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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에서 끝까지 왕을 버리지 못한 충신으로 나온 내시 김처선(장항선)


조선시대 내시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글쓰는게 부담스러워서 늘 미루다 보니 생각날 때 한꺼번에 올리게 된다. 간략한 책소개를 해놓고 나도 두고 두고 참고해야겠다.

백과사전에는
내시가 조선시대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 소제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이라고 나온다. 간단한 설명이지만 대궐 안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내시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소개를 하려고 '내시'로 검색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영화 '내시(eunuch)'가 나온다. 그것도 무려 안성기, 이미숙 주연이다! 영화 소개를 읽어보니 비극은 비극인데 뭔가 웃긴 건 어쩔 수 없다.

eunuch

안성기, 이미숙 주연 영화 내시 포스터


옛날 영화 포스터는 색감도 색감이지만 어찌 이리 칙칙하고 촌스러운지...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시!! 밤이 두려운 내시들의 몸부림
잘려버린 생生, 잘려버린 사死, 그리고 여女
깊고 깊은 구중궁궐에 남자(王)가 하나, 여자가 수백 명
내시들의 서릿발 같은 성, 뜨거운 여자들의 불같은 성..이라니..ㅋㅋㅋ

이건 뭐 야설도 아니고.. 뭐라구 할 말이 없다.ㅋㅋ
그래도 아리따우신 이미숙님과 안성기님께서 나온 영화기에 애정을 가지고 사진 몇 장을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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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시는 중국의 환관들처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원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안난다.

기존의 사극에서 보여주었던 내시들의 모습은 주로 고개를 숙이고 종종 걸음을 걸으며 가는 목소리로 "마마~" "눼이~" 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현재 왕과 나에서 조치겸(조상선) 역을 맡은 전광렬씨의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내시들은 여자도 (제대로 취할 수) 없었고, 자손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 물론 권력형 내시들만.


어쨋든 내시 관련 서적들을 몇 권 찾아보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몇 권 있다.

내시와 궁녀

내시와 궁녀(제왕의 그림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우리나라의 내시와 궁녀를 다룬 책.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내시와 궁녀를 최초로 소개하고 있다. 내시의 유래에서부터 내시가 되는 과정과 그들의 결혼생활, 묘지, 일화와 함께 궁녀의 유래, 출궁과 죽음, 궁녀의 선발과 입궁 과정, 등 내시와 궁녀의 삶을 빠짐없이 복원하였다.



관련글:
[펌] "거세당한 자들, 그러나 카리스마가 있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내시와 궁녀 중보판)
박상진 지음 | 가람기획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는 궁중의 은밀한 존재였던 내시와 궁녀에 대해 살펴보는 책이다. 구중궁궐의 숨은 권력자이자 왕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던 내시와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2005년에 출간된「내시와 궁녀」의 개정증보판으로, 지금 시기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역사를 바꾼 이인자들
송은명 | 시아출판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린 이인자의 삶을 조명한다!  
이인자 19인의 인물 열전, 막이 오르면 그들의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역사의 숨은 실력가- 이인자. 그들이 만든 역사에 대한 이야기.

이인자로서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왕건,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조선판 내각주의자 정도전, 당 태종의 원정을 좌절시킨 고구려의 거인 연개소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손꼽히는 한명회 등 역사의 또다른 주인공 19명의 삶을 조명한 책.


내시
내시
이정우 지음 | 관동출판사

일곱 분의 군주를 모신 충신 내시 김처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린 이정우의 역사소설 『내시』상 권. 희대의 폭군 연산왕에게 올바른 군왕이 되기를 수없이 아뢰다가 결국, 연산왕의 칼날아래 목숨이 끊어지면서도 충언을 아뢰었던 내시 김치선의 애환과 삶의 고뇌를 생생하게 담고 있다.

