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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쓴 글은 역시 옛날 이야기보다 재미있다. (역사니까 옛날 이야기 맞구나..ㅋ)

 

 

유약한 숙종, 깨방정 숙종... 숙종의 진짜 모습은?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4월 26일 제11부 때부터 전국 시청률 20%대(TNmS 집계 기준)를 돌파한 MBC 드라마 <동이>가 주는 색다른 재미 중 하나는 '숙종의 이미지 변신'이다.

 


 

종래 사극에 나온 숙종과 달리 <동이> 속의 '깨방정 숙종'은 밝고 경쾌한 이미지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따금씩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구사하는 숙종(지진희 분)은 궁녀들에게 손을 흔드는가 하면 동이(한효주 분)에게 등을 밟히기도 하는 등, 파격적인 군주의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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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드라마 <동이>에서 숙종역을 맡은 배우 지진희.
ⓒ MBC

어쩌면, 드라마 <동이>의 '숙종 이미지 바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파격적으로 전개돼도 무방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기존의 숙종 이미지는, 엄밀히 말하면, 사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숙종의 이미지는 '궁중의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유약한 지아비'의 이미지다. 사실, 이런 이미지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악하고 시기심 많은 첩인 교씨에게 눈이 멀어 지혜로운 조강지처인 사씨를 내쫓았다가 나중에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소설 속 유한림(유연수)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숙종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어 우리의 인식 속에 전해져 왔다.


 

당연한 언급이지만,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당시의 사실관계를 일정 정도 반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만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김만중(1637~1692년)은 46년간에 걸친 숙종(재위 1674~1720년)의 치세 중에서 그 절반도 안 되는 18년밖에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숙종이란 군주를 전체적으로 통찰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런 김만중이 남긴 소설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숙종


 

그렇다면 숙종의 올바른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사료에 드러난 객관적 상황을 근거로 숙종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숙종이 과연 여인천하에 휘둘렸는가?'하는 문제에만 국한하여 숙종의 이미지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이용했는지를 판단하고자 할 때 가장 과학적인 방법 중 하나는, 양쪽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어느 쪽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고 최종적으로 생존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A가 "나는 B를 이용했다"고 주장할지라도 두 사람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B의 목적이 달성되었거나 혹은 B가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면, A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자부하든 간에 둘 중 상대방을 이용한 쪽은 B라고 해석하는 게 가장 객관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럼, 숙종과 여인들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어느 쪽일까? 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어느 쪽일까?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 51년간 조선의 여당은 기본적으로 서인 당파였다.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서인이 만년 여당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런데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발생한 제2차 예송논쟁을 통해 남인 당파가 집권에 성공한 이후로 숙종 연간(1674~1720년)에는 집권여당이 수시로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680년에는 경신대출척(경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부활했다가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정권이 기사회생하고, 1694년에는 갑술옥사로 서인정권이 되살아났다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면서 소론정권이 나타나고, 1710년에는 경인환국으로 노·소론 균형 국면이 조성되었다가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정권이 성립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종의 '균형자' 혹은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격한 대결의 와중에 어느 일당이 권력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한쪽이 너무 커지기 전에 다른 쪽에 힘을 실어주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당파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처첩에 대한 숙종의 태도' 사이에 고도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했다는 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중전이 된 것은 서인이 재집권(1680년)에 성공한 직후의 일이었다. 만약 남인이 계속 정권을 잡았다면, 인현왕후가 인경왕후의 뒤를 이어 1681년에 중전 자리를 차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서인 출신의 새로운 중전은 서인 정권의 부활과 함께 출현했던 것이다.

 

 

 


 

'챔피언' 장옥정의 자리를 불안하게 만든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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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 여인천하의 세 주역. 왼쪽부터 최숙빈(한효주 분), 장희빈(이소연 분), 인현왕후(박하선 분).
ⓒ MBC

인현왕후가 중전이고 서인이 여당이던 시기에, 숙종은 남인의 지원을 받는 장옥정(장희빈)의 위상을 계속 높여주었다. 장옥정은 1686년에 종4품 숙원에 책봉되고 1688년에 정2품 소의로 승진한 데 이어 1689년 초에 정1품 빈으로 승격되었다. 서인과 인현왕후가 너무 세지지 못하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숙종 쪽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1689년에 인현왕후가 쫓겨나고 서인정권이 붕괴하면서 장옥정과 남인의 세상이 도래했지만, 숙종은 이번에는 장희빈에 맞설 대항마를 서서히 육성했다.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숙빈 최씨)이 바로 그 대항마였다. 장옥정이 중전 자리에 있었던 시기에, 최 숙빈은 궁녀에서 후궁으로 뛰어올랐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구도로 전개되던 여인천하에 최 숙빈이라는 다크호스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전혀 의외의 인물을 등장시켜 여인천하를 복잡하게 만드는 한편 '챔피언' 장옥정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숙종이었던 것이다.


 

1694년에는 인현왕후와 서인정권이 함께 복귀했고 이때 정계에서는 남인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장희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세 여인이 궐 내에서 공존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 경종)이 무사히 왕위를 잇도록 하기 위한 숙종의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인현왕후의 힘이 너무 커지지 않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런 조치는 결과적으로 서인과 인현왕후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상태는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종식된 1701년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당쟁과 여인천하가 상호 맞물려 돌아간 위의 과정을 보노라면, 숙종이 결코 여인천하에 휘둘린 유약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 여인이 '때때로'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숙종이 성취한 목적에 비할 것이 못 된다. 숙종은 처첩을 다루는 과정을 통해 '매번' 당쟁의 균형을 조절하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는가?


 

숙종시대 여인천하가 끝난 1701년에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숙종 27년(1701) 음력 8월 14일에 여인천하의 한 축인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최 숙빈은 "인현왕후 생전에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숙종에게 귀띔하여 장 희빈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물론 장 희빈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명분으로 음력 10월 8일에 장 희빈에게 자진(自盡)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여인천하의 세 주역 중 2명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 숙빈이 여인천하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여인천하 안에서의 승리'에 불과했다. 인현왕후·장 희빈의 잇따른 죽음으로 최 숙빈에게도 중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장 희빈이 죽기 전날인 음력 10월 7일에 숙종이 "앞으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한다"는 왕명을 내림에 따라 최 숙빈이 혹시라도 품었을지 모르는 '왕후의 꿈'은 순식하게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중전은 못 되더라도 최 숙빈이 그대로 대궐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명부는 최 숙빈의 '독재' 하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을 경계해서였는지 숙종은 1702년에 내명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새로운 중전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인 데에 이어 세 명의 후궁을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운 내명부는 인원왕후 밑에 김 영빈(영빈 김씨), 박 명빈(명빈 박씨), 유 소의(소의 유씨) 등이 포진하는 구도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 숙빈은 궐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최 숙빈은 1701~1704년 사이에 숙종 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현왕후·장 희빈·최 숙빈 구도를 끝내고 인원왕후 중심의 새로운 내명부 체제를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여인천하 종결서 드러난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가 종결을 향해 치닫던 1701년에 숙종이 취한 태도를 보노라면, 여인들의 파워가 자신의 파워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항상 고심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인현왕후가 죽자 장 희빈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최 숙빈에게도 궐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숙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내명부의 그 어떤 여인도 절대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 했던 냉혹하고 비정한 숙종의 이미지를 읽을 수 있다.


 

만약 숙종이 처첩들에게 휘둘리는 신세였다면, 여인천하가 종결되기 전에 그의 권력이 먼저 종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도리어 숙종은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런 숙종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여인천하에 휘둘리는 숙종'이 아닌 '여인천하를 이용하는 숙종'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여인천하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숙종의 모습. 여인천하를 종결시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숙종의 모습.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사씨남정기>가 만들어낸 숙종의 이미지가 역사적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겉으로는 남에게 휘둘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영악한 군주'의 모습. 그것이 숙종의 진짜 이미지가 아닐까. 드라마 <동이>에서는 '깨방정 숙종'을 내세워 숙종의 이미지를 바꾸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각인된 숙종의 이미지는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파격적으로 탈바꿈되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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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드라마였던 동이 속의 숙빈 최씨와 숙종의 실제 만남은 어땠을까?
궁녀와 지존의 극적인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수문록: 조선 후기의 문신 이문정(李聞政)이 4년 2개월 동안 재위한 경종연간의 역사를 들은 대로 기록한 책.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흔히 하는 말처럼 남녀 간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최숙빈과 숙종이 처음 만난 때는 숙종 18년(1692)이었다. 이때 최숙빈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씨가 7세의 나이로 입궁한 때가 숙종 2년(1676)이므로, 두 사람은 무려 16년간이나 같은 공간에 살다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아무리 궁녀의 행동반경이 제한되고 왕과의 접촉이 극히 힘들었다 해도, 한 공간에서 16년간이나 같이 살다 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한쪽이 다른 쪽을 봤거나 혹은 양쪽이 서로를 봤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위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의 첫 만남에 관한 사료의 내용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료에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숙종 18년(1692) 이전에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이다. 

이들의 첫 만남을 증언하는 사료는 이문정(1656~1726년)이 지은 <수문록>이다. 이문정은 최숙빈보다 14세가 많은 사람이다. 동지중추부사(종2품, 차관급)를 지낸 이문정은 신임사화(1721~1722년) 이후 학문과 집필에만 전념한 인물이다.

 

▲ 이문정의 <수문록>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인현왕후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있을 때인 숙종 18년(1692)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문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밤중에 궁궐을 거닐던 숙종은 조명이 유독 화려한 어느 궁녀의 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이 방안을 몰래 엿보니, 웬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그 앞에 꿇어 앉아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종은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렇게 해서 최 숙빈과 숙종이 조우하게 되었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숙종이 방문을 열어젖힌 뒤의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을 통해, 우리는 최 숙빈이 그 순간에 얼마나 대담성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방문을 열어젖힌 숙종은 "너 지금 뭐하냐?"고 물었다. 당시의 정황을 다룬 이문정의 <수문록>에서는 "선대왕(先大王, 숙종)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고 기록했다.

 


왕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최 숙빈의 '대담성'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한밤중에 잔칫상을 차려 놓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숙종이 묻자, 최숙빈이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 <수문록>

 

 

 

 

 "선대왕(先大王, 죽은 임금 즉 숙종)이 하루는 밤이 깊어진 후에 지팡이를 들고 궁궐 안을 돌아다니다가 나인들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나인(궁녀)의 방만 등촉이 휘황찬란하였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두 손을 마주잡고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선대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그 문을 열고 연유를 물어보았다."

 

 

숙종은 좀 '솔직한' 군주였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최측근들에게 숨기지 않았던 듯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그 의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방문 앞에 다가선 숙종은, 창호지에 침을 묻혔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의 체면을 내팽긴 채 방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방안에서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궁녀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로 상 앞에 꿇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야심한 시각에 말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숙종은 결국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그 궁녀에게 물어보았다.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냐고. 이 궁녀가 바로 훗날 영조를 낳게 될 최씨였다. 이것이 두 사람의 우연한 첫 만남이었다.

이후의 기사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날 밤 궁녀 최씨는 폐서인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기념하는 의식을 홀로 거행하다가 숙종에게 우연히 들켰고 그런 모습에 감동된 숙종이 최씨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 <수문록>의 설명이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 젖히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임금의 얼굴이 보인다면, 웬만한 궁녀들은 기겁을 하고 놀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임금이 "너 지금 뭐하냐?"라고 물어보면, 아마 말을 더듬거리며 제대로 대답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최 숙빈은 마치 사전에 준비라도 해놓은 듯이 매우 침착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녀는 중전(폐비 인현왕후)의 시녀로서 특별히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 지금 뭐하냐?"라는 질문에 대해 "네, 저는 지금 뭐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그는 자신이 인현왕후의 시녀였다며 자기소개부터 먼저 했다. 최 숙빈이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현왕후와의 관계를 밝힌 다음에 최 숙빈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일은 중전의 탄신일입니다.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계시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시고 조석으로 드시는 것이라곤 거친 현미뿐입니다. 내일이 탄신일인데 누가 좋은 음식을 올리겠습니까? 소녀로서는 슬픔을 이길 수 없어서 이것을 차린 겁니다. 중전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이지만 도저히 진헌할 길이 없어서, 마치 실제로 진헌하는 것처럼 소녀의 방안에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당시 인현왕후가 죄인이고 장 희빈이 중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와 같은 대답은 사실상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인현왕후를 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그런 숙종 앞에서 폐비를 두둔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숙종을 비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웬만한 궁녀 같았으면 이런 경우에 자기 부모님 생신이나 기일 등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인현왕후의 생일을 들먹인 것은 최 숙빈이 보통 이상의 대담성을 소유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수 있는 위의 행위를 결코 '무모함'이라 표현하지 않고 '대담성'이라 표현한 것은, 최 숙빈의 행동이 평소에 축적된 고도의 상황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숙종은 '폐비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라'는 서인들의 상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숙종은 그런 상소들을 무시하곤 했지만, 계속 올라오는 상소문이 숙종의 심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최숙빈과 숙종의 첫 만남에 관한 <수문록>의 기록. 폐비의 탄신일을 기념하고 있다고 최숙빈이 대답하자, 숙종이 그로부터 감동을 받아 최숙빈을 가까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다. ⓒ <수문록>

 

 

 

최 숙빈은 인현왕후전에 근무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관심을 갖고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숙종의 질문에 대해 "저는 지금 폐비의 탄신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라고 당돌하게 대답한 것은, '이렇게 말해도 숙종이 진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황판단을 했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폐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이 바뀌고 있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아직까지는 폐비가 죄인의 신분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전을 쫓아낸 것은 잘못'이라는 메시지를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칭찬을 들을 가능성보다는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일이었다.

결국 최 숙빈의 대담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숙종은 "죄인의 생일을 기념하다니! 이런 발칙한!"이라고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최 숙빈의 행동으로부터 신선한 감동을 받아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수문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그제야 생각해 보니, 다음 날이 정말로 중전의 탄신일이었다.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시고는 마침내 그를 가까이하셨다."

침방나인으로 바느질 생활을 하던 최 숙빈이 숙종과 친분을 맺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결정적 요소는 위와 같이 최 숙빈 특유의 대담성이었다. 판단력을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인 대담성이 그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이하 생략 =======================

 

 

 

전체 기사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동이에게 껄떡댄 숙종? 실제론 최숙빈이 대담했다 

동이와 숙종의 만남, 실제론 더 드라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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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 숙종 즉위년, 甲寅)  
  · 1월
: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승하
  · 7월 : 대왕대비(장렬왕후)의 인선왕후에 대한 복제를 기년(朞年)으로 정함
  · 8월 : 현종 승하(해시(밤9-11)
  허적을 원상으로 삼음
  왕세자(숙종) 즉위(인정문에서)
  송시열을 서울로 들어오도록 함 - 오지 않음
  · 9월 : (영부사) 송시열에게 능지(묘비문)를 지어 올리도록 명함
  송시열이 사양하는 상소 올림
  정치화를 영부사로 삼고 송시열은 판중추부사(판부사)로 내림
  유생 곽세건이 송시열에게 내린 명이 부당하니 거두어 달라는 상소 올림
  (송시열은 선왕의 적통을 문제 삼은 이다)
  · 10월 : 송시열이 지문 짓기를 사양하자 김석주에게 짓도록 함
  (송시열에 관한 견제가 구체화)
  · 11월 : 이단하가 지어올린 대행왕의 행장을 고쳐 쓰게 함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라고 썼던 대목이 오인례였음을 명시하라)
  · 12월 : 기해년 의례(儀禮)를 정한 신하들을 추죄함. 송시열(宋時烈)의 관작을 삭탈함
     
  1675년(숙종 1, 己卯)  
  · 1월
: 송시열을 덕원(德源)에 유배.
  · 3월 : 복창군·복평군을 궁녀 간통죄로 유배
  · 4월 : 윤5월 송시열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함
  · 8월 : 윤휴의 건의로 복제를 3년으로 함.
  · 9월 :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을 올림.
  * 김우명(金佑明, 1619-1675) 죽음.
     
  1676년(숙종 2, 丙辰)
 
  · 2월
: 이황을 모신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사액함.
  · 4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8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677년(숙종 3, 丁巳)
 
  · 3월
: 호패법 시행.
  · 9월 :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산성(開城山城)을 수축함.
  · 11월 : 선사진(宣沙鎭)을 가도로 옮김.
  용강(龍岡)에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함
  · 12월 : 호포법(戶布法)의 시행을 논의함.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1678년(숙종 4, 戊午)
 
  · 1월
: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여 유통시킴.
  · 3월 : 청의 사신이 조선의 문적(文籍)을 얻어감.
  · 4월 : 공명첩(空名帖)을 폐지.
  · 6월 : 관서, 호남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에게 주전(鑄錢)을 시킴.
  · 9월 : 각사노비(各司奴婢) 면천(免賤)의 한계를 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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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9년(숙종 5, 己未)  
  · 6월
: 허목(許穆)이 허적(許積)을 논핵함.
  남인이 청남(淸南) 탁남(濁 南)의 나뉨.

 

1680년(숙종 6, 庚申)  
  · 1월
: 외방의 주전(鑄錢)을 금지.
  · 4월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남인축출 서인집권. 윤휴 허적 등 남인 (南人)을 유배 보냄.
  서인(西人)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됨.
  허견(許堅) 등이 복선군(福善君)의 추대를 도모하다 처형됨.
  · 5월 : 허적(許積, 1610-1680), 윤휴(尹휴, 1617-1680)를 사사(賜死)함.
  송시열을 석방함.
  윤8월 오정창(吳挺昌) 정원로(鄭元老) 등을 처형.
  · 10월 : 장옥정이 궁녀로 입궐
  송시열을 등용.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 죽음.

  1681년(숙종 7, 辛酉)  
  · 1월
: 새중전의 간택에 관해 논의
  · 2월 : 인경왕후 발인
  · 3월 : 병판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간택하다.
  민유중을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으로 삼다.
  어영청(御營廳)에서 주전(鑄錢).
  · 4월 : 어의동의 별궁에서 납채례를 거행하다.
  납채례 : 대궐에서 간택된 왕비의 집에 혼인을 청하는 의식
  · 5월 : 장옥정이 대궐에서 쫓겨나감

  1682년(숙종 8, 壬戌)  
  · 1월
: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을 설치.
  · 5월 :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함.
  · 10월 : 허새(許璽)등을 처형.
  · 11월 : 전라감영에서 주전(鑄錢)함.
  * 허목(許穆, 1595-1682) 죽음.

  1683년(숙종 9, 癸亥)  
  · 3월
: 송시열 치사(致仕)함.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완성.
  장희재가 인조반정 회갑 축하연에서 숙정을 데리고 달아남.
  · 4월 : 폐지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할 것을 결정함.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당.
  · 7월 : 영남의 대동법을 개정함.
  · 12월 :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죽음.

  1684년(숙종 10, 甲子)  
  · 3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절목(社倉節目)을 올림.
  무산부(茂山府)를 새로 설치함.
  · 10월 : 중용언해(中庸諺解) 완성.
  * 김석주(金錫胄, 1634-1684) 죽음.

 

1685년(숙종 11, 乙丑)  
  · 1월
: 호패의 지패(紙牌)를 목(木), 각(角)으로 바꾸게함.
  경성부의 사부(士夫)에게도 방역(坊役)을 부과함.
  종각(鐘閣)이 불에 탐.
  · 9월 : 호패 위조자를 사형에 처하기로 함.
  · 11월 : 삼금(蔘禁)범죄의 식(式)을 정함.

  1686년(숙종 12, 丙寅)  
  · 1월
: 안주(安州)에서 주전(鑄錢)하고 차자(車子)를 제조.
  · 7월 : 진도에서 표류한중국인 80여명을 송환.
  · 12월 :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 설치의 다섯가지 이득을 말함.
  ▷ 이징명(李徵明), 상소하여 여총(女寵)을 논함.

  1687년(숙종 13, 丁卯)  
  · 5월
: 명안공주 죽음
  · 6월 : 동평군 이항을 혜민서제조로 봉함.
  · 7월 : 최석정(崔錫鼎)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개수함.
  · 8월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열조수교(列朝受敎)를 간행.
  · 9월 : 군문(軍門)에 육화진법(六花陣法)을 연습시킴.
  · 12월 : 숙종이 탕평책(蕩平策)을 유시(諭示)함.
  ▷ 만수전(萬壽殿) 불탐.
  * 김만기(金萬基, 1633-1687), 민유중(閔維重, 1630-1687),
  홍우원(洪宇遠, 1605-1687) 죽음.

  1688년(숙종 14, 戊辰)  
  · 2월
: 숙종이 남한산성에 행차.
  · 3월 : 평안도에 1년을 한도로 주전(鑄錢)케함.
  · 7월 : 소론 박세채(朴世采)을 내?i고 남구만 여성제(呂聖齊)를 유배함. 11월에 석방.
  · 8월 : 인조왕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죽음.
  · 10월 :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왕자(경종)을 출산함.
  · 11월 : 소의 장씨의 어머니가 옥교를 타고 들어오다 욕을 당한 일로 상소가 올라옴

  1689년(숙종 15, 己巳)  
  · 1월
: 왕자를 원자로 정함.
  소의 장씨를 희빈에 봉함
  · 2월 : 기사환국(己巳換局). 서인 실각, 남인 집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제주도에 유배 안치(安置), 6월에 사사(賜死)함.
  · 3월 : 홍치상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절도에 위리안치함.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삭탈함. 윤3월 사사(賜死).
  김익훈(金益勳) 장(杖)을 맞고 죽음.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
  · 4월 : 귀인 김씨를 폐위해 사가로 돌려보냄.
  홍치상을 교형에 처함
  · 5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함.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해 비로 삼음
  장형을 옥산부원군, 부인 고씨를 영주부부인, 계실 윤씨를 파산부부인으로 봉작함.
  * 김만중(金萬重)이 구운몽(九雲夢) 등을 지음.
  * 이단하(李端夏, 1625-1689) 죽음.

1690년(숙종 16, 庚午)  
  · 6월
: 원자(元子)를 세자(경종)로 책봉.
  · 9월 :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음. 열흘 뒤 죽음.
  · 10월 :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
  · 11월 : 진제(賑濟)를 위해 공명첩(空名帖) 2만장을 판매함.
  호적법을 밝히고 지패(紙牌)를 목패(木牌)로 바꿈.
  *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죽음.

  1691년(숙종 17, 辛未)  
  · 7월
: 세자를 위해 ‘한석봉천자문’을 편찬함
  · 10월 : 주전(鑄錢).
  · 12월 : 성삼문 등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림.
  삼남, 서북의 인재를 고루 등용함.
  북한산성의 축성을 결정함.

  1692년(숙종 18, 壬申)  
  · 3월
: 장희재를 총융사로 삼음
  · 8월 : 숙종이 창덕궁으로 돌아옴.
  총융청(摠戎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 10월 : 동(銅)을 북경에서 구입함.
  · 12월 : 8도감사에게 인명(人命) 남살(濫殺)의 폐를 엄금함.
  * 남용익(南龍翼, 1628-1692), 민정중(閔鼎重, 1628-1692),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죽음.

  1693년(숙종 19, 癸酉)  
  · 4월
: 궁인 최씨를 숙원으로 봉함
  · 7월 : 주전(鑄錢)을 호조(戶曹)에 전담시키고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함.
  · 10월 : 소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
  · 12월 : 소의 최씨가 낳은 왕자가 죽음.
  조사석(趙師錫, 1632-1693) 유배지에서 죽음.
  겨울에 대마도주가 본국인의 울릉도 어업의 금지를 요청함.

  1694년(숙종 20, 甲戌)  
  · 3월
: 왕세자가 서연을 시작함.
  갑술옥사(甲戌獄事). 남인 실각, 서인 집권.
  · 4월 : 소론 남구만(南九萬)이 영의정이 됨. 소론 등용.
  폐비 민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장씨를 폐위.
  · 5월 :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다시 종사.
  · 6월 : 숙원 최씨를 숙의로 삼음.
  · 8월 : 왜에게 왜인의 울릉도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함.
  · 9월 : 숙의 최씨가 왕자를 낳음(연잉군)
  어영청(御營廳)의 주전(鑄錢)을 허락함.

1695년(숙종 21, 乙亥)  
  · 4월
: 경기 충청지방에 도적이 횡행함.
  · 6월 : 서원(書院)의 첩설(疊設)을 금지함.
  · 10월 : 상평청(常平廳)의 주전(鑄錢)을 1년 기한으로 허가함.
  · 12월 : 버린 아이(遺棄兒) 수양(收養)의 법을 제정함.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죽음.

  1696년(숙종 22, 丙子)  
  · 1월
: 종묘악장(宗廟樂章)을 바로 고침.
  · 2월 : 사사로이 주전하는 자는 사율(死律)로 처벌함.
  · 4월 : 세자빈을 심호의 딸로 간택함. 세자가 관례를 치름.
  옥산부원군의 비석 파괴 사건으로 업동 등이 잡혀옴
  · 5월 : 세자가 가례를 올림
  · 9월 :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도항한 동래인 안용복(安龍福)을 추문(推問)함.

