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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야사 일부분.
이것들 중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읽은 적이 있다.



<태종>

태종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가 헛발질한 것도 적음. 태종 그거는 제발 지워라 쪽팔리다 했는데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가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적음.


하도 사관이 따라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말타고 거기까지  쫓아오는 사관....



<세종>


북방 개척한다고 도망가고, 모친상 핑계로 낙향
조선의 성군(聖君)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上參)에서 부터 과업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했다.
밤 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들고 나선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나도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 하려한다.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더 시킨다.


흔히 청백리라고 알려진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처절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그리고 나름대로 참 비리가 많은 황희

황희가 청렴결백 두루뭉술과는 거리가 멀었다고해요~
자기 사위가 사고친걸 무마하려다가 파면당하기도 하고,
수령에게 땅을 받고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네요 ;
만화로 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다 알게된 건데
항상 좋은면만 보여주던 사람들이 이런다니까 좀 실망이기도 하고 그래요 ㅋㅋ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을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중이었는데

태종임금님이 특별히
충녕[세종대왕] 을 모시는 하인들한테 충녕이는

삼시 세끼 고기 꼭 챙겨먹이라고 안 그럼 밥 안 먹는다고 ㅋㅋ
충녕이에게만 고기 먹는 걸 허락한다고하고

또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상을 물리고 반찬 다시 가져오라고 하고
결국 고기반찬이 없던 밥상을 먹고 나서는 길에는 기운이 없어서 못 움직인다고
주저 앉아주시는 ㅋㅋㅋㅋㅋㅋㅋㅋ

사랑해요 고기 당신없인 못살아 ㅋㅋㅋㅋㅋㅋ

어쨌든 삼시 세끼 꼬박 고기를 드셔야했던 세종대왕님 ㅋㅋ


친경 한다고,소 끌고 밭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배고픔을 못견뎌,
밭갈던 소를 때려 잡아서 국 끓여 드심



<문종>



문종은 부인 복이 정말 없었음.


문종의 부인은 용모가 그리 예쁘지 않아서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마음을 얻지 못헀는데

자나깨나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골몰하던 그녀가 쓴 방법은 주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 태워 가루로 만든 다음

그 가루를 술에 타 남자에게 먹이기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 간직하기 등등......  그러다 걸려서 폐출당했음.


근데 좀 불쌍 ㅠㅠㅠ 그리고 그 후에 또 고른 봉씨는 너무 다혈질이라

세자와 성격이 안맞았고,


그 후에 세명의 후실을 들였는데 그중 권씨와 겨우 아이가 생겼음

근데 문제는 다혈질 봉씨로, 임신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 자기도 임신했다고 거짓말하고

외간남자 엿보고 대낮부터 술주정등등 문제가 많이 생김.

그래도 두번이나 폐출시킬순 없어서 그냥 세종이 눈감아주고 있었는데 일이 터짐

궁녀중 동성애자인 궁녀를 불러들여서 사부작사부작 한거임...... ㄷㄷㄷ 결국 걸려서 폐출됨.



<세조>



세조가 왕이 되기전에 문종이 죽은지 나흘 뒤에,

단종의 즉위식이 있었던 날 (당시에는 수양대군이라 불림) 세조는

"대행의 은덕을 어찌 말로 다 할수 있으랴? 나더러 바르고 충성스러우며 지식이 남다르다고

항상 더불어 의논하셨지. 진법을 만들었더니'제갈량인들 수양보다 나을까?' 이러시는거야.

또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하셨어. 형제간의 정이 이와 같았거늘 흐규긓그그"

........... 음. 조,좋은 자기 칭찬이다 !!  


하루는 신숙주 한명회(세조의 오른팔격)와 술을 마시다가 신숙주의 팔을 비틀고는

아프냐며 자기팔도 비틀어보라 했는데 진짜 했는데 일단 술자리가 끝난뒤 생각해보니

괘씸해서 신숙주가 뭐하고 있는지 몰래 알아보라고 했는데 이미 신숙주는 한명회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밤에 책을 보는 습관을 오늘도 한다면 그대의 목숨이 위험해지리라

는것을 전해들어 불을 끄고 자고 있어서 화를 면할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건 너무 간단히 쓰여있어서 제가 좀더 자세하게 고쳤어요)


세조는 후궁이 단 한명 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조선의 왕비가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고 나와있었음.

정희왕후는 좀 여장부인듯.



<연산군>



성종이랑 연산군이랑 오랜만에 밖에 바람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했다고...


엄청 꽃미남이었다고 함 여리여리한 미소년


연산군은 시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겼는데

연산이 처용무를 추면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고.

그가 우는 연기라고 할라치면 기생들도 모두 따라울어

연회장이 통곡의자리가 되기도 했다고한다.



<중종>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오면 눈물흘림.
버선발로 뛰어남감



<명종>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하나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고 명종은 그거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본투 댄싱 ㅋㅋㅋㅋㅋㅋ  

꾀병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 받음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임.



<효종>



나르시즘에 빠져서  항상 거울을 보고 웃음 [한마디로 왕자병]


인조를 닮아 얼굴이 예뻤는데 지 예쁜거 알았다고 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울을 끼고 자기 얼굴보며 만족하며 웃었대요.



<숙종>



따뜻한 온돌방에서 신하들이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려서 얼음장에서 일하게 만들었음




<정조>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저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했으나 오래도록 계속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실험정신이 참 투철하시군녀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해 숙제 내줘 숙제 제대로 안하면 개망신 줘

술 못마시는 신하한테 술마시라고 강요 기절할 때까지 마셔

활 못 쏘는 신하한테 활 연습시켜

술을 무진장 좋아라 해서.
정약용에게,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서 원샷을 강요
그래서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함.
그때당시 필통에 술붓기라면..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거랑 맞먹는것.


