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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이해 - 왕과나]'안방의 제왕' 인수대비 

( 이덕일·역사평론가 )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남존여비 강요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1455년, 만 열여덟 살의 며느리 한씨도 비로소 세자빈이 됐다. 결혼 당시 남편은 대군 아들에 불과했으나 그녀는 이때 이미 시아버지가 임금이 되기 위한 포석으로 자신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 편에 선 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 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 살 짜리 손자 대신 열 두 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 살 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 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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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廢妃 尹氏)가 임금의 용안에 흉터자국을 내어 폐비된 사건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일 지라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중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즉, 임금의 용안에 상처를 입혀서 폐위된 황후의 이야기가 야사에 전해내려오고 있으니 이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송나라(960-1279)의 4대 황제는 인종황제(仁宗皇帝 : 재위 1022 - 1063)때의 일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인종은 명판관 포청천(包靑天)이 활약하던 시대에 통치했던 황제이다. 사극 <포청천>을 보면 알겠지만, 살쾡이 태자의 사건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임금이다.(살쾡이 태자의 이야기를 알고 싶으신 분은 네이버에서 검색하시면, 제가 올려놓은 지식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인종은 송나라가 최고 잘나가던 시기에 재위했던 현군(賢君)이었다.


인종의 첫황후는 곽씨(郭氏)였다. 곽황후는 인종이 태자였을 떄 황태자비가 된 어찌보면 조강지처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곽황후는 원래가 나서기를 좋아하여 항상 조정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고 참견하기를 좋아하였다. 인종이 생모였던 신비 이씨(宸妃 李氏 : 진종의 후궁이었다)를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할 때, 적모(嫡母)였던 장헌황후 유씨(章獻皇后 劉氏)의 섭정기에 총애를 받았던 재상들을 좌천시켰다. 여기에는 여이간(呂夷簡/978 - 1043)이라는 재상도 포함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여이간은 장헌황후에게 인종의 생모가 죽었을 당시 후장(厚葬)할 것을 간한 관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좌천된 이유는 곽황후(郭皇后)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이간은 파면된 이유를 알아보고자 환관 염문응(閻文應)을 사주해서 어떻게 된 내막인지 알아보게 하였고, 곽황후가 인종에게 자신을 좌천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염문응과 함꼐 곽황후를 제거하기로 모의했다. 우선 여이간은 자신이 장의황후의 장례를 위해 애쓴 사실을 인종에게 부각시켰는데, 그 공로로 다시 재상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이간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자 염문응과 더욱 밀착해서 곽황후를 제거하는 일을 추진했다.


바로 이 때 인종의 처첩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는데, 염문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당시 인종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은 두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미인(楊美人)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미인(尙美人)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종의 총애를 독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곽황후에 대처할 때는 단짝이 되었다. 따라서 곽황후와 두 미인과의 갈등은 점차 깊어갔다. 게다가 곽황후는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 툭하면 두 미인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곽황후가 인종 앞에서 상미인을 나무랐는데, 상미인은 인종만 믿고서 곽황후에게 몇 마디 대꾸를 했다. 곽황후는 그만 분통이 터져서 상미인의 빰을 때렸다. 상미인은 감히 맞서지를 못하고 울며불며 인종의 뒤에 몸을 숨겼다. 곽황후는 쫓아가서 손을 날렸는데, 실수로 인종의 목을 때려서 손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크게 났다. 인종이 크게 화를 내자 곽황후도 속이 얼어붙었다. 곽황후가 얼른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었지만, 인종은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환관 염문응은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포착하고, 그는 불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곽황후의 고약한 점을 인종에게 고자질해서 마침내 인종으로 하여금 곽황후를 폐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종은 정이 많고 유약한 사람인지라 황후를 폐할 경우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염문응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어찌할 것이냐"

염문응은 당나라때 고종이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웠던 고사를 들먹이며 그 때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말했던 말을 상기시켰다.