  1697년(숙종 23, 丁丑)  
  · 2월
: 대마도주가 막부(幕府) 명으로 왜인 울릉도 왕래 금지 통지.
  도성안에 있는 거지들을 각 섬에 보냄.
  · 4월 : 기아민의 구제를 위해 송첩(松帖)을 내줌.
  · 8월 : 중인(中人) 서얼(庶孼)의 통사자(通仕者)는 찰방(察訪)을 거친 후 수령으로 서용함을 허락함.
  · 10월 : 전국에 대기근.

  1698년(숙종 24, 戊寅)  
  · 1월
: 청에서 개시(開市)를 허락하고 속미(粟米) 4만석을 보내옴.
  숙종이 탕평(蕩平)할 것을 내림.
  · 8월 : 궁인 유씨를 숙원에 봉함.
  · 10월 : 사간원에서 지방의 생사(生祠)의 폐단을 규탄함.
  · 11월 : 노산군(魯山君)을 복위.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함.
  상궁 박씨를 숙원에 봉함

  1699년(숙종 25, 己卯)  
  · 6월
: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국조보감속편(國朝寶鑑續編)을 편찬.
  · 7월 : 영월의 단종릉 장릉(莊陵)의 개수도감(改修都監)을 설치함.
  · 9월 : 남형(濫刑)을 엄금함.
  · 10월 : 숙의 최씨를 숙빈에 봉함.
  전염병이 유행하여 25만명이 사망함.
  * 권대운(權大運, 1612-1699) 죽음.

1700년(숙종 26, 庚辰)  
  · 3월
: 유생(儒生) 사제(賜第)의 범위를 정함.
  최석정(崔錫鼎)에게 속록(續錄), 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수를 전담시킴.
  · 8월 : 선원보략(璿源譜略) 완성됨.

  1701년(숙종 27, 辛巳)  
  · 1월
: 문묘에 계성사(啓聖祠)를 세움.
  · 4월 : 청나라 사람이 압록강을 측량함.
  · 8월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죽음.
  · 9월 : 대행왕비를 무고(巫蠱)한 죄인 장희재를 처형하라 명함.
  장희빈을 자진하게 하라는 비망기를 내림.
  · 10월 : 동평군(東平君) 항(杭)을 사사함.
: 빈(嬪)을 후비(后妃)에 올리지 못하게 명함.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사사(賜死)함.
  장희재를 처형함.
  ▷ 무고(巫蠱)의 옥(獄) 일어남.

  1702년(숙종 28, 壬午)  
  · 1월
: 세자가 장씨의 상(喪)에 감.
  희빈 장씨를 양주 인장리에 장사지냄
  · 5월 : 이준명(李浚明) 등이 울릉도 도형(圖形) 및 토산물을 바침.
  · 10월 : 김주신(金柱臣)의 딸을 왕비로 책봉. 인원왕후(仁元王后).
  귀인 김씨를 영빈, 귀인 박씨를 명빈, 숙의 유씨를 소의에 봉함
  · 11월 : 남구만, 유상운(柳尙運)을 유배지에서 석방함.

  1703년(숙종 29, 癸未)  
  · 1월
: 금위영을 폐지했다가 2월에 다시 부활시킴.
  · 7월 : 명빈 박씨가 훙서함.
  · 9월 : 명빈 소생의 왕자 이 헌을 연령군에 봉함.
  청나라에 황당선(荒唐船) 금지에 대해 통지함.
  * 이시백(李時白, 1635-1703),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오도일(吳道一, 1645-1703) 죽음.

  1704년(숙종 30, 甲申)  
  · 2월
: 연잉군이 혼례를 올림.
  · 3월 : 도성 수축을 시작함.
  · 6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지.
  · 8월 : 해서대동시행절목(海西大同施行節目)을 정하게 함.
  · 11월 :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실록(端宗實錄)으로 고침.
  · 12월 : 대보단(大報壇)이 완공.

1705년(숙종 31, 乙酉)  
  · 3월
: 숙종이 대보단에서 명의 신종(神宗)을 제사함.
  · 10월 : 숙종이 선위(禪位)를 명함.
  · 11월 : 세자가 선위의 명을 거두시기를 세 번째 상소하니 허락함.

  1706년(숙종 32, 丙戌)  
  · 2월
: 최석정이 동국여지승람의 수정을 요청함
  · 5월 : 유생 임부(林溥)등이 동궁모해 혐의로 김춘택을 탄핵하는 상소
  · 6월 : 동궁(東宮) 모해설로 임부(林溥)를 국문함.
  · 8월 : 최석정이 전록통고(典錄通考)를 편찬하여 올림.
  · 10월 : 청에서 칠정력(七政曆)을 수입함.

  1707년(숙종 33, 丁亥)  
  · 1월
: 임보(林溥)가 장을 맞고 죽음.
  · 2월 : 이순신 사우(祠宇)에 현충(顯忠)이라 사액함.
  연령군이 가례를 올림
  · 4월 : 형장(刑杖)을 일체 금지함.
  · 11월 : 숙종이 당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신완(申琓, 1646-1707) 죽음.

  1708년(숙종 34, 戊子)  
  · 2월
: 숙종이 당론을 경계함.
  · 4월 :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佛狼機)를 만들게 함.
  · 10월 : 황해도에 대동법을 시행함.
  · 12월 : 서운관(書雲觀)에서 건상도(乾象圖)와 곤여도(坤輿圖) 올림.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죽음.

  1709년(숙종 35, 己丑)  
  · 1월
: 숙종이 노론 소론의 폐해를 유시(諭示)함.
  · 5월 : 서인(庶人) 상례(喪禮)의 제한을 엄격히 정함.
  김창집(金昌集)이 오륜전비언해(五倫全備諺解)를 완성.
  · 8월 : 강화도에 축성(築城)을 명함.

1710년(숙종 36, 庚寅)  
  · 3월 : 최석정(崔錫鼎)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가 올린 예기류편(禮記類篇)을 소각함.
  노론이 진출함.
  · 7월 : 왜관의 공작미(公作米)를 5년으로 연장해줌.
  · 10월 : 안정기(安鼎基)가 만든 차자(車子)를 제조함.

  1711년(숙종 37, 辛卯)  
  · 3월 :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을 시작하여 10월에 마침.
  · 5월 : 일본에 통신사 파견.
  · 12월 : 왜인의 구은(舊銀, 八星銀) 사용 요청을 허락함.
  비변사에서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올림.
  * 남구만 죽음

  1712년(숙종 38, 壬辰)  
  · 4월
: 청의 목극등(穆克登) 일행이 후주(厚州)에 이름.
  · 5월 : 총융청에서 북한산성 중성(重城)을 축조함.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움.

  1713년(숙종 39, 癸巳)  
  · 7월
: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단함.
  · 10월 : 북도 친기위(北道 親騎衛)를 설치함.
  · 11월 : 이이명(李이命)이 오례의(五禮儀)의 개정을 논함.

  1714년(숙종 40, 甲午)  
  · 1월
: 팔도에 지진(地震).
  · 2월 : 숭례문 괘서(掛書) 사건이 일어남.
  · 7월 : 강원도의 군보단속절목(軍保團束節目)을 강구함.
  * 윤증(尹拯, 1629-1714) 죽음.

1715년(숙종 41, 乙未)  
  · 2월
: 동으로 도량형기를 주조하여 팔도에 반사함.
  · 4월 : 허원(許遠)이 북경에서 역서(曆書), 측산기계(測算機械), 자명종 (自鳴鐘) 등을 구해옴.
  · 12월 : 윤선거(尹宣擧)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跋文)으로 노소간의 분쟁이 격화됨.
  * 최석정(崔錫鼎, 1646-1715), 홍만선(洪萬選, 1643-1715) 죽음.

  1716년(숙종 42, 丙申)  
  · 8월
: 윤선거(尹宣擧) 문집의 훼판(毁板)을 명함. 병신처분(丙申處分).
  · 10월 : 윤선거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 12월 : 윤증의 선정(先正)의 칭호를 금지함.

  1717년(숙종 43, 丁酉)  
  · 5월
: 김장생(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함.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작을 추탈(追奪)함.
  · 7월 : 왕이 이이명과 독대함.
  왕세자가 섭정을 함.

  1718년(숙종 44, 戊戌)  
  · 2월
: 세자빈 심씨가 훙서함.
  인장리의 장씨 묘를 천장하게 함.
  · 4월 : 소현세자빈 강씨의 위호(位號)를 회복시킴.
  · 9월 : 세자빈으로 어씨(魚氏) 책립.
  · 10월 : 마천령(磨天嶺)을 엄격히 막음.

  1719년(숙종 45, 己亥)  
  · 2월
: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이 들어감.
  · 7월 : 경상 전라 충청도에 균전사(均田使)를 파견.
  · 10월 : 연령군 죽음.

  1720년(숙종 46 / 경종 즉위년, 庚子)  
  · 6월
: 숙종 승하, 왕세자(경종) 즉위.
  · 10월 : 삼남의 양전을 끝냄.
  · 11월 : 청의 사신이 옴.
  조태구(趙泰耉)가 김창집(金昌集)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림.
  * 최창대(崔昌大, 1669-1720), 민진후(閔鎭厚, 1659-1720)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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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와 이훤 임금(김수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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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밝히던 조선 왕들의 '굴욕'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일곱 번째 이야기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옛날 왕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천만에!"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훤 임금(김수현 분)은 죽은 세자빈을 닮은 연우(한가인 분)를 무척이나 가까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훤의 소망은 수많은 장애물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그의 소망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자칫 연우의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훤의 소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은, 연우가 무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우가 무녀가 아닌 궁녀라 해도, 이 소망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왕대비와 중전과 외척세력이 묵과할 리 없기 때문이다.

이훤의 처지는 옛날 왕들의 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들 역시 모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관심 있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이 되면 예쁜 여자들을 사귀기 쉬웠을 것'이란 관념보다는 '대학생이 되면 멋진 이성을 사귀기 쉬울 것'이란 관념이 차라리 현실적일 것이다.

 



왕의 '베드신'은 오직 후계자 생산을 위해 

'왕은 본인이 원하면 예쁜 여성을 첩으로 삼을 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27명의 왕이 평균 3.7명의 후궁을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약간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첩의 선택은 원칙적으로 왕실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임금 본인이 여자를 고른다는 것은 원칙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대비나 중전 같은 왕실 여성들이 후궁을 선정했기 때문에, 남자 눈에 예쁜 여성이 후궁에 뽑힐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후궁의 일차적 선정 기준은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가'였다.

왕의 '베드신'도 철저한 사전 기획 속에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여덟 명의 궁녀가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치러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베드신을 찍는 배우가 쾌감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왕은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관계 속에서 남자의 행복을 느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만족을 충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왕이 예쁜 궁녀에게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왕실과 궁중과 조정이 집중 단속했기 때문이다.

승정원(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나타나듯이, 왕의 동선은 철저하게 파악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이 궁녀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여간해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예계 톱스타가 기자들을 따돌리고 인천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든 것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여차하면 신하들의 '막가는' 발언들이... 

 궁궐에 갇힌 왕의 모습. 사진은 정조 임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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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하들은 매일 두세 번씩 경연(세미나) 자리에서 왕의 귀에 '공자 왈', '맹자 왈'을 주입했다.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이 "군자는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가야(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구절이었다. <대학>에 나오는 신독(愼獨) 사상이다.

신하들은 왕이 침실에 혼자 있을 때도 신독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아 자기 수양을 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일례로, 중종 12년 8월 8일자(1517년 8년 24일) <중종실록>에는, 조광조가 경연 자리에서 중종에게 자세를 똑바로 하시라고 훈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광조는 "혹시 요즘 혼자 계실 때 마음공부를 게을리 해서 이런 것 아닙니까?"라며 다그치기까지 했다. 침실에서 딴 생각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막간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왕이 혹시라도 국가경영 이외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까봐 항상 경계하고 견제했다.

2003년 3월 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평검사들과 '막가는' 대화를 했다. 평검사들의 발언 태도는, 내용의 당부당을 떠나, 누가 봐도 '막가는' 것이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제2장에 따르면, '검찰과 긴장관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란 취지의 질문에 대해 노무현은 "그건 작심하고 시작한 것이죠"라고 답했다.

왕들은 항상 노무현처럼 작심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공개석상에서 왕은 반말을 하고 신하들은 존댓말을 했지만, 가슴을 졸이는 쪽은 신하들이 아니라 왕이었다. 신하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공손한 존댓말로 막가는 발언들을 해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고 살려면, 이성에 대한 관심을 억제하고 국정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금 곁에는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주변 사람들은 왕이 여자에게 정신을 쏟지 못하도록 '사전방지 활동'만 벌인 게 아니었다. 철저한 마크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는 '사후진압 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 이런 사후진압 때문에 체면을 구긴 왕들의 사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례로,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미모의 후궁인 홍희빈(희빈 홍씨)을 특별히 가까이 하다가 조정의 견제를 받았다. 중종 13년 3월 12일(1518년 4월 21일) 아침, 그는 경연에 나갔다가 사헌부(검찰청) 정4품 관료로부터 '여색에 빠지는 자는 용렬한 임금'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른 아침 댓바람부터 '평검사'한테서 '여자 조심하라'는 막말을 들은 것이다.

제19대 숙종은 미모의 궁녀인 장옥정(훗날의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으려다가 '미인을 경계하시라'는 상소를 받았다. 숙종 12년 12월 14일(1687년 1월 27일)의 일이다. 숙종이 끝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는 했지만, 이것은 그가 비교적 강력한 군주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덕궁 선정전. 왕의 편전(집무실)이었다.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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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경고를 무시하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가까이할 경우, 자칫 궁녀의 신변까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숙종이 궁녀 시절의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을 가까이하자 중전인 장희빈이 최숙빈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이 이문정의 <수문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제26대 고종 임금 때는 왕의 관심을 끄는 궁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건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전 명성황후(민비)와 후궁 엄귀인의 첩보망이 그처럼 촘촘했던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의 보경 왕후(김민서 분)가 이훤과 연우의 관계를 견제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 상황은 살벌했던 것이다. 

이 정도였기 때문에, 왕이 얼굴 반반한 궁녀를 자기 옆에 둘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정지용의 <향수>에 나오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궁녀들만이 왕의 곁에서 오래도록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이하 생략. 전체 기사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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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회] 숙의 최씨에 대한 희빈 장씨의 미움은...




숙의최씨가 황급히 달려온 숙종에게 인골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하지만

인현왕후는 근거도 없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며 입을 다물게 한다.

숙의 최씨에 대한 희빈 장씨의 미움은 점점 더 커져가고...

한편 자신들의 정보가 자근아기에 의해 김춘택에게로 흘러간다고
판단한 숙정은 충근을 시켜 자근아기를 납치하려 하지만 김춘택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충근등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숙의 측 박상궁의 취선당 염탐은 계속되고 결국 권상궁에게 발견되어
희빈의 덫에 빠지고 만다.

박상궁은 피투성이가 되고 숙의가 달려와 취선당에 관련된 흉흉한 소문 때문이라며

별채를 뒤져야겠다며 벼르자 희빈은 자신있게, 만약 별채를 뒤져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숙의의 왕자를 우물에 던져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82회] 또 다시 일을 꾸미는 희빈 장씨...




결국 별채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희빈장씨는 숙의에게 아들을 살리고자 한다면

당장 대전으로 달려가 장희재의 방면을 주청드리라 명한다.

난감해지는 숙의 최씨!

어렵게 숙종에게 장희재의 방면을 입에 담자 숙종은 믿어지지 않는 듯
의아해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인현왕후 역시 이상하게 여겨 숙의를 불러 사실을
알려하나 숙의최씨는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한편, 자근아기를 노리다 또다시 궁지에 몰린 충근이 동평군에게 달려와

살려달라 청할 때 의금부의 군사들이 들이닥치고 동평군은 위기에 빠진다.

충근은 당장 잡혀 들어가고 동평군역시 귀양을 가는 처지에 이른다.

장희재의 방면은 고사하고 충근의 일로 다시 위기에 빠지는 희빈장씨!

또 다시 일을 꾸며 충근을 독살시키고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위세가 살아난 희빈장씨는 다시 숙의최씨를 불러 대전에 들어 장희재의
방면을 다시 주청하라 압력을 넣는데...



 

 

[83회] 숙안의 죽음에 인현왕후는 오열을 하는데...




숙의의 계속되는 의아한 행동에 의심을 품어오던 차에 자초지종을 알게된 민진후는

이를 인현왕후에게 고하자 인현왕후는 숙의를 직접찾아가 이실직고를 받아낸다.

하지만 이 일을 바로잡을 뚜렷한 방도가 없자 난감해하고....

한편 세자내외가 중궁전에서 오랫동안 문후들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직접 중궁전을 찾아가 중전이 보는 앞에서 세자내외를
호통치는등 또 소란을 일으킨다.

이 와중에 숙안공주가 운명했다는 전언이 오고 그동안 정신적으로 큰
뒷받침되었던 숙안의 죽음에 인현왕후는 오열을 한다. 하지만 큰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었다고 생각한 희빈장씨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한 치성에 더욱 정성을 더하는데....





[84회] 희빈은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숙의와 희빈을 중궁전으로 부른 숙종은 그동안 중전의 간병에

이토록 소홀히 했냐며 호통을 친다. 그리고 앞으로 후궁 둘이 번갈아 가며

중전의 병간호를 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 희빈과 독대할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한
인현왕후는 내키지 않지만 어쩔수 없고....

우려한 바대로 간병온 희빈장씨는 인현왕후에게 막말도 서슴치 않는등
오히려 인현왕후의 병이 깊어가게 만들기만 한다.

한편 취선당에 관련해 이상한 소문이 끊임없자 숙종은 희빈이 중궁전에 든 사이에

취선당을 살펴보라 명하지만 무당 막례의 기지로 별 단서를 잡아내지 못한다.

위기를 넘긴 희빈은 더욱더 신통한 방술을 이용해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숙정을 통해 행하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현왕후의 병이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되고 오히려 세자빈이 신열로
앓아 눕는 일이 발생하는데....



 


[85회] 희빈은 인현왕후를 해하려 계획을 세우고...




희빈은 숙의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여의 순봉을 불러

자신이 지어온 탕재를 달여오라 명한다.

약에 극약이라도 들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중전의 환후를 염려한
충정이라는 희빈의 말에 중전 인현왕후는 거절하지 못한다.

그 탕재에 경분이라는 염화제일 수은을 넣은 희빈은 중전이 탕재를
마시자 회심을 미소를 짓는데...

그런데... 약을 마신 다음날, 의외로 중전은 차도를 보이게 되자

대궐 안은 모처럼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러한 경사에 맞춰 숙종은 숙의를 숙빈에 봉하기에 이르고...

 

이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자 희빈장씨는 당황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알기 위해 여의 순봉을 불러 다그치기 시작하지만
어디서부터 일이 꼬였는지 알 길이 없자 다시 한번 경분이 든 약재를
달여 올리라 명하는데...

 


[ 제 85회 용어풀이 ]

월름미 : 월급으로 미리 주는 쌀




[86회] 춘택은 희빈을 없앨 계획을 세우고...




희빈의 모친 윤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희빈은 황급히 사가로 나가고

이 틈을 타 숙빈은 다시 한번 신당을 찾아내려 일을 꾸민다.

하지만 분란을 두려워한 인현왕후의 제지로 일을 실행하지는 못하고...

사경을 헤매던 윤씨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고 희빈장씨는 슬픔에 빠진다.

이 소식을 접한 김춘택은 희빈이 사가로 나온 기회를 이용해 희빈을
없애버릴 계획을 꾸미는데...

희빈이 상을 다 치르고 궁으로 입궐하는 날, 김춘택은 꼭지단패거리를
불러모아 희빈을 처치하라 명한다.

드디어 꼭지단 패거리에 가마는 둘어싸이고 헤는 위기에 빠진다.

한편, 궐안의 숙빈역시 인현왕후의 명을 거역하고 신당을 찾기 위해
취선당으로 가는데...

 



 

 

[87회] 김춘택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지고...




김춘택을 당장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온 도성에는 나졸들이 깔린다.

하지만 희빈 장씨를 처단하기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김춘택은
오히려 결기를 다진다.

김춘택이 숙종을 알현하기 위해 일부러 잡히려한다는 이야기를
인현왕후로부터 전해들은 희빈장씨는 분하지만 자신의 죄과가 탄로 날까
전전긍긍한다.

숙종이 김춘택을 친국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순간, 희빈은 대전으로
나아와 김춘택의 친국은 또 다른 불행이 되기에 친국 대신 원지유배만
시키달라 주청드린다.

결국 희빈의 주청이 받아들여지고 김춘택은 경상도 상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모처럼 평온을 되찾는 대궐.

그러나 또다시 장희재의 방면을 주청한 제주목사의 상소문제로 시끄러워진다.

희빈장씨는 기회다 싶어 김춘택의 일로 트집을 잡힌 숙빈은 사주하여
함께 대전복도에 꿇어앉아 오라버니의 방면을 주청하지만

오히려 숙종의 노여움만 사는데...


 



[88회] 숙종의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장희빈의 노력...




숙종의 돌아선 마음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방술로

희빈장씨는 숙종의 침의에 인골을 싸서 대전후원에 묻는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희빈 장씨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인현왕후의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올 여름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숙종은 조정을 개편하면서까지 중전을 살리려고 노력하지만...

한편 병마에 괴로워하는 인현왕후를 안스럽게 지키던 숙빈은 희빈에게 들러

중전이 편안히 눈감을 수 있도록 모든 저주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희빈 장씨의 진노만 살뿐이다.

중궁전이 비었다는 전갈에 중전의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몸소 간병하러 온 것처럼

중궁전에 들린 희빈장씨는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중전을 괴롭힌다.

그리고 중전의 헐떡거리는 목을 조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만
때마침 숙빈최씨가 들어오는데....

중전을 죽이기 위해 희빈의 신당에서는 매일 방술이 진행되고
인현왕후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결국 숙종 27년 8월 14일,

중전 인현왕후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뒤로하고 승하하고 마는데....

 

 

 

 

 

[89회]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장씨는 다시 중전의 자리를...




자신의 의도대로 중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장씨는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상상에 즐겁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이 호기를 맞아 그동안 죽어지내던 남인들이

서서히 희빈 장씨를 중전의 자리에 올리는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당막례가 미처 궐을 빠져나가기 전에 온 궐안은 내금위 군사들에 의해

통행금지가 행해지고 기세가 등등한 숙빈최씨는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취선당으로 들이닥치는데...

그러나 희빈 장씨의 간괴로 숙빈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례는
무사히 궐을 빠져나간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말끔히 치워진 신당만을 확인하고는 숙빈최씨는
좌절하고 마는데...

한편 숙종은 중전의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몸소 상복을 입음으로서 통한을 달래고자 하였고 친히 행록을 지어

인현왕후의 행실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희빈과 숙빈에게는 한시라도 인현왕후의 빈전에서 떠나지 말고

지극정성으로 대행왕비를 추모하라 명한다.

그러나 희빈이 빈전에 있던 숙빈을 취선당으로 부른 사이 빈전에 들린
숙종은 텅빈 빈전을 보고 불같이 격노하는데...


 

 

 

[90회] 희빈이 상복도 입지 않고 있다는 것과...

 




희빈이 상복도 입지 않고 있다는 것과 빈전의 숙빈을 함부로 불러내었다는 말에

화가 난 숙종은 취선당으로 달려와 희빈 장씨를 심하게 나무란다.

희빈장씨는 모든 것이 모함이라며 울며 매달려보지만

이미 희빈에게서 마음이 떠난 숙종은 더욱 모질게 희빈 장씨를 떼어놓으며

숙종은 취선당을 떠나고 만다.

숙종이 자신을 홀대하고 숙빈에게 더 호의를 보이자 위기를 느낀
희빈 장씨는 빈전 뜰 앞에서 석고대죄를 올린다.

숙종의 마음은 쉽게 돌어서지 않지만 눈물로 제어미의 용서를 구하는
세자의 호소에 숙종은 희빈의 석고대죄를 받아들인다.

한편 재집권을 위한 남인들의 발호가 시작되고 제주도에 유배된
장희재의 방면이야기 흘러나오자 김춘택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장씨는 중전의 자리에 오를 날이 멀지 않았다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91회]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숙빈최씨는...




빈전에 든 숙빈최씨에게, 내관한명이 희빈 장씨의

값비싼 노리개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가 날아든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 장씨는 그 내관을 불러들여 다시 한번 노리개를 주면서

입막음하고자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숙빈최씨 역시

그 내관을 불러 자초지종을 따져 묻는데...

한편 자근아기를 이용해 김춘택을 잡으려는 남인들은 급히 서두르고
김춘택은 행방이 묘연해진 자근아기를 찾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러나 김춘택이 자근아기와 사통을 했다는 상소로 인해 김춘택은 다시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숙빈최씨는 서둘러 대전으로 향하고 드디어
모든 사실을 숙종 앞에서 털어놓자 충격 받은 숙종은 당장 대전 후원을
파보라고 명하는데...