학식, 인품, 외모 딸리는건 건강이 약한것 밖에 없음



출처 : 엽혹진 '병풍뒤향냄새'님이 쭉빵에서 퍼오신 글
         http://blog.naver.com/khs9182/80107049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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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

 
-사진 태조-

(1) 태조~태종 :    추동궁 마마 (1983 / 태조 - 김무생, 태종 - 이정길, 원경왕후 - 김영란, 정도전 - 이호재)
(2) 세종 :             뿌리깊은 나무 (1984 / 세종 - 한인수, 양녕대군 - 송기윤, 소현왕후 - 김영애)
(3) 문종~연산군 : 설중매 (1984 / 세조 - 남성우, 성종 - 길용우, 연산군 - 임영규, 인수대비 - 고두심
                           장녹수 - 이미숙, 김종서 - 전운, 한명회 - 정진, 유자광 - 변희봉
                           폐비 윤씨 - 이기선, 김처선 - 박규채)
(4) 중종~명종 :    풍란 (1985 / 중종 - 최상훈, 조광조 - 유인촌, 문정왕후 - 김혜자, 정난정 - 김영란
                           경빈 박씨 - 박원숙)
(5) 선조 :             임진왜란 (1985 / 선조 - 현석, 이순신 - 김무생, 원균 - 신충식)
(6) 광해군 :          화천문 (1986 / 광해군 - 이희도, 개시 - 원미경, 인목대비 - 권재희)
(7) 인조~현종 :    남한산성 (1986 / 인조 - 유인촌, 임경업 - 최상훈, 최명길 - 변희봉)
(8) 숙종 :             인현왕후 (1988 / 숙종 - 강석우, 인현왕후 - 박순애, 장희빈 - 전인화, 숙빈 최씨 - 견미   리)
(9) 영조 :             한중록 (1988 / 영조 - 김성원, 사도세자 - 최수종, 혜경궁 홍씨 - 최명길,
                           정순왕후 - 김용선, 홍국영 - 김동현, 정후겸 - 선우재덕)
(10) 정조 :           파문 (1989 / 정조 - 김용건, 효의왕후 - 김청, 혜경궁 홍씨 - 고두심)
(11) 순조~고종 :   대원군 (1990 / 흥선 대원군 - 임동진, 고종 - 김홍석, 명성황후 - 김희애, 철종 - 최수종)


2. 왕실 역사
 
-사진 세종대왕-

(1) 태조~정종 :    개국 (1983 KBS / 태조 - 임동진, 정도전 - 김홍기)
(2) 태종~세종 :    대왕 세종 (2008 KBS  / 세종 - 김상경, 태종 - 김영철, 양녕대군 - 박상민,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이윤지, 어리 - 오연서)
(3) 문종~연산군 : 왕과 비 (1998 KBS / 세조 - 임동진, 성종 - 이진우, 연산군 - 안재모, 인수대비 - 채시라
                           단종 - 정태우, 장녹수 - 유니, 김종서 - 조경환, 한명회 - 최종원
                           폐비 윤씨 - 김성령, 김처선 - 김성환)
(4) 중종~명종 :    여인 천하 (2001 SBS / 중종 - 최종환, 문정왕후 - 전인화, 정난정 - 강수연,
                           경빈 박씨 - 도지원, 조광조 - 차광수)
(5) 선조~광해군 : 왕의 여자 (2003 SBS / 선조 - 임동진, 광해군 - 지성, 개시 - 박선영, 인목대비 - 홍수현)
(6) 인조~현종 :    대명 (1981 KBS / 효종 - 김홍기)
(7) 숙종 :             장희빈 (2002 KBS / 숙종 - 전광렬, 장희빈 - 김혜수, 인현왕후 - 박선영, 숙빈 최씨 - 박예진)
(8) 영조 :             대왕의 길 (1998 MBC / 영조 - 박근형, 사도세자 - 임호, 혜경궁 홍씨 - 홍리나,
                           정순왕후 - 이인혜, 숙빈 최씨 - 김영애)
(9) 영조 :             하늘아 하늘아 (1987 KBS / 영조 - 김성겸, 사도세자 - 정보석, 혜경궁 홍씨 - 하희라)
(10) 정조 :           이산 (2008 MBC / 정조 - 이서진, 영조 - 이순재, 혜경궁 홍씨 - 견미리,
                           효의왕후 - 박은혜, 정순왕후 - 김여진, 홍국영 - 한상진, 정후겸 - 조연우)
(11) 순조~고종찬란한 여명 (1996 KBS / 흥선 대원군 - 변희봉, 고종 - 조재현, 명성황후 - 하희라)


3. 인물로 보는 조선 역사

 
-사진 정조-

(1) 태조~세종 :    용의 눈물 (1997 KBS / 태조 - 김무생, 태종 - 유동근, 세종 - 안재모, 양녕대군 - 이민우,
                           원경왕후 - 최명길, 소현왕후 - 도지원, 정도전 - 김홍기, 어리 - 유니)
(2) 문종~성종 :    한명회 (1994 KBS  / 세조 - 서인석, 한명회 - 이덕화, 문종 - 송승환, 단종 - 정태우
                           성종 - 박진성, 연산군 - 이민우, 폐비 윤씨 - 장서희, 김종서 - 임동진, 인수대비 - 김영란)
(3) 연산군 :          장녹수 (1995 KBS / 연산군 - 유동근, 장녹수 - 박지영, 인수대비 - 반효정)
(4) 중종~명종 :    조광조 (1995 KBS / 중종 - 이진우, 조광조 - 유동근, 문정왕후 - 김민정, 경빈박씨 - 김성령)
(5) 선조 :             불멸의 이순신 (2004 KBS / 선조 - 최철호, 이순신 - 김명민, 원균 - 최재성)
(6) 광해군~현종 : 서궁 (1996 KBS / 광해군 - 김규철, 개시 - 이영애, 인목대비 - 이보희)
(7) 숙종 :             장희빈 (1995 SBS / 숙종 - 임호, 장희빈 - 정선경, 인현왕후 - 김원희, 숙빈 최씨 - 남주희)
(8) 영조 :             홍국영 (2001 MBC / 영조 - 최불암, 홍국영 - 김상경, 정후겸 - 정웅인,
                           정순왕후 - 염현희, 혜경궁 홍씨 - 이상숙)
(9) 정조 :             왕도 (1991 KBS / 정조 - 강석우, 홍국영 - 김영철, 효의왕후 - 박순애, 정순왕후 - 김자옥
                           혜경궁 홍씨 - 정영숙)
(10) 정조 :           소설 목민심서 (2000 KBS / 정조 - 김홍기, 정약용 - 이진우)
(11) 순조~고종명성황후 (2001 KBS / 흥선 대원군 - 유동근, 고종 - 이진우, 명성황후 - 이미연 & 최명길)