관련글:
왕과 나의 김처선 - 실제로는 일곱 임금 거쳐.. 연산군에게 직언했다가 극형



왕과 나 김처선
왕과 나, 김처선
이수광 지음 | 눈과마음

SBS 대하사극 '왕과 나'의 주인공, 김처선의 삶을 다룬 장편소설. (왕과 나의 원작이 되는 소설) 조선시대, 숙명적으로 내시가 되어 상처 받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급변하는 정치 현장에서, 암투가 치열한 구중궁궐에서 비록 자신의 몸은 거세를 당했지만 인생마저 거세당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내시들의 학문, 야망, 사랑을 치열하게 다룸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관련글:
"왕의 남자"의 김처선, 그와 연산군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 KBS 한국사전(傳)
왕과 나 김처선(오만선), 폐비 윤씨(구혜선)에게 고백장면 동영상


관련기사: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 
왕과나 연산군 폭군 이끄는 세기의 간신 김자원 등장으로 눈길 
(몇몇 기사에는 김처선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절대 아님.
김처선은 나이로나, 품계로나 김자원에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음.)


왕과 나의 김자원...이건 너무 잘생겼잖아;; 전혀 간신배 이미지가 아닌 걸~!!

왕과 비의 연산군(안재모)와 쩔쩔매는 김자원



덧1. 내시와 궁녀는 몇 년전부터 꼭 읽고 싶은 책 중 하나였다. 올해가 가기 전엔 읽을 수 있을까?ㅋ
덧2. 김자원은 권력형 간신이라기보다는 주인 비위 잘 맞추는 개;;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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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의 [읍혈록(泣血錄)]이라고도 불린다.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한 여인의 피 어린 기록이라는 의미다.

실제 혜경궁은 그 제목처럼 구절양장 기나긴 목소리로 한을 토해냈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그 한 서린 여인의 주장을 진솔하게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경궁이 맨 처음 이 책에 붙은 제목은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는 뜻의 [閑中錄]이었다. '피눈물의 기록'과 '한가한 날의 기록'. 그 제목의 극단적 차이만큼이나 내용과 진실 사이의 거리도 먼 것은 아닐까?



사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한(恨)의 내용은 간단하다. 혜경궁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영조가 자식들을 병적으로 편애하여 세자의 정신병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 사도세자 형제들, 아니 영조 일가는 왕족의 일원이었으나 행복한 일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세자의 두 누님인 화평.화협옹주는 세자가 10대 초.중반일 때 요절하였다.그리고 혼자 남게 된 세자의 막냇누이 화완옹주는 훗날 주위의 꾐에 빠져 친오빠인 사도세자와 조카인 세손(정조)의 반대편에 섰다가 끝내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이러한 여조 일가의 불행한 삶은 혜경궁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사도세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의심 없이 형성될 트릭이 숨겨져 있다.

혜경궁은 영조가 영빈 이씨 소생 중 큰딸 화평옹주는 매우 사랑했으나, 둘째 딸 화협옹주와 세자는 극도로 미워했다는 점을 가장 애끓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영조가 옥사 등 불길한 정사를 보고 오면, 꼭 세자를 불러 "밥 먹었느냐?"고 물어 대답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귀를 씻고 씻은 물은 화협옹주 집 담장으로 버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세자는 화협옹주를 대하면 "우리 남매는 귀를 씻는 차비(差備:사람)로다"라고 자조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이처럼 영조를 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한 부왕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조실록]은 영조와 그 일가의 관계에 대해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잠깐 검토해보자.


영조가 화평옹주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조가 불길한 말을 들은 후 씻은 물을 버릴 정도로 저주했다는 화협옹주에 관한 기록은, 한 인물에 대한 기록인가를 의심할 정도로 두 기록의 내용이 너무나 판이하다.

그렇다면 그토록 미움의 대상이었다는 화협옹주가 병에 걸렸을 때 영조의 거동을 [영조실록]에서 살펴봄으로써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영조 28년(1752) 11월 25일, 영성위(永城尉) 신광수(新光綏)에게 시집간 화협옹주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황급히 화협옹주의 사가로 거동하려 했다.

