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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이란 무엇이며, 사약의 성분은 무엇인가?

사약이란 왕족 또는 사대부 등 고위층이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극약이다.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형전(刑典)에 인정된 제도는 아니다. 형전에는 교수(絞首), 참수(斬首)만을 사형제도로 명시하고 있었다. 왕족 또는 사대부는 그들의 신분을 참작하여 교살시키는 대신에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자살을 통해 덜 잔인하고 덜 비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약을 마신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사약을 받을어 마시는 죄인 (사진 출처: 다음 사전)


사약은 임금이 사람을 시켜 본인에게 내리기도 하고, 일단 유배를 보낸 다음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의하여 전하여졌다. 죄인은 사약이 든 그릇을 상 위에 정중하게 놓고 왕명을 받드는 예의를 갖춘 뒤 마셨다.

조선시대의 경우 태종 말년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으며,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도 친가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중종 때의 선비 조광조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사사되었으며, 그 유명한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다. 정조 이후로는 차츰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어명이오”라는 외침과 함께 왕의 명을 받은 사자가 가져온 사약을 마신 뒤 피를 토하며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약을 한자로 풀이해 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란 뜻의 사약(死藥)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약’이라는 의미의 사약(賜藥)이 된다.


사약의 성분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로 ‘비상’이란 성분이 사용됐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비상이란 비소(As)라는 독성 원소와 황(S) 성분이 섞인 독극물로 조금만 섭취해도 중독 증상을 보여 결국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상대방을 독살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문헌자료를 찾기 힘들다. 일설에는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고 하나, 이것에 즉사시킬만한 독성이 있는지는 의문시된다.


출처: 인터넷 검색 및 다음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 참고.


보충자료


옛날에 사약 어떻게 만들었어요?
 


극약을 내려 처형하는 것은 조선의 경우 형전에 따로 그 법이 없었고, 내의원에서 사약을 만들때는 비밀리에 제조하여 기록을 남기지않았기 때문에 사약의 재료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극약의 재료로 생금(生金), 생청(生淸), 부자(附子), 게의 알, 비상(砒霜), 초오(草烏), 천남성 등를 사약의 재료로 응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비상
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됩니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으며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되고,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듭니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부자, 초오 등에서 독작용을 일으키는 성분은 알칼로이드 성분인 ‘아코니틴’으로 몸속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저해제로 작용합니다. 아세틸콜린은 신경과 근육을 이어주는 곳에서 분비되는 물질로서, 만일 아코니틴의 작용에 의해 이것의 분비가 부족해지면 근육마비가 일어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짐승을 사냥할 때 화살 끝에 발라서 사용했던 물질도
바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하는 비슷한 종류라고 합니다.


천남성이라는 식물은 산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잎이 넓고 키가 작으며
딸기 비슷한 열매가 열립니다. 천남성에는 ‘코니인’이라는 맹독성 알칼로이드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이 밖에도 생금(生金: 정련하지 않고 캐낸 그대로의 황금)이나 생청(生淸: 불길을 쐬지 아니하고 떠 낸 꿀),
게의 알(蟹卵) 등을 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부자와 함께 인삼도 같이 사용했다는 설이 있는데, 대열대독한 부자에
인삼은 온기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부자의 열독이 더욱 성하여져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약을 받은 죄수를 죽게 하려면 때로 약을 먹인 후 뜨거운 방에 드러누워 있게 하거나
독한 술을 먹여서 약기운을 한껏 발산시키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사약을 먹으면 바로 피를 토하고 죽는 걸로 나오나, 실제로는 30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한 예로 조선조 숙종대에 사사한 송시열의 경우 두사발의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아 항문을 막고 사약을 먹게하여 죽고 난 뒤에도 부릅 뜬 눈을 감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일설에는  독을 더 빨리 돌게 하기 위해 약을 먹인후 구들을 따뜻하게 데운 방안으로 죄인을 몰아 넣기도 했다고 합니다.




◈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성분은?

사약의 성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성분은 비상이다. 비상은 자연상태의 비소를 원료로 제조된다. 비소는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몸 속에 들어가면 효소단백질 분자과 결합해 세포의 호흡을 방해해 세포를 죽게 만든다. 비상을 한번에 치사량 이상 흡입하면 구토, 설사, 모세혈관 확장, 혈압감소 등이 일어나며, 중추신경기능이 마비돼 1-2시간 내에 사망하게 된다.