PS 1. 픽션이 과도한 작품은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왕과 나" (성종~연산군?), "대장금" (중종), "한성별곡" (정조) 등등..
PS 2. 인물의 일대기라도 왕실 역사가 주가 되는 작품 안에서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천둥소리" (광해군), "어사 박문수" (영조), "태양인 이제마" (철종, 고종) 등등은 제외.


출처:
엠파스 지식인
원 출처는 정확히 기재되어 있아 링크 안됨.(디비디프라임 ALEX작성자님 http://dvdprime.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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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작가의 따끔한 질책: 역사드라마가 막가고 있다




Ⅰ. 역사드라마의 광풍이 불고 있는 요즘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서 내보낸다. 평생을 그 일에 종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척도 반갑고 즐거운 노릇이어야 옳지만, 실상은 가슴을 조이면서 걱정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진다는 점은 국사정신의 고양과 나라의 정체성 확립에도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러자니 고증考證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고, 사실史實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격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엄격하게 생각하면 드라마와 사실은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역사드라마가 사실과 같기를 희망하고,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역사를 배우고자 하는 과욕에 젖어있는 게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작가가 쓰는 모든 소설이나 드라마가 픽션虛構의 범주 안에 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나 소설의 경우 있었던 사건, 실제의 인물을 다룰 때는 작가에게 주어진 절대권한이나 다름이 없는 픽션도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에 각별히 유념 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기가 드라마작가나 소설가의 식견과 표준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고려 말의 혼란기를 드라마로 쓰게 되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를 교차하게 하면서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의 갈등을 그리게 된다. 이 상황 안에서라면 어떤 픽션의 도입도 작가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든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요즘의 역사드라마는 이 엄연한 룰(규칙)을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사진은 특정 내용과 상관없음.



Ⅱ.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는 ‘사실’과 얼마간 다를 수가 있겠지만, 그 시대가 지닌 ‘시대정신’은 달라서는 안 되고, 왜곡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 집권자의 통치신념을 제시하는 포괄적인 시대정신이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집권자의 통치이념에 따라서 한 시대, 시대마다 어떤 형식이든 시대정신이 깔리게 마련이고, 바로 그것이 그 시대를 흘러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KBS-TV에서 방송되고 있는 <대왕 세종>의 경우라면 태종시대의‘시대적 정신’과 이탈해서는 그 시대를 바로 그려갈 수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아 조선건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었지만, 세자책봉에서 제외되는 좌절을 겪으면서 스스로 집권하기 위한 야망을 불태우게 된다. 그리하여 나이어린 이복동생을 죽였고,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되는 동복형님까지 죽이면서 왕권을 손아귀에 넣었지만, 아버지 태조(이성계)와 는 상상을 초월하는 갈등을 겪으면서 왕권을 굳혔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도 네 사람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려서 죽게 하였고, 이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며 항변하는 왕비(원경왕후)에게 거침없이 폐비를 입에 담으면서 10여 년 세월을 같은 궐 안(경복궁)에 살면서도 내왕없이 불목으로 일관하였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죄인으로 내치기까지 하였다. 이때까지 조선 왕조의 왕위계승이 장자로 이어지지 않았다하여 듣기 민망한 유언비어가 도는 데도 장자인 세자를 폐하는 태종의 독단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또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재로서의 가능성을 보이자 태종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서 물러난다.



그것은 세종의 새 왕조가 확실하게 자리 잡을 때까지 후견인(상왕)이 되어야겠다는 그의 책임감의 발로이나 다름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세종의 장인이자 국구인 심온沈溫이 ‘왕명이 두 군데서 나오면 정치에 혼란이 있게 된다.’는 당연한 말을 했음에도 그가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서 체포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 할 만큼 단호하고도 혹독한 군왕이었다. 어린 왕비(소헌왕후)는 상왕전의 마당에서 아비를 살려달라는 석고대죄를 올렸어도 태종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미루어 태종의 재위 18년과 상왕으로 있은 4년은 태평한 다음시대를 열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기였기에 어렸을 때의 친구이자 마치 분신과도 같았던 최측근인 이숙번李淑蕃까지도 “내가 죽고 백년이 지나지 않거든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귀양에 처했다.

태종 이방원의 통치시대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다음 시대의 장애물이될 위험이 있는 자를 가려서 그가 어떤 자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해 버렸던 시대’였기에 자신의 뒤를 이은 22세의 어린 세종에게

"천하의 모든 악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주상은 성군의 이름을 만세에 남기도록 하라."는  명언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태종시대를 드라마로 그리자면 이같은 시대정신 또는 시대의 정한이 고려되지 않고서는 좋은 드라마로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된다.


Ⅲ.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되는 화두는 세종시대와 세종의 통치철학을 살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다. 그러기에 KBS-TV에서 <대왕 세종>을 제작 방영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대에 담겨진 귀중한 체험과 정신을 외면하거나 왜곡한다면 모처럼의 좋은 뜻도 물거품이 되기가 쉽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대왕 세종>이라는 타이틀은 너무 보편적이다.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임금이 있었고, 그 모든 분을 통칭하여 <대왕>이라고 높여서 부른다.