 





[92회] 희빈은 세자를 붙들고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숙빈 최씨의 직접 지휘아래 대전의 후원을 파기 시작하자

희빈 장씨는 모든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움에 떤다.

마침내 희빈 장씨가 묻었던 인골이 나오고 이를 직접 지켜본 숙종은
당장 희빈장씨전의 권상궁을 잡아들이라 명한다.

권상궁은 잡혀오기전,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했다고 자백할 것이라며
희빈 장씨를 안심시키지만 희빈장씨는 불안하기만 하다.

드디어 숙종의 친국이 열리고 모진 고문이 권상궁에게 가해진다.

그러나 권상궁은 인골을 묻은 장본인은 자신이며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이 아니라

희빈에게서 멀어진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것 뿐이라고 끝까지 강변한다.

친국은 희빈전의 모든 상궁, 나인들에게까지 확대되고 형벌은 더욱
가혹해진다.

혹시나 모든 것을 실토하지 않을지 불안한 희빈장씨는 세자를 붙들고
자신을 살릴 사람은 세자뿐이니 어미의 곁을 떠나지 말라며 애원하는데...





[93회] 숙빈최씨를 찾아가 살려달라 요청하는 장희빈.....




위기에 몰린 희빈장씨는 자존심을 뒤로한 채 숙빈최씨를 찾아가

지금 친국을 받고있는 권상궁을 살려달라 요청한다.

그러나 희빈이 먼저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숙빈의
말에 발끈하여 심한 말다툼 끝에 힘없이 돌아온다.

궐안 사정을 알 리 없는 숙정 등은 김춘택을 잡고자 모사를 꾸미지만
김춘택은 이를 눈치채고 오히려 이들을 잡기 위해 몸소 숙정의 집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김춘택이 덫에 걸렸다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숙정.

그러나 그들이 김춘택을 포박하려는 순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의금부
병사들이 들이닥치는데...

결국 대궐로 압송되는 숙정과 막례!

이 일은 곧바로 숙종에게 보고되고 숙종은 친히 조사를 하겠노라며
이들의 친국차비도 서두르라 명한다.

그 와중에 희빈 장씨에게는 치명적인 물증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화살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인현왕후의 화상이었다.

한사코 부인하던 숙정과 막례도 이 물증에는 어쩔 수가 없었는지
드디어 모든 것을 실토하기 시작하는데...



 


[94회] 희빈장씨는 취선당으로 돌아와 체념의 눈물을...

 




모든 실상이 드러나는 장면을 목격한 희빈장씨는 취선당으로 돌아와

체념의 눈물을 흘리고, 끝끝내 희빈의 연루는 밝히지 않는 숙정과 막례에게

더욱 가혹한 고문을 명한 숙종은 이제서야 중전의 원혼을 풀 수가 있게 되었다며

인현왕후의 빈전 앞에서 용서를 구하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세자에게 해가 돌아갈까 근심하던 남구만은 다시 한번 숙종을
찾아가 충정어린 간언을 하자 숙종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믿을 것은
세자뿐인 희빈장씨는 세자를 빈전에 보내지 않고 함께 데리고 있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숙종은 상주가 어떻게 빈전을 비우냐며 당장
세자를 데리고 오라고 명한다.

그러나 몇 차례 사람을 보내보지만 끝내 희빈 장씨가 세자를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자 숙종은 드디어 내금위 병사 등을 동원하고서라도
세자를 끌어내라고 명한다.

불안에 떨며 세자를 보낼 수가 없다는 희빈 장씨의 절규!

그러나 왕명또한 거역할 수 없는 지라 최상앙은 완력을 써서라도
세자를 끌어내려 한다.

그런데....세자를 사이에 두고 내금위 병사들과 희빈 장씨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중 그만 세자가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마는데...



 


[95회] 숙종은 결국 동평군의 사사를 윤허하고...




세자의 소식은 곧바로 숙종에게 보고되고 숙종은

희빈 장씨가 이제는 세자의 앞길까지 망치려 한다며 진노한다.

이런 와중에 김창집등 강경파들의 직언으로 숙종은 갈등을 거듭하던 끝에

결국 동평군의 사사를 윤허하고 이어서 무당 막례를 효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소식을 들은 희빈장씨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좌절감에 빠져드는데...

신하들의 계속된 주청에 희빈 장씨의 처리문제로 편전에서 회의가 열리고

이 회의에서 장희재의 처단뿐만 아니라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노론 강경파 의견과 폐세자의 일을 걱정하는 소론의 남구만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숙종은 곤혹스러워 하는데...

 

 

 

 

[96회] 희빈에게 스스로 자진을 명하는 숙종..




취선당에 감금된 희빈장씨!

숙빈전의 박상궁이 진지상을 차려오자 화가난 희빈은 그 밥상을 세차게 밀어 던지며

세자가 오지 않으면 곡기를 끊고 죽고 말 것이라며 절규한다.

한편 희빈의 단죄를 둘러싼 노론 강경파와 남구만의 대립은 점점
격해지고 숙종은 행형을 뒤로 미루며 갈등하기 시작한다.

제주도를 탈출한 장희재는 도성으로 돌아와 민언량과 김태윤등
남인들을 만나 그동안의 소식을 듣고 분개한다.

그리고는 바로 군사들을 일으켜 반정에 나설 계획을 세우지만
제주도에서 동행한 준성의 고발로 장희재 역시 포박된다.

숙종의 명으로 장희재에 대한 국문이 시작되고, 이 자리에서 역모를 꾀하고

인현왕후의 저주를 부추긴 장희재의 편지가 물증으로 제시되는데...

희빈의 행형에 대해 고심하는 숙종!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는지 희빈에게 직접 사약을 내리는 대신에
스스로 자진을 명하는 전지를 내리는데...



 


 

[97회] 어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세자의 청에..




희빈 장씨에 대한 행형이 매듭지어졌다는 소식에 숙빈최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지만

세자는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며 대전으로 가려하지만 쓰러지고 만다.

마침내 자진의 명을 담은 전지가 취선당에 당도하자 희빈장씨는

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세자를 데려오지 않으면 먼저 죽을 수 없다며 전지를
내팽겨치는등 격렬하게 어명을 거부한다.

이 소식에 격노하는 숙종!

당장 취선당으로 달려가려 하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대전에 나타난
세자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어미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세자의 청에잠시 흔들리는 숙종!

그러나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나라를 경영할 수 없다며 냉정하게
세자를 나무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취선당으로 나아온 세자!
그러나 내금위 군사들에게 제지를 당하고 취선당에서 끌려나간다.

“어마마마”를 부르짖는 세자의 절규를 들은 희빈장씨!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보지만 결국 또 다시 제지당하는데...

 

 




[97회] 어미를 살리기 위한 세자의 석고대죄..

 




어미를 살리기 위한 세자의 석고대죄!

숙빈과 세자빈이 나서서 만류하지만 어미를 살려달라며 절규하는
세자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찢어질 듯 마음이 아픈 숙종.

그러나 세자의 청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결국 세자는 내관들에 의해
동궁으로 끌려가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숙빈최씨는 이러다 세자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취선당으로 가 희빈 장씨와 담판을 지으려한다.

즉 세자가 다 죽게 되었으니 세자를 살리려거든 희빈 장씨가 하루빨리
자진하는 수밖에 없다며 다그친다.

그러나 희빈 장씨의 기세가 꺾일 기미가 없자 마침내 품안에 있던
은장도를 꺼내 어서 왕명을 받들라며 소리치는데...

한편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회생의 기회를 노리던 역관들과 남인들은 세를 규합,

관리들을 매수하여 희빈의 자진전교를 거두어 달라는 상소를 올리게 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시작하고 이 소식에 희빈 장씨와 장희재는 마지막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이 일을 오히려 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며 숙종을 격노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숙종은 분노의 눈물을 머금은 채 희빈 장씨를 당장
사사하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99회]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이 내려지고...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

도승지는 희빈 장씨를 강제로 끌어내지만 희빈장씨는 사약소반을 뒤엎으면서

세자를 죽이고 오지 않으면 혼자서는 죽지 않겠노라며 심하게 거부한다.

이 소식에 심하게 격노하는 숙종!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부사 남구만까지 향저로 돌아간다는 말에 매우 미편해한다.

한편, 희빈 장씨를 살리기 위해 세를 결집하던 역관들은 남구만을 직접 찾아가

향저로 돌아가지 말고 오히려 자신들과 함께 입궐하여 희빈을 살려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한다.

역관들의 움직임은 빨라지고 드디어 영부사 남구만을 앞세워 대궐로
몰려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관들의 국기를 뒤흔드는 이 사건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만 살 뿐,

숙종은 당장 난동에 나선 역관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하고 남구만
역시 사저에 연금시켜버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는데...

그러나 희빈 장씨가 이번에도 사약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직접 취선당으로 나아와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라도 입을 벌여 사약을 마시게 하라 명하는데...





[100회] 세자의 품에서 사사되는 희빈장씨!




결국 자신의 불충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자의 품에서 사사되는 희빈장씨!

숙종은 불꺼진 대전에 홀로 앉아 희빈 장씨에 대한 회한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궁에 들러 세자에게 종사의 백년대계와 세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천명을 받든 것이니 앞으로 보위를 이어갈 왕재로서의 위엄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희빈의 사사이후 장희재등 희빈 일당들의 여죄가 추궁되고 혹독한
문초가 행해진다.

김태윤의 자복으로 장희재의 죄상도 낱낱이 밝혀지고 결국 장희재는
백성들의 야유와 욕설 속에서 참수되기에 이르러 한때를 풍미했던 장씨
일가의 세도는 이렇게 끝을 맺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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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회] 장소의의 가회임의 논란은 계속되고...




희재의 소식을 들은 소의는 노발대발하지만
희재를 불러 대궐의 법도를 따르라고 충고한다.

동평군역시 희재를 불러 다시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고...

한편 계속해서 소의의 회임을 의심하던 귀인은 취선당의 어의까지 불러
확인해보지만 별소득이 없자 또 다른 계책을 꾸미기 시작한다.

대궐 안은 순식간에 소의의 회임이 가짜라는 소문이 돌기시작하고
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 일은 곧 소의에게 전해지고 소의는 숙종에게 고해바치지만 숙종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몸조리만 잘하라는 당부를 내린다.

하지만 가회임의 논란은 계속해서 커져나가고 결국 참다 못한 숙종은
두경에게 보검을 가져오라 명하고는 취선당으로 어의를 불러 몸소
가회임 문제를 판결하고자 하는데...


[ 제 41회 용어풀이 ]

사속지망 : 왕자를 생산하여 왕실의 대를 이을 것을 바라는 마음

양사 : 사헌부와 사간헌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옥당 : 왕의 자문을 하는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



 


[42회] 장렬왕후의 별세와 장소의의 왕자생산...




희재와의 마찰로 대왕대비는 쓰러지고 대궐은
다시 긴장감이 돈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차마 숙종과 중전의 앞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지 못하며 속으로만 노여워하고...

옥정의 출산이 가까워지지만 대왕대비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간다.

결국 65년의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자의대비 조씨는 숙종이 후사를 잇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되고 숙종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데...

자의대비가 죽은 뒤 소의 장씨의 발호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고
숙안공주등 서인세력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으며 제발 소의의
후사가 왕자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취선당의 산통이 시작되고 숙종은 왕자이기를 바라며 기대감에 부풀어오른다.

중전 인현왕후 역시 산실청의 일을 지휘하는 등 소의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뒷바라지하고 대궐의 모든 귀와 눈이 취선당으로 모아진다.

드디어 취선당에서 소의의 비명소리와 함께 왕자의 탄생을 알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 제 42회 용어풀이 ]

권초지례 : 왕자가 태어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





[43회]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원자정호를 결심하고...




숙종은 왕자를 생산한 소의가 대견하기만 하고
서인들은 앞으로 몰고 올 환국을 예견하며 숙종의 의도와 남인들의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사가의 어미를 뵙고싶다는 소의에 청에 숙종은 흔쾌히 허락하고

윤씨는 급히 차비를 차리고 궁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궁궐대문앞에서 명패가 없다는 이유로 입궐이 거부당해

실랑이를 벌이다 지평 이익수에 의해 가마가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의 파문은 점점 번져나가고 마침내 숙종은 이익수를 당장
잡아들여 문초하라 명한다.

서인진영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고 숙종을 찾아가 원칙대로 처리한
이익수를 구명하려하지만 숙종은 권도를 내세워 그들을 압도한다.
뿐만아니라 앞으로 패거리를 지어 왕실을 능멸하는 처사를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라며 경고한다.

원자가 태어난지 두달 후, 숙종은 소의의 청을 따라 드디어 원자 정호를
결심하자 서인들은 다시 반발하며 나서지만 우암 송시열은 서인가의 몰락을 예견한다.

조정에 부는 뜨거운 바람. 원자정호를 둘러싼 숙종과 훈구대신들과의
극한 대결은 피바람을 예고하는데...





[44회]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세자책봉으로까지 연결될 원자정호!

드디어 이를 둘러싸고 서인대신들과 숙종의 극한 대결이 시작된다.
하지만 격렬히 반대하며 나서는 서인들을 향해 숙종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강행할 것임을 천명한다.

뿐만 아니라 소의 장씨를 내명부의 최고 품계인 희빈으로 봉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희빈으로 봉해진 옥정이 문후를 들자 인현왕후는 원자를 한번 안아보고자 하나

기세가 등등한 희빈은 원자가 신열이 있다며 원자를 가까이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치욕스런 언사를 날린다.

또 다시 좌절감에 치를 떠는 인현왕후.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자정호와 희빈 등극으로 서인가의 최후가 다가왔다고 예견한 송시열은

죽음까지 각오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원자정호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문을 써내려간다.

불같이 화가난 숙종, 하지만 그 상대가 우암이라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드디어 동평군이 나서고 동평군은 송시열에게 맞불을 놓듯이

옥정에게 서찰을 띄워 송시열의 상소를 문제삼을 것을 간하게 하고

삼사 언관들까지 회유하여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계략을 꾸민다.

차라리 자신과 원자를 죽여달라는 희빈 장씨.

그리고 때마침 숙종에게 나아와 송시열의 상소가 부당하다고 아뢰는 삼사 언관들.

숙종은 드디어 송시열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조정은 기사환국의 광풍으로 빠져드는데...





[45회]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원자명호와 희빈 등극.

그리고 우암 송시열의 상소는 기사환국이라는 일대 격변을 불러일으킨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대신들의 파직과 귀향이 잇따르고

숙종은 그 빈자리를 경신환국으로 출척되었던 남인들로 채운다.

귀인은 할아버지의 파직을 따지러 희빈에게 나아오지만

이미 자기보다 높은 품계인지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

 

중전 또한 기고만장한 희빈을 찾아가 타이르려 하지만

오히려 어서 왕자나 생산하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쓰러지는데....

동평군과 희빈의 의지에 따라 요직에 등용된 남인들은 앞을 다퉈

우암 송시열 등을 사사할 것을 청하자 숙종은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적 지주가 아니었던가....

 

고심 끝에 숙종은 송시열을 제외한 김수항, 김익훈등에게 사약과 극형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고 궐안은 일대 광풍이 휘몰아치는데......

한편 자애롭기 그지없는 인현왕후는 그래도 국모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원자에게 예쁜 옷을 선물한다.

 

그런데 그 옷을 입은 원자가 갑자기 경기를 시작하며 울기 시작하고 이상하게 생각한 희빈은
옷을 살펴보다 바늘 두 개를 발견하는데.....


[ 제 45회 용어풀이 ]

경신 대출척 : 숙종 6년,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몰아낸 사건

상서 : 중국 전통산문의 근원으로써 서경을 달리 부르는 말





[46회] 희빈의 계략으로 귀인과 중전은 궁지로 몰리고...




중전이 선물한 옷을 전달한 침방무수리에 대한 매질이 시작되고

황급히 달려온 중전은 다 자기 잘못이라며 용서를 빌지만

희빈은 바늘을 넣으라 사주한 자를 밝혀내야한다며 계속 매질을 한다.

결국 이 일을 숙종까지 알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계속 희빈과 맞서던 인현왕후는 안되겠다 싶어 숙종에게 달려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이니 자신을 벌하고 이 일을 마무리해달라고 요청한다.
숙종은 난감해하고....

이 일은 이 선에서 마무리되나 남인들은 이 사건은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여

원자를 해하려한 것이므로 내칠 명분이 충분하다며 드디어 중전 폐위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희빈 역시 요즈음 대비 명성왕후가 중전의 꿈에 현몽한다는 소릴 들었다며 숙종에게 고하자

숙종은 인현을 불러 이는 중전이 희빈을 투기하기 때문이 아니냐며 다그치기 시작한다.
인현왕후는 더욱더 궁지로 몰리고....

이 와중에 희빈측 궁녀들이 대궐일각의 땅을 파는 것을 목격한 귀인 측은

분명히 중전을 음해 하려는 희빈의 모사라며 그 증거를 찾고자 하나

땅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숙종에게 발각되어
희빈을 저주하려했다는 죄목으로 궐 밖으로 내쳐지는데...



 


[47회]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마침내 귀인 김씨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에서
쫓겨나고 희빈 장씨는 떠나는 귀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띄운다.

중전 인현왕후는 다음차례는 자기라는 것을 예감하는데....

한편 중전 인현왕후의 생일날이 돌아오자 희빈은 숙종에게 청하여
인현왕후에게 어떠한 하례도 올지 못하게 하고 단자도, 음식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중전의 위치는 더욱 초라해지고...

하지만 인현의 어머니 부부인 조씨는 명을 거역하고 조금의 음식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중궁전에 음식상이 차려진 모습을
숙종이 보게되고 숙종은 불같이 진노하며 중전을 나무란다.

마침내 폐비의 일을 서두르라는 숙종의 어명이 떨어진다.

남인들조차 놀라 반대의 정청을 초래하는 이 일은 일단 우암 송시열을
사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이를 참다못한 박태보와 오두인의 상소로 대궐은 다시 한번 발칵 뒤집히는데...


[ 제 47회 용어풀이 ]

폐출절목 : 폐출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상세히 나열한 문서





[48회] 인현왕후는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결국 박태보와 오두인은 잡혀 들어오고 숙종의 친국이 시작된다.

모진 고문에도 그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숙종과 맞서지만 숙종은 상소의 배후는

반드시 인현의 오빠인 민진후라며 그 화살을 중전 인현왕후에게로 돌리는데...

놀란 인현왕후는 오라버니의 구명을 위해 숙종을 만나려 하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미움만 살뿐이다.

반면 중전 자리에 대한 희빈 장씨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마침내 숙종은 훈구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현왕후 폐비의
교지를 반포하고 옥책과 장복을 불태우기에 이르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어명에 중궁전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결국
인현왕후는 가마를 탄 채 한 많은 대궐생활을 마감하고 쓸쓸히 사가로 떠나는데...





[49회]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폐비된 인현의 가마가 도성거리로 나서자 수많은 유생들과 백성들은

가마를 막아서고 통곡을 하며 슬퍼한다.

안국동 사가에 도착한 인현은 어머니와 회한의 재회를 하고

자신은 죄인이므로 황량하게 허물어져 가는 별채에 머물겠노라 한다.

다시 한번 집안은 울음바다를 이루고...

한편 인현을 내친 숙종 역시 자신의 결정에 대해 괴로워하지만
중전자리에 오른다는 희망에 부푼 장희빈은 중궁전에 들러 인현이 쓰던
물품들을 모두 갖다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라 하고 또 인현의 사가에
사람을 보내 거동을 소상히 살피라고 명하기까지 하는 등 점점 더 위세등등해진다.

그러나 역사상 역관의 자식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는데...


[ 제 49회 용어풀이 ]

역관 : 통역을 맡아보는 관리로서 중인신분

구운몽 : 인생무상을 주제로 한 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사실을 풍자한 소설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0회]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장희빈을 중전자리에 올리기 위한 장희재의 노력은 계속되고

그 와중에 역관(통역관, 중인)들이 자신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태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호기라 생각한 희재는 뒷돈을 대는 등 그들을 부추기고

마침내 사건이 확대되어 숙종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고심 끝에 숙종은 대신들 앞에서 역관출신인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
올려 역관들의 분노를 다스리겠노라 선포한다.

반대하던 대신들도 숙종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할 수 없고...

국상중이라 정식 책비례를 치르지 않았지만 엄연한 중전의 자리에 오르는 장희빈!

그녀는 장희재를 내금위장으로 승진시키고 모친 윤씨에게 작호를 내리는 등

그동안 쌓였던 한들은 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수리 최씨는

분노의 이를 갈며 인현왕후의 복위에 온 몸을 던지겠노라 결심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도 애써 담담해 하는 인현왕후!

그녀는 대문을 걸어 잠그고 식사도 잡곡으로 하는 등 폐서인의 본분에 충실하고자 하고,

뿐만 아니라 숙종을 위한 치성도 매일 빠지지 않고 드린다.

그러던 중 복면한 사내들이 폐비 인현왕후 거처 담을 넘어오는 사건이
발생하고, 순간 인현왕후는 위기를 느끼는데...

 

 

[ 제 50회 용어풀이 ]

부운계 :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들이 모여서 만든 비밀조직

책비례 : 대궐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51회]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




중전이 된 옥정과 내금위장이 된 장희재의 권세는 하늘을 치를 듯 하고

옥정의 사가는 벼슬아치들이 보내는 봉물들로 넘쳐난다.

반면 폐비 민씨의 집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민진후와 어머니 조씨는
출입조차 제한 당한다.

끌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민진후는 홍치상과 만나 인현을 복위시킬 방도를 강구하고

마침내 민심을 얻기 위한 익명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한다.

온 도성에 나붙은 익명서는 또 다른 파란을 예고하고 민심이 돌아설 것이 두려운

옥정과 장희재는 익명서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한편 남인대신들은 이 일을 기회로 서인 잔당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숙종에게 청한다. 숙종 역시 흔쾌히 동의하고 어서
익명서의 주모자를 찾으라 명한다.

걱정이 앞서는 폐비 민씨는 오라버니를 불러 주의로 주지만 쉽게

그 의지를 꺽을 수가 없고...

결국 익명서의 필적을 대조한 끝에 익명서의 주인공이 홍치상으로
밝혀지고 급한 장희재는 왕명도 받지 않은 채 숙안공주의 집으로
처들어가 홍치상을 포박하는데...

 


[ 제 51회 용어풀이 ]

경국대전 : 국정 전 분야에 걸친 교지. 조례 등을 모은 법전

언문 : 한글을 속되게 이르는 말

왕비주청사 : 새 왕비의 책봉을 청나라에 알리기 위한 사신



 


[52회]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아들의 일로 다급해진 숙안공주는 숙종을 찾아와 홍치상 스스로 떳떳하게 자진할

기회를 줄 것이며 이후 더 이상 익명서 사건을 거론하지 말 것을 청한다.

괴로운 숙종은 눈물로서 호소하는 숙안공주의 청을 거절할 수 없고...

결국 스스로 사약을 마시고 자진하는 홍치상!

이를 지켜본 민진후는 분노의 눈물을 삼킨다.

이 일로 민심은 더욱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고 이를 걱정하던 민장도는
폐비 사사를 거론하지만 아버지 민암은 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한편 옥정은 익명서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민진후와 민심을 호도하려한
숙안공주를 법도로서 다스려 달라 청하자 곤혹스런 숙종은 옥정에게
원자의 세자 책봉을 확약하며 마음을 달랜다.

이 소식을 들은 장희재와 어머니 윤씨는 기쁘기 그지없지만

왕명을 사칭하며 경거망동하는 장희재를 못마땅해하는 동평군은 희재를 불러
계속 이러다가는 폐비 복위운동에 불을 붙이는 꼴이 되니 조심하라 경고하는데...


[ 제 52회 용어풀이 ]

구운몽 : 주인공 성진이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인간세상에 유태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고대소설

사씨남정기 : 숙종을 둘러싼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을 풍자한 소설로 폐비복위의 정당성을 담음

매설 : 소설의 옛말

 



 

 

 

[53회] 숙종은 대신들을 불러 나이 어린 원자를 세자로.




숙종은 대신들을 불러 나이 어린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전례를 살피라고 명하고

대신들이 머뭇거리자 중전 장씨는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며 대신들에게 세자책봉을 서두르라 강요한다.

동평군은 걱정을 뒤로한 채 왕비책봉주청사로 길을 떠나고 김춘택은
중전폐위를 풍자한 서포의 소설 ‘사씨남정기’를 받으러 남해로 내려간다.

마침내 옥정의 진노를 두려워한 대신들은 대소신료들의 연명을 받아
세자책봉을 강력히 주청하고 숙종의 윤허가 내려진다. 숙안공주등은
반대를 하고 나서지만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렸고...