그 외에 초오와 부자도 사약의 성분으로 많이 쓰였으며, 초오, 부자의 주성분인 아코니틴, 아코닌은 중추신경을 초기에는 흥분시켰다가 마비시켜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출처:
KISTI의 과학향기 상식 보기 [제 453 호/200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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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의 폐비 윤씨 죽음에는 중요한 이유가 빠졌다!

폐비 윤씨를 새롭게 조명한 SBS 사극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구혜선)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폐비의 잘못을 떠나 그녀가 처연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울하던 차에 슬픈 장면 나오면 울어버려야지 작정하고 봤는데... 눈물은 안났다 ㅡㅡ;

폐비의 눈물과 한이 담긴 금삼의 피는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었다

 


왕과 나 OST 임형주 부디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국모에까지 올랐다가 사모하는 임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은 그녀의 비극적인 일생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폐비 윤씨의 일생도 돌아볼 겸 사약 마시는 장면을 잠시 돌아보자. (사진 출처는 디씨인사이드 왕과 나 갤러리) 오만석, 구혜선 두 배우가 얼마나 연기에 푹 빠졌는지.. 내 가슴도 아프다.

김처선(오만석)이 따라주는 사약을 받고 죽어가는 폐비 윤씨(소화, 구혜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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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소화)의 한많은 일생과 그녀를 그리워하는 성종(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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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마시고 죽음을 맞이하는 폐비 윤씨 동영상(장화홍련OST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전부터 폐비 윤씨(제헌왕후로 추존)와 연산군에 대한 글을 하나 쓰려고 했는데 잘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은 폐비가 죽는 날까지도 못썼다.ㅋ 우리나라 최악의 폭군 연산군을 만들어 낸 사건이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짧게나마 쓰기로 했(는데 길어졌)다.

왕과 나의 착해빠진 폐비 윤씨는 역사 왜곡이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폐비 윤씨도 억울한 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 그 깐깐한 사회에서 평민에 가까운 그녀가 왕비가 되었으니 그녀를 핍박하던 세력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안봐도 뻔하다.

왕과 비의 폐비 윤씨(김성령)와 성종(이진우)



솔직히 악독하기로 따지자면 며느리 쫓아내고 사약까지 내려 죽이고 손자까지 구박했던 인수대비, 그 착한 인종을 들들 볶아 죽인(?) 것도 모자라 아들 명종을 허수아비 만들어놓고 20년 동안이나 해먹은 문정왕후, 정조 독살 혐의를 받고 조선 후기를 다 말아먹은 요녀 정순왕후가 으뜸 아닌가.

폐비 윤씨가 성격적으로는 좀 모난 데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우는 여우이되 남의 눈에 표시 안날 만큼 앞과 뒤가 다른 여우는 아니었나보다. 진짜 여우는 시어머니 비위도 잘 맞추던데...  인수대비(전인화)와 폐비의 문제를 외아들 시어머니의 질투로 인한 고부갈등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수대비가 둘째 며느리 정현왕후(이진)는 아주 이뻐했거든. 제헌왕후가 폐비가 된 것은 그녀의 뻣뻣한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실록에는 폐비가 중전이 된 후 거만하고 투기가 심하며, 윗 어른께도 공경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건 뭐 왕도 쫓아낸 마당에 충분히 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게 뭐 그리 나쁜 짓이라고 원자의 어미를 사약까지 먹여 죽이냔 말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은 분명히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지켜줄 친척도 없던 그녀의 가정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의 묘, 회릉.


왕과 나에서 폐비를 새롭게 그리겠다는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권력의 역학관계를 너무 못그려냈다. 유동윤 작가는 정치권력의 교체와 이동이라는 것이 음모에 의해서만 진행되는 것으로 그렸는데.. 이러한 여인천하식 전개는 유동윤 작가의 한계인가 보다. 지금 드라마 왕과 나처럼 모든 주요 인물들이 선한데 음모와 오해에 의해서만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 즐겨 읽었던 장화홍련 수준의 발상이 아닌가 말이다.ㅡㅡ;;

설영(전혜빈)이나 정내관(안재모) 따위의 공작에 의해 나라의 중대 국사가 좌지우지된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본다. 더욱이 세조에게 갑옷입힌 정희왕후(양미경), 한명회와 사돈 맺어 왕의 모후로 인생역전한 인수대비같은 정치고수들이 '저런 별 것 아닌 이유로 중전을 죽인 후, 대책없이 그 아들을 왕에 올린다'는 건 인수대비 지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폐비는 인수대비와 권력욕 때문에 부딪히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왕과 비에서는 이 부분이 잘 그려져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생기는 알력, 그것을 바탕으로 사건이 진행되어야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왕과 비나 하얀 거탑에서처럼 소름끼치도록 짜릿한 긴장감을 맛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다.