그러나 세종은 단종이나 예종, 혹은 철종과 같은 반열에 두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너무도 크고 자랑스럽기에 일반적으로도 다른 임금들과 구분하여 성군聖君세종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드라마의 타이틀은 당연히 <성군 세종>이야 옳다. 성군 세종의 경우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업적을 남겼고, 자신의 몸은 병마에 시달려서 시체로 변해가는 데도 자신의 병구완보다 국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 왜 드라마의 타이틀에 반영되지 않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의 내용이 꼭 사실史實과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일들을 늘어놓을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이 픽션虛構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방영 중인 <대왕 세종>에는 허점이 너무 많다. 아직은 방송 초기(12회까지 보고 쓴다)인데도 너무 많은 잘 못을 저지르고 있기에 그 중의 몇 가지를 지적하여 앞으로의 과실을 막아주기를 바란다.

1,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태종이 너무 한가하다. 태종은 태종의 시대를 초강력하게 이끌었고, 그것이 곧 세종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엄하게도 세자나 중전, 신료들이 태종의 면전에서까지 임금을 무시하는 듯한 간언諫言을 입에 담는 것을 다반사로 여긴다. 당시의 태종에게는 용납될 일이 아니다.

2, 세자(양녕대군)가 드나드는 방은 어디에 있는 무슨 방인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의 정부기관인 이조, 예조, 병조, 호조 등과 같은 건물은 광화문 밖 육조관아에 위치해 있었고, 임금이 불러야 궁으로 들어갔으므로 거리 감각이 살아 있어야 당연한데도 그저 아무데서나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다.

3, 공무에 임하고 있는 세자의 거처(이 또한 애매하지만)에 궐밖에 있는 충녕대군이 사복 차림으로 들어와 앉아서 감 놔라 대추 놔라고 참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충녕대군의 언동에서 임금이 되고 싶어 하는 기미가 보이는 것은 세종을 잘 못 그리는 단초가 된다.

대왕세종의 충녕대군


4, 더 끔찍한 것은 양녕대군이 큰 아버지(定宗)가 총애하는 기녀 초궁장에게 아우들이 지켜보는 백주대낮에 수작을 거는가 하면, 거처에까지 끌어드린다. 이 불륜不倫이 용납될 수가 있는가. 작가는 폐세자의 빌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변명하겠지만, 양녕이 폐세자가 되는 과정은 <태종실록>에 절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둘러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5, 또 세자가 명나라 사신의 술상을 엎는 대목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과의 관계를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되거니와 세자가 외교사절에게 그렇게 해도 무사할 수가 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런 광태狂態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치기稚氣에 불과할 뿐이다.

6, 더 놀라운 것은 정인지, 최만리 등이 모여서 정도전의 '삼봉집三峰集'을 읽는 비밀결사를 하는 데, 여기에 세자가 참석한다. 정도전은 태종에 의해 참살된 사람이고, 이로부터 4백 년이 지난 고종 때까지도 그의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나 있는지? 더구나 아직 그가 죽은 지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인지와 같은 지식인들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三峰集’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7, 세종조의 명신 윤회尹淮는 시장바닥을 헤매는 주정뱅이로 나오는가 하면, 명나라 사신들이 묵는 태평관의 부엌일 까지 참견한다. 윤회는 태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10년 무렵에는 관직의 꽃인 ‘이조정랑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이런 사람이 난전을 떠도는 주정뱅이면 어찌되는가.

8, 중전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기 위해 상궁을 시켜 독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말이 되지를 않는다.

9, 장차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게 될 장영실이 반정부군에 몸담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을 포탄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지의 극치이고도 남는다.

10,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가 아들 경령군을 후사로 만들 욕심으로 이숙번을 찾아가 아들의 스승이 되어 줄 것을 청하는 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숙번은 효빈 김씨의 멱살을 잡고 태종에게 끌고가 패대기를 칠 인물이다. 이숙번은 태종의 오랜 친구이자 그의 분신이었다.

11, <대왕 세종>이 국민드라마라면 왜 15세 미만에게 주의를 환기하는가. 중학교 2학년이 15세 인데, 이들이 볼 수 없는 <대왕 세종>을 왜 만들어야 하나.


Ⅳ.   MBC-TV의 <이산>의 경우는 비교적 성실하게 잘 만들어지고는 있는 역사드라마임에는 분명하나, 법도에서 벗어나는 몇몇 장면의 과장이 작품천체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역사드라마는 사실과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삼강三綱의 법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이 세 가지를 삼강이라고 한다. 삼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상존한다. 상하의 관계가 문란해지고, 부자의 관계가 무너지며, 부부의 관계가 깨지면 그 사화가, 그 나라가 천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21세기를 살면서도 이 법도는 유지되는 것이 우리의 ‘모럴’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삼강의 도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을 잘못 호도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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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가 사복을 입고 궐 밖으로 나와서 조정중신들을 몽땅 불러모으는 장소는 대체 누구 집이며,

2, 창덕궁에서 얼마나 떨어진 위치에 있는 지 도무지 석연치 않은데도 정순왕후는 거의 매일 밤 그렇게 나간다. 요즘 식으로 하면 안가인지 모르지만….

3. 그것이 한 번이라도 위험천만한 발상인데 정순왕후는 매회 그런 몰골로 궐 밖을 쏘다니고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노릇이고, 어느 날은 ‘주상과 세손 중에서 한 사람을 죽여야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발설한다. 상식으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순왕후의 뜻을 잘 받드는 사람이 대신 말해도 되는 일이 아닌가. 
정순왕후 김여진

4, 사도세자에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한답시고, 책을 찢어서 시냇물에 헹구는 데, 인쇄된 것은 세초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고치자면 주서朱書로 고치는 것이 정도다. 왕조실록이나 정부 문건은 모두 그렇게 고쳤다.

5, 어느 날 밤에는 영조가 곤룡포와 익선관을 벗어놓고, 창덕궁을 빠져 나갔는데도 아무도 모른다. 궐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뭐하였고, 더구나 세손이 그 사실을 모른다면 대궐이 아닌 여염집의 사정과 무엇이 다른가.

