(제26대 고종) -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홍선군의 아들 명복
고종과 일본의 악연
국내의 혼란과 일본의 내정간섭
일본의 병탄과 고종의 대응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
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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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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