어쨋든 폐비 윤씨가 죽었으니 조금 있으면 성종 죽을 것이고, 그 아들 연산군이 왕이 될 것이고, 무오사화, 갑자사화 일어날 것이고, 연산군이 폐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왕과 나는 겨우 한 달 후면 끝난다고 한다. 어우동 나오는 걸 두 달이나 보여줬다는데 제일 중요한 연산군은 겨우 한 달??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다. 김처선, 성종, 폐비가 주인공이라고 김처선 할아버지 나이를 몇 십년이나 젊게 회춘시켜놓고 김처선이 보여준 게 없다. 50회 내내 울기만 하더니... 김처선이 이제 와서 뭘 보여줄 수 있을까. 폐비 윤씨가 죽을 때 김처선이 너무 가엾고 두 사람의 이루어지지 못할 운명에 시청자들이 가슴 아파해야 나머지 한 달을 버텨 나갈 텐데.. 주인공 김처선이 나와도 흡입력이 있거나 가슴 아프거나 하질 않고, (아, 물론 우는 건 불쌍하고 마음 아팠지),  (성인) 연산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왕과 나.... 그동안 뭐한거니? 여인천하에서 명종 20년을 10분만에 압축하더니.. 설마 왕과 나에서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아직은 왕과 나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두 배우가 열연을 보여주었고, 구원투수 (성인) 연산군의 활약(?)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폐비 윤씨가 악독해도 연산군의 복수는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구혜선은 그 어떤 폐비 윤씨보다 억울하게 죽었으니 연산군이 나와서 피바다를 만들 때의 카타르시스는 어느 때보다 강할 것이다.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김자원



이제 남은 한 달간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는지라도 잘 보여주어 그간의 평가를 만회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드라마를 살릴 마지막 희망은 (성인) 연산군이다. 연산군,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요~

미워도 다시 한 번.
왕과 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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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와 오늘 - 김인호 교수
출처: 우리 역사와 오늘

글: 김인호교수
펌:
http://eroom.korea.com/eroom/default.aspx?bid=hsp_106045&pid=222064


▶ 인수대비는 조선의 릴리스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하면 성종 임금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위해선 피도 눈물도 없었던 모사꾼 또는 청상과부가 된 그 광신적 히스테리에 못 이겨 며느리(연산군의 비 폐비 윤씨)마저 죽게 한 잔인한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수대비 한씨를 중국의 폭녀 여후(한고조 유방의 비)나 측천무후(당 고종의 비) 혹은 서태후(청 함풍제의 비) 등에 비교하기도 하고 그 패도와 악독한 성품에 대해 조롱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씨의 일화 속에는 현모양처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여성관에서 배양된 또 하나의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왜곡된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유교적 '현모양처론'에서 본다면 당연히 한석봉의 어머니나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의 자애와 양처의 덕성을 두루 겸한 조선 왕조의 표준적 여인상일 것이다. 어쩌면 현모양처(賢母良妻)란 여성의 삶이 철저히 남자의 두 어깨에 달렸을 때 속편하고 싶은 남성들이 찾고자 한 이상적 여성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수대비는 그런 현모양처형 인성을 가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아비(의경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좌절과 비애를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바꾸면서 끝내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 태평 치세를 열게 한 정열적인 왕모(王母)이자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리고 언해문 간행은 물론이고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중국식 여성 예절 체계를 '조선화(朝鮮化)'한 <<내훈(內訓)>>을 통하여 조선 500년의 여성상의 밑그림을 그려낸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렇다고 인수대비 자신이 <<내훈>>이 바라는 여성형이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물론 자애롭고 덕성 있는 조선의 현모양처상을 고의로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고도 과연 이브는 현모양처였을까? 기원전 15세기 경에 조로아스터교의 천지창조 신화는 묘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즉 아담의 첫 번째 아내는 이름이 '릴리스'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남성 못지 않은 정열과 패기를 가진 용감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고, 자식을 낳기 거절했으며, 그 때문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가부장적 헤브라이 신화에서는 순종하는 이브 모습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현모양처의 출발부터가 묘한 음모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이처럼 전근대 세계의 여성들이 역사의 표면에 뛰쳐나오는 일은 무척 힘들고 고달픈 것이었다. 그래도 조선의 인수대비는 역사의 격랑에 몸을 맡긴 몇 안 되는 한국 여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씨가 간 길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어느 정도 합치된다는 면에서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아낌없이 추천하는 것이다.