"황후 폐립은 본래 폐하의 가정일이기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대신들과 의논하시겠다면 그 또한 영명하신 조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목에 난 상처는 대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재상 여이간만을 불러서 그가 대표로 확인하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재상이 이의가 없다면 다른 대신들도 굳이 만류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인종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즉시 여이간을 궁중으로 불러들었다. 여이간은 이미 염문응과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종의 목에 난 상처를 보자 즉시 마음이 아픈 척 했다. 그리고 옛사례를 들어가면서 곽황후를 폐하라고 권유했으며, 이 일을 반대하는 대신이 있다면, 군신간의 대의를 모르는 자이므로 관직을 파면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인종은 황후폐립을 공론에 붙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인종과 여이간의 뜻에 영합하였으나, 어사대 간관(諫官)이었던 범중엄(范仲淹/990 - 1053)은 그의 직책상 경망하게 황후를 폐할 것이 아니라고 인종에게 극간하였다. 그러나 여이간은 범중엄을 지방관으로 좌천시켰고, 범중엄에 동조하는 간관들을 범중엄의 도당으로 낙인찍어 모조리 탄압하고 좌천시켜버리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여이간의 농간에 의해 인종은 어쨌든 곽황후를 폐할 수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곽황후가 임금의 용체에 상처를 입혀서가 아닌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이 때가 명도 2년(1033년)의 일이다.


곽황후를 폐한 후 염문응은 더욱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후궁의 비빈들도 그에게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나 상미인과 양미인은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했다. 두 미인은 원래 경박한 자들이어서 곽황후를 폐한 후에는 인종에게 밀착하여 매일같이 인종의 시중을 들었다. 결국 인종은 병상에 드러눕게 되는데(쉽게 말하면,,,매일 두 미인과 방사를 벌린 셈이지요)궁정 안팎에서는 두 미인이 너무 방탕해서 인종을 해쳤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염문응은 황제로부터 더욱 두터운 신임을 얻을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여러차례 인종에게 건강에 유의할 것과 두 미인을 멀리할 것을 권유했다. 인종은 짜증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승낙했다. 염문응은 인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두 미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두 미인을 강제로 수레에 실어서 궁전 밖으로 내쳤다. 두 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으나 염문응이 인종의 뜻임을 강조했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튿날 염문응은 인종에게 두 미인을 내쫒은 일을 보고했다. 인종은 깜짝 놀랐서 후회했으나, 이미 쫓아낸 사람을 다시 불러올 수도 없어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인종은 건강이 호전되자 염문응의 충성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고, 조정 안팎에서도 염문응을 나라에 충성하는 환관이라고 했다. 두 미인을 축출한 후 인종은 다시 곽황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곽황후를 다시 황후로 복위시킬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염문응은 그 소문을 듣고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곽씨가 복귀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는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곽황후를 죽이려 했다. 마침 궁중에서 쫓겨나 사가에서 머물던 곽황후가 대수롭지 않은 병에 걸렸는데, 염문응은 의사를 협박하여 병에 맞지 않는 처방을 내리라고 강요했다.
결국 곽씨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

곽황후를 죽인 염문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권력을 등에 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거나 사람을 해쳐서 인망을 잃게 되었고, 결국 어사대 간관의 탄핵을 받아 귀양지인 상주(相州)에서 죽었다.


몇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겠습니다.

1. 곽황후가 그렇게 죽은 뒤 인종은 후궁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들을 반성하고, 명문가의 조신한 처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개국공신 조빈(曺彬)의 손녀였던 광헌자성황후 조씨(光獻慈聖皇后 曺氏)였다. 역시나 그녀는 인종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항상 예의와 법도를 잃지 않았다.

2. 여이간이 범중엄을 축출한 이후 벌여져던 10년간의 당쟁을 경력의 당의<慶曆黨議>라고 한다. 1033년 범중엄을 좌천시킴으로써 여이간의 승리로 굳어지는 듯이 보였으나 1034년 다시 범중엄은 컴백하여 여전히 여이간을 비평하다가 1036년 다시 여이간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 때 윤수(尹洙), 구양수(歐陽修) 등도 같이 축출되었다. 조정의 한기(韓琦), 부필(富弼) 등은 범중엄의 편에 서고, 여이간의 편에는 왕공진(王拱辰), 하병(夏倂)등이 있었다. 여이간이 10년간의 재상임기를 마치고 병으로 은퇴하자, 조정은 범중엄 파에게 장악되어 갔다. 이 때 구양수가 범중엄의 당을 진붕(眞朋 : 군자의 당), 여이간의 당을 위붕(僞朋 : 소인의 당)이라고 정의하였고, 황제는 위붕을 배척하고 진붕의 당과 같이 정치해야한다고 <붕당론>에서 설파하였다. 이것이 송대 붕당정치의 시작이고, 이것이 후대에 신법-구법당의 대립 더 멀리는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계속해서 간간히 중국의 역사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주제를 중심으로 올려보겠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참고 <宋史, 후비열전> http://blog.naver.com/ilove_sungho(본인의 블로그)

=========> 이 사람은 이 글을 퍼갈 때, 반드시 출처를 밝히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네이버에서 탈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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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군의 역사가 파란만장할 수 밖에 없기에 연산군과 광해군은 드라마나, 영화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시대극 소재 중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광해군을 배경으로 왕의 여자라는 드라마가, 연산군을 배경으로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각각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장녹수와 김개시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파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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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궁녀들 주에서 명성을 떨친 예는 아무래도 평범한 궁녀로 입궁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나 왕비의 자리에 올랐거나 후대 왕을 출산한 경우다.