그러던 중 폐비 민씨가 신열로 앓아 눕자 숙안공주는 군부인 신씨에게
병문안이라도 가 의원을 불러야 하지 않겠냐고 청해 신씨는 어려운
발걸음을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장희재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고
마침내 중전 장씨가 알게되는 일이 발생하는데...


[ 제 53회 용어풀이 ]

사씨남정기 : 인현왕후 폐위를 풍자한 소설로 폐비복위의 정당성을 담음

곤위 : 왕비의 자리

저위 : 세자의 자리

삼전 : 임금, 왕비, 세자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





[54회] 옥정의 중전 책봉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동평군의 귀국.

그러나 중국 황제를 알현도 못하는 등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자 숙종은
약소국의 비애를 느끼게 되고 옥정 역시 난감해한다.

반면, 민진후등은 천우신조로 여겨 폐비 복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서포에게서 사씨남정기를 받아온 김춘택은 그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아이들을 통해 널리 유포, 옥정에게서 돌아선 민심을 이용하기로 한다.

마침내 이 노래는 대궐에까지 알려지고 위기를 느낀 옥정은

숙종에게 일러 이 노래의 유포를 막아달라 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고...

왕비주청의 실패로 의기소침하던 동평군은 정국의 새바람을 위해
숙종에게 옥정의 정식 책비례를 청한다.

마침내 옥정의 중전 책봉식이 성대하게 치러지고 이는 폐비 복위는
있을 수 없다는 숙종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 제 54회 용어풀이 ]

목자득국 : 이씨가 왕이 된다는 참설로 이성계의 회군과 건국의 큰 힘이 됨

삼전 : 임금, 왕비, 세자의 자리를 상직적으로 일컫는 말



 

 

[55회] 청나라 사신이 올 날이 다가오자...




청나라 사신이 올 날이 다가오자 조정에는 청사신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는 말이 돌아

숙종 역시 걱정이 앞선다.

김춘택은 자근아기의 도움으로 최무수리의 집을 찾게되고 최무수리의
아비에게 최무수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한편 최무수리는 인현왕후 복위를 빌다가 궁녀들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빠지지만

아버지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휴가까지 얻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드디어 사신들이 평양에 도착하고 동평군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급파된다.

사색이 되어 돌아온 동평군.

그들이 조총 3000정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지만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현왕후 폐비를 문제삼을 것이 자명하기에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데...


[ 제 55회 용어풀이 ]

가자 :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인 관직을 부여하여 예우해줌을 이르는 말

가선대부 : 종2품인 종친, 의빈, 문무관의 품계

 

 

 

 

 

 

 

[56회]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과의 첫만남을 이루는데...




조총 3000정을 마련할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상납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자 청나라 사신들은 폐비 민씨와의 면담을 강행하고 나선다.

이 소식에 애가 끓는 중전 장씨는 편전 앞에 꿇어앉아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라 청한다.

결국 사신들이 폐비를 알현하는 순간 조총 3000정의 요구를
들어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그들의 발걸음 돌리게 된다.

사신을 만난 민암과 동평군등은 그들에게 조총 3000정을 상납하는 대신
옥정의 중전 책봉을 확약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 한때나마 기대에
부풀었던 폐비 민씨와 민진후등은 허탈감에 빠지고...

일단 위기를 모면한 숙종은 나라재정이 어려워 질 것에 대해 한숨이
나오고 모든 재정에 근검절약 하라 명한다.

하지만 중전 장씨의 낭비는 심해가고 결국 내탕금이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중전 장씨는 민암을 불러 당장 내탕금을 채워놓으라 으름장을 놓는데...

한편, 김춘택은 사가로 나온 최무수리를 만나 훗날을 도모하고

중전 장씨의 동태를 잘 살필 것이며 하루빨리 주상의 승은을 입으라 부탁한다.

대감에 부풀어 궐로 돌아오는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과의 첫만남을 이루는데...


[ 제 56회 용어풀이 ]

내탕금 : 왕실에서 사용되는 일상 경비

전정 : 토지에 세를 부과하여 수취하는 제도

군정 :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는 제도

환정 :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제도

광선부원군 : 숙종의 첫쨰 왕비였던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



 

 

[57회] 사씨남정기는 빠르게 퍼져나가고...

 




단속에도 불구하고 장다리 미나리 노래와 사씨남정기는 빠르게 퍼져나가고

김춘택이 폐비 복위운동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폐비 복위의 움직임은 점차 무르익어 가는데....

이를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는 희재는 미칠 노릇이고 동평군과 민장도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중전 장씨의 횡포에 참다못한 숙안공주는 종친들을 선동하여

숙종에게 새로운 후궁을 맞아들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추진하자

이 소식을 들은 남인들은 환국의 전조라며 불안해하고

위기를 직감한 중전 장씨는 숙종에게 그 후궁이 누구냐며 따져 묻는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는 숙종은 왜 그리 투기하냐며 오히려 중전을
심하게 나무라고는 중궁전을 나가 버린다.

중전의 투기는 더욱더 정도를 더해가고 급기야는 무수리 최씨를 불러
매질하기 시작하는데...


[ 제 57회 용어풀이 ]

내탕금 : 왕실에서 사용되는 일상 경비

부덕 : 부녀자로서 지녀야 할 어질고 너그러운 덕행

부용 : 부녀자의 몸맵시

부언 : 부녀자의 말씨

부공 : 부녀자의 솜씨





[58회] 민심은 더욱더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어지고...





중전장씨의 모진 매질 소리는 대궐에 퍼져나가고
마침내 숙종까지 목격하게 되어 이를 말린다.

국모의 체모를 짓밟는다고 악을 쓰는 중전 장씨에게

숙종은 폐비 민씨처럼 너그러움을 지니라고 충고하지만

중전은 어떻게 폐비와 자신을 비교하냐며 더욱더 이성을 잃게 된다.

숙종은 난감해지고 마음한 쪽에 중전 장씨에 대한 실망감과

폐비 민씨에 대한 아스라한 감정이 살아나는데...

이 소식은 최무수리에 의해 바로 궐밖으로 알려지자 민진후, 김춘택등은

더욱 더 큰 희망을 지니게 되고 김춘택은 최무수리를 통해 사씨남정기를 궐 안으로 들여보낸다.

민심은 더욱더 폐비 민씨 쪽으로 기울어지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숙종은 미복을 한 채로 궐 밖으로 미행에 나선다.

백성들에게서 직접 사씨남정기의 이야기를 들은 숙종은 충격을 받게되고

중전 장씨의 채근으로 사씨남정기를 압수하여 불에 태우는 장희재의 광분한 행동을 목격하게 되는데...

 

 

 

 

 

[59회] 궐안에도 사씨남정기는 널리 퍼져나가고..





최무수리에 의해 궐안으로 반입된 사씨남정기는
널리 퍼져나가고 중전 장씨에게까지 전해진다.

불같이 격노하는 중전 장씨! 최근에 최무수리가 사가를 들락날락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는 최무수리의 거처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씨남정기는 발견되지 않고...

중전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장희재를 총융사로 봉해줄 것을
숙종에게 청하고 총융사가 된 장희재는 사씨남정기의 진원지를
밝혀내고자 광분하나 민진후나 김춘택이 관여했다는 단서조차 잡지 못한다.

이 와중에 숙종은 지난날 미행 나갔던 사실을 대신들에게 밝히고
앞으로 민심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사사로운 상소라도 모두 보고하라고 한다.

이 사실에 동평군은 환국이 멀지 않았음을 예견하며 불안해하는데...

한편, 폐비 민씨의 생신 날에 최무수리는 남몰래 폐비복위를 바라는
정성을 들이고 때마침 미행을 다녀오던 숙종의 눈에 띄게 되는데...


[ 제 59회 용어풀이 ]

총융청 : 서울 외곽인 경기일대의 경비를 위해 사직동에 설치하였던 관청

차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





[60회]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되는 최무수리!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되는 최무수리!

숙종은 최무수리에게서 전해 받은 사씨남정기를 다 읽고는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어가자 최무수리와 김춘택은

회심의 미소를 짓게되고 폐비 민씨의 복위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폐비 민씨의 몸은 자꾸만 야위어만 가고...

한편, 한중혁등은 폐비복위를 위한 거사를 도모하지만 민장도가
심어놓은 첩자에 의해 장희재에게 이 사실이 노출된다.

 

드디어 서인잔당들을 쓸어버릴 기회를 포착했다며 장희재는 한중혁과 이몽을 잡아들이는데...

민심을 알기 위한 숙종의 미행은 잦아지고 그만큼 무수리 최씨의
거처를 들르는 기회도 많아져 궐안에는 이상한 소문이 번져나간다.

 

바로 무수리 처소에 갓을 쓴 외간남자가 자주 드나든다는 것인데 이에
최무수리를 제거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중전 장씨는 당장 최무수리를 잡아들이라 명한다.

최무수리에 대한 잔혹한 고문이 시작되고 중전 장씨는 어서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치지만

최무수리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숙종은 다급히 국문장으로 달려오고 중전 장씨의 패악함을 목격하게 된다.

결국 최무수리를 구하기 위해 숙종은 최무수리의 거처를 오고가던
외간남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중전에게 밝히자 중전 장씨는 아연실색하는데..

 

[ 제 60회 용어풀이 ]

서반직 : 무관의 반열을 이르는 말

동반직 : 문관의 반열을 이르는 말

한성부좌윤 : 서울을 지키며 다스리던 한성부의 종2품 벼슬, 지금의 서울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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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대비는 물벌로 인하여 쓰러지고 마는데..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비의 물벌을 계속
맞고 아들을 살리기 위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

드디어 하늘도 감읍하였는지 숙종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모두가 기뻐하는 찰나 주상에게로 가고자 일어서던 대비는 그만 쓰러지고 만다.

숙종의 환후에 이은 대비의 환후로 대궐은 다시 슬픔에 빠져들고
숙종은 성치 않는 몸으로 대비전을 찾아가나 대비는 숙종을 돌려보낸다.
대비의 환후가 깊어지자 세를 잃을까 두려운 김석주의 발걸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하고, 동평군과 민장도등 남인들 역시 훗날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경을 헤매던 대비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고...

대비의 죽음은 세력판도의 변화를 예고하고 숙종은 김석주 대신에
남구만을 우의정으로 제수하는등 서인들의 물갈이를 시도한다.

한편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옥정을 후궁으로 맞이하라 권하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등 서인들은 반대한다. 서인들이 옥정을 들이기 전에
먼저 새로운 후궁을 격식을 차려 들이기로 결정하자 재입궐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옥정은 이 소식에 분을 내며 동평군에게 달려가는데...





[22회] 후궁이 들여지자 옥정은 분을..




후궁이 들여지자 옥정은 책을 모두 불태우는 등 분을 삭이지 못한다.

그러나 새롭게 들여진 숙의 김씨(조여정) 역시 숙종의 총애를 받는데 실패하자

조부인 김수항은 안절부절못하고 결국 장옥정의 재입궁만이 숙종의 마음을 돌리 수 있다며

조사석을 찾아가 옥정의 재입궁을 추진하라 한다.

숙종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정사를 다시 챙기기 시작하고 북방정책을 재검토하며

그동안 북벌에 적극적이던 남인들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서인들을 견제하게 시작한다.

이 소식에 서인들은 긴장하기 시작하기 시작하고...

한편 김수항이 옥정의 재입궁을 추진하자 김석주는 그럴 수 없다며 반발하고

마침내 숙종에게 직접 찾아가 그 부당함을 아뢴다.

 

하지만 이미 숙종의 마음은 김석주를 떠난 상태고 결국 김석주는 쓰러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김석주의 죽음은 옥정을 비롯한 남인들에게는 또 다른 호기가 되고
마침내 숙종은 옥정의 재입궁을 명하게 되는데...


[ 제 22회 용어풀이 ]

육진 : 세종때 여진족 내습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지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관리하는곳



 

 

 

[23회] 옥정의 6년만의 재입궁..




 

옥정의 6년만의 재입궁!

서인세력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까 긴장하고 숙종은 남구만을 좌의정에 제수함과

아울러 남인의 주장인 북방정책에 더욱 신경을 쓰며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옥정과 숙종의 재회. 그동안의 회한을 나누는 자리에서 옥정은
숙종에게 취선당에서 전하를 모시고 싶다고 청하자 숙종은 흔쾌히 허락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인들은 반대입장을 표명하며 들고 일어날 태세이다.

자의대비는 또다시 파란이 일까 걱정이 앞서고...

한편 옥정의 입궐로 세가 높아진 동평은 다음 차례로 희재를 입신시켜 이용하고자

숙정을 희재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희재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취선당 문제로 서인들이 상소를 올리자 분노한 숙종은

도승지를 투옥하고, 이징명을 문외출송시키는 등 파문이 확대되고,

인현은 옥정을 불러 이 문제를 수습하고자한다.

그러나 옥정은 곧 전하가 납실거라 핑계를 대며 거부하는데...


[ 제 23회 용어풀이 ]

 

삼사 :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키는 말

승문원 : 중국과 일본 등의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

 

 

 

 

 

 

 

 

[24회] 숙종은 당색타파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서인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어지지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당색타파의 의지를 불태운다.

한편 옥정이 오질 않자 인현은 몸소 행차하여 취선당 문제로 전하께 누를 끼치고 있다며

완곡히 옥정에게 충고를 한다. 죽을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옥정.

그러나 인현이 가자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빙긋이 미소를 짓는데...

한편 세를 모으기 위한 행보를 시작한 동평군!

먼저 좌상 남구만을 찾아가지만 남구만은 그를 만나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오겠노라 돌아서는 동평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차있고..

옥정은 취선당 문제로 전하께 누를 끼쳤으니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며
아예 뜰에다 거적을 깔고 무릎을 꿇는다.

이에 숙종은 옥정의 청을 들어 다른 별당을 지어주기로 결심하자
옥정의 꿍꿍이속이 있다며 대궐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서인들은 첩지도 받지 못한 궁인에게 처소를 지어 주는 것은
부당하다며 들고일어나 공사를 중지하라 요구한다.

이에 고민하던 숙종은 드디어 옥정에게 첩지를 내릴 것을 명하는데...






[25회] 숙원이 된 옥정의 위세는 점점 높아지고..




숙원이 된 장옥정의 위세는 점점 높아지고
숙의김씨는 매우 못마땅해한다.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무안을 당한 최상궁을 불러 위로하고...

한편 옥정을 숙원으로 봉한 일에 대한 서인들의 반대 상소가 잇달아 숙종에게 전해지자

숙종은 노여워하며 상소를 올린 자들을 가차없이 삭탈관직시킨다.

서인들은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는 반면 장희재에게는 돈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동평군도 세를 모으려는 행동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김익훈은 사가에서 머물고 있는
숙안공주(김영란)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데...

드디어 숙안공주는 입궐을 하고 숙원 장씨를 불러 잘잘못을 따진다.

그러나 한마디도 물러서지 않는 숙원. 숙안공주는 머리끝까지 화가나
회초리까지 들려하나 인현왕후의 만류로 그만둔다.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근신할 것을 명하고...

근신명령을 오히려 기회로 생각하는 옥정. 숙종이 취선당으로 찾아오자
지금 근신중이라 전하를 뫼실 수 없다며 인현왕후의 처소로 달아나는데...

[ 제 25회 용어풀이 ]

체차 : 관리를 다른 사람으로 갈아 바꾸는 것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이르는 말





[26회] 무슨일인가 꾸미는 숙원장씨...

 




숙종이 내린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는등 다시 무슨 일인가 꾸미는 숙원 장씨.

이 일을 알게된 숙의 김씨등은 또다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노비들을 국밥까지 먹여 풀어주었다는 소문이 온 도성 안에 퍼지자
민심은 순식간에 숙원 장씨에게로 넘어간다.

아니 되겠다 싶은 숙안공주는 다시 입궐을 하고...

이러한 민심이 모두 중전의 회임이 늦어져 그렇다고 판단한 서인들은
대책회의에 들어가고 인현왕후는 대비의 신전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한다.

이 소식에 콧방귀를 뀌는 숙원 장씨.

인현왕후의 의관을 불러다가 훗날을 약속해주며

오히려 회임에 안좋은 약재들을 쓰라고 회유한다.

그리고 숙종이 오자 거짓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남인이라 저들이 자신을
홀대를 한다고하자 숙종은 무언가를 결심한다.

드디어 모든 신료들을 편전으로 불러모은 숙종은 조사석을 이조판서에
제수하는등 인사권의 수장을 남인에게 넘긴다.

이 소식에 옥정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대궐에는 조사석과 옥정의
어머니 윤씨가 통간을 하는 사이라는 괴소문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하는데...





[27회] 숙원의 독기는 수그러 들지 않고...




인현왕후는 투기하는 숙원 장씨를 불러 꾸짖고
또한번 그런다면 규율로 엄히 다스릴 것이라며 경고한다.

숙원의 독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조사석과 윤씨의 관계를 알게된 숙안공주(김영란)는 이 일을 잘만 이용한다면

남인들에게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김익훈을 불러 널리 소문을 퍼트려 줄 것을 명한다.

소문은 바람을 타고 온 도성으로 퍼져나가고...

후원으로 산책 나간 숙종은 그 곳에서 울고 있는 숙원을 만나 위로하고 취선당으로 침수를 든다.

그리고 소문 때문에 사직을 청하는 조사석을 오히려 우의정으로 제수를 하는 등 정국의 균형을 꾀한다.

그러나 조사석의 우의정 등용은 서인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중전 인현왕후의 처소에 의관들이 들락거리자

혹시 회임을 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이에 숙원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전에 내통을 했던 의관을 불러 다그치며 아예 중전의 회임을
막을 방도를 처방하라 이르는데...





[28회] 숙원의 일로 인현은 회초리를 들고...




인현왕후의 회임은 아닌 것으로 판명 나고
숙원은 중전을 위로한다하며 의관이 처방한 대추를 가지고 인현왕후를 찾아간다.

감동하는 인현왕후와 숙종. 그러나 숙원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한편 궁중의 평화를 위해 숙의김씨에게 귀인의 첩지를 내려달라는
인현의 청을 숙종이 따르자 숙원은 분개한다.

숙원이 새로이 임명된 귀인(조여정)에게 문후드는 것도 거부하자

귀인은 가만두지 않겠다며 직접 숙원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갖은 핑계로 끝까지 버티는 숙원.

이 소식이 인현에게 전해지자 인현은 숙원을 불러 심하게 나무라지만
숙원은 마음에도 없는 짓은 할 수 없다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
그러자 참다못한 인현은 회초리를 대령하라 명하는데...

남구만의 사직상소로 고뇌하던 숙종은 머리도 식힐 겸 취선당에
들었다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고, 무슨 짓이냐며 인현을 꾸짖는다.

그러나 인현 역시 내명부의 일이니 관여하지 말라며 숙종과 맞서자
숙종은 중전의 이런 모습은 투기에 지나지 않느다며 투기 때문에 내쳐진
중전도 있다며 불같이 화를 내는데...





[29회] 조정의 일로 상심하던 민유중은 결국 쓰러지고...




귀인의 고자질로 숙원을 의심하기 시작한 인현은 숙원의 마음을 떠볼 생각에

숙원을 불러 지난번 그 대추를 같이 먹자고 한다.

순간 긴장하는 숙원. 그러나 숙원은 오히려 그 대추를 감사하다며 먹기 시작한다.

숙원을 의심하던 눈초리들은 일순간 수그러들고..

그러나 취선당으로 돌아온 숙원은 먹었던 대추를 다시 토해내는데....

뒷마무리를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숙원은 희재에게 서찰을 보내 도와달라 청하고,

희재는 마침 출사를 결심한 동평군과 함께 입궐하여 의관을 처치하고자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한편, 종친인 동평의 출사는 서인들의 반발을 사지만 조정의 쇄신을 꿈꾸는 숙종은

동평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하여 서인들의 반발을 일축한다.

조정의 일로 상심하던 민유중은 결국 쓰러지게 되고 이 소식이
인현에게 전해지자 뜻밖의 비보에 인현은 오열하는데...

숙원의 의도대로 의관은 감쪽같이 처치되지만 의관의 행방불명은 또
다른 의혹을 낳기 시작한다.

결국 대왕대비의 귀에까지 이 사실이 전해지고, 화가 난 대왕대비는
숙원의 궁녀인 자경을 당장 잡아들이라 명하는데...

 

[ 제 29회 용어풀이 ]

출사 : 벼슬에 임명되어 관아에 나아감

혜민서 제조 : 의약과 일반 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는 관청의 일을 다스리는 벼슬

 




[30회] 격노한 숙종은 김만중을 유배보내고...




잡혀온 자경이 부인을 하자 몸소 문초에 나선 대왕대비는 더욱 모진 고문을 하고

위기를 느낀 숙원은 대왕대비의 문초는 잘못된 것이라며 멈추어 달라 하지만

숙원의 방자함에 치를 떨던 대왕대비는 숙원을 당장 끌어내라 한다.

끌려 나온 숙원은 오히려 대전뜰에 꿇어앉아 자신의 억울함을 아뢰기 시작한다.

마침 김만중의 상소에 격노한던 숙종은 숙원의 아룀을 듣고 당장
대왕대비의 문초를 멈출 것을 명하자 대왕대비는 그 충격에 쓰러지고 만다.

이 기회에 자신과 숙종을 능멸하는 서인세력의 척결을 결심한 숙원은
계속 대전뜰에서 숙종에게 외치고, 이를 들은 숙종은 모함과 비방을 한
서인들을 당장 잡아들이라 명한다.

상소를 올렸던 김만중이 잡혀오고 숙종의 친국이 시작된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김만중.
격노한 숙종을 김만중에게 유배를 명하는데...

숙종의 도리에 어긋나는 정사에 화가난 대왕대비는 숙종의 문후도 거부한채 숙종과 맞선다.

결국 숙종은 취선당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이 소식을 들은 숙원은 다시
취선당의 뜰에 거적을 깔고 앉아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라며 자신을 죽여달라 외치기 시작하는데...



 


[31회] 중전의 회임을위한 대왕대비의 치성이 시작되자...

 




귀인의 궁녀를 친 일로 인현은 숙원을 불러 충고를 하고

또 대추에 관한 소문의 진상을 떠보려 하나 숙원은 오해라며 발뺌을 한다.

사가의 숙안공주 역시 의관의 행방불명이 숙원과 연관이 있다고 단정을
하고 김익훈을 시켜 희재의 뒤를 밟으라고 지시한다.

대왕대비는 숙종을 불러 숙종의 실정에 대해 몇가지 충고를 하고
조사석의 사직을 받아줄 것과 자신이 직접 중전의 회임을 빌테니 전각을 준비해주고

또 대궐문을 중전의 생시에 맞춰 열고 닫아줄 것을 요청한다.

숙종이 이 청을 받아들이고 중전을 위한 대왕대비의 치성이 시작되자
이 소식을 들은 숙원은 다시한번 배신감에 치를 떨게 된다.

바로그때 숙원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지난번 그 대추에서 수은이 검출되었다는 것과 대왕대비의 지시로

그 처방전을 찾으라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는 숙원은 자경을 시켜 그 처방전을 먼저 찾아
없애버리라고 지시하는데...

 

 

 

 

 

 

[32회] 숙종은 내의원의 일을 재조사하라 명하고..




윤상궁의 소란으로 숙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소란을 알게된 인현왕후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윤상궁과 자경을 불러 대질심문을 한다.

결국 윤상궁의 거짓으로 결론이 나고 숙원은 다시한번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대왕대비는 처방전을 찾아 자신이 직접 보관을 하자

숙원은 그것이 숙종에게 고해지지 않을지 긴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희재는 다시 홍주부를 시켜 대왕대비전의 처방전을 가짜로
바꿔치기를 할 것을 결심하는데.....

희재측의 움직임을 눈치챈 숙안공주는 대왕대비를 찾아가 처방전을
챙긴 대왕대비의 속내가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하지만 대왕대비는 냉정히
숙안공주를 물린다. 아니되겠다 싶은 숙안공주는 다시 대전으로 들어
숙종에게 자초지종을 다 고하자 숙종은 내의원의 일을 재조사하라 명한다.

이 소식에 숙원은 바로 대전으로 달려가지만 숙종은 조사가 끝날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며 숙원의 청을 거절하는데......





[33회] 인현왕후의 결정적 증거에 궁지로 몰리는 옥정..

 




인현왕후의 결정적 증거에 궁지로 몰리는 옥정.
한사코 발뺌을 해보지만 인현왕후의 노기에 당할 수가 없다.

누명을 쓰느니 차라리 죽여달라는 옥정의 청에 인현은 사약을 대령하라 명한다.

순간 긴장하는 옥정.

수은과 사약중 택일하라는 인현의 말에 옥정은 중기를 태워주면 사약을
마시고 죽겠노라 하자 인현은 옥정의 말에 따른다.

결국 옥정은 사약을 마시게 되나 이는 옥정의 버릇을 고치기 위한
인현왕후의 의도된 계략이었는데...