▶ 권력의 핵심을 관통했던 인수대비의 정치력

인수대비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권력 추구의 열정은 그녀를 불과 20대의 나이에 조선 정국의 핵으로 부상하게 만들었다. 그 발단이 바로 '석실능묘 사건'이었다. 예종 1년(1467년) 9월 어느 날 전직 세자빈 수빈 한씨가 임금 앞으로 난대 없이 주청서를 올렸다. 여기서 수빈 한씨는 예종에게 선대왕 세조의 봉분을 석실(石室: 돌방무덤)로 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돌리면...본래 세조는 귀족권을 견제하고, 백성의 살림을 증진하여 이것을 치국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백성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능묘제도를 개혁하려고 했고, '석실 봉분을 만들지 말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세조의 개인적 염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선왕조가 지향해야 할 위민을 통한 치국이념을 확고히 하려고 후왕들에게 유언한 것이다. 백성에 대한 애정 그것을 조선왕조의 영속을 가져올 요체로 생각했던 세조는 그렇게 유언했고, 그러한 선왕의 유언은 당시로선 곧 법이었고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수빈은 '효'를 빙자하면서 신숙주, 한명회, 박원형 등과 더불어 석실 능묘 축조를 예종에게 강권한 것이었다. 그는 훈구세력의 그늘을 받으며 정계일선에서 왕을 핍박하는 정치적 배반을 시작한 것이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되었던 수빈 한씨가 시동생 예종에게 감히 능묘 형식을 문제 삼았던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수빈은 석실 봉분이 제왕의 능묘로서 품위가 있다는 이유를들었다. 하지만 그 것은 세조의 유업을 이으려는 예종 세력과 세조의 왕권주의에 반대한 훈구 세력이 권력의 향배를 놓고 치열하게 대치하는 정국에서 남편의 죽음으로 권력의 일선에서 배제된 수빈 한씨가 훈구 세력을 업고 권력 일선에 복귀하려는 하나의 거사(擧事)였던 것이다. 그러나 훈구세력을 등에 업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인수대비가 연산군 같은 패권주의적 왕권을 탄생시키기 위한 일보후퇴일 뿐이었다.

훈구를 업고 왕권을 빼앗고, 다시 왕권을 통해 훈구를 제거한 희대의 정치가 과연 인수대비는 누구였을까?


▶ 훈구를 제거하라

본래 수빈 한씨는 예종의 형수로서 사가(私家)에 머무는 종실의 한 여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뒤에는 강대한 훈구 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동안 예종은 왕권주의를 유지 계승하고자 젊고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훈구를 저지하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인륜과 분수를 강조하던 정치 풍토에서 장자(長子)의 부인이자 왕의 형수라는 위치는 훈구가 예종을 견제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수빈과 훈구가 손을 잡는 상황은 예종의 입장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고 두 사람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은 김초 사건이나 허계지 아내 사건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먼저 김초 사건은 수빈의 아우이자 안동부사였던 한치의가 지체 낮은 가문 출신이었던 경상도 도사 김초에게서 강제로 첩을 빼앗고 능욕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허계지 사건은 수빈 거처에 빈번하게 드나들던 허계지의 아내가 수빈의 후원을 믿고 자기 범죄 사실을 인멸하고 형벌을 적게 받고자 뇌물을 쓴 사건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빈 한씨의 형제들은 예종에게서 심하게 견제를 받게 되었다. 물론 예종은 수빈 한씨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다른 종실의 인사청탁을 불허하면서도, 수빈 자손의 가자(加資, 과거 없이 관직을 제수하거나 매관하는 것)를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그러나 결국 예종 세력은 강력한 훈구 세력의 지원을 받는 수빈 한씨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종은 암살이라는 여운을 남기면서 곧바로 요절하였고, 자신의 아들(제안대군)이 있었음에도 수빈 소생인 자을산군(성종)에게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열 두 살 남짓의 성종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권력욕이 개입된 것이지만, 결국 죽음을 앞둔 예종이 자기 아들이 닥칠 운명과 단종의 운명을 함께 머리에 떠올려 본 것은 아닌지.