하지만 친딸이라 해도 국왕은 사가로 분병이나 문상을 가지 못하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자 법이었다. 게다가 당시 영조 자신이 의원의 치료를 받는 환자이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했고 부교리 채제공도 두 번씩이나 차자를 올려 가지 말도록 간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영조는 호위 군사를 빨리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판서 김상성과 훈련대장 김성응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들의 부절(符節:군사 지휘권을 뜻하는 표신)을 빼앗으러 간 선전관이 표신(標信:궁중에 급변을 전할 때 사용하던 문표)을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군율을 시행할 정도로 화협옹주의 병환에 당황하며 초조해하였다.

황황히 화협옹주의 사가에 행차한 영조는 밤이 깊도록 환궁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러나 문병도 안 되는 판에 임금이 사가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는 법. 약방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영조에게 환궁할 것을 거듭 청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다.영조가 환궁 준비를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이틀 후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미명에 화협옹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어둑한 새벽길을 나서려 하였다. 이에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영조 자신이 환자임을 상기시키며 만류했으나 영조는 끝내 문상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김약로가 말했다.

"지난해 화평옹주 상사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이 손상되셨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조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 몸이 손상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론 때문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한 것과 연관시키는가?" 

이처럼 [영조실록]은, 영조가 화평옹주는 편애한 반면 화협옹주는 저주했다고 한 혜경궁의 증언과는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화평, 화협 두 옹주를 모두 사랑했다. 물론 영빈 이씨의 첫 소생인 화평옹주를 화협옹주보다 더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영조는 화평옹주에게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할 정도로 그녀를 끔찍히 사랑했다. 또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시집간 화평옹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그녀의 사가로 가서 밤을 새웠다. 화협옹주가 죽기 4년 전인 영조 24년(1748)의 일이다. 영조는 이에 대해 스스로 변명하기도 했다.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세자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항상 마음이 답답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며느리 중에서는 현빈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 중에서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을 당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영조는 화평옹주는 물론 화협옹주도 사랑한 자상한 아버지였다. 혜경궁의 묘사대로 "용모도 절숭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운" 화협옹주를 영조가 미워할 이유가 없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은 2년 후 상일(祥日)에도 그녀의 집으로 거동했다. 화협옹주의 명복을 빌면서 이날 하루를 경건하게 지내고 싶었던 영조는, 어가 행차 때 일체의 취타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화협옹주의 옛집에 들러서는 깊은 밤까지 옹주의 명복을 빌다가 신하들이 여러 번 환궁을 간청한 끝인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화협옹주의 기일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런 모습 어디에서도, 귀 씻은 물을 담장 너머로 던지며 저주하는 영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조는 이처럼 다정다감한 성품이었고, 그답게 일가 모두를 사랑했으나 그중에서 첫딸인 화평옹주와 효장세자의 부인이자 큰며느리인 현빈조씨에게 더 마음이 쏠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실제 영조는 화평옹주 못지않게 현빈 조씨를 무척 사랑했다. 그래서 영조 27년(1751) 11월, 현빈이 세상을 뜨자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무신년(효장세자가 죽은 해) 이후로 내가 의지한 바는 현빈이었는데, 이제 그가 또 세상을 뜨니 슬픈 감회를 어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현빈을 이처럼 아낀 것은 어려서 남편을 잃은 현빈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행실과 그녀의 친정에 대한 남다른 호의 때문이기도 했다. 영조는 현빈의 행실을 마음에 꼭 들어 했다. 그래서 영의정 김재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일찍이 삶은 밤을 좋아하여, 갑자기 삶은 밤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현빈이 곧바로 진상하였다. 그 뒤에 대비의 하교를 들으니, 현빈이 미처 신을 신을 사이도 없이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친히 삶아 왔다고 한다. 이것이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친정 어른이 고관이 되면 기뻐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 현빈은 영돈녕(領敦寧:현빈의 숙부 조현명)이 대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 숙부는 왜 물러가서 쉬지 않을까?'라고 말했으니 그 성품을 알 수 있다"