예컨대 숙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경종을 낳고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다가 쫓겨난 장희빈, 숙종의 무수리로 들어갔다가 훗날의 영조를 출산한 최숙빈, 고종의 궁녀로 들어가서 영친왕을 출사하고 황귀비(皇貴妃)까지 오른 엄비 등이다. 장희빈, 최숙빈, 엄비 등은 궁녀 출신이라고 해도 후대 왕을 출산했으므로 평가가 조심스러웠다.

이에 비해 궁녀로서 왕의 총애만 받고 후대 왕을 낳지 못했던 장녹수(張綠壽)와 김개시(金介屎)는 온갖 비난을 받아야했다. 특시 장녹수와 김개시(개똥이)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에 그 비난이 더더욱 심했다. 역설적으로 갖은 비난을 받다 보니 장녹수와 김개시는 조선 시대 궁녀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가비(家婢)였다고 한다. 가비란 집안의 여자 종을 말한다. 제안대군의 여자 종이었다는 뜻이니 장녹수는 사노비(私奴婢)였던 셈이다.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가비가 된 내력은 대군의 가노(家奴), 즉 남자 종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좀더 생각해 보면 약간 애매한 부분이 나타난다. 장녹수가 원래 노비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남자 종에게 시집가서 노비가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는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張漢弼)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장한필은 문과에 합격하고 문의 현령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버지 쪽으로 본다면 엄연히 양반 가문의 딸인 장녹수가 어찌하여 제안대군의 남자 종에게 시집을 갔단 말인가.

실마리는 아무래도 장녹수의 어머니 쪽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노비 출신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장녹수의 친언니 장복수(張福壽)가 내수사의 여자 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양반 관료였지만 어머니는 노비, 그것도 내수사의 노비였다는 얘기가 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내수사의 여자 노비였으므로 그 자손들도 어머니를 따라 자연히 내수사의 노비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녹수도 근본은 내수사 노비였다고 보아야 한다. 장녹수가 다른 곳이 아닌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한 것도 결국은 장녹수가 내수사 노비였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에게 소속된 노비들은 궁방(宮房)노비인데, 궁방 노비는 대부분 내수사의 노비 중에서 충원된다는 사실에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장녹수는 집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녹수 자매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장한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녹수의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어린 자매를 데리고 얼마나 어렵게 생활했을지 짐작이 간다.

장녹수는 궁녀로 입궁하기 전에 이미 아들까지 낳은 상태였다. 나이도 서른이 넘은 데다 얼굴이 썩 예쁜 편도 아니었다. (실제 얼굴은 전해지지 않으나 실록에 전함.) 단지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를 내는 개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장녹수는 예능 방면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셈이다.

이런 소문은 연산군에게도 들어갔다.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왕들 중에서 예술적인 기질이 가장 뛰어난 왕이었다. 그랬으니 연산군이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히 장녹수를 만났을 것이다. 실제로 장녹수의 노래와 춤은 연산군을 매료시킬 만큼 뛰어났던 모양이다. 눈에 확 띄는 미녀도 아니고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 그것도 연상인 장녹수를 연산군은 딱 한번 보고 바로 입궁시켰다고 한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연산군 8년(1502년)에 종4품의 숙원(淑媛)이 되었다가 1년 후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으로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이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매혹되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 주었고, 둘 사이에 영수(靈壽)라는 딸까지 낳았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그토록 빨리 가까워진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다. 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예술을 사랑하는 연산군. 얼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하여 두 사람을 이어 준 끈은 바로 이 예술적 교감이었다.

둘째, 모성애에 목말라하는 연산군의 갈망을 장녹수가 체워 주었다. 장녹수는 아버지 없이 자란 반면 연산군은 어머니 없이 자랐다. 이렇게 자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갈구했을 것이다. 특히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고 난 후 생모를 그리워하며 몸부림치는 연산군의 모성애를 연상의 장녹수가 채워 주었다.