하지만 위기를 넘긴 옥정의 방자함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인현이 보내준 궁녀들을 거절하고

산실청의 권상궁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아 중전보다 먼저 왕자를 낳겠노라 결심한다.

새로 들어온 권상궁은 불사를 열어 회임을 비는 중전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옥정의 말에 그것을 막을 방도가 있다하며 인현의 처소로 향한다.

인현왕후의 기운을 쇠하게 만들기 위해 중궁전의 혈자리에 쇠징을 박는
일은 꾸민 것이다.

그러나 이일 역시 인현의 상궁들에 목격되고 결국 인현왕후는 직접 나서

옥정의 수족들을 문초하기로 결심하는데...

 


[ 제 33회 용어풀이 ]

귀후서 : 관곽을 만들고 장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기관

중기 : 약재의 쓰임을 세세히 기록한 장부



[34회] 인현왕후는 석고대죄를 드리지만..




숙종이 노기를 띄며 인현왕후를 책망했다는 말에
미소를 띄우는 옥정.

취선당 내인들을 끌어내라는 인현왕후의 명까지 거역한채 버틴다.
하지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조금 뒤 순수히 내인들을 내어주는데...

중궁전에서 문초가 시작되고 옥정의 내인들의 비명소리가 궐안에
진동을 하자 드디어 옥정은 인현을 찾아가 모든 것이 중전의 회임을
바라는 의도로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 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전각밑에서는 쇠징이 아니라 회임을 위한 호랑이 발이 발견되고
이 소식은 숙종에게 전해진다.

중전이 후궁들을 투기하여 자꾸 분란만 만든다고 여긴 숙종은 대신들의
반발까지 사고 있는 불사를 당장 그만두라 명하자 인현왕후는 대전뜰에
엎드려 석고대죄를 드린다.

모든 것이 옥정의 계략이었다며 분해하는 대왕대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중전의 석고대죄를 거두라 하지만 왕명을 어긴 중전을 용서할 수 없다며 맞선다.

인현왕후의 석고대죄는 계속되고 동평군의 말을 들은 옥정은 인현의 옆에다

거적을 깔고 앉아 중전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함께 석고대죄를 드리기 시작한다.

인현은 모멸감에 부르르 떨지만 오히려 숙종은 옥정의 청을 받아들이는데...



 


[ 제 34회 용어풀이 ]

사은사 : 명나라와 청나라에 파견한 답례 사신

호패 : 16세 이상 남자가 차던 일종의 신분증명서





[35회] 대왕대비는 소의의 방자함에 진노하다가...

 




소의 장씨는 자신이 중전의 회임을 위해 치성을 드린거라 변명하지만 인현은 믿지 못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왕대비는 당장 소의를 데리고 오라 하지만

오히려 소의의 방자함에 진노하다가 쓰러지고 마는데...

한편 숙종이 도목정을 선포하여 서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재편하려
들자 송시열은 민심의 동요를 이유를 들어 반대의지를 천명한다. 하지만
도목정의 일로 온 도성이 술렁거리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데...

숙종은 이조와 병조의 도목정 추진이 미흡하다는 동평군의 말을 듣고
동평군에게 직접 그 소임을 맡긴다.

그리고 또한 숙안공주의 궐 출입을 제한해 달라는 청도 받아들인다.
이렇듯 동평군의 입김이 세어지자 김수항은 숙종에게 독대를 청하여
종친으로서의 행동을 문제삼아 견제를 하려하지만 오히려 숙종의 진노만을 살뿐이다.

소의의 회임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지만 대왕대비 또한 인현에게 직접 탕제를 지어주는 등

정성을 다하고 숙종에게 중궁전에서 침수들 것을 청하기도 한다.

결국 숙종은 취선당을 뒤로하고 대왕대비의 청에 따라 중궁전으로 향하는데...


[ 제 35회 용어풀이 ]

도목정 : 이조와 병조에서 관원의 치적을 조사하여 벼슬을 떼거나 올리는 인사제도

혜민서 제조 : 의약과 일반 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는 관청의 수장





[36회] 숙안공주는 동평군과 맞서지만...




숙안의 입궐을 제한한 것은 왕실의 분란을 막기 위한 충정이었다는 동평의 말에

숙안공주는 혜민서 제조자리를 당장 그만두라며 맞서지만 동평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서인세력과 정면승부를 할 것을 결심한다.

동평군은 조사석을 찾아가 서인세력을 척결할 좋은 기회라며 도와달라 청하고

조사석은 숙종을 찾아가 남인측의 준재를 천거하여 등용시킬 것을 청한다.

조사석의 의견은 받아들이는 숙종.

더 이상 동평군을 이리 놔둘 수가 없다고 판단한 송시열은 몸소 입궐하여

혜민서 제조인 동평군을 탄핵하려 하지만 숙종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숙종의 서인세력에 대한 불신만 증폭시키는데...

한편, 대왕대비는 중전과 함께 병문안을 온 숙종이 흐뭇하기만 하다.

하지만 소의는 자신이 정해놓은 합궁날에도 숙종이 올 기미를 안보이자 다급해진다.

급기야는 궁녀들을 시켜 숙종의 동태를 파악하라 이르지만 귀인 김씨는
이제부터 후궁들이 대왕대비의 병구완을 해야한다며 소의를 대왕대비전에 묵어둔다.

동평군의 전횡을 막기 위한 서인들의 최후의 행동을 결심하는 송시열!

전국 유림들에게 사발통문을 띄워 유생들을 동평군의 집앞에 집결시키는데...




 

[37회] 서인들은 숙종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나서는데...




왕명을 거역하는 유생들의 행동에 진노하는 숙종!

계속 왕명으로 다스린다면 더 큰 소요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대신들의
간언에 심사숙고하지만 결국 서인들의 반대에도 무릎쓰고 패초(왕명으로
신하를 부르는 것)를 보내어 동평군을 입궐시키라 명하는데...

그러나 계속된 유생들과의 대치로 동평군의 입궐이 무산되자 동평은
조사석을 불러 인사가 기록된 봉서를 전달한다.

좌의정에 조사석을 천거하는등 남인들 위주로 된 동평군의 봉서를
전해받은 숙종은 매우 흡족해하고 이를 반대하러 온 서인들 앞에서
공표를 해버린다.

입지가 줄어든 서인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숙종은 왕명에 정면으로
반대를 하던 민진후를 문외출송 시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자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들은 모든 대신들의 사직서를 받아 숙종에게 전달하는 등

숙종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나서 숙종은 일대 위기에 빠지는데...


[ 제 37회 용어풀이 ]


패초 : 승지가 왕명을 받아 신하를 부르는것

문외출송 : 죄 지은 자의 관직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내쫓는 형벌

양사 : 사헌부와 사간헌의 아울러 이르는 말

옥당 : 왕의 자문을 하는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





[38회] 취선당에서 장소의의 회임소식이 들려오는데...




합궁에 성공한 소의 장씨에게 숙종은 별채를 내릴 것을 약속하고

소의의 위세는 나날이 높아간다.

숙종은 서인들의 사직을 반려하고 동평의 인사권을 거두는 등 서인들과
타협점을 찾아가지만 강경한 서인들은 오히려 동평을 사직시킬 기회라
여기고 끝까지 싸움을 걸려한다.

하지만 더 이상 밀어부친다면 결국 피바람을 피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송시열은

이쯤에서 타협을 받아들이자 제안한다.

이로서 정국의 파국은 피하게 되는데...

한편 숙종은 소의 장씨의 사가에 노비 100명과 새집을 내려 소의를 위로하자

장희재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가고 동평군은 발이 묶여있는 자신을 대신하여

일을 해날갈 장희재의 입궐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그런데 잠잠하던 궐안은 다시한번 복권된 이징명의 여총에 관련된 상소로 발칵 뒤집히고

숙종은 다시한번 노여워한다.

또다시 시작된 서인들과의 싸움이 숙종은 힘겹기만 하고...

그런데 그순간 취선당에서 장소의의 회임소식이 들려 오는데...


[ 제 38회 용어풀이 ]

경연 : 임금앞에서 신하들이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

 

 

 

 

 

 

[39회] 장소의의 회임으로 숙종은 연화를 열고...




어의들이 취선당을 오가자 소의 장씨의 회임 소문은 온 궁궐에 파다하게 퍼지고

중전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반면 숙종은 온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채 취선당으로 달려오고 왕자를 바란다는

속마음을 소의에게 털어놓는다. 이 자리에서 소의는 별채 낙성일 날 사가의 가족을

초청해달라고 청하고 숙종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인들은 반발을 해보지만 어쩔 도리가 없고 소의 장씨의 위세는

더욱 높아져 이제부터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살려두지않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나 조사석이 연회를 주관하는 소임을 맡자 조사석과 윤씨의 옛 추문에 대한 소문이

다시 번져나가고 민진후는 중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막겠다고 나선다.

드디어 별채 낙성일 날, 연회가 시작되고 모든 대소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숙종은 왕자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의의 가족들을 환대한다.

그런데 숙종이 장희재에게 잔을 따르는 순간,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민진후가 숙종 앞으로 나아와 연회를 중지할 것을 주장하는데...


[ 제 39회 용어풀이 ]

 

사속지망 : 왕자를 생산하여 왕실의 대를 이을 것을 바라는 마음

윤기 : 윤리와 기강을 아울러 이르는 말


 

 

 

 

[40회] 숙종의 국문은 계속되고 대왕대비는 혼절...




민진후에 대한 숙종의 국문은 계속되고
대왕대비의 혼절소식을 들은 숙종은 대왕대비 전으로 달려간다.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대왕대비는 숙종에게 민진후의 죄를 용서하라 청하지만

숙종은 곧 태어날 왕손을 위협하는 일이라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부부인 조씨가 직접 나서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 하지만 숙종의 저의가 무엇인지

불안한 서인들은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데... 서인들이 민진후를 포기하고 있을 때

결국 조사석이 직접 나서 숙종에게 간하고 숙종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소의 장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해한다.

그러나 취선당을 찾아온 숙종은 토라져 있는 소의에게 자신의 행동에
숨은 뜻이 있음을 내비치는데...

결국 숙종의 행동은 동평군의 자유로운 취선당 출입과,

아울러 장희재를 입궐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드러나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뒤통수를 맞은 듯 허탈해한다.

내금위 별장으로 임명된 장희재는 그 부푼 가슴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숙종의 진심을 알게된 소의는 기쁘기 한량없다.

그런데 한껏 뽐을 내며 첫입궐하던 장희재는 자신이 지닌 칼문제로
대전내관 최상앙과 싸우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 드라마 줄거리만 보면 정말 흥미진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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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장희빈은 역사적 사실에 굉장히 충실한 사극이다.

 

장희빈 - 김혜수, 숙종 - 전광렬 -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소소한 일은 그냥 드라마로만 보는게 맞을 것 같고,

역사적인 굵직굵직한 사건을 위주로 이해해보자.

 

 

[1회] 숙종의 제1비인 인경왕후의 승하




숙종의 제1비인 인경왕후의 승하!

그러나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김영애)의 반응은 싸늘했다.
숙종(전광렬)에게 알리지 말 것이며, 국상조차도 간소하게 지내라 명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분노하여 대비전을 찾지만 현종이 승하할 때도 인정보다

용상자리에 매달리셨던 분이셨기에 그런 대비에게 숙종은 점차 마음이 멀어진다.

서인인 인경왕후의 죽음은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인들과 서인들에게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역모를 준비하던 남인 허견과 복선군(송용태)의
계획은 급물을 타기 시작하였고, 역모를 눈치챈 서인들은
김석주(전인택)의 밑으로 단결하여, 역모사건을 기화 삼아 남인들을
몰아낼 것을 궁리한다.

한편, 허견의 역모에 뒷돈을 대던 장현의 집에는 조사석의 정부인이
행패를 부리는데 장현의 동생의 첩이자 옥정(김혜수)의 어머니인
윤씨(이보희)와 조사석(백윤식)이 정을 통한 것이 그 이유였다. 장현은
패물로 그녀를 달래 가까스로 돌려보내지만, 윤씨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하려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옥정은 사람이 사람을 은애하는
것이 죽을죄가 되느냐며 윤씨를 부여안고 울음을 삼키는데...

 


[ 제 1회 용어풀이 ]

친경례 (親耕禮) : 임금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친히 토지를 경작하는것

과전 (科田) : 문무양반들에게 특권을 갖도록 한 토지

공남 (貢納) : 지방특산물에 공세를 바치는 것

평시성 (平市瑞) : 시장에서 쓰는 저울과 물가를 통제하고
상도의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아 보는 관청

 

 

 

 

 

 

[2회] 숙종 제 1비의 승하와 복선군의 음모가...

 




허견과 복선군은 허적의 시호연을 역모날로 정하고, 이런 움직임을 비밀리에 보고받은 숙종(전광렬)은 병조판서
김석주(전인택)를 불러들여 역모사건을 처리할 것을 명한다.

한편 옥정(김혜수)은 장현으로부터 역모에 뒷돈을 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만, 오히려 잘한 일이라며 장현의 등을 떠민다.

숙종의 명으로 홀로 허견집으로 향하는 김석주.

그는 곧 복선군에게 잡히는 신세가 되고 역모가 성공하는 듯 하지만
곧이어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역모에 동조한 자들은 모두 잡히게 되고
장현의 집도 들이닥친 금군들에 의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 결국 옥정의
일가는 집 밖으로 내몰리는데...


[ 제 2회 용어풀이 ]

홍수의 변 : 인조의 손자인 복선군의
형제들이 궁녀와 간통했다는 소문으로 귀양을 간 사건

시호연 : 훌륭한 정승이나 유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이름을 추증하는 것을 축하하는 연회

 

 

 

 

 

 

[3회]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옥정(김혜수)일가.

희재(정성모)는 조사석(백윤식)의 집에 찾아가 큰아버지의 소식을
묻지만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에 힘없이 돌아선다.

복선군의 처리문제로 고심하는 숙종(전광렬)은 의외로 복선군을
죽이라는 자의대비(강부자)의 말에 갈등하기 시작하지만 결국의 왕법의
지엄함을 세우고자 역모에 참가한 남인들을 모조리 처단하라 명한다.

큰아버지 장현의 죽음을 목격한 옥정은 궁녀가 되는 길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 윤씨(이보희)에게 이야기하는데....

한편 몰락한 남인들과 반대로 귀양가 있던 서인세력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이중 인현(박선영)의 아버지(송재호)도 돌아오게된다.
아버지의 무사함을 기원하던 인현은 이 소식에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고...

노름판을 전전하던 희재는 결국 장사패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이들 장사패들은 희재를 놓치자 옥정을 노리게 된다.

쫓기는 옥정. 이때 마침 미행을 나온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 제 3회 용어풀이 ]

회맹의 : 피로써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

술시 : 저녁 7시부터 밤 9시까지의 동인


 

 

 

[4회] 숙종과 운명적인 첫인연을 맺게 되는데..



송시열(이순재)을 중심으로 재집권한 서인들은
국혼을 서두르고 초간, 재간의 절차도 생략한 채 민유중(송재호)의
여식(박선영)을 중전자리에 올릴 것을 거론한다.

격식도 차리지 못한 채 보내야만 했던 인경왕후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숙종(전광렬)은 이 사실을 듣고 종사에는 관심 없이
자신들의 집권에만 눈이 팔린 서인들의 꼬락서니에 분개한다.

한편, 궁녀가 되고자 조사석의 집에 찾아간 옥정(김혜수).

결국 서찰하나를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동평군(유인촌)의 어머니인
숭선군부인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지만 집밖으로 내쳐지고야 만다.

국혼이야기에 불안한 민유중은 담대할 뿐만 아니라 중전의 자리는 큰
하늘을 만나는 것이라며 성심을 다하겠다는 인현(박선영)의 말에 마음을 가라앉힌다.

대비(김영애)와의 첫만남에서 인현은 대비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이소식을 접한 자의대비(강부자)는 긴장하게 된다.

동평군 집앞에서 무릎을 꿇은채 버티던 옥정은 만취해 집으로 돌아오던
동평군(유인촌)과 만나자 말자 실신해서 쓰러지게 되는데...


[ 제 4회 용어풀이 ]

전교 : 임금이 명령을 내리는 일, 또는 그 명령

비변사 : 국방문제와 외교, 산업, 교통, 통신 등 주요 국정 전반을 관장한 문무합의 기구



 

 

[5회] 자의대비와 만나는 옥정...





동평군(유인촌)의 간청으로 옥정은 자의대비(강부자)에게 알려지고

옥정이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라는 말에 자의대비는 내심 기대를 건다.

이에 동평군은 숙정(하유미)을 불러 옥정의 몸단장을 시키고 숙정은
옥정에게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도를 알려준다.

옥정은 하찮은 궁녀로만 살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중전간택날, 인현의 출중함에 명성왕후(김영애)는 기뻐하지만
자의대비는 인현의 여인스럽지 못함에 오히려 옥정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가진다.

가례논의에도 아랑곳 않는 숙종. 대신들의 탁상공론에 격노하고 답답한
마음에 미행을 나가 동평군을 만난다. 동평군은 자신의 속마음을
숙종에게 털어놓게 되고...

드디어 자의대비와 만나는 옥정. 옥정의 영민함에 자의대비는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자의대비는 총명함이 지나친 점이 마음에 걸리고
결국 옥정을 궐밖으로 쫓아내라고 지시하는데....


[ 제 5회 용어풀이 ]

서죽 : 천지 자연의 이법에 비추어 인사의 길흉을 판단하는 점의 한 방법

계사 : 임금에게 사실을 적어 올리던일 또는 그 서면을 일컫는 말

승정원 :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국왕의 비서기관

가례도감 : 국가의 가례행사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

 

 

 

 

[6회] 숙종과 운명적 재회를 하고 승은을 입게 되는데...




어렵게 위기를 모면하고 궁녀가 된 옥정.

새로운 거처에서 시영(곽진영)이라는 궁녀를 만나게 되나 시영의
괴상한 행동에 방밖으로 뛰쳐나온다. 바로 그때, 미행에서 돌아오던
숙종과 운명적 재회를 하게되고...

그 자리에서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드디어 숙종의 승은을
입게 된다. 옥정은 숙종에게 전하의 마음을 달라 간청하고 이 소식에
자의대비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한편 간택에 내정된 인현은 입궁하게 되고 명성왕후는 인현을 만나 빨리

후사를 낼 것을 부탁한다. 인현은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전하의 땅이 되겠노라 다짐하고...

그러나 가례에는 관심이 없는 숙종은 대신들에 대한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인

호포법(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것)시행을 결행하고 서인세력은 발칵 뒤집힌다.

대신들과의 싸움에 지친 숙종은 다시 옥정의 처소로 향하고 기다리고 있던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 제 6회 용어풀이 ]

첩지 : 왕이 내리는 사소한 명령을 일컫는 말

호포 : 호를 단위로 면포나 저포를 징수하는 세제

 


 

 

 

 

[7회]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날...




대비가 기다린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숙종은 계속 옥정과 함께 밤을 지내고

자신의 동곳으로 옥정의 머리까지 손수 올려주기까지 한다.

결국 대비도 숙종이 옥정과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숙종에게
격노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옥정의 뒷조사를 하라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숙종의 회한은 깊어만가고 옥정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가례날.

조현례때 대비는 인현왕후에게 조정이 편하기 위해서는 중전의 몸에서 후사가

빨리 나야한다는 것을 명심시키고, 자의대비 역시 옥정을 불러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회임을 해야한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가례의 초야. 중전이 된 인현왕후는 중궁전에서 숙종을 기다리고 옥정 역시

숙종이 오기만을 목놓아 기다린다. 하지만 숙종의 발걸음은 인현왕후에게로 향하고...


[ 제 7회 용어풀이 ]

호포 : 양반, 상민의 구별없이 호를 기준으로 군포를 평등하게 징수하는 세제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사사로운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친영 : 가례때 신랑이 신부를 맞아 데려오는 육례의 마지막 예식

조현례 : 새로 간택된 왕비나 세자빈이 가례를 지낸 뒤 처음으로 웃어른을 뵙는 의식

 

선온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과 음식



 

 


 

[8회] 대비는 옥정을 쫓아내라 명하는데...

 





숙종이 인현왕후쪽으로 들었다는 말에 옥정은 크게 낙담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사내로서 약속한 궁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인현왕후는 그렇게 숙종을 보내주고 숙종은 옥정에게 가 첩지를 내릴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옥정은 매일밤 숙종과 함께 하고싶다며 응석을 부린다. 숙종은 그런 옥정이 더욱더 좋아지고...

인현왕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 사실은 대궐전체로 소문이 퍼져나가

결국 대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한편 새로들어온 중전에게 하례를 올리는 날,

옥정은 아직 첩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외되어 기분이 나쁘고,

기어코 인현을 찾아가 인사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예에 맞지 않는 일이니 옥정의 인사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나 자신의 고집을 꺽지 못하는 옥정은 중궁전 밖에서 버티고

이 사실을 안 대비는 중궁전으로 달려와 옥정을 쫓아내라 명하는데...


[ 제 8회 용어풀이 ]

호포 : 양반, 상민의 구별없이 호를 기준으로 군포를 평등하게 징수하는 세제

첩지 : 승은을 입은 궁녀를 후궁으로 봉하는 등의 사사로운 내용을 담은 왕의 명령서

내명부 : 궁중에서 봉직하는 귀인, 소의, 숙의 등 여인네들의 관직을 통칭하는 말




[9회] 중전과의 합궁을 약속하는
숙종은...





끌려나가는 옥정.

마침 옥정의 처소에서 옥정을 기다리던 숙종은 옥정의 처참한 모습에
화가나 인현왕후를 심하게 나무란다. 숙종은 눈물흘리는 옥정이  애처롭기만 하고....

회임에 대한 옥정의 의지는 더 강해지고 이 소식에 대비는 격노하며
옥정을 막을 방도를 찾고자 고심한다.

숙종이 옥정의 처소에서 나오질 않자 서인들은 초조해지고 송시열은
호포법을 받아들이는 대신 중전과의 합궁을 할 것을 숙종에게 제안한다.

숙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인현왕후와의 합방을 하러 중궁전으로 향한다.


이 소식에 토라지는 옥정. 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옥정의 첩지를
내려 주겠노라 고백하고 다시 옥정에게로 향하는데...


[ 제 9회 용어풀이 ]

내의원 :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기관

관상감 : 천문, 지리, 책력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기관


 


 

 

[10회] 대비는 옥정을 궐 밖으로 내쫓으려고...




 

숙종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옥정이 어머니 생각에 눈물짓자

숙종은 어머니 윤씨를 불러들여 옥정과 만나게 해준다.

모녀의 정을 나누는 두사람을 바라보는 숙종의 얼굴에는 미소가 쓸쓸히 지어지고...

날로 방자해지는 옥정의 행실이 마음에 걸리는 대비는 마침내 옥정을
모함해 쫓아낼 방도를 찾아낸다.

한편 옥정이 중궁전을 찾아 인현왕후에게 하례를 드리는 자리에서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부디 왕자를 생산하여 주상을 기쁘게 하라고 해
옥정을 놀라게 한다.

한편 숙종이 내린 첩지는 반려되었으나 대신 대비에 의해 새로운
처소가 내려졌으나 자의대비는 대비의 속셈이 무엇인지 불안해한다.

드디어 대비가 결심한 날이 다가오고 숙종이 궐을 비운 능행날을 틈타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김익훈의 수하들은 옥정처소로 쳐들어가 옥정을
궐밖으로 쫓아내려하는데...

 

 

 

 

 

 

 

 

[11회] 옥정은 궁궐에서 쫓겨나 위기의 순간에...

 




옥정은 정체 모를 장정들에 의해 깊은 산골로
끌려가고 동평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희재는 김익훈의 수하를
문초해 옥정이 끌려간 곳을 알아내 뒤쫓아간다.

대비의 음모에 분을 못 참던 자의대비가 능행을 다녀온 숙종을 찾아가
옥정의 일을 고하자, 격분한 숙종은 대비를 찾아가 왜 이리하시는지 따져 묻는다.

그리고 두경을 시켜 옥정의 행적을 알라보라 명하고...

한편 옥정은 위기의 순간에 희재에 의해 구해져 한적한 산사에
머무르게 되지만 대궐에서 쫓겨나 전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참지
못하고 그만 목을 매게 되는데...


[ 제 11회 용어풀이 ]

전설사 : 장막, 병풍 등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


 

 

 

[12회] 옥정에 대한 숙종의 그리움은 더해가고...

 


 



옥정에 대한 숙종의 그리움은 더해가고 점점더
인현왕후에게서 멀어지게 되자 대비는 난감해 한다.

숙종이 계속해서 옥정을 찾자 안되겠다고 판단한 대비는 김석주를 시켜
옥정을 찾아내 아예 한양 밖으로 내치라 명하고...