6, 정조의 즉위식에서의 정조의 모습은 사료를 읽지 않은 정형적이 잘 못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생각이 나서 울고, 또 우느라 즉위식에 나오지 않으려 했지만, 대신들의 간청에 못 이겨 늦게 나와서 즉위식이 상당히 미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 보다 사실이 더 빛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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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역사를 학문으로 읽는 역사학자들은 사서史書에 적힌 문자만을 읽는다. 그러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역사드라마 작가는 사서의 적힌 문자보다는 그 행간行間을 읽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흐름으로 읽을 수가 있는 것이 역사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권한이자 행운이다.

역사의 어느 대목만을 끊어서 읽으면 앞뒤의 사정이 맞질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의 사실을 확인 할 때도 글자(사실)만을 읽지 말고 앞뒤의 사정을 길게 살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영월 땅에 부처되어 있던 단종이 죽던 날을 <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노산군(단종)이 이를 듣고 또한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세조실록> 3年 10月 21日자. 이로부터 장장 7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승지 이자화李自華의 발설이 「중종실록」에 실리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君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26년의 11월 11일자. 단종이 자살했다고 적힌 <세조실록>과 세조가 단종을 죽였다는 기사가 같은 실록에 실리기까지는 무려 74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이와 같이 드라마작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 방송국에서는 시청률에만 의지하여 드라마를 평가하려는 단세포적인 사고가 횡행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설혹 시청률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국사정신을 혼란하게 하였다면 역사드라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작방송사의 위상에 상처를 내게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설혹 시청률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이 국민들(시청자)의 역사인식에 해악을 주었다면 작가나 PD는 큰 죄악을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신봉승 작가: 시, 소설, 평론, 연극 극본, 시나리오, 역사 에세이 등을 집필하며 대학에 출강했으며, 예술원 회원이기도 한 신 작가는 '사모곡', '풍운', '찬란한 여명' '한명회' 등 수십 편의 사극을 써온 한국 TV 사극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9년간 MBC '조선왕조 500년'의 대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었다. 안그래도 대왕세종은 아예 말도 안되고, 이산도 좀 미심쩍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목조목 지적해주시니 속이 시원했다. 역시 대작가님은 다르시구나.! 싶었다.

그런데 '신봉승'으로 검색해보니 똑같은 기사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게다가 어떤 건 길고, 어떤 건 짧고 길이도 제각각이다. 이상하다.? 똑같은 기사를 이리 여러 언론사에 보내도 된단 말인가 싶어서 자세히 읽어보니 '신봉승 작가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라는 구절이 있는 기사가 있다. 신봉승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직접 가져와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기사로 낸 것이었다.!

여러 개의 뉴스를 찾아보았지만 출처가 적힌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남의 홈페이지에서 무작정 퍼와서 '붙여넣기' 신공으로 제목까지 자극적으로 바꿔서 기사를 내어놓고 네티즌들에게는 '저작권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출처조차도 안밝히면서 저작권 운운하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보다.


그 기사 마지막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낯익은 문구가 있었다.

저작권자: XXXXX 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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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 오프닝 화면 타이틀


방송 삼사의 사극 (SBS - 왕과 나, KBS - 대왕 세종, MBC - 이산) 중, 사극불패 신화를 이어가는 KBS의 대왕 세종이 기대됩니다. 세종대왕은 그동안 너무 평화로운 시대라서 사극에서 다뤄지지 않은 왕인데, 드디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대왕님께서 드라마 주인공으로 납셨습니다.!!!


"니들 정말 너무한거 아니냐??"..고 묻고 계신 세종대왕님



요즘 삼사에서 사극을 앞다투어 그것도 조선 초기(대왕 세종)부터, 조선 초중기(왕과 나), 조선 후기(이산)까지 골고루 보여주니 역사에 관심(만) 많은 저는 행복하기도 하고 챙겨보질 못하니 불행하기도 하네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로는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이건 양녕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동시대를 다룬 위대한 사극 용의 눈물과의 비교부터 해보도록 합시다. 작품성이나 연기력, OST에 대한 비교도 하고 싶지만 제 깜냥도 그에 모자라고, 또 대왕세종은 아직 초반부이니, 인물들과 설정만 비교하겠습니다.



1. 태종
유동근 태종과 김영철 태종
 
유동근(용의눈물): 그야말로 태종이 살아있었으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의 완벽한 연기와 캐릭터였습니다. 태종의 인간적인 고뇌, 태종의 결단력, 태종의 잔인성까지 다 보여주며 제목이 왜 용의 눈물인지를 알 수 있는 드라마였죠.

유동근표 태종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절대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적을 막다른 골목으로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으로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의 동생 넷을 가히 살인마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게 다 죽이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은 짐승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들과 흔들리는 조선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라고 하지요.

이게 실록에 나오는 말인지 그가 직접 한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은 정말 진심으로 죄업은 자신이 지더라도 후대가 평탄할 길을 닦아놓은 듯 합니다. (이전 사극에서도 이 대사가 나왔다는데 아시는 분은 좀 도와주세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악업을 지더라도, 그게 자신의 야심때문만이 아니라,
더 나은 후대를 위해서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요즘 세상에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케 한다는 말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앞으로도 이보다 더 나은 태종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김영철(대왕세종): 궁예의 말투가 아직도 좀 남아있는 것이 약간 아쉽긴 하지만 이 분도 유동근씨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인상깊었을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기력 외에 대왕세종의 태종에서 아쉬운 것은 현재 냉정함과 까칠함만 보일 뿐, 유동근표 태종에서 보았던 치밀함이 다소 부족해보인다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충신 정몽주를 도끼로 내려찍은 사건 때문에 굉장히 무식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보이기 쉽지만, 실제로 그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중 가장 똑똑했고,  그렇기에 태조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늙은 공신들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정치고수였습니다. 지금 김영철표 태종처럼 대신들에게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은근슬쩍 질문을 던진 다음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만들어 사건을 지휘해 나가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앞으로 태종의 치밀함을 어떻게 보여줄 지 기대 중입니다.