예컨대 "(장녹수는) 왕을 조롱할 때는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 했고, 왕을 욕할 때는 마치 노예를 대하듯 했다. 다 자란 성인인 연산군의 이런 행동이 정신장애로 보이기도 하지만 연상의 연인에게서 모성애를 갈구하는 가엾은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실제로 장녹수의 영향력이 가장 높았던 것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복수하겠다고 갑자사화를 일으킨 시점이었다.

그런데 장녹수는 왕의 총애로 얻은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무절제하게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으며, 유별나게 재산에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던 것이다.

그것이 장녹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보면 뛰어난 예술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노비의 신분에서 후궁까지 올랐으니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권력을 쥐자 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의무를 요구했다.

이름 없는 노비일 떄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것으로 충분했지만 왕을 좌우하는 권력자가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절제하고 왕의 권력을 절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녹수는 이런 점에 전혀 무신경했거나 무능력했다.


반면에 김개시는 장녹수와 다른 면을 보여 준다.

예술적 재능만 있고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에는 취약했던 장녹수와 전혀 달랐다. 김개시는 노래나 춤이 아니라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다. 게다가 장녹수는 입궁 후 곧바로 후궁이 되었지만 김개시는 어렸을 때 입궁하여 상궁까지 올랐을 뿐 정식 후궁이 되지도 못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김개시는 '천예(賤隸)의 딸' 즉 천한 노예의 딸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김개시는 노비의 딸이었으므로 당연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궁녀로 입궁한 후에도 주로 공노비인 내수사 출신의 궁녀들과 어울렸다. 게다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한『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미인은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김개시는 장녹수와 달리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김개시가 비숫한 시기에 입궁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 라고 말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개시는 애초에 훗날의 광해군이 되는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했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니 김개시는 그보다 어린 나이에 입궁했을 것이다. '아이 때'라는 말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여자의 성년나이인 열다섯 살 전으로 짐작된다. '아이 때' 동궁 나인으로 입궐한 김개시는 청년 광해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선조의 나인이 되었다. 글도 잘 알고 문서처리에도 능숙한 김개시의 역량이 발탁 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김개시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다시 광해군의 지밀 나인으로 옮겼다. 광해군은 자신의 궁녀를 데려온 것이지만 김개시가 아버지 선조를 모셨던 궁녀인 만큼 비난의 소지가 적지 않았다.

광해군이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김개시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세자 시절에 맺은 인연이었다.

둘째는 궁중에서 자신을 위해 성심으로 충성할 궁녀, 그것도 똑똑한 궁녀가 필요해서였다.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제조 상궁으로서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당시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한 실세였다.

왕의 신임을 배경으로 권력을 틀어쥔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만을 위해 충성했다. 광해군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중에서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가 바로 김개시였다.


당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최대의 인물이 인목대비 김씨였는데,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하기도 하고 사건을 조작하여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저주 사건(咀呪事件 :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간 주동자도  김개시였다.

김개시는 광해군에게 위협이 되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없애려고 했다. 광해군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 악역을 떠맡았다. 김개시의 끈질긴 공작에 의해 인목대비는 기어이 서궁에 유폐되고 말았으며, 그 이후에도 죽음 직전까지 몰리는 수난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김개시는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해 버렸다.


출처: 파란 블로그에서 펌.
http://blog.paran.com/desireu/7443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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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왕비 폐비 윤씨 묘수난의 서삼릉(3)

▲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숨어 있는 연산군 어머니 윤씨(1445-1482)의 회묘를 볼 때마다 김영임이 부르는 '회심곡'의 구슬픈 가락이 묘 주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폐비 윤씨 회묘의 겉모습은 왕릉과 다름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훨씬 훌륭하다.

▲ 회묘의 문인석과 무인석. 분명히 묘인데 어째서 능의 형식을 갖춘 것일까.

묘에서 능으로, 능에서 다시 묘로 격하된 폐비 윤씨의 슬픈 운명이 죽어서도 서삼릉 비공개 지역 끝자락에 숨어서 이렇게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 공릉 문화유산해설사 권효숙씨가 올려다 보는 문인석의 높이가 약 3.4m 정도돼 보인다.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두 문인석의 얼굴은 한결같이 어둡고 슬픈 표정이다. 마치 폐비 윤씨의 한맺힌 한삼 자락의 슬픔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회묘는 원래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희대학교 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천묘했다. 회묘가 있던 자리는 현재 경희대학교 경희의료원이 들어 서 있다.