▶ 인수대비는 시세 장악의 달인

수빈 한씨는 세조 집권 초반까지 시아버지 세조에게서 많은 총애를 입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는 수빈의 소생인 월산군, 자을산군에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콩 등을 자주 하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처럼 총애를 입던 수빈은 결국 세조의 왕권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말았다. 그것은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수빈 세력은 와해될 위기에 처했고, 권력에서의 배제는 수빈은 자신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가부장적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왕권에서 배제된 적손 자제가 천수를 다할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결국 수빈의 선택은 왕권주의에 저항한 훈구 세력 즉 한명회와 신숙주 등과 결탁하는 것. 이는 세조 말년 훈구와 신진 청년관료 간의 권력투쟁이 서릿발처럼 작열하는 속에서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과 한명회의 딸(공혜왕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최고조에 달했고, 그 결과 수빈은 한명회의 정치력을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젊은 예종의 충직한 신료를 하나 둘 제거(남이의 옥사)하면서 세조의 유업을 좌절시키고 결국은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결국 중전도 해보지 못한 그녀는 정치력만으로 대비로 전격 승차하여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단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인수대비는 기왕의 한명회, 신숙주 세력을 배제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꾀한다. 그리고 '윤비폐출사건'과 같이 기왕의 훈구 세력이 수세에 몰릴 때는 다시 훈구의 손을 들어 신흥 세력을 퇴출시켰고, 훈구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때는 다시 막강한 왕실의 권위로 훈구의 전횡을 저지했다. 한명회와 결탁이나 그 제거 과정은 그러한 시세와 정국의 변화에 달통한 인수대비의 탁월한 정치력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인수대비가 추구한 길은 절대주의였다. 그것은 인수대비의 엄격한 교육 아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일단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신전을 폐하는 등 반 귀족정책도 동시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엽색 스캔들로 귀족의 반격을 받아 그러한 시도는 훗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인수대비의 처세는 패도(覇道)

인수대비는 며느리 윤씨를 죽이는 등 이른바 인륜 배반의 처세에 달통한 여인이었다. 그렇다면 유난히 인수대비에게만 인륜과 인정의 부족을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과연 역사 속에서 인정이란 존재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역사 속에서 감정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개입된다.

물론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나 대동법 실시와 같이 왕실 측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실시한 진보적인 민본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반된 민심을 바로 하고, 왕조의 안정을 지속하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그래서 한글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한글 용비어천가"였고, "삼강행실도"였다. 또한 대동법도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불안한 재정기반을 일원화하여 국고를 늘여주었고, 삼정의 문란은 대동법 이후 더욱 격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른 비범한 정치적 인물이었다.

꼭 진취적인 여성은 정치적인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오랜 세월 온실의 화초처럼 보호받고 대상화된 성으로 버려진 이면에는 그들의 정치적 능력이 제거된 원인도 자리하고 있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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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승복이님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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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와 치도가 근본을 이루었던 500년 조선사회에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대비의 위엄을 누렸던 여인, 소혜왕후. 16살의 어린 나이에 당시 수양대군 이었던 세조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시아버지 세조와 그 무리들이 지배했던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씨의 처세술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조선조 가장 학식이 높고 유려했던 정치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소혜왕후의 면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위기를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정치감각●

소혜왕후가 20대에 겪었던 풍파는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 그의 맏며느리였던 한씨는 당당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라 "폭빈" 이라는 별명까지 받으며 위세를 누렸다.