한편, 대왕대비는 인현왕후가 문후를 오자 받을 수 없다며 밖으로
내치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비는 노발대발하며 대왕대비전으로
달려오지만 능수 능란히 대처하는 대왕대비에게 오히려 심한 모멸만
당하고 물러선다.

옥정은 산사까지 찾아온 김익훈 무리에게서 간신히 도망치게되고
동평군은 숙종의 마음이 옥정에게 있다는 확신에 옥정을 다시 입궐시킬
것을 도모하고 옥정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온다.

그런데 때마침 동평군집에서 연회가 열리고 숙종은 답답한 마음을
풀고자 미행을 나오게 된다.

뒤늦게 숙종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옥정은 기뻐하며
숙종에게로 달려가는데...


[ 제 12회 용어풀이 ]

잠화 : 숨어있는 돈, 즉 정치 비자금을 이르는 말




 

[13회] 숙종은 인현왕후의 정성에 감동을 받아, 하룻밤을....




동평군 집으로 옮겨온 옥정은 기운을 차리고

동평군은 방 밖에는 얼씬도 말고 숨어있으라고 명한다.

 

하지만 숙종이 동평군의 집에 와 있다는 신씨의 말에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이미 숙종은 가버린 후여서 실망이 크고...

한편 숙종은 옥정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가고 인현왕후는 이런 숙종을 묵묵히 기다린다.

대비는 이런 답답한 인현이 못마땅하기만 하고...

인현왕후는 숙종의 불면을 걱정한 나머지 매일 밤 대전으로 가 몸소
숙종의 잠자리를 준비하고 마침 숙종에게 이 사실이 알려진다.

인현왕후의 이러한 지극정성에 감동 받는 숙종은 그냥 갈려고 하는
인현왕후를 자신의 침소로 불러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 일로 대궐에는 큰 연회가 열리고 대비는 숙종의 마음을 잡은 인현왕후를 경하한다.

이 사실은 마침내 동평군에게까지 알려지고 고심하던 동평군은 옥정을
불러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명하는데...





[14회] 숙종은 옥정과의 감격의 재회를 하고...





옥정은 전하를 만나게 해달라고 동평군에게 매달리고

동평군은 숙종의 진심이 옥정에게 있음을 알고는 옥정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한다.

마침내 동평군은 옥정이 동평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대왕대비에게
알리고 대왕대비는 숙종에게 다시 말한다.

숙종은 옥정의 소식에 눈물을 떨구고...

숙종은 인현왕후와의 잠자리에서도 옥정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 없고
결국 새벽에 중궁전을 나가고 만다. 숙종의 빈자리가 더욱 서럽기 만한
인현왕후는 씁쓸히 미소짓기만 하고...

드디어 숙종은 동평군의 집으로 향하고 옥정과 감격의 재회를 한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옥정의 무고함을 밝혀주겠노라 약속을 한다.

한편 옥정의 일을 소문내기로 작정한 동평군은 희재를 시켜 옥정의 회임에 쓸
약재를 사 모으라고 지시하고 마침 인현의 약재를 사려하던 서인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 서인들은 바짝 긴장하는데...


 

 

 

 

[15회]옥정의 회임사실이 알려지자...




숙종이 계속 옥정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대비는

인현왕후를 불러 심하게 나무라고, 숙종에게도 찾아가

옥정만은 아니 된다며 노발대발한다.

하지만 숙종은 오히려 옥정의 무죄를 밝히겠노라며 직접 나서

옥정의 일과 관련된 자들을 문초하기 시작하고...

결국 숙종은 대비전의 최상궁이 이일에 연루된 사실을 밝혀내고
대비전을 압박하자 대비는 수라상도 거른 채 숙종과 맞선다. 걱정이
앞서는 인현왕후는 몸소 미음을 쑤어 대비전에 가지만 대비는 인현을
만나주지도 않고...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재조사에 대한 희망에 가득한 옥정에게 드디어
회임의 징후가 보이고 동평은 소문을 낼 요량으로 의원을 불러들인다.

결국 숙종도 옥정의 회임 사실을 알게되어 기뻐하고 또다시 옥정을 만나러

미행을 나선다. 이 일이 대비전에 알려지자 대비가 혼절하는 등 서인세력들은

발칵 뒤집히고 인현왕후는 자신도 모르게 질투와 분노가 끌어 오르는데...





[16회] 숙종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다고...

 




숙종은 대비를 찾아가 옥정의 재입궐을 윤허해줄 것을 간청하나

대비는 죽어도 옥정을 인정할 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한다.

한편 숙종이 옥정에게 왕실물품을 보내자 급해진 서인세력은 중전의 회임을 서두른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옥정에게 첩지를 내리기로 결심하고 몸소 대비를
찾아가 그것을 알린다. 그러나 역시 대비의 반응은 싸늘하고...

한편 동평군은 조사석을 은밀히 만나 서인세력의 견제와 남인세력의
부활을 논의하며 뜻을 같이 해달라고 요청한다.

옥정의 왕자출산을 바라는 마음에 대왕대비와 숙종이 각각 사조룡과
금도끼를 보내자 대비는 안되겠다 싶어 김석주를 급히 부른다.

김석주는 옥정을 처결하고자 동평의 집으로 자객을 보내고 옥정은
또다시 큰 위험에 빠지는데...





[17회] 옥정은 반대세력들에게 복수를...




분노가 극에 달한 숙종은 금부를 동원하여
김익훈의 수하들을 문초하고, 대왕대비는 대비를 찾아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노라 하지만 대비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한다.

사건의 배후를 캐고자 희재는 깍정이 패를 동원하고 숙종 역시
김석주를 불러 직접 재조사하라 명한다.

다급해진 김석주는 김익훈의 집을 찾아가고 미행하던 두경은 배후가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숙종에게 고한다.

숙종은 대비가 이 일의 실질적인 배후임을 직감하고 대비를 찾아가
옥정을 재입궐시키겠노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다.

안되겠다 싶은 대비는 결국 이일에 서인대신들을 동원시킬 것을
결심하고 서인들은 대전밖에 부복하여 숙종에게 옥정의 재입궁을
거둬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숙종은 물러나지 않고 대신들과 맞서고...

한편 정신을 차린 옥정은 재입궁에 기대를 걸고, 만약 재입궁하게
된다면 자신의 반대세력들에 복수할 것을 결심하는데...





[18회] 옥정의 재입궐이 힘들어지는 찰나에...

 




희재가 땅문서의 정체를 밝히려 들자 김익훈과
김석주는 긴장하기 시작한다.

한편, 숙종은 옥정의 재입궐을 미루는 대신 조정을 물갈이 하고자
별시(임시과거)를 시행할 것을 지시하자 서인들은 숙종의 의중을 간파하고자 분주해진다.

그런데 별시중에 옥정을 해하려한자의 신원을 밝힌 익명서가 발견되어
대궐은 발칵 뒤집히고 결국 숙종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대노한 숙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자객을 색출하라 명하고 조사석을 불러
이 일을 재조사하라 은밀히 이른다.

이 소식에 옥정측은 재입궐이 앞당겨질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오르지만
김익훈은 엉뚱한 인물을 잡아들여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옥정의 재입궐이 점점 힘들어지는 찰나 땅문서가 서인측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숙종은 서인세력의 정치자금 조달책인
칠패도주의 집을 샅샅이 뒤지라고 명하는데...

 


[ 제 18회 용어풀이 ]

별시 : 필요한 인재를 등용시키기 위해 수시로 시행되는 과거제도

문회출송 : 죄 지은 자의 관직을 빼았고 한양 밖으로 내쫓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





[19회] 숙종의 병이 두창으로 밝혀지고...




숙종의 병은 두창(천연두)으로 밝혀지고 사경을 헤매기 시작해

모두들 바짝 긴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동평군과 옥정의 미래는 불투명해지기만 하고 서인들은

그 후계까지 논의하며 동평군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이를 감지한 동평군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는데...

한편 대비는 전염의 위험에도 아랑곳 않고 숙종을 찾아가 극진히 간호한다.

그러나 숙종의 병은 차도가 없고 옥정을 찾으며 점점 더 사경을 헤매자

대비는 사가의 무당까지 불러 숙종을 깨어나게 하고자  한다.

이 소문은 도성 밖으로 퍼져나가고 이 소식을 들은 옥정은 자기가 직접
궁에 들어가 전하를 뵈어야 한다며 숙정에게 요청을 한다.

마침 사가의 무당과 숙정이 연결이 되고 옥정의 입궐에 희망이 보이는데...


[ 제 19회 용어풀이 ]

두창 : 오늘날의 천연두로, 열이 나고 온몸에 발진이 생기는 전염병

호구별성 : 천연두를 집집마다 가져다 주어 앓게 한다는 여신을 이르는 말





[20회] 무당의 가마에 숨어 입궐을 하는 옥정...




무당의 가마에 숨어 입궐에 성공하는 옥정.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동평군은 숙정을 심하게 나무라고 대왕대비 역시
옥정을 불러 왜이리 경거망동하느냐며 대노한다.

의녀로 변장을 하고 숙종에게로 향하는 옥정. 때마침 숙종을 간호 중이던 인현왕후와 마주치는데...

한편 들여진 무당은 숙종의 국상을 피하기 어려우며 숙종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비가 직접 칠성단을 지어 치성를 들여야 한다고 하자 대비는 죽기를 결심하고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 일이 서인들에 알려지자 법도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일어난다.

칠성단 공사로 인한 파장은 커져만 가고 대신들과 유생들이 들고
일어서지만 아들을 살리고자 하는 대비의 의지는 꺽을 수 없다.

대비는 죽음까지 결심하며 300번의 얼음물을 맞는 물벌까지 하기로 마음먹는데...


[ 제 20회 용어풀이 ]

소격서 : 도교의 일월성신을 구상화하여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 보는 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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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내 의견과 거의 일치하는 글이 있어서 가져와 봄.

 

 

기사 원본을 보려면 제목을 클릭~.

 

 

장희빈만 악녀?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사극에서 인자한 인물로 그려진 인현왕후, 우리가 잘 몰랐던 '두 얼굴'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인현왕후(홍수현 분)가 중궁전에 입성하면서 장옥정(김태희 분)의 악녀 본색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희빈의 '흥행 포인트'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가 본격화됨에 따라 시청률 상승 또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기존에 장희빈을 그린 이야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희생과 인고'의 상징인 인현왕후가 매우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과연 인현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인내하고 받아들였던 후덕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전의 자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심 있는 여성이었을까.

'엘리트 코스' 밟았던 인현왕후의 자존심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홍수현.
ⓒ 키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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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당시 조선 시대 여성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었다. 서인세력 중에서도 뼈대 있는 가문을 자랑하던 여흥 민씨 집안의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서인의 거두 송준길이었으며 외척으로는 우암 송시열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숙종의 계비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실제로 그를 왕비로 적극 추천한 이는 송시열과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였다. 한 마디로 집권세력과 왕실세력의 비호를 한 몸에 받은 셈이다.

이렇듯 날 때부터 최고의 양갓집 규수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지존의 짝인 왕비가 되었으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인현왕후 특유의 자신감은 궁 밖에 쫓겨나 있던 장희빈의 환궁 과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장희빈은 명성왕후에게 '남인의 간자'로 찍혀 궐 밖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그러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다시 숙종의 곁으로 불러들인다. 한 마디로 남편의 첩을 제 손으로 끌어 들인 것이다.

인현왕후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는 숙종이 장희빈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 둘째는 남인세력이었던 시할머니 장렬왕후 조씨가 장희빈의 환궁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것, 셋째는 인현왕후 스스로 장희빈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자신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한미한 가문 출신의 장희빈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양갓집 규수로서 그것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생각이었다.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숙종을 거쳐 가는 여러 여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 중전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이 평생을 걸쳐 두고두고 신경 쓸 '라이벌'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안일한 생각과 달리 장희빈은 훨씬 영리했고 정치적이었으며 숙종의 사랑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날이 갈수록 기세등등해 지는 장희빈의 위세는 인현왕후로선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현실이었을 것이다.

인현왕후도 '투기'를 했다

 SBS 월화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왼쪽부터)김태희(장희빈 역)-한승연(최숙빈 역)-홍수현(인현왕후 역)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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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예의범절이 생활화된 데다가 왕비의 체면과 체통을 중시했던 인현왕후는 대놓고 장희빈을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는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다과를 함께 하는 등 후덕한 조강지처의 품격을 보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인현왕후 또한 중전 이전에 여자이니 어찌 투기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는 장희빈이 매우 교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장희빈으로선 아무리 윗전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끌려가 매를 맞는 것이 보통 고욕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인현왕후는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너무 지나치자 서인의 거목 중 한 명인 김수항의 증손녀를 후궁으로 들여 장희빈을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재밌는 것은 김수항의 증손녀는 명문세가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궁에 들어오자마자 당시 숙원이었던 장희빈보다 윗전인 숙의의 첩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소의 김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바로 아래 단계인 귀인에 책봉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미천한 출신을 환기시키며 내심 그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귀인 김씨의 입궁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 진 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을 찾아가 자신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현종과 명성왕후가 나타나 "민씨와 장씨는 본래 원수지간으로 현재 장씨가 복수하려하며, 경신환국 후 원한을 품은 이들과 결탁하여 나라에 화를 미칠 것이다. 그리고 장씨 팔자에는 아들이 없고 민씨에게는 자손이 많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며 직접적으로 장희빈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현왕후는 "장씨는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험담까지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이미지와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인현왕후의 위와 같은 발언은 장희빈이 숙종의 첫 아들인 경종을 낳으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아들도 낳지 못한데다가 체통을 잃고 '투기'까지 한 죄목을 함께 물었다. 몇몇 사료에서는 숙종이 인현왕후를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보다 못한 죄인이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죽는 순간까지 장희빈을 궁지로 몰아

 인현왕후에게 장희빈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라이벌이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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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게 중전의 자리를 빼앗긴 인현왕후는 5년간 안국동 본가인 감고당으로 돌아가 폐출 생활을 감내했다. 정부의 제대로 된 지원조차 없었던 이 시기에 인현왕후의 몸과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손상됐다. 인현왕후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유도 바로 폐비 때 얻은 여러 가지 병증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1964년 서인 세력이 재집권한 갑술환국이 일어나면서 중전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7년이 넘는 세월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는 장희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과거의 악연을 떨쳐 버리지 못한데다가 세자의 친모이기도 한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살아 있는 그 날까지 가만 둬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만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인현왕후는 승하하기 얼마 전부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된 이유는 모두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는데, 이 빌미란 것이 바로 장희빈의 저주를 뜻한다. 인현왕후의 이 같은 말은 차후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인현왕후 승하 2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됐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역사 속의 인현왕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린 것과 다른 '두 얼굴의 인물'이었다. 그는 명문세가의 딸로 태어나 깍듯한 예의와 품격이 몸에 밴 사람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애첩에게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인현왕후는 궁인 출신의 장희빈이 자신의 라이벌이란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평생을 장희빈에 대한 콤플렉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숙종과 함께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에 묻혀 있는 인현왕후는 지금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쩌면 끝끝내 '역사의 승리자'로 남아 연적이었던 장희빈을 희대의 악녀이자 요부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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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장희빈들이다. 동영상으로 한 번 비교해보자!

 

 

 

 

 

8대 장희빈이 등장하는 동이, 이병훈 감독이 알려주는 예전 장희빈과의 비교

 

 

 

 

제 5대 장희빈인 전인화 장희빈

 

 

이때의 숙종은 강석우 - 청춘스타였음ㅋㅋㅋㅋㅋ

인현왕후는 박순애 - 후덕한 왕후에 정말 잘 어울림. 

 

 

 

 

제 6대 장희빈인 정선경 장희빈의 오프닝.

 

 

숙종은 임호, 인현왕후는 김원희. 지금과 사뭇 다른 이미지.

 

 

 

장안의 화제였던 정선경 장희빈 사약 받는 장면

 

 

특히 사약 그릇 발로 차서 임호 임금 얼굴에 맞고 떨어지는 장면!!ㅋㅋㅋㅋㅋ

 

 

 

 

 

 

7대 장희빈 김혜수 장희빈과 그 외의 여인들 연기

인현왕후 - 박선영, 숙종 - 전광렬, 숙빈 최씨 - 박예진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송일국씨가 김춘택으로 열연..

너무 잘 생겼어..ㅠㅠ 근데 너무 미워.. ㅠㅠ

 

 

 

 

 

김혜수 장희빈 사약 받는 모습

 

 

 

 

 

 

 

8대 장희빈인 이소연, 동이 속에서 이소연 장희빈 사약받는 장면

 

 

예전에 소리지르고 발악하던 장희빈들에 비하면 너무도 점잖고 기품있다.

이때 숙종 - 지진희, 인현왕후 - 박하선, 숙빈 최씨(동이) - 한효주... ㅋ

 

 

 

 

 

 

마지막으로 김태희 장희빈...

아직 극 초반이라 이렇다 할 장희빈의 성격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이제 본격적인 대결이 펼치질 듯 하여 기대중..

 

 

역대 장희빈들의 동영상을 보니 잠깐인데도 너무 너무 재미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도 높은 시청률로 좋은 결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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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장옥정, 사랑에 살다'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비록 시청률은 삼사 드라마 중 꼴찌이지만 (직장의 신, 구가의 서, 장옥정)

적어도 사극빠인 저한테는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이 드라마 속에서 궁인들의 가벼운 행동거지나, 서인들의 지나친 왕권 도전 등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도 숙종 이순의 불같은 성정, 냉철한 성격, 결단력있는 성격과 과단성,

그가 장희빈(희빈 장씨, 장옥정)을 사랑할 때의 모습 등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보여집니다.

 

 

요즘도 게시판, 카페, 블로그 등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문제점 및 시청률이 낮은 이유는 역사 왜곡이라고들 하는데...
그 역사왜곡이라는 것이 착한 장희빈, 악녀 인현왕후 때문이라고 말을 하네요.

이 드라마의 문제점은 뚝뚝 끊기는 편집과, 과한 설정, 감없는 연출이지
캐릭터 설정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아, 물론 익숙하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요.


하지만 숙빈 최씨를 무조건적인 선역으로 그렸던 동이에서조차도
장희빈을 이전의 무모한 악역으로 그리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리 따지면 동이야 말로 역사 왜곡 환타지 동화였음.)

 

 



장옥정(장희빈)을 보는 시선이 이리 달라지게 된 것은
한문으로 쓰여진 실록이 국역되면서 점점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장희빈이 악독하게 굴었다는 기록은 없어요.
그 어떤 장면에서도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장희빈이 사악하게 행동했다는 것은 숙종이 마지막에 자진을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만

등장하는 표현이고, 그 전의 기록에는 없는 말입니다.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후에 인현왕후에게 인사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사악한 행동이 없습니다. 적혀진 사실 자체가 없어요.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로 인해서 죽었다?는 것조차도 제대로 된 물증이 없습니다.

 

실록을 찾아보면 최숙빈이 그리 말했고,

그것을 인현왕후 사후에, 장희빈 자진 어명이 떨어진 후에 조사하는 이상한 조사과정이 나올 뿐입니다.

실록을 찾아서 읽으면 읽어볼수록 장희빈이 좀 불쌍한 구석이 있네?라고 느끼게 될 정도입니다..

 


오히려 현숙하고 조신한 왕후의 이상형인 인현왕후가 우리의 기억과는 판이하게 다름에 놀라게 됩니다.

 

실록 속에는 인현왕후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희빈을 불러서 매질을 했다는 기록과

'숙원 장씨는 숙종이 전생에 죽인 짐승으로 원한을 품고 태어났다'고 폭언(?)을 퍼부은 기록이 있습니다.

 

숙종실록 21권, 15년 (1689년 기사) : 왕비 민씨의 간특한 정상을 참지 못하는 비망기

 

 

위키피디아 인현왕후 - 전체 내용을 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 서거한다. 민씨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이때 공식적인 죄명은 장씨와 궁인들이 민씨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진을 명한 이후에 뒤늦게 수사를 시작하는 등 그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시 조정 안팎에서 장씨의 무고의 사실성과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 인현왕후는 장희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숙종실록』 27년 9월 23일자는 왕비 민씨가 친정붙이 민진후(閔鎭厚) 형제에게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빌미’란 장씨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숙종실록』은 또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임금에게 몰래 (장씨의 저주를) 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라는 명을 내림으로서 숙빈 최씨의 저주설에 손을 들어주었다.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전생에 숙종의 활을 맞고 죽은 짐승의 화신이라는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이며 숙종,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녀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5]

 

 

사악한 장희빈과 불쌍하고 후덕한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소설인 '인현왕후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며,

수많은 사극과 드라마에 의해서 확대, 왜곡, 재생산되었습니다.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경종을 고자;;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것,
사약을 마실 때 발버둥쳤다는 것조차도 실록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임금의 사랑으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세자를 낳고도 희빈으로 강등된 것만으로도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인데

사약 먹고 죽은 후에도 (이것도 실록에는 안나옴.) 몇 백년간이나 악녀의 상징으로 기억이 되다니...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이쯤 되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는 인현왕후가 투기했다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 - 여인이자, 서인정권의 상징으로서 당연하다고 봅니다)

 

장희빈이 착하디 착했는데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현왕후도, 장희빈도 예전의 이분법적인 선악구도 속의 인형이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  납득 가능한 인간이었음을 믿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새로운 장희빈, 재해석된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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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사극 속의) 장희빈....

 

 

미모와 요사스러운 색기로 우유부단한 숙종을 홀리어서 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성정이 표독하고, 천성 자체가 사악해서 자신을 다시 불러준

순박하고 지고지순한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저주해서 죽게 만들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대체적으로 사극에서 보여준 모습에 힘입은 바가 큰데..

이 사극 속의 장희빈의 모습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조선시대 인현왕후를 모시던 궁인 혹은 서인이 쓴 것으로

짐작되어지는 작가 미상, 연대 미상의 작품, 인현왕후전'에 등장한 장희빈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 인현왕후전 원문 ------------------- 

 

 

 

"옛 한무제도 무죄한 구익부인을 죽였거니와 이제 장녀는 오형지참(五刑之斬)을 할 것이요. 죄를 속이지 못할 바로되 세자의 정리를 생각해서 감소감형하여 신체를 온전히 하여 한 그릇의 독약을 각별히 신칙하노라."

 

 

궁녀를 명하여 보내시며 전교하사,

 

 

"네 대역부도의 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약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죽을 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임이 네게 영화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로 일시도 머무르지 말라."

 

 

"네 중궁을 모살(謨殺)하고 대역부도함이 천지에 당연하니 반드시 네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梟示)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은으로 경벌을 쓰거늘 갈 수록 태만하여 죄 위에 죄를 짓느뇨?"

 

 

장씨 눈을 독하게 떠 천안(天顔=용안)을 우러러뵈옵고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

 

 

"민씨 내게 원망을 끼치어 형벌로 죽었거늘, 내게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게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의 도리가 아닙니다."

 

 

살기가 자못 등등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사 두 눈을 치켜 뜨시고 소매를 걷으시며 여성하교하여 이르시기를,

 

"천고에 저리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이라."

 

 

장씨, 손으로 궁녀를 치고 몸을 뒤틀며 발악하여 말하기를,

 

"세자와 함께 죽이라. 내 무슨 죄가 있느뇨?"

 

 

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좌우에게,

 

"붙들고 먹이라." 하시니,

 

 

여러 궁녀 황황히 달려들어 팔을 잡고 허리를 안고 먹이려 하나 입을 다물고 뿌리치니

상감께서 내려보시고 더욱 대노하사 분연히 일어나시며,

 

"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 하시니, 여러 궁녀 숟가락 청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

 

 

(중략) 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아니 계시고,

 

"빨리 먹이라." 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

 

경각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섬돌 아래 고꾸라져 유혈이 샘솟듯 하니,

 

 

(중략) 상감께서 그 죽음을 보시고 외전으로 나오시며,

 

"시체를 궁 밖으로 내라." 하시고

 

----------- 이하 생략 -------------------------------

 

 

 

 

한편 실록 속의 장희빈...

 

장옥정, 흔히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자못 아름다웠다"고 짧게 표현됐지만 조선왕조실록이 인정한 유일한 미인인 만큼

장옥정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일하게 실록에 그 자태가 자못 아름다웠다고 적혀져 있는 여인,

유일하게 낮은 신분의 궁인에서 신분이 급상승한 여인,

유일하게 궁녀 신분으로 쫓겨나서 재입궁한 여인,

유일하게 6년이나 궁 밖에 있으면서도 왕의 마음을 쥐고 있던 여인

유일하게 후궁의 신분으로 궁 안에서 죽은 여인. (대비, 중전, 세자빈 외에는 무조건 출궁해서 죽어야 함.)

 

 

여러가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여인이다.

 

 

실제로 실록 속에는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에 대한 물증이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려고 했다거나, 표독스러웠다거나, 이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약올려서 

인현왕후가 참다 못해 매질을 했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올 뿐인데...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현왕후를 찾아가서 자랑한 거;;;)

 

임금이 실수로 한, 혹은 농담으로 했던 작은 이야기까지도 다 적혀있는 실록에

왜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때리게까지 만들었던 건방진 행동은 하나도 적혀있지 않는 것일까??