죽어서도 파란만장했던 폐비 윤씨의 묘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왕실의 태실과 왕자 공주묘를 집장하고 후궁들의 묘까지 여기로 옮긴 영향이 미친 게 아닐까 한다.

▲ 슬픔에 찬 문인석의 얼굴에서 비장함 마저 흐른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었을까? 새삼 연산군이 폭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기억을 회릉에서 곰곰 생각해본다.

다른 어느 능의 능호보다 우울한 회릉이라는 능호를 되짚어보고, 회심곡을 폐비 윤씨의 무덤 앞에서 들려줬으면 하는 것은 그들 모자의 비극 때문인지, 아님 회심곡이라도 묘 앞에서 한바탕 속 시원히 불러줘야 폐비의 500년 서린 한이 풀어질 거라는 한낱 내 감상때문인지….

1482년 성종(1457-1494)에게 사약을 받고 한삼에 피를 쏟고 죽은 뒤 묘비조차 없던 윤씨에게 연산군이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이 1489년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겨우 허락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 희생자가 폐비 윤씨이고 이 역시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 윤씨가 성종보다 12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년(1476)년의 일이다.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 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 인수대비, 안순대비의 세 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 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했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되었다….

다 알고 있는 얘기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성종이 소년 시절 12살이나 연상이었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할 만큼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 시절에 빠졌던 미모였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을 가진 제왕이라 그런 나이 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일까.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불과 8살의 차이에 시샘 당한 여자들의 다툼이었을까.

숙의에서 단숨에 왕비로 오를 정도로 왕의 사랑을 입었지만, 훈구세력의 막강한 명문집안이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명문출신이었던 후궁들이 손잡은 세력다툼에 밀려나고 만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사림과 훈구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실을 둘러싼 대신들의 정권 알력 속에 희생된 여인들이 한둘이던가.

▲ 난간석과 석물이 조선초기 양식이다.

폐비 윤씨의 회묘가 왕릉의 겉모습 갖게 된 이유가 단순히 연산군의 어머니 추숭 때문만은 아니다.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20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도, 행적을 숨김없이 적어 상석과 능상 사이에 묻는다. 지석의 초안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연산군은 생모로 알았던 윤호의 딸 정현왕후의 아들이 아니고 윤기무의 딸 폐비 윤씨의 아들이 자신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인 연산군 10년(1504)이다.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윤씨의 폐출을 빌미 삼아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동시에 제거하려고 벌인 피바람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유래 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연산군의 향락으로 국고가 비게 되자 공신들에게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해 보충하려 한다. 그때까지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빼앗길 수 없던 권신들은 비로소 왕의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겉으로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건 때문이나,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의 속셈과 사림을 싫어했던 연산군의 내심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피비린내 나는 갑자사화에서 권신과 사림, 훈구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했고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

▲ 회묘를 수호하는 석호의 꼬리가 압권이지만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된다. 이 덕분에 폐비 윤씨는 어느 왕릉 못지 않은 능상과 석물로 단장했으나,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아들이 쫓겨나고 비참하게 죽게되니 과연 한삼의 피에 서린 원한이 풀렸을지는 의문이다.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됐지만 '무덤을 건드리면 동티난다'는 설을 우리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 폐비 윤씨 회묘에서 내려다 본 후궁들의 공동묘지.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나무들 사이로 후궁들의 묘가 내려다보인다. 이곳은 일제가 모아들인 후궁묘와 해방 이후 묘의 주변개발 때문에 옮겨온 명종 후궁 경빈 이씨 묘 외 6기를 천묘해 모두 16기의 후궁묘가 있다. 광복 후에 천묘한 묘들도 왜 일제가 만든 묘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는지 알 수 없다.

▲ 조선 왕들의 후궁묘.

폐비 윤씨의 묘에서 내려와 후궁들 묘의 담장을 끼고 돌면 대문이 나온다. 이 후궁들의 묘는 싸구려 공동묘지 같은 왕자와 공주들의 묘보다 봉분도 훨씬 크고 담장을 둘러 그런 대로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무슨 속셈으로 왕자와 공주 묘보다 후궁들의 묘를 이렇게 크게 만들고 담장까지 둘렀는지 잠시 생각해본다.


▲ 겨울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대문 틈새로 보이는 후궁묘.

왕실에 들어와 각자의 사연을 지니고 영욕의 세월을 보냈던 여인들이 잠든 묘들을 보자니 겨울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스산하기만 했다.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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