그러나 결국 지아비 의경세자의 요절과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눈물을 쏟으며 출궁할 수 밖에 없었던 한씨는 '수빈' 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정계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빈은 한낱 '세자빈을 잠시 누렸던' 그저 그런 조선의 아낙으로 사라질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약해진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정계의 수장격이었던 한명회와 신숙주와의 결탁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과의 결탁은 곧 결국 세조조의 격정의 세월을 주도했던 훈구파와의 결탁을 의미했다. 결국 수빈은 둘째 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셋째딸을 혼인시킴으로써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왕권을 짓누르고 정계의 표면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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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저에 나가있는 동안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수빈의 위세는 결국 세조의 승하와 함께 분출된다. 수빈은 이른바 예종조를 뜨겁게 달궜던 "석실 능묘 사건" 으로 권력의 핵심을 간파하며 왕권을 짓누르는 파란을 스스로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건은 이러하다.

1467년 조정에 한 여인의 주청서가 날아 들어왔다.

"세조 대왕의 봉분이 초라하고 약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이 어찌 선왕께 황송스러운 일이 아니리까. 마땅히 세조 대왕의 봉분을 석실로 해야 할것입니다." 라는 간략한 주청이었다. 그러나 이 주청서의 주인공이 바로 수빈 한씨 였다는 점에서 조정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조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서 능묘제도를 개혁하면서 "석실 봉분은 없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며 "내가 죽어도 석실봉분은 없어야 할 것이며, 후대에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명했었는데 그것을 며느리인 수빈이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예종은 세조의 유지임을 전면에 내세우며 수빈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친다. 그러나 물러설 수빈은 아니었다. 수빈은 한명회, 신숙주 등을 앞세워 다시 한번 예종에게 청을 올리고 무례에 가까울만큼 첨예한 대립을 보여줬다.

당시 세조의 잠저에 나가있던 수빈이 이처럼 무례할 정도로 예종을 몰아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조 말년, 세조는 혈육과도 같던 한명회, 신숙주 등을 비롯한 훈구세력들을 전적으로 견제하며, 예종을 위한 포석을 놓기 시작했다. 결국 세조의 이러한 변심으로 이들의 위세는 꺾일 만큼 꺾였고 귀성군 준, 남이, 유자광 등의 신진 세력이 조정의 핵으로 급부상했다.

이 후 남이가 역모사건으로 죽은 뒤에도 불구하고 유자광 등이 훈구세력과 대응할 만큼의 세력권을 키우기 시작하자 훈구파와 결탁했던 수빈으로써는 이들을 저지할 강경책이 필요했다.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예종의 형수라는 위치가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 잘 알고 있었고 '석실 능묘 사건' 을 고의로 연출해내며 훈구파를 전면에 끌어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빈과 예종과의 갈등은 크게 증폭되었으나, 유약했던 예종이 수빈과 그 뒤를 받치고 있던 거대 정치 세력인 훈구파를 당해 낼리 만무했다. 마침내, 세조의 봉분은 석실로 둘려싸이게 되었고,수빈은 다시 한번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며 예종 말기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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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정희왕후와의 결탁으로 대비가 되다●

이렇듯 수빈과 갈등을 겪던 예종은 결국 20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국가로서는 1년 사이에 세조와 예종의 두 번의 국상을 겪은 것이지만, 수빈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예종의 아들은 겨우 4살 이었고, 왕권은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 당시 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강력한 정치권력을 담당했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신숙주 등 뛰어난 원훈들만이 조정을 안정시킬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세조 말기 한명회 등이 역모 사건으로 핍박 받을 때에도 항상 그들의 편이었던 것도 바로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수빈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위에 올리며 수빈과 한명회로 대표되는 훈구파를 정계의 핵심으로 다시 부각시킨다.

당시 13살이었던 자산군이 왕위에 책봉되자 한명회 등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권유했고 정희왕후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가 바로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 이었다.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수빈 역시 '대비' 의 지위에 오른다. 법도상으로는 예종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대비의 책봉을 받을 수 없었으나 그 아무도 수빈의 대비책봉에 대해 문제 삼지 못했다. 대쪽같은 성미의 수빈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보복을 받을 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정희왕후는 대왕대비로, 예종비는 왕대비로, 수빈은 대비로 책봉이 되면서 내전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권력은 힘●


대비의 자리에 오른 수빈은 '인수대비' 의 칭호를 받으며 정계의 핵으로 당당하게 부상한다. 인수대비는 권력의 핵으로 부상 하자마자, 남은 신진세력의 싹수를 잘라 버리는데 총력을 다한다. 세조 생전에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 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던 신진세력의 대표격 귀성군 준이 역모사건에 휘말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귀양길을 떠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수대비의 힘이었다.