 

 

이쯤 되면.... 

그동안의 장희빈 드라마나 장희빈 영화 속에서의 장희빈 모습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혹시 서인들이 승리한 역사에서 남인들에게서조차도 서인을 내리기 위한 도구로만 쓰여졌던

천한 신분의 장희빈이 오히려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쓰인 가엾은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장희빈 상상화라는데... 서양화가가 그린 것이라서 우리 정서에 좀 안맞는 듯 하다.

실제 장희빈 이렇게 생겼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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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은 낮은데 관심도와 비난받는 양은 국민드라마급인 '장옥정, 사랑에 살다.'

 

제목 그대로입니다.


지금 장옥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태희가 욕먹는 이유는 김태희이기 때문입니다.



김태희가 나오니까 관심도는 높으나
그에 맞는 드라마의 질적인 수준이 뒷받침 되지 않으니
드라마의 타이틀롤을 맡은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것이죠.



그런데 드라마를 볼수록 저는 김태희에게 욕이 집중되는 이 현상이 이해가 되질 않아요.
보면 볼수록 김태희는 기대보다 너무 너무 잘 해주고 있거든요.
김태희 때문에 안봐야지..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잘 해주고 있는 걸로 보여요. 

 - 팬이 아닌 제 눈에도 -


오히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는 연출, 대본, 편집이 가장 큰 문제에요.


사극 매니아인 저한테 굉장히 거슬리는 점이 있는데 하나 하나 다 들자면 끝도 없지만..
그중에 단 몇 가지만 들어도..



1. 임금의 곤룡포..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붉은 옷이라야 하지 않나요?
세자도 아니고.. 옷 색깔은 또 왜 그렇게 하늘색;; 조선시대 임금옷으로 너무 어색합니다.


2. 조선시대 패션 디자이너 설정도 약간 뭐잉; 했는데 오늘도 보이는 마네킹;



3. 하이힐은 실수로 보였다고 하더라도.. 김태희만 너무 짧은 저고리 ㅡㅡ;;



4. 임금에게 일반 존대어를 쓰면 안되는데... 너무 막 대하는 느낌이에요.
ex) 주상이.. ~ 하셨소 (X) ==> 전하께오서 ~ 하시었소... 등 극존칭을 써야하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임금 앞에서 대신들은 커녕, 낮은 신분의 사람들조차도 너무 조심이 없네요.

원래 임금 앞에는 똑바로 서지도, 얼굴을 들지도 못해야 하지 않나요.

그 모든게 불경죄에 들어가거늘...


5. 명색이 일국의 중전인데..  중전옷이 나인들보다 더 초라한 건 왜일까요?


6. 또한 양반집 규수라는 애들의 말버릇이 너무 교양이 없군요.


감히 대궐에서 중전에게...
"전하는 요즘도 네가지가 없어요?" 라니... 미친 거 아닙니까? ㅡㅡ;;
주리를 트는 정도가 아니라.. 삼족이 멸함을 당할 정도의 말버릇입니다.

 

400년 전의 궁녀가 "기분 째져~" 이런 말을 사용하는 것도 너무 얼척이 없고요..



6. 임금이 자신을 칭할 때 짐(X) ==> 과인(O)으로 해야 합니다.


이 뿐 아니라 임금이 애정행각을 벌일 때 옆에 궁인들 왜 가만 있나요?
다 뒤로 돌아서야죠.. 이런 디테일이 극을 고급스럽게 만들어주는데...


7. 스토리는 왜 그래 중구난방인지.. 장옥정과 이순 위주로 가야할 것 아닌가요.
7회 뒷부분은 재미있긴 재미있었지만.. 30분 넘게 허적의 난.. 어이구..
실제 사건도 아니고 허구의 역모 사건(복선군 말고 허적)으로 30분 간 망나니 씬을 보여주네요.

 

정치 드라마로 가려면 기존의 정치드라마처럼 진지하게 만들든가...
송시열도 등장시키고, 액션도 제대로 시키고,
리얼하게 사극 분위기를 제대로 내든가..

로맨스 사극으로 가려면 정치 분량도 좋지만..  
장옥정 - 이순 사이의 감정 발전을 보여줘야
헤어졌을 때나 장옥정 사약 받을 때 절절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8회는 재미있네요.

아.. 역사랑 상관없이 말입니다.


 


8. 위에서 빼먹고 말 안한 게 몇 가지 있었는데요...
동평군, 치수 등이 옥정이랑 엮이는 건... 도대체 언제..??
지금쯤이면 인물들 관계 설정 다 끝나야 되는 회차 아닌가요? 휴..ㅠㅠ



게다가 이순과의 '호색한' 신에서 김태희 얼굴은 위에서 그렇게 클로접;;;
김태희니까 살아남았지.. 왠만한 미녀라도 그 각도에서 잡으면 다 오징어 됩니다ㅠㅠㅠ



이런 저런 것들로 해서 드라마가 좀 유치하고 고급스럽지 못하게 보입니다.
실제로 처음에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김태희의 연기력이라든지,
유아인과의 어울림(이모 - 조카, 큰누나 - 막내동생..) 이런 건 전혀 안거슬려요. (적어도 저한테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구요.

 

 


요약:  7회 후반부 재미있었고, 8회부터는 제법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제 대본 상의 미숙함을 연출에서 잘 조절해서 톤 다운해주고,

편집에서 잘 좀 섞어 주면 시청률도 쑥쑥 오를 것 같네요.

 

 

간만에 진짜 숙종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숙종다운 숙종이 나왔는데...

시청률 때문에 다시 우유부단한 숙종과, 밑도 끝도 없이 사악하기만 한 장옥정은 보기 싫거든요.


 

김태희 유아인 잘 하고 있으니 앞으로 연출, 대본, 편집이 정신차리길 빌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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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하도 여러번 만들어져서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장희빈 (= 장옥정, 희빈 장씨).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경국지색의 미모 + 극악무도한 성격 +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패악질이 하늘에 다다라 다시 쫓겨남 +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발각되어 사약 받고 죽음  + 아들인 경종의 하초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듬.' 등의 다양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사극의 주인공으로 사랑받아온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조선 후기 숙종의 빈(嬪). 왕자 윤(景宗)을 낳아 세자에 봉해지자 희빈에 올랐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왕비가 되었으나 이를 후회한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켜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659년 8월 9일생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다. 아버지는 중인으로 이름은 장형(張炯)이며 아버지는 역관(譯官)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는 윤씨였다. 어려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사석(趙師錫)과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으로 궁에 들어가 자의대비전(慈懿大妃殿)의 나인이 되었다.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장형)이 사망하자 조사석의 첩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장옥정은 궁에 나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석은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했다. 

장옥정은 뛰어난 미모로 젊은 세자(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숙종의 5촌인 복선군복창군복평군 3형제가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던 장현 등도 함께 유배형을 받았다. 하지만 역모사건은 서인 김석주(金錫胄)의 무고로 일어난 사건으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더욱 대립하게되었다. 장현은 역관(譯官) 출신의 재력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과 가까웠고 장옥정의 5촌이었다. 이때문에 남인의 영향을 염려한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장옥정을 극도로 꺼려하였다. 명성왕후는 부친 김우명(金佑明)과 함께 서인으로 당색이 매우 강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자 장옥정은 다시 궁으로 입궐하여 후궁이 되었으며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와 갈등하게 되었다. 당시 장옥정은 남인의 세력에 속해 있었고 인현왕후는 정치 실세였던 서인을 대표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 적대관계였다. 

숙종은 오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씨와 사이에서 왕자 윤(昀:景宗)을 낳았고 1689년(숙종 15) 1월 윤을 원자로 봉하고 소의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하였다. 원자의 출생은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숙종이 윤을 원자로 봉하려 하자 이것이 성급하다고 상소한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남원에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나머지 서인들도 유배형을 받고 축출되었다. 반면에 남인(南人)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이 해 5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올리자 서인 박태보(朴泰輔) 등 80여 명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두고 남인들 마저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강행했다.

1690년 9월 장희빈은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10개월 만에 죽고말았다. 1693년에 숙종은 무수리 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아 영수(永壽)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그 아들도 출생 2개월에 사망했다. 이즈음에 숙종의 마음은 점차 장희빈에게서 멀어졌다. 1694년에는 숙빈 최씨가 아들(후일 영조로 등극)을 낳아 장희빈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장희빈의 후광으로 정치적 실세로 군림하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포도대장 직에서 물러났다.

1694년(숙종 20) 서인세력의 재집권을 위해 기회를 찾고있던 김춘택(金春澤) 등이 다시 서인의 집권을 위해 남인들을 역모로 고발하였고 마침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남인세력은 대부분 숙청되거나 유배형을 받아 몰락하였고 소론계 서인이 집권하였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희빈(후궁)으로 강등시켰으며 빈을 후비로 승격하는 일이 없도록 법을 만들었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 최씨의 밀고로 희빈 장씨가 자신의 거처인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이일로 그해 10월 10일 장희빈은 사사되고 오빠 장희재(張希載)는 처형되었다.

[출처] 희빈장씨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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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 환국 정치의 중심에 섰던 비극적 운명의 왕비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

 

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런 운명이 찾아왔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김아네스·이장우·정두희·최선혜, [장희빈, 사극의 배반], 소나무, 2004;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숙종실록], 휴머니스트, 2009;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1~3, 역사문화, 2009.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장희빈이 드라마에 묘사된 것처럼 사악한 여자의 극치라서 현명한 군주인 숙종이 그녀에게 벌을 내렸다?는 결론은 상당히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장희빈은 사악하고, 인현왕후는 현숙하고 투기할 줄 모르는 왕비였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거짓말인데..,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인현왕후가 산후 조리 중인 장희빈에게 매일 매질을 가한 것이 적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현왕후 = 이상적인 왕비상'으로 그려놓은 드라마 속의 인현왕후는 인현왕후전에만 나오는 서인들의 조작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장희빈을 숙종이 엄청 미워해서 죽은 후에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숙빈 최씨만이 그의 마지막, 영원한 사랑이었다는 것 역시도 조작에 가까운데, 그것은 그녀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역시 실록에서 나온 기록이다.)



읽기 쉽게 잘 써놓은 펌글을 하나 가져옴.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갤러리에서 펌.




장옥정 드라마인 만큼 그녀의 장례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노론이 쓴 책)은 그녀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어.

'사약을 먹지 않기위해 발악했고, 아들의 하초를 잡아당겨 고자로 만드는 패악을 부리다 억지로 사약이 부어졌다.
드디어 장녀가 죽으니 하늘의 천벌을 받아 시체가 순식간에 썩어 궐내를 진동하는지라 즉시 궁밖에 내다버렸다.'


..................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증오섞인 표현인지....노론이 그만큼 희빈을 증오하고 미워했다는 단적인 증거.  그동안 장희빈 드라마는 이런 인현왕후전과 수문록..등의 내용들로 그려졌어.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희빈장씨는 발악을 했다는 글 한줄 없고, 또한 죄를 짓고 죽은 후궁의 장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장례 절차를 밟아 숙종이 지극하게 장례를 치뤄줬어.

결론부터 말하면 장례기간은 5월상에서 하루를 뺀 기간(112일)
왕세자에게 처음엔 시마복(3개월동안 상복을 입는것)을 입으라 명했으나 다시 3년복상을 하라고 교지를 내림(3년에서 며칠을 뺀 기간) 모든 장례절차를 궁에서 행함.

+참고로 인현왕후는 5월상(114일)


장례절차___지금 우리가 느끼기에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할수있지만 이건 조선시대때 아주 중요한 예법중 하나야. 상복을 몇년 입는가하는 문제로(예송논쟁) 10년을 넘게 서인과 남인이 피터지게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고 그랬으니까.


간단하게 왕실예법을 알아보면_

귀인일수록 장례기간이 길어....보통 100일이 넘으면 국상개념이야.


(장례기간)
왕은 150일(6월장), 왕비는 100일(5월장), 왕세자는 70일이상(4월장), 왕(&세자)의 사친, 세자빈과 왕자녀들 그리고 내명부 정1품 빈은 50일가량(3월장)

3월장,5월장..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xx왕후가 3월에 죽었다면 장례를 5월장을 적용해서 죽은 달 포함해서 다섯번의 달을 지나 7월에 장례를 치룬다는거야.


(상복기간)
=적자로서 아버지의 정실이 죽었을 경우 그 적자는 3년상
  서자(庶子)로서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緦麻服:3개월복상)


(실제 사례)

12대 인종 - 재위기간이 1년. 4월장(100일)

장렬왕후 -인조계비. 5월장(110일) 

숙빈최씨 - 내명부 정1품의 예로 3월장(5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연잉군이 3개월 복상을 하려 했으나 숙종은 5일만 상복을 입고 벗으라 어명을 내림.

영빈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당시 세손(정조)의 할머니)- 세자의 사친으로 후궁 제1등의 예로 3월장 (60일), 궁밖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순조의 생모) - 3월장(60일), 궁안에서 장례를 치름, 3개월복상

수빈박씨는 생전에 아들이 왕위에 올라 가순궁저하, 수빈저하라는 경칭을 들었던 왕의 생모였다.
그럼에도 저정도의 장례절차를 거쳤어. 아들인 순조가 왕실 가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로 예를 갖춘 상황 


희빈은 죄를 쓰고 사사되었고, 폐비되어 자리에서 내려온지 8년이 지난 상황이었어.
그런데 숙종이 이같은 장례 절차를 지시하지...당연히 노론측이 엄청나게 반발하지만 그대로 진행했어.

위에서 봤듯이 세자의 생모(왕의 생모)라도 맥시멈 60일 장례, 3월장인데...희빈은 전례가 없는 예우를 받은것.



이후 16년이 지나 숙종이 와병중에 희빈의 묘를 천장(이장)하는데...노론이 그 정도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며 천장을 반대하지만 숙종은 세자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로 천장을 지시하고 예조와 종친, 지관 10명을 보내 1년가까이 좋은 길지를 찾아내게해서 와병중에 직접 천장지를 택해서 천장을 진행해...세자 내외에게 망곡례를 지시하며 천장식도 궁에서 하고...  

희빈 묘역 조성할때 사방 100步 주위에 기존에 있던 왕실 종친들의 묘를 파서 다른곳으로 옮기라 명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묘역은 박정희때 이장한 묘역이라 규모가 작아졌지만 당시엔 꽤 컸을거라고 추측할수가 있어.


이러한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보았을 때 숙종은 장희빈을 엄~~~~청 아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사랑? 글쎄.. 16년간 청춘을 다 바친 여인을 특별한 증거도 없이 사약을 먹인 남자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어쨋든 냉혹한이었던 숙종이 20대를 다 바친 여인이었음은 명확한 사실이니,,, 엄청난 매력이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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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은 효종 10년(1659)에 역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현종 10년 아버지 장경(張烱)을 여의고 숙부 장현의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의 집 종이었던 관계로 조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조대비의 조카사위인 숭선군, 그 아들인 동평군 집안과 가까웠다.

장희빈이 살았던 시기는 북벌론을 주도하던 효종이 승하하면서, 1차․2차 예송(禮訟)이 벌어지고 경신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이 벌어지는 붕당정치의 격동기였다. 이러한 격동기에 장희빈은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는 시기에 궁중에 들어가 2살 어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궁 밖으로 쫓겨났다가, 숙종 9년 모후 명성왕후가 승하하면서 다시 궁으로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 14년 10월 28일 왕자를 낳고 다음 해 1월 11일에 그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다. 곧이어 5월 2일 인현왕후를 내쫓고 5월 13일왕비가 되었다. 숙종 16년 6월 16일에는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숙종 15년 2월 2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2월 4일 제주도로 유배가고 6월 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5년만인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계를 주도하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후에도 장희빈은 세자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무고죄를 받아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장희빈은 효종 10년에 태어나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이 종법을 둘러싸고 예송으로 이념논쟁을 벌이던 현종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양반호포제․노비종모법 ․ 대동법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보수와 개혁의 대결을 벌이던 숙종대에, 남인 세력과 연결된 숙종 후궁으로 등장하여, 뒤에 경종이 되는 아들을 낳아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서인이 집권하던 현종 10년에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양인이 되는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었다. 그 후 현종 15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이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노비종모종량법이 제정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되었다가,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장희빈을 앞세워 남인이 집권하자 노비종모종량법은 다시 폐지되어 어머니가 양인이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정책을 쓰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니 장길산 같은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이반을 바로 잡기 위해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여 노비종모종량법을 다시 제정하는 등 개혁을 서두르니, 장길산 같은 도적은 저절로 사라지고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한 모든 제도의 정비가 추진된다. 이처럼 성리학 이념에 따라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반 가정에서도 첩이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아들 못 낳은 적처를 내쫓고 적처가 되어 집안을 차지하려는 것은 성리학 이념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에, 장희빈은 숙종 27년 이러한 성리학 이념에 어긋났던 보수세력을 대표해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이와 같이 현종, 숙종대 정치사를 일괄해 볼 때, 서인과 남인이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 대결을 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삼강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에 어긋나는 숙종의 행동을 지지했던 남인의 지지를 받았고 이를 반대했던 서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희대의 요부로 묘사되거나 정치력이 있는 인물로 묘사되거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리학 이념을 놓고 정책대결을 하는 붕당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 지두환(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참고문헌
지두환, 『장희빈』, 역사문화, 2002.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원글 출처: http://www.kostma.net/Contents/Dongyi/Default.aspx?Body=14#Topic.



- 나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장희빈은 철저한 희생자라고 본다.

물론 나 역시도 어린 시절에는 장희빈은 죽어 마땅한 악녀라고 생각했으나...  
자라서 역사를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으니.. 영원한 진리란 없나보다. 
지금 생각하면 경종, 영조, 정조 때의 비극이 모두 숙종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서 슬프고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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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사랑에 살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최정미 (유레카엠앤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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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옷을 입은 칙릿 소설 (※Chick Lit; chick + literature)은 젊은 여성을 겨냥한 영미권 소설들을 지칭하는 신조어)

한 여인이 있었다. 신분의 그늘이 재능을 압도하던 시절, 왕비가 되기에는 조금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탁월한 지성과 재능으로 이를 극복한 여자, 장옥정.

역사는 그녀를 아름다움에 의존해 치맛자락을 휘둘러댔던 희대의 요부로 기록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장옥정의 내면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남자들은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의 리더십을 배우고,
여자들은 <사랑에 살다>를 통해 시대의 알파걸 장희빈의 지성과 열정을 배워야 한다."


장희빈, 역사가 왜곡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실 1, 그녀는 뛰어난 지성을 가진 조선 시대의 알파걸이었다

역관의 딸로 태어나 침방나인이 되었고, 훗날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의 어머니였으며, 6년여 동안이나 왕비의 자리에 머물렀으나 희대의 요부 장희빈으로 생을 마감한 여인, 장옥정.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계비(繼妃)였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장희빈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료는 인현왕후의 삶을 그린 '인현왕후전'이 전부. 그런데 이 소설은 인현왕후를 모시던 한 궁녀가 썼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누가 썼든, 아마도 '인현왕후전'은 철저히 그녀의 입장에서 쓰인 승자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영화로, 책으로, TV 드라마로 그려진 장희빈은 이렇게 편향될 수밖에 없었던 기록에 기대어 세상에 둘도 없는 요부로, 조선시대 최고의 팜므파탈로 박제되었다.


작가 최정미는,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으니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인현왕후전'의 대척점에서 장희빈의 억울했을지 모를 사연을 대변해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서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해설을 기반으로, 장옥정이라는 한 여인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1688년, 이순이 즉위한 지 열네 해째 되던 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온 궁궐을 들뜨게 했다. 왕자의 탄생이었고, 훗날 숙종 이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의 탄생이었다! 서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왕자의 출산이 남인들의 복귀를 열어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사람들은 옥정이 미인계로 단번에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치마폭에서 놀게 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천하의 이순을 모르고 하는 낭설이었다. 오히려 이순에게 옥정은 서인에게 긴장감을 유발시켜 권력 독점을 막는 데 유용한 방패막이일 수 있었다. -p.237


몇 번에 걸쳐 TV 역사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장희빈'은 음모와 술수가 능하고 투기가 심한 악녀였던 데 반해 인현왕후는 온화하고 덕이 넘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악독한 요녀는 오히려 인현왕후였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컨대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였는데, 죄상이 드러나자 성종께서 종사를 위해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폐출했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던 행동까지 했으니 종사에 죄를 얻었다. 이에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저로 돌려보낸다."

이 상반된 견해에 대해 작가 최정미는 이렇게 단언한다. 장옥정은 패션 감각과 재능, 영민함으로 왕비에 등극한 조선 최고의 알파걸이었다고. 더불어 이 당당한 여인의 죽음은 한 여자로서 한 남자에게 주었던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이순은 복잡한 머리를 털고 편전을 떴다. 옥정과 가볍게 농을 주고받으면 머리가 가벼워지려나. .. 모처럼 응향각에 든 이순이 소주방에 일러 주안상을 내오라 했다. 평소에도 옥정이 영민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룰 수 있을 정도의 소양을 갖췄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근심을 털어놓고자 꺼내놓은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옥정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꺼낸 이야기였다. .. 그런데 옥정은 의외로 말귀를 잘 알아듣고 응수도 제법 잘했다.

이는 김인호 교수의 장희빈에 대한 평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500년의 조선 역사 중에서 최고의 어머니와 최고의 여성상을 또 한 사람 꼽는다면 그녀는 바로 장옥정 즉 장희빈이다. 특히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못하고 정치적 훈련이 전혀 없던 시절, 그래도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남성의 국왕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후세에 남긴 장옥정이야말로 오늘날 다시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라 보인다."
가난한 역관 아버지와 천민 어머니를 둔 장옥정.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관과 특유의 영민함 그리고 국왕 이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진실 2, 그녀는 조선 최고의 패셔니스타였다

장희빈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알려진 사실은 그녀가 역관 장현의 종질녀였고, 침방나인으로 궁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침방나인에게 주어진 소임은 왕실의 옷과 이불을 만드는 것이었다. 팩션을 써 나가는 데 있어, 장옥정이 침방나인이었던 점에 착안해 옷을 만드는 여인, 즉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돌아보게 되었다. 패션은 현대 독자들, 특히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다. 조선시대에 디자이너 혹은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여인 장옥정.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안에서, 역관인 아버지와 최하층 계급인 천민 노비를 어머니를 두었음에도 신분의 굴레에 함몰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개척, 당대 최고 지성 집단의 독설과 공격을 온몸으로 받았으면서도 끝내 조선 최고의 여인인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한 성공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매혹적인 여성에 재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스토리는 현대인들에게도 충분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현대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서 죽어갔다는 비극성은 그녀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그 비극성이란 그렇게 재기발랄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 장옥정이 국왕 이순이라는 최고 권력가를 만나게 되고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가, 권력가의 이기에 의해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진실 3, 그녀는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전하는 처첩 간의 갈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시면서 많은 것을 얻어내셨다. 전하가 잃으신 것은 없으시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한과 모욕을 준신 것도 전하시고, 희빈 장씨에게 역시 광영과 상처를 번갈아 주신 것도 전하시다. 전하는 나와 희빈 장씨를 번갈아 쥐었다 폈다 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내셨다. 내가 중전의 자리를 다시 찾으면 기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어. 위안이 되는 것은 있지. 가문이 다시 일어서고 왕비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 대신 전하께서는 적절한 시기마다 왕비전의 주인을 바꾸어 환국을 일으키시고, 그 반대급부로 왕권을 극대화하셨지. 희빈 장씨와 나 모두 그분의 희생양인 것이야....."

다시 환궁하여 중전 자리에 오른 인현왕후의 회환 어린 말이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여성은 단순히 숙종의 여인이 아니라 남인과 서인 각파가 벌이는 권력쟁탈의 상징이었다. 권력과 함께 그들의 운명은 부침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 여인들은 모두 권력의 희생양으로 혹독한 업보를 치르고 말았다. 요녀가 아니라 정객으로서, 나아가 미모보다는 시대를 넘보는 재주로서 장옥정은 자식을 왕으로 만들었고, 잠시간 정권 교체라는 신선한 광풍을 역사에 남겨놓았다. 진정 멋진 여성의 운명은 미모보다는 시대와 역사 앞에 얼마나 정열적이었던가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장옥정의 죽음을 새롭게 바라본다. 옥정이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진정 사랑 때문이었다고. 소설의 마지막 대목은 이순과 옥정의 대화 장면이다. 이순이 옥정에게 죽음을 명한 뒤 옥정이 되묻는다. "그것으로는 죽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른 이유를 말씀해주시오! 어찌해서 내가 죽어야 합니까?" 왕은 왕세자를 위해서 죽어달라고 말하지만, 옥정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미 없이 커갈 자식을 두고 눈에 밟혀서 어찌 떠납니까? 그리는 더욱 못해드리겠습니다." 이때 이순이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는다. "나를 위해 죽어다오, 옥정아! 내가 너의 죽음을 원한다. 그것이면 되겠느냐?"