2. 원경왕후 민씨 : 최명길(용의눈물)최명길(대왕세종) 으로 10년만에 다시 연기.

최명길 원경왕후

이렇게 같은 사람이 같은 역을 두 번 맡는다는게 굉장히 드문 케이스죠. 정말 잘 어울리고, 10년 동안 더 아름다워지신 것 같네요. 캐릭터도 거의 동일한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태종에게 지지 않고 대드는 강단있는 모습과 아들을 사랑하는 모습 등이 그대로 보여집니다.



3. 세종(충녕대군) :

안재모 세종과 김상경 세종

안재모(용의눈물): 안재모는 여기서 역대 최고의 성군 세종 역을 맡고, 바로 다음 사극인 왕과 비에서는 최악의 폭군 연산군 역을 맡았죠. 어린 나이에도 둘 다 소화를 잘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 왕과 비와 동시대를 다루는 사극 왕과 나에서는 임금에서 내시로 신분이 폭락했지만 연기 하나는 끝내주죠? 그야말로 사극의 젊은 피입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세종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 특징이 없었죠.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충녕대군은 왕위에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왕에 오른 것으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죠? ^^)

김상경(대왕세종): 용의 눈물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해 보이던 안재모의 눈빛과는 달리 대왕세종에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와 세상에 뜻을 품은 충녕을 보여주었습니다. 용의 눈물에서는 왕위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고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실제 충녕은 정치에 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입니다.



4. 소헌왕후 심씨 :

도지원 소헌왕후와 이윤지 소헌왕후

도지원(용의눈물): 충녕 배역도 단역인데 세자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친정이 몰락할 때외에는 별로 나온 장면이 없습니다. 이 때 도지원은(여인천하의 뭬야~! 도지원 아님) 아주 어린 나이(중 3?)이었다고 하는데 정통 사극에 출연해서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수준의 연기를 보였습니다.

이윤지(대왕세종): 용의 눈물처럼 까메오 수준이 아닌 배역이라 상당히 큰 배역인데 개인적으로 참 매력없다 생각하는 배우가 캐스팅되어 약간 아쉽네요. 

자기 때문에 친정이 몰락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내가 소헌왕후라면 왕이면서도 자신을 구해주지 못한 남편(세종)도 미웠을 것 같은데 그런 원망없이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고, 조선 왕비 중에 내명부를 가장 잘 다스려, 태종에게 덕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땅에 닿는 여인이라는 칭송까지도 들었다고 합니다. 

왕비라는 이유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입은 그녀에게 세종대왕이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남편으로서의 사랑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자녀를 많이 두는 것도 중전을 보호해주는 한 가지 방법이었을까요? 어떤 이유에서건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의 금슬이 아주 좋았고, 조선 왕비 중에 남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여인입니다. 자녀가 열이니 임신, 육아 기간만 해도 10년 이상이라 거의 애 낳는 기계였습니다. 늘 배불러 있는 걸로 분장하면 되겠군요.;;

어쨋든 그녀가 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뜬 후에 세종이 크게 슬퍼하여 소헌왕후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니, 둘 사이가 굉장히 깊었나 봅니다. 젊은 날의 사랑과는 다른 오랜 우정과 믿음, 신뢰, 애착이 합쳐진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겠죠. 집현전 학자들에게도 의지하지 않던 세종에게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같습니다.




5. 양녕대군 :

이민우 양녕대군과 박상민 양녕대군

박상민은 여인천하에서 길상이로 나왔을 때


이민우(용의눈물): 이때 이민우가 20대 초반이었다는데 연기 끝내주죠. 원래는 충녕대군(세종) 역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는데 이민우가 양녕에 매력을 느껴 배역을 바꾸는 바람에 대본이 수정된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양녕대군이 그렇게 매력있는 인물로 재탄생되었나봅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양녕대군은 지하에서 이민우와 용의 눈물에게 고마워 해야할 것입니다. 망나니 중에 X망나니였던 그를 이렇듯 멋~지구리하게 포장시켜 줬으니 말입니다. 야사에서는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나는 숙청작업과 정치공작에 질려서 동생에게 지 자리를 물려주고 쿨하게~ 떠나준 것으로 전해져온다지만 실록의 여러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하거든요.

후에 양녕대군에 대해서 따로 적을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적겠지만 어쨋든 양녕이 권력욕이 없어서 동생에게 그
리 깨끗이 왕위를 물려줄 만큼 됨됨이가 된 인간은 아니었다 이겁니다. 용의 눈물에서 인물들을 재해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다른 건 다 참겠습니다만...  양녕대군만큼은 심하게 미화되었다는 거죠.

박상민(대왕세종): 대왕세종에서의 양녕은 용의 눈물에서의 양녕처럼 쿨한 느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양녕은 권력에 욕심도 있었구요. 솔직히 용의 눈물의 양녕은 쾌남아 정도도 아니고.. 무슨 도 통한 도사 같지 않나요?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도 없는 사람이 늙어서 목숨 구걸하려고 수양대군(세조)한테 붙어서 알랑방구 끼고 세종 손자인 단종 죽이자고 그 난리를 떨겠냐구요. 

그런 게 세상이라지만....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응? ㅋㅋ



6.  효빈김씨 : 두 분 다 88년 미스코리아 진(김성령)과 선(김혜리) 이랍니다

김혜리 효빈과 김성령 효빈

김혜리(용의눈물): 원래 성품이 온순한데다 원경왕후의 몸종이었다가 후궁이 되었고 원경왕후 덕에 목숨까지 건졌기에 원경왕후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저도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김성령(대왕세종): 분명한 것은 현재 김성령표 효빈처럼 건방지지는 않았을 거에요. 피도 눈물도 없는 태종 앞에서 까불 수 있는 건 조강지처 뿐일텐데... 감히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앉힐 욕심을 내다니... 이건 윤선주 작가가 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원경왕후도 기가 죽어서 조용히 지냈다지요.)