현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사신(思愼)파는 시종일관 영조의 탕평택에 호의적이었다. 현빈의 아버지 조문명(趙文命)과 숙부 조현명(趙顯命)은 영조 때 탕평택을 이끌었던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그럼에도 현빈은 척리(戚理:임금의 외척)가 대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현빈과 그 집안의 이런 자세가 영조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문명과 조현명 형제, 그의 아들들은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훗날 사도세자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조재호도 바로 사도세자의 형수인 현빈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혜경궁의 말대로 영조가 화평옹주만 사랑하고 화협옹주는 극도로 미워한 정신병자라면, 현빈 조씨를 사랑한 반면 혜경궁은 극도로 미워했어야 이치에 맞다. 그런데 헤경궁은 영조가 사도세자는 미워했어도 자신은 사랑했다고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영조가 현빈 조씨를 총애했다는 기록은 자주 나오지만 혜경궁을 사랑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한 옹주, 아니 영조 일가에 대한 [한중록]과 [영조실록]의 기록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두 기록 중에서 어느 쪽이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영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런 성품이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영조는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했던 애민의 군주였다. 그는 심지어 당시 사회의 가장 최하층인 노비의 처지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노비의 형편이 말도 못하게 어려워 남종은 장가를 못 가며 여종은 시집을 못 간다. 부부가 있은 후에야 부자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노비의 세금을 반으로 감면하라"

이처럼 당시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노비이게까지 세심산 배려를 베풀 줄 아는 영조가,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물며 외아들인 사도세자를 미워할 까닭이 있었을까?

영조가 극진히 아꼈던 화평옹주는 시종일관 세자의 편을 든 자상한 누이였다고 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화평옹주가 영조와 세자 사이에서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화평옹주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영조의 통곡 속에 화평옹주가 죽은 것은 세자가 대리청정하기 6개월 전인 영조 24년 6월로, 세자 나이 열네살 때였는데, 그때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조는 화평옹주가 죽은 6개월 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자는 기품이 뛰어나지만 뒷날 과연 어떻게 행동할 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내가 살아 있을 때 정사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이처럼 여조는 세자의 기품이 뛰어나다고 보았다. 실제 두 부자 사이에 영조가 극히 편애했던 화평옹주가 나서서 중재할 만큼의 갈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네 살짜리 외아들과 쉬흔아홉 살의 늙은 아버지 사이에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가 "겁이 나서 못 하면 (영조가) 남 보는 좌중에서 꾸중하시고 흉도 보셨다"라고 하여, 영조가 시종 세자를 미워한듯이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영조는 대신들에게 대리청정시키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사람도 부형(父兄)이 있으면 타인이 그 자제를 업신여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량이 어떻게 시국의 형편에 따른 편벽한 내용의 상소를 알 수 있겠는가? 내가 뒤에서 세자의 기반을 세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세자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기 위해서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영조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세자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부담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온 주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혜경궁의 기술 중 또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선희궁이라 불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한 부분이다. 영빈 이씨는 천한 나인(內人)출신이었다. 혜경궁은 세자궁 나인들이,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선희궁을 업신여겼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다른 궁 소속의 궁녀들이라면 몰라도 세자를 모시는 궁녀들이 세자의 생모를 업신여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혜경궁은 [한중록]을 쓸 당시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0~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승승장구해 형제 정승의 지위를 누리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으나 공교롭게도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혜경궁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직후 몰락의 길을 걷는다. 그 이유가 참으로 기구하다.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이를 '병신처분'이라 한다). 세상의 시각 또한 혜경궁을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惡妻)로 의심하였다. 아마 이 몰락이 없었다면 혜경궁은 [한중록]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


이러한 처지에서 쓰여진 한중록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내포할까??
한중록에서는 영조는 변덕이 심하고 치매 때문에 사람도 못알아봤다고 나오며, 사도세자도 광폭했다고 나오는데..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MBC 사극 이산에서는 한중록의 기곡을 받아들여서 영조가 치매인 걸로 묘사하고 있던데... 과연 그래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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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조선왕독살사건 상세보기
이덕일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조선왕독살사건으로 재판 인종에서 고종까지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의 임금들을 조명한 저서.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 서-제14대 선조,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 -소현세자, 사라진 북벌의 꿈-효종 등 조선조 9인의 임금과 세자 에게 뒤따라다닌 사인의 의혹과 진실을 파헤친 책.