시대의 알파걸이었던 옥정은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다. 이순을 위해 죽어주겠다고. 이것은 시대에 의해 희생된 죽음이 아니라, 사랑 앞에 정열적이었던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장희빈은 정치적 야망 때문에 죽음에 내몰린 것이 아니라 순결한 사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다. 그것뿐이었다.





장희빈 사극의 배반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정두희 외 (소나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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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장희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미 영화로 2번, 드라마로 5번 제작되어 온갖 음모와 질투의 화신의 이미지에서, 적극적으로 신분상승을 꾀했던 진취적인 여성으로 우리 앞에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원했던 장희빈, 시대가 원했던 장희빈의 실체를 파헤친 이 책은 사극와 역사의 미묘한 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장희빈 4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박종화 (범우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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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 장편역사소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1백여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궁중과 조정의 거유, 석학과 재상, 충신과 모사, 미희와 요녀, 음부 등 온갖 군상의 인물들의 파노라마 속에서 어머니의 정부와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가, 궁녀의 신분에서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희대의 요녀 장희빈을 유장한 문체로 생생하게 형상화했다. KBS에서 방영인 100부작 드라마 장희빈(김혜수 주연)의 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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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조선야사실록) 상세보기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고 고우영 만화가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재출간된 장편 만화 『연산군』 제1권. 정사(正史)의 뒤안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인 야사(野史)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신문에 연재되면서 광고 게재로 삭제된 부분과 기존에 출간된 책에서 검열된 부분을 복원하였다. 이 작품은 구어와 비속어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오늘의 갑갑한 현실과 역사에서 입증된 진리 사이를 거리낌없이 가로지른다. 또한 상식을 뒤엎고 편견을

2006년 4월25일 故고우영 화백의 추모 1주기에 즈음하여 고인의 장편 만화 중 『오백년』4권과 『연산군』3권을 묶어 새롭게 『조선야사실록』7권 세트로 제작된 책이다. 연산군의 탄생부터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되 “폭군” 이미지에 치중하던 기존의 이야기와는 달리, 불우한 성장과정에서 표출될 수밖에 없었던 연산군의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정사보다 더욱 사실적인 야사를 만들어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가 고 고우영 작가님의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도서관 갈 때마다 고우영 작가님 작품이 있는지 살펴보아도 없더니..ㅠ  영화 <왕의 남자>와 비교하여 야사(野史) 특유의 감칠맛 나고 숨 막히는 전개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마 고우영 작가님 특유의 성적 농담과 화끈한 묘사가 많이 나올 것 같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 연산군 중종과 그 신하들) 상세보기
김범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조선조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재조명하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변혁의 시대에 펼쳐진 권력 투쟁을 살펴보는 책이다. 국가 체제를 완성한 성종, 그에 대한 반발과 균열을 보인 연산군, 다시 왕권을 둘러싼 체제 정비를 시도한 중종까지 3대 75년간의 정치 투쟁을 다루었다. 세 왕과 신하들의 권력 관계는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사를 압축한 중요한 특징들을 지녔다. 저자는 세 왕이

이 책 내용에 대한 저자 김범의 자세한 설명 보러가기

이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책이 있다.
역사상 최악의 폭군 연산군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책이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폭군의 멍에를 벗긴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지식산업사 펴냄
연산군을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 성리학의 기준에 따라 연산군을 평가하는 기존의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연산군을 힘의 논리에 따른 역사적, 이념적 희생자로 보았다. 연산군의 통치 전반을 종합적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 저자 소개 지은이_ 신동준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조선일보》《한겨레》기자. 서울대, 외국어대 강사. 21세기 정치연구소 소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상세보기
신동준 지음 | 살림 펴냄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말하는 통치 리더십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조선 역사에 묻는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조선의 왕과 신하를 통해 통치 리더십의 조건을 살펴보는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조선이 패망한 근본 원인을 왕권이 미약하고 신권이 강한 '군약신강'의 왜


연산군에 대한 호의와, 그의 폭정을 신권과 왕권의 대립에서 보는 관점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인 것 같아서 뒤져보니, 역시.. 같은 저자였다. 역시 사람의 관점이 바뀌긴 쉽지 않나보다.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한명회의 신봉승 작가님이 연산군을 광인으로 보고 이와 반대로 드라마 왕과 비, 장녹수의 정하연 작가님이 연산군을 가엾게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도 연산군을 위한 변명을 상당히 구구절절히 펴시더니 이 책에서도 연산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당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분 의견에 100%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연산군 초기에 왕권이 대폭 강화된 건 사실이니 작가의 주장 중 일부는 동의한다. 예전 사극에는 연산군 일기의 내용을 고대로 받아들여서 연산군이 처음부터 구제불능인 것으로 나왔지만
연산군이 처음부터 싸이코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강력한 왕권을 손에 쥐고도 그렇게 밖에 행동 못한 것은 100% 연산군의 책임이다. 이때는 왕권 강화고~ 신권 제압이고~ 이런 건 안중에 없고 이미 정신줄 완전히 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리뷰들이 상당히 재미있어서 몇 부분을 발췌해보았다. (중간의 흥미로운 부분만을 발췌했으므로 전체 서평을 보고 싶으면 링크를 눌러서 미디어 리뷰를 확인하시길.)


조선왕조 역사로 보는 `통치 리더십`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시대의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그 이유는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것. 저자는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개혁가들임을 강조한다.

그 예로 신 소장은 패도정치라 불리는 세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왕도와 패도는 적절히 섞어 사용해야하는데, 치세(治世) 시는 패도보다는 왕도를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하게 되고, 반대로 난세(亂世)의 경우 강력한 리더십을 요하기 때문에 패도 사용이 높게 된다""큰 틀에서 보면 세조가 패도를 구사한 것은 맞지만 시대적 상황(계유정난 등)이 그를 패도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저자는 조선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세도정치`를 꼬집고 있다.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이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이 왕권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다. 이로써 조선 중기와 후기로 와서 국가는 점점 쇠약해졌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부국강병이 왕과 국가의 목표이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신권이 제약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이명박 당선인에게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과 직면해 있기도 하다.


“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평화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BOOK책갈피] 조선은 신하들이 말아먹었다며?


역사 상식은 역사책에서만 얻는 게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재미있으라고 각색한 얘기를 그런가 보다 하며 정사로 받아들인다는 점. 이 때 사실과는 동떨어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생겨나는 법이다.

영화 ‘왕의 남자’, 소설 『단종애사』(이광수)와 『금삼의 피』(박종화)가 좋은 예다. 세조와 연산군을 여지없이 폭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신문기자 출신의 정치학자인 저자는 전혀 다른 사실을 전한다. 세조와 연산군 모두 신권(臣權)의 발호를 억누르려다 그 같은 오명을 쓰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의 보위를 찬탈했다는 세조에 대한 왜곡된 평가를 하루빨리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산군도 사림 세력을 견제하려다 쿠데타로 실각한 비운의 군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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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이야기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이 글을 얼마 전에 발견해서 비공개하고 있다가 지금은 승복이님의 블로그가 아예 사라져 버린 관계로 공개처리했습니다.


이제는 원로 축에 끼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동시에 조선 시대 사극을 들고 오고, 김종학이 판타지 사극을, 정하연이 이방자 여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대극을, KBS에서는 <대조영> 의 후속작으로 <세종대왕> 을 제작할 준비를 마치면서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때 아닌 '사극' 열풍이 불어 닥칠 전망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방송됐던 사극들은 어떠한 인물들을 주로 다뤘을까. 재미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사극의 단골 손님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후보 1.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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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극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흥행카드' 라고 한다면 단연 연산군이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적, 어머니를 잃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자라나며 삐뚤어지기 시작한 연산군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 주위를 둘러 싼 권력 암투와 2번에 걸친 사화, 요부 장녹수와의 스캔들, 할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폐륜 등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담아내며 사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을 갖췄다.  

1962년 영화 <연산군> 에서 신영균이 열연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 이 후로, TV판 '연산군' 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971년 TBC <사모곡> 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 때 연산군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배우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이 뭐길래><딸 부잣집> 등으로 친숙한 배우, 김세윤. 김세윤의 뒤를 이어서는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에서 임영규가 연기한 바 있고, 1987년에는 영화 <연산군> 에서 배우 이대근이, 1994년 KBS <한명회> 에서는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 이민우가 연산군을 맡아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1년 뒤인 1995년 KBS <장녹수> 에서는 유동근이, 1999년 KBS <왕과 비> 에서는 안재모가 각각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안방 극장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가장 최근에 연산군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배우 정진영으로 1000만 관객 돌파의 신화를 낳은 영화 <왕의 남자> 에서 어머니를 잃고 광기 어린 영혼을 소유하게 된 연산군 역을 실감나게 연기해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는 누구일까.

시청률로만 따지고 보자면 <왕과 비> 의 안재모로 그 당시 최고 시청률이 44.3% 를 기록했을 정도. 녹록치 않은 경력을 지닌 연기파 채시라와의 연기대결은 <왕과 비> 의 사상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 1등 공신이라 할 만하다.


후보 2. 장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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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하면 떠오르는 여자하면 당연히 장녹수다. 연하의 연산군에게 장녹수라는 존재는 아내이자, 첩이었고, 어머니였다. 연산군 시대의 개막과 함께 그를 파멸로 이끌고 결국은 자신까지 돌무더기 무덤 속으로 들어간 시대의 요부.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녀는 지금까지도 연산군과 함께 한국 사극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다.

그렇다면 이 '요부' 를 실감나게 그려 낸 인물은 누가 있을까. 1971년 <사모곡> 에서 김세윤과 호흡을 맞춘이는 이제 원로 배우 소리를 듣는 고은아이고, MBC <설중매> 에서는 '섹시배우' 이미숙이, 영화 <연산군> 에서는 강수연이 장녹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타공인 최고의 장녹수는 KBS <장녹수> 의 박지영으로 유동근과의 연기 앙상블이 빛났을 뿐 아니라 장녹수가 살아 돌아온 듯 한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대내외적인 찬사를 받았다.

19999년 <왕과 비> 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故 이혜련이 안재모와 호흡을 맞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작년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배우 강성연이 '녹수' 역을 맡아 남성 중심의 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뽐내는 등 수많은 스타들이 장녹수라는 캐릭터를 거쳐갔다. 연산군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본 것은 장녹수가 아니라 수근비였으나 여전히 장녹수라는 인물은 스타들이 탐을 내는, 연산군과 운명을 같이 한 '매력' 있는 '여성' 인 셈이다.


후보 3. 인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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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이 등장했으니 '인수대비' 가 없을 수 없다. 할머니와 손자의 관계지만 '폐비 윤씨' 의 사사사건을 계기로 정치적으로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연산군과 인수대비는 조선 500년 역사 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폐륜으로 그 끝을 맺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잠저로 나온 뒤, 예종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어 올리고 훈구파와의 강력한 결탁으로 성종 시대를 안정을 추구했던 한 여걸의 죽음이 그토록 비참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아픔이다.

우리에게 '소혜왕후' 라는 이름보다 '인수대비' 라는 이미지로 더욱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는 이 캐릭터는 지금까지 수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이제는 영원한 배우로 기억되는 황정순 선생을 비롯해 영화 <연산군> 에서는 중견배우 정혜선이, <설중매> 에서는 고두심, <장녹수> 에서는 반효정, <한명회> 에서는 김영란, <왕과 비> 에서는 채시라, 영화 <왕의 남자> 에서는 윤소정 등이 열연했다. 특이한 점은 정혜선이나 고두심, 채시라 등의 여배우들이 모두 20~3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역을 소화했다는 것.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20대부터 그려내려다 보니 비교적 젊은 배우를 기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일테지만 어찌되었건 지금으로 보자면 모두 자타공인 '연기파' 들이 이 역을 거쳐갔으니 인수대비야 말로 '연기파 제조기'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소중한 교훈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다.


후보 4.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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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최고의 간신이자 사육신과 대비되는 조롱의 대상이면서도 왕권이 약화되던 단종시대를 철인군상과 같은 의지로 뒤엎고 결국은 성종시대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명신(名臣)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 한명회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재평가 되면서 그 역사적 명성을 달리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때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사육신 띄우기' 로 명성에 흠집을 냈던 한명회는 이제야 제 위치를 찾으며 역사적으로 받아 마땅한 평가를 받고 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이 유명한 칠삭동이를 맡은 배우들은 정진, 이덕화, 최종원 등. 특히 정진 같은 경우에는 70~80년대 문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에게 최고의 '한명회' 로 기억되는 인물로 지금 보아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다. 이덕화는 자타공인 가장 유명한 한명회로 회자되는 배우로서 신봉승이 쓰고 그가 타이틀롤을 맡았던 드라마 <한명회> 는 여전히 KBS 가 자랑하는 사극 중 하나로 남아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안목도 달라진다. 미래의 한명회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인물로 기억 될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공과' 를 둘째치고서라도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한명회' 라는 이름이 미친 거대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후보 5.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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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자가 아닌 다음에야 후세에 그 이름이 남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천한 기생의 신분으로서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욱 시급한 일일진대 오직 단 한사람, 명월 '황진이' 는 그러한 평가를 거부한다. 양반 출신의 여성으로 태어나 기생의 길을 택한 여자.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 로 불리우는 조선 최고의 여성 문학가. 벽계수를 골탕 먹이고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며 세상을 발 밑에 둔 여성. 그것이 바로 기생 황진이의 정체다.

요부의 이미지와 순결한 문학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황진이는 1957년 영화 <황진이> 에서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 대한민국 최초로 황진이를 연기한 이는 전설의 스타 도금봉. 그 이 후, 강숙희, 김지미, 이미숙, 장미희, 하지원, 송혜교 등이 그 뒤를 이으며 이 매력적인 기생 아니, 시인의 일생을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담아내고 있다.

최근 영화 <황진이> 가 개봉되면서 송혜교의 '황진이' 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개인적으로 한마디 덧 붙이자면, 영화 자체의 매력과는 상관 없이 송혜교는 그 위치에서 충분히 잘 해냈다. 송혜교의 황진이가 하지원의 황진이보다 매력적이지 못했던 까닭은 하지원이 송혜교보다 월등히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라 황진이에 대한 작품의 접근이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송혜교는 <황진이> 를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 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후보6. 김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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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광해군,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사랑한 여자였던 김개시는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쟁의 역사 속에서 그 요망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선조의 독살설과 인목대비에 대한 핍박, 광해의 실책에 모두 관련되어 있는 김개시는 일개 상궁의 신분으로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정사를 좌지우지한 요화였으니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을테지만.

이 요화를 연기한 이는 <회천문> 의 원미경, <서궁> 의 이영애, <천둥소리> 의 이주화, <왕의 여자> 의 박선영 등이고 이들과 함께 광해군을 연기한 이는 이희도, 김규철, 김주승, 지성, 김개시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적 입장에 서 있던 인목대비는 권재희, 이보희, 이현경, 홍수현이 열연했다. 개인적으로 <서궁> 의 이영애와 이보희의 연기는 나름대로 재밌게 본 편이다.


후보 7.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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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글에서 자주 했고, "역대 장희빈" 에 관한 글까지 이미 쓴 상황에서 더 할 말이 무에 있을까 싶으랴만은 해도 해도, 봐도 봐도 재밌는 것이 바로 '장희빈' 이다. 1대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역사는 곧 한국 사극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장희빈> 이 만들어 질 때는 항상 '장희빈을 재평가 하겠다.' 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지만 결국은 '현모양처'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끈다는 것. 아직도 장희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악녀와 요부' 라는 차원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장희빈의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려 했던 김혜수의 <장희빈> 이 나중에서는 그저 '독한 여자' 로만 기억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장희빈은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이미 역사라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사극에서 가장 '쓸 만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를 이미 포함하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vs여자의 싸움에,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대립을 즐겨하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굳이 거스르면서 바꿀 필요는 없다. 장희빈에 대한 재평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학계에서 하면 될 일이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그렇다면 이들과 호흡을 맞춘 인현왕후는 누가 있을까. 1대 도금봉을 시작으로 2대는 태현실, 3대 김민정, 4대 이혜숙, 5대 박순애, 6대 김원희, 7대는 박선영이 맡았다.


후보 8.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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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 지는 <한중록> 의 지은이로 유명한'혜경궁 홍씨' 는 지금껏 정치적인 이유로 남편 사도세자를 여읜 비운의 주인공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오히려 사도세자의 구원 요청을 차갑게 외면한 것은 바로 혜경궁, 그 자신이었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남편에게 -그것도 정략결혼을 한 남자에게- 그녀는 사랑도, 애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버리는 대신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에도 사도세자의 씨앗인 정조를 그대로 왕위에 올린 이유는 혜경궁 홍씨의 강력한 의견 표명이 단단히 한 몫을 거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버리되 자식까지는 버리지 못했던 혜경궁은 정조를 제거하려는 친정 집안의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하고 정치적 공세를 펼침으로써 마침내 '정조시대' 를 열어제쳤다.

정조 시대에 이르러 사도세자의 일에 관련해 자신의 가문인 풍산 홍씨가 풍비박산 나게 되자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바로 그 유명한 <한중록> 임은 이미 유명한 사실. '한가한 날의 기록' 이라는 뜻의 <한중록> 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친정을 옹호함으로써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 돌파구 역할을 했다. 재밌는 것은 <한중록> 을 쓰던 혜경궁 홍씨의 나이는 이미 70 줄이었으니, 그녀야 말로 영조와 정조 시대를 관통하는 진정 노회한 정객이었던 셈이다.

이야기로 잠시 딴데로 새버렸는데 다시 돌아와서 '혜경궁 홍씨' 를 맡은 여배우는 누가 있을까? MBC <안국동 아씨> 의 김영란을 시작으로, <한중록> 의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 의 하희라, <대왕의 길> 의 홍리나 등이 바로 혜경궁을 연기한 배우들이다. 


후보 9.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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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이라는 빛나는 이름과 '쇄국' 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동시에 쓰고 있는 인물, 흥선 대원군. 상가지구로 시작해 조선말 가장 혁신적인 개혁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의 삶은 드라마로 그려내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권불십년' 이라는 말처럼 10년만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끊임없는 정치적 재개로 결국은 을미사변이라는 역사적 책임을 떠 맡을 수 밖에는 없었던 사람. 

대원군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카리스마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로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의 김승호를 비롯하여, <민비> 의 김성원, <풍운> 의 이순재, <대원군> 의 임동진, <찬란한 여명> 의 변희봉, <명성황후> 의 유동근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순재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연기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바로 <풍운> 을 꼽기도 했는데, 그 만큼 대원군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후보 10.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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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나왔으니 며느리가 빠질 수 없다. 바로 '명성황후' 가 그 주인공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던 그녀는 1895년 일본인들에게 잔인하게 시해당하기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쥐락펴락 했던 진정한 여걸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적에서는 '공' 보다 '과' 를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겠으나, 그녀의 죽음과 함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은 명성황후라는 한 인물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영향력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리했고, 드라마에서도 여과없이 반영 됐다.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들은 명성황후에게 있어서 '관대한' 시각을 가졌을 뿐더러 미모의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 선 편이다.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에서 원로배우 최은희가 김승호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대중문화사에 등장한 '명성황후' 는 <민비> 의 김영애가 그 바통을 이어 받으며 브라운관에 진출했고, 다시 한 번 김영애가 <풍운> 에서 열연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애 이 후에는 <대원군> 에서 연기파 김희애가, <찬란한 여명> 에서는 하희라, <명성황후> 에서는 이미연, 영화 <한반도> 에서는 강수연이 맡았다.

지금 젊은 층에게 가장 사랑받는 명성황후는 이미연으로서 그 동안의 강인하고 독한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마치 멜로물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투영함으로써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조선으로.

최근 <주몽><대조영> 의 경향으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를 벗어난 '탈조선화' '반조선화' 현상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고려 시대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태조 왕건> 이 후에, <제국의 아침><무인시대><신돈> 등은 고려시대를, <주몽><연개소문><태왕사신기> 등은 고구려를, <대조영> 은 발해를 다룸으로써 조선이라는 시간을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의 움직임을 보면 한국 사극은 다시 '조선' 을 주목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왕과 나>, 정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리려는 <이산 정조>,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등은 이미 편성이 거의 확정 된 상태로 'Come back 조선' 을 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과 비><신돈> 의 정하연과 <내 남자의 여자> 에서 열연중인 김희애가 손을 잡고 <비운의 이방자 여사> 를 준비중이어서 또 다른 근대사의 비극을 보여 줄 참이다. 왜 그들은 다시금 조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조선' 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시청자들에게 긴밀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연산군, 장녹수, 인수대비, 장희빈, 정난정, 영조, 정조, 혜경궁, 대원군, 명성황후 같은 인물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친숙도는 이미 40여년간 지속되어져 왔으며 그것이 비록 '식상' 하다고 할지라도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 올 수 밖엔 없다. 한국 최고의 사극 감독이라고 일컬어지는 김재형과 이병훈이 '닳고 달은' 연산군과 정조를 들고 나온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사극들은 조선으로 컴백한 것일뿐 인물에 컴백한 것 같지는 않다. <왕과 나> 도 연산군이 아닌 김처선이 주인공이고, <이산 정조> 도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조나 사도세자, 혜경궁이 아니라 바로 정조의 일대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기 ?문이다. 친숙한 배경과 신선한 캐릭터로 무장한 2007년 사극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한국 사극의 역사, 그 역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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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사극 속의 장희빈

[펌] 조선판 마녀사냥, 장희빈의 고정관념
[펌] 사극드라마로 조선시대역사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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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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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이란 무엇이며, 사약의 성분은 무엇인가?

사약이란 왕족 또는 사대부 등 고위층이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이다.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형전(刑典)에 인정된 제도는 아니다. 형전에는 교수(絞首), 참수(斬首)만을 사형제도로 명시하고 있었다. 왕족 또는 사대부는 그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살시키는 대신에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살을 통해 덜 잔인하고 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약을 마신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약을 받을어 마시는 죄인 (사진 출처: 다음 사전)


사약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내리기도 하고,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전하여졌다.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왕명을 받드는 예의를 갖춘 뒤 마셨다.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말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으며,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도 친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중종 때의 선비 조광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사사되었으며, 그 유명한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다.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어명이오”라는 외침과 함께 왕의 명을 받은 사자가 가져온 사약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약을 한자로 풀이해 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란 뜻의 사약(死藥)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약’이라는 의미의 사약(賜藥)이 된다.


사약의 성분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비상’이란 성분이 사용됐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비상이란 비소(As)라는 독성 원소와 황(S) 성분이 섞인 독극물로 조금만 섭취해도 중독 증상을 보여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상대방을 독살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들다. 일설에는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고 하나, 이것에 즉사시킬만한 독성이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출처: 인터넷 검색 및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참고.


보충자료


옛날에 사약 어떻게 만들었어요?
 


극약을 내려 처형하는 것은 조선의 경우 형전에 따로 그 법이 없었고, 내의원에서 사약을 만들때는 비밀리에 제조하여 기록을 남기지않았기 때문에 사약의 재료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극약의 재료로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 비상(砒霜), 초오(草烏), 천남성 등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상
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됩니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으며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되고,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듭니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부자, 초오 등에서 독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은 알칼로이드 성분인 ‘아코니틴’으로 몸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저해제로 작용합니다. 아세틸콜린은 신경과 근육을 이어주는 곳에서 분비되는 물질로서, 만일 아코니틴의 작용에 의해 이것의 분비가 부족해지면 근육마비가 일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짐승을 사냥할 때 화살 끝에 발라서 사용했던 물질도
바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하는 비슷한 종류라고 합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은 산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잎이 넓고 키가 작으며
딸기 비슷한 열매가 열립니다. 천남성에는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이 밖에도 생금(生金: 정련하지 않고 캐낸 그대로의 황금)이나 생청(生淸: 불길을 쐬지 아니하고 떠 낸 꿀),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함께 인삼도 같이 사용했다는 설이 있는데, 대열대독한 부자에
인삼은 온기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부자의 열독이 더욱 성하여져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약을 받은 죄수를 죽게 하려면 때로 약을 먹인 후 뜨거운 방에 드러누워 있게 하거나
독한 술을 먹여서 약기운을 한껏 발산시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사약을 먹으면 바로 피를 토하고 죽는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 예로 조선조 숙종대에 사사한 송시열의 경우 두사발의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아 항문을 막고 사약을 먹게하여 죽고 난 뒤에도 부릅 뜬 눈을 감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일설에는  독을 더 빨리 돌게 하기 위해 약을 먹인후 구들을 따뜻하게 데운 방안으로 죄인을 몰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성분은?

사약의 성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성분은 비상이다. 비상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해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든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

그 외에 초오와 부자도 사약의 성분으로 많이 쓰였으며, 초오, 부자의 주성분인 아코니틴, 아코닌은 중추신경을 초기에는 흥분시켰다가 마비시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상식 보기 [제 453 호/200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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