7. 그 밖의 인물들입니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 정하완(용의눈물)최상훈(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20년을 해먹은 전설적인 정승 황희 : 박진성(용의눈물)김갑수(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 : 선동혁(용의눈물)김주영(대왕세종)
김주영씨는 10년전에 용의눈물에서 이방간역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태종 이방원의 장자방이었던 하륜 : 임혁(용의눈물)최종원(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양녕대군이 폐세자되는 결정적인 사건의 주인공 어리 : 故 이혜련(용의눈물)오연서(대왕세종)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세자빈 김씨(양녕대군 부인) : 안연홍(용의눈물)유서진(대왕세종) 
남편 잘못 만나 졸지에 한양 밖으로 쫓겨난 세자빈 역 안연홍은 저 때만 해도 이미지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너무 까불이 이미지에 대출광고까지 찍어서 이미지가 너무 나빠져 버렸습니다. 연기도 잘하는 배우인데 참 아깝네요.

용의 눈물 vs 대왕세종


5회부터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배우들이 바뀌었던데...  너무 어린 아역배우에서 갑자기 너무 삭은 성인배우로 넘어가니 영 적응이 안되네요. 
실제 양녕대군은 쫓겨나고 나면 나올 일도 별로 없을 텐데... 폐세자될 때 나이가 25인데 40에 가까운 박상민씨가 양녕대군으로 나오다니.. 너무합니다.ㅜㅜ 세종대왕 역을 20대만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그랬겠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으로는 보여야 할 텐데.. 스물 다섯에 쫓겨난 양녕대군을 40살 아저씨가 연기한다니..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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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세종은 양녕대군의 미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의 욕심과 비행, 충녕대군의 왕위에의 욕심과 도전, 그로 인한 두 왕자 사이의 갈등과 알력... 이런게 재밌을 것 같은데 이를 표현하기에 주연 배우들이 너무 나이가 많아서 패기있는 모습이 잘 안드러나는게 좀 아쉽습니다.

그래도 6회 방영분에서 양녕이 기생을 희롱하는 연기는 잘하시더군요. 나이를 잊고 보면 괜찮습니다. 어린 척하기가 어색했을 텐데 패기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어쨋든 앞으로 양녕대군의 행보가 어찌 그려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초반의 탄탄한 전개를 유지시켜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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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처럼 가벼운 사극에 부족함을 느끼는 분들!
왕과 나의 궁중 내 여인암투에 질린 분들!

오랜만에 나온 선굵은 조선 사극, 대왕 세종 같이 안하실래요?

다 같이~~ 대세에 빠~져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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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 출연자들 사진, 이민우/유동근의 명연기 동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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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Honggildongjeon.jpg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홍길동전 첫 쪽


홍길동전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이며 정치가인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국문소설이다.



홍길동의 실제 시대적 배경은 연산군 때라고 하는데 소설 홍길동전은 세종대를 그 배경으로 한다.
조선 후기에 씌어진 소설인데 왜 하필 그 시기를 세종대로 했을까? 여기에 그 설명이 있다.


출처: 순천 시민의 신문, 덧셈의 정치 중 일부 인용


최초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은 사실 세종 때를 그 배경으로 한다. 홍 판서가 낮에 길몽을 꾼 후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려 한다. 그러나 부인이 거절하자 안방을 나오다 우연히 지나가는 노비 춘섬을 보고 동침한 결과 길동을 낳게 된다. 서자로 태어난 길동의 이야기를 다룬 홍길동전이 왜 하필이면 세종조를 배경으로 한 것일까?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 장남 방우부터 넷째아들 방원에 이르기까지 아들들이 있었지만 태조는 강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결국 1398년 방원을 중심으로 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인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로 인해 태조는 신의왕후 소생 가운데 첫째인 방우가 병으로 죽자 둘째인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간다.

실권자였던 방원이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는데 그는 그 이전까지는 없었던 적서의 차별을 제도화 하는 법을 만든다. 후궁인 강씨에 대한 증오가 적서 차별을 제도화 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결국 태종 때 적서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차별을 받게 된 서얼들의 한이 세종에 이르러 홍길동전으로 나타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구전되고 구전되다가 허균에 이르러 한글소설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축첩제도가 금지된 오늘날 적서의 차별이 있을 리 없지만 차별은 도처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순혈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경우 혼혈에 대한 차별이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지역주의로 무장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른 지역 출신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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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故 김무생님



신덕왕후 강씨, 김영란님.



신덕왕후의 큰아들 방번,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함. 불쌍한 정태우는 불우한 왕자 역할만 몇번 째냐.



태종 이방원 유동근,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대단한 왕



원경왕후 민씨 최명길님, 이 드세던 여자가 멸문지화를 입은 이후 10여년간 갖혀살며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함.



선빈 안씨 이보희님.



효빈 김씨 김혜리, 태종이 왕에 오르기 전 사가에서 눈에 들었다고 함.



소빈 노씨 하지원의 앳된(?) 모습. 태종의 용포에 음식을 쏟아서 관심을 삼.ㅋㅋ


양녕대군 이제 이민우, 용의 눈물에서는 일부러 미친 척(?)한 것으로 묘사됐으나 행동을 보면 진짜 미친 놈임.
어쨋든 연기 하나는 끝내주는 이민우. 유동근 = 태종 이방원인 것처럼 이민우 = 양녕대군 공식을 세움.


세자빈 김씨 - 안연홍, 중전될 팔자에서 X망나니 남편 덕분에 졸지에 한양에서도 쫓겨나
평생 바람둥이 남편 등만 보고 산 박복한 여인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는데 결정타를 날린 여인, 어리
故 이혜련의 연기는 후속작 왕과 비의 장녹수에서 진가를 알 수 있음.