목차
<누가 왕을 죽였는가> 개정판에 부쳐

1. 대윤과 소윤, 그리고 사림파 사이에서(제12대 인종) - 이질 증세와 주다례
폐비 신씨와 두 윤씨 왕후
서른다섯 중년 왕비의 출산
백돌아! 백돌아!
홀로된 첩과 약한 아들을 어찌 보존하겠소
문제의 '주다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의 장례식
곤장이 다리보다 더 굵으니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2.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제14대 선조) - 중풍과 찹쌀떡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주상의 뜻
어젯밤엔 편히 잤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문제의 찹쌀밥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사실처럼 굳어진 독살설

3. 현실과 명분의 와중에서(소현세자) - 학질과 의관 이형익
피눈물 흘린 삼전도의 치욕
볼모로 가는 두 형제
명.청이 교체되는 대륙의 한복판에서
부정父情 아닌 부정否定
소현세자 추대 사건의 진상
아담 샬과의 만남
비운의 귀국길
인조에게 쏠린 몇 가지 의혹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
세자 일가의 비극
조선의 좌절, 세자의 좌절

4. 사라진 북벌의 꿈(제17대 효종) -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소현세자의 유산
용상에 가려진 효종의 아킬레스건
모든 것은 북벌로
효종의 딜레마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손을 떠는 어의 신가귀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5. 예송시대에 가려진 죽음(제18대 현종) - 복통과 뜸 치료
효종의 모후 자의대비과 입어야 할 복제
부모가 자식상에 3년복을 입지 못하는 4가지 이유
임금의 예는 일반 사대부나 서민과 다르다
예론을 금하노라
며느리상에 시어머니가 입어야 할 복제
어찌 앞뒤가 서로 다른가?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박하니
현종의 이례적인 조치
현종의 복통과 병상을 지키는 사람들

6. 이복형제의 비극(제20대 경종) - 게장과 생감 그리고 인삼차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두 모자의 운명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경종의 진심
목호룡의 고변
적발하여 정법하라
게장, 생강 그리고 인삼차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7. 개혁군주의 좌절(제22대 정조) - 홧병과 연훈방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3대 모역 사건
규장각과 장용영 그리고 화성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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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군의 아들 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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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해외 망명 작전
마지막 군주의 최후
고종이 해외로 망명했다면

조선엔 왜 독살설이 많을까

[알라딘 제공]


책소개

"누가, 왜 조선의 왕들을 독살했나"

제12대 인종(1515-1545), 제14대 선조(1552-1608), 소현세자(1612-1645), 제17대 효종(1619-1659), 제18대 현종(1641-1674), 제20대 경종(1688-1724), 제22대 정조(1752-1800), 제26대 고종(1852-1919).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왕조에서 독살설에 휘말렸던 임금은 무려 8명이나 된다. 조선왕조가 배출한 왕이 27명인 것을 감안하면 조선은 지구상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던 왕조였다.


누가, 왜 왕들을 죽였나.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에겐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는 꼭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했고,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됐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독살설은 또 조선왕조의 후반기에 집중돼 있다.
왜 그럴까?

<사도세자의 고백>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대중적 역사서로 인기몰이를 한 바 있는 이덕일 숭실대 교수는 ''누가 왕을 죽였는가''의 개정증보판으로 내놓은 <조선 왕 독살사건>(다산초당)에서 흥미로운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 망했어야 할 조선왕조의 기형적인 정치행태 ''독살''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우선 역사가 ''너무'' 장구했다. 세계 역사상 대개의 왕조는 200~300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는데, 조선은 쇠퇴기ㆍ멸망기에 접어든 뒤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는 것이다.