정희왕후는 귀성군 준이 종친이고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명분하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려 했으나 인수대비는 이런 정희왕후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귀성군 준의 처벌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훈구파가 버티고 있었고, 이는 자신을 이만큼으로 성장시킨 훈구파에 대한 인수대비의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결국, 정희왕후도 인수대비의 강력한 권고를 뿌리치지 못했고, 30대에 영의정의 위세를 누렸던 귀성군의 인생도 그것으로 끝나게 된다. 귀성군의 몰락은 곧 신진세력의 몰락이었다. 다시 조정은 훈구파의 세상이 됐고 이들은 정희왕후와 인수대비의 비호 아래 그 영화가 극에 다달았다.

그러나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 때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 에 대비할 또 다른 대응책이 필요하다 느꼈다. 인수대비 자신이 권력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파악했던 만큼 그녀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들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고 아들 '성종' 을 위한 새로운 신진들을 끌어올리는 데에 주력한다.

이것은 세조 말년, 세조가 예종을 위해 훈구를 견제했던 것과도 같은 이유였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친정을 위해서는 왕권을 넘어서는 권신(權臣)들을 강력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끝내,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책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성종조에 사림파의 등장을 끌어내며 성공적으로 성종 자신이 훈구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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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기를 꺾어 놓다●

성종 시절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거의 50 : 50의 비율로 서로의 견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했던 때였다. 그러나 성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해서는 훈구파를 억제하고 사림파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훈구파를 정계의 뒷편으로 밀어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종의 정책은 종래에 어머니 인수대비와 대립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사림파의 위세가 등등해지던 그 순간 인수대비는 '윤비 폐출' 을 위해 뒷편으로 밀려나 있던 훈구파를 다시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한다.

윤비 폐출 사건은 인수대비의 진두 지휘 아래 직접 진행되었던 사건이었기에 그녀는 한명회, 정창손 등을 다시 끌어올려 폐출을 뒷받침 하도록 지도한다. 윤비폐출을 기화로 인수대비와 훈구의 연대적 결속감이 강해지자 높은 위세를 누렸던 사림파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치욕을 겪는다.

이렇듯 꺾인 사림파의 위세는 "불교 도첩제" 사건으로 다시 한번 수세에 몰리게 된다.

성종 23년,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사림들은 도첩 없는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키고 엄중하게 단속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역시 유교 근본주의에 철저했던 임금이었고 불교를 그저 미신 중 하나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에 이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불교를 믿으며 "불교 열풍" 을 주도했던 인수대비에게 이 정책은 사림파의 정면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고 참다 못한 그녀는 긴 장문의 전교를 내려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불교는 세조대왕 때부터 믿어져 왔으며, 정희왕후 께서 믿으셨고, 나 또한 믿고 있는데 정책적으로 불교를 억제하니 이러한 불효가 어디 있는가!" 라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유교를 신봉했던 국가 '조선' 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주인공이 '인수대비' 라는 점에서 성종과 사림파는 한 발 물러서 도첩제를 완화하게 된다.


●왕실의 안정을 추구했던 여걸●

세조, 예종, 성종의 3대의 권력의 핵심을 주도했던 인수대비는 결국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안정에 철저했던 정치가 였다. 인수대비는 대부분 훈구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힘으로 정치를 다스렸던 여걸이었으나, 절대로 그들이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넘어서는 모습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정치권력은 철저히 왕실 중심이었고, 아들 성종 중심이었다.

인수대비의 처세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선 왕실, 취약한 왕실을 훈구 세력과 동맹을 통하여 구하고 왕조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장하려는 왕실 측의 처세였다. 개인적인 원한에 윤비를 폐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연산군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절대화한 왕권의 역공으로 죽음에 이르른다.

역사의 격랑 앞에 힘차게 몸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정상에 우뚝 세웠던 정열적인 조선의 어머니이자, 조선 왕조 500년을 안에서 지킨 인수대비는 양보와 자애를 강요 당하는 진취적 현대 여성들이 배워야 할 진정한 조선의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출   처: ♤끄적끄적 이야기♤ / 블로그 / 냐하하하~ / 2006.08.14 [원문보기]


현재는 승복이님이 블로그를 폐쇄한 상태라서 원문을 볼 수가 없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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