효령대군 이보 장나라의 오빠인데 정말 잘 생겼고 연기도 잘하던데 왜 안나오는지..


충녕대군 이도 안재모, 수염 낫을 때가 훨씬 나은데.. 왕과 비에서 연산군역으로 열연함.
수염 붙이고 나온 순간부터 전국의 처자들을 울림.


 
성녕대군 이종. 늦둥이로 총명하고 착해서 사랑을 듬뿍 받으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일찍 세상을 뜸.



이숙번의 처 정씨 송윤아.. 아. 정말 예쁘네.
원경왕후와 절친한 사이였으나 후궁 선빈을 소개해주는 바람에 원경왕후와 멀어짐.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를 회상하는 태종.
참 사람 많이도 죽였다ㅡㅡ;; 이건 인간 백정도 아니고..




용의 눈물에서 절에서 사슴고기 구워먹은 양녕을 미친 놈이라고 욕하는 태종과
그래도 뭘 잘했다고 뻔뻔하게 대드는 양녕대군 이민우





양녕대군의 서찰, 마치 왕위를 충녕에게 양보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과연 그럴까?



양녕대군을 폐세자 시키면서 괴로워하는 태종...
적장자에게 물려줘야 아들들끼리 골육상쟁의 비극이 안일어난다고 생각했을텐데..
세자를 위해, 아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살육을 하고, 그 많은 말썽을 다 참아줬건만.



원경왕후의 최후... 이제서야 용서를 구하는 태종과의 대화..
두 분의 소름끼치는 연기력과 이야기... 찡하다.




용의 눈물은 다시 봐도 참 멋진 드라마이다.
앞으로 이런 명품 사극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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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朝鮮이야기(26)]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조선 건국 직후 강화도 등에 강제이주… ‘왕씨 제거’ 기습작전으로 집단 수장돼


왕씨 완전 제거 작전

그 많던 왕(王)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의 통계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500년 가까이 이어진 고려였기에 조선 건국 당시 왕씨의 수는 대단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 20일 태조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를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렸다.

이성계는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씨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는 명나라로부터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정 요인이 컸던 것이다. 태조3년(1394년) 1월 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 형률을 맡고 있는 3개 기관이 합동으로 왕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것도 그런 불안감의 발로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윤허하지 않았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 제거를 주장했다.


실상은 분명치 않지만 왕씨들이 연루된 이런저런 모반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이성계는 사헌부에 명을 내려 강화도 등에 거주하고 있는 왕씨들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왕씨 제거 주청은 4월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결국 4월 14일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그 문제를 논의할 것을 지시한다. 왕씨들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일부 신하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지만 소수였고, 절대다수는 왕씨의 완전제거를 역설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하는 공양왕의 동생인 왕우 삼부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살해하기로 결정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했으니 이성계와 왕우는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이보다 참혹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렇게 해서 왕씨의 씨를 말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와 거제도 외에 삼척에도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은 삼척,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도,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도로 파견되었다. 모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성계의 최측근이었다.

작전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바로 다음날 윤방경 등은 왕씨를 모두 색출해 강화나루에 수장(水葬)시켰다. 거제도의 작전은 4월 20일에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수장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왕족이었고 그 밖의 왕씨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돼 “모두 목을 베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왕씨의 서얼들까지 잡히는 대로 참수했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닌 경우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렸다. 왕씨들의 관직진출이 금지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였으니 아무리 정부에서 완벽하게 왕씨를 제거했다고 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왕씨 색출작업은 태종 때도 계속된다. 태종13년(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아무래도 사찰은 불교국가였던 고려에 동조하리라고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태종의 생각은 바뀐다.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다.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말한다.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그것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었다.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신하들을 나무란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자고 고려 왕실을 박멸하려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현실주의자 태종다운 발언이었다. 이어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했다. 그러나 20여년 가까이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심지어 성을 전(全)이나 옥(玉)씨로 바꾼 사람도 많았다.

태종의 이 같은 명이 있은 이후 왕씨에 대한 살육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진출하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아마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간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그나마 당시 최고위직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문과 급제자는 1453년 왕희걸(王希傑·?~1553년)이 최초였다. 그는 이름 그대로 대단히 보기 드문 인재였을 것이다. 문장?琉?글씨 등에 두루 정통한 그는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라갔다. 또 이황이나 노수신 같은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아마도 왕희걸을 바라보는 당시 왕씨 집안 사람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왕희걸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을 맺는 것은 명종 때 을사사화다. 당시 그는 함경도 어사로 있었다. 이때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계림군을 역모로 얽어매려 했는데 계림군이 함경도 쪽으로 도망을 쳤다. 왕희걸의 조사 결과 중 보우(普雨)가 황룡사·석왕사 등지에 계림군을 숨겨주었다는 보고서를 올렸지만 보우의 뒤에는 문정왕후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20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 보우는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 변협에게 피살되는데 보우의 승적을 박탈할 때 핵심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왕희걸의 장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왕씨에 대한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에 대한 제사는 줄곧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선조 때에 오면 그마저 사람이 별로 없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선조22년(1589년) 7월 4일 조정에서는 50년 가까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의 사람이 제사를 주관해 온 것은 문제라며 새롭게 왕씨 중에서 주사자(主祀者)를 선정하는 문제를 놓고 선조와 신하들이 격론을 벌인다. 그것은 왕훈이라는 사람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종손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 벼슬이 높았던 계통에서 고를 것인지였다. 종손의 경우 지방의 말직 정도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벼슬이 높았던 계통으로는 당연히 왕희걸의 후손이 거론됐다. 결국 왕씨 제사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왕훈이 숭의전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왕훈은 종손 계통이었다. 숭의전은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왕씨를 중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흥선대원군이다. 그의 뜻은 고종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8년 3월 6일 고종은 왕건의 현릉에 행차했다가 동부승지 왕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씨가 전조의 후손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부터는 공부에 힘써 이름을 날리도록 하라.”

즉 조선이 망하기 일보 직전에야 제대로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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