무릇 한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에서 시련을 극복 못하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며 들어서야 하는데, 유독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돼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살아 있었다.

이덕일 교수는 조선왕조의 쇠퇴 시점을 임진왜란으로 본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일본의 침략에 피지배계급인 농민들을 두고 혼자 도망가기 바빴던 그 순간부터 조선의 사회체제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지배 계급은 군림의 이유를 상실했다는 설명이다. 백성들이 국왕인 선조가 떠난 궁궐에 난입해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예원에 불지른 행위는 사대부→일반백성→노비로 이어지는 조선의 신분제 자체를 부인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사대부들의 권력 획득 방식 ''독살''

개국 초 조선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가리지 않고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 포 납부로 군역 면제)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1488-1544)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포 납부로 군인 고용)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병역의무가 면제됐다.

저자는 "개국 후 200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생명 사이클이 다한 나라였고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고 평했다.

정상적인 생명력을 다한 조직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고, ''국왕 독살설'' 역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 중 하나다. 독살설이 유독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부터 본격적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약한 왕권(王權)과 명분 없는 신권(臣權)의 합작 ''독살''
 
조선 후기 들어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왕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닌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을 적당(敵黨)의 일원으로 봤다.

저자는 "조선의 국왕은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며 "오히려 끊임없이 신하들의 견제를 받는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임금은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으며, 신하들은 당론에 따라 얼마든지 특정 임금을 배척했다. 신하의 임금 선택을 ''택군(擇君)''이라고 하는데 국왕 독살설이야말로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의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반정(反正)이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 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저자는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독살"이라며 "독살설이야말로 왕조의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프레시안 2005.07.29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쓴다. 남들처럼 근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글솜씨도 없고 길게 쓰는 재주는 더더욱 없어서 미루고 미뤘는데 요즘 MBC 드라마 '이산 (정조)'를 보면서 그때 느꼈던 흥분을 다시 느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


책장을 넘기면서 숨이 가쁠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서를 좋아해서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시기에 마침 저 책을 읽은 것이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왕 독살사건'이랑 '누가 왕을 죽였는가', 둘이 다른 책인 줄 알고 두 권을 다 골랐었는데 알고 보니 전자는 개정판이었다. 처음에 '누가 왕을 죽였는가'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그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좀 점잖게 고쳐서 재판했다.

특히 내가 흥분했던 부분은 인종, 경종, 정조 이야기다. 책 읽기 전부터도 조선의 왕 중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책 읽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숨을 씩씩 몰아쉬곤 했다. - 난 지금도 사극을 보거나, 인수대비나, 문정왕후, 선조, 인조, 정순왕후, 망할 놈의 노론을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몇백년이나 된 일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화를 내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ㅋ

불쌍한 정조대왕님.ㅜㅜ 
인생 참 험난하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죽었고, 외할아버지란 사람은 역적들이랑 짜고 사위랑 손자를 그렇게 죽이려고 했고, 친할아버지 영조는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맨날 천날 충성심을 시험하질 않나...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의복을 갖추고 잠자리에 들 정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도 하루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잇는 천재군주, 만능군주, 마지막 개혁군주 정조대왕께서 그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우리나라 역사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ㅜㅜ

정조 사망시에 아니 정조 대왕 승하시에 그 옆에 정순왕후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책을 100% 믿기도 어렵지만 정순왕후 같은 여자면 능히 정조를 독살하고 남았을 것 같다.

드라마에서는 영조가 정조를 꽤나 아낀 걸로 나오는데... 만약 진짜 드라마 '이산' 같았다면 영조도 참 불쌍한 왕이다.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뒤늦게 후회를 하니 영조는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이 오죽 참담했으랴.


이 책은 조선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 더욱 즐길 수 있다. 어릴 때 인상깊게 읽었던 왕후 간택 이야기의 주인공인 정순왕후-_-;;는 알수록 망할 X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러울 것이다.

아..  혈압올라.ㅠ 글쓰다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지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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